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루소의 ‘고귀한 야만인’은 낭만적 虛構이다

윌리암 골딩의 소설은 반인간적(antihuman)이 아니고 反루소적(anti-Rousseau)적이다. ‘파리大王’은 인간의 본성을 반인간적으로 그리고 있지는 않다. 그것은 인간은 고귀하고 순결한 존재이기 때문에 반드시 발전을 이룰 것이라는 루소의 낭만주의에 오염된 인간을 그리고 있다.

‘파리大王’은 루소의 사회철학에 기원하는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선입관과 편견으로 장식된 이야기로 시작한다. 소설의 첫 장에서 純眞無垢(순진무구)의 상징인 아이들의 무리가 등장한다. 그들은 지상낙원이며 루소의 ‘고귀한 야만인’(noble savage)의 거주지인 열대의 무인도에 놓여진다.

그러나 이들 아이들은 에덴동산의 아담과 같은 인물이 아니며 純眞無垢(순진무구)하지도 않다. 아이들은 각기 나름대로 뱀의 속성과 영향을 나타낸다. 이것은 랄프가 뱀의 형상이 있는 혁대의 버클을 푸는 것으로 상징된다. 여기에 소설 전체를 貫流(관류)하는 가공스런 아이러니가 있다. 낭만적인 사람은 문명의 상징인 옷을 벗기만 하면 자신에게서 모든 악을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표면상으로는 牧歌的(목가적)인 이 공동체에는 네 명의 주요 인물이 등장한다. 랄프는 품위 있고 분별이 있는 국회의원을 상징한다. 그는 또한 민주적 정부라는 추상적 槪念(개념)을 表象(표상)하는 인물이다. 잭은 독재자이면서 독재의 개념을 상징한다. 피기는 지식인으로 계몽사상 및 과학적 방법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사이먼은 신비주의자이고 시인이며 종교적 신앙을 상징하는 그리스도적 인물이다.

랄프가 소유하고 있는 상징적 가치-민주적 절차라는 추상적인 개념-는 독자에게 하나의 挑戰(도전)으로서 제시된다. 만약에 민주적 절차가 全 역사를 통해서 인류가 만들어 낸 최선의 통치이념이라면 왜 이것이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에서 항상 적용되지 않는가?

지상 낙원의 아이들 모두가 왜 피기의 합리적 과학주의와 사이먼의 통찰을 수용하지 않는가? 모든 장소의 모든 사람이 모든 시대에서 민주적 통치절차와 합리주의적 계몽사상을 수용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이러한 의문에 대해서 골딩은 ‘파리大王’에서 부정적인 해답을 제시한다. 골딩은 인간을 타락한 존재로 간주하지는 않지만 완벽한 존재도 아니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그는 인간을 선한 의지의 존재로 가정하는 루소적인 神話(신화)를 냉소한다.

‘파리大王’은 루소의 사회계약 이론을 실험에 부치는 寓話(우화)이다. 골딩은 열대무인도에 순진무구한 아이들을 등장시킴으로써 루소가 인간의 尊嚴性(존엄성)을 회복하는 데 최선의 방책이라고 주장하는 문명 이전의 원시상태를 설정한다.

그리고 나서는 인간은 천성적으로 착하기는커녕 문명의 탓으로 간주할 수 없는 어떤 형태의 缺陷(결함, defect)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루소의 사회철학은 실험에 실패한 것이다.

잭이라는 인물을 통해 골딩은 인간진보에 대한 낭만적인 신화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잭은 아이들에게 고기를 먹이려는 악의 없는 동기에서 사냥을 시작하지만 열대의 지상낙원을 살인적인 地獄(지옥)으로 전락시키는 장본인이 된다.

이것은 동기가 아무리 이타적일지라도 진보에 대한 노력이 수단이나 방법에 있어 잘못된 사상이나 사고에서 진행된다면 어두움의 세력이 진보의 진로를 장악하고, 인간성 속에 있는 선한 의지도 파멸적인 목적으로 이끌게 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原罪(원죄)는 인간성에 내재하는 악을 의미한다

국회의원 랄프와 독재자 잭 그리고 신비주의자겸 시인인 사이먼, 이 세 사람 중에서 사이먼이 현실주의자이다. 사이먼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直視(직시)하고 수용한다. 종교적인 인물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한다는 것은 국회의원과 독재자의 제한된 인식능력에 대한 하나의 비판적 논평이 된다.

사이먼은 다른 아이들과 떨어져 나와서 존재의 신비를 熟考(숙고)하는 신비주의자이다. 사이먼은 다른 아이들이 집짓기를 포기한 뒤에도 집짓기를 계속하고 꼬마들을 먹이며 현실의 역겨운 악취 속에도 최선을 다하고 절망을 부추기는 짐승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

사이먼이 짐승과 만나는 것은 예수의 겟세마네를 연상시킨다. 그는 악과 대면하고 악의 실체를 인식하고 악과의 대면에서 오는 苦惱(고뇌)와 공포 속에서도 악에게 패배 당하거나 위협을 받지도 않는다. 그는 의식을 회복한 직후에 산으로 올라가서 낙하산 줄에 묶여 있는 죽은 조종사를 해방한다.

그는 ‘전락한 인간’(fallen man)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산에 올라가는 것이다. 사이먼은 짐승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산을 내려가지만 아이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가 상징하는 예수처럼 사이먼은 종교적 의식-악마적인 돼지사냥의식-의 渦中(와중)에 살해된다.

그의 죽음은 거대한 폭풍이 섬을 강타하는 동안에 일어난다. 사이먼이 실제로 죽은 후에야 죽은 조종사는 해방되어 신비의 상징인 바다로 떠나간다. 사이먼의 몸은 ‘불의 눈과 달빛의 몸을 가진 생물’에 둘러싸이는 영광의 시간을 가진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燐光(인광)으로 빛을 내면서 사이먼은 부드럽게 바다로 떠내려간다.

주인공이 물을 통해 신의 위치로 聖化(성화)되는 것-이것은 復活(부활)의 중심사상(motif)이다. 사이먼의 죽음과 부활은 인간의 구원과 부활을 위해서는 랄프의 이성주의나 잭의 공격 본능만으로는 부족하며 존재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사이먼의 종교적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사이먼을 신화적인 관점에서 조명해 보면 그의 구원자의 역할이 더욱더 분명해진다. “사이먼은 짐승의 입 속에 들어가 있었다. 그는 쓰러져 의식을 잃는다.”는 것은 고대의 탐구신화를 연상시킨다. 큰 뱀이나 용 또는 고래 같은 거대한 짐승에게 잡아먹힌 주인공은 짐승의 뱃속에서 죽음의 의식을 치른다.

짐승의 배는 저승을 의미하고 저승은 악을 상징한다. 지옥에서 죽음의 과정을 거치면서 災殃(재앙)으로 강타 당한 사회를 치유해줄 靈藥(영약)을 발견하게 된 주인공은 이승의 세계로 되돌아온다.

그리스도는 무덤과 지옥으로 下降(하강)한 후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 죽음에서 부활하여 세상으로 돌아온다. 악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악과 죽음으로 대면한 자가 악으로 죽어 가는 사회를 구원하게 되는 것이다.

‘파리大王’은 인간은 천성적으로 선하다는 루소의 사상을 서구세계가 포기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인간은 선한 존재라는 사상은 인간이 완벽하다는 주장을 낳게 마련이며 이것은 재앙을 가져올 수도 있다. 인간이 자신의 불완전함을 통찰하지 못하고 자신의 이성이나 본능만을 과신하게 되면 전쟁이나 혁명을 일으켜 수천만 명을 죽음의 지옥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골딩은 인간 자신의 본성에 대한 진실을 가르치기를 원한다. 고도로 복잡하고 정교한 상징을 통해서 그는 현대인에게 인간의 原罪(원죄)에 대해서 상기시켜 준다. 원죄는 인간성에 내재하는 악을 의미한다. 악이 선으로 포장하여 전쟁이나 혁명을 일삼으면 인간은 참혹한 재앙을 自招(자초)하게 된다.

골딩은 ‘파리大王’의 주제를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주제는 우리 사회의 결함의 원인은 인간성의 결함이라는 사실을 추적하려는 시도이다. 사회건설은 정치제도가 아무리 논리적이고 훌륭할지라도 정치 제도가 아니라 인간 개개인의 윤리성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끝)


(다음 편부터는 로렌스의 ‘연애하는 여인들’(Women in Love) 해설편이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