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뽕 지하제국 탐험(제 2부) - 쫓는 자와 쫓기는 자(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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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밀조공장
  
  거물들의 잇단 구속은 뽕꾼들에게 이젠 시대가 변했음을 가르쳐 주었다. 비호 세력을 업고 돈을 믿고 유지 행세 등 정상적 사회 생활을 하면서 범행을 위장할 수 있었던 시대는 지난 것이다. 히로뽕 범죄자들은 범죄자답게 뛰지 않으면 안되게 됐다. 호랑이가 아니라 토끼처럼, 정규군이 아니라 게릴라처럼 그들은 늘 움직여야 생존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정규군은 붕괴되었지만 히로뽕 시장의 그 엄청난 경제성은 끊임없이 범죄 예비군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인력 확보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이 히로뽕 제국의 사정이다. 상실되는 것이 병력보다도 더 빠르게 보충되고 있는 것이 히로뽕 군단이다. 아파트에서 農家까지, 과수원에서 고속도로까지, 무인도에서 야산까지…히로뽕 밀조 공장들은 기상천외의 모습을 하고 곳곳에 숨어들고 있다.
  
  81년11월6일 보사부 釜山마약 감시분소의 감시원이 히로뽕 주사를 맞은 한 남자를 붙들어 엄중한 심문을 했다. 몇 시간이 지나자 이 남자는 {밀조 공장을 알고 있다. 나를 놓아주면 잡도록 해주겠다}고 했다. 공작금을 주어 그를 풀어 주었다. 4일 뒤 그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틀 뒤 남해 고속 도로 釜山인터체인지에서 만나자. 푸른 포니와 트럭을 덮쳐라} 이틀 뒤 인터체인지에서 감시원들은 파란 포니와 트럭이 나타나자 급습했다. 후닥닥 뛰어 달아나는 두 사람, 그러나 밀조범 金종헌씨(36)는 잡혔다. 포니와 트럭도 압수했다. 덮개로 가린 트럭의 적재함을 들여다 본 감시원들은 깜짝 놀랐다. 플라스크, 교반기, 비닐봉지, 버너, 그 독특한 냄새…이동식 밀조 공장으로 설치돼 있지 않은가. 金씨와 달아난 두 공범은 2주 전 3백여만 원에 중고 4t트럭을 구입, 히로뽕 제조 설비를 갖춘 뒤 남해 고속 도로를 따라 金海·鎭海·馬山 등지를 싸다니면서 5kg의 히로뽕을 만들었다.
  
  작업?밀폐된 적재함에서, 냄새는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또는 들판에서 날려보냈다. 구름 끼거나 비오는 날엔 냄새가 잘 확산되지 않아 작업을 하지 않았다. 손이 달릴 땐 주차장에 트럭을 세워 둔 채 운전사까지 뒷 공장의 작업에 가세했다. 그들은 연락용으로 포니도 함께 몰고 다녔다. 트럭이 항공모함이라면 포니는 호위함격이었다. 全南 和順군 우산리의 외딴 농가. 申福來(52)라는 사람이 밤낮 무슨 기계를 돌리고 있었다. 주민들이 물으면 {농약을 만든다}고 했다. 경찰관도 신종 농약이 개발되고 있는 현장을 둘러보곤 {수고한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82년2월27일 釜山지검 수사반이 들이닥쳤다. 그것은 농약이 아니라 히로뽕이었다. 현지 경찰관들은 히로뽕을 본 적도 없는 이들이었다. 82년6월 釜山지검 申光玉검사가 일망타진한 밀조단 8명은 慶南 義昌군에서 외딴 농가를 빌어 휴양을 위장, 합숙을 해가며 한 달 사이 히로뽕을 25kg, 액체 히로뽕 40ℓ를 만들었다.
  
  그들은 농민들에게 선심을 베풀면서 경계심을 누그러뜨린 뒤 농번기에 지친 농민들이 곯아떨어진 한밤중에 공장을 돌렸다. 마을 앞에는 망원경을 가진 보초를 배치, 수사관들의 접근을 감시하는가 하면 레코드 살롱과 제미니 등 두 대의 차량을 굴리며 釜山 馬山에서 원료와 화공 약품들을 분주하게 조달해 오기도 했다. 최근엔 반제품, 즉 中間材만 전문적으로 만들어 밀조 공장에 팔고 있는 조직도 생겨나고 있다. 이 반제품은 냄새가 많이나 위험한 1차 공정을 거친 것이다. 이것만 있으면 일반 가정에서도 간단하게 완제품을 만들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반제품 전문, 완제품 전문식으로 分業化가 되면 밀조 공장의 전국적 확산은 더욱 촉진될 것이다. 더구나 종래의 수십 단계가 6∼8단계로 단순화되어 원료만 있으면 죽쑤듯 쉽게 말들 수 있게 됐다.
  
  의약품용 원료가 범죄용으로
  
  원료 구하는 방법도 새로 개발되고 있다. 염산 에페드린은 감기약에 약간씩 쓰인다. 의약품 제조 목적으로 한국에 합법 수입되는 양은 한해 1t쯤 된다. 이 수입 에페드린은 보사부에서 그 사용실적을 철저하게 사후 관리, 범죄 목적으로는 유출될 수 없는 것으로 알려졌었다. 83년4월 釜山지검은 서울의 친화약품(株) 대표 이사 崔홍룡씨(64)를 구속했다. 그는 세관이 공매한 에페드린을 의약품 제조 목적으로 구매한 뒤 히로뽕 밀조단에 세 차례에 걸쳐 47kg을 팔아 약 2천만 원의 이익을 남긴 혐의였다. 에페드린 부정 거래는 형량이 가벼운 약사법 위반으로밖에 처벌할 수 없다. 釜山지검은 崔씨에 대해서만은 히로뽕 제조방조로 걸어 향정신성 의약품 관리법 위반죄를 적용했다.
  
  70년대 후반·80년대초에 독직(瀆職)사건으로 옷을 벗은 일부 경찰관·마약감시원이 아예 히로뽕 세계로 뛰어들어 활약(?)하고 있는 것도 요즈음의 특징적 현상이다. 釜山의 전직 형사 C씨(43)는 밀수 비호 세력으로 점찍혀 75년말에 옷을 벗었다. 그런 다음 그는 釜山의 히로뽕·폭력 세계에서 이름이 꽤 알려져 있는 金모·方모 씨와 손을 잡고 히로뽕에 손대기 시작했다. 뒷구멍으로는 밀조 공장을 돌리기도 하고 밀매도 하면서 겉으로는 釜山 번화가의 나이트 클럽 사장으로 유지 행세를 했다. 80년에 공범 金모씨가 잡히자 그는 달아났다. 나이트 클럽 경영엔 모 히로뽕꾼이 자금을 대고 C씨는 [얼굴 사장]노릇만 했다고 한다.
  
  보사부 마약 감시원이었던 李모씨도 옷을 벗고 나서 히로뽕業을 본격적으로 개업, 과거 동료들로부터 수배를 당기기도 했었다. 도망 중에도 그는 레코드 자가용 승용차를 직접 몰면서 밀조자 金모씨 등과 서울의 나이트 클럽, 술집 등을 싸돌아다니는 것이 여러 번 목격되었다. 이밖에 VTR을 이용한 히로뽕 밀수출 사건의 주범 閔모씨, 홍콩 루트의 염산에페드린 밀수입에 손댄 林모씨가 경찰관출신이다. 밀매·알선 등 자질구레한 사건에 관련돼 구속된 전직 수사관들은 훨씬 더 많다. 이들이 재직중에 히로뽕 수사를 어떤식으로 했을까 하는것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고문을 입증하려고…
  
  1980년9월 초순 釜山지검 마약 담당 宋光洙검사는 세 사람을 히로뽕 밀조 혐의로 구속했다. 세 사람은 모두 히로뽕 전과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또한 부자였다. 검찰에서 진술한 재산 정도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심상호(沈相浩)씨(당시 51·晋州시 水晶동)는 두 채의 빌딩, 두 채의 주택, 7천평의 토지 등 3억 원 어치의 부동산을 갖고 있다고 했다. 오봉서(吳鳳瑞)씨(당시 49·釜山시 온천.溫泉동)는 부동산이 1억5천만 원, 金德俊씨(당시 48·서울시 西橋동)는 여관 등 2억원짜리 부동산을 갖고 있었다. 沈씨는 晋州시·晋陽군의 반공연맹 지도위원장, 수정동 마을 금고 이사장, 수정동 방범 협의회 위원, 수정동 정화 위원회 부위원장, 수정동 선거 관리 위원, 진주 경찰서 대공 공작원, 수정동 새마을 협의회 부회장 등등 수많은 직함을 가진 향토의 유지이기도 했다.
  
  검찰은 [沈相浩는 7개의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자신의 신분을 위장, 영남 일원의 히로뽕 밀조자들에게 제조 기술을 지도하여 온 자]라고 공소장에서 못박았다. 검찰이 밝힌 沈씨의 많은 제자 중에는 검찰과 총격전을 벌였던 李황순씨의 이름도 들어 있었다. 沈씨는 히로뽕을 만들어주는 대가로 수백만∼천만원씩의 기술료를 받았다고 보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재판 결과는 어떠했던가? 81년3월4일 釜山지법 제1호 법정에서 崔병국 검사는 沈씨에게 무기징역·추징금2억2천만 원, 金씨에게 징역 7년·추징금1천만 원, 吳씨에게 징역15년·추징금1억4천만 원을 구형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沈씨에게만 징역 5년을 선고하고 金는, 吳씨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항소심에선 金, 吳씨는 물론이고 沈씨도 무죄를 선고받았다. 대법원에서도 그대로 확정되어 세 사람은 모두 [결백 증명]을 받았다.
  
  이들 세 사람이 구속되었을 때 전국의 신문들이 [국내 최대급 밀조범 검거]라고 떠들썩하게 보도, [금방이라도 죽게 될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결과는 이 모양이었다. 세 사람에게 무죄를 안겨다 준 결정적인 공로는 [심한 물고문과 폭행으로 자백을 강요당했음]을 입증한 변호사들에게 돌아가야 마땅하다. 沈相浩씨의 변호인은 釜山의 金光日변호사였다. 많은 무죄를 받아낸 것으로 이름난 金변호사는 沈씨의 자백이 고문에 따른 것이란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소형 녹음기를 가슴에 품고 晋州로 갔다. 沈씨는 80년9월15일에 晋州호텔 503호실에 끌려가 수사관들로부터 고문을 받았다고 金변호사에게 말했던 것이다. 金변호사는 진주호텔 종업원 朴모 여인과의 대화를 비밀 녹음했다. 박 여인은 당시의 고문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무죄 부른 고문수사
  
  이 녹음 테이프를 증거로 제출한 金변호사는 81년1월5일 수사관을 증인으로 불러 고문 부분을 집중적으로 신문했다.
  
  변호인={진주 호텔에 도착하여 증인등 마약 감시원은 沈피고인을 데리고 503호실에 들고 검사와 서기는 505호실에 들었는가요?}
  李(마약 감시원)={호실 기억은 없으나 두 방에 들었읍니다}
  
  변호인={증인은 동 피고인에게 그 동안 히로뽕 해먹은 것 다 대라! 오봉서를 아느냐, 김덕준을 아느냐는 식으로 신문하였는가요?}
  李={이름을 우리가 댄 일은 없고 박재현과 피고인이(히로뽕 밀조를) 했다고 진술했읍니다}
  
  변호인={배○○(마약 감시원)은 피고인에게 팬츠만 남기고 옷을 다 벗긴 후 몸통 받쳐 열번과 귀 잡고 토끼뛰기 열 번을 구령에 맞춰 시킨 후 타월로 피고인의 양손을 감고 무릎 아래로 수정을 채운 뒤 목욕실로 데리고 갔나요?}
  李={그렇게 한 일 없읍니다}
  
  변호인={그 호텔을 나온 것은 몇시경이었는가요?}
  李={어둑할 때였읍니다}
  
  변호인={어둑할 때면 7, 8시경인데 오후 두세 시경부터 4, 5시간 무엇을 하였읍니까?}
  李 =『묻고 답하느라고 시간이 걸렸읍니다』
  
  변호인={피고인이 순순히 답했다면 4, 5시간이 걸릴 리가 있겠는가요?}
  李={그 점은 모르겠읍니다}
  
  변호인={동 목욕실에 피고인을 데리고 가서 발닦는 카피트 두 장을 깐 후 沈씨를 반듯하게 눕히고 오론쪽 옆구리에는 배○○, 왼쪽 옆구리에는 강형사가 자기들의 발을 각자 끼워넣고 동인의 발을 붙잡고 나서 앞으로 물을 먹일 터이니 말할 것이 있으면 발을 흔들라고 말한 일이 있는가요?}
  李={그런 일 없읍니다}
  
  변호인={동 피고인이 고통에 못이겨 고함을 지르자 옆방인 502호실에 투숙하였던 일본인 손님이 놀라서 뛰어나와 허둥거리자 증인 중에 누군가가 그 사람의 신분 검사를 하였고, 딴곳에 가 있으라고 말하여 그 손님은 호텔 여자 종업원의 안내로 다른 일본 사람의 방으로 간 사실이 있는가요?}
  李={바깥에서 일본인과 우리 수사관중에 누군가 그렇게 하였는지는 모릅니다}
  
  증인 신문은 동문서답식이었지만 이것이 재판부의 판단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음은 1심 판결문의 다음 대목에서 드러난다.
  […피고인 沈상호는 80년9월14일21시경 진주 경찰서 형사들에 의하여 연행되어 진주 경찰서와 부산지방 검찰청 진주지청에서 신병이 억류당한 채 조사를 받다가 진주호텔 503호실에 감금된 채 심한 물고문과 자백을 강요당하였으며 그날 자정경부터 부산 마약 감시 분소로 옮겨져 같은 달 19일14시55분경 정식 구속될 때까지 감시소 보호실에 감금된 채 고문과 폭행을 받았던 사실, 동 피고인 작성의 자술서는…
  고문과 폭행으로 자백을 강요당하면서 마약 단속반원들의 면전에서 작성된 것이며, 동 피고인에 대한 검사의 제1회 신문 조사는 위 자술서를 작성한 직후 마약 단속반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위 마약 감시소에서 작성되었고 제2회 신문 조서 약시 범행을 부인하면 다시 감시소로 데려가겠다는 협박 하에서 작성되었던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 바 그렇다면 피의자 신문 조서 중의 자백은 고문, 폭행, 협박 신체구속의 부당한 장기화로 인하여 임의로 진술된 것이 아니라고 의심할 상당한 이유가 있으므로 이를 유죄의 증거로 삼지 못할 것이다]
  
  1심 재판부는 朴재현씨(당시 수배중)의 집에서 발견된, 히로뽕 제조 기구와 완제품 등의 물증만 증거로 채택, 沈씨와 朴씨가 함께 히로뽕을 만든 사실만 유죄로 인정했다. 그러나 고법과 대법원 재판부는 기구와 완제품은 朴씨의 것이라는 沈씨의 변소까지 받아들여 완전한 무죄를 선고했던 것이다.
  
  변호사 경기는 뽕꾼들이 좌우?
  
  이 재판은 히로뽕 수사 기관 종사자들에게 큰 충격과 교훈을 주었다. 마약수사에 가혹한 문초가 따르기 쉬운 것은 물증을 확보, 자백을 유도하는 정석수사보다 신문을 통해 물증을 찾는 강제 수사가 많기 때문이다. 沈相浩씨 등의 무죄 판결은 그런 고문 수사가 입증될 경우, 자백은 물론이고 물증도 증거력을 잃게 된다는 선례를 남긴 것이다. 이 사건의 재판 과정을 보면 변호사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가 한눈에 드러난다. 세 피고인이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았거나 그럴 만한 돈이 없었다면 판결은 다른 방향으로 나왔을지도 모른다. 재판은 진실을 밝히는 일이 아니다. 법정에 제출된 증거 자료의 범위 아래에서 유죄 무죄를 가리는 일이다. 유죄 판결을 받았다고 해서 반드시 [진실로 유죄]가 되는 것도 아니고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해서 진실로 결백한 것도 아니다. 검찰은 沈씨의 재판이 끝나기 전에 그의 공범이라고 믿고 있었던 朴재현씨의 검거에 힘을 썼다.
  
  朴재현씨는 81년10월5일에 붙들렸다. 검찰은 朴씨를 히로뽕 322.5kg 밀조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그 가운데 3백kg은 냉동기 수리 공장으로 위장한 진주의 비밀 공장에서 沈씨와 같이 만들었다고 朴씨는 말했다. 그러나 朴씨가 잡혔을 때는 沈씨가 무죄확정을 받은 이후였다. 일사부재리 원칙에 따라 검찰은 沈씨에 대해 새삼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무죄로 풀려난 吳鳳瑞씨는 83년8월18일 釜山지검에 또 구속되었다. 다른 두 공범과 함께 82년2월에 히로뽕 23kg을 만든 혐의였다. 히로뽕 범죄자들만큼 법률을 충분히 활용, 법의 보호를 만끽하고 있는 사람들도 드물 것이다. 그 법의 보호는 서민들에게도 당연히 적용되어야 할 것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상의 얘기이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금력, 바꿔 말하면 변호사의 도움으로서만 법의 보호를 충분히 받을 수 있는 경우가 많다. 히로뽕 범죄꾼들이 너무 쉽게, 너무 가볍게 죄값을 치르는 데 의아심을 갖는 사람들은 민주 사회에서 법의 이익을 백 퍼센트 향유하려는 그들의 자세만은 오히려 본받도록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釜山 변호사界의 경기는 히로뽕꾼이 좌우한다]는 농담은 변호사들에 대한 비난으로 해석되어져선 안될 것이다.
  
  쫓는 者의 人情
  
  히로뽕에 처음 손대는 사람들 중에는 실패한 사업가들이 가끔 발견된다. 히로뽕으로 한탕하여 기운 사업을 회복하겠다고 나섰다가 패가망신하는 이들이다. 81년12월24일밤 크리스머스 이브, 釜山시 東萊구 거제(巨堤)동의 D맨션 아파트 앞. 대여섯 명의 사나이들이 추위에 몸을 떨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한 사람이 {나온다!}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파트 입구로 아이들의 손목을 잡은 40대 부부가 걸어오고 있었다. 성탄절 전야의 나들이가 틀림없었다. 몇 시간 동안 한데서 서성거리고 있었던 사나이들의 표정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그들의 표정은 환했다. 사나이들은 그 가족이 사정 거리 안에 들기만 기다렸다. 이윽고 사나이들이 행동을 개시하려 할 즈음 키 작은 남자가 조용히 말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자. 내일 와서도 잡을 수 있겠다. 어차피 오늘이 마지막 나들이일 터인데…} 사나이들, 아니 釜山지검 마약반 수사관들은 시무룩한 표정이었으나 辛光玉검사의 지시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 그 사람은 적은 정유 공장 안에 비밀 공장을 차려 놓고 히로뽕을 만들고 있었읍니다. 그는 인쇄업에 실패했고 정유 공장 주인인 외사촌 처남은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었읍니다. 같이 일확천금을 노린 것이었죠. 우리는 며칠 동안 집에도 못 들어가고 그들을 뒤쫓았는데 나들이 나오는 천진한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는 차마 그 자리에서는 수갑을 채울 수 없었읍니다. 물론 그 다음날에 체포, 구속했읍니다만…} 히로뽕꾼들에겐 집은 있어도 가정은 없다. 늘 쫓기는 신세, 늘 몰리는 기분 히로뽕 중독 증세로 인한 정신적인 파탄… 아이들까지 아버지를 이상한 눈초리로 본다. 어느 전과자는 {외동딸의 원망하는 듯 두려워하는 듯한 눈망울이 가슴을 찔러 손을 씼었다}고 말한다. 그는 {뽕꾼들의 아이들은 비록 어린 마음이지만 아버지가 뭘 하는지 짐작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아이들도 침울하고 난폭해진다}고 했다.
  
  대부분의 뽕꾼들은 가족이나 배우자를 히로뽕에 같이 끌어들이기 때문에 가족 전체가 정신병동과 같은 이상 분위기에 휩쓸리기도 한다. 孔昌喜검사는 이런 경험담을 털어 놓는다. {82년10월 서울 반포동에 밀조 공장이 있다는 정보를 얻어 올라갔지요. 밀조기술자의 집을 덮쳤더니 아이들만 있어요. 아이들도 아버지가 어디로 돌아다니는지 모른다는 거예요. 설득을 했지요. 열몇 살 된 딸이 애원하듯 말했죠. [이모를 살려 주면 말할께요] 그 소녀는 이모가 아버지와 함께 히로뽕을 만들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러겠다고 약속했죠. 그 딸을 차에 태우고 방배동 부근을 뺑뺑 돌았는데 이 아이가 마음이 변했는가 봐요. 가르쳐 주지 않아요. 다시 딸을 집으로 데리고 가서 [이것이 결국 아버지한테로 이롭다]고 달랬지요. 그제야 딸은 우리 수사관들을 데리고 가서 아버지가 있는 집을 가리켜 주곤 막 울면서 달아나 버리더군요}
출처 : 월조
[ 2003-07-09, 16:0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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