反美선동한 일본 사회당 당수를 찔러죽인 17세 소년, 그도 옥중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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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10월 12일 일본 여야 3당 합동 연설회에서 사회당 위원장인 아사누마 이네지로(浅沼稲次郎)가 연설을 하고 있었다. 그때 한 젊은이가 연단으로 뛰어올라 아사누마 위원장에게로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아사누마는 쓰러졌고 대회장은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다. 연단으로 뛰어오른 이는 야마구치 오토야(山口二矢)였다.
   1943년 일본 육상 자위대원의 아들로 태어난 야마구치는 우익사상(右翼思想)을 지닌 아버지와 형의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우익활동에 참여했다. 17세 무렵 그는 우익단체인 대일본애국당(大日本愛國黨) 총재인 아카오 사토시(赤尾敏)의 연설에 큰 감명을 받아 그 당에 가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연설과 시위, 전단 돌리기밖에 없는 우익단체들의 활동을 납득하지 못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이 국가를 망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의 준동을 막지 않으면 일본이 위기에 처할 것이라 여겼다. 특히 사회주의 혁명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인물인 아사누마 이네지로는 일본 사회에 큰 위협이 된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18세의 야마구치는 아사누마 위원장을 살해한 것이다.
   당초 야마구치는 아사누마를 살해한 후 자신도 그 자리에서 자결하려 마음먹었다. 그래서 암살실행 직전 자신의 옷 주머니에 다음과 같은 암살 이유서까지 준비해 넣었다. “일본 적화(赤化)를 꾀하고 있는 아사누마 이네지로여! 나는 당신에게 개인적 원한이 없지만, 사회당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당신에게 방중(訪中)시의 폭언과 국회 난입 선동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대에게 천벌을 내린다.”
   즉 아사누마가 1959년 중국을 방문하여 “미국 제국주의는 중일(中日) 양국(兩國) 인민(人民)의 공동의 적(敵)”이라고 발언하거나 사회당원들의 국회 난입지시 등을 한 데에 대한 보복으로 암살함을 천명(闡明)한 것이다.
  
   야마구치는 미리 준비한 33센티 가량 길이의 칼로 아사누마를 힘껏 찌른 후 다시 한 차례 더 찔렀다. 아사누마는 연단에 앉아 있던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총리 면전에 쓰러졌다. 한 차례 더 피를 보려던 야마구치의 칼은 식장 경호를 하던 형사의 손에 잡혔다. 힘껏 칼을 뽑으면 형사의 손가락이 잘려 나가버릴 것 같아 야마구치는 순순히 체포에 응했다. 목적은 일단 달성했거니와 무고한 형사의 손을 베어 버릴 순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체포 된 야마구치는 암살의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요지로 진술했다.
  
   『평소 사회당은 국가를 망친다고 생각해 왔다. 사회당은 러시아 혁명 당시 공산당에 정권을 넘긴 케렌스키 내각과 같은 행위를 할 것이라 믿었다. 안보파동 때부터 그러한 신념을 갖고 아사누마 외에 노자카(野坂) 일본 공산당 간부회장, 고바야시(小林) 일본 교조 위원장도 함께 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좌익 지도자를 죽인다 하여 좌익 세력을 조속히 없앨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지금까지 저질러 온 죄악은 용서할 수 없었으며, 한명을 쓰러뜨리는 것으로 향후 좌익 지도자의 행동이 제한되고 선동꾼의 감언이설에 부화뇌동하는 일반 국민이 한명이라도 더 각성할 수 있으면 좋다고 생각했다. 믿을 만한 동지와 결행하려고도 했지만 나의 결의를 털어 놓을 사람이 없었다. 아카오(赤尾) 선생님이 거론되면 그가 검거 될 것은 분명하고, 내가 결행하면 우리 당에 제재가 가해질 것이므로 탈당한 다음 결행하였다. 』
  
   야마구치는 배후를 묻는 경찰에게 한사코 단독 범행이라 주장하였고, 1960년 11월 2일 수감 중이던 형무소 독방에서 자신의 옷을 찢어 천장 전등 부위에 걸어 목을 매 자살했다.
  
[ 2020-02-12, 14:3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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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noda74    2020-02-12 오후 9:51
조선조 5백년 동안
치열한 사화, 당쟁으로 수천 명이 죽어나갔지만,
신기하게도 정치적 암살은 한 건도 없었다고 한다.
모두 왕의 결재를 득한 후 상대세력을 합법적으로 처형시켰다.
이를 달리 말하면 뭐든지 저 혼자서 나서는 일이 일절 없었고
대신, 다른 사람의 호응을 얻고, 형세를 유리하게 만들어 놓고,
최고 통치자의 결재를 받아 놓은 후에야,
보복에 나선 것이다.
그런 피를 이어받은 족속이니
열도인의 저런 처절한 몸부림은
반도에서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무학산    2020-02-12 오후 4:33
山口二矢가 칼을 막 찌르는 순간의 사진이 이전에 인터넷에 많이 떠돌았습니다.
그때 저장해 두었던 사진을 여기에 올리려니 안 되어서 회원토론방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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