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뽕 지하제국 탐험(제 3부) - 폭력과 광기의 지옥기행(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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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黑幕) 뒤의 세 거두(巨頭)
  
  오늘의 일본 야쿠자의 실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기서 잠깐 세 거두의 생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 정계의 흑막 고다마 요시오(兒玉譽士夫), 산구조(山口組)의 우두머리였다가 4년 전 사망한 다오까(田岡一雄), 도쿄의 「밤의 경찰서장」 마찌이(町井久之)가 그들이다. 마찌이는 재일 동포다. 록히드 사건의 주범으로 유명해진 고다마는 폭력단 계보도에서 꼭대기에 자리잡는다. 그는 전후의 일본 정계를 요리해 온 실력자였고 하부 조직 없이도 폭력단 세계를 조종해 온 대부(代父)였다. 우익 정치 세력과 폭력단을 연결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그였다.
  
  고다마는 1941년 이른바 아옥기관(兒玉機關)을 창설, 막후 실력자로서의 발판을 마련했다. 제국(帝國)해군의 물자조달 및 정보 수집기관인 아옥기관은 상해(上海)에 본부를 두고 전성기엔 2천명의 직원을 부렸다. 이 기관은 아편 밀매로 방대한 자금을 마련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으나 정확한 활동 상황은 지금도 미스터리다. 태평양전쟁이 끝났을 때 아옥기관은 중국에 약 30억엔어치의 자산을 갖고 있었다. 순사 월급이 60엔 하던 시절의 30억 엔이었다. 고다마는 일부 재산을 다이어먼드 등 귀금속으로 바꿔 일본으로 갖고 오는 데 성공했다. 이 귀금속을 현금화하여 고다마는 우익 인물들에게 정치 자금으로 제공했다. 그는 요시다 정권에 대항하는 하도야마(鳩山一郞) 계열을 지원했다. 자민당 정권에 고다마가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했는가 하는 것은 1960년의 「정권 양도서 사건」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그해 1월16일 기시(岸信介) 수상은 사또(佐藤榮作) 고오노(河野一郞) 오오노(大野伴睦) 등 자민당내 세 거두와 회담, 공동 서약서를 작성했다. 「……고다마 군(君) 입회하에 협의한 건에 대해서는 협력 일치, 실현을 기한다뭅?짤막한 서약서였다. 「입회하에 협의한 건」은 기시가 후계 총재로 오오노를 지명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서약은 실현되지는 않았으나 고다마가 이런 수뇌 회담을 주선, 스스로 입회 증인되었다는 것은 아무런 조직을 갖지 않으면서도 정권의 사활 문제에까지 개입하고 있는 그의 조종술을 여실히 증명했다. 고다마는 정계, 재계의 갈등·분쟁에 빠짐없이 개입, 막후 조정자의 구실을 다했다. 큰 정치의 의혹 사건에도 고다마는 빠지지 않았다.
  
  1960년의 「안보파동」은 좌익 학생집단에 대항할 우익의 물리력으로 야쿠자 조직을 동원하는 결과를 빚었다. 야쿠자를 우익의 전위 행동 부대로 활용하는 데 있어서도 고다마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그들은 우익의 이데올로기에서 행동의 정당화를 구하려 했다. 우익과 야쿠자는 물리력과 이데올로기를 교환하면서 서로 깍지를 낀 것이었다. 고다마는 나이가 열 살쯤 아래인 마찌이와는 특별히 친숙한 사이가 되었다. 마찌이는 도쿄의 가장 큰 조직 동성회(東聲會)회장이었다. 동성회는 지금은 해산되었지만 60년대에는 1천5백여명의 단원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1964년 고다마는 마찌이와 산구조 보스 다오까를 의형제로 결연시키는 중매 역할을 했다.
  
  일본 최대 야쿠자 단체 산구조는 당시 「나와바리」(관할구역)를 확장하는 데 열중, 본거지인 고오베에서부터 북해도(北海道)까지 곳곳에서 「지하(地下) 북벌전쟁」을 일으켜 중소 폭력단들을 흡수해 가고 있었다. 고다마는 태풍처럼 팽창하는 산구조가 도쿄에 진출, 유혈 쟁투를 벌이는 것을 막으려고 둘을 손잡게 했다. 이 결연식에선 다오까가 형(兄), 마찌이가 제(弟)가 되었다. 고다마는 전국 시대의 2대 거물을 화친시킨 바탕 위에서 동아동우회(東亞는同友會)라는 연합 단체를 설립, 한 때 야쿠자 세계의 천하 통일을 꾀하기도 했다. 그는 관동(關東)지방의 대조직 금정회(錦政會)의 고문으로도 있었다.
  
  마찌이는 도쿄의 육본목(六本木)에 동아상호기업(東亞相互企業)을 설립, 기업인으로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1961년 이 회사 빌딩 준공식엔 기시 전 수상을 비롯한 정제계 거물, 야구 선수 나가시마, 가네다 등 스포츠 스타 등이 참석, 그의 폭넓은 인맥을 과시했다. 마찌이는 회장으로 고다마를 모셨다. 회장실은 40평이나 되는 호화판이었다. 응접소퍼 한 세트가 3천만원짜리였다고 한다. 고다마-마찌이 인맥은 한·일 국교 정상화 회담에서도 우익을 대표, 막후에서 상당한 기여를 했다. 고다마는 한·일 친선에 공헌했다하여 우리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코리언 커넥션의 수원지(水源池)
  
  코리언 커넥션의 뿌리를 캐는 것도 이번 취재의 중요한 목표였다. 다무라씨의 배경 설명은 설득력이 상당히 있었다. 즉, 제1차 히로뽕 시대에 재일동포가 많이 관여했다는 것이다. 1954년의 경우 검거된 히로뽕 사범 가운데 한국인은 14%(일본내 재일동포는 0.5%)였다. 밀조범 가운데 55%, 밀매범 가운데 21%가 한국인이었다. 정은종(鄭銀宗)씨등 많은 한국인 밀조 기술자들이 한국으로 달아나 밀조 기술을 퍼뜨렸다. 폭력단 세계에서도 한국인은 많다. 민족 차별 문제를 자극할까 봐 발표는 못하지만 적어도 6∼7%는 한국인일 것이다. 기자가 뒤에 오오사까, 고오베 경찰에서 확인한 후 두 지역 폭력단원 중 한국인은 10%쯤, 히로시마는 5%였다. 이들은 친척이 있는 한국에 자주 왕래할 수 있어 히로뽕 밀수입 루트를 구축하는 데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는 것이 다무라씨의 얘기다.
  
  1982년의 경우, 일본에서 붙들린 히로뽕 사범 가운데 약3.1% 7백24명이 한국인(재일 동포 포함)이었다. 밀수입 사범 43명 가운데 13명이 한국인이었으며, 이해 오오사까 출입국 관리소에서 추방한 외국인 마약·히로뽕 사범 35명 가운데 30명이 한국인이었다. 결국 코리언 커넥션의 수원지는 폭력단내 한국인과도 이어진다는 이야기가 된다. 폭력단 세계에 한국인이 많이 진출한 것은 물론 나쁜 일이었지만 그런 환경에 대한 이해는 필요할 것 같다. 전후 많은 재일 동포들이 그 혼란기에도 마찌이의 이름을 댐으로써 일본 폭력단으로부터 봉변을 면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얘기다.
  
  오오사까에서는 그 무렵 부산사람인 양원석(梁元錫(일본이름 야나가와 지로)이 유천조(柳川組)를 설립했다. 재일동포들을 폭력배들로부터 보호한다는 목적이 있었다고 한다. 전후 일본의 치안이 경찰력의 약화로 혼란에 빠지자 전국적으로 제3국인(한국, 중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패싸움이 자주 벌어졌다. 암시장의 지배권에서부터 교육제도 문제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이유가 분쟁의 불씨가 되었다. 이 때 제3국인으로부터 일본인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서 많은 폭력단이 생겨났고, 그런 일본인 폭력단으로부터 한국인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에서 많은 한국인계 단체가 일어났다.
  
  치안이 안정되자 이들 단체는 설립 목적과는 달리 모두 범죄단체화해 버렸다. 유천조는 한국인을 자주 습격했던 산구조 밑에 들어가 전국 제패 전쟁의 선봉부대 구실을 해 한때는 「살인 집단 유천조」란 별명을 얻기도 했었다. 유천조는 1967년에 해산했다. 양원석은 신문의 독자 투고란에 어느 교포소녀가 『재일 동포의 이름을 더럽히는 유천조를 빨리 해산하라』고 쓴 것을 읽고 충격을 받아 해산의 결단을 내렸다고 한다. 지금은 오오사까에서 우익단체 아세아민족동맹(亞細亞民族同盟)의 명예회장으로 일하면서 마약추방 운동도 벌이고 있다.
  
  기자는 일본에 오기 직전 서울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전후에는 나름대로의 명분이 있었으나 지금은 나쁜 일을 했음을 인정한다』면서 『남은 생애를 한국과 일본의 친선, 폭력단 추방 운동에 바치기로 했다』고 했다. 그는 최근 신설된 프로복싱 조직 IBF의 국제 커미셔너로 한국과 일본, 미국을 분주하게 오가고 있다. 마찌이는 야쿠자 세계에서는 지금 은퇴했고 동성회는 1966년에 해산했다.
  
  경찰청에선 동성회가 동아우애사업조합(東亞友愛事業組合)으로 이름을 바꾸어 존속하고 있다고 밝혔다. 동아조합의 이사장은 한국 이름이 오남길(吳南吉)인 오끼다(沖田宇弘). 오끼나와, 군마현 등 5개소에 지부를 두고 6백82 명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 조직은 경찰청이 작성한 히로뽕 밀매 주력 폭력단 리스트에도 올라 있다. 1976년에 한국으로 도망, 도쿄 죽내조(竹內組)두목 다께우찌 다까하시와 손잡고 최대 규모의 히로뽕 밀수 루트를 만들어 약 2백kg을 일본으로 보냈던 박노식(朴魯植)은 동아조합의 간부였다.
  
  폭력. 권력. 금력(金力)의 유착
  
  일본의 조직 폭력단과 특별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은 자민당 내 당입파(黨入派)였다. 요시다 - 기시 - 이께다 - 사또 - 후꾸다 - 등 관료파에 대해 하도야마 - 오오노 - 고오노 - 다나까 등 당인파는 보다 우익적이고, 보다 친한적이고, 보다 이념적이었다. 오오노 반보꾸는 자민당의 부총재 시절 하역단체의 고문직을 맡기도 했다. 이 협회는 山口組(산구조)가 운영하는 것이었다. 60년대 오오노와 고오노는 수상 쟁탈전에서 잇따라 고배를 들고 타계했다. 폭력세계의 방탄 구실을 했던 두 거물이 사라지자 자민당 관료파는 경찰을 동원, 대대적인 폭력단 소탕작전을 펴기 시작했다. 그것은 당인파를 견제하려는 의도도 갖고 있었다. 안보 투쟁에서 우익을 지원한 관계도 있고 해서 60년대 초 폭력단은 너무 커져 있었다.
  
  경찰은 폭력단 전담의 수사 4과를 신설, 폭력단원들을 도박, 공갈, 총포. 도검류 불법 소지 혐의로 잡아들이고 폭력단의 자금줄인 프로 레슬링이나 연예 흥행 회사에 압력을 넣었다. 정상(頂上)작전이라 하여 폭력단 우두머리들을 표적 삼아 집중 수사를 펴기도 했다. 동성회(東聲會), 유천조(柳川組)는 경찰의 집요한 압력에 못 이겨 조직 해산을 결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산구조(山口組)만은 끝까지 버티었다. 이 소탕 작전으로 전국의 폭력단원 수는 18만 명 선에서 70년대 초에 10만 명 선으로 격감했다. 자금줄이 끊긴 결과였다.
  
  이 때 한국으로부터 기적처럼 건너온 것이 히로뽕이었다. 폭력단원들은 너나 없이 히로뽕이란 먹이를 향해 달려 들었다. 새 자금줄 히로뽕에 대한 수요는 급증했고 한국의 밀조 공장은 신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코리언 커넥션과 일본 폭력단의 악수였다. 영국이 북해 석유 발견으로 기사회생했듯 폭력단들은 히로뽕 루트의 개척으로 재기한 것이다.
  
  호시노씨가 내놓은 폭력단의 최근 활동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조사 대상 중 약 14%의 조직은 『정계에 접근해 있거나 하려 하고 있다』로 나타나 있다. 경찰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정치와 폭력의 유착은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어는 일본 기자는 『자민당내 다나까, 나까소네 파 가운데 야쿠자와 가까운 국회의원이 많다』고 했다. 그들이 폭력단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은 폭력 조직이 우익 세력과 연합, 선거운동에 개입하기 때문이다. 폭력단원과의 관계가 깨끗하기로는 미끼파가 꼽히고 있다. 폭력단의 정계 진출은 최근 임협계 우익(任俠系 右翼)단체의 출현으로 나타나고 있다.
  
  산구조(山口組) 등 대폭력 조직들은 앞다투어 극단적 국수주의를 표방하는 우익 단체를 만들어 방계 세력으로 삼고 있다. 폭력은 우익이라는 이제올로기로 포장함으로써 경찰과 국민들의 비판적 눈길을 피해 보자는 목적 이외에도 자금원의 개척이란 의도가 여기엔 깔려 있다. 일봉의 우익 단체들은 대부분 기업들로부터 활동 찬조금을 거두어 사업을 벌여 왔다. 많은 우익단체는 이것을 직업화하여 생활우익(生活右翼)이란 말까지 듣고 있다. 기자가 만난 일본의 폭력단 담당 수사 간부들은 우익단체에 대해선 경멸감을 표시하면서 양쪽을 동일시하는 경향까지 보였다.
  
  히로뽕의 덕으로 전국 제패
  
  호시노씨는 폭력단 연구를 위해 지금까지 2백여 명의 수령급과 면담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정중하고 세련된> 사람들이며 인간적인 매력을 가진 사나이들이었다. 호시노씨는 이들 수령에 대해 조직 경영자의 측면에서 특히 많은 분석을 해왔다. 그들의 기능은 깡패로서보다는 기업체 사장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다오까는 그런 점에서 가장 우수한 폭력 기업 경영자였다. 그가 이룩한 폭력제국 산구조(山口組)에 대해서는 특별한 취재가 필요하다. 山口組는 한국의 히로뽕 조직과 가장 거래를 많이 하는 야꾸자들일 뿐 아니라 일본 밀매시장의 최대 유통업체이기 때문이다.
  
  10년째 폭력단 담당을 하고 있는 어느 주간지 기자는 『서울 명동의 R호텔에 갔더니 안면이 있는 山口組 야꾸자가 많이 묵고 있는데 놀랐다. 그들의 서울 아지트 같았다』고 했다. 山口組의 83년 현재 세력은 산하 단체 5백78개, 조직원 1만 3천여 명이다. 82년에는 1천6백41명의 산구조원이 히로뽕 사범으로 검거되었다. 히로뽕에 관련된 전체 폭력단 검거 인원의 약 15%였다. 83년에는 이 비율이 약 17%로 다시 늘었다.
  
  경찰청의 어느 간부는 필자에게 대외비로 되어 있는 히로뽕 취급 폭력단 조직표를 보여 주었다. 여기에는 히로뽕 밀매에 특히 적극적인 1백21개 단체가 실려 있었다. 3분의 1은 山口組 소속 단체였다. 총수 다오까는 생전에 히로뽕에 손대는 조원(組員)은 파문하겠다고 엄포를 놓았고 마약추방 국토정화동맹을 조직, 가두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었다. 간부와 조원이 따로 논 것이 아니라 그들은 절묘한 더블 플레이를 벌인 것이다.
  
  일본 경찰이 덕도(德島)에서 적발한 山口組 산하 아주회(阿州會)의 히로뽕 경영 실태를 보자. 이 조직은 아홉 달 동안 히로뽕 5kg을 밀매했다. 하루 평균 매상고는 한화로 환산 약 3백50만원. 1백20만 원쯤은 히로뽕 구입 대금으로 지출하고 약 70만 원은 회장 몫, 87만 원은 상부조직에 대한 상납금. 회관 건설 적립금. 변호사 비용 적립금. 운영비 등. 나머지 70만 원은 단원들의 수당으로 지급했다. 손가방 만한 부피의 하얀 가루가 약 아홉달만에 웬만한 중소기업과 맞먹는 약 10억 원의 매상고를 기록하게 했다는 얘기다.
  
  폭력 기업 山口組의 전략
  
  山口組의 전성기를 이룩한 조장 다오까는 살인 전과자다. 그는 태평양전쟁 전, 2대 조장 산구등(山口登)의 부하로 있을 때 행패를 부리는 다른 폭력단원을 일본도로 참살, 징역 8년형을 복역한 적이 있다. 山口組의 2대 조장도 1940년 7월 도오꾜에서 농인조(籠寅組) 라이벌 폭력단 암살대의 습격을 받아 그 후유증으로 죽었다. 이처럼 수뇌부부터가 피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山口組는 1910년대 고오베로 진출, 항만 인력 공급업에서부터 발판을 굳혀갔던 제 1대 조장 산구춘길(山口春吉)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다. 다오까는 1946년 6월에 조장에 취임, 35년간 이 왕국을 철권으로 통치했다.
  
  걸걸한 목소리, 과묵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언변, 영국 복지의 애용가 다오까는 폭력단 세계에 근대적 경영 기법을 처음 도입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일본 최대의 항구 고오베의 하역을 독점하는 하역 전문회사를 설립, 전국 제패의 발판으로 삼았다. 토건업, 프로 레슬링과 연예계 흥행에도 손 대 합법적 수입원을 확보했다. 山口組가 직영한 신호예능사(神戶藝能社)는 미조라 히바리 등 일본의 대표적 스타들과 독범 계약, 떼돈을 벌었다. 일본 가요계의 여왕이라 불리는 미조라 히바리는 데뷔 시절부터 다오까를 아저씨라 부르며 따랐다. 그녀의 이혼 발표회에 다오까가 후견인으로 참석할 정도였다. 81년 8월 다오까의 장례식에서 조사를 읽은 것도 미조라 히바리였다.
  
  다오까는 피투성이의 지하 전쟁을 거듭하며 「나와바리」를 구주에서 북해도까지 확장, 지금은 그 세력 범위가 43개의 도도부현(都道府縣)에 미치고 있다. 山口組는 1960-64년의 팽창기에 4백 건의 무장충돌, 80명의 피살, 3백여 명의 부상을 기록했다. 세력권 확장은 경영 측면에선 판매망의 확장이다. 山口組의 경영 방식을 맥도널드 햄버거나 켄터키 치킨과 같은 상표 대여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山口組를 상징하는 공포의 마름모꼴 문장(紋章) 배지를 달고 다니는 단원들 근방에는 조무라기 폭력배는 얼씬도 못한다. 업소에선 두말없이 「세금」을 바친다. 그러니 山口組에 가입, 상납금이란 로열티를 지불하고 「山口組 계열」이란 상표를 획득하려는 폭력 단체가 줄을 설밖에 없다.
  
  공포와 타산에 의한 복종
  
  호시노씨는 일본 야쿠자의 전통적인 미학이었던 의리와 인정은 붕괴과정에 있다고 말했다. 히로뽕이 몰고 온 황금주의가 그런 붕괴에 일조를 하고 있다. 신화 뒤에 있는 폭력단의 진짜 행동 논리는 「폭력과 금력에 의한 지배」와 「공포와 타산에 의한 복종」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본 경찰은 분석하고 있다. 야쿠자의 독특한 관습 가운데 하나가 「손가락마디 자르기」다. 1970년 경찰청이 3백50명의 야쿠자들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40%인 1백40명이 한 번 이상 손마디를 자른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1백40명 가운데 4분의 1은 두 번 이상 자른 것으로 나타났다. 약60%는 자른 뒤 후회했다고 했다.
  
  「손가락마디 자르기」는 대부분 징벌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히로뽕을 구입하려고 한국에 온 야쿠자가 사기꾼에게 걸려 돈만 떼였다고 하자. 그는 일본에 돌아가면 영락없이 가운데 손가락의 첫째 마디쯤은 스스로 잘라 책임지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실수의 정도가 클 때는 차 상급자까지도 감독 불충분의 책임을 지는 징표로 손가락마디를 자른다. 손가락 마디를 함부로 자르는 건 아니다. 마디마디마다 의미가 다 있다. 가장 가벼운 실수엔 새끼손가락의 첫째 마디, 오야붕의 애인 가로채기와 같은 무거운 잘못엔 집게손가락의 첫째 마디를 자른다. 엄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자르지 않는다. 엄지는 「오야붕」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야쿠자 단체끼리의 전투에서는 진 쪽에서 항복의 표시로 마디를 자르는 것이 관습으로 되어 있다. 이런 「마디 자르기」는 무사들의 할복과 비교되고 있으나 훨씬 위선적이고 비겁한 의식이란 평가를 받는다. 마취를 하고 마디를 자르는 야쿠자도 있을 정도이니까. 일본 폭력단의 무장은 굉장하다. 정규 조원(組員)들은 으레 권총을 갖고 있다. 장총도 드물지 않다. 오오사까에서 만난 山口組 출신의 어느 사나이는 이렇게 말했다.
  
  『돈만 있으면 권총을 손쉽게 살 수 있다. 1, 2백만 엔이면 한자루 거뜬히 산다. 모두가 필리핀 등에서 밀수입된 권총이다. 우리는 두 가지를 쓴다. 22구경과 45구경. 22구경은 보통 호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살상용이라기보다는 손끼검용이라고 할까? 경고나 위협으로 허벅다리에 한방 쏘아버린다든지 할 때 이걸 쓴다. 45구경은 겨드랑이에 차고 다닌다. 전투용이다. 나는 22구경과 45구경 두 개를 가진 적도 있었다. 나와바리를 지키기 이해, 또는 남의 나와바리를 빼앗기 위해 분쟁이 벌어지면 어김없이 총격전으로 확대된다. 야쿠자끼리의 총격전에선 죽거나 다쳐도 경찰에 신고를 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불문율이다』
  
  1982년에 경찰이 압수한 권총은 1천2백45자루나 되었다. 이 해 전국에서 권총을 사용한 살인사건에서 피살된 사람은 66명이었다. 90%는 폭력단원이 관련된 것이었다. 경찰청 과학경찰 연구소 호시노씨는 8년 전 「폭력단원의 살인의 연구」라는 논문을 발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는 자료를 꺼내 오더니 설명한다. 1975년에 일본에서 일어난 2천98건 살인 사건 가운데 폭력단원이 저지른 것은 약 20%인 3백96건이나 됐다. 그 가운데 피살자가 폭력단원과 아무런 면식이 없었던 사건은 12.9%에 지나지 않았다. 대부분이 그들끼리의 죽임이었다. 폭력단은 그 폭력을 일반인에겐 쓰지 않으려고 조심한다는 증거다.
  
  살인의 동기를 보면 남녀 관계가 15.4%, 조직 내외의 갈등과 규율상의 문제가 22%, 사업이나 금전상의 갈등 13.3%, 개인적 감정 49.4%였다.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타조직원에 대한 보복살인, 배신자에 대한 징계살인 등을 많이 저지르는 것도 폭력단 살인의 특징이다. 살인의 방법을 보면 일본도(日本刀)등 도검류를 사용한 경우가 63.5%, 권총이 29.7%였다. 미국의 살인 통계를 보면 총살 67.9%, 도검류 17.6%인데 총기 소지가 허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호시노씨는 『일본 폭력단의 보복 살인은 마피아에 비하면 약한 것 같다. 그러나 수령에 대한 피해가 발생했을 때는 적극적으로 보복에 나선다. 수령은 조직,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고 했다. 그런 보복 살인의 구체적인 예가 「오오사까 전쟁」이었다.
  
  다오까, 총 맞다
  
  그날 일본의 관서(關西)지방은 찌는 듯한 더위 속에 있었다. 다오까(田岡)는 오후 2시께 전강어전(田岡御殿)이라 불리는 고오베의 자택을 출발했다. 교토로 달리는 캐딜락 안에는 그의 측근 부하 네명이 경호원으로 같이 타고 있었다. 오후 4시께 다오까 일행은 교토의 동영(東映)촬영소에 도착했다. 이 영화사에선 「일본은 두 명의 돈(代父)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캐치프레이즈가 붙은 야쿠자 영화 「日本의 수령완결편(首領完結篇」을 찍고 있었는데 이틀전 불이 났다. 「산구조삼대(山口組三代)」 등등 다오까를 모델로 한 영화를 여러 편 만들어 山口組와 퍽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이 영화사에서 다오까는 화재 위문을 한 뒤 저녁을 먹고 나이트 클럽 「베라미」로 갔다.
  
  그날 밤 교토는 뇌우(雷雨)였다. 「밤의 상공회의소」로 불리는 베라미였지만 날씨 때문인지 객석은 한산했다. 스테이지에선 쇼가 끝나고 있었다. 악단의 연주가 최고조에 이르렀다. 막이 서서히 내려지고 있었다. 다오까는 무대에서 두 번째 열에 앉아 호스티스의 재롱을 즐기면서 무대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 순간 다오까로부터 뒤로 세 번째 열에 있던 젊은 남자가 슬며시 일어났다. 다오까의 등뒤로 다가가더니 청년은 두 발을 벌리고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빵!」 3초쯤 있다가 다시 「빵!」 총성은 악단의 연주에 파묻혔다. 많은 사람들은 무대에서 터진 폭죽소리 정도로 생각했다. 다오까는 손수건으로 목을 싸잡고 있었다. 손수건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다오까의 앞자리에 앉아 있던 두 사람도 동시에 쓰러졌다. 청년이 쏜 두 발의 총알 가운데 하나는 다오까의 목을 가볍게 스치고 앞자리의 한 손님 몸에 박혔다. 다른 한 방은 다오까를 완전히 빗나가 앞자리의 다른 손님을 강타했다. 피격된 세사람 모두 치명상은 아니었다. 청년은 손님들 사이를 헤치고 바깥으로 달아났다. 다오까의 경호원들이 추격 했으나 붙들지는 못했다.
  
  「山口組 총수의 암살 미수!」이 소식은 즉각 교토, 오오사까, 고오베 지역 경찰에 비상을 걸었다. 경찰 수사는 두 갈래 방향으로 진행되어다. 우선 암살 기도범의 신원을 밝히는 것이 급선무였다. 동시에 山口組에 의한 보복을 막기 위해 그들의 거동을 24시간 감시하기 시작했다. 누가 감히 전후(前後) 30년간 일본의 폭력 세계에 군림해 온 대부 다오까에게 총질을 했을까? 山口組와 경찰은 이 범인의 사냥 경쟁에 들어갔다.
  
  피를 피로 씻는 복수극
  
  며칠 뒤 경찰은 범인의 정체를 알아냈다. 오오사까를 활동 무대로 하는 폭력단 송전조(松田組) 계열의 촌전조(村田組) 산하 대일본정의단(大日本正義團)의 조원 나루미(嗚海淸), 25세. 그는 한때 정의단 회장 요시다(吉田芳弘)의 운전사였다. 요시다는 그 2년 전 山口組 계열의 폭력단원에 의해 사살되었다. 그것은 「제1차 오오사까 전쟁」의 마무리였다. 오오사까의 한 도박장을 둘러싸고 벌어진 이 지하 전쟁에서 일본 최강의 山口組는 휘하의 말단 야쿠자가 네 명이나 죽임을 당하자 松田組계열 폭력단의 조장(組長)을 사살한 것이었다. 4대 1이란 희생 비율로는 상쇄가 어림없을 것 같지만 폭력 세계의 셈법에 따르면 조장 한명의 목숨은 조원(組員) 네 명의 그것과 맞먹는 것이다.
  
  가깝게 모시던 조장을 읽은 나루미는 복수를 맹세했다. 재로 변한, 두목의 화장한 유골을 핣으며 그는 이를 갈았다. 대일본정의단의 병력은 3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1만3천명의 山口組에 도전한다는 건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늑대처럼 위험한 집단이었다. 『그 자식들은 히로뽕을 맞기 때문에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 베라미에서 목숨을 건진 다오까는 병상에서 그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나루미는 근 일곱 달 동안, 다오까가 가끔 들르는 베라미 주변을 답사, 치밀한 암살 계획을 세웠다. 베라미에서 일하는 호스티스를 정보원으로 포섭, 이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4미터란 지근 거리에서 쏜 총알은 다오까에게 경상을 입혔을 뿐이었다.
  
  『山口組가 나루미를 잡아죽이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그를 체포해야 한다』 우리가 먼저 그를 체포해야 한다』 일본 경찰은 그들이 위신을 걸고 나루미 수색 작전을 전국적으로 벌이기 시작했다. 경찰과는 별도로 山口組도 사수조(私搜査)에 들어갔다. 그것은 피로 피를 씻는 살육전이었다. 다오까 피격 36일 뒤 대일본정의단의 상부 단체인 村田組 간부가 공중 목욕탕의 가족 탕에서 나오다가 사살됐다. 보름 뒤엔 松田組 계열 소속의 야쿠자 두 명이 山口組 암살대의 저격을 받고 숨졌다.
  
  저격자, 내부(內部) 처형되다
  
  다시 그 보름 뒤 고오베 항구를 내려다 보는 육갑산(六甲山) 기슭에서 거의 다 썩은 시체가 등산대에 의해 발견됐다. 시체는 고무 테이프로 몇겹이나 둘둘 감겨져 있었다. 경찰은 문신장인(匠人)들을 상대로 탐문 수사를 벌였다. 이 장인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결코 잊지 않는다. 한 장인은 형사에게 그 자청(剌靑)문신은 자신의 작품이며 문신의 주인은 나루미라고 확인했다. 경찰의 손이 닿기 전에 나루미는 폭력 세계의 율법에 따라 처형된 것이었다. 사법권을 야쿠자에게 도둑맞은 격이 된 경찰은 나루미 처형의 범인 수사에 들어갔다. 며칠 뒤 경찰은 나루미 살해의 범인으로 다나까 등 세 야쿠자를 체포, 기소했다.
  
  범인들은 뜻밖에도 반출구조(反出口組) 노선의 폭력단인 충성회(忠誠會)에 몸을 의탁, 그들의 비호 속에서 집요한 山口組 암살대의 추격을 피할 수 있었다. 忠誠會는 도망자 나루미를 데리고 여러 아지트를 옮아 다니며 그를 극진히 보호했다. 그를 숨겨온 지 한 달 보름이 지난 어느날 다나까 등 충성회 깡패들은 한밤중에 나루미를 끌어냈다. 온몸을 접착 고무테이프로 꽁꽁 말아버린 그들은 승용차로 六甲山 기슭으로 끌고 가 등산용 칼로 그의 등을 마구 찔러 죽였다. 애지중지 아끼던 같은 노선의 도망자를 왜 갑자기 죽이게 되었던가? 이 살인의 동기는 영원한 수수께끼다.
  
  나루미는 은신 중에도 행동을 조심하지 않았다. 忠誠會에선 자신들이 비호 세력임을 山口組에서 알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던 끝에 「예방처형」을 했다는 설이 하나 있다. 다른 설은, 점차 가열되는 山口組의 보복 공격을 견디다 못한 松田組 수뇌부가 나루미를 내부 처형, 그것을 근거로 삼아 山口組와의 휴전 협상을 벌이려 했다는 것이다. 나루미의 피살 뒤에도 山口組의 보복공세는 누그러질 줄 몰랐다. 모형 헬리콥터에 다이너마이트를 가득 싣고 이를 무선으로 조종, 松田組 두목의 집을 폭격한다는 계획이 발각되기도 했다. 山口組는 松田組 사무실에서 거창한 기자 회견을 갖고 「항쟁 종결」을 일방적으로 선언해 버렸다. 베라미 사건 1백11일 뒤의 결말이었다. 대부 다오까의 경상은 일곱 사람의 목숨으로 결제된 셈이었다. 이것이 폭력 세계의 비정한 계산법인 것이다.
  
  한국인은 山口組와 같은, 누가 보아도 범죄단체임이 분명한 폭력단이 어떻게 존속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를 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법률 때문이다. 일본 헌법은 단체 설립의 자유를 보장, 아무리 깡패 집단이라도 그 단체를 대상으로 하는 규제는 할 수가 없다. 다만 폭력단원이 죄를 지으면 개별적으로 체포할 뿐이다. 한국은 「범죄 단체 조직의 죄를 적용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면에서의 대응은 수월한 편이다. 한국에서 히로뽕 거물들이 여러 가지 사정으로 잘 안 잡히는 것과 꼭 같이 일본에서도 폭력단 두목은 직접 범죄에 가담하지 않고 뒤에서 교사만 하며 교사는 입증이 거의 불가능하므로 경찰에 잘 걸려들지 않고 있다.
출처 : 월조
[ 2003-07-09, 15:4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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