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층의 표적 김정남 수석의 이념과 역사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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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부 「불꽃회」사건과 평화신문에서의 金주석
  
  정부가 남북화가들의 合作에 의한 反체제적·反美的 행사에 스폰서가 돼야 하나?
  
  ―화제를 바꾸겠습니다. 문화체육부의 민예총(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지원 문제를 여쭙겠습니다. 金수석께서 민예총이 사단법인화 하고 그 단체에 정부 예산을 지원하는 데 관여했습니까.
  
  『저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그러나 在野단체들이 사단법인으로 등록하고 책임 있는 활동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민예총의 이념적인 경향은 어떻게 봅니까.
  
  『혼재돼 있다고 봅니다. 우리 사회가 민주다 反민주다는 식으로 대립하고 있을 때 과격한 이념도 들어와서 함께 혼재돼 있습니다. 그러나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큰 흐름으로 봐서는 거친 부분들이 순화돼 가는 과정에 있다고 봅니다』
  
  ―민예총의 기관지인 「민족예술」에 이런 대목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회주의의 몰락 앞에 얼마간 당황하는 것은 비록 명시적으로는 아니었을 망정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는 대안의 하나로 사회주의를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굳이 부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자본주의의 모순이 우리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일을 위협하는 한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에 관계없이 사회주의적 이념은 새롭게 바뀌면서 가치를 지닐 수도 있다는 점을 배제해선 안될 것이다」 이들은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에 기뻐하지는 않고 당황했다고 했습니다. 또 우리 기자가 만났던 민예총의 한 핵심 인물은 『민예총 안에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굳이 부인하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단체에 93년 정부 예산으로 5천만원을 지원하고, 남북한 화가들이 공동으로 주최한 「코리아통일 미술전」에도 예산 지원을 한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아마 그보다 더 과격한 표현도 있을 겁니다. 제가 생각하기론 일부 예술가들은 말을 함부로 좋게 말하면 더 정열적이고 더 선명한 표현으로 하는 특질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문예지원금은 특정 단체에 일괄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 사업에 대해 문예진흥원에서 심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심사를 거친 뒤 지원하는 것으로 압니다. 저도 솔직히 그들의 활동에 대해 불안한 구석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 전부를 불신하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되풀이 해서 말하지만 큰 흐름 속에서 보면 거친 부분들은 계속 순환되어 나가는 과정이 라고 봐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해하고 끌어안아 그 속에서 순화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지원금을 줄 때 일정한 조건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라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反대한민국적이면서 상대적으로 親北·親 金日成적인 요소는 안되지 않겠습니까.
  
  『지원을 할 때 엄격한 기준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그들이 과거의 틀과 타성을 버리지 못해 자신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객기가 아직 있습니다』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 나의 역할 중 하나』
  
  ―「코리아통일미술전」 圖錄을 보니 두 가지 주류로 나눌 수 있겠더군요. 하나는 우리나라 작가들이 그린 것으로, 자본주의적인 오염과 미국 문화와 미군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묘사한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북한화가들이 그런 것으로 북한을 지상천국과 같은 곳으로 묘사해 놓았습니다. 결국 남북한 화가들이 힘을 합쳐서 反美·反대한민국적인 미술전을 연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미술전에 국가가 지원한 것은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잘못된 것은 고쳐야죠. 그들이 돌출적이고 우리 정서에 맞지 않는 일을 일으킬까 개인적으로 상당히 불안한 것이 사실입니다』
  
  ―金수석께서는 그들이 사단법인화해서 순화되는 과정일 것이라고 말씀해서 순화되는 과정일 것이라고 말씀하시지만 그들은 합법적인 지위를 부여받아서 더 자신 있게 활동을 하고 있는 측면도 있지 않겠습니까.
  
  『예술가들의 속성상 과장된 제스처를 취하는 경향이 있을 것입니다』
  
  ―민예총 지원과 대비되는 것이 反共단체인 자유총연맹에 대해 점차 지원을 줄여가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우리 정부의 이념적 좌표가 어디에 있는지 의문이 갑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려하는 부분들은 많이 없어질 것입니다. 문체부에서도 적법한 절차를 거쳐 그들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있고, 고쳐야 할 것이 있으면 검토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을 만나보면 작품에 표현된 것과 전혀 다른 면이 많습니다. 작품에는 과장된 도식이 있습니다』
  
  ―저도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사람을 만나보면 그렇지 않지만 그들의 글이나 그림을 보면 바짝 긴장하게 만듭니다. 문제는 사회적 행위가 인간 그 자체가 아니라 그들의 표현물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그동안 정상 사회로 오는 과정에서 궤도에서 일탈된 일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일탈된 것도 있고, 민주화를 억압하며 일탈된 것도 있습니다. 긴 과정 속에서 그런 것을 고쳐 나가야 할 것입니다』
  
  ―金수석께서는 在野에 계시다가 정부로 들어갔습니다. 정부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맡고 있는 분야가 교육·문화이기 때문에 그것을 성실하게 수행해야 되겠죠. 정부 안에서 특별히 다른 임무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개인적인 소망은 가난이 제 탓만이 아닌 사람들, 불의에 짓밟히면서도 자기 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 저 짐에 눌려 신음하는 사람들, 그 동안 우리 사회에서 굴절됐던 부분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데 힘을 보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국민이 갈등과 위화(違和)를 훌훌 털고, 화해를 하되 정의롭게 하는 데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정부 안에 소외된 계층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우리 정부가 건강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소외된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하다 보면 불가피하게 그 사람들 중 좌파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까지도 대변해주는 경우가 있지 않을까요.
  
  『在野 인사들 중 우리가 지금 어떤 위치에 있고, 상황이 얼마나 빠르게 변하고 있는 것을 아직까지 모르는 사람들을 보면 제가 더 답답함을 느낍니다. 그런 사람들이 아직도 옛날처럼 자기를 과시하고, 자기 입장만을 관철시키려고 할 때는 곤혹스러울 정도가 아니라 그들이 결국 자기들을 감싸안으려는 사람들까지 곤경에 빠뜨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양분법적으로 좌파적이다, 우파적이라고 나눌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공동체에 대하여 건설적이고 책임있는 참여를 하게 하느냐 하는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의 보수층과 구태의연한 사회주의 이념을 유지하고 있는 세력 사이에서 金수석이 샌드위치가 되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듭니다.
  
  『솔직히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사회주의자였던 적은?
  
  ―한 사람을 지켜볼 때 그 인간이 어떻다는 것보다 먼저 이념적으로 어떤 입장일까 하는 시각으로 보게 되는 것은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의 숙명인 것 같습니다. 남북이 분단되어 이념의 차이 때문에 눈 앞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을 냉전적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통일이 될 때까지는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숙명일 것입니다. 金수석께서는 인터뷰에서 대학 시절 자신이 사회주의에 빠져든 것은 통과의례나 한때의 열병이었던 것처럼 묘사하신 적이 있습니다. 金수석께서는 「불꽃회」사건에서 반공법 위반으로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습니다. 당시 실형을 받았던 김정강씨에 따르면 「불꽃회」의 이념적인 지향은 마르크스주의였고, 金日成이 항일투쟁을 했다는 것을 인정하여 북한 정권을 긍정한 반면 朴正熙 정권은 미 제국주의의 番犬으로 강령에 표기하며 부정했다고 했습니다. 또 남한사회는 식민지적 半봉건사회로 규정했다고 했습니다. 이 강령은 김정강씨가 주도해서 작성한 것으로 압니다만 김정강씨는 『그 내용에 대해서는 金正男씨와 일치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일치된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 글은 김정강씨의 글입니다. 그 사건에서 제가 받은 혐의는 불고지죄였습니다. 그런 것을 같이 읽고 왜 수사기관에 알리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당시의 대학은 쫓기지도 않는데 담을 타넘고, 동대문시장에서 해방 전후에 나왔던 마분지책, 소위 「말똥종이 책」이라 부르던 그런 책을 읽고 개념을 몇 개 외워야 어깨에 힘주고 다닐 수 있던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를 정치적인 소신으로 받아들였던 적이 있습니까.
  
  『소신이라고 말할 정도는 못됩니다. 당시 6·3사태를 전후한 대학가 분위기와 맞물려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한일회담을 전후해서는 민족의 존엄성과 자주성이라는 측면에서 북을 평가한 적은 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사회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기보다는 막연한 환상 같은 측면이 더 강했던 것 같습니다. 노트에도 이름 대신 「나는 민중 일반을 불타게 사랑한다」고 써두던 분위기였으니까요』
  
  6·3세대의 책임 문제
  
  ―저도 대학생으로서 6·3사태를 겪었던 기억이 납니다. 6·3사태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朴正熙의 대외지향적인 개발전략에 맞서 학생들은 우리끼리 잘 살아보자는 식의 민족적인, 폐쇄적인 대안을 내세웠습니다. 결국 朴正熙는 그것을 극복하고 대외지향적인 경제개발전략으로 나갔습니다. 300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 와서 6·3세대로 불리는 당시의 주도 세력들은 그때의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고, 한국의 언론들도 민주화 운동이었다는 측면으로만 당시의 사태를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6·3세대들이 주장한 자력갱생식 개발전략을 택한 북한은 지금과 같은 상태를 맞았습니다. 반면 朴正熙의 개발전략은 세계가 인정하듯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6·3세대들이 꼭 옳았다고만 할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당시 20대 초반의 학생들이 그 행동의 결과에까지 책임졌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와서 金수석께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6·3 세대는 분단은 됐지만 통일이 곧 될 것 같은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밖으로 계속 나가면 통일이 멀어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저변에 깔려 있었던 측면이 있습니다. 한일회담에서 학생시위가 긍정적으로 작용한 점도 있을 것입니다. 한일회담 당시 농림부 장관이셨던 원용석(元容奭)씨가 일본측 파트너인 아카키와 회담을 할 때 한국에서 데모가 심하게 일어나는 것을 안 아카키는 기가 죽어 한국측의 실무적인 요구는 대부분 들어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6·3 사태 직후 계엄령이 선포되고 한국 정부가 위태롭다는 말이 나돌자 아카키는 잘 만나주지도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학생들의 한일회담 반대 데모는 우리가 겪어야 했던 하나의 과정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만약 그것도 없었다면 허전했다고 생각합니다. 한일회담도 우리 민족이 좀 더 당당하게 임했으면, 민족적 존엄성에 더 합당하게 임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저도 비판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6·3세대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당시 한일국교정상화를 추진했던 사람들의 고뇌도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들은 수구세력이었고 우리만 옳았다」는 식의 독선적인 생각은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져본 적도 없고, 가져서도 안되겠죠. 그렇게 배타적이어서가 아니라 한 시대의 역할을 했다는 자긍심이겠죠. 세태를 반영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6·3세대 모임에 과거에는 얼굴을 비치지도 않던 사람이 요즘 들어 얼굴을 비치는 사람도 상당히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평화신문에서 젊은 기자들 견제하려고 애썼다』
  
  ―金수석의 공식적인 활동 중 짚고 넘어가야 할 것 중 평화신문(가톨릭 서울교구 기관지)에 재직할 때의 일을 묻겠습니다. 평화신문에서 金수석의 역할은 가장 선배 기자, 그리고 공식적인 직책으로서 편집기획위원,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 등을 거쳤습니다. 평화신문을 만드는 데 지도적인 위치에 계셨던 분으로서 도의적인 책임이 우선 있다고 생각하고, 편집국장 대리로 계실 때는 법률적인 책임까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신문을 보니 좋은 기획물이 많더군요. 특히 간첩 피의자의 인권문제를 다룬 것은 다른 언론매체에서는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사의 재조명 시리즈나, 주체사상을 말 그대로 비판은 전혀없이 객관적으로 보여주기만 한 기사등 일련의 기사는 북한쪽 입장, 또는 反남한적인 시각이 아니냐는 느낌이 듭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설명이 좀 필요합니다. 평화신문은 6·29 이후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해서 나온 것입니다. 6·29 이후의 시대 분위기는 민주화의 파고가 엄청나게 높았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순화된 상태지만 당시에는 분출하는 욕구행위가 돌출적인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때 평화신문에서 제가 한 역할은 오히려 그런 사회분위기를 어떻게 적절하게 수용하느냐,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기자들의 급진적인 성향을 얼마나 억제하느냐의 문제였습니다. 당시 제가 입수해서 실었던 신영복씨의 옥중편지는 나중에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으로 만들어져 출판까지 됐습니다. 그 내용을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가족들에게 보낸 아주 서정적이고 따뜻한 내용들뿐입니다. 제가 청탁한 건 아닙니다만 김낙중(金洛中)씨의 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글의 내용보다는 그분이 나중에 간첩죄를 범했다는 것 때문일 겁니다. 저는 창간 인터뷰에서 추기경께 그런 말을 한 적도 있습니다. 「신문의 이름을 평화신문으로 정했으니 누구의 가슴에 아픔이 생기게 해서는 안된다, 비판을 해도 따뜻한 애정이 담긴 것이라야 하겠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이 그런 방향으로 편집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평화신문의 現代史 시리즈와 교과서 준거안의 유사성
  
  ―평화신문 기획기사에 6·25를 설명한 부분 중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북침설이 통용되고 있다. 남한에서 통용되어온 남침설과는 정반대이다. 그러므로 6·25전쟁에 대한 남북한의 합의된 견해를 도출하는 작업이 현대사의 주요 과제다」는 것입니다. 6·25전쟁은 우리가 두 눈 뜨고 겪은 것입니다. 그런데 남침을 했다는 사실을 남북간의 합의를 통해서 도출해야 한다니….
  
  『그 부분은 전혀 모르겠습니다』
  
  ―저는 평화신문에 연재했던 현대사 재조명 시리즈를 보면서 최근에 문제가 됐던 국사 교과서 준거안 파동과 연결이 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시리즈는 4·3항쟁이나, 10월항쟁, 여순사건과 같은 용어문제라든지, 주체사상은 비판없이 그야말로 객관적으로 소개하면서 남한의 현대사는 지독하게 비판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일치라는 게 金수석께서 그때 평화신문에 계셨던 것과 지금 교문·사회 수석으로 계실 때 교과서 준거안 파동이 생겼던 것과 관계가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까.
  
  『저에게 인터뷰를 신청할 때 평화신문의 내용과 국사교과서 준거안 파동의 연관성 등을 묻겠다고 해서 저는 무슨 관련이 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으나 이젠 그 이유를 알겠군요. 그런 시리즈가 있었다는 건 지금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저는 그 시리즈를 정확히 잘 모릅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평화신문 관계자가 쓴 기사가 아니라 외부인사의 기고기사로 압니다. 젊은 기자가 현대사연구회인지, 그 당시 새롭게 발족한 소장학자들로 구성된 연구회에서 쓴 글을 얻어와서 시리즈로 실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저희 기자가 취재한 바로는 金수석께서 그 시리즈에 직접적인 관련은 없었을지 모르나 당시 평화신문의 한 기자가 金수석께 그 현대사 시리즈의 사관이 너무 편향된 시각이 아니냐란 문제를 제기했고, 金수석께서는 『지금까지 우리 역사는 친일 역사학자들에 의해 친일적 보수의 입장에서만 씌여졌다. 이제는 역사관이 재정립돼야 한다』는 식으로 응답한 것으로 압니다.
  
  『기억은 없습니다만 현대사 인식에 있어서 시야를 넓히자는 얘기를 할 수 있었겠지요. 그리고 저는 현대사 연구회(편집자 주:시리즈 집필자는 현대사연구회가 아니라 한국역사연구회의 현대사 분과팀인데 金수석은 잘못 알고 있었다)가 어떤 학자들로 구성된 연구회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 당시 저는 특집과 사설만을 담당했었는데, 1주일 동안에 그 지면을 채우는 데도 벅찼습니다』
  
  ―저는 月刊朝鮮의 편집장입니다만 「항쟁」과 같은 용어는 엄격히 제한을 합니다. 주체사상과 같은 것을 소개할 때도 엄정한 비판과 검증을 하라는 등의 분명한 취급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편집 책임자의 의무입니다. 그런데 평화신문에는 親北的 용어가 너무 많았습니다.
  
  『그 당시의 분위기나, 제가 관여할 수 있는 시간의 제약 때문에 저는 그런 인식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학자들이 모인 연구회의 이름으로 나가는 기사였기 때문에 방치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평화신문의 현대사 시리즈에 나타난 시각과 이번 국사 교과서 준거안 파동은 우연의 일치입니까.
  
  『책임 회피가 아니라 오직 사실에 입각해서 말씀드린다면, 현대사 준거안이 만들어진 과정을 저는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런 작업을 한다는 것을 언론에 보도되기 직전에 보고받았습니다』
  
  『내가 준거안 사주한 것처럼 몰아가는 데 섬뜩』
  
  ―그러나 저는 간접적인 원인이 있다면 이런 관련은 있다고 봅니다. 보수적인 교육부에서 이런 방향으로 착안을 하게 된 것은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서 우리 현대사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하려고 하는 분위기를 가미하여 아이디어를 낸 것이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분위기를 조성한 것에는 金수석께서도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로서는 오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중한 검토가 처음부터 없었던 데 대해서, 교육행정에 관계있는 사람으로서 책임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준거안 자체와 저를 등식으로 연결, 마치 제가 준거안을 사주, 또는 지원한 것처럼 몰아가는 데 대해 섬뜩함을 느꼈습니다. 막연한 개연성을 가지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요?』
  
  ―준거안 자체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것이 사실에 근거하고 있으면 어쩔 수 없지만 명백히 좌익에 의한 폭동을 항쟁이라 표기하고 사상이라고도 할 수 없는 주체사상을 객관적으로 설명한다고 하면서, 세계가 인정하고 있는 한국의 50년 역사를 일방적으로 비판하는 준거안이 만들어지는 학계의 분위기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학계의 일반적 분위기는 아닐 것입니다. 젊은 학자의 검증되지 않은 시선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준거안일 뿐인데, 그 파동이 지나치게 과장된 측면도 있습니다』
출처 : 월조
[ 2003-07-11, 17:4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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