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에 불황이란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이 유령은 어둠을 좋아하여 대낮같이 밝은 중국에는 얼씬도 않고 불빛 희미하거나 칠흑같이 어두운 세계 곳곳에는 수시로 출몰한다.

불황에 대한 생각은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시장경제에서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 겪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시장경제에서도 어쩔 수 있고 피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앞의 입장은 전통적인 사고 방식이고 뒤의 것은 이른바 케인즈식 사고 방식이다.

'소비가 미덕'이라는 말은 불황 때에 금과옥조처럼 되뇌는 말로 바로 케인즈가 퍼뜨린 말이다. 적절한 소비가 뒷받침이 되면 불황은 능히 어렵지 않게 극복할 수 있다는 주장이 이 말 속에 들어있다. 정부가 앞장서서 소비를 창출하는 것이 장려된다. 일자리를 만들어 소비자의 주머니도 두둑하게 해 준다.

이 이론에 충실하여 진작부터 부동산과 주식의 거품이 빠지면서 급격히 위축된 소비 시장을 활성화하려고, 일본은 90년대에 정부가 GDP의 100%가 넘는 국가 부채를 지면서 경기 진작을 하려고 갖은 애를 다 썼다. 또한 금리를 계속 내려서 이른바 제로 금리가 되었다. 그러나 소비는 늘어나지 않았고 투자도 지지부진했다. 유동성 위기에 빠진 것이다. 국민들은 더욱 허리를 졸랐다.

이를 비웃으며 고공 비행을 하던 90년대의 미국 경제도 새 천 년과 더불어 IT 산업의 거품이 빠지면서 주식이 답보하고 투자가 시들해졌다. 마침내 미국을 이끌던 기관차인 소비가 헛김을 빼기 시작했다. 미국 경제 대통령 그린스펀은 즉시 쌍권총을 빼들었다. 오른손, 왼손 연이어 금리란 총을 산 아래로 발사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금리가 2%대에 진입했다. 일본과 거의 비슷해진 것이다. 그러나 소비는 오히려 위축되기 시작했다. 조심스레 유동성 위기란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소비감소 →투자위축 →실업증가 →금리인하 →소비감소.

이론에 따르면 금리인하가 투자활성화와 소비증가로 이어져야 하는데, 현실은 정반대로 나타난다. 왜 그럴까? 소비자 입장에선 너무도 뻔한 답이다. 미래가 불안하기 때문이다. 나부터 살아야 한다. 실업 상태에서 저축이 없으면 그 날로 거리에 나앉을 수밖에 없다. 제로 금리라도 이자 한 푼 안 늘더라도 내 통장에 돈이 없으면 무슨 비참한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몸무게가 70kg이 정상인 사람이 100kg가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이 사람은 30kg은 더 빼야 정상이다. 40kg이 빠져도 전혀 이상 없다.
몸무게가 70kg이 정상인 사람이 40kg이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이 사람은 30kg은 더 쪄야 정상이다. 40kg 더 쪄도 전혀 이상 없다.
현재 일본과 미국, EU를 비롯한 선진국은 바로 70kg이 정상인 사람이 100kg이 된 사람과 같다. 이들이 5kg 빠져서 95kg이 되었다고 해서, 식량을 덜 소비해서 농민이 어렵게 되었다고 식량을 더 소비하라고, 빨리 5kg 더 찌라고 15kg 더 찌라고 아무리 달래도 말을 잘 들을 리 없다. 식탐이 대단한 사람 외에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오히려 자기 아랫배를 보고는 충격을 받아 차제에 25kg을 더 빼려고 작심할 것이다.

케인즈의 이론은 70kg이 정상인 사람이 먹고 싶어도 식량 살 돈이 없어서 못 먹어 40kg이 되었을 때에 적합한 것이다. 현재의 배불뚝이 선진국에는 오히려 해가 되는 이론이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현재 선진국은 지나친 물질의 풍요로 물질의 귀함을 전혀 실감하지 못하고 색다른 것만 찾는 부잣집 아이와 같다. 백만 원짜리 장난감을 내던지고 천만 원짜리 장난감을 당장 사 달라고 떼쓰는 아이랑 비슷하다. 불행한 아이다. 이런 아이가 세뱃돈으로 난생 처음 받은 거금 만 원하고도 천 원으로 무엇을 사야 다 쓸지 몰라 고민하는 가난한 집 아이의 행복을 알 리 없다.

당장은 괴롭겠지만, 정부는 100kg의 사람이 70kg이 되도록 오히려 도와 주어야 할 것이다. 값비싼 장난감으로 아이를 버려 놓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자연과 인간의 소중함, 아름다움을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게 해 주어야 할 것이다.

현재 선진국의 어려운 경제 상황은 배부른 소리다. 군살을 더 빼야 한다. 적절한 다이어트가 필요하다. 경기 부양책, 소비 진작책을 지양해야 할 것이다. 스스로 군살을 빼려고 하는 걸 정부가 나서서 억지로 막을 필요가 없다. 약간의 고통은 감수할 줄 알아야 한다.

한국도 실질적으로는 물질적 풍요가 선진국 못지 않다. 따라서 무리한 소비 진작책이 필요 없다. 외환 위기 직후에는 급격한 소비 위축을 막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지금은 소비 위축을 약간 방조할 필요가 있는데, 소비의 불을 되살리려 애쓴다. 지금은 군살을 빼야 한다(workout). 그래야 몇 년 후 경제가 탄탄대로에 올라선다.

서양 이론을 달달 왼 또는 귀동냥한 높은 분들 또는 책상물림들이 늘 한 발 늦은 또는 틀린 경제 정책을 쓰고 있는 듯하다.

(2001. 11.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