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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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자기가 쓰고 싶은 것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독자들이 읽고 싶어하는 것을 쓰는 직업인이 기자다. 내가 쓰고 싶어하면서도 시간을 내지 못하고 있는 소재가 하나 있다. 그것은 고래다. 물기둥을 일으키면서도 유유히 대양을 떠도는 고래와 이 순진무구한 고래들을 글자 그대로 작살낸 인간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은 것이다.
  
  국민학교 다닐 때 본, 그레고리 팩이 주연하고 존 휴스턴이 감독한 영화 '백경' 이후로 나는 고래를 좋아하게 되었다. 울산 장생포를 오가면서, 솔피(고래를 잡아먹는 고래)의 이빨을 깎아 만든 멋진 담배 파이프를 물고서 경로당을 출입하는 늙은 고래잡이들도 많이 만났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한 기자가 한가하게 고래를 쓰고 앉아 있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사회의 요구에 맞추다가보니 나는 1987년과 88년에는 군인들에 대해서 기사를 많이 쓰게 되었다. 정승화 증언, 윤필용 사건, 12·12사태 등 주로 군사정권을 끌어가고 있는 군인들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서 쓴 것들이었다. '이제 우리도 민주주의를 하게 되는 모양이다'는 국민들의 희망을 산산조각 낸 1979년 12월 12일, 한남동의 총성은 자다가도 깨어나 화가 치미는 응어리를 내 가슴 속에 묻어놓았다. 군관계 기사에 대한 사회의 수요와 나의 이런 홧병이 정치군인을 자주 다루게 했던 셈이다.
  
  지난해 12월의 대통령선거 이후 나는 가슴이 허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중오할 대상이 갑자기 사라졌을 때의 어리둥절한 허탈감 같은 것이었다. 기자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 이 새로운 상황에서 어떤 행동지표를 세워야 하는가를 곰곰 생각해보기도 했다. 한편의 충격적인 영화를 보고 극장 문을 나섰을 때 쏟아져 내리는 대낮의 밝음 앞에 선 것 같았던 시기였다. '증오할 대상이 없어졌으니 이제는 사랑할 대상을 찾아야지…'하는 말들이 이즈음 자주 입에 붙기 시작했다.
  
  사물을 보는 관점과 관심의 대상이 서서히 바뀌는 것을 느꼈다. 저 멀리 높게 있는 것보다는 우리 곁에 있는 작은 것들에 마음이 쏠리고, 시비를 가리려는 살벌한 자세보다는 일단 상대를 이해해보려는 의욕이 솟아나는 것이었다. 88년 6월호 월간조선에 실린 '한국의 군부'를 취재하면서 나는 제대한 지 18년만에 처음으로 병영과 철책선으로 돌아가 보았다.
  
  군부, 군사정권, 정치군인 등의 짧은 낱말로써는 간단하게 상징할 수 없는 힘, 낭만, 아름다움, 애틋함, 그리고 사회에 대한 증오심이 거기에 있었다. 장교들은 대체로 울분에 차 있었다. 그 울분의 원인을 따지기 전에 우선 그런 울분의 존재를 알리자는 생각으로 기사를 썼다.
  
  '공수 부대의 광주사태'도 비슷한 관점에서 쓰여졌다. 잔혹한 진압이 왜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당사자의 증언은 그 진압의 피해자들인 광주시민들의 증언만큼 진상규명에는 필수적인 자료다. 군인과 시민의 행동논리는 다르지만, 그 다름을 서로가 알아야 다름에 따른 또 다른 충돌을 예방할 수가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나와 다르다는 것'은 '나의 적'이라고 생각한다. 서양 사람들은 회의를 할 때 이견(異見)을 당연한 것, 동의를 예외적인 것이라 생각하는데, 한국인들은 동의가 당연, 이견이 예외라고 생각하여 자기와 다른 의견을 내는 이들을 미워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군인과 시민의 다른 점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공통점을 더 많이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대치관계에 있는 여러 집단―군과 민, 서울과 지방, 지역과 지역, 노동자와 중산층,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의 갈등을 풀기 위해선 양쪽의 입장을 교류시키는 매개가 있어야 하고, 그것은 언론일 수밖에 없으며, 그 방법은 정확한 정보의 수집과 균형잡힌 전달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 오늘날 기자됨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지금도 나의 첫째 소망은 고래를 쓰는 것이다. 1988년 7월
출처 : 조선일보사
[ 2003-07-10, 10:4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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