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뽕 지하제국 탐험(제 1부) - 코리언 커넥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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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뽕 地下帝國 탐험(제1부) - 코리언 커넥션:白色의 恐怖「화이트 트라이앵글」을 가다
  
  이 기사는 홍콩·한국·일본을 무대로 암약하고 있는 거대한 히로뽕 범죄 집단에 대한 추적 르포르타지다. 지난 3년 간 그들의 발자취를 뒤쫓으며 수집한 다각적인 자료를 정리해 간다.
  
  <1983년 12월 월간조선>
  
  제1장 어느 히로뽕꾼의 고백
  
  한번 심부름에 7백50만원
  
  이제 우리는 히로뽕 지하 제국의 문턱에 서 있다. 이 무시무시한, 어마무지한, 신비스러운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려는 것이다. 우리에겐 길잡이가 필요하다. 필자는 梁學承(40·서울 江南구 거주)이란 훌륭한 가이드를 발견했다. 그는 6년 동안 이 제국의 병사로 일선에서 뛰다가 검찰에 자수, 광명을 되찾은 사람이다. 그 자신 히로뽕에 중독되어 폐인이 되다시피 했던 체험도 갖고 있다. 지금은 정신과 육체에서 모두 건강을 되찾은 사람, 땅딸막한 키에 순진한 웃음을 지닌 梁씨는 자신의 히로뽕 험? 그리고 탈출기를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내가 그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75년6월, 부산에서 국제해운 소속 화물선 세븐 스타호(7백30t)에 선원으로 승선, 일본 요꼬하마 고오베 등을 왕래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나는 이 무렵 친구 李범우의 소개로 韓三洙씨(50)를 만나게 되었다. 韓씨는 부산항 주변의 밀수 세계에선 60년대부터 이름을 떨치고 있던 거물이었다. 그는 「동×회」란 동업·동향인 친목 모임을 만들어 회장 노릇을 했고 처, 동생과 함께 히로뽕에 손대고 있었다. 그는 「히로뽕 보세」의 수법을 쓰고 있었다. 韓씨는 「원단」(히로뽕 원료를 그렇게 부름)을 구해도 직접 히로뽕을 만들진 않았다. 「교수」(제조 기술자를 그렇게 부름)에게 원단을 넘겨 완제품 kg당 80?원의 수고료를 주고 히로뽕 제조를 맡겼다.
  
  韓씨는 완제품이 た?이를 인수, 그가 부리는 여러 갈래의 외항 선원들을 통해 日本으로 밀수출했다. 그는 일본에 수많은 輸入先을 갖고 있었다. 對日 히로뽕 취급량에선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최대급 인물이었다. 韓씨는 보통 히로뽕 5kg이 든 보따리를 나에게 건 주었다. 나는 뜯어보지도 않고 이것을 쇼핑백에 넣은 채 부산항에서 배에 올랐다. 출항할 때는 몸수색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발각 될 위험은 없었다. 배에선 선실 벽을 뜯고, 또는 파이프를 절단하고 뽕을 감춘 뒤 깜쪽같이 복원해 놓는 등의 방법을 썼다. 요꼬하마 항구에 내리면 나는 韓씨가 적어 준 전화 번호로 도착을 알린다. 인수자와 만나는 장소는 보통 우리 배가 접안한 부두였다. 日本에선 일반인들의 부두 출입이 자유롭다. 나는 약속 시간에 맞추어 슬리퍼를 질질 끌고 부두로 내려간다. 미리 약속한 복장으로 낚시질를 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 다가가 암호를 교환한 뒤 슬그머니 옆에다가 보따리를 내려놓으면 일은 끝나는 것이었다.
  
  그는 씩 웃으며 잡은 생선을 한아름 내 주면서 『회를 쳐 먹으라』고 농을 하기도 했다. 이들은 차를 몰고 여자를 데리고 와 아베크족으로 가장하는 수가 많았다. 그 다음날?시내에서 인수자와 만나 히로뽕 대금을 수표로 받는다. 당시의 가격은 kg당 2백50만∼3백50만 엔이었다. 나는 韓씨에게 대금을 전달해 주고 kg당 1백50만 원씩의 운반비를 받았다. 5kg만 운반해도 7백50만 원, 선원 월급은 택시값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당시엔 나뿐만이 아니라 정말 수많은 선원들이 이런 운반을 해 주었다. 그런 심부름을 하지 않는 선원들을 세는 게 더 빠를 것 같은 시절이었다. 우리 배는 요꼬하마·고오베·오오사까 등 일본의 여러 항구를 드나들었다. 韓씨는 항구마다 수입선을 확보하고 있는 듯했다. 내가 운반해 준 것만 해도 韓씨는 5∼6개의 루트를 갖고 있었다. 나는 1년 남짓 배를 타다가 하선했다. 요꼬하마에서 동료 선원이 밀수품을 운반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들렸다. 나를 포함한 다른 선원들도 조사를 받고 귀국 조처를 당했다. 이것이 결과적으로는 다행이었다. 세븐 스타호는 얼마 뒤 홍콩 근해에서 침몰, 선원들은 떼죽음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히로뽕 중개상을 차리다
  
  梁學承씨는 배에서 내려 몇 달 놀다가 다시 흥아 해운(株)의 對日 화물선 삼정호(1천t)를 타게 되었다. 梁씨는 원래 배를 타기 전 금은방에서 일했었다. 그는 보석 감정 기술을 갖고 있었다. 삼정호 선장이 「보석 감정사」를 찾다가 梁씨를 발견, 채용했다. 선장이 보석 감정사를 필요로 했던 까닭은 뻔한 것이었다. 선장은 자신이 밀수하는 보석을 감정해 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때 벌써 「뽕界」에선 일본으로 보낸 히로뽕의 대금을 금괴나 보석으로 받는 것이 일반화되고 있었다. 梁씨의 증언은 계속된다.
  
  『나는 삼정호를 타면서부터 독립을 하기로 결심했다. 韓씨가 시키는 대로 물건을 운반만 해 줄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히로뽕을 구입, 밀수출을 하기로 한 것이다. 78년 1월 나는 부산의 조직 깡패 「20세기파」 소속인 李기영으로부터 히로뽕 밀조자 金대인(34)을 소개받았다. 金대인의 가족은 히로뽕系였다. 아버지 金재동(58)은 히로뽕 밀조계의 거물로서 1960년대부터 鄭강봉 등과 함께 한국에서 처음으로 히로뽕을 밀조하기 시작한 元祖 중의 한 사람이었다. 나는 부산역 앞 S호텔에서 金대인을 소개받고 즉석에서 kg당 4백만 원을 주고 뽕 두 개(한個는 1kg을 뜻함)를 샀다. 나는 삼정호가 요꼬하마에 도착하자 부두에서 재일 동포 金東一에게 두 개를 건네주고 나중에 金씨가 한국에 왔을 때 한화로 1천1백만 원을 받았다. 金동일은 원래 韓삼수의 수입선이었다. 내가 자주 韓씨 물건을 운반해 주면서 친해졌었다.
  
  폭력단의 組員으로서 그는 술집을 경영하고 있었다. 부산에는 내연의 처를 두고 자주 한국을 왕래하며 重機 5대를 굴리는 부자였다. 金씨는 나의 단골이 되었다. 그는 나로부터 구입한 히로뽕을 다른 폭력 조직에 팔고 있었다. 1천1백만 원에 산 2kg에 3백만 원의 마진을 붙여 전매(轉賣)하고 羚駭? 金대인이란 上線(밀조 루트)을 갖게 된 나는 下線, 즉 운반책을 따로 두기로 했다. 對日 화물선 아리랑 스타호 선원 尹병남 등 세 명의 선원들을 나의 밀수출 루트로 잡아 두었다. 매달 한번씩 정도는 이 선편 루트를 가동시켰다. 이 때부터 나는 히로뽕 주사를 맞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내가 산 「뽕」의 질을 검사하기 위해 맞았다. 히로뽕은 맨눈으로는 감별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저 조미료나 설탕처럼 보일 뿐이다. 가루를 물컵에 넣어 水面 위에서 거품을 튀기면서 녹으면 上質, 가라앉으면서 녹으면 下質이라고 한다. 냄새가 나거나 착색이 되어 있으면 순도가 낮고 알맹이가 굵은 것은 순도가 높다고도 한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감별법은 직접 히로뽕 주사를 맞아보는 길뿐이다. 그렇게 시작한 주사 회수는 점점 잦아지기 시작했다.
  
  히로뽕 용액이 팔뚝의 정맥 속으로 흘러들면 금방 상쾌한 기분에 젖게 된다. 이 기분의 정도, 기분이 오르는 시간, 지속 시간으로 히로뽕의 질을 알아 낼 수 있다. 히로뽕을 맞으면 비온 뒤의 화창하게 갠 날씨, 세상이 모두 그렇게 산뜻하게만 보인다. 視覺만 그런 게 아니라 청각도 놀랄 만큼 예민해졌다. 여관방에 누워 있으면 그 때까지는 들리지 않던 위층에서 속삭이는 소리까지 환하게 들렸다. 피로감이 싹 가시고 몸은 가뿐해지며 잠 한숨 자지 않아도 정신은 맑기만 했다. 밥 한 숟갈 먹지 않아도 힘이 펄펄 나는 것 같았고 만사에 관심을 갖게 되고 자신만만해졌다. 국민학교때 소풍가기 전야의 그런 설레는 기분, 섹스도 마음 내키는 대로 몇 시간이나 계속할 수 있고 마음대로 사정 시각을 조절할 수 있는 초능력, 이런 감각의 세계에 나는 서서히 빠져들고 있었다.
  
  ** 다음 메모는 외곽 케이스를 만들고 백그라운드를 넣어 처리할 것
  메모/떠도는 惡靈
  
  히로뽕은 그리스어로 「일을 즐긴다」(Philopons)라고 한다. 이 하얀 가루의 「魔藥」은 「홍콩·한국·일본」을 연결하는 「하얀 공포의 제국」을 창설했다. 「화이트 트라이앵글」―. 그것은 홍콩을 원료 공급기지, 한국을 工團, 日本을 소비 시장으로 삼는 3각 구도를 가진 국제 범죄조직인 것이다. 이 국제 범죄 집단은 미얀마·라오스·타일랜드 접경지역에서 암약하는 아편 생산·밀매·밀조 전문의 「골든 트라이앵글」 조직과 쌍벽을 이룬다. 히로뽕 中毒者는 日本에 1백만, 韓國에선 2천 명(추정)이나 된다. 이들을 히로뽕의 노예로 삼아 치부하고 있는 지배층, 즉 화이트 트라이앵글의 조직원은 10만 명을 넘는다. 日本의 조직 폭력단 소속 「야꾸자」 10만 여명, 한국의 밀조·밀매범 2천 여명(추정), 홍콩·대만의 원료 밀수꾼 수백 명이 이 막강한 「히로뽕 軍團」을 이루고 있다.
  
  「히로뽕 제국」의 年間 매상고는 日本경찰의 추산에 따르면 1조6천억 원이다. 日本조직 폭력단(2천5백여개)은 전체 수입의 반을 히로뽕 밀매로 조달하고 있다. 한국 밀조 조직의 히로뽕 對日 밀수출액은 약 2백억 원, 홍콩―대만 밀수선단의 對韓 원료 밀수출액은 약 4억 원이다. 히로뽕은 한국을 거치면서 50배의 이문을 창출하고 日本에 들어가선 80배의 이문을 밀매 조직에 안겨 준다. 약 2천 배의 폭리, 이것이 히로뽕 제국을 떠받치고 있는 경제의 원칙이다. 「히로뽕 제국」이 日本에 이어 한국 사회에서도 그 「악령의 시한 폭탄」을 터뜨릴 때 수십만의 인생이 하얀 약물의 포로가 되어 황폐화될 것이다. 그 대폭발의 시한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나는 그제야 내 주변에 있는 거의 모든 「뽕쟁이」들이 히로뽕 중독자가 되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떼돈을 버는 것만큼 늘 쫓기는 불안감 속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불안·초조를 잊기 위해 그들은 더욱 깊숙이 히로뽕의 그 환각 세계로 도피해 들어가고 있었다. 金대인은 부산 松島 해수욕장 앞 바다에 늘 자가용 배를 띄워 놓고 있었다. 「통금」이 있던 시절, 그는 새벽 5시만 되면 이 모터보트를 몰고 남해의 외딴 섬으로 낚시를 나가곤 했다. 낚시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체포의 불안으로부터 탈출, 무인도에서 해방감을 맛보며 히로뽕을 스스로 주사하여 즐기기 위한 뽕꾼 특유의 소풍이었다. 간혹 밀조범들은 이런 낚시를 가장, 무인도나 바닷가에서 버너로 히로뽕 제조 1차 공정을 끝마치기도 했다. 1차 공정에선 염산 냄새가 많이 나므로 주택가에선 들통이 나기 쉽다. 金대인은 낚시터에서 밤늦게 돌아와서도 꼭 밤 12시 직전에 집으로 전화를 걸어 이상 유무를 확인한 뒤 들어가곤 했다. 그들에게는 통금 시간 4시간이 그래도 덜 불안한 시간대였다.
  
  히로뽕을 한번 맞으면 5∼8시간쯤 기운이 지속된다. 이 약 기운에서 깨어나면 그 때까지 밀렸던 피로감이 한꺼번에 덮쳐 오면서 나는 깊디깊은 잠에 빠지고 만다. 정말 죽은 듯, 누가 꼬집고 때려도 모르는 그런 잠에서 하루고 이틀이고 계속 헤맨다. 물론 음식을 입에도 대지 않고서. 잠에서 깨어나면 으레 밤이다. 그래서 또 히로뽕이나 여자를 찾게 된다. 낮과 밤을 거꾸로 지새며 식욕은 떨어지고 몸은 말라만 갔다. 씹어서 먹는 밥 같은 음식은 귀찮아졌다. 목구멍에 걸려 잘 넘어가지도 않았다. 그래서 흰죽 같은 걸로 때우게 됐다. 약 기운만 믿고 황음(荒淫)에 빠져 아내를 못살게 굴고…이렇게 되면 가정 파탄이 안 올 수가 없다. 나도 하루에 서너 번씩 주사를 맞으면서 이들과 같은 황폐된 생활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78년2월 나는 서울 C호텔 6층에서 중요한 인물을 만났다.
  ** 메모 끝
  
  文明吉이란 미스터리
  
  文明吉(40)이란 사나이였다. 강단 있게 생긴 그는 스스로를 기관원 출신이라고 소개했으나 나중 알고 보니 전과3범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文씨에게도 히로뽕을 건네주기 시작했다. 文씨는 金浦 등 공항을 통한 對日 항공 밀수출 루트를 확보하고 있었다. 이 루트는 선편 루트보다도 훨씬 빠르고 굵직했다. 내가 오늘 文씨에게 물건을 건네주고 도오꾜의 누구에게 전달하라고 하면 하루나 이틀 뒤에는 꼭 일본에서 「잘 받았다」는 국제 전화가 걸려 오는 것이었다. 文씨는 나 이외에도 여러 국내 판매 조직과 접선, 일종의 對日 밀수출 종합 창구 역할을 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선편보다는 점점 항공편 루트를 더 자주, 더 대량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를 안 지 1년 남짓 동안 나는 文씨를 통해 열 다섯 차례 약 30kg(일본 말단 밀매 가격 한화 환산 2백40억 원)을 金東一씨 등 단골에게 보냈다. 文씨가 직접 일본으로 운반하는 것은 아니고 그가 심어 놓은 반출 조직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한국과 일본을 자주 오가는 일본인이나 재일 교포를 주로 활용하는 것 같았다. 그는 단번에 30kg을 일본으로 보내기도 한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30kg급은 미군 조종사 편으로 부친다는 거였으나 물론 확인할 길은 없다. 30kg짜리 보따리를 일본의 누구에게 전달해 주면 조종사에게 1만 달러씩 준다는 얘기며, 조종사들은 출입국 때 체크를 안 받아 안전하다는 얘기며, 그런 조종사는 미인계를 써서 자기 부탁에는 꼼짝 못하도록 잡아 두고 있다는 얘기 등이 황당무계한 것 같기도 했으나 그의 실적을 보면 거짓말로만 치부할 수도 없었다』
  
  
  
  도망 중에도 밀수업 번창
  
  이 文明吉에 대해서는 본 기자가 덧붙일 얘기가 있다. 지난해 2월 28일 日本 경찰은 인터폴을 통해 文明吉에 대한 소재 수사를 한국 치안본부에 의뢰해 왔다. 일본 경찰은 81년11월17일 대한항공 724기 편으로 나리따 공항에 도착한 재일 교포 徐洪錫씨(57·도오꾜 시나가와區 유따가마찌12-31-6 거주)를 히로뽕 밀수 혐의로 검거했다. 徐씨가 들고 나온 두 개의 나무 상자 속에는 8개의 부채꼬리가 들어 있었다. 히로뽕3.97kg이 상자 안에 감춰져 있었다. 徐씨는 경찰에서 진술하기를, 히로뽕은 文明吉씨로부터 받았는데 81년 11월15일게 서울 S호텔에서 文씨 및 조모씨와 함께 의논하여 徐씨가 일본에 귀환하면 서울 李모의 친지라고 자칭하는 어떤 사람이 徐씨에게 전화를 걸어 올 것이니 그에게 히로뽕을 건네주기로 했다는 거였다. 徐씨는 무려 67회에 걸쳐 부채꼬리 1천5백42개를 수입했다고 진술했다.
  
  일본 경찰은 많은 양의 각성제(히로뽕)가 같은 숫법으로 日本에 반입되었을 것이라고 추정, 文씨의 소재 수사를 의뢰한 것이었다. 전과 조회 결과 文明吉씨는 병역법 위반·부정 수표 단속법 위반 등 6개의 전과를 가지고 있음이 판명됐다. 더구나 80년10월13일자로 釜山시경에서 마약법 위반 혐의로 전국에 지명 수배해 놓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文씨는 간도 크게도 도피 중에 히로뽕 밀수출을 시도한 것이었다. 金海가 고향인 文씨는 도망 중이었지만 그의 농장이 엄청난 규모임이 밝혀졌다. 京畿도 龍仁군 외사면 가창리 296번지에 있는 청지 동물 농원이 그곳. 대지 1만9천3백평, 건물 11채(건평2백), 산돼지 3마리, 곰 25마리, 노루·사슴 8마리, 조류 다수…. 이 농원은 文씨가 도피 직전 재일 동포 池석진씨(도오꾜 거주)에게 팔아 넘긴 것으로 돼 있었으나 池씨는 없고 관리인이 경영을 하고 있었다. 梁씨에 따르면 文씨가 78년에 살았던 漢南동 집도 어마어마한 호화 저택이었다고 한다. 文씨가 히로뽕 밀수출로 이런 재산을 마련한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최근 日本주둔 美軍 수사기관은 항공편으로 대량의 히로뽕을 일본으로 밀반입한 군인을 재판에 넘긴 것으로 보도되었다. 일본과 한국 경찰에선 文씨가 잡히면 굉장한 항공 밀수 루트가 발각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그를 뒤쫓고 있다. 文씨의 비호 세력도 그 때 깨질 것이라고 예언하는 수사관도 있다. 文씨는 이 서씨 사건 이외에도 80년7월 釜山지검이 적발한 3백kg밀조 사건에 원료 공급책으로 단정되어 수배를 받고 있는 중이다. 3백kg 사건은 韓三洙씨가 文씨로부터 염산 에페드린 5백kg을 1억2천만 원에 사들여 완제품 3백kg을 만들고 이를 對日 활어선을 통해 日本에 팔아 넘겼다는 내용이었다. 韓씨 등 5명은 구속되어 실형을 선고받았다. 梁씨의 눈에 비친 文씨는 항공편 밀수출 전문인데 文씨는 굵직한 원료 밀수입 루트도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해상과 하늘을 누비고 홍콩과 일본을 넘나드는 괴물, 그래서 고참 형사들은 文이야말로 활동중인 뽕꾼 가운데 최고의 실력자라고 평하고 있다.
  
  자수로 되찾은 나의 삶
  
  梁學承씨는 78년 봄 삼정호에서 내렸다. 삼정호 선장 등 선원 몇 명이 히로뽕 등 밀수 혐의로 경찰에 구속된 때문이었다. 梁씨는 걸려들지 않았다. 육상 생활을 하면서부터 그의 판매 공작은 더욱 활발해졌다. 서울 잠실에 살면서 수천만 원대의 부동산까지 갖게 된 그는 부산의 다른 히로뽕 밀매 조직과도 선을 달았다. 전직 경위 金모씨 등으로부터 히로뽕을 매입, 다나까·야마모도 등 일본 고객들에게 보냈다. 80년 3월 그는 또다시 자신의 사업을 한 단계 격상시키려고 했다. 단순히 金대인으로부터 kg당 4백만 원씩 주고 히로뽕을 사는 데만 머물러 있기가 싫었던지 제조에 손을 대기로 했다. 상점을 담보로 하여 1천6백50만 원을 빌어 金대인씨에게 밀조 자금으로 대주고 히로뽕 완제품 10kg을 받기로 약속했다. 1kg당 1백60만 원밖에 먹히지 않아 이문이 많은 장사였다. 석 달 뒤 梁씨는 먼저 2kg을 받았다. 그 가운데 1kg을 친구인 李범우씨에게 건네주었다. 李범우씨 등 6명은 80년10월 부산의 마약 감시반에 붙들렸다. 다시 梁씨의 증언을 듣는다.
  
  『李씨는 金대인과 나의 이름을 댄 모양이었다. 金대인에게 나머지 8kg을 받으려 찾아갔더니 8kg분 1천2백만 원을 그 사건의 무마비로 친면이 있는 보사부 마약 감시원 吳모씨에게 주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과연 얼마 뒤 吳씨가 나를 불러 모 호텔에서 만났다. 그는 나를 봐 주는 대가로 나에게 다른 뽕꾼을 찍어달라고 했다. 나는 그런 정보가 없다고 발뺌을 하며 적당히 넘겼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吳씨는 李범우 사건과 관련, 2백만 원을 받았을 뿐이었다(이 건으로 吳씨는 구속). 나는 내 돈을 떼먹은 金대인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뽕꾼」들은 자기는 중독자이면서도 동료가 중독자가 되면 그와 멀리하려는 이상한 습벽을 갖고 있다. 중독자는 자제가 되지 않아 언제 무슨 사고를 낼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金대인이 나를 그렇게 보는 것 같았다.
  
  단골인 金東一도 뽕 대금 2백만 엔을 떼먹었다. 또 다른 단골 모로보시는 1.5kg대금 6백30만 엔을 떼먹었다. 모로보시의 경우는 그가 日本에서 검거되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으로 고의는 없었다. 이렇게 되니 나도 생각이 달라졌다. 그즈음 나의 중독 증세는 더욱 악화돼 있었다. 도망 다닐 때도 주사기와 뽕만은 꼭 지니고 다니며 하루에 5∼6회씩 스스로 주사했다. 종일 호텔에 누워 뒹구는 생활을 일곱 달쯤 하고 있었다. 81년7월 드디어 나는 자수를 결심하고 서울지검 마약 담당 검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검사는 형사 한 분을 보내 주었다. 내가 일찍이 본 적이 없는 사명감에 불타는 형사였다. 나는 그에게 내 기억을 되살려 히로뽕 조직과 내가 관련된 범죄 사실을 낱낱이 털어놓았다. 나의 증언에 따라 수십 명의 검거 대상자 명단이 만들어졌다. 그들은 차례로 구속되었다. 釜山의 거물 崔完洙도 구속되었다. 검사는 고맙게도 나의 수사협조와 자수 사실을 참작, 기소 유예 처분을 내렸다.
  
  나는 히로뽕도 끊었다. 집안에는 비로소 웃음이 깃들이기 시작했다. 나의 고발로 감옥에 들어간 뽕꾼들의 보복이 걱정되곤 한다. 그러나 내가 다시 뽕에 손대지 않는 한 약점 잡힐 일은 없다. 육체적인 보복에 대비하여 나는 체력을 단련중이다. 그런데 정말 큰일이다. 뽕 세계에서 생활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내 눈엔 도처에 그런 사람들이 보인다. 오죽하면 釜山에선 놀고 잘사는 놈은 간첩 아니면 뽕꾼이라는 말까지 나돌겠는가?
  
  釜山 中央동의 다방들에 가 보면 히로뽕 원료 중매상들이 득실거리고 서울 어느 곳의 호텔에서는 벨 보이들이 일본인들에게 1회 3천 엔씩 받고 뽕 주사를 놓고 있다는 소문이 들린다. 얼마 전 죽은 거물 정치인 K씨의 아들은 히로뽕 상습자로 구속되기까지 했다. 서울과 대구의 연예계로 뽕을 공급한다는 깡패들도 알고 있다. 이러다간 히로뽕이 대마초처럼 퍼지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뽕 세계에선 별볼일 없게 될 때 비로소 잡힌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송사리만 잡히고 정말 큰 거물은 아직 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정말 히로뽕으로 떼돈을 벌었던 사람들은 일찍 손을 씻고 의젓이 살고 있다는 얘기도 듣고 있다. 단속 기관의 수사관들이 아는 대로만 다 잡아 넣는다면 뽕꾼들은 쉽게 소탕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梁씨가 자수하여 검찰에 제보한 「내부 고발 자료」는 아마도 히로뽕 수사 역사상 가장 상세한 것이었을 것이다. 梁씨는 히로뽕 界의 거물들과 두루 접촉했었고 증언이 매우 자발적이었기에 정보는 알짜배기였다. 梁씨의 증언에서 드러난 기라성 같은 뽕꾼들의 범행과 개탄할 만한 내막에 대해서는 뒤에 상론(詳論)한다.
출처 : 월조
[ 2003-07-09, 18:1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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