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지마 밀사―權翊鉉의 담판

세지마를 對韓밀사로 처음 사용한 이는 스즈키 젠코(鈴木善幸) 총리였다. 1981년 12월 그는 사쿠라우치 외무장관으로부터 '비공식 특사로 서울에 가서 全斗煥 대통령을 만나 경제협력 문제에 대하여 整地작업을 해주었으면 한다"는 부탁을 받았다. 이듬해 1월4일 오후에 서울에 도착한 그는 그날 저녁 청와대 영빈관에서 全 대통령을 만났다. 全 대통령은 한국정부가 일본정부에 약60억 달러의 경제지원을 요청하는 이유는 한국의 국방력 강화를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한국의 안전은 일본의 안전이고, 東北亞의 안전이다. 한국의 군사력은 북한군의 50
% 수준이다. 금후 5년 안에 70%까지 올리고 싶다. 우리는 GNP의 6%를 국방비에 쓰고 있으나 財源이 부족하다. 그래서 일본의 경제협력을 기대하는 것이다. 실무자 수준의 회담이 아니라 스즈키 총리의 결단으로 먼저 총액을 결정한 뒤 외무장관 회담을 진행하였으면 좋겠다."

세지마는 全 대통령의 뜻을 스즈키 총리에게 전하였다. 한일 고위급 실무자 회담이 시작되었다. 그해 4월엔 權翊鉉 당시 민정당 사무총장이 한국에 와서 미야자와 관방장관, 타케시다 자민당 간사장 등을 만나고 갔다. 회담은 一進一退하였다.

1982년 11월27일 나카소네가 천황으로부터 총리 인증을 받았다. 사흘 뒤인 11월30일 밤 나카소네는 세지마를 도쿄의 자기 집으로 초청, 식사를 함께 하였다. 식사가 끝난 뒤 그는 세지마에게 자신이 한국을 방문하여 全斗煥 대통령과 만나 현안문제를 매듭짓고 싶다는 뜻을 털어놓으면서 密使(밀사)역을 맡아줄 것을 당부했다. 나카소네는 "내년 1월 중순에 미국을 방문하여 레이건 대통령을 만나게 되어 있는데, 그 전에 한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싶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세지마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총리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졌다고 썼다.

"新내각이 발족하자 마자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서면 지지율이 떨어질 수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국 지도층의 생각을 아는가? 韓日관계 정상화를 위하여는 일본측이 대국적 견지에서 양보할 수 있는가?"

이때 세지마는 총리직속의 임시행정조사위원회의 핵심위원으로서 나카소네의 측근 상담역을 맡고 있었다. 權翊鉉에 따르면 나카소네가 스즈키 수상 내각에서 행정관리청 장관을 하고 있을 때 일본에서 그를 만났는데, 이야기 도중 갑자기 “내가 총리가 된다면 한국을 방문하겠다”고 말하더란 것이다.

세지마는 權 민정당 사무총장에게 연락을 취하였다.
"일본에 등장한 새로운 지도부는 兩國 관계를 하루빨리 정상화하고 싶어하는데 全 대통령의 뜻이 어떤지 알고싶다. 우리 두 사람이 어디서 만났으면 한다."

1982년 12월8일 세지마는 극비리에 오사카 공항을 출발, 金海 공항에 도착했다. 귀빈실에서 權翊鉉 당시 민정당 사무총장을 만나 세 시간 회담했다. 양쪽이 모두 兩國頂上의 특명을 받고 온 상황이었으므로 이야기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즉, 교과서 왜곡문제와 韓日 경협차관 문제로 냉각된 두 나라 관계를 나카소네의 공식방한으로써 타개한다는 기본적인 합의를 보게 된 것이다. 세지마는 이날 중으로 도쿄에 돌아가 한밤중에 나카소네의 私邸(사저)를 방문, 이 성과를 보고했다.
12월23일엔 權총장이 비밀리에 오사카로 날아가, 프라자 호텔에서 세지마를 만났다. 주로 일본이 한국에 제공할 차관의 총액과 형식에 대한 논의였다. 의견이 상당히 좁혀졌다. 총액은 40억 달러 선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12월29일 세지마는 나리타 공항을 출발, 서울에 도착, 李範錫 외무장관과 요담하였다. 다음날 오전 10시 세지마는 청와대에서 全斗煥 대통령을 만나 나카소네 총리의 親書를 전달하였다.

대통령은 "모처럼 발족한 나카소네 내각이 곤경에 처하는 것은 우리로서도 곤란하다. 그런 관점에서 오사카 회담(세지마-권익현)에서 합의한 데 대하여 동의한다"고 말하였다. 나카소네 총리가 새해에 한국을 방문하는 데 대하여는 감사와 환영의 뜻을 전하였다. 세지마는 대통령을 만나 대체적인 합의를 본 뒤 이범석 외무장관과 다시 만났다. 李 장관은 나카소네가 당일 회담하고 돌아가는 스케쥴에 반대하고 하룻밤은 묵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세지마는 全斗煥 대통령이 일본 총리 앞으로 보내는 親書를 갖고 돌아갔다. 1983년 1월5일 일본 정부는 임시 閣議를 열고 한일頂上회담이 10일 열린다고 한국정부와 동시에 발표하였다. 전두환-나카소네 회담에 의하여 韓日경협 문제가 완전히 타결됨으로써 韓日 양국은 밀월기에 들어간다. 1984년 9월엔 전두환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였다. 레이건-全斗煥-나카소네 사이에 깊어진 협력관계 속에서 일본측은 한국이 준비중이던 서울 올림픽의 성공을 위하여 협력하기 시작하였다.

*엘리트 코스

여기서 잠시 세지마는 어떤 인물인가를 알아보자. 그는 1911년 도야마縣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淸日, 露日전쟁에 사병으로 참전한 사람이었다. 도와미 중학교 시절, 육군의 대연습 광경을 구경하고는 감격, 군인의 길을 택하여 도쿄 幼年학교를 지망했다. 幼年학교는 3년제 고등학교 과정으로서 일본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예비 교육을 받는 곳이다. 20대 1의 경쟁률을 겨우 뚫고 거의 꼴찌로 합격한 세지마는 졸업할 때는 수석이었다. 일본陸士에 진학, 1932년 7월 육사 44기로 졸업했다. 315명의 졸업생 가운데 차석(보병과에선 수석)을 하여 천황이 주는 은시계를 받고 昭和천황 앞에서 御前(어전)강연을 하였다. 강연 제목은 '戰場에서의 給水문제'였다.


그의 陸士생도시절 만주에선 관동군이 중앙의 지시를 무시하고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전체를 점령, 괴뢰 만주국을 세웠다. 만주사변의 주동자는 관동군 작전 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 뒤에 육군상·조선주둔군사령관·戰犯으로 처형)와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의 콤비였다. 좌관(左官: 영관)급 참모들이 장성급 지휘관을 얼굴 마담으로 삼고 軍을 좌지우지한 것이 일본이 대륙침략과 군국화로 치닫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세지마의 육사 생도시절에는 청년장교들이 5·15사건을 일으켜 이누카이 수상을 죽이고, 경시청 등을 습격했으나 정권탈취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이 거사엔 육사생도 일부가 참여, 퇴학당하기도 했다. 이 청년 장교들은 농촌의 피폐와 재벌의 횡포, 정당의 부패에 반기를 들고 천황을 중심으로 하여 國政을 일대 개혁하자는 이른바 ‘昭和維新(소화유신)’을 주장했다.
이런 질풍노도의 시기에 육사를 졸업한 세지마는 고향인 도야마의 제35 보병연대에 배속되어 3년을 보냈다. 그는 자신의 회상록에서 '將校團'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장교단이란 직책이나 직급을 떠나서 모든 장교들이 先後輩 관계로 만나 가슴을 열고 대화하는 조직이었다. 계급중심의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 인간중심의 수평적 관계였다. '장교단' 모임에서 다져진 끈적한 인간관계가 實戰에서 유감 없이 발휘되었다고 한다.
그는 도야마 연대에서 만주 주둔 關東軍으로 전출되었다. 변경에서 抗日(항일)게릴라들을 토벌하는 일을 했다. 1936년 2·26사건이 터졌다. 도쿄에 주둔한 부대의 위관급 청년장교들이 일으킨 쿠데타는 천황이 그들을 반란군으로 규정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이 반란으로 사이토 內대신(前 조선총독)등 여러 重臣이 살해됐다. 반란군은 오카다 수상 관저도 습격, 수상으로 보이는 사람을 사살했는데 그는 오카다 수상의 妻男인 마츠오 예비역 해군대좌였다. 마츠오는 세지마의 妻 기요코의 아버지였다. 세지마는 어머니가 위독한 상태에서 "네가 결혼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한스럽다"고 말하면서 기요코의 사진을 보여주자 그 자리에서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여성과 결혼을 결심하였다고 한다.

세지마는 1937년 사단장의 추천으로 육군대학에 응시, 40대 1의 관문을 통과, 합격했다. 선발된 사람은 50명이었다. 日本군부에서 출세하려면 육군대학을 나와야 했다. 육군대학 입학자를 내기 위해 부대에선 응시자로 추천된 장교에겐 휴가를 주고, 호텔까지 잡아주며 공부를 시켰다고 한다. 육군대학에서 세지마는 戰史 공부를 즐겨 하였고, '생각하는 방법'을 배웠다.
<먼저 목적을 생각한다. 목적 달성을 위한 방침을 생각한다. 방침달성을 위한 방책을 생각한다. 방책을 수행하기 위한 조직체계를 생각한다. 그리고 着眼大局着手小局이다>
나중에 이토추 상사를 운영할 때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陸大 재학중 대위로 승진하였다.

세지마의 入學성적은 좋지 않았으나 2년 뒤 졸업할 때는 또 수석이었다. 유년학교, 육사, 육대를 모두 수석 또는 차석으로 졸업한 장교는 츠지(辻政信), 나가타(永田鐵山) 등 일본육군의 엘리트 몇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回想錄을 읽으면 세지마라는 인물은 엘리트 교육의 産物이란 생각이 든다. 幼年학교는 장래 군의 간부를 위한 '인간 만들기', 陸士는 여기에다가 군사교육을 더하고, 陸大는 전략전술을 가르치고 참모를 양성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세지마는 陸大 수석 졸업생이 졸업식 때 천황 앞에서 하게 되어 있는 이른바 ‘御前강연’에서 ‘일본군의 통수에 관하여’란 제목으로 이야기했다. 그의 목소리가 너무 낮아 천황과 7.5m 사이를 두게 되어 있는 강연석을 5m로 좁혔다는 일화가 있다.

*大本營 작전장교

육군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일본 장교단의 젊은 엘리트 세지마 류조(瀨島龍三) 보병대위가 大本營(대본영) 육군부 작전과로 발령된 것은 1939년 12월 초순이었다. 대본영은 戰時(전시)에 만드는 임시 지휘체제였다. 당시 대본영 참모총장은 皇族(황족)인 閑院宮載仁親王 元帥(원수)였다. 75세였다. 그는 세지마 대위가 신고하러 가니 “君(군)은 나이가 얼마인가”라고 물었다. 27세라고 하자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가. 君은 아직 젊으니 먼저 상황의 전반을 잘 공부하세요. 그리고 항상 大局(대국)을 놓치지 않도록 하면서 자신의 見識(견식)을 함양하도록 하는 게 좋겠다.”
세지마는 작전부 作戰課 작전반의 소속이 되었다. 그는 먼저 國防用兵(국방용병) 전반에 대한 연구 및 作戰課 전체의 총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대본영 육군부는 내 가지 문제로 苦心(고심)하고 있었다. 노몬한 사건의 뒤처리, 中日전쟁의 장기화, 육군군비 증강 계획의 재검토, 그해 독일이 시작한 유럽 전쟁에의 대응.
특히 1937년에 시작된 中日전쟁이 골칫거리였다. 일본군은 중국 대륙의 점과 선을 확보하고 있을 뿐 蔣介石(장개석)이 지휘하는 중경의 국민당 정부는 철저한 抗戰(항전)을 선언, 미국 등 국제적 지원을 받고 있었다.
세지마는 자신의 回想錄(회상록) ‘幾山河’에서 일본이 태평양 전쟁으로 끌려가는 계기는 中日전쟁이었다고 반성하였다. 세지마는 기밀서류를 관리하고 있었으므로 중일전쟁 시작 1년 전 일본 육군의 천재로 불리던 이시하라 간지 작전과장이 작성한 문서를 읽을 수 있었다. 만주사변을 일으켜 괴뢰 만주국을 만드는 데 主役(주역)이었던 이시하라 대좌는 이렇게 썼다.
<일본은 모든 노력을 만주국 건설에 집중하여야 한다. 이를 위하여 육군은 소련의 위협에, 해군은 미국의 武力간섭에 대처하여야 한다. 다른 방면에서 우리의 國力(국력)을 소모하는 것을 절대로 피해야 한다>
이시하라는 만주를 일본의 생명선으로 이해하였으나 중국까지 침략하는 것은 반대하였다. 그러나 일본 군부는 모험노선을 선택, 그 1년 뒤 中日전쟁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1939년 12월, 세지마가 대본영 육군부 작전과에 배속되었을 때 작전과는 1940년도 육군작전계획안을 만들고 있었다. 세지마는 육군과 해군 사이의 협력 부문을 맡았다. 해군 작전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서태평양을 침공하는 미국 함대에 대한 요격 작전’이었다. 세지마는 <태평양 전쟁의 주체는 해군이고, 육군은 해군의 작전을 지원한다>는 입장에서 <유사시 육군은 일부 병력으로 라바울을 점령한다>는 항목을 추가하였다. 해군과의 이런 인연으로 하여 세지마는 나중에 연합함대 참모를 겸하게 된다.


*독일의 國力을 과대평가

당시 일본군의 통수권자는 昭和천황이었다. 대본영은 참모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천황의 재가를 얻어 작전을 사실상 주도하였다. 대본영의 참모총장은 육군을, 군령부총장은 해군을 관장하였다. 통수권 운용의 핵심은 ‘국방용병작전’이었고 이와 관련하여 천황에게 上奏(상주)하는 일을 作戰課(작전과)에서 담당하였다. 전문가가 아닌 天皇(천황)이 독창적인 전략을 세울 수가 없었으니 사실상 作戰課가 전쟁 지도 업무를 주도한 셈이다.
1940년 7월27일 대본영과 정부의 협의체인 ‘대본영정부연락회의’는 ‘세계정세의 推移에 따른 時局處理要綱(시국처리요강)’을 결정하였다. 그때 독일은 유럽에서 전격전으로 프랑스군을 6주 만에 궤멸시키고 영국군 40만 명은 덩켈크에서 九死一生(구사일생)으로 철수하여 돌아갔다. 히틀러는 이탈리아의 도움을 받아 유럽을 장악, 영국을 고립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런 정세 변화 속에서 결정된 ‘時局처리요강’은 그 뒤 일본의 進路(진로)를 결정하게 된다. 요강의 핵심은 유리해진 정세를 이용하여 中日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기회를 봐서 東南亞(동남아)를 확보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목적을 위하여 독일 및 이탈리아와 정치적 결속을 강화하고 미국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하여 對美(대미) 교섭을 추진한다. 동시에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의 석유자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武力(무력)사용을 준비하기로 하였다.

이 요강에 따라 1940년 9월 일본은 독일 및 이탈리아와 함께 ‘三國(삼국)동맹 조약’을 체결한다. 이로써 일본은 영국과 미국을 敵(적)으로 돌린 셈이다. 일본의 국가 지도부는 승승장구하는 독일의 國力(국력)과 戰力(전력)을 과대평가하고 영국과 미국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세지마는 回想錄(회상록)에서 적고 있다.

이 무렵 히틀러는 스페인의 프랑코 총통에 대하여 “우리 편에 서서 영국을 치자”는 제안을 한다. 프랑스에서 만난 두 사람은 그러나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다. 프랑코는 독일 및 이탈리아의 도움을 받아 스페인 內戰에서 공화파에 이겼지만 영국의 잠재력을 높게 평가하였다. 영국이 비록 고립되었지만 절대로 항복하지 않고 정부를 캐나다로 옮기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히틀러를 만나러 오면서 고의로 두 시간이나 늦게 도착하였다. 히틀러를 驛(역)에서 기다리게 함으로써 그를 화나게 하여 회담을 유리하게 끌고 가려는 일종의 심리전이었다. 프랑코는 參戰(참전)에 원칙적으로 동의한다고 해놓고는 독일이 도저히 만족시킬 수 없는 전제조건을 제시하였다. 프랑코의 교묘한 修辭(수사)에 질린 히틀러는 “그 자와 만나 이야기하는 것은 생이빨을 빼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만약 이때 프랑코가 일본처럼 오판하여 독일에 협력하였다면 2차 대전 이후 패전국 대우를 받아 스페인 사람들이 고생하였을 것이고, 그의 정치적-육체적 생명은 끝났을 것이다. 일본의 誤判(오판)은, 급변하는 상황에서 戰時(전시) 외교에 실패하면 국가와 국민이 불행해진다는 좋은 사례이다. 일본은 러일 전쟁에선 영국과 미국의 도움을 받아 겨우 이겼는데, 그 恩人(은인)을 敵(적)으로 돌린 것이다. 더구나 일본은 석유 등 중요한 戰略(전략)물자의 수입을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다.

事物(사물)을 좁고 깊게 보는 데는 능하지만 넓게 종합적으로 보는 데 약한 일본인들은 경제와 전술에선 잘 하지만 외교와 戰略(전략)에서 실수하는 경우가 많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임진왜란도 그런 사례이다.


*獨蘇 전쟁 시작

세지마의 회상록에 의하면 作戰課(작전과)는 동남아 확보 작전에 반대하였다고 한다. 작전과장 오카다 대좌는 “우리가 연합함대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無言(무언)의, 위대한 發言力(발언력)이다”고 말하였다.
세지마는 남방작전의 육군측 主務(주무) 참모로서 홍콩에 密派(밀파)되었다. 미쓰비시 상사원으로 위장한 그는 상륙작전을 위한 地形 조사를 하였다. 작전과는 싱가포르-말레이시아 작전, 인도네시아 작전, 홍콩 작전, 필리핀 작전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모두가 상륙작전이므로 戰略(전략)급습, 制空權(제공권) 확보, 작전부대의 기계화가 필요하였다. 세지마는 작전반장의 지시에 따라 남방작전의 전반적인 종합계획 작성을 책임졌다. 세지마는 “미국과의 결전은 피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계획을 짰다고 한다.

대본영 작전과는 中日(중일)전쟁을 끝내기 위하여서는 프랑스의 식민지인 인도지나 반도의 북부, 즉 지금의 하노이 일대를 확보하여 비행장을 건설할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었다. 일본 군부가 ‘援蔣(장개석 지원)루트’라고 불렀던 ‘佛印루트’와 ‘버마-昆明루트’를 봉쇄하기 위하여서는 하노이 근방에 비행기지를 두고 이 루트를 폭격하겠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프랑스 식민통치당국을 상대로 외교 교섭에 들어가 군대를 평화적으로 進駐(진주)시키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결국 武力(무력)점령이 되었다. 1940년 9월26일이었다. 영국과 미국은 즉각적으로 반발하였다. 미국은 철강 제품의 對日(대일)수출을 금지시켰다. 영국은 잠시 닫아놓았던 ‘버마 援蔣 루트’의 再開(재개)를 통보해왔다. 美英(미영)과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다. 모두가 무리한 中日전쟁 때문이었다.

1941년 봄 세지마 대위는 작전반장의 보좌로서 작전의 전반, 특히 全軍(전군)의 병력 운용을 맡는 한편 북방반에 소속하여 만주 주둔 關東軍(관동군)을 시찰하였다. 그해 4월 일본과 소련은 불가침 조약인 중립조약을 맺었다. 일본 육군은 전통적으로 소련을 主敵(주적)으로 보고 관동군을 重視(중시)하여 왔는데, 어느 새 미국을 主敵으로 돌려놓은 셈이다. 이런 방향선회의 가장 큰 판단 근거는 독일군이 유럽을 장악하고 영국을 제압할 것이란 전망이었다.

그 독일군이 1941년 6월22일 소련을 기습 침공하였다. 5월부터 대본영에는 獨蘇開戰(독소개전) 가능성에 대한 정보가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특히 6월6일 駐獨(주독)일본 대사 오시마는 히틀러를 면담하고 독일이 소련을 칠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일본군 상층부에선 이 기회를 이용하여 宿敵(숙적) 소련을 칠 것인가 동남아로 나갈 것인가, 즉 北進(북진)이냐 南進(남진)이냐의 격론이 벌어졌다. 육군성, 해군, 작전과장은 “이 기회에 북방의 부담을 줄이고 남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육군의 작전부장은 “다년간의 현안인 북방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북진해야 한다”고 반박하였다. 세지마의 회상록에 따르면 독일의 소련 침공 소식에 접한 한 작전장교는 “히틀러가 오판했어!”라고 소리 질렀다고 한다.

대본영 陸海軍部는 獨蘇전쟁이란 새로운 상황에 대한 지침을 마련, 御殿(어전)회의를 통하여 천황에게 보고하고 재가를 받았다. 만주의 병력을 증강하여 사태의 추이를 관찰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응하여 소련군도 병력을 증강하였다가 일본군의 北進의사가 없음을 확인하곤 獨蘇전선으로 다시 보냈다. 소련은 조르게 등 간첩망을 통하여 일본군의 방침을 알았다고 한다.

일본 대본영은 남방작전을 계획하는 과정에서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점령작전을 위하여서는 인도지나 반도의 남쪽을 확보하여 항공기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당시 인도지나는 프랑스의 남쪽에 세워진 비시 정부에 의하여 통치되고 있엇다. 비시 정부는 독일의 압력을 받아 일본군의 進駐를 허용하였다. 7월 말 일본 제25군이 월남지역에 無血(무혈) 상륙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미국, 영국, 네덜란드는 일본의 資産(자산)동결 및 석유 禁輸(금수)조치를 취하였다. 당시 일본의 석유재고량은 1년분 남짓이었다. 독일을 믿고 달렸던 일본은 코너에 몰렸다. 對美(대미 협상을 통하여 難局(난국)을 타개하려는 노력을 하는 한편 對美전쟁 준비에 들어간다.

일본 고노에 총리는 미국측에 대하여 일본은 프랑스령 인도지나 이외의 지역으로는 진출하지 않는다, 필리핀의 독립을 존중한다, 미국은 일본과 정상적인 무역관계를 회복시킨다는 3개항을 제의하였다. 미국은 전제조건을 제시하여 사실상 이 제의를 거부하였다.

일본은 9월6일 御殿회의를 통하여 “10월까지 우리의 요구조건이 관철되지 않으면 미국, 영국, 네덜란드에 開戰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10월2일 미국은 일본에 대하여 회답을 보내왔는데, 그 내용은 중국과 인도지나에서 완전 撤兵(철병), 삼국동맹의 사실상 무효화 요구였다. 대본영은 1941년 10월 말까지 작전계획을 완성하였다. 중국에서 철병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기엔 일본이 너무 나가 있었다. 일본 지도부는 “경제봉쇄를 당하여 미국에 굴복하느니 스스로 난국을 타개해야 한다”는 방향을 선택한 것이다. 難局 타개의 핵심은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의 油田(유전)지대를 점령, 석유자원을 확보한다는 것이었다. 태평양전쟁은 그 본질이 석유전쟁이었다.

*開戰 명령 암호문 작성


고노에 내각이 美日(미일) 교섭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辭職(사직)하고 일본 陸軍相 도조 히데키 대장이 1941년 10월18일 총리로 임명되었다. 天皇은 도조 총리에게 “9월6일 御前회의 결정에 구애받지 말고 內外 정세를 재검토하여 신중하게 대처하라”고 지시하였다.
정부와 대본영은 11월2일 “武力발동 시기를 12월 상순으로 정하고 마지막 對美(대미)교섭을 시도하며 독일 및 이탈리아와 제휴를 강화한다”고 결정하였다. 이 사흘 뒤 오전 10시 반부터 오후 3시 넘어까지 진행된 御殿회의는 육군과 해군의 작전계획을 통과시키고 천황의 재가를 받았다.

도조 내각은 11월7일 노무라 미국 주재 대사를 통하여 “日中간에 평화가 성립하면 2년 내로 일본군을 중국과 인도지나에서 대부분 철병한다”는 약속이 포함된 안을 제시하였다. 11월 초순 駐美(주미)대사 노무라는 헐 국무장관과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이것이 일본의 최대 양보안이다”고 설명하였다. 미국측의 반응은 차가왔다. 헐 장관은 “일본이 독일과 제휴하고 있는 한 美日관계의 조정은 불가능하다. 먼저 이 근본적인 장애물을 제거하지 않으면 협상할 수 없다. 미국의 평화정책과 히틀러는 相容(상용)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11월20일 일본정부는 대사에게 “우리의 최종안으로서 남부 인도지나 進駐 이전으로 돌아가겠다는 내용을 담은 乙안을 제시하라”고 훈령하였다. 헐 장관은 이틀 뒤 ‘인도지나 철병만으로써는 국면타개가 불가능하다” 답변하였다. 11월26일 헐 장관은 미국의 새로운 제안을 내어놓았다.

‘헐 노트’로 알려진 이 제안은 “중국과 인도지나로부터 전면 철수, 중국에서 중경정권 이외의 정부는 인정하지 않는다, 삼국동맹의 死文化”를 요구하였다. 일본은 이 문서를 최후통첩으로 간주하고 기습작전 시행에 돌입하였다. 12월1일 오후 御前회의는 開戰을 결정하였다.
세지마는 進攻(진공)명령, 開戰日에 관한 명령 등 作戰사무에 종사하였다.
남방군 총사령관 데라우치(寺內壽一) 대장에게 “히노데와 야마가타”라는 開戰 암호문을 打電(타전)한 것도 세지마 대위였다. 그는 이 開戰(개전)명령서를 새 붓과 먹으로 썼는데, 손이 떨렸다고 한다.
昭和천황은 전쟁으로 나아가는 데 대하여 주저하고 있었다는 증언이 많다. 세지마는 戰後(전후) 후배인 아라이 기미오(제2차임시행정조사위원회에 참여)씨에게 “천황은 內戰을 걱정하여 開戰을 결단하였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하였다고 한다. 천황이 군부를 누르고 외교적인 방법만 모색하였다면, 그리하여 中日전쟁에서 양보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군의 강경파가 2.26 사건과 같은 반란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세지마는 일본의 전쟁 지도 기능이 정부와 군으로 兩分되어 있었고 통합 기능이 미비된 점을 여러 군데서 비판한다. 그는 또 육군과 해군 사이의 정보 교류가 충분하지 못하였음을 인정하였다. 1942년 6월 일본 연합함대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 해군에 大敗(대패)하였는데, 해군은 육군측에 상황을 자세히 알려주지 않았고 육군측도 알아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요사이 뒤돌아본다면 미드웨이 해전 직후 서태평양에 있어서 금후의 작전 전반에 대하여 兩軍 사이에 솔직한 토의를 했어야 했다. 당시 해군은 미드웨이의 실패를 회의에 올리는 것을 싫어하였고, 육군도 해군과 충돌하는 것을 꺼렸다>

*中日전쟁이 萬惡의 근원


세지마는 회상록에서 이렇게 반성한다.
<첫째, 中日전쟁을 일으키지 말았어야 했다. 둘째, 三國동맹 체결과 프랑스령 남부 인도지나 진주를 하지 않았어야 했다. 1939년 가을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난 시기를 이용하여 중일전쟁의 대승적 해결, 즉 점령지로부터의 철병을 단행하였어야 했다. 1941년 10월 도조 내각 성립 때 萬難을 무릅쓰고 對美교섭을 통하여 三國동맹을 파기하고, 만주 이외의 지역으로부터 철병하였어야 했다. 물론 이 대결단은 국내적으론 군과 관련되는 일이고 미국이 응락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있지만...국가는 생존과 발전을 잘 조화시켜야 한다. 발전에 치중하여 절도와 한계를 잃으면 생존이 위험해진다. 당시 우리나라는 지도원리가 확립되지 않았다. 무리하게 발전을 추구하여 만주사변, 중일전쟁을 일으키다가 보니 생존이 어렵게 되었다. 필수적인 자원인 석유 등을 미국과 영국에 의존하면서 두 나라를 敵對視(적대시)하다가 전쟁으로 가서 지고 말았다. 만주를 제외한 중국 및 滿蒙(만몽)지역으로 세력권을 확대한 것은 발전의 한계를 넘는 暴走였다>

세지마는 정보 판단의 실수도 지적한다.
< 一元的인 국가통합정보기구가 없었다. 육군은 주로 對蘇, 對獨 정보 수집에 주력하였다. 해군은 對美英 정보수집에 열중하였다. 육해군이 다 군사적 정보수집에 치중하였다. 정치적, 경제적 정보를 포함한 국력의 종합적 판단을 소홀히 하였다. 이런 정보 부족으로 우리 민족의 성격상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판단보다는 심정적이고, 희망적인 판단으로 흘렀다.
명치헌법에 의하여 국가의 통치는 천황이 총람하고 정부와 군통수부는 천황을 보필하게 되어 있었다. 정부, 육군, 해군이 國策 추진기관이었다. 총리, 외무장관, 육군 해군 장관, 육해군의 통수부장의 여섯 명이 합의하게 되어 있었다. 시간을 다투는 문제를 결정하는 데는 너무 복잡하였다. 통수권의 독립과 現役(현역)무관제가 더욱 사태를 어렵게 만들었다. 이런 가운데서는 국가지도원리에 입각한 大英斷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옛날 사람이 이야기하였다.
“이 세상에 不變(불변)하는 것은 없다. 다만 하나 不變하는 것은 모든 것이 항상 변화한다는 사실이다” >


*11년간 포로생활, 인간의 본질을 보다

1945년 7월17일 세지마 소좌는 대본영 참모에서 관동군 참모로 전출됐다. 임박한 對蘇(대소)전에 대비하고, 패전 뒤의 처리문제를 맡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소련이 8월9일 선전포고와 동시에 만주를 침공, 관동군은 붕괴되고 세지마는 항복 뒤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 수용소로 끌려갔다. 수용소에서 11년간을 포로로 보냈는데 《레미제라블》을 수십 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1946년 9월18일 포로생활 중이던 세지마는 소련군에 의해 일본으로 압송되어 도쿄 戰犯 재판의 증인으로 세워졌다.
한 시간 동안 연합군 검찰관으로부터 신문을 당했다. 검찰관들은 세지마로부터 천황의 전쟁책임에 대한 유리한 진술을 얻어내려고 했으나 세지마는 천황의 전쟁책임을 부인하는 쪽으로 증언하여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세지마는 가족과의 면회를 스스로 거절하고 당일 시베리아로 돌아갔다. 세지마가 11년간이나 포로생활을 한 것은 이런 ‘비협조’에 대한 소련측의 보복이었다는 얘기도 있으나 확인할 수 없는 일이다.

일본 소설 '不毛地帶(불모지대)'의 주인공 모델이자 國士로 추앙받으면서 公的 부문에서 많은 일을 한 세지마 류조(瀨島龍三)는 소련이 일본 군인 약60만 명을 포로로 잡아 놓고 시베리아에서 강제노동을 시키고 투옥한 것은 국제법 위반이라고 주장한다. 이 중 6만 명이 죽었다. 이는, 일본인들이 지금도 러시아를 가장 경계하는 이유중의 하나이다. 세지마는 11년간의 억류생활중 극한체험을 여러 번 하였다. 엘리트 일본군 장교 출신이 화장실 청소를 하고 重病으로 生死의 기로를 헤매었다. 그가 남긴 回想錄의 제목은 '幾山河'이다. 수 많은 고비를 넘긴 인생이란 뜻이다. 이 책에서 그는 시베리아 억류생활을 통하여 인간의 본질을 보았다고 썼다.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고독과 空腹이었다. 밤중에 배가 고파 일어나 물을 마시고 배를 채운 적도 많았다. 이런 극한상태에서 인간은 粉飾(분식)이 불가능하여 거의 벌거벗은 존재가 되고 만다. 우리 일본인중엔 완력으로 남의 빵을 빼앗는 사람도 있었고, 반대로 자신의 빵을 쪼개어 病者에게 나눠주는 이도 있었다. 나는 "도대체 인간은 그 본질이 무엇인가"하고 생각에 잠겼다. 되풀이하여 읽은 빅토르 유고의 '레 미제라불'에 "인간은 두 개의 중심에 서서 포섭된 楕圓(타원)이다"는 말에 공감하였다. 즉, 정신과 육체, 감정과 이성, 善行과 惡行의 양면을 공유하는 '살아 있는 존재'가 인간인 것이다. 인간의 약함, 추함을 극복하기란 쉽지 않다. 평소에 신앙심과 책임감으로 자신을 단련시켜놓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인간의 가장 소중한 가치이자 도덕은, 他人을 위하여, 또는 이 세상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계급의 上下, 학력의 高下와 관계가 없는 至高의 현실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軍人사회에서 자랐으므로 軍人의 계급이 바로 인간의 가치라고 생각하였는데 현실과 遭遇(조우)해보니 눈을 새롭게 뜨게 되었다. 군대의 계급, 기업의 직급 등은 조직 운영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고 인간의 가치와는 전혀 별개이다.

따라서 계급, 직급의 上位者일수록 자신을 엄정하게 규율하고, 인간적 수련을 계속해야 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제 정신을 갖지 않으면 안 되고, 또 조직의 상층부에 있는 자는 겉만 보아선 안되고, 뒤도 잘 보면서, 조직 전체를 묵묵히 지탱하고 있는 사람들을 잊어선 안 된다. 인간의 수련엔 한이 없다. 사람은 棺을 덮을 때까지 그렇게 노력해야 하는 게 아닐까>

*거북등 같은 손

1956년 8월19일 세지마는 일본으로 귀환했다. 세지마보다 여섯 살 아래인 기요코 부인은 한때 긴자에서 구두닦이를 하며 두 딸을 데리고 生計를 이어갔다고 한다. 세지마는 관동군에 있을 때나 시베리아로 끌려가서도 혼자서 일찍 송환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동료들에 대한 의리로 해서 그런 기회를 거절했다고 한다. 崔慶祿 전 주일대사는 필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대사시절 여러 번 신세를 졌지요. 韓日간에 문제가 생기면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곤 했습니다. 제가 미안해서 전화를 걸고, 찾아뵙고 부탁드리겠다고 하면, 언제나 펄쩍 뛰어요. 대사는 한 나라를 대표하는 분인데 여기까지 오시게 할 수 없다면서 꼭 그분이 먼저 움직여요. 하루는 나를 찾아와, 대사 각하, 사죄해야 할 일이 있다고 머리를 숙여요. 놀라서 무슨 일이냐고 했더니 양심의 가책을 받을 일을 했다는 겁니다. 뭐냐 하면 그분 가족이라 해보았자 老부부뿐인데, 원래 방이 두 칸밖에 안 되는 낡은 집에 살았어요. 그런데 부인이 신경통으로 아파서 최근에 조금 좋은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갔는데 이게 양심에 걸린다는 거예요. 그 老부부를 같이 만난 적이 있는데 세지마씨가 자기 손을 만져 보라고 해요. 꼭 거북이등처럼 거친 손이었어요. 시베리아에서 영하 40도 아래서 강제 노동하다가 凍傷(동상)에 걸려서 그렇게 됐다고 그래요. 부인의 손도 마찬가지인데, 그래서 늘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라고 하더군요.”

세지마는 귀국 뒤에도 1년 반 동안 실업자 생활을 보내야 했다. 40대 중반의 그는 이 기간에 11년간의 포로생활로 생긴 공백을 메우는 일을 했다고 한다. 崔 전 대사에 따르면 세지마는 도서관에 가서 지난 11년간의 신문을 빠짐없이 읽으며 잃어버린 세월을 복원해 갔다고 한다.
“아무리 빨리 읽어도 하루 열흘 분밖에 못 읽겠더라고 해요. 그래서 신문철을 아예 대출하며 집에서 밤새워 읽으니 하루에 한 달 분을 소화하겠더랍니다.”

세지마는 몇 년 전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나를 정보의 鬼才라고 이야기하지만 제임스 본드도 아닌데, 특별한 정보가 그리 많을 리도 없다. 나의 가장 큰 정보원은 내외의 신문기사다. 목적의식을 갖고 신문이나 자료를 읽으면 개개의 정보에서 차원 높은 새로운 정보가 생긴다.”
세지마는 이토추 회장 시절 중공이 베트남을 침공하기 석 달 전에 이를 예언했었다고 한다. 그 비결에 대해서 세지마는 “신문을 알뜰히 읽고 분석하면 그런 결론이 나온다”고 말했다. 그는 “종합상사란 정보의 흐름을 事物의 흐름으로 바꾸는 조직이다”라고 정보를 강조하곤 했다. 세지마의 실업자 시절 가족의 생계는 가축시험장에 취직한 부인이 맡아서 꾸려나갔다. 저녁밥을 세지마가 지어놓고 부인의 歸家를 기다렸다고도 한다.

*이토추에서 석유에 집착

세지마는 선배장군의 소개로 이토추 상사의 촉탁으로 입사한다. 1958년 12월의 일이었다. 세지마는 入社(입사)조건으로 이런 요구를 했다고 한다.
-면접시험을 보고 채용을 하지 않는 치욕은 삼가주기 바람
-11년간 언론의 자유를 속박하지 말 것
-영업에 관한 지식은 全無상태이니 양해해 달라.

세지마는 1960년 항공자위대의 新(신)기종 결정을 둘러싼 수주전에선 미츠이 물산의 F-104A 전투기에 밀려 참패했다. 그의 말대로 영업에는 별 소질이 없었던 것 같다. 세지마의 실력이 제대로 발휘될 수 있었던 것은 업무부 본부장(이사)에 취임하여 이토추의 경영에서 참모장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부터였다. 조직관리·인사·경영전략 수립에서 세지마는 작전참모의 경험을 충분히 살려 섬유재벌 정도로 알려져 있던 2流 상사인 이토추를 미쓰비시, 미츠이에 버금가는 세계적인 규모의 대회사로 키우는 데 두뇌 역할을 했다.
소설 《불모지대》에서는 이키 다다시가 이란에서 유전발견에 성공하는 것을 클라이맥스로 설정하고 있다. 실제로는 이토추가 1970년에 자바의 해저유전 개발에 성공, 소설과는 차이가 있다. 이토추는 세지마 업무본부장의 강력한 권고로 미국 회사가 시작한 개발사업에 자본참여, 原油판매권을 얻었는데, 시추가 성공하며 해피엔딩이 됐던 것이다.
세지마는 석유공급원의 확보에는 이상할 정도의 집념을 보인다. 韓日협력위 등 공식석상에서 세지마는 꼭 석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세지마는 대본영 참모로서 일본이 미국에 의해 석유로 목이 졸려 開戰으로 치닫게 된 과정을 체험했던 사람이다.
세지마는 종합상사는 營利(영리)보다는 國益(국익)을 중시해야 한다는, 일종의 ‘종합상사 국가기관설’의 신봉자로서 석유자원의 확보를 위해서는 회사의 이해관계도 초월해야 한다는 생각을 그대로 실천했던 것 같다. 세지마는 일본―스리랑카 경제 합동위원회의 일본측 회장이다. 세지마는 중동의 원유를 실은 탱크들이 스리랑카 근해를 지나야 일본에 올 수 있다는 점을 중시, 이 나라와의 친선은 말래카 해협 연안국들과의 우호만큼이나 일본의 안전에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그 직책을 수행하였다.

세지마의 호적수로서 1960, 1970년대의 일본 상사맨 사이에서 우상이 되었고 《불모지대》에서 세지마의 라이벌로 설정된 이는 닛쇼이와이 상사의 가이후 하치로(海部八郞)였다(부사장까지 역임).
세지마는 참모형, 가이후는 지휘관형이었다. 가이후는 록키드 뇌물사건에 연루되어 商社를 떠났다. 세지마는 이토추를 떠나도 그의 조직은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 데 대하여 가이후의 인맥은 그의 퇴진과 함께 붕괴된 점을 들어 일본 경영학계에선 세지마를 더 높게 평가한다고 한다. 세지마는 1972년에 이토추 부사장, 1977년에 부회장, 1978년에 회장으로 승진했다가 1981년에 상담역으로 일선에서 물러났다.

*일본 육사 인맥의 정점인 세지마

여기서 韓日 양국에 걸친 세지마의 영향력, 그 원천을 분석해 볼 필요가 생긴다. 한국에서도 한국 陸士인맥은 막강하였지만 일본에서도 일본 육사인맥은 단결력과 그 영향력이 대단하였다. 일본 육사는 61기까지(59∼61기는 졸업은 못하고 패전을 맞음) 약 5만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들 졸업생이 만든 동창회로 해행사(偕行社)가 있다. 한때 약 1만8000명이 회원이었다. 申應均(신응균), 金貞烈 등 한국인 동창 10여 명도 회원으로 명부에 실려 있었다. 만주군관학교를 거쳐 일본 육사에 편입된 사람들<朴正熙, 姜文奉(강문봉) 등>은 회원이 될 수 없다.

세지마가 가장 왕성한 공직 활동을 벌인 1980년대 중반, 1만8000여 명의 생존 일본陸士출신들은 거의가 경제계의 수뇌부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軍 조직의 운용이나 商社의 운용은 공통점이 많기 때문에 육사출신 엘리트들은 잘 적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세지마도 육사선배의 소개로 이토추에 들어갔지만, 死線(사선)을 함께 넘어 의리가 강한 이들은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면서 경제계의 중요한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일본이 戰後에 종합상사를 앞세워 세계 시장을 석권할 수 있었던 것도 작전참모가 경영참모로 변하고 총칼 휘두르던 사무라이의 승부정신이 상사맨의 집념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란 해석도 있다.
戰後에 일본 경제계의 인물 공급원 구실을 한 또 다른 기관은 만주철도 조사부였다. 2000명의 조사연구원을 부리며 40년간 6000여 건의 보고서를 냈던 이 세계최대의 두뇌집단은 식민지 경영의 아이디어 産室에서 일본재건의 엔진으로 변신했던 것이다. 偕行社의 명부를 훑어보면 60, 70대의 이들이 거개가 현역으로 활동중이었다. 남자와 여자의 평균수명이 모두 세계최고로서 고령화 사회인 일본의 독특한 풍토이다. 세지마는 1981년부터 偕行社의 부회장직을 맡았다.
동대경제간화회(同台經濟懇話會)는 세지마 인맥의 또 다른 샘이었다. 일본육사에는 兵科에 따라 상무대, 진무대 등 별명이 따랐는데 同台란 대를 같이하는 일본육사출신들이란 의미다. 이 간화회는 일본 육사 출신의 경·정계인들이 조직한 일종의 연구·간담회였다. 한때 830여명이 회원으로 있었다.
그 가운데 200명쯤은 상장기업의 이사 경험자들이었다. 현역관료로선 최고직급인 사무차관도 늘 4∼5명쯤 되었다. 이들은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발표회 등을 갖고 있었다. 이 모임의 대표간사, 즉 회장역을 맡고 있는 이가 세지마 류조였다.

이 모임은 매년 1월 세지마 류조의 강연을 듣는 것으로 일을 시작한다. 이 年頭 강연은 ‘年頭교서’로 불릴 정도로 스케일이 컸다. 1985년 1월9일 산케이 회관에서 세지마는 ‘昭和 60년의 내외 정세전망, 일본의 정치와 경제’란 제목으로 연두강연을 한 바 있다.

*국가재편성 ‘임조’의 참모장

세지마가 韓日 양국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은 나카소네 총리가 그를 ‘國士(국사)’로 모시면서부터다. 나카소네는 1980년 스즈키 수상 밑에서 행정관리청 장관이 되자 임시행정조사위원회를 발족시켰다. ‘臨調(임조)’라고 약칭되는 이 조직은 戰後 일본의 청산이니, 국가 재편성이니, 제2의 開國이니 하는 거창한 모토를 내걸었다.
戰後 패전국의 입장에서 맥아더 사령부로부터 강요됐던 국가운영시스템을 일단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에 걸 맞는 체제와 국가운용의 基調를 확립한다는 것이 ‘臨調’의 목표가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赤字 재정을 고치고, 행정개혁을 통해서 방만해진 관료 조직의 군살을 빼고, 교육개혁을 통해서 국민교육의 방향을 재정립한다는 것이다. 패전국 체질, 패전국 콤플렉스를 청산함으로써 경제 규모에 걸 맞는 국가 체제를 갖추자는 원대한 계획이었다.
이 ‘臨調’의 참모장 구실을 한 이가 세지마 류조였다. 나카소네는 臨調를 발족시킬 때 일본재계의 실력자들을 동원하여 세지마의 참여를 간청했다고 한다. 삼고초려를 다해 모셔 온 세지마가 뒤에 ‘나카소네의 제갈량’이 되는 것이다. 과거의 행정개혁시도가 실패한 것은 財界가 협력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카소네는 일본財界의 천황이라고 불리는 도코 도시오(土光敏夫, 경단련 명예회장)를 ‘臨調’의 회장으로 영입하고 이 얼굴마담의 밑에 세지마를 참모장격의 ‘臨調’위원으로 붙여 놓음으로써 財界의 협력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스즈키 수상 퇴진 뒤 나카소네가 수상이 되면서 ‘臨調’는 더욱 활발하게 숱한 행정개선안을 정부에 내고, 정부는 이의 실천을 약속함으로써 국가재편성 작업이 급템포로 진행되었다. 공무원 增員 억제, 봉급 인상 억제, 일본전신·전화 공사의 민영화(완료), 國鐵(국철)의 분할·민영화가 ‘臨調’의 작품이었다. 옛날엔 별로 친밀하지 않았던 세지마와 나카소네를 이어준 사람은 5·17직후 세지마와 함께 한국을 방문한 바 있었던 도쿄 그룹의 고토 노보루(五島昇) 일본상공회의소 회장이었다고 한다.

나카소네는 고토와 동기생으로 도쿄 대학을 졸업했지만, 전쟁 중에는 해군경리장교였다. 이 해군 主計科(주계과)사관 출신들은 戰後에 일본의 금융·재정 분야에서 큰 활약을 했는데 ‘청년 看話會’란 단체를 만들었다. 고토는 육군출신이지만 이 看話會(간화회)에 관계했고, 나카소네와는 ‘너, 나’하는 처지였다. 세지마는 고토의 소개로 나카소네의 국가재편성 작업에 가담하여 政界와 財界를 연결하는 고리로서 핵심 역할을 하게 됐다고 한다.
1981년 12월엔 ‘臨調’의 핵심 위원 6명이 모인 자리에서 세지마가 ‘임조’의 기본 방향을 적은 메모를 발표했는데, 이것은 ‘세지마 書簡(서간)’으로 알려져 ‘臨調’의 방향과 기조가 됐다고 한다. 세지마는 1984년엔 임시교육심의회 위원으로 임명되어 교육개혁에서도 핵심 역할을 하였다.
일본의 일부 지식인들은, 세지마가 교육의 기조를 국가주의적으로 몰고 가려 한다고 비판하였다. 세지마도 “훌륭한 국제인이 되기 위해선 먼저 훌륭한 일본인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군에 있든 상사에 있든, 또는 서울에 있든 그의 정신세계는 항상 일본과 天皇에 붙박여 있었다.
세지마는 1979년 스리랑카 대통령 주최의 만찬회 자리에서 天皇에게 불려가 “세지마는 그 동안 나라를 위해 수고했다”는 칭찬을 받았다. 세지마는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감격의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군, 재벌, 대륙침략파 인맥과 닿아

韓日관계에 있어서 세지마가 관계한 유일한 단체는 韓日협력위원회다. 1980년대, 한국측 회장은 劉彰順(유창순) 전 총리, 일본측 회장은 기시 노부스케 전 수상이었다. 이 단체에 세지마는 타케시다, 아베 등 일본政界의 실력자들과 함께 상무이사(총원 10명)로 되어 있었고, 경제협력 분야를 맡았다.
세지마는 1982년과 1984년 두 차례 합동회의에 참석했다. 회의록을 보면 두 번 발언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1982년 3월 뉴 오다니 호텔(도쿄)에서 열린 회의에서 세지마는 일본의 행정개혁에 대해서 아주 간결하게 설명을 했다.
“일본은 석유 등 7억t의 원료를 해마다 수입하고, 이 원료에서 매년 7000만t의 상품을 생산한다. 사회복지·보장의 부담률이 높아지면 놀고먹으려는 사람이 늘게 되므로 주의해야 한다. 일본은 오일 쇼크 후 公債를 남발하여 財政상태를 위태롭게 했다. 公債금액이 예산의 2배나 되는 82억 엔이다. 재정적으로는 파탄국이다. 행정조직이란 그 속성상 그대로 두면 무한대로 增員이 된다. 행정개혁이 진행되면 현재 정부의 인허가 사항인 1만1000건의 업무 중 3분의 1은 감소시킬 수 있고 그에 따라 공무원도 많이 물러나야 할 것이다.”

한일협력위는 일본 측에선 기시 노부스케 계열의 인물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 세지마는 기시가 회장으로 있는 일본종합 연구소의 이사이기도 하다. 이 연구소는 國策연구회 및 韓日협력위와 공동으로 도쿄에서 동아시아 문제를 주제로 한 심포지엄도 열었다.
이 연구소는 기시係 親韓派 인사들이 만든 것이다. 이사장은 한일교류 4대 단체 중의 하나인 韓日친선협회의 일본 측 회장인 다나카 다쓰오 자민당 의원이었다. 그는 일본의 조슈(長州, 지금의 야마구치懸) 군벌의 최후실력자였던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수상 역임)의 아들로서 자유당 시절부터 李容九의 아들 (한국명 李碩圭, 일본명 오오히가시 구니오, 1986년 사망)을 내세워 韓日국교정상화 운동을 벌인 사람이다. 일본 상공회의소 회장 고토 노보루 등 일본 財界의 거물들도 이 연구소의 이사다.
세지마는 國策연구회의 이사이기도 하다. 國策연구회는 1950년대 말부터 1983년 사망 때까지 韓日간의 가장 굵직한 파이프 라인이었던 정치 브로커 야츠기가 만든 조직이다. 연구보다는 정치자금의 조달창구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 이 연구회도 일본 보수인맥의 한 거점이다.

*야츠기와 韓日협력위

세지마의 행동패턴을 좀 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선 야츠기(失次一夫)가 韓日협력위를 무대로 하여 벌여온 활동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세지마를 인맥과 사상적 혈통으로써 평가해보는 방법이기도 하다. 객관성의 유지를 위해서 1983년 10월 일본의 ‘국제정치’ 학회지에 실린 ‘日韓관계와 야츠기’란 논문(야마모토 츠요시 씀)의 요지를 소개한다.
<야츠기는 195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 사이 韓日관계의 가장 중요한 일본측 비공식접촉자였다. 이 기간에 그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던 것은 이케다 및 미키 수상 시절뿐이었다. 야츠기는 이케다와는 친했지만 이케다는 오오노 반보쿠(大野伴睦, 당시 자민당 부총재)에게 韓日교섭의 幕後공작을 맡겼고, 미키는 야츠기와 친하지 않았다. 한국측은 미키 시절 새로운 인맥을 구축할 필요성을 느껴 무임소장관 李秉禧(이병희)를 창구로 하여 韓日의원연맹을 만들었다.
야츠기는 자유당시절 주일한국대표부 柳泰夏(유태하)참사관과 알게 되면서 한일간의 비공식접촉자로 등장했다. 柳를 기시 수상에게 소개하고, 金東祚(김동조, 당시 외무부 정보국장)를 기시 수상과 극비리에 만나게 함으로써 한국측 창구를 만들고, 1958년 5월엔 기시 수상의 특사로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을 방문, 한일간의 관계개선에 대한 원칙적 합의를 얻어냈다.
야츠기가 한일관계에서 활약하는 무대는 1969년 2월에 창립된 한일협력위원회였다. 일본측 회장은 기시 노부스케였다. 기시는 일화(日華)협력위원회의 고문이기도 했고, 한일협력위와 日華협력위의 일본측 위원들은 많이 겹치고 있다. 이들의 특징은 자민당의 우파로서 反共色이 선명하다는 점이다. 한일협력위의 장점은 自國정부가 國內사정으로 해서 어떤 계획을 제안할 수 없을 때 상대국의 요청인 것처럼 위장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제2회 한일협력위 회의에서 야츠기는 ‘日韓장기경제협력試案’을 제출했다. ‘야츠기 試案’으로 알려진 이 안의 내용은 두 나라가 동일한 경제권을 형성한다는 것으로 제1단계로 한국의 포항 이남과 일본의 야마구치현, 기다큐슈 일대를 묶어서 협력경제권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실은 이것은 ‘한국안’이었다.
한국내에서 反日 분위기가 고조돼 있어 한국 측에서 제안을 못하고 張基榮(장기영) 상임위원이 야츠기에게 부탁하여 ‘야츠기 試案’으로서 대신 제출케 한 것이다. 이 안은 그 뒤 폐기되었다. 야츠기는 2회 협력위 회의 직후 이렇게 이야기했다.
“여자를 구슬린다든지 돈을 빈다든지 하는 문제는 연설로써는 해결할 수 없다. 별실에서 그런 문제를 처리했다. 3일간의 회의기간 중 큰 경제협력만 해도 5∼6건은 처리했을 것이다.”
별실에서 협상할 때 야츠기는 기시를 모시고 갔다.
“기시는 군자연하면서 모양 좋은 이야기만 하고, 곤란한 이야기는 내가 도맡아 했다”고 한다. 기시는 구체적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동석하는 것만으로도 야츠기의 의견에 동조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었다. 대륙붕석유의 韓日공동개발구상도 야츠기가 1970년 8월의 협력위에서 먼저 제안하고, 1972년 7월 金鍾泌(김종필) 총리를 만나 담판을 지은 것이다.
金大中(김대중)납치사건 때는 金총리를 만나 “국가는 권위와 신뢰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때에 따라선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 張作霖 폭살사건에서 천황이 그렇게 했듯, 한국도 일시적으로 권위가 손상되어도 신뢰를 잃어선 안 된다는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야츠기는 다음날 朴正熙(박정희) 대통령과 만나서 같은 이야기를 하려고 했으나 朴대통령이 면담 초장에 한국말로 “이 사건에 한국정부 관계자가 관련됐다면 엄중히 처벌하겠다.”고 말하여 그럴 필요가 없게 됐다. 귀국 즉시 야츠기는 다나카 수상에게 朴대통령의 뜻을 전해 1973년 11월2일 金鍾泌 총리가 일본에 건너가 다나카와 회담,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타결했다>

*있는 것은 國益 추구뿐

야마모토 츠요시는 이어서 ‘비공식접촉자로서 야츠기의 생각’을 이렇게 분석하고 있다.

<야츠기가 여러 번 이야기한 것이 두 가지 있었다.
첫째는, 국가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있는 것은 國益(국익)의 추구뿐이라는 얘기였다.
두 번째는, 어느 한 쪽에 너무 기울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비공식 접촉자로서 한국과 관계하는 자도 있어야 하고 북한과 통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며, 한국과 북한이 대립한다고 해서 양쪽의 비공식 접촉자끼리 대립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오히려 서로 정보를 교화,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야츠기는 대만에 대한 비공식 접촉자이면서도 중공과의 비공식 접촉자와 자주 만나 정보를 교환하기도 했다. 북한에 대한 비공식 접촉자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야츠기는 재일조총련 부의장 金炳植(김병식)과도 자주 만나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일본財界의 북한방문단 조직을 꾀했다. 1977년엔 親韓派와 親북한파를 각각 서울과 평양으로 보내 양쪽 수뇌와 면담케 한다는 구상을 추진했다. 한국측 실력자를 親북한파 우츠노미야 도쿠마 의원에게 소개시켜 주기도 했으나 이 계획은 한국정부의 거부로 성사되지 않았다>

세지마의 密使역할은 야츠기가 84세의 나이로 1983년 3월에 사망한 무렵부터 더욱 활발해졌다. 야츠기가 죽은 뒤에는 세지마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세지마는 야츠기 및 기시와는 오래 전부터 밀접한 관계이고, 야츠기가 죽자 기시, 나카소네란 정치 지휘관 아래서 참모장 역할을 하면서 對韓(대한)활동에 임하였다. 朴정권 아래선 여러 갈래의 韓日막후 루트가 공존했으나 세지마 등장 이후엔 세지마 창구로 一元化 된 느낌마저 있었다. 야츠기와 세지마는 인격이나 스타일, 그리고 경력이 판이하다.
야츠기는 출신성분도 안개에 가려져 있고, 學歷은 國卒이며, ‘昭和의 괴물’이란 별명을 들으면서 政界의 뒤편에서 국수주의자들과 어울려 정치낭인 역할을 하며 지내온 우익적 인물이다. 戰後엔 미군에 의해 공직에서 추방됐었다. 우익을 심하게 비판하는 사람은 우익활동을 밥벌이 수단으로 한다고 하여 ‘생활우익’이라고 하는데 야츠기도 그런 욕을 먹을 때가 있었다.
세지마는 모든 면에서 모범생이며, 야츠기처럼 흑막적인 면이 없는 陽性이고, 일본인의 美德을 한 몸에 아우르고 있는 듯하다. 세지마의 등장 이후 韓日관계의 막후가 돈 문제로부터 깨끗해졌고 채널도 거의 공식화됐다는 평도 받았다.

일본역사학자 오오에(大江志乃夫)는 세지마를 혹평하는 몇 안 되는 일본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 번도 일본軍國주의의 전쟁 책임을 반성하지 않았다. 그는 수상의 참모기능을 강화하여 대통령적 수상으로 키우려 획책하고 있다. 일본을 전쟁으로 끌고 간 옛 참모본부의 수법을 재현하고 있다. 한 번도 전쟁 중의 자기 책임을 시인한 적이 없는 세지마는 국가지도를 말할 자격이 없다.”

*나카소네의 평: "선생과 나는 합동작전을 하였습니다."

세지마의 한국측 창구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은 세지마를 존경하는 발언을 서슴없이 하였다. 세지마의 경륜과 겸손, 특히 그의 청렴결백함이 주로 칭송의 대상이었다. ‘결백하므로 권위가 선다’는 말은 세지마 에게도 해당되는 모양이었다. 일본의 언론도 세지마에 대해서만은 거의 흠을 잡고 있지 않다. 국사(國士)란 말을 정관사처럼 붙이며 그를 살아 있는 神話로 만들었다. 이 글을 쓰면서 참고로 한 일본 언론의 보도 가운데 그에 대한 유일한 비난은 ‘너무 낭만이 없다’는 지적이었다. 權翊鉉 고문은 세지마가 단순히 나카소네 개인의 참모가 아니란 점을 강조했다.
메이지 유신에서 兩大 주동 세력은 조슈번(야마구치현)과 사쓰마번(지금의 기고시마)이었다. 유신이 성공한 뒤 조슈 인맥은 육군, 사쓰마 인맥은 해군과 경찰을 장악했다. 육군의 뒷받침을 받는 조슈 출신 수상들이 잇따라 나왔다. 韓日합병의 길을 연 이토 히로부미, 일본군벌의 창시자 야마가다 아리토모, 총독시절 조선을 무단통치한 데라우치, 만주침략의 길을 튼 다나카 기이치(다나까 다츠오의 아버지)가 戰前(전전)의 조슈 출신 총리들이다.
전후엔 韓日회담의 길을 연 기시(그는 1936∼39년 사이 만주국 산업부차관으로 만주경영의 실질적 책임자였다)와 그의 친동생으로서 그 회담을 타결 지은 사토 수상이 조슈출신이었다.
최근의 아베를 포함, 모두 8명의 총리가 조슈로부터 배출됐는데, 이들은 한국과 만주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는 특징이 있었다. 그들의 고향이 한국과 지리적으로 가깝다는(시모노세키가 야마구치현에 속함)것도 그런 성향의 한 이유이겠다. 반도 및 대륙 지향적인 조슈 인맥이 일본육사인맥, 재벌인맥과 함께 열렬한 천황주의자 세지마의 뒤를 바쳤다.

*최후의 密使

세지마는 盧泰愚 대통령 시절에도 한일간의 막후 密使 역할을 하였다. 盧씨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직후인 1988년 1월11일 그는 朴泰俊 포항제철 회장의 초대로 서울에 갔다. 롯뎃호텔에서 세 시간 동안, 盧泰愚 당선자를 만났다. 세지마는 나카소네 전 총리와 타케시다 총리의 메시지를 전하였다. 타케시다 총리는 88 서울 올림픽의 성공을 위한 전폭적인 협력을 약속하고 盧씨가 추진하는 중국과의 관계改善(개선)에도 협력할 뜻을 비쳤다. 盧 당선자는 "全斗煥-나카소네 체제 때 확립된 韓日양국의 관계를 타케시다 총리와 손을 잡고 발전시켜나가고싶다"고 말하였다.

세지마는 이 자리에서 盧 당선자에게 내각제로 개헌할 것을 충고하였다고 자신의 회상록에서 적고 있다.
"5년에 한번 全국민을 동원하는 대통령 직접 선거는 국가의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이 아닌지 의문이 든다. 지역갈등으로 연결되는 듯하다. 기회를 보아서 내각제로 개헌하는 것이 어떨까 한다"

세지마는 다음날엔 청와대로 全斗煥 대통령을 방문하였다. 대통령은 두 아들 부부와 함께 세지마를 맞아주었다고 한다. 全 대통령은 '퇴임후의 자세'에 대하여 助言을 구하였다고 한다. 잠시 머뭇한 세지마는 "사실은 나카소네 총리도 퇴임을 앞두고 같은 부탁을 하여 지금 하는 것과 비슷한 助言을 한 적이 있다"면서 입을 뗐다.

"오는 2월25일 대툥령 교대까지는 최후의 순간까지 국가의 최고책임자로서 책임을 다하여주십시오. 두번째는 7년간 실시한 정책을 정리하여 다음 대통령에게 인계하십시오. 국가는 영원하고 정책은 계속성이 중요합니다. 세번째는 좋은 후계자를 만드는 것이 前任者의 도덕적 의무인데, 盧泰愚 후보의 당선으로 이것은 잘 되었습니다. 네번째는 퇴임 후의 자세인데, 이게 잘못 되면 앞에 말한 1, 2, 3이 아무리 잘 되어도 有終의 美를 거두기 어렵습니다. 퇴임후는 차기 대통령을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는 것이 국가에 대한 責務(책무)라고 생각합니다."

세지마씨가 韓日양국의 頂上 사이에서 마지막 密使 역할을 한 것은 1990년 5월이었다. 한국측은 盧 대통령의 訪日을 앞두고 과거사에 대한 天皇의 확실한 사과를 요구하였다. 일본측은 난색을 보였다. 당시 총리 가이후(海部俊樹)는 세지마를 공관으로 초대하여 助言을 구하였다. 세지마는 "1984년 全斗煥 대통령이 訪日하였을 때 昭和천황이 한 사과 이상으로 나갈 필요는 없고 표현상의 연구를 하는 게 좋겠다. 국정책임자인 총리가 명확하게 사과하면 된다. 단, 그 경우에도 日韓倂合을 '침략'이라든지 '식민지화'라고 定義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감안할 때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냈다.

세지마는 가이후 총리의 요청에 따라 한국을 방문, 盧 대통령에게 이런 사정을 설명하기로 하였다. 한국측은 세지마의 방한을 즉각 수락하여 盧 대통령의 訪日 이틀 전인 1990년 5월22일 오후 청와대 방문이 이뤄졌다. 세지마는 盧 대통령에게 한 시간 40분 가량 일본의 사정을 설명하였다. 盧 대통령은 헤어질 때 "이번 訪日은 역사적 의미가 있으므로 꼭 성공시키고 싶다"고 말하였다.

5월24일 밤 궁중만찬회에서 아키히토 天皇은 "昭和천황께서 '금세기의 一時期에 양국간에 불행한 과거가 존재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유감이므로 다시는 되풀이되어선 안될 것이다'고 하신 말씀을 떠올리면서, 우리나라가 만든 이 불행한 시기에 貴國의 사람들이 맛보았던 고통을 생각하면서, 나는 痛惜의 念을 금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盧 대통령의 국회연설도 好評을 받았다.

그가 80세 생일을 맞았을 때 나카소네 전 총리는 이런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는 서로 운명을 견디면서 일본국과 함께 榮辱을 나눴습니다. 나는 선생에게, 특히 日韓교섭, 행정개혁, 國鐵, 전신전화, 전매공사의 민영화로 큰 신세를 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총리 재임중 정권의 운용에 대하여, 면밀하고, 적절한 助言을 작전지도요령의 형태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의 정권은 戰後期의 新일본 건설, 戰後정치의 총결산을 위한 선생과 나의 공동작품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계속하여 선생과 우리들의 합동작전계획을 실천하고 싶습니다. 지도를 바랍니다>

*참모의 철학

세지마는 회상록('幾山河')에서 참모의 세 가지 마음자세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첫째, 참모는 지휘관이 정확하게 일을 할 수 있도록 보좌하는 자리이다. 둘째, 참모는 바쁜 지휘관의 중압감을 덜어주어 그가 平常心을 갖고 판단할 수 있도록 보좌하는 자리이다. 셋째, 참모는 비밀을 엄수하여야 한다>

참모가 해야 하는 세 가지 일에 대하여는 이렇게 정리하였다.
<1. 항상 內外의 정보를 수집하여 實情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2. 정보에 기초하여 넓은 시야를 가지고 지휘관에 대하여 適時에 策案을 건의할 수 있어야 한다. 복수의 案을 건의할 때는 올바른 판단을 돕도록 자료를 준비한다.
3. 지휘관이 결심한 事案이 잘 집행되도록 보좌하고 事後 점검을 통하여 명령대로 시행되도록 관리한다>

세지마는 자신이 사회에 나와서 한 일도 다 군대에서 배운 참모의 자세를 실천한 것뿐이라고 말하였다. 세지마는 2007년에 96세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