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뽕 지하제국 탐험(제 1부) - 코리언 커넥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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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같은 밀조 공장
  
  崔判鎬씨의 죽음은 결국 만다린호 수사의 終章이 되었다. 수사팀의 형사 두 명이 구속되고 실질적으로 수사를 지휘하고 있었던 尹在基검사는 崔씨 가족과의 배상금 문제로 더 골치를 앓게 되었다. 1천5백만 원 배상으로 崔씨 가족과 두 형사측이 합의를 보았고 덕분인지 두 형사는 몇 달 뒤 「이례적인」 집행 유예 선고를 받고 1심에서 풀려났다. 大檢은 만다린호 수사에서 손을 떼기로 했다. 수사 리스트에 올려진 용의자들의 극히 일부 밖에 조사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50여 명만 기소한 채 수사는 2월에 들어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이 수사 종결은 그야말로 「일단락」에 불과했다. 大檢 수사진에 의한 「釜山지역 히로뽕 거물들 급습 사건」은 釜山지검을 난처한 입장에 몰아 넣었다. 「당신네 관할 구역에 그런 히로뽕 거물들이 있는데도 그 동안 무엇들 하고 있었느냐」는 식의 비판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여기서 釜山지검이 「일단락」된 大檢수사의 바통을 이어받게 됐다.
  
  釜山지검은 마약 담당 검사에게 수사를 맡기지 않고 특별수사2부 조우현(曺干鉉) 부장 검사와 제갈융우(諸葛隆佑)검사에게 「특별 수사」를 지시했다. 이 특별수사부는 大檢으로부터 관계자료를 넘겨받아 처음부터 큰 조직 우두머리에 조준을 맞추고 잠복에 들어갔다. 만다린호 사건 수사는 결코 죽지 않았다. 그것은 새롭게 탄생한 격이었다. 釜山지검의 체면을 걸고 전면에 나선 특수부의 첫 성과는 80년 2월21일에 나타났다. 수사진은 이날 밤 西구 玩月동의 金龍權씨(52) 집을 덮쳤다. 방 안에선 10명의 남녀가 어울려 노름을 하고 있었다. 검찰 특수부가 이런 작은 도박판을 노린 것은 아니었다. 수사관들은 金씨의 몸을 뒤졌다. 왼쪽 장딴지에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그것을 떼어내니 하얀 가루가 나왔다. 히로뽕이었다. 이것이 실마리가 되었다. 金씨는 히로뽕을 崔在道씨(54)로부터 샀다고 했다. 검찰은 공작원을 중간에 넣어 崔씨로부터 물건을 사는 것처럼 위장, 24일 楊亭로터리에서 접선하기로 하여 덫을 깔아 두고 수사관들을 보냈다. 崔씨는 승용차를 타고 약속장소에 왔다가 눈치를 채고 달아났다. 검찰 수사진도 차로 추격했으나 놓쳐버렸다.
  
  4일 뒤 특수부는 특수 정보에 따라 崔씨를 南川동의 S아파트에서 붙들었다. 崔씨와 함께 있던 거물 金炳默씨도 함께 검거했다. 崔씨의 공장은 西구 土城동2가17번지에 있는 싯가 2억 원짜리 4층 건물 안에 있었다. 이 4층 건물은 하나의 요새였다. 4층 건물의 1층은 연쇄점으로 세를 주고 있었다. 그 간판에다가 崔씨는 폐쇄회로의 TV카메라 렌즈를 달아 자기 전용의 4층 밀실에서 출입자를 감시할 수 있게끔 해 두었다. 2층부터는 계단 입구에 철문을 달아 층층을 격리시켰다. 계단엔 또 음파 탐지 장치를 부착, 접근하는 인기척을 알 수 있게 했다. 조직망과 연락하는 데 사용하는 무전기도 3대나 갖고 있었다. 4층과 이어지는 베란다에는 맹견 3마리를 놓아기르고 있었다. 그는 수십 쌍의 진귀한 새들도 키우고 있었다. 빨간 앵무새는 수사관을 희롱하는 듯 『사장이 집에 없다』고 똑똑히 말했다. 崔씨의 밀실에선 「히로뽕 팝니다」라고 쓰여진 큰 족자가 발견돼 수사진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79년에 구속된 그의 부하 李元澤씨(35)의 작품(?)으로 밝혀졌다. 李씨는 히로뽕에 중독돼 정신분열증을 일으켜 자기 집 대문에 그 족자를 걸어 놓았는데 기겁을 한 崔씨의 부하들이 떼 온 것이었다.
  
  崔씨는 히로뽕 밀조·밀매를 직접 했음이 밝혀졌다. 냄새가 많이 나는 1차 제조 공정은 麗水 근방의 외딴 집에서 끝낸 뒤 냄새가 적은 2차 공정 작업은 이 4층 밀실에서 했다. 그의 판매 루트는 외항선원·日本인 관광객·국내밀매 조직 등 다양했다. 그의 집에선 80kg의 원료, 10kg의 완제품이 압수되었다. 히로뽕 수사엔 더러 의혹이 따라다니고 범인을 잡고 나면 그런 의혹이 더 확대되는 수가 많다. 崔씨는 79년9월18일 다른 히로뽕 사건과 관련, 치안본부로부터 자금책으로 전국에 지명 수배돼 있었고 신문에도 크게 났다. 그런데도 그는 지명 수배된 그 주소지에서, 수배 기간 중에 사장 행세를 하며 주택가 한복판의 큰 건물에서 히로뽕 밀조를 태연히 하고 있었다. 당연히 비호 세력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崔씨의 요새 같은 2억 원짜리 집은 韓國의 히로뽕 집단이 70년대의 발흥기를 거치면서 얼마나 많은 부를 축적했고, 또 겁이 없게 되었는가를 확인시킨 하나의 물증이었다. 영세성을 특징으로 하는 한국형 범죄와는 딴판의 세계가 그곳에 펼쳐져 있었다. 「한국형 마피아」 「코리언 커넥션」이란 신문표제가 별로 과장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한국의 마피아, 총격전, 비명…
  
  클라이맥스는 3월에 왔다. 崔在道씨 조직을 깬 검찰은 3월 초순 다음 표적을 李黃純씨로 겨냥, 그를 감시하기 시작했다. 李씨의 집은 수영만이 내려다 보이는 民樂동 鶴山기슭에 있었다. 검찰은 주대은(周大銀)형사 등 수사원 3명을 뽑아 李씨 집을 망원경으로 24시간 계속 감시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기다린 것은 李黃純씨의 귀가였다. 3월19일 오후 李씨가 집에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諸葛검사는 6명의 무술 수사 요원을 데리고 들이닥쳤다. 미리 정찰을 해 둔 대로 2명은 비상 탈출구가 있는 산 쪽, 다른 한 명은 옆집의 높은 곳에서 감시, 李昌錄 형사 등3명이 대문의 벨을 눌렀다. 가정부가 대문을 빼꼼히 여는 순간 형사들은 집안으로 뛰어들었다. 방안에 있던 李씨는 엽총을 겨누며 『더 들어오면 쏘겠다』고 위협했다. 기겁을 하고 집 밖으로 물러난 검찰 수사반은 南部경찰서에 병력 동원을 요청, 60명의 무장 경관들이 달려 왔다. 그들은 집을 에워쌌다.
  
  경찰이 마이크로 『포위되었으니 자수하라』고 방송을 하자 李씨는 털스웨터 차림으로 2층 베란다에 나와 소리질렀다. 『자수 못하겠다. 빚이 너무 많다. 자수하면 죽기 전에 풀려나지 못한다. 차라리 자살하겠다』 30분 동안 설득을 해도 듣지 않았다. 경찰은 공세로 나왔다. 먼저 개 두 마리를 향해 사격, 대문 옆쪽에 있던 한 마리를 죽였다. 李씨는 사이다 병을 던지면서 경찰관들에게 총을 겨누고 으르렁거렸다. 피해가 날 것을 우려, 다시 설득 작전으로 바꾸었다. 李씨의 형(59)을 데려 와 자수를 설득해 달라고 했다. 형은 집안으로 들어가 동생을 달랬으나 李黃純씨는 말을 듣지 않았다.
  
  일단 물러났던 형은 오후 6시50분께 다시 집안으로 들어갔다. 이 때 셰퍼드 한 마리가 열려진 대문 틈으로 뛰쳐 나오려다가 경찰관의 총격을 받고 쓰러졌다. 이를 보고 있던 李씨는 고함을 지르면서 마당으로 뛰어 나왔다. 그는 허리엔 단검, 오른손에 日本刀, 왼손엔 엽총을 들고 있었다. 총을 세 번 쏘면서 그는 개를 안고 들어가더니 개의 상처를 붕대를 감아 주는 것이었다. 이 때에 형이 들어서자 李씨는 자기 목에다가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려 했다. 형이 몸을 날려 이를 막으려 했다. 총구는 빗나가면서 「빵!」 李씨의 오른쪽 어깨를 꿰뚫었다. 경찰관들이 이 때 밀려들었다. 그들은 李씨를 차에 태워 廣安동 성인 의원으로 옮겼다. 그는 2시간쯤 수술을 받았다. 散彈 20여 개를 빼냈다.
  
  장미 화단 밑의 지하 공장
  
  검찰 수사진은 「李씨 왕국」을 비로소 접수했다. 崔씨의 4층집이 요새였다면 李씨의 대지 2백 평짜리 대저택은 철옹성이요 「환상의 궁전」이었다. 이 집은 8m 높이의 축대 위에 버티고 있어 위용을 더해 주었다. 초대형 철제 대문에는 두 대의 감시용 TV 카메라가 붙어 있었다. 이 카메라를 통해 李씨는 안방에서 방문자의 얼굴을 환히 알아보고 있었다. 주위의 담벽과 철조망엔 니크롬선을 부착, 사람의 손이 닿으면 응접실에 설치된 부저가 방향별로 울려 어느 쪽 벽에 사람의 손이 닿았는가를 알 수 있게 했다. 대문을 지나 마당으로 들어서면 차고, 사설 경비실, 개집 4개 등이 있었다. 경비실은 난방 장치까지 되어 있었다. 경비실 옆에는 비상 탈출용 사다리가 산 쪽 담벽에 걸려 있었다. 도르래식인 이 사다리는 줄을 당기면 산 쪽으로 내려지게 설계된 것이었다. 개집은 TV를 갖다 놓아도 어울릴 정도의 크기였다. 담벽을 따라서 5개의 서치 라이트 시설을 해 놓았다. 현관 오른쪽에는 6평 크기의 장미 동산이 있었다. 이 화단 밑에 히로뽕 비밀 공장이 있었다. 그 입구도 교묘히 위장되어 있었다.
  
  응접실 안에는 2층 계단 아래에 잡스런 가재 도구를 쌓아 놓은 공간이 있었다. 전기 난로 등 가재 도구를 꺼내고 사방 1m 정도의 응접실 바닥 판자를 들어올리면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이 생긴다. 이 지하통로를 따라 가면 응접실, 안방, 가정부 방 밑을 S자로 통과, 장미 화단 밑의 공장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입구를 모르면 바깥에서는 도저히 지하 공장을 찾을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지하 공장은 두께 20cm의 시멘트 옹벽으로 포장되어 있었고 그 위에 다시 40cm 두께의 화단 흙이 덮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지하 공장에서는 가열기·플라스코·물통 등 2백여 점의 제조 기구가 발견되었다. 여기엔 양수기와 환풍기까지 설치, 제조 과정에서 생기는 악취와 폐수를 배출하도록 했다. 李씨의 안방과 응접실은 007영화에 나오는 범죄 집단의 상황실을 방불케 했다. 감시용 비디오 카메라, 부저, 서치 라이트 스위치, 日本刀, 단도, 레밍턴 엽총, 자외선 망원경, 실탄 30발 등등.
  
  李씨는 목욕탕을 사우나 시설을 갖춘 「환각의 집」으로 개조해 놓고 있었다. 벽은 나체 사진으로 도배돼 있었고 조명에 따라 알몸이 입체감을 갖게끔 설계했다. 중독자인 그는 히로뽕 주사를 스스로 맞고 여기에 틀어 박혀 性的 환상을 즐기곤 했었다. 히로뽕 중독자의 습벽인 의심·불안·초조를 반증하듯 李씨는 2층 천장에까지 은신처를 마련해 놓았다. 2층 큰방의 붙박이장 2개 중 하나의 천장을 뜯어 사람 하나가 겨우 숨을 수 있도록 한 것인데 천장을 잡아당기면 사다리처럼 돼 지붕 바로 밑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지붕 밑에 올라가 위에서 천장 입구를 잠그면 지붕을 뜯지 않고는 찾아낼 수 없게 돼 있었다. 李씨는 76년9월부터 79년7월까지 이 철옹성에서 히로뽕 1백63kg, 日本 말단 밀매 가격으로 약 1천억 원어치를 밀조, 주로 폭력배, 밀매 조직 등을 통해 日本으로 팔아 넘겼음이 밝혀졌다.
  
  누가 비호 세력인가?
  
  李씨가 검거되자마자 수많은 의문들이 사정없이 던져지기 시작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李黃純씨는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崔完洙씨 등 釜山항 밀수 거물의 밑에서 직접 밀수품을 반입, 운반하던 행동대의 일원이었다. 72년2월의 금괴 밀수 사건 때 구속되어 그해 12월 그는 징역 4년의 확정 판결을 받았다. 그는 馬山 교도소에서 불과 열 달 간 옥살이를 하고 73년11월에 공범 3명과 함께 형집행정지 결정을 받아 풀려났다. 그 결정의 이유는 폐결핵·심장 쇠약 등이었다. 그는 형집행정지 기간중의 주거지를 釜山鎭구 堂甘2동97번지의 兄 자택으로 제한받았다. 여기서 첫째 의문이 제기되는 바, 건장한 李씨가 어떻게 형집행정지 결정을 받을 수 있었는가 하는 물음이다.
  
  李씨는 출옥하자마자 주거지 제한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가 히로뽕에 손대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형집행정지 기간중이었다. 몸이 병들어 옥살이를 할 수 없다고 하여 내보낸 죄수가 수십만을 병들이는 범죄 조직을 꾸며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사직 당국은 李씨의 주거지 제한 이탈을 과연 모르고 있었던가?」 하는 둘째 의문이 고개를 치켜들지 않을 수 없었다.
  
  李씨는 남의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에다가 자기 사진을 붙여 가지고 두 대의 고급 외제 승용차를 번갈아 몰고 다녔다. 李씨는 75년12월의 釜山항 밀수 합동 수사 때도 히로뽕 관계 용의자로 수배되었으나 잡히지 않았다. 78년3월19일엔 釜山남부 경찰서가 李씨의 이웃으로부터 제보를 받아 그의 집을 급습, 히로뽕 완제품과 제조 기구 등을 압수했으나 李가 소재 불명이라 하여 기소 중지해 버리고 말았다. 같은 해 釜山지검에 파견된 보사부 마약 단속반에서도 李씨 관계를 수사하다가 「소재 불명」으로 처리, 종결해 버렸다. 「소재 불명」이라던 李씨는 대궐 같은 집을 짓고 그 왕국에서 엄청난 양의 히로뽕을 만들며 釜山 사회에서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사람들과 어울려 주연을 베풀곤 했다. 李씨가 어디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셋째 의문, 「그렇다면 못 잡은 것인가, 안 잡은 것인가?」
  
  이러한 의문들이 꼬리를 무는 가운데 韓國日報의 釜山지검 출입 金大成기자는 3월21일 특별수사2부의 수사 자료를 입수, 다음날 조간의 사회면 머리에 특종 기사를 쓸 수 있었다. 그 기사의 요지―.
  「…검찰은 李가 그간 마음놓고 범행을 저지른 것은 배후 비호 세력의 조직적인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확인, 李의 배후 수사를 본격적으로 벌이기 시작했다. 검찰이 배후 수사에 착수하게 된 것은 李와 함께 폭력 행위, 밀수, 히로뽕 밀조 등에 참여했던 高모씨(39 釜山시 洞萊구 巨濟동)의 제보에 의한 것이다. 제보에 따르면 73년11월13일 李가 馬山교도소에서 출감할 때 당시 의무 과장이던 金모씨에게 거액의 뇌물을 주고 『심장 쇠약과 폐결핵 증세가 있다』는 허위 서류를 작성, 출감했으며 李가 주거지 제한을 이탈, 히로뽕을 밀조하고 있을 때 당시 釜山市警 강력계 都모 경사가 李의 소재를 파악하고도 잡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난 75년12월 釜山항 밀수 수사 때에는 李가 지명 수배되었으나 당시 치안본부 金모 경위가 이를 귀띔, 달아나게 했고 李는 이를 무마하기 위해 4천4백만 원을 썼다는 것이다. 치안본부 宋모 경장은 76년12월24일 釜山의 최고급 요정 東萊 별장에서 金모 경사, 釜山의 체육 관계 단체 부회장, 李 등 4명과 함께 술을 마셨으며 李는 당시 中央동 공작 다방에 자주 다녔다고 주장했다. 宋모 경장은 對日 히로뽕 수출의 배후 조종사로 日本폭력배와 선을 대 주었다고도 했다. 李는 한때 고위층의 운전병으로 있었음을 기화로 대담한 범죄를 벌였다고 高씨는 제보했다. 한때 모 체육관의 태권도 사범이었던 高씨는 원래 李와 공범 관계였는데 사이가 나빠져 발을 빼려 하자 李가 칠성파 깡패 4명을 시켜 죽이겠다고 위협, 사직 당국에 고발하는 것을 포기했었다는 것이다. 高씨는 지난 78년4월4일 이 같은 내용을 사직 당국에 제보하는 데 성공했으나 李가 잡히지 않았기 때문인지 수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열쇠 쥔 사나이, 탈출하다
  
  金기자가 기사에서 「高모씨」라고 이름을 감춰 준 사람은 이 글에서도 한번 등장했던 高光男씨다. 그는 72년2월 釜山항 금괴 밀수 사건에서 李黃純씨와 함께 행동대원으로 구속되었던 사람이다. 기사에서 밝힌 「高씨의 제보」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高씨가 78년 4월에 관계 기관에 냈던 투서 내용인지, 아니면 釜山지검 수사진이 李씨 수사를 하면서 직접 그를 대면, 받아낸 새로운 진술인지를 모르겠으나 어느 쪽이든 그 내용은 결국 같았을 것이다. 78년의 高씨 투서는 大檢을 비롯, 釜山지검·釜山시경·보사부 등 여러 기관에 보내졌던 것 같다. 투서 요지는 대체로 인용한 기사와 같았으나 물론 뇌물 액수, 건네준 장소·방법·날짜 등 훨씬 상세했다. 기사에는 빠져 있으나 검사들도 몇 명 투서에서 거론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高씨는 李씨와 활동을 거의 같이했고 직접 李씨의 뇌물을 전달하는 일도 했으므로 투서 내용은 너무나 구체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투서는 모두 내사 종결 처리되었다.
  
  물론 당사자인 李씨가 잡히지 않았으니 내용의 진위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고 하면 변명은 될 수 있는 일이지만 투서의 내용을 밝히려는 적극적인 의지가 사직당국에 없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내사 종결의 사유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高씨의 투서는 정확한 정보였다는 것이 뒤에 입증이 되었으니까. 투서에서 거론된 공무원들이 너무 많다거나 너무 쟁쟁한 사람들이었다는 것도 「내사 종결」의 한 요인이 되었을지 모른다. 崔判鎬씨가 죽기 전 이 투서 문제로 분주하게 뛰면서 「내가 잘못되면 50명이 다친다」고 말했다는 것도 「내사 종결」과 맥이 통하는 분위기의 반증이 아니었을까? 어쨌든 釜山지검의 수사는 「高씨의 제보」를 길잡이로 하여 李씨의 배후 세력을 족치는 방향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3월28일 釜山 지검 수사반이 이번엔 서울로 날아갔다. 그들은 출근길의 두 보사부 직원을 검거했다. 보사부 약정국 마약과 감시계장 金昌淳(당시 39·사무관·서울시 冠岳구 銅省동 삼호 아파트) 보사부 서울 분소 마약 단속계장 李載昊씨(42·서울 東大門구 祭基2동 803)가 그들이었다. 두 사람은 비행기 편으로 釜山으로 압송되었다. 두 사람은 民樂동 李씨 집에 차려진 임시 수사 본부에서 조사를 받았다. 金씨는 부엌 방에서 신문을 받았다. 3월31일 새벽 金씨는 달아났다. 수갑을 찬 채 金씨는 방충망이 쳐진 부엌 방 창문을 뚫고 달아났는데 당시 두 전투 경찰대원이 방 입구를 지키고 있었으나 졸았다는 것이었다. 이튿날 金씨가 차고 있던 미제 수갑이 근처 숲속에서 발견되었다. 달아 난 것은 金씨 뿐이 아니었다. 3월31일 釜山에 있는 보사부 마약 단속반 직원 두 명, 李相京(당시 40) 유병환(柳炳垣)씨(41)가 자취를 감춰버렸다. 議政府 마약 감시 분소에서는 조영호(趙英虎)씨(42)가 행방을 감추었다. 서울 분소 前 감시원 吳鎭福씨(40)도 달아났다. 달아난 것은 보사부 마약 감시원뿐만이 아니었다.
  
  高씨의 진정서에 李黃純씨의 비호 세력으로 지명되었던 金仁鎬 경위(41·서울시경 외사과 경위) 車明鎭 순경(34·서울시경)도 달아났다. 폭력배들도 달아났다. 칠성파 두목 이강환(李康桓)(40) 부두목 천달남(千達男)(37) 단원 鄭京植씨(39)가 도망간 것이다. 핵심 정보를 지닌 공무원들이 탈출하거나 잠적하는 바람에 비호 세력 수사는 사실상 중단 상태에 빠졌다. 만다린호 수사가 崔判鎬씨의 죽음으로 끝난 것과 같이 李黃純씨 비호세력 수사도 金昌淳씨의 탈출로 일단락되고 말았다. 金씨는 76―78년 사이 보사부 부산 지역 마약 감시반장으로 일했다. 따라서 李黃純씨에 대한 정보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고 李씨를 가장 잘 보호해준 후원자였으며 히로뽕 세계와 단속 공무원 세계의 유착에 관한 가장 많은 지식을 가진 인물이었고 가장 거액의 뇌물을 받은 사람이었다. 이 핵심 인물이 수갑을 찬 채, 두 전경의 눈을 속이고 탈출한 데 대해서는 말도 많았다. 「일부러 놓아 주었다」는 험한 이야기도 나돌았고 「그가 달아나는 바람에 수십 명이 살았다」는 못된 쑥덕공론도 있었으나 모두 추측일 뿐이다.
  
  犯人이 犯人 잡으러 다니고
  
  釜山지검은 4월4일 그간의 수사 결과를 종합 발표했다. 검찰은 관련자 25명의 이름을 밝혔는데 그중 13명은 비호세력이었다. 그 13명 중 10명이 달아났다. 그 뒤 달아난 10명은 대부분 검거되거나 자수했으나 큰 수사는 일단 모멘텀, 즉 추진력을 잃게 되면 다시 본격화되는 일이 없으므로 대세에 영향은 주지 않았다. 구속된 서울 마약감시 분소 감시계장 李載昊씨의 범행 사실은 그가 釜山의 마약 분소에 근무할 당시인 78년3월 한달 동안에 이뤄진 것이었다. 3월 초순 그는 崔東基씨(당시47)의 히로뽕 밀매 사건을 수사하면서 폭력배이면서 히로뽕계의 일선 수습책 구실을 하던 李正雄씨(당시40)를 통해 崔씨로부터 5백만 원을 받고 사건을 묵살했다. 그달 하순에는 다른 히로뽕 사건을 묵살하면서 李正雄씨의 중계로 3백만 원을 또 받았다.
  
  우리는 여기서 이것을 빙산의 일각이라고 볼 때 어떤 논리가 성립되는지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말단 직원이던 李載昊씨가 한 달 사이에 사소한 두 사건의 묵살로 8백만 원을 먹었다면 도대체 그는 1년 동안엔 얼마나 받았을까? 金昌淳 씨는 李黃純씨로부터 세 차례 7천만원(일부 보도는 5천만원)을 받았다고 보도되었으나 그의 탈출로 입증은 되지 않았다. 金씨의 그 뇌물 액수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일까? 만약 그렇다면 이 보사부 마약 감시 직원들은 뇌물 액수에 있어선 장관급(明星 사건에서 당시 교통부 장관은 8천만 원을 받았다고 함)을 능가하는 기록 보유자들인 셈이다. 당시 보사부 소속 전국(부산·대구·광주·대전·수원·의정부·서울) 분소의 마약 감시 직원들은 27명이었다. 이들 가운데 6명이 李黃純씨 사건과 관련돼 구속되거나 달아났다. 두 달 앞에 구속된 黃민택씨까지 포함하면 석달 사이에 전직원의 약 3분의 1이 형사 피의자가 돼버린 셈이었다.
  
  「犯人이 犯人 잡으러 다닌 마약 단속반」이란 신문 제목(中央日報 80년4월1일치 사회면)이 절대로 과장이 아니었다. 金昌淳씨는 釜山지검에 연행되기 전 만다린호 사건 수사팀에 의해 이미 다른 건으로 찍혀 있었다. 그 건으로 그의 집을 수색했던 어느 형사는 이렇게 말했다. 『그의 아파트에 들이닥치니 그의 아내만 있었다. 아내는 단박에 어느 검사에게 전화를 걸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것이었다. 그의 집엔 왜 그리도 표창장이 많은지 모를 일이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묵살한 사건의 기록들을 상당량 집에 가져와 보관하고 있었다』 金昌淳씨의 탈출 뒷 이야기를 여기에 처음으로 밝혀둔다. 金씨는 釜山에서 달아난 뒤 롤렉스 시계를 어느 전당포에 맡기고 10만 원을 빌어 잠적해 버렸다. 검찰에서 전국에 지명 수배를 했고 그의 얼굴 사진도 신문·방송마다 크게 실렸다. 그래도 그는 잡히지 않고 세상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졌다. 필자의 취재 결과, 金씨는 지난 81년 여름에 간암으로 숨진 것으로 밝혀졌다. 그의 장례식에는 한때 그의 동료였던 보사부 마약 감시 직원들도 많이 참석했었다고 한다. 1년 동안 어떻게 피해다녔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그 도피 생활중의 초조와 불안이 간암의 악화에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은 사실이리라. 80년 초의 「히로뽕 폭풍」으로 저승에 간 것은 崔判鎬씨에 이어 그가 두 번째였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악수
  
  만다린호 사건―崔判鎬씨의 죽음―崔在道씨 검거―李黃純씨 사건―히로뽕 조직 비호세력 조사로 이어진 79년12월∼80년 초 넉달간의 수사는 일단락 되었으나 餘震은 계속되었다. 4월8일 釜山지검은 高光南 씨의 제보에서 이미 지목된 바 있는 南部경찰서 도용회(都溶會) 경사(당시 53)를 구속했다. 都씨는 지난 76년4월 수배중이던 李黃純씨를 崔判鎬씨의 집에서 붙들었으나 6백만원을 받고 풀어 준 혐의를 받았다. 우리는 여기서 고씨의 진정서 내용이 거의 정확한 것임을 재확인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 진정서에서 지목되어 있으면서도 수사에서 빠진 宋모 경위, 그리고 몇몇 검사들의 「결백」에 「예외성」을 발견하게 된다. 李黃純씨 사건의 여파로 검찰 쪽에서 히로뽕 사건과 관련, 옷을 벗고 변호사 개업을 한 사람은 담당 검사 출신의 C모씨 한 명뿐이었다.
  
  그 무렵 서울에서 검사 입회 계장이 한 명 히로뽕 사건 비호와 관련 구속되었다. 또 모 검찰청 파견 마약 반장을 지냈던 李모 경사도 히로뽕 밀조범으로 부터 3백만 원을 받은 것이 들통나 구속되었다. 조직 범죄자들과 단속 공무원들의 밀착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밀수꾼과 세관 직원, 소매치기와 치기배 전담 형사들, 도벌꾼과 산림 감시원들의 밀착 부정이 몇번이나 큰 사회 문제가 되었던 것을 기억한다면 쫓기는 자와 쫓는 자 사이의 이 끈적한 관계가 「운명적」이란 느낌마저 든다. 마약 전담 검사 출신의 어느 현직 검사는 이렇게 말했다.
  
  『히로뽕 범죄자들은 상습범들이기 때문에 전문 단속 요원들과는 나쁜 관계든 좋은 관계든 밀접해지기 마련이다. 한 단속 요원이 같은 히로뽕꾼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잡아넣을 때가 많다. 그러다가 보면 그 범죄자에 대해서 두 가지 감정이 생긴다. 하나는 연민의 감정이요 다른 하나는 저 놈이 감옥에서 나와 보복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감이다. 그래서 공직 윤리를 이탈한 인간 관계가 쫓기는 자와 쫓는 자 사이에서 성립되기 쉬운 것이다. 또 하나 수사비 문제를 들 수 있다. 히로뽕 등 마약 수사에는 특히 돈이 많이 든다. 물증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히로뽕 1kg은 손에 넣어야 하는데 함정수사를 펴 그걸 살 경우, 4백만 원이나 든다. 만약 그것이 가짜로 판명된다면 우리의 실정에서는 단속원이 자기 돈으로 물어야 한다. 수사비 대로 움직이라고 하면 사실상 히로뽕 수사는 중단될 것이다』
  
  마약 반장 출신의 어느 형사는 이렇게 말했다.
  『보사부 마약 감시원의 질이 가장 문제다. 뭐니뭐니 해도 히로뽕 조직에 대해 가장 많은 정보를 축적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형사나 검사는 자주 담당이 바뀌지만 그들은 평생 동안 그 일을 하며 한 지역에서 10년 가까이 근무할 때도 있다. 그렇게 되면 너무 많이 알아 수사를 할 수 없는 지경이 된다. 몰라서 히로뽕 조직을 소탕하지 못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지금은 그렇지 않을 줄 알지만 80년 이전에만 해도 밀조공장이 어디어디에 있는지를 손금 보듯 환히 알고 있는 감시원들이 많았다』
  
  어느 한 전과자는 70년대 말과 80년 초의 상황을 2년 전 이렇게 말했다.
  『그런 형사들과 마약 감시원들은 돈 먹는 방식에서 벌써 차이가 난다. 형사들은 한번 돈을 받으면 다음 번에 걸려들 때도 봐 준다. 그러나 마약 감시원들은 「그 때는 그 때고 지금은 다르다」면서 또 받아간다. 완전히 케이스 바이 케이스다. 그런 감시원은 저승사자 같다』 우리는 梁학승씨가 증언한 것을 새삼 기억할 필요가 있다. 「히로뽕 세계에선 별볼일 없게 될 때 잡히는 법이다」는 이야기, 「정말 거물은 리스트에도 안 올려져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
  
  최근 釜山에서 히로뽕 수사로 이름을 날렸던 辛光玉 검사는 검사측의 고충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히로뽕 수사는 검사가 보사부 마약 감시원과 경찰을 지휘하여 진행하게 되어 있는데 검사가 소신 있게 수사를 할 수 있도록 위에서 뒷받쳐 주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특히 히로뽕 수사에서는 아무리 잘 해도 모략이 따르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것들을 위에서 막아 주면 담당 검사는 사명감을 갖고 일하게 된다. 그리고 검사가 솔선 수범할 때 형사나 감시원들이 곁눈질을 할 수가 없는 법이다』
  
  그들은 끝까지 싸운다
  
  필자는 韓國의 히로뽕 역사를 3期로 구분한다.
  제1기는 60년대로서 「잠복기」였다. 日本에서 쫓겨온 재일 동포 출신 밀조 기술자들이 산발적으로 히로뽕을 만들어 팔기 시작한 시기였다. 사회문제로까지는 악화되지 않았고 단속 법규도 없던 때였다.
  제2기는 70년대로서 필자는 「발흥기」라고 부른다. 釜山항을 중심으로 밀수 조직이 히로뽕 조직으로 전환하면서 그들이 제1기의 주인공이었던 밀조 기술자들을 부리며 악질 공직자들의 엄호 속에서 「히로뽕 산업」을 국제 규모로 확정한 시기다. 이 시기의 끝은 만다린호 사건과 李黃純씨 사건이었다. 79년말―80년초의 정치적 과도기와도 일치하는 이 분수령적(分水嶺的) 사건은 70년대의 모순을 한꺼번에 노출시킨 대폭발이었다. 뿌리깊은 홍콩 루트의 원료 밀수, 단속자와 범죄자의 유착, 솥뚜껑으로 파리 잡는 식의 전근대적 마약 수사 등등의 문제들이 터져자빠진 것이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수사관들의 정신 자세와 제도 면에서 그 뒤 상당히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음은 다행한 일이었다.
  제3기는 80년부터 장래의 어느 시점일 것이다. 단속이 잘되면 이 시기는 「쇠퇴기」로 분류될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日本처럼 「전국 보급기」가 될 듯하다.
  
  82년6월12일 아침, 慶北 盈德군 丑山면 앞바다는 맑았다. 파도는 1―2m로 약간 치는 편이었다. 빨간 모자를 쓰고 트레이닝복을 입은 네 사나이가 작은 통통배를 하나 몰고 동쪽으로 나가고 있었다. 한 시간쯤 달렸을까, 해안선이 부옇게 가물거리는 위치까지 달려온 통통배는 바다에 떠 있는 화물선 쪽으로 다가갔다. 화물선은 3천t쯤 되어 보였다. 통통배에 탄 사람들이 빨간 모자를 벗어 흔들자 화물선 갑판에 세 사람이 나타났다. 세 선원들도 무엇이라 중국어로 소리질렀다. 그들은 미리 준비해 둔 듯한 두레박을 밧줄에 달아 통통배로 내려보냈다. 빨간 모자 사나이가 그 두레박 안에 무엇을 넣었다. 반쪽 10원짜리 대만 지폐였다. 두레박은 다시 올라갔다. 세 선원들은 올라온 지폐를 자기들이 갖고 있던 다른 반쪽과 맞추어 보더니 이번엔 쌀가마니만한 감색 부대를 주렁주렁 달아 내리기 시작했다. 14개째 부대가 통통배에 실리자마자 배는 잽싸게 선수를 돌리더니 해안선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화물선의 세 선원들은 당황한 듯 발을 동동 구르며 고함을 지르더니 황급히 선실로 사라졌다.
  
  얼마쯤 지났을까, 화물선이 남쪽으로 향해 발진, 서서히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이 통통배에 타고 있던 네 사람은 盈德경찰서 형사계 朴대일 순경을 비롯한 형사들이었다. 사라진 화물선은 파나마 선적의 스윙호였다. 네 형사들이 이런 「쇼」를 하게 된 경위는 이렇다. 영덕 경찰서는 하루 전 어부 朴아무개로부터 신고를 받았다. 축산(丑山)면 어촌계장 崔益光씨(47)가 1백만 원을 자기에게 주면서 작은 어선 한 척을 구해 달라고 은밀히 부탁하더라는 것이었다. 이 첩보에 접한 경찰은 崔씨를 비롯한 5명의 밀수 하수인들을 그날 몽땅 잡았다. 하수인 그룹의 두목인 박태준(朴泰駿)씨(41·釜山시 南구 감만1동33의 1)는 5월 하순 화교 魏中興씨(47·釜山시 南구 감간1동33의 1)로부터 일화 1천1백만 엔, 화물선 컬러 사진1장, 밀수품 운반책 포섭 자금 6백만 원, 암호용 지폐 반쪽을 넘겨 받았다고 했다. 임무는 6월12일 오전10시 盈德앞 12해리의 공해상에서 日本에서 대만쪽으로 가는 스윙호에 접근, 밀수품을 받아오라는 것이었다.
  
  朴씨로부터 이 모든 정보와 물품을 인계받은 경찰은 상대방 확인용인 빨간 모자를 쓰고 접근, 물건만 인수하고 대금은 주지 않고 돌아왔던 것이다. 공해상이라 스윙호에 대해서는 다른 조처를 취할 수 없었다. 이날 작전에는 해경과 해군 경비정까지 동원돼 먼데서 통통배를 엄호했다. 문제의 감색 부대를 열어 보니 안에 든 것은 하얀, 가루, 염산 에페드린이었다. 무게는 7백56kg, 즉 2천5백만 명에게 주사를 한 번씩 놓을 수 있는 양을 만들 수 있는 원료였다. 盈德경찰은 그러나 이 사건의 배후 조종자 魏씨는 잡지 못했다.
  
  그는 누구인가? 만다린호 사건 때 염산 에페드린의 韓國측 貨主의 한 사람으로 지명 수배되었던 인물,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도망중에 또 한탕 크게 하려다가 실패한 것이었다. 그는 만다린호 사건의 교훈을 잊지 않고서 범행 장소를 치외 법권 지대인 公海上으로 옮겨 놓았다. 히로뽕꾼들은 열심히 배우는 것이다. 지난 1월에는 만다린호 사건 때 구속됐다가 복역하고 나온 曺積傑씨가 하로뽕 밀조 조직에 또 원료를 공급하다가 釜山지검에 의해 조직이 깨지는 바람에 지명 수배되어 있다. 만다린호 사건의 그 지긋지긋한 악몽은 뽕꾼들에겐 그렇게도 쉽게 잊혀지는 일장 춘몽이던가? 그들은 외딴집에서, 아파트에서, 사창가에서, 술집에서, 지하에서, 밀실에서, 선실에서, 이제는 공해상에서 우리 선량한 시민들을 상대하여 끝까지 싸울 것이다.
출처 : 월조
[ 2003-07-09, 17:5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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