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엔 조갑제씨의 주장이야말로 견강부회이며, 친일적 발언이라고 본다. 국가의 기본 요건으로 영토, 국민, 주권이 있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얼핏 그럴듯 해 보이지만, 따져보면 심각한 오류가 있다. 1910년 국치 이래 1945년 동안 어디 영토와 국민이 없었나? 수천년 우리 민족이 대대로 터전을 살아온 한반도 땅이 어디 하늘에라도 증발했나? 바다에라도 침몰했나? 멀쩡히 그대로 있었다. 그럼 그 땅은 사람이 살지 않은 유령의 땅이었나? 멀쩡히 삼천만 백성이 살고 있었다. 다만, 일본의 불법적 한반도 병합(그래서 우리는 그 시기를 일제강점기라고 부른다)으로 일시 주권을 빼앗겼을 뿐이다. 그리고 임시정부의 통치권이 실효적으로 미치지 못했을 따름이다.

그래서 임시정부의 이승만, 김구 등 선열들이 나라 수립을 선포하고 국권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던가? 만일 조씨의 주장대로 통치권이 실효적으로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국가로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우리는 일본의 한국 통치를 합법적이고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는 결과, 다시말해 우리가 '대일본제국'의 '충량한 신민'이었음을 인정해야 하는 논리적 귀결점을 낳는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 시기를 그냥 '아무 것도 없는 민족사 공백의 시기'라고 부르나? 멀쩡한 국민들이 이 땅위에서 숨 쉬고 살아 있었는데, 2000년 동안 세계 각지를 떠돌던 유대인들과 똑같이 망국의 백성, 혹은 한반도를
유령의 땅이라고 불러야 하나? 멀쩡하게 백성들이 살아서 생업을 유지하고 있던 시기를 역사에 아예 없었던 것 처럼 진공상태로 만들어 놓아야 직성이 풀리나? 이 또한 민족사적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만약, 일본의 통치를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지도 않고 망국의 시기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그 시기를 도대체 뭐라고 불러야 하나? 한번 대답해 주기를 바란다. (일본으로부터 실효적인 통치권을 되찾기 위한 선열의 노력을 분리주의적인 반란이냐고 되묻는 조갑제 씨의 질문은 그야말로 친일적이다. 임시정부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당시 한반도엔 일본제국주의 말고 통치권을 가진 곳이 없지 않은가. 그렇게 되면 일제의 한국강점이 합법적이다 뭐 이런 이야기가 되는 거 아닌가?)

나치가 프랑스의 대부분을 무력 점령했을 때 비시 괴뢰정부에 반대해 영국에서 드골이 선포한 임시정부를 프랑스인들은 법통이 아니라고 부인하나? 2차대전이 끝났을 때 드골은 개선장군 처럼 귀환했던 것을 모르는가?

그렇다면,.일제의 한국 감정의 불법성을 단호하게 내세우기 위해서라도 임시정부를 국가 법통으로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조갑제 씨 등 뉴라이트 인사들이 임시정부의 위상을 깎아내리려는 까닭이야 자명하다.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지만, 그 이후 임시정부의 실질적인 수반은 김구라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 그래서 이승만이 실질적으로 정권을 잡은 1948년을 국가 수립일로 강변하겠지. 나아가, 민족의 역량이 아닌 미국의 시헤 때문에 독립이 됐다고 머리를 조아리고 싶은 것이겠지. 글쎄, 친일도 좋고 친미도 좋은데, 그 바람에 우리 민족은 일본제국주의의 신민, 미국 등의 신탁통치 아래 있던 망국의 백성으로 격하돼 버린다. 없는 민족사도 세워서 복원시켜야 할 판에 왜 이렇게 우리는 있는 투쟁의 자취, 민족사의 핵심적 가치를 스스로 깎아내리고 우리의 선인들을 외국의 노예로 자꾸 만들려는가? 각성해야 한다.

나라를 연방제로 끌고 갈려고 그러는데, 이자를 빨리 축출하는 것이 좋겠군요. 그대로 좌시하기에는 지나치게 악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