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경쟁 속 발칙한 일탈(逸脫)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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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 중 한 명은 만날 때마다 손녀의 동영상을 보여주면서 자랑을 하기 바쁘다.
  
  “해외 지사에 나간 아빠를 따라 간 초등학교에 다니는 손녀가 그 나라의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쓴 시가 좋았던 모양이야. 그 나라 학교의 선생들이 학교 문집에 넣겠다는 거야. 우리 손녀는 세계적 시인이 되겠다고 그래.”
  
  이제는 아이들의 꿈도 한반도라는 좁은 땅에 머물지 않는 것 같다. 손녀를 자랑하는 친구가 말을 계속했다.
  
  “손녀가 한국으로 돌아와서 국제학교에 들어갔어. 그런데 단번에 전교 일등을 한 거야. 그러니까 그동안 내내 일등을 했던 아이의 엄마가 우리 손녀를 보러 왔더래.”
  
  “대단한 손녀를 뒀네. 그렇지만 그동안 일등을 해 왔던 아이나 엄마는 질투가 나겠구만.”
  내가 맞장구를 쳐 주었다.
  
  “우리 손녀 말이 자기는 전혀 개의하지 않겠다는 거야. 자기는 오직 목표가 미국의 하버드대학교라는 거야.”
  
  손자 손녀의 시대는 이미 세계화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얼마 전 한 선배의 집안도 우수한 손자를 하버드에 넣기 위해 특수과외를 시킨다고 했다. 이제는 인간도 물건도 세계적인 경쟁을 이겨내야 하는 것 같다. 얼마 전 세계적인 첨단공학기술의 권위자인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나같이 비닐같은 부드러운 소재에 전자회로를 인쇄하는 기술을 연구하고 그걸 인정받은 교수가 전 세계에 열 명쯤 있어. 사우디 같은 부자나라에서 생산라인을 깔려고 하면 세계적인 학자 열 명이 경쟁을 하는 셈이야. 거기서 일등을 해야 하는 거지. 그 기술 하나로 한국의 장래 먹거리가 될 수도 있고 말이야.”
  
  나는 그런 무한경쟁의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 세상에서 빛을 보는 사람은 바닷가의 모래 한 알 정도의 확률이 아닐까.
  
  아이들 교육에 인생을 다 바치는 부모들이 많다. 아이들도 경쟁에 쫓긴다. 아이들이 일류 대학 진학에 목을 매고 있다. 수백 명의 청소년들이 절망해서 자살하는 게 교육 현실이다. 대학입학 후에도 비싼 등록금을 내면서도 취업준비와 스펙 쌓기로 진짜 하고 싶은 공부를 하지 못한다. 대학을 졸업해도 대부분이 백수나 비정규직이 되고 수백 장의 취업원서를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한다. 취업에 성공해도 자아실현과는 거리가 먼 일을 생존 때문에 억지로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살던 시대와는 달리 경제성장이 둔화된 자식 세대는 구조조정으로 정리해고가 많은 것 같다. 사십오 세에 정년이라는 ‘사오정’이라는 말이나 오십육 세가 되어도 회사에 남아 있으면 도둑이라는 ‘오륙도’라는 말도 옛말이 되어 버리고 이십대의 태반이 백수라는 ‘이태백’이라는 말도 예사다. 자식들이나 손자 손녀들이 어린 시절부터 경쟁 속에서 참다운 배움도 학교친구들이나 직장 동료와 참된 인간관계도 맺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런 젊은 날의 경쟁은 자신에 대한 이해나 성찰마저 할 여유를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얼마 전 청년 문제를 다루는 이십대의 젊은이가 찾아왔었다. 내가 살던 시대는 좋았던 것으로 착각하는 것 같았다. 이제는 황혼으로 저물어 가는 나의 세대는 어땠나, 기억 저편의 일을 떠올려 봤다. 중고등학교 대학교 입시부터 고시까지 경주마 같이 달리는 치열한 경쟁이었다. 주위를 보면 대학 졸업까지 이십 년 치열하게 공부했다. 그리고들 대기업에 들어들 갔다.
  
  경제성장이 되던 우리 세대의 경우는 목이 잘리지 않는 대신 ‘일 중독’에 빠져 삶의 균형을 잃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모든 걸 직장에 바치는 그 시절 가정에서의 살가운 대화도 놓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사십 년 가량 노동을 하고 퇴직을 하고 노인이 된 지금은 바람 빠진 쭈글쭈글한 풍선들이 되어 있는 모습이다. 만나보면 인생을 헛살았다는 공허가 얼굴에 나타나 있는 걸 보기도 한다.
  
  나는 삼십대 중반 무렵 잔인했던 한 상관에 대한 기억이 아직 남아 있다. 상관이 나와는 반대 성향인 사람과 한 팀이 되어 일을 하게 한 적이 있었다. 도중에 서로 생각이 부딪치고 일이 부딪치고 돌과 돌이 부딪치는 것처럼 파란 불이 일었다. 나의 인격이 모자랐을 때의 일이다. 다툼이 일어나자 상관이 나를 사무실로 부르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가 사과해야겠소. 전혀 성향이 다른 사람을 일부러 한 팀으로 만들어 서로 부딪치는 걸 보고 관찰했소. 미안하오.”
  
  나는 마치 아이 둘을 세워 놓고 서로 뺨 때리기를 시키는 장면이 연상되면서 불쾌감이 일었었다. 또 한 번 그런 일이 있었다. 어느 날 상관이 나를 부르더니 이번에는 진급에서 경쟁자의 입장에 있는 사람에 대해 물었다. 평소에 함께 일하면서 같이 밥도 먹고 하는 친한 사이였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사회의 사다리를 빨리 올라가야 한다는 경쟁심은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걸 방해했다. 경쟁심을 노골적으로 이용하는 상관이라는 사람도 비열했지만 내 자신이 더 역겨웠다.
  
  경쟁이란 인간성을 철저히 메마르게 하는 것 같았다. 인간답게 살아가려면 쓰고 있는 여러 겹의 껍데기를 벗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다리 질서의 껍데기에서 내려와야 했다. 상대적 비교나 우월감의 껍데기를 버려야 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도 너무 바쁘게 살지는 않고 싶었다. 다른 사람에게 좀 더 잘해주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 방법은 경쟁 사회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출세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낮아지고 낮아져서 마지막에는 행복도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행복해지려고 하다가 불행을 맛보니까. 자식이나 손자 손녀에게도 경쟁에서의 승리보다는 발칙한 일탈을 권하는 입장이다.
  
[ 2021-02-24, 12:5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미투데이미투데이  요즘요즘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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