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뽕 지하제국 탐험(제 1부) - 코리언 커넥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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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악마의 씨앗」뿌리내리다
  
  전쟁의 私生兒
  
  도대체 이 저주받을 「악마의 씨앗」은 어떻게 하여 인간 세상에 나타났던가? 한국에서 히로뽕이라고 하는 이 약물은 학명으로는 메스암페타민(Meth-Amphetamine)이다. 우리 나라 향정신성(向精神性) 의약품 관리법은 메스암페타민 이외에도 암페타민, 레브암페타민, 하이드록시암페타민 등 여러 유사품을 각성제로 지정해 놓고 있으나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히로뽕, 즉 메스암페타민이다. 메스암페타민은 1893년에 합성되어 세상에 소개된 것이다. 메스암페타민을 합성한 것은 日本의 長井麻黃에서 에페드린 성분을 발견, 여기서 다시 메스암페타민 성분을 뽑아 냈다. 이 약은 처음에는 천식 특효약, 발작성 수면증과 파킨슨씨 병 치료약 등으로 널리 쓰였다. 1938년 독일 과학자들은 메스암페타민이 잠 안 오게 하는 작용, 즉 각성(覺醒) 기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들은 펠지핀이란 약품으로 이를 개발, 주로 군인들에게 사용하기 시작했다. 독일 정부는 「펠지핀」이 남용되어 중독자가 생기게 되자 1941년 규제법을 만들었다.
  
  日本에서도 이 메스암페타민은 전쟁 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1940년엔 大日本製藥(株)이 「히로뽕」이란 상품명으로 메스암페타민을 시판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히로뽕」이 메스암페타민의 대명사처럼 돼 버렸다. 「히로뽕」은 지금도 생산되고 있으나 이것은 엄격한 규제 아래서 연구나 특수 치료용으로만 쓰이고 있어 별 문제가 없다. 日本에선 히로뽕을 覺醒劑라고 부르고 있다. 한국에서는 잠 안 오게 하는 약을 각성제라고 부르고 있어 약간의 혼란이 있는데 한국의 각성제는 합법적으로 제조된 비중독성 약품이다. 태평양 전쟁 중 日本 군부는 히로뽕을 대량 생산, 이른바 「突擊錠 「猫目錠」 등의 애칭으로 군인들에게 투약했다. 돌격정(突擊錠) 이란 가미가제(神風) 특공대원과 敵前 상륙을 앞둔 병사들에게 지급되었다. 무섬증을 없애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묘목정(猫目錠)은 야간 작업·작전, 보초, 통신 종사자, 군수 공장 종사원들에게 지급되었다. 글자 그대로 고양이 눈처럼 두 눈을 말똥말똥 뜨고 밤일을 수행하도록 목적한 것이었다.
  
  日本의 패전 뒤 군부에서 갖고 있던 방대한 양의 히로뽕이 시중으로 유출되었다. 사용자들이 늘기 시작했다. 패전으로 허탈감에 빠진 日本인들은 원기 회복을 위해 히로뽕의 도움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작가, 예능인들이 특히 히로뽕에 탐닉했고 제대 군인, 야간 작업자, 소년·소녀들도 여기에 휩쓸리게 되었다. 군부에서 방출된 히로뽕이 동나자 군대에서 제조 기술을 배웠던 사람들이 히로뽕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규제법이 없었으므로 密造가 아니라 공공연히 만들고 팔았다. 日本 정부가 각성제취체법(覺醒劑取締法)을제정, 단속에 나선 것은 1951년의 일이었다. 그래도 기세는 수그러지지 않았다. 1954년 日本전국에서 각성제 사용과 관련, 체포된 사람은 5만5천명에 이르렀다. 이 해 日本의 히로뽕 常用者수는 1만 명은 정신 장해자가 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했다. 1956년부터 히로뽕 사범은 격감되기 시작, 한 해의 검거자수가 1천명 선 밑으로 뚝 떨어졌다. 「전쟁의 사생아」 히로뽕은 마침내 사라진 것 같았다.
  
  환희의 극치, 그 뒤의 轉落
  
  히로뽕에 대한 일부 국민들의 몇 가지 오해가 있다. 헤로인과 히로뽕을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첫째고 히로뽕을 헤로인·모르핀과 같은 痲藥으로 치는 것이 둘째 오해다. 헤로인과 모르핀은 아편에서 정제된 마약이며 약리 작용면에서도 히로뽕과는 크게 다르다. 痲藥은 중추 신경을 억제, 모든 신체기관의 운동량을 줄인다. 즉 인간을 나른하게, 무기력하게 만든다. 히로뽕은 정반대로 중추 신경의 기능을 촉진, 흥분시킨다. 정신적, 신체적 기능이 급격히 향상된다. 말하자면 신체라는 기계를 풀 가동시키는 것이다. 우선 잠이 오지 않고, 그래도 피로감은 싹 가시고 정신은 말끔해지며 힘이 펄펄 솟는 것같이 느낀다. 실제로 히로뽕을 주사 맞으면 일시적으로 힘이 세진다.
  
  히로뽕 중독 상태의 범인들과 격투를 벌인 형사들에 따르면 그들은 「짐승처럼 싸운다」고 한다. 몸집에 비해 엄청난 힘을 낼뿐만 아니라 맞아도 고통을 안 느끼는지 집요하게 저항한다는 것이다. 日本에선 한때 권투·프로 레슬링 등 격투기에서 선수들이 경기 직전 히로뽕을 맞는 일이 잦아 소변 검사를 하기도 했다. 체력뿐 아니다. 시력, 청력, 성적인 기능까지 월등히 좋아진다. 기분이 상쾌해지고 자신감이 생기는 것은 물론이고. 『주사를 맞은 순간 찌르르 온몸에 선류가 흐르는 듯 머리카락이 거꾸로 서는 것 같은 기분… 갑자기 주변이 선명하게 보이고 구름 위로 걷는 것 같은 기분…』(어느 경험자의 이야기) 이렇게 보면 히로뽕은 日本 폭력단이 선전하듯 「행복의 약」 「부부 화합의 약」인 것처럼 보인다. 바로 이런 착각에 히로뽕의 무서운 덫이 깔려 있다.
  
  0.02g의 주사로 처음엔 다섯 시간쯤 약효가 지속된다. 그 약 기운이 떨어졌을 때의 스산한 기분! 댐이 터지듯 한꺼번에 밀려오는 불쾌, 권태, 피로, 초조, 불안. 그때서야 사용자는 히로뽕이 권태나 피로를 없애 주는 약이 아니라 댐처럼 일시 막아 주는 기능을 할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행복의 극치, 그 뒤의 불쾌의 나락. 이 양극단의 대립 속에서 중독자가 생긴다. 사라진 쾌감을 그리워하며, 동시에 더욱 깊어진 권태, 피로에서 탈출하려고 히로뽕에 다시 손을 뻗는다. 악순환의 시작인 것이다. 日本에선 한 번 주사를 맞은 사람들 가운데 약 90%가 常用者로 전락해 버린다는 통설이 있는데 히로뽕은 헤로인과 마찬가지로 이처럼 강력한 정신적 의존성을 심어 준다. 다만 히로뽕은 헤로인과는 달리 신체적 의존성은 강하지 않다고 한다. 따라서 신체적 금단(禁斷) 증상은 거의 없다. 히로뽕을 끊지 못하는 것은 신체적 욕구 때문이 아니라 정신적 욕구 때문이란 얘기다.
  
  히로뽕 만성 중독은 0.01∼―0.02g의 히로뽕을 두 달 이상 지속적으로 주사 맞을 때 발생한다. 먼저 약물 중독의 특징인 내성(耐性)이 생긴다. 즉 약효가 잘 나타나지 않아 투약량을 점점 높여야 한다. 가장 중요한 히로뽕 중독 증상인 환각·만상이 인격을 지배하게 된다. 망상의 종류도 가지가지다. 타인이 자기의 험담을 하고 돌아다닌다고 생각하는 「관계 망상」, 전봇대가 형사로 보이는 「피해 망상」, 천장에 눈이 달린 것으로 보이는 「감시 망상」, 아내가 바람났다고 의심하는 「질투 망상」, 늘 누군가가 뒤쫓아오는 것 같은 「추적 망상」 등등. 이 밖에 환청(幻聽)·환시(幻視)·환취(幻臭). 이런 망상에서 처참한 살인·방화·폭행 등 히로뽕 범죄가 빚어진다.
  
  더구나 이런 망상이나 환각은 히로뽕을 완전히 끊은 뒤에도 일생 동안 따라 다니는 경우가 있다는 의학 보고다. 對社會的 범죄에 있어서 헤로인 등 마약류는 중독자를 사회로부터 소외, 도태시켜 버리는 소극적 역기능을 하는 대신 히로뽕은 살인·방화·폭행 등 공격적 역기능을 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히로뽕의 적극성과 공격성이 日本人의 부지런한 민족성과 잘 어울린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히로뽕이 서양에서 인기가 없고, 헤로인이 극동에서 맥을 못 추는 사회적, 문화적 배경은 무엇인지, 연구 대상인 것 같다.
  
  元祖 鄭銀宗이 살아 있다!
  
  1981년12월11일 日本의 도오꾜 치안을 담당하는 경시청 방범부 보안2과장은 인터폴(국제 경찰 기구)을 통해 韓國 치안본부로 수사 협조 의뢰 전문을 급히 보냈다. 서울 江南구 盤浦동 산67-13번지(2통2반)에 산다는 전화 번호 5X3-369X의 鄭銀宗씨(69)에 대한 정확한 주변 사항을 조사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鄭銀宗! 이 미스터리의 인물을 日本 경찰에서는 오랫동안 찾고 있었다. 그 이름이 경시청 수사망에 구체적으로 잡힌 것은 경시청이 서울로 전문을 보내기 7일 전이었다. 81년12월4일 日本의 하까따發 도오꾜行 新幹線 히까리호의 그린車 객석에서 경시청 보안과 수사관들은 세 명의 30대 남자들을 검문, 그들이 운반하던 가방을 수색했다. 가방을 여니 비린내가 풍겼다. 안에는 스물아홉 개의 비닐 봉지가 들어 있었다. 봉지의 겉은 스카치 테이프로 둘둘 말려 있었다. 테이프를 뜯었다. 조미료 같은 하얀 가루, 히로뽕이었다. 이날 압수한 히로뽕은 모두 30.247kg. 日本의 수사 역사상 최대의 압수량이었다. 「新幹線 사건」으로 유명해진 이 수사는 경시청 수사진의 끈질긴 추적이 가져온 성과였다.
  
  1980년 10월부터 경시청 보안과는 鄭成晃(41)이란 인물에 주목하게 되었다. 경시청이 알아낸 鄭成晃씨의 인적 사항은 이러했다. 「鄭씨는 1976년 한국에서 美國으로 이민, 79년부터 호놀룰루의 모 관광회사에서 일하면서 한국과 일본을 자주 드나들고 일본에선 폭력단원들과 자주 접촉하고 있다』 1년이 넘게 鄭씨를 추적하던 경시청 수사관들은 1981년11월27일 오후 4시40분 鄭씨가 두 사나이와 함께 도오꾜 하네다 공항에서 후꾸오까行 일본 항공(株) 비행기에 오르는 것을 발견, 미행하기 시작했다. 鄭씨 등 세 사람은 후꾸오까에서 시모노세끼로 들어가 호텔에 투숙했다. 12월4일 오전 鄭씨 일행은 시모노세끼 시내에서 어느 승용차 운전사로부터 무슨 물건을 인수하여 도오꾜行 히까리호에 올랐다. 미행 수사관 11명도 뒤따라 기차에 타고 오며 그들을 감시했다. 鄭씨와 함께 붙들린 두 日本인은 니시야마 요시이사, 기다주미 요시아끼씨로 밝혀졌다.
  
  경시청은 이들 세 명을 신문했다. 일본의 말단 밀매 가격으로 60억 엔, 즉 2백억 원어치나 되는 히로뽕을 운반할 정도라면 굉장한 밀수 조직이 뒤에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신문 결과, 문제의 히로뽕은 12월4일 「해상 박치기」 숫법으로 시모노세끼 항구에 상륙했음이 드러났다. 그날 아침 시모노세끼에 사는 야마우찌씨(44) 등 두 사람은 4.5t짜리 작은 배를 몰고 규슈의 고꾸라항을 출항했다. 그는 약속된 해상에서 한국 활어수출선을 만나 히로뽕을 받아 시모노세끼 시내의 한적한 요시미 어항에 상륙, 운반책을 시켜 鄭씨들에게 히로뽕을 전달했다. 며칠 뒤 경시청은 니시야마로부터 더욱 놀랄 만한 정보를 얻어냈다. 문제의 물건을 부친 사람은 鄭成晃씨의 아버지 鄭銀宗씨란 것이었다. 『鄭銀宗이 서울에 아직 살아 있다!』 경시청의 고참 수사관들은 충격을 받았다.
  
  鄭銀宗씨는 누구인가? 재일 교포였던 그는 1954년 8월 오사까府 경찰에 구속되었다. 혐의는 1953년8월―54년5월 사이 히로뽕 1백18kg을 밀조, 밀매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 언론 기관은 사상 최대의 밀조 사건이라 하여 크게 보도했다. 鄭銀宗씨는 그러나 보석을 받고 나와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다. 1955년6월9일 제7회 공판정에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열살 난 아들 成晃군과 함께 증발해 버렸다. 日本경찰은 이 최대의 히로뽕 제조범이 한국으로 밀항했으리라고 추측했었다. 그런데 바로 그 25년 전의 父子가 日本경찰 앞에 바람처럼 나타난 것이었다. 한국 경찰이 鄭銀宗씨가 산다는 80평 짜리 큰 저택을 찾았을 때 그는 이미 행방을 감춘 뒤였다. 그러나 조사가 진행됨에 따라 鄭씨는 둘러싼 미스터리의 안개가 한겹한겹씩 벗겨지기 시작했다.
  
  日本에서 배워 온 밀조 기술
  
  全南 木浦 사람인 鄭銀宗씨의 일본 탈출, 한국 상륙은 우리 나라의 히로뽕 범죄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출발점이 된다. 그는 아들 成晃군과 함께 「악마의 씨앗」을 이 땅에 옮겨 와 심었던 것이다. 1957년부터 1969년까지 日本에서 히로뽕 관련 범죄로 붙들린 사람은 한 해에 1천 명선 이하로 떨어졌다. 히로뽕은 사실상 잊혀진 이름이 되고 있었다. 日本의 60년대는 사상 유례없는 고도 경제 성장의 시기였다. 고도 성장의 열기 속에서 사람들은 구태여 히로뽕으로부터 元氣를 빌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사회 풍조가 히로뽕을 용납하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日本 경찰은 일단 히로뽕은 끝난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해탄 너머 한국에서는 은밀한 음모가, 히로뽕 帝國의 재건을 위한 치밀한 책략이 진행되고 있었다.
  
  日本의 戰後 히로뽕 시대의 특징은 밀조·밀매·투약이 모두 日本 국내에서 이루어졌다는 점, 그리고 조직 범죄 집단과의 관련성이 별로 없었다는 점이다. 일본 정부가 각성제 취체법을 만들어 히로뽕 사용을 범죄로 규정, 단속에 나선 50년대 중반기 이 세계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히로뽕 사용이 범죄로 규정되어 지하로 잠적하면서 그 밀조와 유통에 「야꾸자」 조직들이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이다. 이 변화의 중요성은 당시에는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일본의 단속 강화는 히로뽕 범죄를 폭력단의 전유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한국계 밀조 기술자들을 고향으로 피신케 하여 불티를 옆으로 확산시키는 결과를 빚었다. 韓國에서 누가 맨 먼저 히로뽕을 만들기 시작했느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부산 지검은 마약 담당 검사로 있었던 李炅在씨는 「1960년대 후반 재일 동포 金화순이 최초로 국내에 매스암페타민 제조 기술을 도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검찰」誌 1981년 판)고 하여 金화순을 원조로 꼽았다. 보사부에서도 1983년도 한일 마약류 간담회에 제출한 자료에 비슷한 기원설을 적어 놓고 있다. 「우리 나라의 히로뽕 事犯은 1970년8월21일에 검거된 金華淳 사건을 계기로 하여 발생하기 시작하였으며 同 金華淳·鄭降峰 등은 태평양전쟁 당시 日本군에 징용되어 군수 공장 기술자로 근무하면서 히로뽕 밀조 기술을 습득하였으며 日本에서 거주하는 동안 폭력단들과 손잡고 히로뽕 밀매 등에 관여타가 우리 나라에 입국, 同폭력단들로부터(姓名不詳) 원료와 자금을 제공받아 히로뽕을 밀조, 日本 폭력단에 제공하기 시작하였다」
  
  히로뽕界의 「교수」, 金華淳
  
  여기서 김화순(金華淳)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1970년8월 서울지검 마약반 하일부(河一夫)·김유후(金有厚) 검사팀이 적발한 것이다. 金씨는 당시 釜山시 東萊구 장전(長箭)동에 살면서 히로뽕을 대량 밀조, 일본인 아라이 등을 통해 일본으로 밀수출하다가 일당 8명과 함께 붙들렸고 원료 20kg도 압수 됐었다. 金씨는 재판 도중 병보석으로 받아 서울의 어느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탈주했다. 1975년 여름, 그는 경부고속도로 釜山쪽 톨 게이트에서 影島 경찰서 형사대에 검거, 수감되었다. 붙들릴 때 58세의 金씨는 자가용을 직접 몰며 권총까지 차고 있었다. 형사들에게 3천만 원짜리 자기앞 수표를 내어놓으며「그냥 눈감아 달라」고 사정을 했었다. 필자가 당시 경찰서에서 만나본 金씨는 히로뽕 중독으로 폐인이 되다시피 했었다.
  
  金씨는 도망 생활 중에도 濟州島에서 큰 여관을 경영하고 釜山에서는 바다매립 공사에 아들을 통해 돈을 대고 있었다. 당시 그의 재산은 십억대로 평가되었다. 이 金華淳을 한국 히로뽕의 元祖로 보는 데는 무리가 있다. 히로뽕 세계에 몸담았던 사람들도 金씨 기원설을 부인하고 있다. 70년의 金華淳 사건도 韓國에서의 첫 히로뽕 사건이 아니었다. 1968년4월7일자 韓國日報 사회면 머리에는 「정체 불명의 새 合成痲藥, 제2의 메사돈 적발, 백색 분말 15kg 압수」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다. 서울지검 마약 합동 단속반(반장 서정각.徐廷覺부장검사, 河一夫·문종술.文終述 검사)은 이 「합성 마약」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국립 과학수사 연구소 등에 감정을 의뢰했으나 실패, 駐韓 WHO 극동 담당 마약 수사관에게 분석을 다시 의뢰, 수사관 루스씨가 백색 분말을 가지고 日本으로 떠났다는 내용이었다. 20일 뒤인 4월27일의 전국 신문에는 문제의 백색 분말이 히로뽕으로 밝혀졌다는 기사가 크게 났다. 아마도 히로뽕이란 말이 국민들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을 터이다.
  
  그 때 붙들린 밀조 주범은 釜山 汎亞化學 대표 유철환(兪哲環)씨(당시45)였다. 兪씨는 자신의 공장 시설을 이용, 3년 동안 히로뽕을 밀제조, 일본으로 팔았다고 진술했다. 그는 제조 기술을 鄭江(또는 降) 峰씨로부터 배웠다고 했다. 兪씨에 따르면 재일동포 鄭씨는 1964년2월 모국 방문 여권을 갖고 韓國에 건너왔다. 체류 기간이 한 달로 된 여권 기간이 끝나자 그는 영주 귀국의 형식으로 고향인 木浦에 주저앉았다. 그는 자기보다 먼저 들어와 있던 재일 동포 야마구찌씨(당시 50)와 짜고 木浦에 비밀 공장을 세워 히로뽕을 만들기 시작했다. 1차로 7kg을 만들어 그 가운데 4kg은 三千浦에서 對日 活魚 수출선을 통해 kg당 1백만 엔의 대금을 받고 친면 있는 日本 폭력단으로 팔아 넘겼다는 것이었다.
  
  日本폭력단이 배후 조종
  
  그러나 그 때 검찰은 鄭江峰씨를 잡지 못했었다. 鄭씨는 73년6월28일 부산 지검 설경진( 景鎭) 검사에게 붙들렸다. 鄭씨는 수배중에도 계속 히로뽕을 밀조하고 있었는데 주목할 만한 진술을 했다. 즉 밀조에 필요한 원료와 자금은 오오사까·고오베를 활동 무대로 하고 있는 일본 최대의 조직 폭력단 山口組로부터 받았고 밀조한 히로뽕 1백kg은 관광객을 가장하여 들어온 일본인 폭력단원들을 통해 밀수출했다는 것이었다. 鄭씨의 말대로라면 日本 조직 폭력단은 日本에서 취체법이 강화돼 히로뽕 밀조자가 최고 사형까지 받도록 되자 韓國에다가 일종의 보세 가공 공장을 차려 돌리고 있었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鄭江峰씨가 원조인가? 많은 히로뽕 전과자들과 수사관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나 필자는 의문을 갖고 있다.
  
  日本 경시청의 수사 협조의뢰에 따라 鄭銀宗씨의 행방을 쫓던 어느 수사관은 기묘한 사실을 발견했다. 鄭銀宗씨가 일명 降峰으로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日本에서 찾고 있는 鄭銀宗이 실은 鄭降峰과 異名同人이 아닌가 하고 그는 더 조사를 해 보았다. 그 결과 鄭降峰은 교도소에서 출감한 직후인 지난 76년에 이미 죽었고 鄭銀宗은 鄭降峰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그러니 鄭銀宗씨는 형의 등 뒤에서 근 25년이나 노출되지 않고 살아 왔던 셈이다. 銀宗씨는 형보다도 10년쯤 먼저 한국에 돌아왔다. 鄭降峰씨가 영주 귀국한 것은 이미 한국에서 발판을 굳힌 동생의 권유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거의 4반세기만에 윤곽을 드러낸 鄭銀宗씨는 그 동안 무엇을 했던가? 히로뽕 전과자·고참 수사관들의 얘기를 종합, 그의 생애를 추측·복원해 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형이 검찰에 걸려들기 전까지 鄭銀宗씨가 무엇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검찰·보사부의 견해와는 달리 한국에서 히로뽕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60년대 후반기가 아니고 60년대 초, 또는 5·16이전까지 거슬러 오른다고 전과자 梁학승씨는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초창기에 이 거물 기술자 鄭銀宗씨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나 일단 추리할 수 있다. 더구나 1970년까지 한국에는 히로뽕 규제법이 없었다. 밀조·밀매를 해도 처벌할 수가 없었다. 밀수를 할 경우에만 관세법으로 다스렸다. 이런 천국에서 鄭씨와 같은 기술자들이 그 제조기술을 썩이고 있었을까? 히로뽕 세계의 소식통에 따르면 鄭銀宗씨는 70년대 초 모 고속버스 회사의 주식을 상당량 갖고 있었고 아들 成晃씨는 그 회사의 임원으로 일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만한 재력은 히로뽕에서 생긴 것이 아닐까? 그러다가 75년11월 張인호·李영진씨가 서울지검에 히로뽕 밀매로 구속,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 때 張인호씨가 취급했던 히로뽕은 鄭銀宗씨의 비밀공장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鄭씨는 이 사건으로 수배되지도, 기소 중지자로 기록되지도 않았다. 鄭銀宗씨는 日本 경시청의 조사 의뢰가 서울로 날아 온 81년 말까지는 한반도 수사 기관의 히로뽕 전과자 대장에 오른 적이 없어 서류상으로는 「결백한」 사람이었다. 그 비결이 무엇이었던가, 많은 쑥덕공론이 있다는 것만 밝혀 둔다.
  
  釜山港 밀수 조직, 히로뽕 轉業
  
  히로뽕 제국이 韓國의 지하에 서서히 뿌리를 박아 가고 있던 1960년대 말 釜山과 對馬島에 걸쳐 있던 「밀수 제국」에도 큰 변혁이 일고 있었다. 1968년12월25일치 中央日報 사회면에는 기묘한 박스 기사가 실렸다. 對馬島의 이즈하라 항구에서 趙東午 특파원이 쓴 기사의 요지―.
  「지난 14일 밀수선 金成호와 大洋호가 마지막 밀수품을 싣고 이 항구를 떠남으로써 15년 동안의 對馬島 밀수 시대가 막을 내렸다. 이날 일본의 세관 관리와 출입국 관리소 직원들도 마지막 밀수선이 떠나는 날 부두에 나와 밀수선을 전송, 그들이 「변칙 무역」이라고 부르는 對韓 밀수의 특이성을 보여 주었다. 對韓 밀수의 총지휘자격인 이정기(李錠起)(38)도 떠나는 선원들에게 『다시는 오욕의 밀수를 하지 말자』고 했고 밀수선원들은 일본관리들에게 『그 동안 폐가 많았습니다.』고 인사말을 했다. 이즈하라 町會는 지난 21일 모임을 갖고 밀수 기지로서의 운명이 다한 이 항구의 경제적 타격에 관한 대책을 논의했다.
  
  이즈하라 항구는 지난 53년부터 일본 정부와 주민들의 성원 아래 對韓 밀수 전초 기지로 흥청댔다. 5·16직후 뜸했던 밀수는 62년부터 다시 활기를 찾아 월평균 40척의 밀수 특공선이 현해탄을 왕래했다. 이들은 미국 본토불을 가지고 무역선을 위장, 이즈하라에 들어와서는 선박 대리점을 하는 한국인 吳鍾玉에게 2만 원씩의 수수료를 내고 입출항 및 외환절차의 수속을 맡긴 뒤 李錠起·金義經에겐 4%가량의 수수료를 내고 밀수품의 구입을 의뢰하곤 했었다. 5·16직후 혁명 재판소에 계류중 日本으로 도피했던 밀수왕 李錠起는 이번에 후꾸오까 한국 총영사관 姜鐵九 영사의 끈질긴 설득에 따라 밀수업에서 손을 떼고 후꾸오까로 옮겨 가 토산품 판매업을 차릴 계획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지난 6개월 동안의 유예 기간중, 미리 사 모아 두었던 밀수품을 모두 韓國으로 보낸 다음 손을 씻은 것이다」
  
  이 기사가 보여 주듯 日本 당국은 對馬島 경제를 좌우하는 對韓 밀수를 사실상 묵인, 권장하였다. 이즈하라에서 밀수왕 李錠起가 보낸 특공선은 한국 남해안의 감시망을 뚫고 해안에다가 밀수품을 던져놓고 돌아가곤 했다. 그러면 이즈하라 특공대의 한국 내 조직이 이 물건을 받아 처분했다. 이 밀수왕 李錠起의 밑에 있었던 수많은 밀수계 거물들은 60년대 말부터 對馬島 밀수가 사양길에 접어들자 새로운 활로를 찾게 되었다. 이 때 타이밍 좋게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이 히로뽕이었다. 60년대에 鄭降峰씨 형제와 金華淳씨 등이 구축한 히로뽕 밀조 조직은 釜山항의 밀수 조직과 결합하면서 명실공히 범죄 帝國의 면모를 갖추고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1972년2월 서울지검 특별 수사반은 청와대로부터의 특명에 따라 釜山항을 통한 대규모 금괴·시계 밀수 사건을 파헤쳐 3개 밀수 조직원 19명을 구속하고 다른 3개 파 28명을 수배했다. 이들은 부산시내 브로커와 금은방을 통해 암달러를 끌어 모아 中國 선원편으로 스위스·홍콩·중공제 금괴 등을 밀수입해 왔다. 이들이 3년 동안 밀수입한 금괴는 전국 유통량의 70%를 차지했고 그 대금으로 해외에 유출시킨 외화는 3백만 달러나 되었다. 당시 수사반이 발표한 국내 밀수 조직표에는 崔完洙(당시 40세·금괴荷主) 李黃純(당시38세·시계荷主) 高光南(31·운반책) 鄭재창(40·금괴荷主) 千達南씨(29·금괴운반책) 등의 이름이 보인다. 이들은 이즈하라 밀수 특공대로 잔뼈가 굵었던 프로들로서 70년대말과 80년대 초에 가서는 모두 거물 히로뽕조직의 두목級으로 변신했다.
  
  큰 히로뽕 사건 때마다 이들은 때로는 원료 공급책으로, 때로는 밀수출책으로, 때로는 밀조·밀매책으로 관련되어 「히로뽕 帝國史」의 주요 배역을 맡게 된다. 李黃純씨는 80년3월에 검찰 수사진과 총격전까지 벌이게 되고 鄭재창씨는 큰 원료 밀수 사건 때마다 배후 조종자로 등장하게 되며 高光男씨는 히로뽕 조직과 일부 단속 기관원들과의 야합을 폭로하는 투서를 하여 십여 명의 옷을 벗긴다. 이 밖에도 밀수에서 히로뽕으로 돌아버린 인물로는 韓三洙(51·釜山시 中구 新昌동 1가 4) 吳鳳瑞(53·釜山시 東萊구 溫泉동 443의 8) 崔鍾九(50·釜山시 中구 大廳동) 鄭忠孝씨(46·釜山시 東구 水晶동 389) 등 셀 수 없을 정도이다. 물론 이들은 히로뽕을 전문으로 하면서 기회를 봐서 일반 밀수도 계속했다. 큰 히로뽕 사건에는 약방의 감초처럼 끼이는 사람 가운데 하나인 吳鳳瑞씨의 전과 기록을 보면 관세법 위반2건, 도로 운송 차량법 위반 2건, 습관성 의약품 관리법 위반 2건, 향정신성 의약품 관리법 위반 2건, 사기, 명예 훼손, 부정 수표 단속법 위반 2건, 폭행 등 8종류에 14건을 기록 韓國 밀수의 현대사가 그의 個人史에 새겨져 있는 느낌이다.
  
  금괴 밀수 두목도 뽕꾼 두목으로
  
  70년대초 히로뽕 세계에 轉業한 프로 밀수꾼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마도 崔完洙씨일 것이다. 忠南 公州가 고향인 그는 慶南도 경찰국의 정보 형사로 일한 적이 있었다. 이즈하라 특공대 밀수가 한물 가기 시작한 1968년6월 그는 船食 회사인 동아 상사를 차렸다.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되고 있는 港界 안에서 외항선에 음식품을 공급하는 회사였다. 외항선에의 접근이 자연스럽게 되는 이런 港界내 업소들이 자주 밀수 전초기지로 사용되던 시절이었다. 그는 1년 뒤 항내의 선박 수리를 전문으로 하는 진양 실업도 창립했다. 그는 50―60명의 직원들을 데리고 있었다. 거의가 밀수 전선의 私兵들이었다. 크라운 승용차·트럭·12t짜리 통선으로 장비된 그의 밀수조직은 釜山항을 주름잡았다. 시계 밀수 사건에서도 그는 국내 조직의 총두목으로 발표되었다. 나중에 히로뽕 세계의 거물로 큰 李黃純·鄭재창·千達男씨 등도 崔씨의 부하, 또는 보조원에 불과했다.
  
  崔씨의 조직은 1968년6월부터 4년 동안 10여 척의 중국 선박을 통해 약3백 관의 금괴, 2만 개의 시계 등 싯가 13억 원어치를 밀수했었다. 당시 국내 금시세는 국제 시세보다 두 배나 비쌌다. 崔씨는 이들 외항선이 釜山 외항에서 닻을 내리면 어둠을 틈타 쾌속 통선을 접근시켜 밀수품을 내리는 숫법을 썼다. 4년 동안 한번도 감시 당국에 걸린 적이 없었다 하여 비호 세력이 든든했다는 소문이 나돌았었다. 崔씨의 전과표를 보면 1956년에 벌써 「관세법 위반」이 드러날 정도다. 그러니 그는 약 30년 동안 밀수와 히로뽕 세계를 오간 것이다. 崔씨와 그의 주변에 도사리고 있었던 밀수 조직에게 있어서 72년의 금괴 수사는 일대 타격이었다. 崔씨도 72년7월 특정 범죄 가중 처벌법 위반 혐의로 징역 5년의 대법원 확정 판결을 받았다.
  
  崔씨는 출소 뒤 70년대 중반, 히로뽕 원료 공급자로 釜山의 범죄 세계에 새롭게 등장했다. 과거 밀수 전성기에 깔아 두었던 대만선 루트를 이용, 염산 에페드린을 무더기로 밀수입했다. 히로뽕 세계에선 원료 공급 루트를 장악한 사람이 밀조 조직의 총책이 되는 것이 보통이다. 염산 에페드린만 있으면 직접 밀조를 하지 않고도 원료를 기술자에게 대주고 완제품을 기술자와 나눠 가질 수 있다. 직접 밀조를 하지 않아도 kg당 14만원으로 사들인 수백 kg의 원료를 kg당 40만―50만 원에 밀조 조직에 넘겨주면 단 한번 거래에 수천만 원이 남는다. 이런 식으로 崔씨는 여러 갈래의 밀조 조직 배후에서 원료 파이프 라인 역할을 해 왔다.
  
  70년대 후반에 가선 崔씨와 韓三洙씨등 거물들은 밀조 조직의 前面에 나서지 않고 한걸음 뒤에 물러앉았다. 그렇게 하여 여러 조직들을 조종했으며 들통이 나도 쉽게 빠질 수 있었다. 수사의 중점은 밀조책으로 쏠리기 마련이니까. 崔씨는 나중에는 히로뽕 밀매에도 손을 댔다. 그 때문에 지난 81년6월19일 서울지검 특수부 수사팀과 梁학승씨의 공동 작전으로 붙들렸다. 梁씨는 尹모씨를 통해 崔씨의 히로뽕 2kg을 1천만 원에 위장 구입, 증거물을 확보한 뒤 수사팀으로 하여금 廣安동에 있는 그의 집을 덮치게 했던 것이다. 崔씨는 82년에 출옥한 뒤 또다시 히로뽕 밀조에 손을 댔다가 지난 1월27일 釜山 지검에 구속되었다.
출처 : 월조
[ 2003-07-09, 18:0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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