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상사의 법무장교 인물평
"배웠다는 사람들 옆에 있어 보면 서리가 내릴 듯 냉기가 돌아요.”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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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파트 가까운 나지막한 산을 오르다가 오래 전 군에서 같이 근무하던 김 상사를 만났다. 내가 스물다섯 살 때 육군 중위 계급장을 달고 부대에 갔을 때 그는 나보다 열세 살이 많은 큰형뻘의 하사관이었다. 그는 깍듯이 예의를 지키며 자상하게 나를 돌보아 주었다.
  
  그의 상관을 모시는 태도는 극진했다. 내 위에 계급이 중령인 법무참모가 있었다. 김 상사가 상관에게 충성하는 모습은 대단했다. 한여름 며칠간 비상훈련이 있었다. 찌는 듯한 열대야가 계속됐다. 사무실의 벽에서도 바닥에서도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김 상사는 커다란 양철통을 구해다 찬물을 채우고 그 속에 피엑스에서 사온 맥주를 넣어 두었다가 참모에게 가져다주었다. 진심으로 상관을 위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 두 사람은 나이도 같았다. 퇴근 무렵 배가 출출할 때면 통근버스가 정차하는 근처 식당에 들어가 함께 칼국수를 먹기도 했다. 상관이었던 사람도 그도 모두 퇴직을 하고 다시 세월이 흐른 후 우연히 만난 것이다. 반갑기도 하고 그에게 빚을 진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와 산아래 돼지목살집에 가서 고기를 구우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게 됐다.
  
  “군에서 퇴직을 하고 나와서 어떻게 지냅니까?”
  이미 그는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매일같이 오전에 산에 오르고 오후에는 구청에서 하는 노인센터에 가서 바둑을 둬요.”
  “그게 계속되면 지겹지 않아요?”
  내가 물었다.
  
  “습관처럼 그걸 즐겁게 만들어야지 집안에만 있으면 사람들을 피하게 되고 폐인이 됩니다. 그래서 일단 눈을 뜨면 밖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산에서나 노인정에서나 사람을 대할 때마다 내가 낮아지면서 그 사람들 얘기를 받아줘야지 목이 뻣뻣하게 굴면 따돌림을 받아요. 저도 칠십이 가까운데 산에서 만나는 사람들하고 덤벙덤벙 잘 지내고 있어요. 더러 삼겹살에 소주도 한 잔 하구요. 그런데 하사관 출신이라는 게 나한테는 상처인데 가끔 그걸 건드리는 사람이 있어요.”
  
  “이제 세상사 모두 끝내고 황혼인데 아직도 군의 계급장에 매여 있어요?”
  내가 되물었다.
  
  “있죠. 며칠 전에 구청 노인회관에 가서 바둑을 뒀어요. 늙은이들이 많이 와요. 나하고 바둑을 두던 사람이 내가 뭘했느냐고 물어요. 그래서 군 출신이라고 했더니 계급을 뭘로 끝냈느냐고 묻더라구요. 그래서 상사라고 했더니 자기는 대령이래요. 그때부터 상관 행세를 하더라구요. 내 참 더러워서 내가 이 나이에도 육군 하사관인가요?”
  
  그가 탁자 위에 놓여있던 백세주 잔을 입에 털어넣더니 말을 계속했다.
  
  “제가 군에서 하사관으로 삼십년 동안 장교들을 모셨어요. 대부분이 법무장교죠. 이 분들이 제대를 하고 대부분이 판검사나 변호사가 됐죠. 그 많은 분들과 인연을 맺었는데 거의 대부분이 얼음보다 더 찬 것 같아요. 그때 참모님이 제대를 하시고 변호사 사무실을 차리셨어요. 일부러 시간을 내서 찾아갔죠. 그랬더니 헛말이라도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하지를 않아요. 차 한 잔을 주는데 표정을 보니까 그렇게 냉정할 수 없어요. 그 후 다시는 가지 않았죠.”
  
  그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계속했다.
  
  “엊그저께 신문을 보니까 그때 같이 근무하던 김근식 씨가 고등법원장이 됐더라구요. 그 사람 군대 있을 때 처신으로 보면 절대 출세할 사람이 못되는데 고등법원장이 된 걸 보면 후에 상당히 변한 모양이에요. 군대 있을 때 지저분한 짓을 많이 한 걸 제가 알거든요. 그 사람이 다른 부대로 전출갈 때 보고 싶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제가 하사관인데. 내가 양보하고 그 사람이 살던 연립주택에 가서 이삿짐을 다 싸주었던 생각이 납니다. 배웠다는 사람들 옆에 있어 보면 서리가 내릴 듯 냉기가 돌아요.”
  
  나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을 했다. 계급이 높으면 늙어서도 계급장 냄새를 피웠다. 법을 다루면 먼저 인간에 대한 이해와 아픔에 공감해야 하는데 깊은 우물에서 나오는 것 같은 냉기가 그 주변에서 흘렀다. 그들은 따뜻한 마음을 가진 늙은 김 상사보다 열등한 인간이었다. 하나님은 겉을 보지 않고 속을 보신다고 했다.
  
[ 2020-01-11, 10:3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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