예술가의 임무는 느끼게 하고 보여 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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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콘라드의 <暗黑의 奧地: Heart of Darkness>

-영화 ‘지옥의 묵시록’ 원작소설

예술가의 임무는 느끼게 하고 보여 주는 것

<暗黑(암흑)의 奧地(오지)>(Heart of Darkness)의 작가 조셉 콘라드(Joseph Conrad)의 본명은 조셉 테오도르 콘라드 코르젠이오스키(Josef Teodor Konrad Korzeniowski)이다. 콘라드는 1857년 帝政(제정)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우크라이나(Ukraine)에서 태어났으나 부모의 나라인 폴란드에서 성장했다. 그의 부친은 記者(기자)이고 시인이며 번역가였으며 폴란드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투옥되기도 했다. 콘라드가 5세 때에 가족이 추방당했고 12세 때에 부모가 죽었다. 그가 17세에 바다로 가서 프랑스와 영국 商船(상선)의 선원이 된 것은 암울한 현실로부터의 탈출이고 반항이며 도피였을 것이다. 그는 영국에 歸化(귀화)해 영어로 소설을 써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소설가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엘리엇(T.S. Elliot)은 콘라드를 “내가 지금까지 만났던 가장 위대한 (문학적) 군주”라고 극찬했다. 콘라드는 ‘예술가의 임무는 느끼게 하고 보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위대한 소설은 독자로 하여금 인간존재의 深淵(심연)을 보고 느끼게 해준다.

어느 이상주의자의 顚落과 공포

<暗黑의 奧地>의 이야기 줄거리는 간단하지만 대단히 난해해 독자로 하여금 팽팽한 知的緊張感(지적 긴장감)을 경험하게 해준다.

서술자(narator)인 말로(Marlow)는 퇴역선장으로 지내다가 벨기에의 象牙(상아) 무역회사의 선장으로 취직해 낡은 蒸氣船(증기선)을 몰고 아프리카의 콩고江(강) 상류로 올라간다. 도중에 그는 콩고江 상류 奧地(오지)에 있는 상아 수집소의 支社長(지사장)인 커르츠(Kurtz)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회사의 콩고 총책임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커르츠의 비범한 능력과 업적에 대해 敬歎(경탄)하고 있었다.

말로는 그 후 원래는 이상주의적 문명인이었던 커르츠가 현대문명과는 거리가 먼 야만의 原住民(원주민)을 제압하고 開明(개명)시키기보다는 원주민의 野蠻性(야만성)에 同化(동화)되어 야만족으로부터 神的(신적)인 존재로 崇仰(숭앙)받으며 食人(식인)과 性的放縱(성적방종)에 이르기까지 온갖 惡行(악행)을 저지르는 악마적 인간으로 전락한 사실을 발견한다. 마침내 말로는 커르츠를 만나고 귀환하던 중에 그의 죽음을 지켜본다. 커르츠는 죽을 때에 “너무 무서워! 너무 무서워!(The horror! The horror!)”라며 자신의 타락과 魔性(마성)에 대해 戰慄(전율)한다.

말로는 유럽으로 돌아와서 커르츠의 약혼녀에게 커르츠의 악마적인 모습을 숨기고 그가 숭고한 삶을 살았다고 거짓말을 한다. 커르츠를 이상적인 인물로 확신하고 있는 약혼녀를 실망시키지 않고 그녀에게 살아갈 의미와 가치를 주기 위해서 거짓말을 한 것이다.


암흑의 다양한 의미

암흑은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암흑은 문명의 빛이 닿지 않는 아프리카의 奧地를 가리킨다. 암흑은 우주의 無意味(무의미)한 空虛(공허)를 의미한다. 암흑은 모든 의미를 파괴해 버리는 허무주의를 表象(표상)한다. 암흑은 理性(이성)을 압도하는 몰도덕적 본능을 상징하기도 한다. 암흑은 또한 이상주의자들의 理想(이상)과 善意(선의)를 좌절시키는 惡(악)의 形象化(형상화)이다.

콩고江 奧地로의 航行(항행)을 통해 말로는 빛과 암흑의 상징적 의미를 眺望(조망)하게 된다. 그 의미는 아래와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우주는 암흑으로 시작해서 암흑으로 끝날 것이다. 인간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역사는 모호하고 몰도덕적이며 무목적적이라는 점에서 암흑이다. 인간도 근본적으로 암흑의 존재이다. 우연하고도 돌발적인 이유로 인간은 가끔씩 문명의 형태로 암흑에 빛을 가져오고 암흑을 얼마간 쫓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암흑의 威勢(위세)를 저지하는 인간의 문명적 행동은 불안정하다. 왜냐하면 암흑의 作用力(작용력)은 인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고 사회와 인간 속에 遍在(편재)하기 때문이다.

문명의 빛은 힘이나 强度(강도)나 耐久力(내구력)에 있어서 암흑의 敵手(적수)가 되지 못하고 어떤 면에서는 암흑에 종속된다. 말로가 荒地(황지)에서, 커르츠에게서, 그리고 자신에게서 발견하는 암흑은 우주의 근본이며 현실이다.

말로는 콩고江 항행에 대해서 “그들은 암흑의 오지 속으로 점점 더 깊이 침투해 들어갔다.”고 말한다. 아프리카의 荒地를 “암흑의 오지”와 동일시하는 것은 전통적인 근거가 있다. 황지는 문명의 빛이 닿지 못하는 땅이다. 아프리카는 현대문명과는 차단된 황무지이다. 이런 이유로 유럽인들은 아프리카를 암흑의 대륙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말로는 황지에 암흑 이상의 더욱 더 큰 形而上學的(형이상학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적극적이고도 악의적인 어떤 힘이다. 그것은 인간의 정신이 침투할 수 없으며 인간이 구축한 문명의 範疇(범주)를 허물어 버리는 힘이다. 그것은 深夜(심야)의 어둠이 모든 형태를 흡수하듯이 문명의 모든 형상을 삼켜버린다.

암흑의 威力(위력)에 비교하면 인간의 모든 지적인 조립품이나 “인간 이성과 의도의 모든 영역은 虛構(허구)에 불과”하다. <暗黑의 奧地>는 인간의 사고와 행동의 基底(기저)가 되는 인간 본성의 이성적 및 도덕적 능력에 대해 의문을 나타내며 암흑의 힘에 압도당하는 문명의 허약함을 表出(표출)한다.

암흑이 문명을 압도하는 힘은 인간이 문명의 통제를 벗어나서 황지에 투입될 때 더 강해진다. “법률과 우리를 감시하는 이웃이 우리를 보호해 준다.”는 말로의 말처럼 인간은 본능이라는 암흑을 통제하고 문명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회의 제약이 필요하다.

문명의 방패로 보호받지 못하고 문명 이전의 야만의 세계에 노출된다는 것은 영혼을 발가벗겨서 원초의 본능적 衝動(충동)에 맡기는 것과 같다.

암흑의 땅으로 내려가는 것은 모든 문화적 교양과 遊離(유리)되어 본능과 對峙(대치)하는 것이다. 이럴 때 인간은 “타고난 힘”으로써 야만의 유혹과 도전을 극복해야 한다. 타고난 힘이란 자제력을 포함하는데 인간에게는 이것이 결여되어 있고 커르츠도 예외는 아니었다.

“빛의 使者”에서 “지옥의 王”으로

커르츠는 이익만을 추구하는 평범한 상인은 아니었다. 그는 象牙(상아) 무역회사의 고위 직원으로서 아프리카 오지에 들어가지만 그에게는 野蠻(야만)의 땅에 문명의 빛을 가져오는 “빛의 使者(사자)”로서의 고매한 사명감도 있었다. 그는 사람을 압도하는 帝王(제왕) 같은 카리스마가 있고 신문에 투고하기 위해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며 야만의 땅을 開明(개명)시키기 위한 “거대한 계획”을 가진 이상주의자였다. 그는 적어도 이상을 가지고 아프리카에 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奧地의 고독 속에서 惡魔(악마)로 변해 간다. 커르츠는 콩고江 오지에서 “잠복해 있던 야만적인 본능에 압도되어 무자비한 짐승”으로 顚落(전락)한 후 죽는다.

커르츠의 황폐한 모습을 말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의 영혼은 미쳐 있었습니다. 야만의 오지에서 홀로 있었기 때문에 그의 영혼은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며… 미쳐버렸던 것입니다. 나는-나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그 영혼을 들여다보는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나는 어떠한 자제력도, 어떠한 신앙도, 어떠한 두려움도 모르는, 그런데도 자신과 맹목적으로 투쟁하는 不可解(불가해)한 영혼의 신비를 보았습니다.》

문명의 가치에 위협적이고 무관심한 암흑만을 응시하다가 영혼이 미쳐버린 커르츠는 善(선)과 惡(악)을 초월하는 악의적인 조물주가 되었다. 빛의 使者로 자부하던 커르츠 자신이 빛을 흡수해 버리는 암흑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는 야만족에게 왕처럼 군림하고 야만족은 그를 神(신)처럼 崇仰(숭앙)했다. 커르츠는 배신자의 머리를 잘라서 나무 막대기에 꽂아 놓고 사방에 전시할 만큼 잔인한 지옥의 왕이 된 것이다. 말로의 시야에 들어오는 커르츠의 內陸支社(내륙지사)는 지옥의 광경이다.

《여러분은 멀리 그 폐허처럼 보이는 건물 주변에 설치해 놓은 장식품에 제가 깜짝 놀랐었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제 저는 더 가까이 가서 그 장식품들을 보고 한 대 맞은 것처럼 머리를 뒤로 젖혔습니다. 그리고 나서 세워 놓은 막대기들을 망원경으로 모두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착각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둥근 浮彫(부조)들은 장식적인 것이 아니고 상징적인 것이었습니다. 그것들은 생각을 위한 糧食(양식)이었고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독수리가 있다면 독수리의 양식도 되었을 것입니다… 나무막대기 위에 꽂혀 있는 그 사람의 머리들이 얼굴을 건물 쪽으로 보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 둥근 부조(사람머리)들은 훨씬 더 인상적이었을 것입니다. 머리 하나만 제가 있는 쪽을 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심하게 충격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고개를 뒤로 젖힌 것은 단지 놀란 동작이었습니다. 저는 거기에 나무 부조장식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저는 처음 보았던 그 머리로 돌아왔습니다. 그것은 검고 말라 있었고 아래로 처지고 눈꺼풀은 닫혀 있었습니다. 그것은 기둥 꼭대기에서 잠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말라서 오그라든 입술 때문에 하얀 이를 내놓고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저 영원한 잠 속에서 끝없이 익살스러운 꿈을 꾸면서 계속해서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암흑의 대륙 아프리카의 의미

“빛의 사자”인 커르츠를 이렇게 魔王(마왕)으로 변형시킨 아프리카의 蠻地(만지)는 인간의 본능에 내재하는 비문명적이고 몰도덕적인 “짐승 같은 본능”의 表象(표상)이다. “짐승 같은 본능”은 情慾(정욕)과 탐욕과 衝動(충동)과 공격성과 熱情(열정)의 總和(총화)로서 비이성적인 종족보존 본능이며 生(생)의 동력인 이드(id)와 동일시된다.

아프리카의 만지(wilderness)는 문명세계에서 침입해 온 커르츠를 掩襲(엄습)해 “그가 자신에 대해서 지금까지 몰랐던 것, 절대적 고립 속에 투입되기까지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것(본능)을 그의 귀에 속삭여 주었다. 그런데 그 속삭임은 도저히 거역하지 못할 만큼 환상적이고 매력적이었다. 커르츠의 내면은 텅 비어 있었기 때문에 그 속삭임은 커르츠 안에서 크게 울려 퍼졌다.”

문명의 껍질 안에 잠복해 있던 암흑의 본능이 蠻地의 자극을 받아 통제불능이 될 때 인간은 짐승으로 추락한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커르츠의 추락은 그의 내부에서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우주는 인간에게 완전히 중립이다. 우주가 의도적으로 인간에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우주에 반응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야만은 커르츠에게 중립일 뿐이고 어떠한 악의적인 힘도 아니다. 커르츠 자신이 가치중립적인 야만에 자극을 받아 “짐승 같은 본능”에 압도당한 것이다. 아프리카의 蠻地에만 암흑이 있는 것이 아니고 커르츠의 영혼 내면에 암흑의 오지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인간의-심지어 聖者(성자)의-無意識(무의식)에는 암흑의 오지가 있다. 문명은 인간의 몸을 감고 있는 옷과 같다. 그 옷은 본능의 狂風(광풍)에 쉽게 찢어지고 날려가 버린다.

문명은 또한 鎔巖(용암)을 덮고 있는 얕은 地表(지표)와 같아서 문명의 빛이 다다르지 못하는 암흑의 오지에서는 쉽게 갈라지면서 내부의 본능을 噴出(분출)시켜 이성을 압도해 버린다. 인류문명의 精髓(정수)라는 독일인들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600만 명의 유태인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 이유도 게르만 민족주의로 포장된 공격본능이라는 암흑의 오지에 추락해 理性의 빛과 통제력을 상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유럽문명의 老衰와 타락

암흑의 아프리카에 대비되는 유럽의 문명도 위선과 탐욕과 거짓과 오만과 편견으로 빛이 바래져 있다. 평등과 자유와 인권과 法治(법치)를 지도이념으로 하는 유럽의 문명은 아프리카에서는 탐욕스러운 제국주의로 타락해 문명의 빛을 상실하게 된다.

말로가 고용주와 계약을 맺기 위해 찾아가는 회사가 위치해 있는 도시는 그에게 “회칠한 무덤(whited sephulchre)”을 연상시킨다. 그 도시는 생명력이 枯渴(고갈)되어 버린 문명이 남겨 놓은 자동기계처럼 무심하고 인간성이 말라버린 죽음의 도시인 것이다.

《…나는 회사 사무실을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도시에서 제일 큰 건물이었고,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이 그 건물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회사는 해외帝國(제국)을 경영하면서 동전 한푼이라도 더 많은 이익을 남기려 하고 있었습니다.

깊은 그늘에 가려져 있는 人跡(인적) 없는 비좁은 거리, 높은 집들, 셀 수 없이 많은 판자로 된 발(venetian blinds), 돌 틈에 돋아나 있는 잡초들, 위압적인 마차전용 아치길, 조금 열려 있는 거대한 이중 출입문, 나는 이런 것들 사이로 나 있는 벌어진 틈을 미끄러지듯이 통과해 사막처럼 건조하고 장식이 없는 계단을 올라가 첫 번째 문을 열었습니다.

두 명의 부인이(고용주) 검은 양모로 뜨개질을 하고 있었고 그중 한 명은 뚱뚱하고 한 명은 야위었습니다. …약 45분 후에 나는 다시 응접실에 있었고 인정 있어 보이는 비서가 쓸쓸하고 동정심으로 가득 찬 표정을 지으면서 어떤 서류에 서명하라고 했습니다. 서류 내용 중에는 회사의 비밀을 누설하지 말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운명을 뜨개질하는 두 女神

나는 불안을 조금 느꼈습니다. 나는 그런 의식에 익숙해 있지 않았고 그곳에는 뭔가 불길한 것이 있었습니다. 내가 마치 어떤 음모에-잘은 모르겠지만-매우 옳지 않은 일에 가담한 것 같았습니다. 바깥쪽 방에서 그 두 여인들은 여전히 맹렬하게 뜨개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도착하고 있었고 한 젊은이는 그들을 두 부인에게 소개시키느라 왔다갔다 하고 있었습니다. 나이가 많은 부인은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부인의 천으로 된 슬리퍼는 발따시개 위에 있었고 고양이 한 마리가 부인의 무릎 위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부인은 머리에 풀먹인 흰 어페어(affair)를 쓰고 있었고, 한쪽 볼에는 사마귀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은테 안경이 부인의 코끝에 걸려 있었습니다. 부인은 안경 위로 나를 힐끗 쳐다보았습니다. 그 빠르고도 무심하며 침착한 눈길에 나는 불안했습니다.

바보 같고 쾌활한 얼굴을 가진 두 명의 젊은이들이 안내를 받고 들어 왔고 부인은 지혜로운 사람처럼 그들을 여전히 무심하고도 재빠르게 쳐다보았습니다. 부인은 젊은이들과 나에 관한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섬뜩하고도 오싹하는 느낌이 나를 덮쳐 왔습니다. 부인은 불가사의한 운명의 여신 같았습니다. 나는 멀리 아프리카에서, 한 명은 사람들을 끊임없이 미지의 세계로 안내하고 또 한 명은 무관심한 눈길로 바보 같고 쾌활한 얼굴들을 찬찬히 살피면서 그리고 검은 양털로 棺(관)의 덮개를 짜면서 地獄(지옥)의 문을 지키고 있는, 이 두 부인을 생각했습니다. …부인이 찬찬히 살펴본 사람들 중에서 적지 않은-반도 안 되는-사람들이 부인을 다시 보지 못했습니다.》

말로의 고용주인 부인들은 유럽문명을 상징한다. 그것은 무심하고 경직되고 기계적이고 맹목적이며 자동화되어 비인간화된 문명이다. 우리는 부인들의 이름을 알 수 없다. 개성을 함몰시키는 문명에서는 개인의 이름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暗黑의 奧地>에서 커르츠와 말로를 제외하고는 인물들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총지배인, 벽돌 담당자, 키잡이, 약혼녀 등 보통명사의 이름만 있을 뿐이다. 기계처럼 무심한 고용주인 부인들은 말로에게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들에게는 말로가 하나의 기계이거나 도구이지 대화의 대상이 되는 인간은 아닌 것이다. 그들의 동작은 타인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 연결하려고 노력도 하지 않는다.

뜨개질하는 부인은 인간의 운명을 짜는 운명의 여신을 연상시키지만 부인 자신이 하나의 운명으로서 자신 및 타인에게 비인간화된 生中死(생중사)의 삶을 강요한다. 살아 있지만 생명력을 상실한 屍身(시신) 같은 부인은 회사의 직원들도 생중사의 존재로 만들 것이라는 것을 前兆(전조)하는 象徵(상징)이다. 그리고 얼굴에 점이 있고 베로 만든 슬리퍼를 신고 있는 나이 많은 부인은 搖之不動(요지부동)의 자신감을 가진 “육체와 정신적 畸形(기형)”의 상징이다. 畸形이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으면 개선을 위한 변화는 불가능해진다. 말로는 이러한 기형이 된 문명의 압도적인 重力場(중력장)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소설의 끝에 가서도 빛은 啓蒙(계몽)의 힘을 상실하고 여전히 生中死의 상태에 있다. 말로가 유럽으로 귀환해 커르츠의 약혼녀에게 커르츠의 죽음을 전하는 장면에서 나타나는 빛의 이미지는 냉랭하고 인공적이어서 생기가 없다. 약혼녀의 대리석 벽난로는 “차갑고 기념비 같은 백색”으로 빛나고 그녀의 “아름다운 머리칼”과 “아름다운 얼굴”은 “잿빛의 圓光(원광)으로 둘러싸인 것처럼” 보인다. ‘저녁이 짙어지고 있었다.’, ‘실내는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 ‘암흑이 더 깊어졌다.’, ‘검은 상복 입은 그녀’ 등 약혼녀는 빛을 몰아내는 암흑의 이미지로 둘러싸여 있다. 그녀는 어둠으로 압도당하고 있으면서도 “크리스탈로 된 절벽만큼 투명하게 순수한” 영혼을 커르츠에 대한 추억에 바친다. 그러나 그 영혼의 바람은 환상이며 虛妄(허망)한 것이다. 말로에게는 그녀의 “위대한 구원의 환상”은 지상의 현실과는 거리가 먼 “천상의 光輝(광휘)”로 빛난다. 비록 약혼녀는 “(커르츠에 대한) 꺼지지 않는 사랑과 믿음”으로 조명을 받고 있지만 “말해지는 모든 단어와 함께 방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 문명의 빛은 생명력을 상실하고 不自然(부자연)과 위선과 기만과 近親(근친)관계를 가진다. 문명이 타락해 빛을 상실한 것이다.

빛은 그것이 환상일지라도 필요하다

그래서 문명은 광명보다는 암흑의 속성을 가지게 된다. 약혼녀의 순수한 이상주의도 燐光(인광)처럼 차갑고 창백하며 현실과는 너무나 遊離(유리)되어 있어 암흑의 오지까지 다다를 수 없다. 그녀는 현실로부터 차단되어, 세상에는 죽은 존재가 되며 정상적인 활동이 없는 幽閉(유폐)된 인간이다. 그녀의 무지와 확신은 말로와의 대화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아! 그러나 나는 세상의 누구보다 -그이의 어머니보다-그이 자신보다- 그를 더 믿었어요. 그이는 나를 필요로 했어요. 나를! 나는 그이의 모든 한숨, 모든 말, 모든 몸짓, 모든 눈길을 소중하게 간직해 왔어요.”

나는 가슴이 서늘해 왔습니다. “그만 하십시오.” 나는 숨죽인 소리로 말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나는- 나는-너무 오랫동안 침묵 속에서 한탄해 왔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그(커르츠)의 최후를 지켜보았지요? 나는 그의 고독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 누구도 나만큼 그를 잘 이해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아무도 나만큼 (그의 말에) 그의 말을 잘 들을 수도…”

“나는 그와 최후까지 같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의 최후의 말을 들었습니다…” 나는 겁에 질려서 말을 중단했습니다.

“그 말을 다시 해주세요.” 그녀는 상심한 어조로 중얼거렸습니다. “나는 원해요-나는 원해요-뭔가를-뭔가를-믿고-믿고 살 뭔가를 원합니다.”

나는 “그 말은 하지 마세요.”라고 고함을 지를 지경이었습니다. 짙어 오는 어둠이 사방에서 낮게 속삭이는 소리로 집요하게 그 최후의 말들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막 불기 시작하는 바람의 첫 속삭임처럼 점점 위협적으로 거세지는 그런 속삭임으로 커르츠의 최후의 말 “너무 무서워! 너무 무서워!”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제가 의지하고 살 그의 최후의 말을 해주세요. 당신은 제가 그를 사랑하고-사랑하고- 사랑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세요?” 그녀는 재촉했습니다.

나는 용기를 내어서 천천히 말했습니다. “커르츠가 소리 낸 최후의 말은-당신의 이름이었습니다.”

나는 가벼운 한숨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환희와 공포로 가득한 소리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승리감과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 같은 소리로 “나는 그럴 줄 알았어요. 나는 확신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내 심장이 멈추고 쓰러져 죽는 것 같았습니다.》

암흑이 약혼녀를 압도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말로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짓말뿐이다. 그녀를 비추고 있는 사랑과 믿음의 불빛이 비록 환상일지라도 꺼지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문명의 필수 조건은 빛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영혼에 내재하는 빛은 위대한 “구원의 환상”이며 비록 그것이 환상일 뿐이지만 그 빛은 영원히 살아남도록 해야 한다. 환상의 빛은 地上(지상)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천상의 光輝”이고 인간은 환상 없이는 문명의 持續(지속)이나 發展(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인간이 “빛의 透過(투과)가 불가능한 암흑의 오지”에 있을지라도, 그리고 “죽은 河馬(하마)”의 썩은 냄새를 맡을지라도 인류는 天上(천상)의 광휘를 바라보며 몸부림을 쳐야 한다. 환상 없이는 살 수 없고 환상 없는 미래도 없다.

약혼녀가 커르츠에게 기대하고 있는 사랑과 믿음과 소망은 인류문명이 지향하는 가치이며 비록 그 가치의 완벽한 실현 가능성이 稀薄(희박)하더라도 그리고 그 가치를 추구하는 者(자)가 커르츠처럼 암흑의 오지로 추락하더라도 그녀는 환상을 포기할 수 없다. 환상은 그녀의 삶의 支柱(지주)이기 때문이다. 믿음과 사랑의 빛 속에 있는 약혼녀는 인류가 추구하는 문명의 영혼이다. 그래서 말로는 그녀의 환상을 깨뜨릴 수 없는 것이다.

善한 思想이 惡을 제압한다

말로는 다음과 같이 사상(즉 환상)이 인류를 재생시킨다고 생각한다.

《우리하고 얼굴색이 다르거나 우리보다 낮은 코를 가진 사람들로부터 땅을 뺏는 것을 의미하는 지구의 정복이라는 것은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리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 추악한 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思想(사상: idea, 암흑의 대륙 아프리카에 문명의 빛을 전달하려는 선한 의도와 이상)뿐입니다. 그런 아름답지 못한 것의 裏面(이면)에 있는 사상 말입니다. 感傷的(감상적) 허세가 아닌 사상… 우리가 그 앞에서 머리를 숙일 수 있고 희생물을 바칠 수 있는 어떤 것…》

말로는 인간은 무한히 전락할 수도 있지만 인간은 또한 드높은 이상을 갈망하고 숭배하는 능력과 필요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인간의 本性(본성)은 이상을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희생하는 不可思議(불가사의)한 면도 있다. 인간이 이상의 실현과정에서 비열하게 타락하고 용서받기 힘든 죄를 짓기도 하지만 理想 자체는 이상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는 것은 아니다.

커르츠는 빛의 使者로서 패배했지만 그가 추구했던 문명의 가치는 여전히 우리가 崇慕(숭모)하고 따라야 하는 가치들이다. 인간의 본성에는 惡의 요소도 있지만 善의 요소가 더 많다. 시대를 초월해서 인간은 개인이든 집단이든 악이 아닌 선을 삶의 지표로 한다. 커르츠는 “짐승 같은 본능”으로 인해 “괴물 같은 열정”에 굴복하지만 선을 위해 “투쟁하고 투쟁했다.” 이러한 투쟁은 커르츠의 내면에 있는 도덕적 覺醒(각성)의 존재를 암시한다.

그가 죽음에 임박해서 말로에게 “너무 무서워! 너무 무서워!”라고 絶叫(절규)하는 것은 커르츠 자신이 가진 이상의 빛으로 자신을 판정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커르츠가 이상 실현에 대한 자신의 叛逆的(반역적)인 태만으로 인해 죽음에 이르지만 그 반역성을 충분히 의식하고 그것을 증오하기 때문에 그의 “암흑에의 본능”은 암흑을 초월해 더 높은 곳으로 향할 수 있다고 단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暗黑의 奧地>의 엄청난 힘은 자신과 투쟁하고 자신 속에서 자신의 행동을 판정하고 형벌을 가할 수 있는 가치기준을 발견하는 인간영혼의 능력의 啓示(계시)에 있다. 자신의 이상에 대한 타당성의 확인은 커르츠의 위대한 승리이다. 이 능력이 “암흑”의 “압도적인” 힘을 박탈하는 것이다. 커르츠는 비록 그의 이상과 사상과 言約(언약)의 실현에 실패하지만 인간이 가진 善에 대한 가치를 결코 거부하지는 못한다. 이러한 가치들 때문에 커르츠는 “도덕적 승리”를 거둔다. 커르츠의 가치는 비록 많은 제약을 받지만 약혼녀의 영혼 속에 이상으로 살아 남는다.

<暗黑의 奧地> 끝에 가서도 소설의 분위기는 허무주의적이며 어떠한 긍정적인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단지 생존만이 보장될 뿐이다. 그러나 “환상을 구출하는 것”의 중요성은 명백하다. 말로의 거짓말이 없이는 “모든 환상적인 목적의 빛” 도 “문명의 흐릿한 빛”도 消燈(소등)되어 버릴 것이며, 그러면 인류에게는 향상의 모든 가능성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사망의 골짜기에서 썩은 하마의 냄새를 맡을지라도 우리는 아득히 저 멀리 절벽 위에서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크리스탈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말로의 시간여행

<暗黑의 奧地>는 顯現(현현, epiphany) 소설이다. 현현이란 깨달음을 의미한다. 현현을 경험하게 되면 종전과는 다른 새로운 시각으로 자신과 사물을 보게 된다. <暗黑의 奧地>에서 현현의 대리인은 말로이다. 말로는 단순한 서술자가 아니다. 그는 깨달음을 위해 암흑의 오지로 여행하는 巡禮者(순례자)이다. 그는 런던을 출발해 콩고江 상류로 순례의 길을 떠난다.

런던은 인류 문명의 精髓(정수)이고, 콩고江 상류 奧地는 문명 이전의 原始(원시)의 땅이다. 런던과 콩고 사이에는 인류문명 5,000년의 시간이 가로 놓여 있는 것이다. 말로의 순례는 문명에서 원시로 5,000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여행이다.

문명의 껍질은 대단히 얇다

여행을 하면서 말로는 인간의 實存的(실존적) 본능은 문명 이전이나 이후에도 동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문명인의 外皮(외피) 안쪽에는 太古的(태고적) 본능이 深海(심해)의 深層水(심층수)처럼 변함없이 자리 잡고 있다. 문명의 껍질은 대단히 얇아서 비문명적이고 가치중립적인 본능에 쉽게 압도당한다.

말로는 암흑의 대륙 아프리카를 侵奪(침탈)해 본능에 압도당하는 유럽인들에게서 “폭력의 악마, 탐욕의 악마, 뜨거운 욕망의 악마”를 보았다. 이 악마들은 “사람들을 뒤흔들고 몰아붙이는 강력하고 눈에 핏발이 선 악마들”이다. 말로는 커르츠를 “정욕의 충족에 있어서 통제력이 결핍”되고 “짐승 같은 본능”과 “짐승 같은 정열”에 耽溺(탐닉)하고 “무자비하게 사악한 악마”로 그리고 있다.

콩고江을 올라가면서 말로는 이러한 악마들과 친숙하게 되며, 특히 커르츠로부터 강력한 인상을 받고 그와 자신이 同類(동류)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커르츠처럼 말로도 “야만과 정열의 함성”과 “遠親關係(원친관계)”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며 그것들에 “반응”하고픈 유혹을 느낀다. 커르츠는 말로의 分身(분신)인 것이다. 그가 런던에서 콩고江 상류 1,000마일까지 커르츠를 찾아가는 것은 자신의 분신을 찾아가는 것이다. 문명의 껍질을 벗어버리고 野性(야성)으로 완전히 되돌아간 백인 이상주의자 커르츠를 만남으로써 말로는 자신도 轉落(전락)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커르츠의 “미친 영혼”을 들여다보는 고난을 겪으며 자신의 영혼도 들여다보게 된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더욱 더 깊은 지식을 배운다.

백인이든 흑인이든 인간은 모두 친족이다

말로는 백인인 커르츠뿐 아니라 문명을 모르고 원시 상태로 살아가는 오지의 흑인들도 遠親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 나는 죽은 조타수가 매우 그리웠습니다-나는 그의 시신이 조타실에 누워 있을 동안에도 그가 그리웠습니다. 아마도 당신들은 사하라 사막의 모래 한 알보다 더 중요하지도 않을 야만인을 이렇게 그리워하는 것이 대단히 이상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는 일을 해왔습니다. 그는 배를 조종했습니다. 수개월 동안 내 조수로 내 뒤에서 일했습니다. 일종의 협력관계였습니다.

그는 나 대신 키를 잡았고 나는 그를 돌보아 주었습니다. 나는 그의 결함을 걱정해 주었고 이렇게 해서 우리 사이에는 유대관계가 형성되었었고, 나는 그것이 갑자기 끊어진 다음에야 겨우 그 관계를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치명상을 입고 나를 쳐다볼 때의 그 깊고 친밀한 눈빛은-생애의 가장 격렬한 순간에 확인되는 遠親 관계를 주장하는 듯한 그 눈빛-이날까지도 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말로는 백인이든 흑인이든 문명인이든 야만족이든 모두 親族(친족)이며 정신의 오지에서는 동일한 인간이라는 것을 통찰하게 된다. 콩고 여행은 말로에게 원시와 현대 사이에 놓여 있는 시간의 장막을 찢어버리고 야만인과 문명인을 동일한 실존으로 간주할 수 있는 炯眼(형안)을 갖게 해 주었다.

인간은 악에 대해 두려움을 갖는 도덕적 존재이다

콩고 여행은 또한 말로에게 자신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는 콩고에 오기 전까지는 자신을 몰랐으며, 콩고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짐승 같은 정열”에 압도되어 악마로 전락한 커르츠와 헌신적인 야만족 조타수에게서 자신의 分身을 발견하면서 말로는 자신을 좀더 깊이 알게 되는 것이다. 커르츠는 말로에게 인간정신의 한계를 보여 주었다. 그는 커르츠의 내면에 있는 암흑에 가까이 갈수록 자신도 악에 대한 가능성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한다. 그는 커르츠를 따라 冥府(명부)의 세계로 내려가서 자신과 모든 인간에 내재하는 惡魔性(악마성)과 대면하며 戰慄(전율)을 느낀다. 그리고 커르츠가 죽어가면서 “너무 무서워! 너무 무서워!”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구원의 희망을 품게 된다. 커르츠의 전율은 인간의 이성과 도덕성을 바탕으로 하는 문명의 빛이 침투하지 못하는 암흑의 深淵(심연)으로 상징되는 악에 대한 전율이며 이는 인간은 악으로 파멸되는 순간에도 악에 대해 두려움을 갖는 도덕적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문명사회의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통제력으로부터 완전히 孤立(고립)된 암흑의 奧地에서 악마로 전락했지만 죽음에 임박해서 악에 대한 두려움을 회복함으로써 커르츠는 도덕적 승리를 거둔다. 커르츠를 만남으로써 말로는 인간은 악의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절벽 위의 ‘까마득히 높은 곳’ 천상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도덕적 크리스탈을 우러러 보고 갈망하는 선한 존재일 수도 있다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말로에게 콩고여행은 자기발견(self-discovery)의 순례여행이다. 그 여행은 지리적 여행일 뿐 아니라 인간정신 내면으로의 여행이며 영혼의 成熟(성숙)을 위한 탐구여행이다. 그는 문명의 허약함, 지적 공허, 우주에 遍在(편재)하는 악, 인간본능의 野獸性(야수성), 존재의 무의미 등 삶의 부정적인 면과 함께 理想과 도덕성을 추구하는 善의 존재도 의식하게 된다. 그는 변화된 사람이 되고, 좀더 많이 아는 사람이 되어 유럽으로 돌아온다.

암흑의 오지를 경험하지 못하고 자신의 영혼에 내재하는 악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는 일반 사람들은 이제 말로에게는 “알지도 못하고 간섭이나 하는 주제넘은 사람들” 일 뿐이며, “그들의 인생에 대한 지식은 짜증스런 겉치레에 불과하다.” 악의 지옥으로 내려가 보지 못한 사람들은 커르츠의 약혼녀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환상에 사로잡히거나 고용주 노부인들처럼 오만과 편견으로 비인간적이며 대리석 彫刻(조각)처럼 생명력이 결핍된 사람들이다. 이들의 삶은 피상적이며 위선과 편견과 거짓으로 織造(직조)된 生中死 같은 삶이 되기 쉽다.

삶은 안개로 덮여 있다

말로의 역할 중의 하나는, 사람은 實在(실재)에 대한 인식능력이 대단히 부족하다는 것을 표출하는 것이다. <暗黑의 奧地>는 불확실성과 模糊性(모호성)을 형상화한다. <暗黑의 奧地>는 이러한 모호성의 이미지가 많이 나타난다. 말로가 테임즈 강을 출발할 때 태양을 어렴풋이 가리는 안개, 야만족이 말로의 배를 공격할 때 시야를 완전히 가리는 짙은 안개, 하늘을 가리는 黑夜(흑야)의 밀림, 그 밀림에서 들려오는 야만족들의 의미 모를 함성, 어둠에 덮여 가는 유럽의 도시, 어둠에 윤곽을 상실해 가는 약혼녀의 방, 이름을 알 수 없는 대부분의 등장인물, 사람마다 다른 커르츠에 대한 평가 등은 불확실성과 모호성의 이미지들이다. 실재는 안개 속의 사물처럼 시야에 明瞭(명료)하게 들어오지는 않는다. 말로는 “실재는 私的(사적)이고 개인적”이며, “자신에 대한 실재는 누구도 알 수 없다. 타인은 한 개인의 실재에 대해서는 겉모습만 볼 수 있고 실재의 진정한 의미를 결코 파악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사람은 타인뿐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명확한 이해가 부족하다. 삶은 안개로 덮여 있기 때문이다.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말대로 “인생은 체계적으로 배열된 긱램프(gig lamps, 2륜마차용 램프. 양쪽에 하나씩 있음)가 아니다. 인생은 의식의 처음부터 끝까지 半透明(반투명) 外皮(외피)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빛나는 圓光(원광)이어서 실재는 안개 속의 태양이나 램프처럼 희미한 원광으로 보인다.”

인간은 착각하며 살아간다

말로에게는 ‘한 사건(episode)의 의미는 열매의 核(핵)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밖에 있어서 그 의미는 유령 같은 희미한 달빛 속에 보이는 안개에 덮인 圓光처럼 그리고 안개를 밝히는 불빛처럼 에피소드를 둘러싸고’ 있다. 하나의 에피소드에 다양한 의미가 안개 속의 불빛처럼 가리고 있기 때문에 실재의 파악이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안개 속으로 사물을 보면서도 모든 것을 분명하게 보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간다. 인간은 錯視(착시)에서 결코 벗어 날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실재에 조금이라도 더 근접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말로처럼 내면에로의 탐구적 巡禮(순례)가 필요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순례의 필요성을 모르고 있으며 순례 중에도 순례의 의미를 의식하지 못한다. 말로와 동행하는 총지배인, 경리책임자 등 백인 “순례자”들은 위선과 탐욕과 편견과 일상의 관습으로 눈이 멀어 있기 때문에 암흑의 오지를 정면으로 대하면서도 암흑의 오지를 보지 못한다.

우리는 모두 커르츠의 분신이다

그들은 백인 문명인도 콩고江 유역 야만인들과는 遠親이라는 것, 악마로 전락한 커르츠가 자신들의 분신이라는 것, 인간성 속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으며 문명인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 문명의 빛도 흐려지고 암흑에 흡수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문명이 타락하지 않고 계속 발달하기 위해서는 문명의 빛, 즉 “우리가 스스로 세우고 그것을 위해 우리를 희생할 수 있는 “理想과 思想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

<暗黑의 奧地>는 ‘地獄의 默示錄(지옥의 묵시록: Apocalypse Now)’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이 영화는 <暗黑의 奧地> 및 프레이저(Frazer)의 <황금가지: The Golden Bough> 와 엘리엇(T.S. Eliot)의 <荒蕪地(황무지): The Wasteland> 등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 없이는 이해가 거의 불가능하다.

시간과 장소는 20세기의 베트남전쟁이며 커르츠와 말로는 각각 미군 대령과 대위로 나온다. 말로 대위는 메콩江을 거슬러 올라가서 커르츠 대령을 죽인다. 노쇠해 이성을 상실하고 미쳐 버린 이상주의자 커르츠 대령 대신에 생명력의 상징인 젊은 말로 대위가 등장함으로써 생명력을 상실한 문명의 황무지에 생명을 가져오는 재생의 비가 내리게 된다.

우리는 <暗黑의 奧地>에서 奈落(나락)에 떨어져서 암흑에 패배하지만 암흑에 대한 투쟁을 포기하지 않는 커르츠를 통해 우주는 비록 암흑에 싸여 있지만 도덕적 우주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우리는 또한 인간성에 內在(내재)하는 암흑의 오지를 의식하게 됨으로써, 맹목적 이상주의의 오만과 편견과 독선에 대해 경계를 하게 되고, 더욱 지혜롭고 더욱 겸손하며 더욱 신중한 자세로서 이상을 추구하며, 암흑의 세계에 문명의 질서를 부여하려는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인간으로 성숙되어 간다.

[ 2019-09-03, 10:0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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