有故 1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1979년 11월 3일 고 박정희 대통령의 육신이 국군묘지에 묻히던 날, 어는 신문은 '한 시대를 이끌고 역사 속으로'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러나 8년이 지난 지금도 박정희는 '역사'가 아니라 '현실'이다.
  
  10.26정변 뒤 잠시 동안 박정희와 그의 시대는 일단 매듭이 지어지는 듯했으나 5.17로 해서 그가 남긴 체제는 운용자들만 조금 바뀌었을 뿐 고스란히 승계되어 오늘날의 이 현실을 지배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도 박정희와 10.26의 그늘 아래 있다. 그늘 속에 있으니 그늘을 만든 나무의 전체상이 제대로 보일 리가 없다.
  
  오늘날 민주화운동은 박정희의 그늘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인 것이다. 그늘에서 뛰쳐 나와야, 즉 국민이 정권을 선택할 수 있게 되는 민주화의 첫 걸음이 내디뎌진 뒤에라야 사람들은 박정희를 차분한 마음과 냉정한 머리로써 찬찬히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대부분이 박정희가 최후를 맞는 그 소용돌이 속에서 씌어진 것이다. 1979년 10월 16일 부산에서 반정권 데모가 터진 때로부터 다음 해 5월 17일까지 사이의 열띤 분위기 속에서 취재하고 정리한 것을 7년이 지난 지금 책으로 내놓게 된 것은, 오늘의 상황이 급박하기는 하지만 박정희와 그의 시대를 어느 정도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시기가 코앞에 왔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의 붕괴과정은 다른 모든 조직의 몰락과정과 비슷한 궤적을 보여 주었다. 정권의 중심 인물이 먼저 정신적인 파탄을 나타냈고 조직의 내부 질서가 무너져 내렸으며, 그것은 때맞춰 다가온 외부의 위기 요인에 의해서 확대되었다. 조직은 항상 안으로부터 먼저 망하기 시작하는 법이다.
  
  그러나 수많은 객관적 조건들이 널려 있다고 해서 한 정권이 자동적으로 무너지지는 않는다. 바싹 마른 인화물질이 있다고 해서 불이 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객관적 상황 조건과 주관적 인간의지가 통합될 때, 즉 인(因)과 연(緣)이 부합될 때 국면을 전환시키는 대사건이 터지는 것이다.
  
  부마사태의 발단을 만든 부산대학생 정광민(鄭光敏)과 10.26사건의 김재규가 그런 연(緣)을 제공한 두 사람이다. 부마사태와 10.26사건은 그 전개과정을 좁게 보면 우발적인 것 같지만, 넓게 볼 때는 필연적인 것이다. '필연적인 우연'인 것이다. 학생 정광민이 화가 나서 강의실로 뛰어들고, 김재규가 '개인의 정분을 끊고 야수의 마음으로 심장을 쏠' 수 있었던 그 심리의 뒤에는 한 시대의 축적된 모순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정광민과 김재규의 그 결단에 이르기까지의 심리변화는 상황과 인간의 상호작용을 보여준다. 박대통령을 어버이처럼 따랐던 김재규를 냉혈의 모반자로 변모시킨 것은 1970년대의 시대상황 이었다. 이 경우에도 김재규의 성격 속에는 상황이 뿌린 갈등의 씨앗을 품어 키울 만한 바탕이 깔려 있었다. 한마디로 그는 회의할 수 있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10.26사건 뒤 시중에서는 '미국 CIA가 조종했다'는 말이 떠돌았다. 수사 책임자가 이를 부인했음에도 아직도 이를 믿으려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이 책 속에서 이 설을 부인했다. 그러나 한편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소문은 항상 '축약된 과장법'으로 나타난다. 기자로서 나의 관점은 과대포장된 소문의 알맹이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김재규는 박동선(朴東宣)사건의 여파로 전임자가 사임한 뒤 중앙정보부장이 될 수 있었다. 중앙정보부장이 된 뒤 그는 친미적인 입장에 섰고, 박대통령의 반미감정이 안보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김재규를 대통령 살해로 몰아 붙인 중요한 사건은 김영삼에 대한 의원직 제명이었다. 이 제명의 발단도 反박정희 성향이 강하던 미국 신문에 난 기사였다. 요컨대 김재규가 방아쇠를 당긴 무대에서는 한.미간의 갈등관계가 배경음악으로 깔려 있었다.
  
  강대국과 약소국의 기본관계가 순탄하지 못할 때는 여러 가지 사건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10.26사건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점이 많다. 더구나 박정희의 이력서에 깊게 각인된 반미적 경력과 성향은, 그의 집권과 죽음에 다같이 미국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게 했다. 대통령이 된 몸으로서도 늘 미국과 가진 자에 대한 반감을 지니고 있었고, 그 감정대로 행동할 수 없어 괴로워 하고 또 외로와 했던 사람이 박정희였다 '10.26사건을 미국 CIA가 조종했다' 는 것은 민중 속에서 단순화된 유언(流言)임에 분명하지만, 그것의 알맹이는 상당한 진실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박정희의 파란만장한 생애 그 자체가 한국 현대사의 한 단면이다. 박정희는 한 시대를 만들었고, 그 시대는 또 박정희를 변화시켰다. 박정희란 '개인' 속에는 그 시대를 살았던 우리의 모습들이 녹아 있다. 식민지의 경험, 가난, 해방, 좌.우익의 피비린내 나는 투쟁, 사상적 방황, 이혼, 6.25, 4.19, 경제성장과 물질적 풍요, 아내의 피살, 도덕의 황폐화 .... 그것은 한 인간으로 맛볼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영욕이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것은 또한 우리 시대의 한국인들이 살아온 과정의 상징적 표현이기도 했다. 한국인의 현대사적 삶을 가장 진하게 살아온 인간 박정희는 종장에 가서는 허무감에 젖는, 피로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는 수많은 한국인이 그렇듯 유교적 실용주의자였다. 실용적인 가치를 성취한 뒤 그는 쓸쓸해졌다. 유형적인 것, 즉물적인 것 이외의 가치, 즉 정신적 종교적 예술적인 고귀함에 대한 이해도 흥미도 없었던 그는 슬쓸함을 채우고 허무해지는 자신을 지탱해 줄 철학적인 신념이 부족하였다. ' 인간은 먹고 사는 것 이외에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는가'라는 회의에 대한 답을 찾아낼 수 없었던 것이 인간 박정희의 한계였고, 그가 상징하는 이 시대의 위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인이 인간의 존재 가치를 회의할 수 있는 물질적 바탕을 만든 것은 박정희였다.
  
  그가 주도한 '굶주림으로부터의 해방'이 한국인의 관심을 형이상학적으로 한 단계 올려 놓았기 때문이다. 박정희를 비판하는 사람도, 굶어죽는 사람이 없도록 만든 점과 함께 한국인이 자신감을 갖게 한 것을 그의 큰 공으로 인정해주고 있다.
  
  이는 실로 대단한 업적이다. 이 업적으로 해서 박정희란 이름은 우리의 역사에서 굵은 고딕 활자로 길게 기록될 것이다. 박정희를 그런 정치가로 만든 것은 당대의 한국인이었다. 박정희는 우리의, 또 우리 시대의 분신이었다. 그래서 박정희의 최후는 한 시대의 끝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문제는 박정희는 갔지만 그의 시대와 체제는 정리되지 않았다는 점일 것이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그의 유산이 어떤 방식으로 정리되느냐에 따라 크게 좌우될 것이다. 한국 역사상 박정희만큼 저술과 연구의 대상으로 자주 등장할 인물은 달리 없을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에 관한 논문, 저작들이 많이 쏟아질 것이다. 그의 극적인 생애와 그에 대한 연구를 통해 스스로의 장단점, 한국인의 장단점, 더 나아가 인간의 삶의 조건들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박정희는 수많은 학자와 기자들을 유혹할 것이다.
  
  이 책이 그런 작업의 한 기초 자료가 되길 바라면서 취재에 협조해 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한다.
  1987년 6월
  조 갑 제
  <이 책은 관훈클럽 신영연구기금의 지원을 받아 취재 및 저술되었다>
출처 : 한길사
[ 2003-07-10, 10:3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리버티헤럴드  |  뉴스파인더  |  이승만TV  |  장군의 소리  |  천영우TV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