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뽕 지하제국 탐험(제 1부) - 코리언 커넥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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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뽕 산업도 고도 성장 시대로
  
  72년의 釜山항 밀수 조직 붕괴는 이들 조직원들을 히로뽕으로 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釜山 밀수 조직의 참여로 「히로뽕 산업」은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독자적인 원료 조달 체제를 확보함으로써 그들은 日本 폭력단에 대한 종속적 위치에서 벗어나 대등한 또는 우월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 파나마, 또는 리베리아 선적의 선박에 탄 중국인 선원들에 의한 홍콩→한국 원료 공급 루트라는 공식에 따라 대량의 염산 에페드린이 釜山 쪽으로 밀려오면서 히로뽕 생산량도 급증하기 시작했다. 히로뽕 세계에 뛰어든 밀수 조직은 원료 루트뿐 아니라 對日 밀수출 루트도 여러 갈래로 개척했다. 對日 외항선과 對日活鮮魚 수출선들이 한-일간 벨트 역할을 하여 끊임없이 日本으로 하얀 가루를 실어나르기 시작했다.
  
  밀수 조직은 釜山의 조직 폭력배들도 같이 끌고 들어갔다. 釜山의 2대 폭력단인 칠성파(두목 李康桓·42) 20세기파(두목 鄭宗植·39)를 필두로 폭력배들은 히로뽕 밀매·알선에 손을 대게 되었다. 그들은 釜山에 자주 들리는 日本 폭력단의 말단 組員들과도 긴밀히 접촉, 히로뽕 판매망 확충에 일조를 하고 있었다. 어느 폭력단도 마찬가지이겠지만 釜山폭력단은 결코 의협(義俠)으로 지탱되는 집단이 아니다. 그것은 돈줄로 유지되는 하나의 경제 단체이다. 이강환(李康桓)씨가 연약하고 불편한 몸집으로도 칠성파의 괴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돈줄의 확보에 성공했기 때문이며 그 돈줄은 바로 히로뽕에서 나오고 있었다.
  
  釜山항 밀수 인맥의 히로뽕界 진출은 히로뽕 조직의 현대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영세성을 면치 못하던 초창기의 조직은 기업화·대형화되고 「정치력」까지 발휘하게 되었다. 釜山항 거물 밀수 조직의 장점은 일부 단속 기관원들과 밀착할 수 있는 「정치력」이었다. 경찰 경비정이 밀수품을 실어 나르고, 단속 기관원이 밀수품을 압수하여 꿀꺽해 버리고, 세관 직원들이 밀수품 유출을 에스코트 하고… 이런 사례들은 사실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이런 풍토속에서 굳혀 놓은 비호 세력들을 밀수조직은 히로뽕 세계로 업고 들어갔다. 밀수 전선에서 단련한 교묘한 은닉·밀매·뇌물 숫법까지 그들은 갖고 갔다.
  
  현해탄 건너온 히로뽕 감정사
  
  1970년에 접어들면서 日本에서는 불길한 징조가 하나 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70년엔 14년만에 처음으로 히로뽕 사범 검거자수가 1천 명 선을 넘어 1천6백18명을 기록했다. 다음해엔 2천6백, 그 다음해엔 4천7백명, 이어서 8천, 1만, 1만4천, 1만8천, 2만 명 선으로 폭발적인 증가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71년5월12일 日本 경찰은 나고야 항에 들어온 제7 한진호(4백25t)를 수색, 숨겨진 히로뽕 9kg을 압수했다. 그 때까지 가끔 1kg전후의 밀수 히로뽕이 日本에서 압수된 적은 있었으나 이처럼 대량 적발된 적은 없었다. 한국으로부터의 밀반입이 조직화되고 있다는 암시였다. 韓國에선 70년부터 히로뽕 사범을 습관성 의약품관리법으로 단속할 수 있게끔 법이 보완되었다. 70년엔 7명의 밀조범이 구속되고 21kg의 현물이 압수되었다. 해가 갈수록 법 위반자 수는 늘어갔다. 73년엔 54명 검거, 74년엔 77명 검거, 75년엔 1백51명 검거에 현물 1백11kg 압수, 이런 추세로 증가해 갔다.
  
  처음 4년 동안엔 밀조범이 주로 잡혔다. 70년대 중반기부터는 밀매범이 많이 잡히기 시작했다. 마침내 극동의 마르세유가 된 釜山항을 중심으로 「코리언 커넥션」은 본격 가동을 개시한 것이었다. 75년엔 이윽고 국내 중독자가 발생했다. 10월16일 서울지검 형사3부는 국내 판매를 목적으로 한 밀조단 5명을 구속했다. 남수경(南壽庚)씨(47·釜山시 東萊구 明倫동 46의 1)를 우두머리로 한 이들은 1년 동안 4.5kg의 히로뽕을 서울의 중독자들에게 팔아 왔었다고 검찰은 발표했다. 이런 조직은 거의가 경험이 적은 소그룹으로서 對日 밀수 루트를 확보하지 못하자 나라 안에서 시장을 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때까지의 통설로서는 한국인 체질에는 히로뽕이 잘 듣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나 결과는 빈말로 밝혀졌다.
  
  1975년 무렵까지는 韓國에서 적발된 큰 밀조 조직은 대부분 日本 폭력단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73년2월20일 釜山市警은 金武俊씨(45·釜山시 東萊구 廣安동 818) 등 밀조·밀매단 5명을 구속했다. 金씨들은 日本의 국제 마약단 다마모또 조직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韓國에 온 일본인들을 통해 히로뽕을 밀수출했었다. 다마모또 마약단은 한국뿐 아니라 동남아 각국에서도 현지 조직과 짜고 헤로인과 히로뽕을 같이 취급하다가 日本에서 검거됐었다. 두목 다마모또는 서울에 현지처를 두고 16회나 한국을 왕래하며 제조 자금을 대고 완제품을 日本으로 반출해 갔었다. 1874년 7월에 釜山지검은 염산 제조 회사와 탁아소에 비밀 공장을 차려 놓고 12kg을 만든 일당 5명을 구속했다. 두목인 재일동포 張정표씨도 日本 폭력단 나까지마組의 조원이었다. 그는 釜山의 염산 제조 공장 주인을 꾀어 공장 시설을 히로뽕 제조 시설로 바꾸었다. 히로뽕 제조과정에서 나오는 염산 냄새를 자연스럽게 위장하기 위해서였다.
  
  같은 달 釜山시경은 관광객을 가장하여 한국에 온 坂口씨를 체포했다. 그는 日本 폭력단의 부탁을 받고 밀수입해 갈 제품의 질을 감정하러 온 기술자였다. 그가 털어놓은 감정법은 담배갑 안에 있는 은박지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히로뽕 가루를 은박지 위에 발라 놓고 라이터 불로 밑에서 달구면 上質은 식으면서 결정으로 되고 下質은 은박지에 녹아 붙어버린다는 것이었다. 日本에서 이런 감정사를 보낸 것은 초기 거래에서 그들이 몇 번 속임수에 걸려들었기 때문이었다. 히로뽕의 양을 늘리기 위해 밀가루·화학 조미료·설탕·염산 에페드린 따위를 섞는 숫법, 그러나 고발도 할 수 없는 실정, 그래서 1회 감정에 50만 엔씩 주고 감정사를 파견했던 것이다.
  
  74년 무렵부터 韓國의 밀조 조직이 많은 기술자와 든든한 원료 루트를 확보하게 되자 日本폭력단과의 관계는 주로 밀매·알선·운반 등 말단 조원들끼리의 실무적인 레벨로 격하되었다. 재일 동포, 폭력단의 「찐삐라」(최말단 組員), 日本 연예인 등이 한국으로 자주 건너와 소량의 히로뽕을 운반해 가던 것도 이 시절이었다. 한국 검찰의 통계를 보면 1975년까지 급증하던 히로뽕 사범 검거자 수는 76년엔 전해의 반 정도로 낮아지고 히로뽕 압수량도 10분의 1로 줄어든다. 이것은 74―75년에 있었던 麗水, 釜山항 합동 밀수 수사의 충격 때문이었다. 수백 명의 선원, 밀수꾼, 폭력배, 금은상들이 구속되고 수십 명의 비호 세력이 검거됐다. 이 바람에 히로뽕 세계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오봉선(吳鳳善)씨 등 그때 구속된 많은 밀수범들은 히로뽕에도 손대고 있었으므로 일시적으로 히로뽕 軍團의 전력은 약화되었던 것이다.
  
  밀조 기술 교습료 2천만 원
  
  히로뽕 범죄 중에서도 가장 신비스럽게 윤색되어 온 것은 밀조 기술 분야였다. 히로뽕의 제조 공식은 이미 널리 공개된 것이라 비밀도 아무것도 아니다. 오래 마약 담당 검사 생활을 했던 鄭烘原 검사(法務部 法務課 근무)는 이렇게 말한다.
  『문제는 순도인 것 같다. 방정식대로 하면 히로뽕이야 만들 수 있겠지만 순도가 떨어져 팔 수가 없을 것이다. 어떻게 높은 순도의 제품을 만들 수 있는가가 기술의 핵심인 것 같다』 순도가 중요한 것은 가격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한국 히로뽕이 日本 시장의 80%를 점하고 있는 비결의 하나는 높은 순도에 있다. 대만이나 필리핀제는 순도가 낮아 한국제의 반값도 못 받고 있다. 1978년 日本의 히로뽕 시장에는 홍콩·대만제가 대거 진출, 약 40%의 점유율을 나타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질이 나빠 다음해부터는 다시 한국제가 80% 이상의 점유율을 보이게 되었다.
  
  왜 한국의 제품이 계속 좋게 빠지고 있는가? 여러 가지 해석이 오가고 있다. 우리 나라의 물이 히로뽕 제조에 적합하다든지, 기온, 특히 釜山 근방의 기온이 제조에 적당하다는 등등의 이야기가 있으나 추측일 뿐이다. 가장 그럴 듯한 설명은 한국의 밀조 기술자들이 그 비법을 끊임없이 발전시켰으며 기술자의 층이 두껍다는 것이리라. 梁학승씨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히로뽕에 몸담은 경력이 6년이나 되지만 밀조 공장만큼은 한번도 가 본 적이 없다. 총책이 히로뽕 장사를 기획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밀조 기술자를 한 사람 구하는 일이다. 기술자들은 어느 조직에도 소속되지 않고 혼자서 뛴다. 밀조 총책이 원료를 구해서 기술자에게 주면 곧 바로 제조에 들어갈 수 있는데 kg당 제조기술료는 80만원 선이다. 제조 현장에는 총책도 안 들어가는 것이 원칙이고 그 대신 기술자는 제품이 완성될 때까지는 바깥으로 나올 수 없다.
  
  한 차례 공장을 돌렸다 하면 10kg 이상을 만드므로 기술자는 단번에 1천만 원 가까이를 번다. 제조 기간은 보통 3일. 첫날엔 태우고 이튿날엔 식혀 말리고 사흘째 물건을 볼 수 있다. 초창기엔 1kg의 히로뽕을 만드는 데 2kg의 염산 에페드린이 필요했다. 기술이 발달하여 요즈음엔 원료 1kg을 집어넣으면 7백50g의 제품이 나온다. 옛날엔 몰라도 최근엔 쪽이 팔린 유명 기술자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유명한 기술자는 감시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신인 기술자는 어떻게 양성되는가 하면 교습료를 주고 제조 현장에 들어가 고참으로부터 실습을 받는 것이다. 사흘간의 실습비는 2천만 원 정도다. 옛날엔 제조기구가 수십 가지나 되었지만 최근엔 간편해져 냉장고·비커·환풍기·온도계 등 열 가지 남짓한 기구만 있어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기구의 간소화로 제조 시간도 단축되고 있다. 제조의 성공 여부, 즉 어떻게 하면 질 좋은 제품이 나오는가의 여부는 냉각 과정에 달려 있다고 한다.
  
  기술자들은 보통 사흘 동안 철야 작업을 한다. 가장 신경쓰는 단계가 이 냉각 과정이다. 요즈음엔 가정마다 냉장고가 있는데 이 냉장고를 기술자들은 냉각 과정에 활용한다. 히로뽕 밀조가 여러 면에서 쉬워진 셈이다. 기술자들은 감옥에 한번 갔다가 나오면 밀조 일선에서 뒤로 물러나고 후계자를 키우려 한다. 외부 사람은 믿을 수 없어 아들이나 조카 등 집안의 젊은 사람을 뽑아 가르쳐 주는 일이 매우 흔하다. 한 가족이나 가까운 친척들이 모두 히로뽕 범죄자가 되는 경우가 그렇게 많은 까닭 중의 하나가 바로 그런 데 있는 것이다. 70년대 초까지는 50∼60대의 日本계 기술자들이 많았지만 요즘 기술자들은 대학 중퇴 이상의 학력을 가진 젊은층이 많다』
  
  수많은 히로뽕系 가족들
  
  한국에 히로뽕 시대를 연 鄭銀宗씨 형제, 金華淳, 兪哲環씨 등은 모두 제조 기술자였고 조직상으로도 그들은 총책 역할을 했다. 70년대 초반에만 해도 한국에서 믿을 만한 기술자는 여섯 명 뿐이라고 했었다. 金華淳의 경우, 이 무렵엔 전국의 여러 공장을 순회하며 1회에 1천4백만 원씩 받고 뽕을 만들어 줄만큼 기술자가 귀했다고 한다. 이들 기술자는 공장에 갈 때는 스스로 검은 띠로 눈을 가렸다. 나중에 체포되더라도 공장 위치를 볼 수 없게 스스로 통제하는 것이다. 70년대 중반부터 거물 밀수꾼들이 전향, 원료 루트를 장악하면서 기술자들은 상대적으로 종속적인 자리에 놓이게 되었다. 이 때쯤엔 기술자들 숫자도 많아져 희귀 가치도 크게 떨어져 버렸다.
  
  메스암페타민, 즉 히로뽕의 제조 과정은 염산 에페드린을 빙초산에 녹여 촉매제(파리디움·황산 바리움)와 과염소산을 가하여 섭씨80―90도에서 접촉, 환원한 뒤 촉매를 여과하고 농축시킨 뒤 찌꺼기를 소량의 물에 녹여 강알칼리성으로 만든 다음 에테르로 추출하는데, 여기까지가 1차 공정이다. 1차 공정에서 불가피하게 나오는 염산 냄새 때문에 무인도나 바닷가, 외딴 집, 또는 돼지 사육장 등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엔 트럭에다가 제조 시설을 설치, 고속 도로를 누비며 1차 공정을 끝내는 아이디어까지 나올 정도이다. 1차 공정과 2차 공정을 분리, 장소를 옮겨가며 만드는 경우고 많아지고 있다. 2차 공정은 반제품에다가 염산 가스를 통하여 염산염으로 만들어 침전시키고 초산 크로로포름으로 재결정시키는 것이다.
  
  서울 지검 특수부 辛光玉검사에 따르면 몇 년 전 부산에서는 화공과 출신 어느 대학생이 집에서 히로뽕 공식대로 제조 연습을 하다가 붙들려 온 적이 있었다고 한다. 범죄 목적은 없었고 단순한 호기심의 발동인 것으로 밝혀져 훈방시켰지만 그만큼 히로뽕 제조기술이 널리, 쉽게 퍼질 소지가 있음을 보여 준 사례라 하겠다. 히로뽕 밀조·밀매조직은 가족 합작 회사의 형식을 취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비밀 유지를 위해서 가족끼리 뭉치는 것이다.
  
  우리 나라 최대의 對日 밀수 총책으로 꼽히는 韓三洙씨는 그의 동생 昭南씨(39·수감중)와 함께 그 일을 하다가 지난 80년에 함께 구속되었다. 얼마 뒤에는 韓씨의 아내가 같은 혐의로 또 구속되었다. 吳鳳善씨는 부산의 유명한 형제 밀조·밀매자들이다. 아버지 金재동·아들 金대인씨도 히로뽕 가족을 이룬다. 鄭銀宗·鄭강봉 형제와 鄭銀宗씨의 큰아들 成晃씨도 2대에 걸친 전통을 갖고 있다. 특히 銀宗씨는 아들을 데리고 日本에서 한국으로 밀항했다가 아들이 히로뽕에 관심을 갖게 되자 日本으로 갈 수 없는 자신 대신 아들을 다시 하와이로 이민시켜 「재미 동포」라는 아들의 신분을 활용, 日本으로 히로뽕을 운반하도록 한 사람이다. 지난 80년8월28일 서울지검이 붙든 東大門구 답십리 T아파트의 가족 밀조·밀매단은 주범 權모씨와 그의 형, 權씨의 아내, 아내의 계모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밖에도 숱한 히로뽕系 가족 집단이 있다.
  
  뽕꾼 애국자론
  
  70년대에 韓國사회에서 히로뽕 밀조·밀수가 거대한 범죄 산업으로 성장한 배경은 무엇인가? 「열 번 실패해도 한번 성공하면 팔자 고친다」는 한탕주의를 먼저 꼽지 않을 수 없다. 실제는 「열 번 성공해도 팔자 망치는」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히로뽕의 엄청난 暴利 구조에 인생을 걸고 달려드는 사람들은 끊이지 않았다. 복부인에게 아파트처럼, 범죄꾼들에게 히로뽕은 최대의 투기 대상이었다. 히로뽕 범죄에 대한 「죄의식의 결핍」을 두 번째 배경으로 꼽지 않을 수 없다. 70년대 釜山에서 사회부 기자 생활을 한 필자는 이런 말을 진지하게 하는 경찰관이나 공무원들을 숱하게 만났다.
  『우리 솔직히 얘기합시다. 히로뽕 밀수가 뭐 나쁩니까? 일본놈한테 그런 히로뽕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보내 저들을 모두 중독자로 만들었으면 속이 시원하겠습니다』
  『밀수하면 밀수입을 의미하는 것이 우리 실정인데 우리도 밀수출할 것을 갖고 있다니 거 자랑스러운 일 아닙니까, 허허허. 히로뽕이라도 밀수를 해서 무역 역조를 시정해야지요』 「히로뽕 제조자 애국자론」을 편 변호사의 예를 들것도 없이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그때 상당히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日本人들이 50―60년대 對馬島를 對韓 밀수 기지로 방조·육성한 것을 기억한다면, 또 그렇게 키워 놓은 한국의 밀수 조직들이 이제는 그들을 향해 히로뽕을 퍼뜨리게 된 이 「부메랑 현상」을 확인한다면 내심 고소한 생각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히로뽕 범죄에 대한 이러한 「민족 감정」이 범죄자들과 수사관들의 행동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민족 감정」은 히로뽕 범죄자를 비호하는 사람들의 행동에 양심의 갈등을 덜 주었을 수도 있고 단속 자체를 덜 적극적으로 만들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히로뽕 성행의 세 번째 배경으로는 범죄꾼들의 金力과 일부 수사 요원들의 權力이 유착된 현상을 들 수 있다. 히로뽕 조직의 金力이 일부 기관원·경찰관·보사부 마약 감시원·검사 등을 오염시켰다는 수많은 증거들이 있다.
  
  수뢰공무원들을 다룬 기사를 찬찬히 비교해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는 일이지만, 히로뽕 사범들로부터 수사 요원들이 받은 뇌물 액수는 70년대에도 결코 1회 수백만 원대를 밑돈 적이 없었다. 부정한 세무 공무원들의 수뢰 액수가 큰 것으로 정평이 나 있지만 히로뽕의 金力에는 크게 못 미칠 것이다. 한때 日本에선 공화당 정권하의 韓國정부가 정책적으로 히로뽕 밀수를 방조하고 있다는 소리가 나온 적도 있었다. 적어도 우리 정부나 어떤 수사 기관도 그런 정책을 세운 바가 없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히로뽕의 金力에 휘어잡힌 일부 공무원들은 많은 「뽕꾼」들을 비호했으며 그런 비호가 한국의 히로뽕 문제를 오늘날처럼 깊게 한 것이다.
  
  네 번째 배경은 韓日간의 교통량·무역량 증가다. 韓日 국교 정상화 이후 두 나라 사이의 선편·항공편 교통량과 무역량은 급증했고 이 많아진 교통량의 틈 속에 히로뽕이 낄 수 있는 기회도 늘어났다. 두 나라의 범죄자들은 빈번하게 오고갔고 엄청난 통관 물량과 부족한 감시인력의 불균형 속에서 히로뽕은 수많은 구멍을 뚫을 수 있었다. ―이런저런 시대적 상황이 히로뽕 밀조·밀수를 북돋우고 있던 70년대의 마지막 해, 지평선 너머에선 한 점 먹구름이 다가 오고 있었다.
출처 : 월조
[ 2003-07-09, 18:0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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