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뽕 지하제국 탐험(제 2부) - 쫓는 자와 쫓기는 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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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巨物들의 장례식
  
  최후의 巨物 X
  
  그를 우선 X라고 해두자. 일부 수사관들 사이에선 그를 한국 히로뽕계 최후의 거물이라고 평하곤 한다. [최후의 거물]이란 것은 X가 아직 한번도 히로뽕과 관련하여 유죄 확정 선고를 받은 바 없음을 뜻한다. 그래도 X는 히로뽕 거래로 치부했고 그 돈의 힘으로 몇몇 고위공직자와 상종하며 여태까지 법망을 빠져 나왔다고 확신하는 수사관들이 있다. 그들 가운데는 지금도 집요하게 X에 대한 감시의 눈을 번득이는 사람도 있다. X는 서울의 고급 주택가에 대저택을 갖고 있다. 재산은 10억대 이상이라고 어느 수사관은 말한다. 그는 일정한 직업도 없이 사교 클럽 회원으로 골프장에 자주 나다니며 유유자적하고 있다고 한다. 지명도가 높은 사회적인 감투도 물론 쓰고 있다. 집에는 전화가 두 대 있다. 모 수사관의 얘기―.
  
  {보름 동안 그의 집을 감시한 적이 있다. 그는 피해 다니는 중이었다. 집에 전화가 두 대 있는데도 가족들은 걸려 오는 전화만 받고 전화를 걸 때는 꼭 집 바깥으로 나와 공중 전화를 쓰는 것이었다. 무슨 내용인가 싶어 차례를 기다리는 척 그 가족의 뒤편에 서서 엿들으려 하면 다이얼을 돌리다 말고 통화중이라면서 나에게 양보를 한 뒤 가 버렸다. 히로뽕 세계에선 그가 한국에서 처음 밀조를 시작한 제1세대 그룹에 속하는 노장이라고 보고 있다} X는 60세, 그의 전과표에는 14개의 입건 기록이 있다. 공갈, 점유물 횡령, 부정 수표 단속법, 횡령, 배임, 의약품 관리법, 외국환 관리법 위반 등등의 혐의다. 처분 결과를 보면 벌금형이 세 번, 집행 유예가 네번, 기타는 무혐의. 구속은 되었지만 실형을 산 적은 한번도 없었다. 전과표만 보아도 X는 파란이 많은 생활, 위기의 연속을 잘도 헤쳐 나온 사람이란 인상을 풍긴다. 가장 최근에 그가 구속된 건 지난 80년 봄이었다. 혐의는 히로뽕계의 중진인 G에게 세 차례에 걸쳐 히로뽕 1.4kg을 팔았다는 것과 뇌물을 알선했다는 것이었다. 뇌물 알선부분의 이야기에는 Y라는 형사가 등장한다.
  
  지난 74년 Y는 G가 히로뽕 원료를 밀수하고 있다는 첩보에 따라 내사를 하고 있었다. 그는 G가 X와도 자주 접촉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 무렵 X가 Y형사에게 만나자는 전화를 걸어 왔다. 인천의 어느 호텔 코피숍에 나가니 G도 X와 같이 있었다. Y형사는 검찰에서 조사를 받을 때 [그 자리에서 G로부터 수사를 중단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3백만 원을 받았다]고 진술했었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G, Y, X는 모두 검찰에서의 진술을 번복, 결국 X는 무죄로 풀려났다. X가 히로뽕 관계로 구속되어 법정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것은 이것이 두번째였다. 비록 X가 무죄로 나왔다 해도 재판 기록을 보면 X와 수사관들의 관계를 짐작케 하는 증언이 발견된다. Y형사에 대한 변호인 반대 신문의 요지―.
  
  변호인={피고인은 1974년 10월 G가 히로뽕 원료를 밀수입한다는 정보를 입수, G의 집을 급습했으나 헛탕친 적이 있지요?}
  Y={예}
  
  변호인={피고인은 계속 추적하다가 G가 히로뽕과 관련돼 재판까지 받은 적이 있는 X의 피아트를 타고 다니는 사실을 알아냈죠?}
  Y={예}
  
  변호인={그래서 피고인은 G와 X가 어떤 관련이 있구나 하는 심증을 굳히게 되었는데 74년 11월 하순 X로부터 仁川올림푸스 호텔에서 만나자는 전화가 왔었죠?}
  Y={예}
  
  변호인={피고인은 수사 정보를 얻기 위해 담당검사에게 보고하고 거기로 갔죠?}
  Y={예}
  
  변호인={피고인은 X가 용돈을 좀 주겠다고 하기에 누구 코를 꿰어 끌고 다니려고 그러느냐고 거절하고 한 잔 사라고 했죠?}
  Y={예}
  
  변호인={술을 내라고 한 것은 술을 마시면 무의식중에 G가 정체를 드러내놓을 것 같아서 그런 거죠?}
  Y={예}
  
  변호인={그러나 G는 끝내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그날 헤어졌죠?}
  Y={예}
  
  변호인={2∼3일 후에 정○○(사건 당시 서울 지검에 파견 나온 보사부 마약 감시반장·재판 당시 미국 이민)가 다가오더니 G관계로 3백만 원 받았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했죠?}
  
  Y={액수에 대해선 말하지 않고 돈을 좀 받았다고만 했읍니다}
  변호인={피고인은 정 반장이 받았으면 정 반장이 알아서 할 일 아니냐고 했지요?}
  Y={예}
  
  변호인={정○○은 당시 마약반장으로서 G와 X와는 절친한 사이로 함께 춤추고 당구도 치고 아주 다정하게 지내는 사이였죠?}
  Y={예}
  
  변호인={피고인은 당시 마약반에선 강경파였는데 G가 피고인을 매수하는데 실패하자 정 반장을 통해 뇌물 공세를 편 것이죠?}
  Y={예, 그건 분명합니다}
  
  변호인={정 반장은 피고인이 검사실에 갔다 오니까 30만 원을 내어 놓으며 마약반 직원 각자에게 분배한 것이니까 받아두라고 하던가요?}
  Y={예}
  
  변호인={피고인은 그것마저 받지 않으면 마약반에서 고립될 것 같아 받았지요?}
  Y={예}
  
  변호인={G는 원래 정 반장에게 3백만 원을 줄 때는 피고인에게만 주라고 했는데 피고인이 안 받을 것 같으니까 받지 않을 수 없도록 다른 직원들과 나눠갖는 작전을 쓴 것이죠?}
  Y={예}
  
  변호인={G는 정 반장과는 친하니까 검찰에서 피고인만 찍어 뇌물을 주었다고 진술했죠?}
  Y={그런 것 같습니다}
  
  어느 수사관은 이렇게 울분을 털어 놓았다. {X와 같은 자의 입에서 현직 국회의원 이름이 들먹여져서는 말이 안된다. X에 대한 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데는 수사진의 미숙도 이유가 되겠지만 바깥으로부터의…} 이런 수사관들은 재판이야 어찌되었든 자기가 쫓고 있는 사람이 진범이라고 확신한다. 그 피의자를 직접 다루어 본 데서 느껴 아는 육감 같은 것이 그런 확신을 굳힌다. 많은 거물 히로뽕꾼들은 겉으로는 지역 유지 행세를 하며 방범 협의회장 등등의 감투를 쓰는가 하면 파출소 신축에 돈을 대 경찰서장으로부터 감사장을 받곤 한다. 대부분은 수사망에 걸려 들어 [그 사람이 그런 짓을…]하는 놀라움을 주기도 하지만 아직도 흉악한 범죄자의 얼굴을 선량한 시민의 가면으로 가린 채 활보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이 고참 수사관들의 얘기다.
  
  절묘한 변신
  
  역설적으로 이야기하면 X라면 인물을 [최후의 거물]이라고 부른다는 그 자체가 80년대 초반에 히로뽕 수사의 풍토가 크게 쇄신되고 수많은 거물들이 줄초상 났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만다린호―李黃純사건을 계기로 뽕꾼들을 감쌌던 비호 세력의 힘은 약화되었다. 그러면서 거물들이 줄줄이 엮이어 들게 되었다. 더구나 80년대의 마약 전담 검사들은 젊고 때묻지 않은 집념의 인물들이었다. 金成浩·宋光洙·이경재(李炅載)·신광옥(辛光玉)·孔昌喜 검사 등 서울 및 釜山지검의 마약 전담 검사들은 정열적으로 수사를 지휘했다. 이들 가운데서도 辛, 孔 두 검사의 활동이 눈부시다. 辛검사는 釜山지검에서 81년9월∼82년7월까지 마약 전담 검사로 있으면서 20개 조직 1백여 명의 뽕꾼들을 검거했다. 孔검사는 82년7월부터 현재까지 釜山지검 마약 전담 검사로 일하면서 34건의 히로뽕 사건을 해결, 2백23명을 검거하고 그 중 1백65명을 구속했다. 孔검사 팀이 압수한 히로뽕 완제품은 73.7kg 이것은 82년에 일본에서 적발, 압수한 현물량보다도 6kg이나 많은 것이다.
  
  젊은 마약 담당 검사들의 성공 여부는 그 밑에 있는 5∼6명의 수사요원들(보사부 마약 감시원과 형사)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달려 있다. 경험과 정보는 많지만 부패한 수사요원, 경험은 없지만 의욕적인 수사요원 가운데 누구를 重用하느냐로 고심하는 검사도 있다. {지금도 몇몇 늙은 감시원들은 뽕쟁이들에게서 휴가비 받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을 데리고 수사를 하면 정보가 새나가 될 일도 안 됩니다} 이것은 어느 현직 검사의 솔직한 실토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관계는 냉혈적이다. 뽕꾼이 수사관에게 뇌물을 주어 수표번호를 적어놓는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일단 약점을 잡아 놓으면 그 수사관의 생명은 그 길로 끝이다. 그런 약점을 이용, 뽕꾼이나 폴력배가 수사관을 꼭둑각시처럼 조종할 수도 있다. 그런 수사관이 그만두고 뽕꾼 밑에 들어가 심부름하는 경우도 있다. {마약 수사를 하려면 선의의 스폰서가 든든해야 한다}는 어느 수사관의 실토는 히로뽕 수사에 드는 경비를 어떻게 조달하느냐가 수사관에겐 사활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수사 풍토는 많이 깨끗해졌다. 무엇보다도 기라성 같은 히로뽕界 名人들이 최근 4년 사이 거의 일소되었음이 그것을 입증한다. 마피아 상황에서도 대개 그렇듯 마약업계의 두목은 終章에 가까이 가야 비로소 정체가 밝혀진다. 우리의 80년대는 과연 그런 종장이 될 수 있을까? 전번 호에도 잠시 소개된 釜山의 히로뽕 거물 한삼수(韓三洙)씨(53)는 여러 가지로 연구할 만한 인물이다. 히로뽕帝國의 거물이 어떤 수완으로 장사판을 벌이는지를 밝히는 데 韓씨는 좋은 자료가 된다. 全南 木浦가 고향인 그는 1953년에 釜山港內業體에 취직, 항만의 생리를 체득한 다음 밀수와 히로뽕에 손대기 시작했다. 韓씨는 70년대에 한국 히로뽕 세계의 대표적 거물로 성장했으나 밀조에는 직접 손을 대지 않는 사람으로 알려져 왔다. 밀조범은 가장 중한 벌을 받는 대신 가장 많은 이문을 남기기도 한다. 韓씨는 제조·판매의 배후 조종자란 소문이었는데 그의 범죄 스타일이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은 1980년7월 관련자 6명과 함께 그가 구속된 뒤였다.
  
  釜山지검 마약 담당 宋光洙검사가 그들을 붙들었을 때 韓씨는 겉으론 중기 대여업을 하고 있었다. 공소장에 따르면 韓씨는 히로뽕 범죄의 연출가로 그려져 있다. 韓씨는 지난 79년8월 미스터리의 인물 文明吉씨(수배중)로부터 조카인 한소남(韓昭南)씨를 통해 염산 에페드린 50kg을 외상으로 건네받았다. 文씨는 이 원료를 중국 선원으로부터 받았다고 한다. 韓씨는 원료를 제조범 박기원(朴基源)씨(45)에게 넘겼다. 朴씨는 釜山시 南구 廣安동의 자기집 비밀 공장에서 열달 동안 2백50kg의 히로뽕을 만들었다. 2백50kg이면 對日밀수출 가격으론 약 10억 원, 日本에서의 말단 밀매 가격으로는 약 5백억 엔(한화 약1천6백억 원)어치다. 對日수출량 1년치의 10∼20%나 되는 양이다. 이처럼 단시간에 이렇게 많은 히로뽕을 만든 예는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韓三洙씨는 朴씨로부터 완제품 32kg을 받아 이를 文明吉씨에게 원료 5배kg의 대금조로 건네 주어 정산했다. 文씨는 원료를 대주고 제품을 받아가는 [보세 가공]을 한 셈이다.
  
  韓씨 자신은 중개수수료를 받는 대신 朴씨로부터 완제품을 헐값에 구입, 많은 이문을 붙여 밀매 조직에 팔기 시작했다. 그는 제1막에선 원료중개상, 제2막에선 제품 도매상으로 [절묘한 변신]을 한 것이었다. 韓씨는 세 차례에 걸쳐 제품 58kg을 朴씨로부터 kg당 70만∼1백80만 원에 구입, kg당 50만∼1백60만 원의 마진을 덧붙여 팔아넘겼다. 이 도매상 영업으로 韓씨는 간단하게 5천만 원을 남겼다. 그는 밑천 한푼 들이지 않고 정보와 인맥을 적당히 끼워 맞추어 굵직한 거래 한건을 마무리지었던 것이다. 韓씨는 1심에서 징역7년에 추징금 2억3천3백70만 원, 朴씨는 징역 12년에 추징금 6억3천6백만 원의 선고를 받았다(최종심에서도 이대로 확정). 검찰에선 韓씨를 히로뽕 밀조의 공동정범(朴씨와 함께)으로 기소했으나 재판부에선 이 부분에 대해서 무죄를 선고했다. 이 사례에서 실질적인 주범은 韓씨였으나 제조를 한 朴씨보다도 가벼운 벌을 받은 것은 韓씨가 오랜 경험을 통해 터득한 좌우명―히로뽕 제조에는 손대지 말라―덕분이었다.
  
  朴魯植 신디케이트, 무너지다
  
  慶南 南海가 고향인 박노식(朴魯植)씨(47). 그의 전과는 화려하다. 재일 동포인 그는 도오꾜의 환락가인 아사꾸사를 관할 지역으로 하는 폭력단 東亞友愛事業組合의 최고 간부였다. 그는 1976년11월 히로뽕 밀매 혐의로 재판을 받던중 한국으로 도망갔다. 朴魯淑으로 이름을 바꾼 그는 여의도 어느 맨션 아파트의 8층에 틀어박혔다. 그리고는 국제 전화 하나로 사업을 시작했다. 日本안에 폭력단 연줄을 많이 확보하고 있던 朴씨는 도오꾜의 다께우찌組 두목 竹內敬吉(51)과 선을 달았다. 朴씨는 히로뽕 수출 대리점, 다께우찌는 수입 대리점 격이었다. 두 사람은 국제 전화로 수시로 연락을 취하면서 대량의 히로뽕을 거래하기 시작했다. 주로 對日화물선과 활선어 운반선이 동원되었고 釜山의 조직 폭력단이 하수인으로 이용되었다. 朴씨는 江南 梁山에 밀조 공장을 두고 있었다. 순도 실험 목적으로 스스로 주사를 놓기는 했지만 중독까지는 가지 않았다. 그는 서울 시내 한복판에 위장 회사를 차려 놓고 일본의 거물 깡패들을 초청, 기생 파티도 자주 벌였다.
  
  1978∼80년 사이 朴씨가 일본으로 보낸 히로뽕은 일본 경찰에서 증거를 잡은 것만도 16회에 70kg(일본 말단 가격 1백30억 엔)이었다. 드러나지 않은 것까지 치면 약 2배kg이 朴씨―다께우찌 루트를 통해 반입된 것으로 일본경찰은 보고 있다. 이 루트는 한국과 日本에서 동시에 공격을 받아 붕괴했다. 80∼81년 사이 일본 경시청은 竹內組에 총공세를 가해 폭력단 관련자 2백96명을 체포, 히로뽕 7kg, 17정의 권총을 압수했다. 일본 경찰수사 결과 다께우찌는 朴씨가 보낸 히로뽕을 하부 조직을 통해 인수, kg단위의 히로뽕을 1백, 50, 10g 단위로 小分, 주로 도오꾜의 말단 밀매 조직에 소매해 왔음이 밝혀졌다.
  
  이 루트를 붕괴시킨 일본 경찰은 한때 [이제부터는 밀반입량이 크게 줄 것이다]고 안도했었다고 한다. 일본 경찰은 국외로 도망간 마약 사범 8명을 국제 수배한 적이 있었는데 朴씨도 그 속에 끼여 있었다. 朴씨는 막후에서만 활동, 한국에선 거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한국 수사 당국이 朴씨를 체포한 것은 80년7월이었다. 당시 그는 서울 永東에 대지, 濟州島엔 농장 등 수십억 대의 재산을 갖고 있었다. 朴씨의 체포에는 日本수수당국도 상당히 협조했고 재판 과정에서도 그들은 큰 관심을 보였었다. 朴씨는 간부급 수준에서 日本의 폭력조직과 거래를 한 거의 유일한 사례일 것이다.
  
  VTR대리점의 副業은?
  
  1981년엔 양학승(梁學承)씨가 서울 지검에 자수하면서 37명의 뽕꾼들이 검거되었다. 梁學承씨는 자기가 6년 동안 경험한 히로뽕 계보를 좔좔 털어 놓았다. 이에 따라 수사 대상자가 60여 명이나 리스트에 올려졌다. 그 리스트의 맨 앞에는 X의 이름이 있었다. 그 때 X는 벌써 두 차례나 검찰에 구속되었으나 두 번 모두 무죄 판결을 받고 나와 있었다. 그의 당시 감투는 [××동 새마을 금고 이사]. 거물 히로뽕꾼들의 사회적 감투를 조사해 보면 가장 많은 것이 새마을 금고 이사 자리다. 혐의자 60여 명의 직업 분포는 다양했다. 항해사, 선원, 전무, 사장, 건설회사 현장 소장, 전직 경위, 여관 주인, 양복점 주인. 서울 지검은 X를 잡아넣기 위한 세번째 시도로서 梁씨를 정보원으로 중간에 넣어 그의 물건(히로뽕)을 구입하려는 공작을 했다. 공작은 또 실패했다. 정보원의 부탁을 받은 중간 밀매자가 {X의 것이다}고 하여 가져온 히로뽕은 나중에 알아보니 엉뚱한 루트의 물건이었다. 서울 지검은 60여 명에 대한 수사를 다하지 못하고 손을 뗐다. 인력, 수사비 등의 여건상 정책 수사가 아니면 한 사건을 몇 달이나 오래 잡고 늘어질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미국과 일본의 수사 당국이 사소한 정보도 애지중지하며 몇 년씩 끈기 있게 집착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풍토다.
  
  확신을 갖고도 이 때 손을 못댄 정보들 중에는 [항공 화물 회사를 이용한 對日 밀수출 협의]도 있었다. 이 때 검거하지 못하고 놓친 거물로는 閔모씨(60)가 있다. 지금 3년째 수배를 받고 있는 그는 81년까지만 해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본의 모 VTR제조회사의 한국 대리점 사장이었다. 방송국이나 관공서용 특수 카메라의 수입 창구 역할도 했던 이 대리점은 75년에 설립되어 짭짤한 재미를 보고 있었다. 閔씨는 경찰관 출신으로 관세 합동 수사반에서도 근무한 경력이 있었다. 공항이나 세관에는 얼굴이 넓게 알려진 편이었다. 신흥회사의 사장으로 누가 봐도 부러운 생활을 하는 것 같았던 그는 對日 히로뽕 밀수출 창구도 터 놓고 있었다.
  
  하수인으로 구속된 기술부장 金모씨에 따르면 閔씨는 수리를 위해 일본으로 보내는 VTR 속에다가 여러번 1∼2kg의 히로뽕을 넣어 밀수출했다는 것이었다. 나중에는 VTR 속에 일화를 백만 엔씩 넣어 보내기도 했다. 그것은 아마도 밀수품 구입 자금이었을 것이다. 히로뽕이 든 수리용 VTR이 78년∼81년 사이 거의 정기적으로 日本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아 일본의 VTR 제조 회사 안에 히로뽕을 받아 빼돌리는 공범이 있으리란 추측도 할 수 있으나 閔씨가 잡혀야 항공편 밀수출 루트의 전모가 밝혀질 것이다.
  
  脫 釜山, 脫 홍콩, 入 대만
  
  1980년의 李黃純 총격 사건 이후 우리 나라 검찰이 붕괴시킨 가장 큰 단일조직은 83년1월 釜山지점 孔昌喜검사가 적발한 대만·한국·일본의 3각 구도를 가진 밀수·밀조·밀매단이었다. 검찰이 구속한 14명, 수배한 17명 속에는 한국 히로뽕界의 스타 플레이어들이 거의 다 들어 있었다. 이 조직의 검거는 거꾸로 뽕꾼들은 단속이 아무리 강화되어도 제 갈 길을 가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이들은 4년 동안 대만에서 4백50kg의 원료를 사들여 2백23kg의 히로뽕을 만들어 국내외에 팔았다. 원료 구입에는 화교 조적걸(曺積傑.51)·張世昌씨(73)가 주역이었다. 曺씨는 만다린호 사건 수사때 갈비뼈가 부러지는 혼줄이 나고도 출소 후에 또 원료 밀수 루트를 재건, 82년9월 한국 화물선편으로 선원을 대만 기륭(基隆)시에 보내 중국인으로부터 원료 75kg을 밀수입하는 등 홍콩·한국 루트를 대신할 대만 루트를 새로 개설했다.
  
  70노인인 張世昌씨는 여러번 신문 사회면을 장식한 직업적 밀수꾼이다. 히로뽕 원료 구입 전문으로 전향한 뒤에는 주로 仁川항을 무대로 암약해왔었다. 82년7월23일 仁川세관이 적발한, 컨테이너 화물을 이용한 염산 에페드린2백50kg 밀수입 사건에도 배후 조종자로 지목돼 수배중이었다. 張씨는 D해운 컨테이너 화물선 선원을 통해 싱가포르에서 염산 에페드린을 구입, 세관체크가 매우 어려운 컨테이너 안에 숨겨 仁川항에 부렸던 것이다. 釜山지검은 張씨를 붙들었으나 曺씨는 달아났다. 원료의 국내 처분책으로는 유명한 崔完洙씨가 검거됐다. 교도소에서 나온 지 반년만에 그는 또 쇠고랑을 찼다. 崔씨는 曺씨가 들여 온 원료를 국내 밀조단에게 중매하는 역할을 했다. 이 원료를 받아 히로뽕을 밀조한 李상조(56) 李기호씨(56) 또한 특이한 인물이었다.
  
  李상조씨는 82년 대만으로 가 그곳에서 히로뽕을 만들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았는데 무죄 판결을 받고 귀국했다. 李기호씨는 화공 기술자로서 염산 에페드린을 밀수입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국내에서 제조할 방법이 없을까 하고 연구에 몰두한 사람이었다. 만약 그의 연구가 성공했다면 히로뽕은 걷잡을 수 없이 나라 안에서 번져갔을 것이다. 지금 한·일 두 나라 수사관들 사이에는 한국의 그 우수한 밀조 기술자들이 대만·핀리핀 등 히로뽕後發國에 잠입, 밀조를 하고 있다는 정보가 나돌고 있다. 아직 확인된 바는 없으나 이 사건에서 드러난 바와 같은 밀조 기술자들과 원료 밀수책의 잦은 대만行은 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만다린호 사건 이후 한국에서 소외된 대만 선박들이 원료를 공해상에서 한국배에 넘기고 히로뽕을 대금조로 받아 가지고 일본에 밀수출한다는 정보도 있다. 히로뽕제국에 심상치 않은 새 바람이 불고 있는 듯하다.
  
  李기호·李상조씨 등이 경기도 시흥군 군포읍 삼정 화학공업사 2층 실험실에서 만든 히로뽕 28.2kg중 20kg은 禹상효씨를 거쳐 金말이씨(서울 강남구 반포동)에게 넘어갔다. 이 金씨는 80년에 구속, 복역중인 거물 韓三洙씨의 아내. 거물의 아내답게 남편을 대신하여 한번 거래에 20kg(도매가 1억 원)을 굴리는 큰손을 갖고 있었다. 이로써 韓씨 부부, 그리고 조카 昭南씨는 교도소 생활을 같이하게 되었다. 張세창씨가 염산 에페드린을 仁川항에서 빼내는 과정에서 仁川의 金모 형사는 자기 승용차로 90kg을 운반해 주었음이 밝혀져 지명 수배되었다. 이 金형사는 소매치기들을 많이 잡아들이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張세창씨와 평소 잘 알고 지낸 것이 이런 전락(轉落)의 계기가 되고 말았다. 張씨는 지명 수배중인데도 원료 밀수입에 있어서 자금 조달, 仁川항만 뚫고 나오기, 원료 및 히로뽕 처분 등 범죄 기획에서 실천까지를 도맡아 했다. 仁川항의 경비는 만다린호 사건 때처럼 허술하기만 했던 것이다.
  
  이들 뽕꾼들의 주소지는 부산·인천·서울 등 廣域 분포를 보였다. 孔검사는 공작원을 崔完洙씨에게 접근시켜 염산에페드린을 구입할 것처럼 위장, 이들의 조직 속으로 들여보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개가를 올리게 되었다. 崔씨는 그 때 딸의 결혼식이 임박, 돈이 궁한 형편이었다. 검찰은 이 수사에 원료 구입 자금으로 1천8백만 원을 미끼로 동원했다. 범인들이 미끼를 뜯어가지 못하고 미끼에 걸려 들어 손해를 보지는 않았다. 이 수사로 드러난 것처럼 최근엔 거물 히로뽕꾼들이 [脫釜山]을 선언, 서울쪽으로 대거 주소지를 옮기고 있다. 孔검사는 {지금은 서울시내와 근교에 가장 많은 뽕꾼들이 몰려 있다.
  
  특히 강남구 테헤란路 부근에 많다}고 말한다. 최근들어 釜山지검의 마약 수사반은 거의 출장수사를 해야 할 만큼 전국을 상대로 뛰고 있다. 뽕꾼들은 일부러 조직원의 사는 곳을 멀리 분산시켜 놓고 전화로 긴밀하게 연락하고 있다. 누가 잡혀 가면 {감기 들었다}는 식의 암호 전화를 걸어 달아나게끔 하고 있다. 지역분산은 도망갈 시간을 버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釜山의 히로뽕 거물들은 한때 바닷가 民樂동·南川동에 많이 살았다. 바닷바람을 이용, 밀조 공장의 냄새를 제거하는 것 외에도 日本텔리비전을 보고 있다가 일본에서 운반책이 잡혔다는 보도가 나면 빨리 도망갈 수 있다는 지리적 조건을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출처 : 월조
[ 2003-07-09, 17:4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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