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뽕 지하제국 탐험(제 1부) - 코리언 커넥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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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死神 만다린호
  
  『대나무 실은 배를 주의하라』
  
  1978년 가을 水原지검 仁川지청 尹在基 검사는 색다른 사건을 하나 맡게 되었다. 그것은 두 형사가 강도로 돌변하여 금괴 등 1억여 원어치의 금품을 빼앗아 가 버린 희한한 사건이었다. 仁川에 사는 K라는 밀수꾼이 있었다. K는 78년 가을 仁川항에 도착한 외항선 선원이 자신에게 전달할 금괴를 갖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K는 이 금괴를 반출해 나오는 방법을 궁리하다가 어느 형사의 정보원을 누구 소개로 알게 되었다. 문제의 두 형사는 이 정보원의 부탁에 따라 부두 안으로 들어가 외항선에서 금덩어리를 한 가방 건네 받아 바깥으로 나왔다. 두 형사는 정보원을 데리고 이 금괴의 중간 판매책인 安仁淑씨(당시 39세·여자)에게 물건을 전달하는 체하다가 그대로 安씨를 체포, 서울의 T호텔로 끌고 갔다. 두 형사는 이틀 동안 安씨를 객실에 감금하고 혼을 뺀 뒤 약 1억 원어치의 금괴와 현금을 빼앗았다. 그리곤 安씨를 풀어 주고 그들은 유유히 사라졌다. 安씨와 K씨는 속으로만 끙끙 앓았다. 밀수품 사고를 누구에게 신고하겠는가? K는 너무나 애통했던지 개인적으로 잘 아는 서울의 어느 검사에게 수사를 부탁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K씨는 두 형사가 仁川결찰서 소속일 것이라고 짐작, 그 검사는 K씨 말대로 仁川결찰서의 인사 기록 카드를 뒤지는 소동을 벌였으나 실마리를 잡을 수 없었다. 仁川 바닷가에는 어느새 이 소문이 퍼지게 되었다. 그래서 尹在基 검사가 仁川 경찰서를 지휘, 공식적으로 수사에 나서게 되었다. 尹검사는 安씨를 찾아내고 그를 데리고 T호텔로 갔다. 한 호텔 종업원이 결정적인 제보를 했다. 『그 때 두 형사는 수사를 한다고 객실을 빌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중 한 사람은 낯이 익은 형사였다. 그 전에 우리 호텔에서 텔리비전을 잃어버려 서울 중부 경찰서 형사계에 신고를 하러 갔었는데 그곳에서 본 적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尹검사는 며칠 뒤 아침에 중부서 서장 실로 들이닥쳤다. 서장에게 직원 조회를 열어달라고 부탁했다. 그 자리에서 두 형사의 얼굴을 확인, 현장 구속을 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두 형사는 그 낌새를 알아차리고 조회 전에 이미 행방을 감추어 버렸다. 尹검사는 치안 본부에 시한을 정해주고 그때까지 잡아 주지 않으면 공개 수사를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얼마 뒤 치안본부는 金남석 순경 등 두 형사를 체포, 특수강도 혐의로 구속시켰다. 지금은 변호사를 개업하고 있는 당시의 尹검사는 이 때 安仁淑씨를 신문하다가 막연한 정보를 하나 얻게 되었다. 安씨는 보석류 밀수업계의 거물 중매상이었다. 어머니는 독립 운동가, 자신은 여군 대위 출신인 安씨를 신문하면서 尹검사는 그녀의 애국심에 호소했다. 태극기를 바라보게 하고 애국가를 계속 부르도록 했다. 몇 번 부르더니 눈물을 글썽거리며 속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安씨는 밀수 귀금속 보석류를 많은 거물 정치인·기관장들 집에 전달한 사실도 고백했다. 그 명단들이 공개되면 「정치 판도가 바뀔 정도였다」고 한다. 安씨는 어느 날 「仁川항에 대나무를 실은 배가 들어오면 주의해서 지켜보라」고 이야기했다. 安씨는 79년 여름, 재판을 받던중 관절염이 도져 병보석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숨졌다.
  
  구멍 뚫린 仁川 부두
  
  1979년11월27일 만다린호(2천5백t)는 대만에서 대나무 3만8천 단을 싣고 홍콩으로 떠났다. 다음날 만다린호는 홍콩에 도착, 이틀간 정박, 무슨 물건을 더 싣고 韓國을 향해 출항했다. 이 배가 仁川항에 들어온 것은 12월7일이었다. 이틀 뒤인 9일 오후5시께 仁川 프린스 호텔의 309호실에는 네 명의 사나이들이 모여 무엇인가 의논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만다린호 선원(會在得(54) 林滋靑(44) 채포홍씨와 한국인 金奎澈씨(44·釜山시 南구 大淵동1804의 4)였다. 서로가 모두 안면이 깊은 사이인 듯했다. 여기서 선원들은 金씨에게 자기들이 가져온 「물건」들을 빼내 팔아달라고 부탁했다. 그 물건이란 홍콩에서 실은 것이었다.
  
  會再得은 홍콩의 貨主 여만복으로부터 밀수를 부탁받은 녹용 1백50kg, 염산 에페드린2백50kg, 라도 손목시계 5백 개를 숨겨두고 있었다. 林滋靑은 홍콩의 宋옥성으로부터 부탁 받은 밍크목도리 25개와 선물 세트 82개, 채포홍은 자신이 직접 구입한 녹용(2백4kg)과 브로바 손목 시계(3천개)를 갖고 있었다. 이들을 포함하여 만다린호 선원 9명은 모두 자기 나름대로의 루트를 통해 넘겨받은 어마어마한 양의 녹용, 우황청심환, 염산 에페드린, 시계 등을 감춰 두고 있었다. 파나마 선적의 이 배는 20여 명의 자유중국 선원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겉으로는 화물선, 속은 밀수 전용선이었다.
  
  뒤에 이 배의 공동선주는 3명으로 밝혀졌다. 그 중 한 명은 동남아 어느 나라의 경찰 고위 간부였다. 하급 선원들은 월급을 전연 안 받고 있었다. 그들은 이 배를 탈 때 선주인 「사내영」이란 사람에게 1인당 4백∼5백 달러씩의 승선료까지 바쳤을 정도였다. 이 선원들은 밀수를 공동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루트에 따라 따로따로 밀수품을 운반해 주고 있었다. 10여 갈래의 밀수 루트가 이 한 배에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네 선원으로부터 판매 부탁을 받은 김규철(金奎澈)씨는 그날 밤 9시 밀수전과자 徐 源씨(45·서울城東구 上往十里동 270의 1)를 찾아갔다. 徐씨는 밀수품을 유출해 주겠다고 했다. 그는 金씨를 통해 선원 會씨로부터 山자가 적힌 암호 쪽지를 받았다. 만다린호 선원 채포홍은 별도로 이날 아침 평소부터 잘 아는 변광일(邊光一)씨(63·서울 강남구 역삼동76의 34)에게 밀수품이 도착했다고 연락했다. 邊씨도 仁川항의 밀수품 밀반출에 능력이 있는 徐씨에게 다시 부탁하게 되었다. 선원 채씨는 접선시 확인용으로 한국돈 1천원권을 반으로 찢어 그 하나를 徐씨에게 주었다.
  
  다음날인 10일 오후 徐씨는 밀수 세계에서만 통하는 이 두장의 반출증을 갖고 仁川항 주변의 건달인 읍용철(扈龍喆)씨(54)를 찾아갔다. 徐씨는 암호 쪽지 두 장을 扈씨에게 건네 주면서 물건을 서울 東大門구 제기동의 자기 집 비밀 창고까지 가져다주면 3천만 원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두 사람은 만다린호에서의 접선 시각을 11일 새벽 2―3시 사이로 정했다. 11일 오후 7시 扈씨는 해진검수(株) 소속 선박 화물 검수원 金榮福(37) 朴熙喆씨(37)를 자기 집으로 불렀다. 두 사람에게 상황을 설명해 준 뒤 부두 경비원 및 운전사 포섭을 지시했다. 그들은 성공하면 3천만 원을 갈라 먹기로 했다. 포섭자금 1백만 원을 받은 金榮福씨는 仁川항 부두 관리 경비원 金連植(34) 金永柱(34) 金秉云씨(37)에게 협조를 부탁, 승낙을 받았다. 운전사 포섭을 책임진 朴熙喆씨도 이날 밤 10시 金모씨를 통해 경기 7아2754호 덤프 트럭 운전사 李東福씨(27)를 소개받았다.
  
  徐씨와 扈씨는 단시간 안에 그들의 조직망을 통해 仁川항에 구멍을 뻥 뚫어 놓은 것이었다. 남은 과제는 이 구멍으로 들어가 밀수품을 꺼내 오는 일뿐이었다. 운전사 李씨는 11일 새벽 2시께 트럭을 몰고 경비원들의 환영(?)을 받으며 仁川항 제3부두를 통과, 제1부두 6번석에 접안한 만다린호 옆에 다가갔다. 밀수꾼 일당은 이날 새벽 녹용, 히로뽕 원료, 시계 등 약 30억 원어치의 밀수품을 한 트럭 가득 싣고 바깥으로 나갔다. 이들은 중국 선원들로부터 이 물건들을 인수할 때는 지폐 반 조각을 제시, 선원 쪽에서 갖고 있던 다른 반쪽과 맞추어 서로를 확인하였다.
  
  대만 밀수선단의 정체
  
  尹검사는 만다린호가 대나무를 싣고 들어왔다는 것을 알고 이를 주시하고 있었다. 仁川경찰서 姜모 형사가 결정적인 정보를 얻은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仁川항 주변의 밀수 인맥에 정통한 정보원이 「수상한 트럭이 나갔다」는 단서를 제공했던 것이다. 尹검사는 이 정보에 따라 경찰을 지휘, 트럭의 행선지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일단 반출된 밀수품은 화교가 끼인 10여 명의 밀수 중매상인들을 통하여 이틀 사이에 서울, 부산, 대구 등지로 흩어졌다. 수사진은 중매상들을 추궁하여 판매 루트를 알아냈다. 수십군데의 판매선을 뒤져 밀수품의 약 3분의 2인 20억 원 어치를 압수할 수 있었다. 검찰은 만다린호의 출국을 정지시키고 선원들도 일단 붙들어 두고 신문을 시작했다. 검찰은 金奎澈씨 루트 이외에도 두 갈래의 밀반출이 더 있었음을 밝혀냈다. 만다린호 선원들은 한국에서도 저마다의 밀반출·밀매 루트를 갖고 있었다.
  
  중국인을 수사할 때는 통역을 잘 써야 한다고 한다. 통역을 잘못 써 수사기관의 정보가 중국인 피의자들에게 빠져나가 수사를 망치는 수가 왕왕 있었다고 한다. 검찰은 화교 학교 교사를 통역으로 쓰면서 중국선원들 가운데 한 사람의 협조자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수사에 협조하면 구형량에서 선처를 받을 것이라고 기대했던지 그 선원은 만다린호의 그 동안의 행적과 범행 수법에 대해서 소상하게 털어놓았다. 이 증언에 의해 수사는 급진전했다. 12월25일 수사진은 만다린호를 수색했다. 尹검사는 그 선원의 귀띔에 따라 기관실 밑에 있는 빈 탱크를 열도록 했다. 이 탱크는 배 안에서 생기는 폐유·폐수 등 찌꺼기 액체를 모아 두는 곳으로 항구에 들어가서는 못 열게 되어 있었다. 이것을 열면 오염 물질이 바다로 쏟아지기 때문이었다. 만다린호 선장은 한국의 환경 보전법을 들먹이며 대들었으나 결국 개봉했다. 그 속에는 녹용 2백kg, 시계 1천4백80개, 우황 청심환·해구환 1만2천 박스 등 싯가 10억원어치의 밀수품이 아직 남아 있었다.
  
  尹검사는 중국선원들로부터 대나무를 실은 또 다른 배 두 척이 仁川을 향해 오고 있다는 정보도 얻어냈다. 두 배 가운데 하나는 파나마 선적의 윤타이호(1천6백t급)였다. 이 배는 만다린호와 똑같은 항로, 즉 대만―홍콩 항로를 따라 17일에 仁川에 들어왔다. 수사진은 윤타이호도 수색, 역시 빈 물탱크에서 녹용·시계 등 밀수품 싯가 1억2천만 원어치를 압수했다. 지금까지의 밀수 수사는 거의가 밀수선이 떠난 뒤에 이뤄져 밀수 루트의 상부 구조는 밝혀지지 않고 끝나 버리는가 하면 밀수선원들에 대한 처벌도 할 수 없었다. 이 사건처럼 동시에 세척(만다린·윤타이호에 이어 또 한척을 적발)의 현행 밀수선을 잡은 것은 유례가 드문 일이었다.
  
  尹검사는 仁川, 富平 경찰서에서 20명의 형사들을 뽑아 대규모 전담 수사진을 구성, 장기 확대 수사에 들어갔다. 수사 방향은 국내 밀수 조직으로 초점이 맞추어졌다. 김규철(金奎澈)씨 등 밀수품 1차 인수자들, 그 다음의 중간 상인들, 그 밑의 구매자들 등 수백명의 명단이 작성되었다. 전국에서 50여 명의 한약상·화교들이 수사 대사에 올랐다. 중국 밀수선원들을 신문해 감에 따라 더욱 엄청난 정보가 밝혀지기 시작했다. 만다린, 윤타이 호를 포함한 14척의 중국 선박들이 몇 년 동안이나 밀수품을 釜山·인천(목포항으로 운반해 왔다는 정보였다. 尹검사는 이 「밀수선단」 14척의 명단을 만들어 대만 정부에 통고했다.
  
  원료 공급을 독점한 홍콩루트
  
  이 수사에 참여했던 한 고참 형사는 『내 평생에 그토록 복잡한 사건은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수십 명이 관련된 밀수 현장을 덮쳤고 현물과 밀수 선원들, 그리고 일부 국내 조직원들을 무더기로 확보했으므로 수사 소재가 엄청나게 많았다. 수십명의 피의자들이 몇 년 동안의 밀수 사실을 좔좔 진술하는 바람에 수사 정보도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20명의 수사진이 밤낮 없이 뛰어도 그 정보를 다 소화할 수가 없었다. 해가 바뀌어 80년이 되면서 그 때까지의 全面 수사에 한 가닥의 맥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수사 대상으로 떠오른 사람들 가운데는 히로뽕과 관련된 사람들이 유독 많다는 것이 바로 그 맥이었다. 그 때까지의 수사진은 녹용·시계 루트에 더 열중했었다. 80년 1월엔 수사 주력이 히로뽕 루트로 쏠리기 시작했다. 검찰은 히로뽕의 흐름을 밟아가기 시작했다.
  
  金奎澈씨가 빼낸 밀수품 가운데 히로뽕 원료(염산 에페드린) 2백50kg을 인수한 것은 南基龍씨(44·釜山시 中구  州2동306)였다. 南씨는 이것을 자기 집에 가져다 보관하고 있다가 붙들렸다. 현물도 압수되었다. 검찰은 이 南씨의 여죄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南씨는 釜山항을 무대로 대규모 밀수를 상습적으로 해 온 인물임이 드러났다. 그의 공범으로는 전직 경찰관 임호직, 60년대부터 유명한 밀수꾼이며 70년대에는 히로뽕꾼이 된 鄭재창씨도 끼여 있었다. 南基龍·金奎澈씨 등은 79년6월 한달에만도 두 차례에 걸쳐 밀수입한 염산 에페드린 5백kg을 인수, 釜山 東萊구 長箭동 부곡 아파트에 사는 공범 집에 보관해 두고 釜山의 여러 밀조 조직에 이를 kg당 14만 원씩에 팔았음이 밝혀졌다. 5백kg이면 히로뽕 약 3백kg(日本 말단판매 가격 한화 2천억 원어치)을 만들 수 있는 양이다. 日本에서 한 해에 팔리고 있는 히로뽕 총량의 약15%에 해당한다. 그런 방대한 양을 한 달 동안 취급했다면 이 조직은 국내 최대의 원료 공급 루트이며, 그 밑으로는 수많은 밀조 조직이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수사진은 南基龍씨로부터 원료를 산 張春源씨(49·釜山시 影島구 靑鶴2동 125)를 붙들었다. 張씨는 79년 6―10월 사이 南씨로부터 네 차례 50kg의 염산 에페드린을 구입, 鄭忠孝씨(46·釜山시 西구 괴정.槐亭1동 578)에게 그중 20kg을 kg당 14만5천 원씩에 팔았다고 진술했다. 검찰은 80년 1월8일 鄭씨 조직일당 3명을 慶南 密陽군에서 붙들었다. 밀조 기술자 鄭씨는 張씨로부터 사들인 원료를 가지고 朴紀鎬씨(48)등 2명과 밀조 공장을 차려 히로뽕을 만들고 있었다. 이것은 중요한 성과였다. 히로뽕 수사에서 원료 루트가 밝혀지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루트가 여러 단계이므로 上線 추적이 어렵고 원료 밀수는 잡아도 약사법 위반으로 밖에 벌할 수 없어 수사관들이 매력을 덜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만다린호 사건은 바다 건너 홍콩의 원료 공급자로부터 밀조 공장까지의 흐름이 확인된 첫 사례였다.
  
  검찰은 이제 南基龍씨가 79년6월에 누구로부터 5백kg의 원료를 받았으며 이 원료는 어떻게 釜山으로 들여왔는가에 수사 방향을 돌리게 되었다. 그 제2의 원료 밀수 루트는 金奎澈 루트보다도 더 굵직한 것 같았다. 이즘부터 수사는 대검찰청 특수부 4과의 박력 있는 黃相九 부장검사 지휘로 넘어갔다. 수사 규모가 너무 커진 데다가 용의자들이 대부분 釜山에 있어 仁川지청 수준에선 釜山 지검의 관할권으로 들어가기가 곤란했기 때문이었다. 黃검사는 대검 수사관들과 검찰청에 파견 나온 고참 형사들을 이 수사에 더 투입했다. 黃相九 부장 검사는 이 때 히로뽕 조직에 대한 일대 소탕을 결심했던 것 같다. 그것은 절호의 기회임이 분명했다. 韓國으로의 히로뽕 원료 반입을 거의 독점했음이 분명한 만다린, 유타이호 등 대만 밀수선단으로부터의 생생한 정보가 전면적인 소탕 작전을 뒷받쳐 줄 것 같았다.
  
  지금까지의 히로뽕 수사는 下線 조직에서 上線으로 기어오르는 방식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수사에서는 개별 조직 밖에 검거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은 원료 밀수·도매상에서 시작, 아래로 쫙 퍼진 밀조·밀매 조직으로 내려가는 부채살 수사, 곧 확산식 수사가 될 터였다. 전국의 주요 조직을 총람하면서 그대로 쓸어버릴 수 있는 기막힌 기회였다. 수사팀은 그 동안의 히로뽕 사건 기록을 분석하고 만다린, 윤타이호 수사에서 드러난 새 자료와 종합, 일종의 한국 히로뽕 인맥 지도를 만들었다. 이 때 수사 대상으로 드러난 인물들은 굉장했다. 원료 밀수 부문에서는 林鎭禮, 曺積傑(화교·44·서울中구 회현동), 위중흥(魏中興.화교), 鄭在昌, 郭진국, 吳鳳善, 崔完洙, 임호직, 金奎澈, 안세걸(顔世傑.화교), 吳鳳瑞씨 등이 떠올랐다. 이들로부터 원료를 공급받는 조직으로는 崔判鎬, 李黃純, 崔在道, 李화선, 吉泰仁씨 등이 체크되었다. 드디어 80년1월13일 대검 특수부는 20여 명의 수사진을 釜山으로 내려보냈다. 수사 책임자는 대검 수사과 金모 계장, 그 밑의 수사진은 거의가 仁川·富平 경찰서 형사들이었다. 이 수사팀이 가장 중요한 인물로 점찍은 것은 崔判鎬씨였다.
  
  새벽에 죽다
  
  釜山 廣安里 해수욕장의 갯바람이 늘 바다 냄새를 몰아다 주는 民樂동 주택가의 한밤중, 崔判鎬씨의 2층 양옥 현관문을 쾅쾅 두드리는 네 사나이가 있었다. 시각은 1월14일 새벽 1시. 崔씨가 잠옷 바람으로 놀라 일어나 문을 열었다. 네 사나이는 구둣발인 채로 마루로 올라서면서 소리쳤다. 『우리는 청와대 특별 지시로 왔다. 홍콩의 간첩에 돈 대주는 놈을 잡으러 왔다. 불을 다 켜!』 『들어갑시다』 崔씨가 말했다. 『어이쿠!』 崔씨는 다짜고짜 가슴을 채고 고꾸라졌다. 두 사나이는 지하실로 뛰어내려갔다. 다른 두 사나이는 배를 움켜쥐고 쓰러진 崔씨를 끌고 2층으로 올라갔다. 崔씨의 아내 鄭내정씨(48)와 세 아들이 깨어 일어났다. 지하실에서 돌아온 한 남자는 권총을 뽑아 겨누며 가족들을 한 방으로 몰아넣었다. 다른 사나이는 전기 스탠드를 팽개쳐 박살을 냈다. 갑자기 2층에서 『아이고 엄마야!』하는 비명이 들리더니 곧 조용해졌다. 鄭여인이 뛰어나가려 하자 감시역을 맡은 사나이가 꽥 고함을 질렀다. 『총알 박아 줄 테니 도망가 봐라!』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현관문 여닫는 소리가 났다. 2층에서 한 사나이가 崔씨를 업고 내려왔고 다른 사나이는 뒤에서 밀며 바깥으로 나가는 게 보였다. 감시역의 사나이는 『다른 데로 조사하러 갔다』고 했다. 그제야 가족들은 2층에 올라가 보았다. 물이 담긴 바께쓰가 놓여 있었고 방바닥이 흥건히 젖어 있었다. 한 시간쯤 흘렀을까, 전화벨이 울렸다. 그 사나이가 전화를 받았다. 상대방은 崔씨 집의 지리를 묻는 듯했다. 다시 한 30분이 흘렀다. 어둠 속에서 세 사나이가 崔씨 집을 찾아왔다. 조금 전 崔씨를 업고 나간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방바닥에 주저앉아 鄭씨가 냉장고에서 내준 맥주를 계속 마시면서 자기들이 서울 대검찰청에서 내려온 수사요원들이라고 소개했다. 술기운이 좀 돌 때쯤 되어서 선임자인 듯한 키 큰 사람이 어렵게 입을 뗐다.
  『崔判鎬씨가 죽었습니다.』
  『예?』
  『취조를 받던 중 달아나다가 베란다에서 떨어졌습니다』
  『아이구!』
  鄭여인은 비명에 가까운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피를 부른 강제 수사
  
  崔判鎬씨는 달아나다가 죽은 게 아니었다. 그는 자기 집 2층에서 고문을 받다가 정신을 잃었다. 두 형사들이 그를 업고 약 15km 떨어진 釜山大學병원의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숨져 있었다. 시체 부검 결과로는 사인이 갈비뼈가 부러지면서 심장을 찌른 것으로 나타났다. 崔씨 가족들의 증언에 의하면 崔씨는 좌우 갈비뼈가 열 개나 부러지거나 금이 갔었다고 한다. 손목엔 수갑 자국, 정갱이와 얼굴엔 피멍이 들어 있더라는 것이다. 이날 밤 釜山에서 갈비뼈가 부러진 것은 崔씨뿐이 아니었다. 형사들은 崔씨 집과 거의 동시에 西面에 있는 李화선씨 집에 들이닥쳐 즉석 고문을 하다가 갈비뼈를 다섯 개나 부수고 말았다. 그도 釜山大學병원 응급실로 옮겨졌는데 목숨을 보전했다.
  
  세 번째의 부상자는 화교 曺積傑씨였다. 몸이 장대한 그는 형사들에게 붙들려 釜山역 앞의 아리랑 호텔 객실에서 취조를 받았다. 그도 갈비뼈가 몇 개 부러지는 고문을 당했다. 일선에는 이날 밤 갈비뼈가 부러진 피의자는 두 명 더 있어 모두 5명이 죽거나 다쳤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두 명의 이름은 알지 못한다. 이들은 어떤 고문을 당했기에 그 지경이 됐는가? 그 상세한 과정을 차마 이 지면에 기록할 수가 없다.
  
  14일 釜山지검은 崔씨를 때려 죽게 한 富平 경찰서 朴종대(42) 仁川 경찰서 吳승록씨(32) 등 두 형사를 구속했다. 이 수사에 참여했던 수사관들은 『히로뽕 중독자들의 특이 체질을 모르고 함부로 다루다가 그런 사고를 냈다』고 변명했다. 그들의 설명에 따르면 히로뽕 중독자들은 뼈속에서 칼슘 성분이 녹아나와 수수깡처럼 퍼석하여 잘 부러진다는 것이다. 필자의 상식으로는 히로뽕이 그런 작용을 한다는 의학 보고는 없는 듯하다. 그러나 히로뽕 중독자들이나 고참 수사관들은 『경험에 비추어 그렇더라』고 한결같이 말하고 있다. 다른 수사관들은 『그날 밤 釜山에 내려 온 형사들은 대체로 경험이 얕은 사람들이었다. 도대체 그렇게 피의자를 다룬다는 건 상식 밖의 일이다』고 했다. 『사건을 지휘하는 쪽에서 형사들을 너무 부추긴 것 같았다. 너무 겁없이 취조를 한 탓이 아닐까?』(어느 관계 형사의 말) 『남의 관할 구역에서 수사하느라고 그들은 조급했던 것 같다. 자기 관할 구역이면 파출소나 경찰서 시설을 빌어 차분하게 신문을 할 수 있었을 텐데 他地라서 서둘러 정보를 빼내려다가 그런 사고를 낸 것이 아닐까?』(어느 형사의 이야기)
  
  좌초한 수사진
  
  이날 밤 대검 수사진은 통금 시간을 이용, 동시에 여러 용의자 집을 덮쳤다. 히로뽕꾼들이 보통 통금 시간에만 집에 붙어 있는 습관을 노린 것이었다. 서로 연락을 취하지 못하게 하려는 뜻도 있었다. 그러나 초장부터 崔, 曺씨가 잇따라 그런 꼴을 당하는 바람에 새벽이 밝아올 때쯤엔 수사가 아니라 수습으로 방향이 바꾸어져 버렸다. 세차게 나갔던 수사는 암초에 부딪쳤고 수사진은 다음 날 서울로 올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경찰은 죽은 崔씨와 李씨에 대해서는 수사를 중단시켰다. 曺積傑씨만은 구속했다. 曺씨는 만다린 호의 木浦루트에서 중심 인물이었다. 79년9월19일 만다린호는 木浦항에 들어갔다. 韓國측 밀수품 貨主인 林모(당시 미체포)씨는 木浦 경찰서 외사과 尹春燮 경장, 木浦세관 崔允錫씨(22)의 묵인 아래 수십개의 부대에 든 염산 에페드린 1천5백kg을 이 배에서 빼냈다. 그는 木浦에 사는 中國人 한의사 張守禎씨(48) 집에 이것을 맡겨 두었다가 曺積傑 씨에게 넘겼다.
  
  曺씨는 원료를 서울과 釜山 등지의 여러 밀조조직에 넘겨 팔았다. 曺씨가 취급한 원료 1천5백kg은 한국 수사 역사상 최대의 히로뽕 원료 밀수량이었다. 이것은 히로뽕 완제품 1t을 만들 수 있는 양으로서 1t이면 일본의 말단 밀매 가격으로는 약 6천6백억 원어치에 해당한다. 당시 韓國에서의 年間 히로뽕 제조량은 2t쯤으로 추정되었다. 曺씨 그룹은 단 한번의 밀수로 韓國 지하조직 수요량의 반을 공급했다는 계산이 된다. 이것으로 미루어 만다린호를 필두로 한 14척의 대한 밀수선단이 韓國에 대한 원료 밀수를 몇 년 동안 거의 독차지하여 왔다는 추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수사진은 釜山의 애인집에서 曺씨를 체포할 때 부수입을 하나 기록했다. 曺씨가 타고 있던 승용차는 龐모씨(38) 소유로 밝혀졌다.
  
  「석이」란 별명을 가진 龐씨는 그 몇 년 전 히로뽕 밀매사건과 관련, 수배된 적이 있었다.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던 어느 형사가 승용차 운전사를 데리고 龐씨를 붙들었다. 龐씨는 자기는 아무 죄가 없다고 했다. 조회를 해보니 과연 그는 기소 중지되어 있지 않았다. 어떤 사건의 피의자가 달아나면 수사 당국은 일단 그를 「기소 중지」를 시키고 수배를 한다. 기소 중지가 안 돼 있다는 것은 누군가가 고의로 龐씨의 전과를 지워 버렸다는 것을 뜻한다. 형사는 龐씨를 추궁했다. 그는 고백했다. 서울 히로뽕계의 거물 郭진국씨를 통해 보사부 마약 감시반 黃민택 계장에게 뇌물 2백만 원을 주고 그렇게 했다고. 이 진술에 따라 검찰은 즉시 黃계장을 구속하고 郭씨(48)도 체포했다. 郭씨는 자기가 살던 現代아파트에 형사들이 닥치자 뛰어내려 중상을 입었다. 이 시점까지 만다린호 수사는 벌써 단속 공무원 3명의 구속을 몰고 왔다. 고문치사, 부상, 공무원 연쇄 구속……수사는 불길한 징조를 보이고 있었다.
  
  『50명이 옷 벗게 된다』
  
  崔씨의 죽음은 한창 달아오르던 수사에, 그 절정에서 쏴― 찬물을 끼얹은 결과가 되고 말았다. 수사는 추진력과 리듬을 잃고 비틀했다. 崔判鎬씨를 釜山 수사의 뚫지 않으면 안 될 관문으로 여기고 있었던 검찰이었기에 그 타격은 더욱 컸다. 비밀창고의 열쇠를 잊어버린 격이었다. 검찰에선 그 비밀 창고 안에 뽕꾼들이 우굴우굴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尹在基씨는 『釜山 밀조 조직의 실질적인 代父는 바로 그였다』고 했다. 다른 수사관은 「崔씨는 표면에는 나타나지 않고 뒤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수사 기관들을 상대로 사건을 무마, 수습하는 데 있어서 일종의 대리점 구실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수사관은 「崔씨가 죽었기 때문에 경찰·검찰·보사부에서 수십 명이 살았다」는 암시적인 말을 했다. 이 말은 崔씨가 평소에 입버릇처럼 「내가 잘못되면 적어도 50명이 옷을 벗는다」고 말했다는 것과 맞추어 생각해 볼 만한 것이다. 몇 달 뒤 李黃純사건이 터졌을 때 검찰은 崔判鎬씨가 李씨와 공범이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崔씨가 한번도 히로뽕 사건 관계로 입건되거나 실형 확정을 받은 사실이 없다는 것이다. 문서상으로, 공식적으로도 그는 「결백한」 인물이다. 이 점이 崔씨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특이한 관점을 설정케 하고 있다.
  
  검찰은 만다린호에서 유출된 염산 에페드린의 일부가 金奎澈씨나 曺積傑씨를 통해 南基龍→李모(또는 朴모)를 거쳐 崔씨 손에 넘어갔다고 추리했던 것 같다. 그를 경유하여 원료는 다시 李黃純·崔在道·吳鳳瑞씨 등 그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밀조 조직으로 분배되었을 것이라는 추리였으나 崔씨의 죽음으로 확증을 잡지 못하게 되었다. 50대 초반에 비참하게 맞아 죽은 崔씨는 사망한 지 나흘째인 80년1월17일 釜山시 東萊구 靑龍동의 시립 공원 묘지에 묻혔다. 장례식엔 가까운 가족들 밖에 오지 않았다. 그 몇 달 전 崔씨의 딸 결혼식장에 모였던 쟁쟁한 지역 유지·관리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문상객들이었다. 그의 집에 붙어 있던 방범 순찰함도 경찰에선 떼어 가 버렸다. 생전의 崔씨는 훤칠한 키에 서글서글한 인상의 호남자였다. 그는 釜山시의 모 체육 단체 부회장으로 오래 있었다. 梁正模 선수가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부문에서 금메달을 따고 고향으로 돌아 왔을 때 카 퍼레이드를 했는데 崔씨의 지원이 컸다고 한다. 韓國과 日本의 몇 몇 프로 레슬러들과도 친밀했다.
  
  晉州 사람인 그는 경찰·검찰·보사부 쪽으로 특히 발이 넓었다. 경찰 간부들이나 모 마약 담당 검사와는 식사를 같이 할 정도였고 형사들 가운데는 딸이 결혼하게 됐다면서 崔씨를 찾아 와 부조를 받아가기까지 할만큼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였다고 한다. 釜山시 경찰국에 인사 이동이 있으면 아는 사람에게는 꼭꼭 예의를 차렸고 崔씨가 죽기 며칠 전까지도 서울 보사부 마약 감시반의 金모씨는 자주 인사 전화를 서울에서 하기도 했다. 李黃純·崔在道씨 등 釜山의 유명한 밀조 조직 우두머리들과 폭력단 두목들도 崔씨를 「웃사람」으로 대우했다는 것은 여러 사람들의 증언으로 확실하다. 그들은 崔씨를 대체로 「형님」이라고 불렀다. 「최씨의 그늘 속에서 그들이 컸다」는 표현을 쓰는 사람도 많다.
  
  다만 70년대 말부터는 밀조 우두머리들이 각각 독립 체제를 구축, 사업상으로는 崔씨의 영향권에서 벗어났으며 이 때문에 崔씨는 섭섭해하였다고 한다. 崔씨는 78―79년엔 「진정서」사건의 수습에 매달려 관계 기관에 뛰어다니느라 매우 바빴고 고민도 많이 하여 그 때문에 1년 사이 많이 늙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崔씨는 말년엔 이 세계의 뒤로 물러앉아 그가 오랫동안 구축해 두었던 인맥을 밑천 삼아 조정자의 역할에 머물렀던 것 같다.
출처 : 월조
[ 2003-07-09, 17:5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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