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책선에서 만난 ‘기드온’ 성경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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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십대 초의 나에게 닥친 고민 중의 하나는 군복무였다.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 당연한 의무였다. 그러나 가난하고 힘없는 집 아들만 군대에 가는 느낌이 들었었다. 학교 다닐 때 몸도 건강하고 멀쩡하던 친구들이 갑자기 눈이 나쁘다면서 병역을 면제받았다. 군대를 가지 않기 위해 만들어 내는 이유들이 기기묘묘했다. 또 상당수는 집에서 동사무소로 출퇴근하고 일 년 정도면 끝낼 수 있는 방위병이 되기도 했다. 지금으로 치면 공익근무요원인 것이다. 그들이 부러웠다.
  
  군 입대 무렵 나는 심한 간염을 앓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한 시간만 지나면 온몸이 나른해졌다. 나는 거의 하루종일 어둠침침한 방 안에서 혼곤한 잠에 빠졌었다. 그래도 병무청의 신체검사 담당 군의관은 내게 ‘갑종 일급’이라는 최고의 건강한 군자원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이십대 군복무가 신경 쓰이는 것은 힘이 들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었다. 공부를 하던 도중에 몇 년의 공백기를 가져야 하기 때문에 인생이 전혀 달라질 수 있는 장애물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었다.
  
  장기근무를 해야 하는 직업 법무장교 시험을 치고 입대했다. 운명이 나를 그쪽으로 몰고 있었다. 훈련 중에도 간염 때문에 질질 끌려 다니는 상황이었다. 저녁에 내무반에 도착하면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같이 훈련받는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과 의심과 미움의 눈길을 받아야 했다. 부대장은 꾀병이 아니라는 걸 알고는 나를 내버려 두었다.
  
  그나마 배경이 괜찮은 사람들은 서울 근처의 부대에서 근무했다. 나는 최전방의 철책선 부대로 배치됐다. 두껍게 눈이 쌓인 끝없는 하얀 산의 능선들이 물결치는 곳이었다. 겨울이면 매일같이 수은주가 영하 이십도 가까이 내려가고 있었다. 내게 순찰명령이 떨어지기도 했다. 철책선 안으로 들어가 매서운 바람이 부는 눈 덮인 들판을 밤새 걸어야 했다. 들판 구석구석의 짐승의 굴 같이 파놓은 참호 속에서 병사들이 꽁꽁 얼어붙은 채 어둠 속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쓸쓸하고 고독하고 슬픈 이십대였었다. 꿈은 좌절되고 이렇게 살아야 하나? 라는 근본적인 고민을 하고 있었다. 나는 군복을 입고 싶지 않았다. 자유인이고 싶었다.
  
  그런데 영혼을 옭죄는 제복을 입고 인간을 누르는 계급장을 머리에 붙이고 있었다. 탈출하고 싶은 나에게 군복무 십 년의 의무는 중한 징역형을 선고받은 죄수 같은 느낌이었다. 어느날 새벽 순찰을 돌고 산 위에 있는 막사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무쇠 석유난로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부하인 김 중사가 손바닥만한 작은 책 한 권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면서 말했다.
  
  “이거 기드온 협회라는 곳에서 전방의 장병들에게 공짜로 주는 성경책이에요. 종잇장이 얇고 부드러워서 담배를 말아 피면 좋습니다.”
  
  당시만 해도 군대 안에서 담배를 배급해 줄 때였다. 담배가 떨어지면 신문지를 찢어서 담배가루를 말아서 피기도 했다. 당시 나는 하나님과 관계가 없었다. 오히려 거부반응이 들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주관한다면 이렇게 불공평한 걸 그냥 방치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잠시 후 무심히 그 책을 들어 몇 페이지를 뒤적거렸다. 도대체 무슨 소리가 씌어 있는지 궁금했다.
  
  펼쳐진 페이지 안에는 여러 종류의 그릇에 대한 얘기가 나오고 있었다. 토기장이가 필요에 따라 하나의 진흙 덩어리로 여러 형태와 등급의 그릇들을 만들어 낸다는 내용 같았다. 그릇 중에는 부자집 상에 오를 윤기 나는 하얀 도기도 있고 시장바닥에서 국밥을 담는 뚝배기도 있는 것 같았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를 어떤 그릇으로 만들었는지 그건 하나님 마음이라는 것 같았다. 그냥 자기가 만들어진 용도에 충실하라는 것 같았다. 어떤 울림이 마음속으로 스며들어오는 느낌이었다. 내가 바로 그 뚝배기였다. 뚝배기가 이조백자나 고려청자가 되려고 헛꿈을 꾸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은 내게 그냥 그대로 네 처지대로 살아가라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현실은 그대로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변하는 것 같았다. 뚝배기로 만들어졌으면 뚝배기로 살자고 했다. 산봉우리의 슬레이트를 얹은 브로크 막사 사무실이 갑자기 나만의 편안한 은신처가 되는 느낌이었다. 거기서 이병주 씨의 소설 ‘지리산’부터 시작해서 많은 문학 서적을 읽었다. 하얗게 눈 덮인 능선들이 어느 순간 내게 따뜻하고 맑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처지대로 살기로 했다. 군복과 계급장은 더 이상 나를 얽어매지 못할 것 같았다. 나의 영혼은 자유인이었다. 물고기 뱃속에 있던 예언자 요나가 뱉어지듯 그 얼마 후 나는 사회로 다시 던져지게 됐다.
  
[ 2020-03-29, 21:4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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