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조금 야금야금
"여든이나 아흔이 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더 깊어져 있을 테니 더 좋은 곡이 나오지 않을까요?”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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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텔레비전 화면에 작달막하고 얼굴이 넙적한 한 오십대쯤 남자의 아파트 방이 비치고 있었다. 평범한 아파트의 자그마한 방이다. 창문 쪽으로 책상이 보이고 그 위에 책이 꽂혀있는 독서대가 보인다. 그 앞에 있는 회전의자를 빙 돌리면 반대편에 자그마한 전자 피아노가 있고 악보를 놓는 대 위에 오선지가 인쇄된 공책이 있었다. 남자가 이렇게 자신의 일상을 설명했다.
  
  “책상에 앉아서 독서를 하다보면 어떤 순간에는 멜로디가 떠올라요. 그런 멜로디는 안개처럼 나타났다가 순간 사라지는 경우가 많아요. 그걸 막기 위해 얼른 돌아앉아서 피아노로 그 멜로디를 재현해 내고 바로 악보에 적는 거죠. 평생을 그렇게 해 왔어요. 저기 책장 보세요.”
  
  방의 벽에 붙어있는 책장 한 칸에는 스프링노트 형태의 악보 공책이 빼곡하게 들어있었다. 남자는 그 공책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제가 작곡한 저 곡들은 숫자로 치면 이천 곡도 넘을 걸요? 아직 주인을 찾아 세상에 나가지 못해서 그렇죠. 저는 이 방안에 앉아서 음악이라는 제품을 생산하는 장인이에요.”
  
  성실한 작곡가 이호섭 씨의 모습이었다. 그의 노래들은 주로 트로트풍의 가요들이었다. 그가 만든 노래가 가수 주현미나 설운도에 의해 히트가 됐다. 그가 조그만 식당에서 가수 설운도 씨와 만나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두 사람 다 세월에 풍화된 흔적이 얼굴에 역력하다. 가수 설운도 씨가 작곡가 이호섭에 대해 말을 하고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이 다 후암동 산 위 판자집에 이웃으로 살았었어요. 어떻게 방이 좁은지 돌아앉을 공간도 없었다니까요. 그때 이호섭 씨가 저보다 더 힘들게 사는 것 같아 제가 변두리 스탠드바의 사회자로 소개를 하기도 했어요. 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두 사람의 고생담이 이어졌다. 두 사람은 현재의 성취에 감사하고 있었다. 가난한 판자집 생활에 삼류 밤무대 사회자로 나가면서도 그는 꿈을 향해 야금야금 조금조금씩 세월을 걸었다. 검정고시로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친 그는 학교를 다니지는 않은 것 같았다. 또 다른 한 삶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나이를 먹었어도 대학원에 다니면서 음악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있었다. 인간의 몸은 늙어도 영혼은 늙지 않듯이 영혼의 작업인 음악은 나이가 먹을수록 더 익어가는 것 같다. 얼마 전 노래 인생 사십이 년이라고 한 낭만 가객 최백호 씨는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칠십대 나이가 되니까 이제 좀 어른스러워진 것 같아요. 나이 들수록 익어가니까 훨씬 더 좋은 가사를 쓰고 노래를 만들 수 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 여든이나 아흔이 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더 깊어져 있을 테니 더 좋은 곡이 나오지 않을까요?”
  
  칠십대에도 그의 버킷리스트는 꽉 차 있다고 기자는 전하고 있었다. 좋은 가사를 만들고 노래를 붙이는 일은 영혼의 작업인 것 같았다. 그건 공장에서 제품을 찍어내듯이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하늘에서 어떤 영감이 올 때 그걸 야금야금 조금조금씩 잡아 실을 짓듯 하얀 종이와 오선지 위에 담는 것이다. 나도 매일 생활 속에서 떠오르는 생각이나 순간 가슴에 잔물결을 일으킨 감동들을 조금 조금씩 노트북의 하얀 화면에 그 무늬를 그리고 있다. 조금조금 야금야금 그런 방법으로.
  
  
  
  
[ 2019-10-05, 05:4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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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건    2019-10-05 오전 8:48
그래요. 늙을 수록 익어가는 곡식이지요. 그리고 맛잇는 생명을 살리는 쌀이되구요. 이게 없으면 생명이 끊어집니다. 그 생명을 이어가게 하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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