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김유신의 대당 결전 의지가 오늘의 한국 만들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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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열등감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나…』
  
  ―1963년 朴正熙와 尹潽善의 대결을 군인 출신과 민간인 출신이 대결이라기보다 근대화 세력과 수구적 양반정치의 대결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우리 정치문화에는 李氏朝鮮 때 공리공론·위선적인 명분론으로 권력투쟁을 일삼아 국가 전체의 발전이 저해되고 민중의 삶이 도외시되어온 엘리트 정치의 전통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고 봅니다. 이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시 朴대통령이 보수 수구세력에 대해 국가 개혁론을 주장하지 않았어요, 그런 문제에 대해 국민들의 관심이 있었어요. 당시 보수귀족과 개혁파의 대립이었다고 보는 시각이 있었어요. 尹潽善씨가 그때 실수한 것은 朴正熙씨를 빨갱이로 몬 것입니다. 美군정 3년 동안 무고하게 빨갱이로 몰린 사람들, 특히 전라도 사람들이 반발해서 朴대통령을 밀어주었어요. 尹潽善후보는 서울 경기 강원 충북 충남에서 이겼어요. 남쪽에??졌지요. 경상도는 朴대통령 고향이라고 하지만 전라도에서 35만 표나 나왔어요. 그때 尹潽善씨에게 15만 표차로 이겼는데 산술적으로 보면 전라도 표가 朴대통령을 만들어준 거죠. 그러나 대통령 되자마자 전라도를 차별해서 우리나라를 이 꼴로 만들었어요. 朴대통령 전에는 전라도 사람들이 부산 대구 상주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경상도 사람도 목포에서 당선됐어요. 그때까지 분리가 안됐는데 그후로 갈라졌어요』
  
  金九의 실수
  
  ―金이사장님 책에서 재미있는 대목을 발견했습니다. 金九 선생을 존경하지만 현실 정치인으로서 金九 선생의 판단은 잘못됐다고 쓰셨더군요. 신탁통치에 찬성하든지 아니면 대통령으로 출마하든지 해서 李承晩 대통령에게 정권이 넘어가지 않도록 할 수 있었는데 단독선거에도 반대, 신탁에도 반대, 결국 반대만 하다가 끝났다고요. 그렇다면 상대적으로는 李承晩대통령의 단독정부 수립 노선을 상당히 높게 평가하는 걸로 보이는데요.
  
  『그건 아니죠. 金九선생은 통일을 해야 한다는 분이거든요. 그때는 신탁통치 외에는 美蘇가 합의해줄 길이 없었습니다. 신탁통치를 받아서 5년 이내에 통일이 되게 하든지 아니면 남한만이 선거에 참여해서 대통령이 되어서 다시 북한과의 통일의 길로 나아가든지 둘 중에 하나를 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 李박사는 남한만의 대통령을 하겠다면서 근본적으로 통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통일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소련군에 의해 북한에 꼭두각시 정부가 세워지는걸 보고 공산주의의 실체를 봤기 때문에 더 현실적인 판단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그렇게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민족 양심상 노력을 했어야지요. 美蘇와 공산당에 대해 조건을 내세우고 이렇게 하면 우리도 참여하겠다고 제시해야 하는데 무조건 보이콧하고 남한 단독정부를 주장했어요. 그분은 1946년 2월에 정읍에서의 발언을 통해서 단독정부를 주장했던 것입니다』
  
  ―金이사장님도 당시에 신탁통치에 반대하셨는데 신탁통치를 받아들였으면 분단을 막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보지는 않아요. 나도 처음에 신탁통치를 반대했지요. 그러나 그 후로 달라졌습니다. 곧 左右합작이 있었고 미소 공동위원회가 설립됐습니다. 당시 李박사와 金九선생이 전부 참여하여 총력적으로 선거를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공산당을 믿지 않아요. 이미 그때 스탈린은 자기네가 공산화한 지역을 하나도 내놓지 않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통일을 기피했을 가능성도 큽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봤으면 공산주의 정체를 더 잘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우리가 당연히 바쳐야 할 정성이자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李承晩에 대한 평가
  
  ―李承晩 대통령이 정치인으로서 두 가지 뛰어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1945년 이전부터 공산당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어 공산당과 합작하면 공산화의 길밖에 없다는 것을 정확히 알았다는 점입니다. 또 하나는 냉전의 본질을 빨리 알아 어차피 미국과 소련의 양대 구도로 가니까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우는 수밖에 없다는 이론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죠. 이렇게 세계관이 뚜렷했다는 것이 당시 金九 선생을 비롯한 다른 정치인들과는 다른 점이라고 보는데요. 金이사장님께서 李承晩 대통령에 대해 평가하신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 기회에 생각을 말씀해 주시죠.
  
  『李承晩 대통령의 독립투쟁의 역사라든가 탁월한 외교적 시야는 높이 평가합니다. 공산주의와 타협 없는 투쟁도 그 당시로서는 아주 필요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은 누구보다도 공산주의를 잘 알았습니다. 사실 6·25대 겪어보기 전까지는 많은 남한사람들이 공산주의를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李박사는 국민을 계몽하고, 국민과 더불어 운영해 나갔어야 했습니다. 또 냉전의 추세를 재빨리 파악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공산주의의 정체를 국민에게 알리고 모든 것을 국민을 중심으로 운영했어야 하는데 친일세력을 중심으로 운영했습니다. 공산주의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대는 성공하지 못합니다.
  
  李承晩 대통령은 무조건 탄압 일변도로 나갔습니다. 미국은 소련과 데탕트하고 歐洲안보회의도 개최하면서 접촉하여 거대한 나라를 일거에 무너지도록 했습니다. 중국과도 처음에는 대결을 했지만 핑퐁외교를 통해서 등소평이 나타나도록 만들었습니다. 미국이 월남전에 진 것과 쿠바와 37년간 강력하게 대치한 것은 다 미국의 강경한 정책 때문이었어요. 그러나 요즘 북한에 대해 유연한 정책을 쓰니까 제네바 회담 이후 북한이 親美的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원칙은 확실히 세워놓되 정책은 유연하게 집행했어야 한다는 면에서 잘못 됐다고 생각합니다.
  
  덧붙여서 얘기하면 미국은 북한에게 확실한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北이 한국과 미국을 이간시키려고 하면 남한에게 잘할 때 우리도 잘 해주겠다는 것을 北에 대해 확실히 해야 합니다. 미국은 남한과 협력하면서 3각 외교를 펼쳐나가야 합니다. 이번에 중국에 갔을 때 중국이 한국에 대단히 호감을 보인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붕(李鵬) 총리가 제주도에 왔을 때 귀국 직전에 한반도 평화조약에 중국과 한국도 참여해야 한다는 말을 한 것과 APEC에서 강택민(江澤民) 총리가 金泳三 대통령과 회담하고 북한이 한국 기업만 상대하지 말고 정부와 협력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북한에게 대단한 충격이지요. 이제는 외교의 시대입니다. 미국이 혈맹이라는 생각에서 기대려고만 해서는 안됩니다. 일본과 중국 러시아와 활발한 외교를 펼쳐야 합니다. 특히 러시아를 토라지게 해서는 안됩니다』
  
  『높이 평가해야 할 李承晩의 반공포로 석방』
  
  ―94년 봄에 외무부에서 1950년대 외교문서를 공개한 적이 있는데 정리를 맡았던 대사의 인터뷰를 본 일이 있습니다. 당시에 李承晩의 주된 외교적 관심은 미국의 원조를 받아 北의 남침을 저지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는데 그 일에 혼신의 힘을 기울인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대통령이 이 문제에 이 정도로 관심을 가졌다면 다른 경제문제에는 관심을 기울일 시간이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李承晩의 對美외교에서 배울 점이 있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특히 휴전 직전에 반공포로를 석방해 미국을 깜짝 놀라게 한 후 미국의 코를 걸어 상호방위조약을 맺고 국군의 현대화를 이룩했으면 미군을 주둔하게 한 것은 그 뒤 우리 경제를 발전하도록 하는 큰 울타리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李承晩의 對美 자주외교를 지금 시점에서 평가해 보면 상당히 배울 점이 많은데 金이사장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李承晩 박사의 반공포로 석방이라든가 휴전협정을 끝까지 반대하여 韓美방위조약을 체결한 것은 국가를 위해 큰 이익을 남긴 일이고 역사에 남을 일입니다. 그것은 李박사같은 큰 인물이 오랫동안 독립운동을 하면서 쌓은 관록에서 나온 것이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정치 우선 시대가 아니라 경제 우선 시대이기 때문에 좀 다르지만 지금도 역시 李박사의 태도를 본받아 미국과 자주적으로 경쟁해서 줄 것은 주고받을 것은 받는 외교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국방이나 북한 핵문제가 우리 정치권의 큰 이슈가 되어야 하건만 현재 분위기는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정치가 안보나 외교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우리 정치는 지엽적인 것을 문제삼는 일에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정치인들이 국방은 미국 사람들이 맡아 준다는 의타심에 너무나 오랫동안 젖어있기 때문인 걸로 생각됩니다. 안보나 외교는 국가 생존에 관계되는 절체절명의 명제라는 절실한 인식이 없다고 보는데 金이사장님은 어떻게 보십니까.
  
  『그런 면이 부족하지요』
  
  ―특히 북한 핵문제가 이렇게 크게 대두되는데 국회에 特委 하나 없지 않습니까.
  
  『국회가 그런 문제에 있어서 국민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어요. 통일문제를 그렇습니다.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고 청문회도 여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데 안 하고 있어요』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문민정부라는 말속에는 양반 지식인에 의한 정치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양반정치 문화가 존재하는데 그런 잔재가 아직도 남아 있는 데가 야당이 아니냐는 생각을 합니다만….
  
  『글쎄 그 문제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다만 여당에는 군사정치문화가 남아 있는 게 사실이고 야당에도 개선해야 할 점이 많습니다. 되도록이면 국내 정치에 대해 말을 안하고 싶습니다』
  
  국가 지도층의 自主정신 결여
  
  ―지금까지 지난 50년을 되돌아보는 입장에서 말씀해 주셨는데 앞으로 전망과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세계사를 살펴보면 이제 아시아·태평양 시대가 오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리나라가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어서 작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대단히 큰 나라입니다. 남북이 합하면 당장에 세계 10위권 내에 들어갑니다. 상호 협력하면 대단한 힘이 생기지요. 우리 국민들은 통일하면 손해 보는 줄 알지만 오히려 양쪽이 크게 발전합니다. 남북이 하나가 되어 나가면 2010년에 이르러 세계 5위권으로 진입하리라고 봅니다. 현재의 G7 국가 중에서 우리를 앞서갈 나라는 미국·일본·중국·독일 정도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위치가 매우 좋습니다.
  
  일본·중국·러시아 사이에 위치해 있어 약할 때는 수탈을 당하지만 강할 때는 부채꼭지처럼 중심이 됩니다. 우리나라에 대해 주변국에서 몹시 신경을 씁니다. 이번에 중국에 갔는데 중국에서 나를 국빈 대접했어요. 항시 경호가 붙고, 경찰차가 에스코트를 하고, 주요 요인들이 성의껏 대해주었습니다. 이것이 다 우리나라의 중요도 덕이지요. 중국은 북한에 대해 신경을 많이 씁니다. 필요할 때마다 北에 한국 카드를 내밉니다. 우리도 북한에 중국카드를 이용하면 됩니다. 일본도 우리나라에 몹시 신경을 씁니다. 우리나라가 중국과 항공부문에서 협력을 하자 신문과 사설에서 중국과 가까워질까 봐 우려하는 소리가 쏟아져 나왔지요. 남북이 화해하고 협력하여 운명을 개척해 나가면서 주변 국가를 컨트롤해 나가야 합니다. 해외에 있는 5백만 우리 동포들도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생존 차원이 아니라 강대국 사이에서 번영하려면 대한민국의 정치를 이끄는 사람, 지식인층 등 엘리트들이 이끄는 사람, 지식인층 등 엘리트들이 자주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과거 구한말(舊韓末) 때 찬스가 있었지만 기회를 놓쳐 한반도를 강대국들의 각축장으로 내주지 않았습니까. 정치 엘리트들이 외국의 힘을 빌려 개혁하려다 오히려 이용만 당했습니다. 그 결과 식민지가 되고 분단되었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힘이 있으면서도 북한에 항상 끌려가는 것은 정치권의 자주정신 결여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에 관해 金이사장님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카터같이 주한미군의 철수를 주장했고 남한에 대해 그렇게 좋은 인상을 남기지 않은 사람들을 남북문제에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나, 그거야말로 非자주적인 일이 아니냐는 얘기도 있습니다.
  
  『카터가 자신이 주한미군을 철수한 일에 대해 잘못했다고 얘기합니다. 그 당시 나는 카터에게 주한미군을 철수해서는 안 된다고 편지를 한 적도 있습니다. 물론 카터가 잘했다는 것은 아니에요. 남북한이 꽉 막혔으니 조정자가 필요했고 그 적임자를 카터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나라는 독일과 달리 전쟁을 치렀고 극도의 증오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상회담이 꼭 필요합니다. 나는 물꼬를 트는 데 있어서 카터가 간 것이 괜찮은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94년 9월에 미국에 갔을 대 미국의 관계자가 카터를 북한에 가게 한 것을 대단히 높이 평가할 일이라고 말하더군요. 중국에서도 카터를 안 가도록 했으면 김일성이 죽었을 때 한반도가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다며 나에게 감사한다고 말했습니다. 여러 모로 생각해 볼 때 결과는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북핵문제, 일괄타결 외엔 방법이 없었다』
  
  ―金이사장님께서 北核문제를 일괄 타결해야 한다고 주장하신 것이 93년 봄 영국에 계실 때부터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고 예측했습니다. 전문가들도 비관적으로 보고 저도 비관적으로, 또 비판적으로 봤는데 결과적으로는 이사장님 예측대로 됐습니다. 특별한 정보라도 있었습니까.
  
  『정보는 없었습니다. 당시에 북한은 수교를 해달라, 그러면 핵을 포기하겠다는 입장이었고 우리는 핵을 포기하면 외교를 주겠다는 입장이었죠. 그러니 협상이 되게 되어 있었죠. 다만 서로 속으면 어떡하나 걱정하고 있었죠. 그러니 해결책은 일괄타결 밖에 없었어요. 당시 미국은 하늘이 무너져도 해결해야 할 입장에 놓여 있었어요. 95년 4월에 NPT 조약을 항구적으로 연장하는 것은 미국의 국익상 절대적인 일이었죠. 미국은 경제력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라 군사력과 핵으로 지배하고 있는데 연장이 안되면 일본이 핵을 가지게 되고 그러면 일본은 초강대국이 됩니다. 미국 국익이 중대한 타격을 입게되죠. 미국은 반드시 해결해야 했고 북한은 경제가 파탄에 이르렀기 때문에 미국과 손을 잡지 않으면 살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해결될 수밖에 없죠. 이 일에 물꼬를 튼 사람이 카터인데 카터가 일을 만든 게 아니라 되게 되어 있는 일을 한 것뿐입니다』
  
  ―그때 혹시 북한과 미국 정보기관이 일괄타결을 추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국가자존의 문제
  
  ―그대 金이사장께선 일괄타결 조건으로 북한은 남한에 대해 對南적화를 포기해야 한다는 조건을 적시했는데 對南적화 포기는 일괄타결에서 빠지지 않았습니까.
  『빠졌죠. 나중에 보니 문제가 어려워지니까 단순화되어가더군요. 기본핵심은 외교와 핵 포기의 교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핵타결은 대남적화 포기와 직결됩니다. 북한이 가장 중요한 핵 부분을 포기하고 미국과 외교관계가 이루어진다면 북한이 남한을 공격할 수 없습니다. 한편 미국은 이번 핵문제 해결로 막대한 이득을 얻었습니다. 첫째, 전쟁재발을 막았고, 둘째 일본 핵 재무장을 막았고, 셋째 NPT조약의 항구적 연장의 길을 열었고, 넷째 북한에 진출해서 중국과 러시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다섯째 시베리아 등 북방 자원지대 진출의 발판을 얻은 것입니다』
  
  ―제네바 美北 회담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 결과가 현실적으로 최선의 선택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미국 쪽으로 봐서 그렇고 한국 입장에서 보면 한국은 국가자존의 문제가 손상됐습니다. 당장 벌을 받아야 할 북한에게 20억 달러를 들여 경수로를 지어 주면서도 당당히 주는 것이 아니라 미국을 통해 납품하는 형식을 취한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더구나 한국형이냐 아니냐를 놓고 애걸복걸하면서 저자세로 원조하는 것은 국가자존의 문제입니다.
  
  『그런 면에서 외교를 좀 더 잘 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93년 5월에 북한의 김용순 노동당 서기를 만났는데 제일 중요한 것이 경수로라고 했습니다. 「미국 것은 국내법에 제약이 있어 제공받을 수 없고 일본 것은 받기가 싫다, 남한 것이라면 좋겠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이것은 신문에 보도되어 있습니다. 그러던 것이 조문파동 등으로 꼬이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경수로를 지어주면서 개방 보장을 받을 수 있나 하는 것인데 우리 기술진 수백명이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할 수 있겠습니까.
  
  『보장을 안 하면 진전이 안 되는데요』
  
  ―과연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경수로 시작하면 저쪽이 약해집니다. 저쪽은 빨리 만들어야 하니까요. 우리만 약한 게 아니에요. 상대방도 약점이 있는 겁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정치 엘리트의 自主 문제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가 민주는 어느 정도 했다고 봅니다. 제대로 된 나라는 국가의 자존심, 또 국가가 지켜야 될 의무사항에 대한 투철한 정신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 점에 실패해 과거에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우리 기자가 남태평양의 인구 10만밖에 안 되는 통가라는 나라의 뚜뽀라는 왕을 인터뷰한 일이 있는데 어떻게 독립국가를 유지했는가 하고 물으니 대수롭지 않게 『우리 안에 내분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타일랜드가 식민지가 안된 것도 국민들이 단합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강대국의 영향력을 이기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자주를 이루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국론 분열이 없어야 하고 지배층과 국민의 사이가 좋아야 합니다. 자주국방을 이루어야 자주외교가 이루어집니다. 특히 권력 엘리트의 자존심이 문제입니다. 국내 문제를 외국에 갖고 나가 해결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해결하려는 자존심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협력적 自主
  
  『자주는 협력적 자주여야 해요. 배타적 자주는 국익에 도움이 안됩니다. 李承晩 시대 때의 외교와는 또 다릅니다. 한국 사람들은 식민지 때문에 사대주의에 대한 센서티브한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또 형식적 자주에 매달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특히 미국에 대해서는 거의 체면이 없을 정도로 수용하고 순응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은 무조건 배격을 합니다. 둘 다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친미도 반미도 할 필요 없습니다. 오직 국익에 따라 협력도 하고, 또 시비를 따지기도 하면 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협력적 자주에요. 국익에 도움이 되는 자주를 해야 합니다. 민족이 합심하여 자신 있고, 여유 있는 자주를 해나가되 주변국과 협조가 있어야 합니다』
  
  ―그걸 어떤 사람들은 열린 자존, 개방적 자존이라고 말하더군요.
  
  『좋은 표현입니다』
  
  ―역사적으로 봐서, 붙어 있는 나라중에서 한쪽은 북한처럼 못사는 나라가 있는데 잘사는 나라가 못사는 나라에게 계속 눌려지냈던 경우가 몇 군데 있었어요. 중구의 송나라와 금나라, 요나라의 예를 봐도 그렇습니다. 송나라는 문화는 발전했으나 상무정신이 약해 금나라나 요나라가 침략해 오면 배상금으로 해결하려 했어요. 그래서 결국 인질을 보내다가 황제가 포로가 되어 망하고 양자강 밑으로 가서 南宋이 되었습니다. 이탈리아 도시국가 중에서도 피렌체라는 나라가 주변 국가에게 돈을 뜯기는 형편이었습니다. 피렌체의 마키아벨리가 쓴 책에 재미있는 내용이 있어 메모를 해놓았습니다.
  
  「한 나라의 국력을 계산하는 방법 중 하나는 인접국가와 어떤 관계가 성립되어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만약 어떤 나라가 우호관계를 지키는 조건으로 이웃 나라로부터 돈을 받는다면 그 나라는 강국이다. 반대로 약체국일 수밖에 없는 이웃 나라인데도 불구하고 그 나라에 대해 돈을 주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는 나라가 있다면 이는 약하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이 글을 읽으면서 지금의 남북한 관계를 잘못 해석하면 돈을 주고 평화를 사는 관계가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나라 정치하는 분이나 우리 국민들이 자주국방 의지가 없을 때 그럴 위험이 있다고 봅니다. 북한에서 「전쟁불사」로 나올 때 우리도 전쟁불사로 나가야 게임이 되는데 우리는 전쟁불가로 나옵니다.
  
  『그런데 그것과 다른 것은 우리는 군사력이 강하다는 점이에요. 우리가 국방비를 훨씬 많이 씁니다. 북한이 GNP의 25%를 쓴다고 하지만 GNP 총량을 보면 차이가 많아요. 이번에 핵문제가 해결된 이면에는 중국의 북한핵에 대한 단호한 반대표시가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북한이 핵을 만들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았고, 실제 북한이 핵을 아직 만들지 않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국내의 단합을 바탕으로 외교하면 잘 된다』
  
  ―그 정보는 누구에게서 들었습니까.
  
  『중국에서 들었습니다. 심지어 중국 지도자가 북한에 핵이 있으면 우리가 먼저 치겠다는 얘기를 하더군요. 뭐든지 맘대로 안돼요. 아까 타일랜드 문제를 얘기했는데 대단히 좋은 지적입니다. 태국이 독립을 유지한 건 국내 단합과 외교의 승리에요. 당시 영국이 인도에서 버마를 침공했고 프랑스가 인도차이나 3국을 차지했어요. 태국이 그 사이에 끼이게 되었어요. 그때 태국이 두 나라를 설득했어요. 「당신데 두 나라는 강대국이다. 둘 사이에는 완충지대가 필요하다. 우리를 놔두라. 그러면 완충지대 역할을 잘하겠다」 그래서 독립을 보장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19세기말에 있어서의 우리 조선왕조는 당시 러시아의 남하를 두려워한 서구열강이나 일본이 중립국가로서의 위치를 보장하겠다고 했을 때 이를 거절했습니다. 청나라는 우리의 대국인데 속국인 우리가 중립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이러자 청·일 전쟁이 일어나고 우리는 급속도로 망국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외교에서 한 수를 놓치게 되면 이처럼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쓰라린 교훈을 주는 사례입니다. 독일의 비스마르크도 외교에 성공하여 통일도 하고 나라를 지켰지요. 그러나 카이젤이나 히틀러는 외교에 실패해 협공을 당했지요.
  
  우리가 살아나가는 데 미국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미국이 한국에 있음으로 해서 북한의 남침을 막는 것은 물론이고 일본의 군사적 위협을 막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미국이 물러가면 군사적 진공 상태가 생기게 되고, 일본과 중국이 서로 각축전을 벌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군의 철수는 동북아시아의 안정을 불안하게 합니다. 우리는 외교력을 동원해서 미·일·중 삼자가 누구도 패자가 되지 않도록 세력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요즘 싱가폴의 이광요 수상과 논쟁을 벌이고 있지만 그분하고 딱 하나 합치되는 것이 바로 이 점이에요. 아시아에 미국이 있어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북한의 의견도 같습니다. 북한의 김용순도 「우리도 미군이 나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북한도 일본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증거죠』
출처 : 월조
[ 2003-07-11, 18:2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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