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폭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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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의 대부분을 미국의 대학에서 연구원 생활로 보내고 최근 귀국한 한 선배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 1년동안 한국을 떠나 있었다는 것이 기자로서는 불행이란 생각이 든다. 6월사태와 대통령선거의 열광을 실감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 두 사건에 의해 이루어진 오늘의 현상을 이해하자니 뭔가 허술한 기분이다. 역시 기자는 현장에 가까이 있어야 하는 직업인가 보다.'
  
  기자가 가장 강해 보이는 것은 현장에서 눈에 불을 켜고 발바닥이 닳도록 뛰고 있을 때다. 그것은 남자로서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닌가 한다. 군인은 총을 가질 때 강하듯 기자는 현장 속에 있을 때 그 어떤 직업인보다도 강해진다. 격동의 1980년대를 기자로 살면서 단순히 대사건을 보도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고 가지가 바로 현장의 그 역사를 만드는 주역 중 하나라는 보람을 느낀 이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1980년 5월 광주사태를 취재한 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신문기자 시절'을 일단 마감했다. 한 1년간 자유기고가 생활을 한 뒤 나는 월간 잡지기자가 되었다. 월간잡지기자는 마감시간이 월(月) 단위이기 때문에 일간지 기자처럼 현장에 가깝게 다가가지는 않는다. 몇 발자국쯤 뒤로 물러서서 약간 넓은 시각에서 일간지 기자들이 쓸고 지나간 현장, 즉 정돈된 현장을 다루게 된다. 자연히 잡지기사는 사건의 전개과정뿐 아니라 전체의 모습과 의미를 담게 된다. 상당한 취재시간과 상당한 지면이 보장되는 잡지기사는 심층취재를 가능하게 한다. 바로 이 점에서 잡지는 신문이나 방송 매체보다도 우월한 것이다.
  
  스스로 의식해서 그런 것은 아닌데, 나는 1985년 2·12총선부터 1988년의 4·26총선에 이르는 질풍노도의 시대를 그 단면이나마 잡지라는 그릇에 연속적으로 담게 되었다. 부산에서 신문기자로 1970년대를 보냈던 내가 한국의 파워 센터인 서울 광화문에서 1980년대를 살면서 한국역사상 가장 뜻깊은 사건들의 현장에 가깝게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은 기자로서 행운이었다. 나를 그런 자리에 있게 해주신 분들에게, 평소에는 잊어버리고 지낸,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한 3년 전 친구들과 모여 잡담하는데 한 사람이 문득 이런 말을 했다.
  '지금은 세상되어가는 꼴이 더럽고 답답하고 속상하지만 언젠가는 바로 이 순간까지도 행복하게 기억될 날이 올 것이다.'
  
  지난 3년은 대다수 한국인들에 의해 '행복했던 시대'로 추억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 3년간 많은 사람들이 상황의 참여자가 되었고 새 역사를 만드는 데 크든 작든 제몫을 다했다. 오늘의 변화는 누가 만들어 준 것이 아니다. 김영삼, 김대중, 노태우, 박종철, 권인숙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한두 번의 삽질을 거들었던 것이다.
  
   '즐거운 것'보다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흥분하고 분노하며 환호한 적은 우리 역사상 일찍이 없었을 것이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자신에게 수없이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던 시대는, 아무리 캄캄했다 하더라도 소중하며 즐거운 추억인 것이다.
  
  저 능선만 넘으면 정상이 보이겠지, 저 터널만 지나면 신천지가 전개되겠지, 하는 기대를 가지고 걸음을 재촉하다가 넘어지며, 실망하고, 또 일어나는 것이 인간사인 것 같다. 역사의 행로도 같으리라. 이 고비만 넘기면 멋진 지평이 전개될 것이라고 가슴 부풀었지만, 그 고비를 넘겨도 기적같은 것은 없었다. 다만 약간 좋아졌을 뿐이었다. 다만 약간 정상에, 그리고 멋진 신세계에 가까이 갔을 뿐이었다.
  
  그러나 역사에 있어서 이 '약간의 전진'은 얼마나 눈물겨운 성취인가. 봉건의 나라에서, 식민지였던 나라에서, 반동강 난 나라에서, 생각이 다르다는 것은 죽음을 뜻하기도 한 나라에서, 동족의 가슴에 총질을 서슴지 않았던 나라에서 눈물·피·땀·함성·비명, 그리고 목숨걸고 쌓아올린 이 '약간의 전진'이란 탑은 우리 모두의 것이다. 그 '우리'의 기록을, 이 금자탑을 쌓는 데 돌을 던져 주었던 모든 분들에게 바친다. 1988년 7월
출처 : 조선일보사
[ 2003-07-10, 10:4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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