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김대통령과의 인연은 소중히 간직하고싶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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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正熙와 金鍾泌의 숙명적 관계
  
  『나는 현실주의자다』
  
  ―화제를 좀 돌려보겠습니다. 金대표는 스스로를 현실주의자(realist)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이상주의자(idealist)라 생각합니까.
  
  『현실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 어디 나서지도 않지만 처지지도 않지요. 현실 속에서 뒤지지 않고 기여하는 위치에서 걸어가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金泳三 대통령은 현실주의자입니까.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金대표께서는 5·16은 내 작품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많은 면에서 내 생각이 들어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일어나는 경위, 조직, 일정한 기반이 될 때까지의 기여. 그러나 리더십에 의해 혁명을 성공시킨 것은 朴대통령이지요』
  
  ―5·16의 발상은 누가 먼저입니까.
  
  『우리는 민주당 정부로는 나라정치가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먼저 軍 정화(淨化)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이 일로 헌병대 두 번 끌려가고 감방살이하면서 이것으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혁명을 준비했습니다. 군복을 벗고 당시 대구의 2군 부사령관으로 있던 朴대통령을 찾아갔습니다. 朴대통령은 당시 내가 헌병대에 끌려간 사실도 군복을 벗은 사실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와는 연관을 갖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혁명을 하자고 동지들을 규합한 뒤 朴대통령을 모시고 하자고 했던 것입니다. 서울에 있는 동지와 朴대통령이 처음으로 만나게 된 것은 61년 3월 충무로에 있는 김상욱씨 장인 소유의 빌딩 옥상이었습니다』
  
  『어디에다 주겠어, 임자밖에 없는데』
  
  ―朴대통령과의 관계는 인척 사이에서 朴대통령이 권력을 장악하고 난 뒤 1인자와 2인자의 관계로 변하는데 인간적으로 어려워지지 않았습니까.
  
  『인간岵막?아주 친했습니다. 대통령 앞에서 담배도 피고 안 피면 그 자리에서 「피워」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같이 있을 때도 여간해서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고 직책을 불렀습니다. 金의장, 金총리 또는 임자하고 부르셨습니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종필아」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초창기는 그렇다 해도 70년대 넘어가면서 어려워지지 않았습니까.
  
  『어려워졌다기보다 70년대 후반부터 朴대통령 자신이 나한테 인간적으로 미안해했던 것 같습니다. 71년 大選때도 후계자 기르겠다고 공언하고 나에게 「몸조심하고 마음의 준비도 하고 있어. 어디에다 주겠어. 임자밖에 없어」하고 말했는데 계속 집권하니까 마음에 부담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78년에 국회의원도 그만두려고 했습니다. 플라자호텔에서 이번 선거에 나서지 않겠다고 했더니 다음날 대통령이 불러 「마음대로 못 그만둬」하셔서 부여에서 다시 출마하게 됐습니다』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 김정렴(金正濂)씨 증언에 따르면 78년 신직수(申稙秀) 법률특보, 김기춘(金淇春) 비서관이 특명을 받아 정권이양계획서를 만들고 있었다고 합니다. 朴대통령이 83년쯤 김대표를 총리로 임명한 뒤 대통령직을 물러남으로써 자연스레 대통령권한대행으로 승계시켜 다음 대통령이 되도록 할 생각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생각을 당시에도 알고 있었습니까.
  
  『물론 알았지요. 대통령이 나한테 말했지만 다른 사람들한테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5·17 前 당하는 도리밖에 없다고 생각
  
  ―그렇다면 10·26사건은 金대표에게 엄청난 충격이었겠습니다.
  
  『나는 대통령승계를 못 받게 돼서 충격을 받았다기보다는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金載圭한테 당했다는 사실 등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10·26후 5·17까지의 金대표의 행동에 대해 오랫동안 논란이 예상됩니다. 당시 공화당의 추대에 의해 統代대의원선거로 대통령이 된 다음 민주화개헌을 했다면 비록 욕은 먹었겠지만 나라를 위한 길이 아니었나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생각은 할 수 있겠지요. 朴대통령이 죽음으로써 한 시대는 끝났다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한 시대가 끝났으면 헌법을 고치고 새 헌법에 따라 朴대통령의 개발시대를 포함에 국민의 심판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거했으면 대통령이 안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정식으로 朴대통령의 치적과 앞으로의 심판을 받자는 생각이었지요』
  
  ―당시 계엄사령관 鄭昇和씨 증언에 따르면 공화당에서 金대표를 統代후보로 결정하자 당시 길전식 사무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崔圭夏 대통령을 옹립하기로 결정했다고 통보했다는데요.
  
  『그런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대통령장례 직후에 벌써 全斗煥씨와 영남출신 몇몇 인사가 반대 얘기를 한 적이 있긴 있었습니다』
  
  ―5·17 전에 全斗煥 보안사령관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이건개(李健介) 검사가 다리를 놓아 만나게 하려고 했습니다만 만나지 않았어요. 움직임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金泳三·金大中씨에게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말을 하며 엉뚱한 세력이 날뛰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金相万씨가 인촌기념관에 세 사람을 초대했을 때도 그런 얘기를 하며 정신차려야 한다고 했는데 별로 관심을 쏟지 않았습니다』
  
  ―당시 신군부의 집권 움직임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습니까.
  
  『전혀 아니었습니다. 이때 슬프게 생각한 것이 정당이란 게 이런 때 힘이 없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도 5·16을 해봤기 때문에 당하는 도리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만나봐도 제지가 안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연행되던 날 바로 이 방(金대표는 거실 바로 옆 식당으로도 쓰이는 방을 가리켰다)에 끌려갔습니다. 서빙고로 가서 편하게 있었습니다. 도장찍어 달라는 대로 다 찍어주고는 한 마디 했습니다. 「당신들 나를 희생양 삼아 혁명하는 모양인데 잘 해줘야돼」했습니다. 그후 盧泰愚씨를 만났는데 「선배님 미안합니다」라고 하길래 「개의치 말고 열심히 하라 全斗煥장군과 둘이 싸우지 말라」고 했습니다』
  
  ―당시는 全斗煥 장군과 면식이 없었습니까.
  
  『알고 있었지요. 1사단장 시절 땅굴을 발견한 공로로 5·16민족상까지 주었는데요. 또 朴대통령을 모시고 있었으니까 알고 있었지요. 차이가 많이 나서 같이 뒹굴 정도는 아니었지요』
  
  권력에 도전하는 사람에겐 비정
  
  ―朴대통령이 권력에 대해서는 비정하고 잔인할 정도라고 말을 했는데 사실입니까.
  
  『권력에 도전하는 사람에게 무자비했습니다. 10·2 항명파동 때의 일이 대표적인 예지요. 吳致成 내무장관 해임건의안에 대해 朴대통령 부결하라는 지시를 했는데도 가결이 됐거든요. 그날로 金成坤씨 등을 잡아들여 치는 것 보니까 무서웠어요. 尹必鏞 사건도 같은 차원에서 볼 수 있지요』
  
  ―金대통령의 하나회 제거 등 군 개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최고사령관이 소신 있게 하는 것에 대해 무어라고 말할 입장이 아닙니다. 엄격하게 얘기해서 군내 사조직은 없어야 합니다』
  
  ―5·16주체세력과 하나회세력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5·16주체세력은 5·16하고 나서 군에선 없어진 것입니다. 새 정부 가 들어서면서 군에 복귀한 사람을 빼고는 전부 군복을 벗어버렸으니까 군대 내 조직으로는 끝난 거지요』
  
  ―朴대통령은 金日成, 金大中, 金泳三씨를 어떻게 보고 있었습니까.
  
  『金大中씨에 대해서 별로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金泳三씨는 좀 차이가 있었어요. 인간적으로 서로 안 맞았다고 봅니다. 「개발」은 더 돼야 하는데 자꾸 말이 많으니 현실적으로 全 책임을 맡길 수 있는 대상이 못 된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김일성에 대해서는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이 朴대통령의 확고한 생각이었습니다. 金日成에 대해서는 「두고보자, 지금은 네가 군사적으로 조금 낫다고는 하지만 어느 시기에 가서는 어림없어, 내가 그렇게 만들겠어」 하는 식이었습니다』
  
  素月시가 좋아요
  
  ―7·4공동성명 前 李厚洛씨를 북한에 보내기로 결정한 배경은 무엇입니까.
  
  『이후락씨를 파견한 건 우선 남북간에 길 좀 터놓자는 의도였습니다. 朴대통령은 그때 가능하면 남북간에 혈桓맛?피할 수 있도록 하자, 경제로 승부하면 승산이 있다, 월등히 앞설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金대표께서 고사성어를 인용, 재미있는 말을 많이 해 우리 정치를 부드럽게 만들어 주는 좋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평소에 책을 읽다가 기억할 만한 말은 메모해서 새겨 둡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잊어버렸습니다』
  
  ―詩心이 있는 정치 등, 「시심」이라는 말을 하시는데요. 시심이 무엇입니까.
  
  『정치도 예술로 비유, 낭만도 있어야겠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정치인의 리더십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위기관리능력입니다. 반면에 낭만도 있어야겠지요』
  
  ―우리나리 시인 중 좋아하는 시인이 있습니까.
  
  『素月을 좋아합니다』 金대표는 외고 있는 시도 있느냐는 질문에 「먼 훗날 잊었노라.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하며 소월의 시 한 구절을 암송해 보였다. 중국에서는 詩보다 樂을 더 높이 친다는 말에는 가수 이미자의 노래를 직접 아코디언으로 반주했던 경험담을 얘기하기도 했다. 金대표는 정치가의 예술적 취향이 화제가 되자 약간 감정이 고양되는 듯했다.
  
  독일 수상을 지냈던 슈미트가 매년 한 번 런던에 가서 영국 로얄필과 공연하는 피아니스트라는 얘기와 영국의 히드 수상은 유명한 파이프오르가니스트라는 등의 얘기를 「신나게」 했다. 김대표는 독서의 중요성과 자신의 독서습관에 대해서 「강의」하기도 했다. 金대표는 『텔레비전을 보는 것은 남이 하는 것을 듣는 식이어서 깊이가 없어진다』며 읽고 생각하고 감격하고 눈물도 흘려봐야 인생의 깊이를 안다면서 이는 독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金대표는 또 책은 항상 손닿기 쉬운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한다며 자신은 침대 머리맡에 책을 두고 잠들기 직전까지 독서하다가 잠들어 버리는 게 습관이 되었다고 했다.
  
  조국선진화가 신당의 비전
  
  권력은 아편
  
  ―누구보다도 권력의 실체를 절실하게 느껴본 입장에서 권력의 속성에 대해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정치학자의 해설은 실제의 권력과는 다릅니다. 권력은 마약 같은 것입니다. 한 번 쥐면 놓지 않으려 하고 권력에 도취하게 되면 점점 더 요구하게 됩니다. 여당에 있는 사람이 약한 게, 권력의 비호를 받다가 보면 어떤 변화도 바라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권력의 비호를 받다보면 안전하거든요. 그래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거지요』
  
  ―권력을 상실한 뒤 느끼게 되는 금단현상 같은 것을 견디지 못해 사람이 추해지고 또 권력에 아부한다고 하는데요. 金대표께서는 서너 차례 野人의 경험이 있었는데 그때 어떤 기분이었습니까.
  
  『그런 때일수록 책을 읽었습니다. 캔버스를 메고 야외로 그림을 그리러 갔습니다. 내 시간을 가졌습니다. 언젠가는 떠날 텐데…. 인간이란 유한한 것 아닙니까. 80년에서 86년까지 주로 미국에 있으면서 미국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내 시간을 충분히 즐겼습니다. 서양의 정치인들은 인간적 취미를 다 갖고 있습니다. 외곬이 아니지요. 일본의 정치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의 진보잡지 「世界」지의 前 편집장인 야스에 료스케(安江良介)라는 사람이 최근 서울에 와서 한일국교정상화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표명했습니다. 국교정상화 때문에 일본의 입장에서 볼 대 한반도문제 해결이 더욱 어려워졌다는 논지였습니다. 金대표께서는 한일국교정상화의 역사적 의미를 어떻게 평가합니까.
  
  『한일국교정상화는 오늘의 한국이 있게 한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여러 측면에서 국가발전에 기여했다고 봅니다. 地政學的으로 우리나라는 일본열도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해양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일본을 거쳐야 합니다. 지정학적인 위치를 봐서도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하기 않을 수 없었습니다. 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후 韓-日간에 계속 회담이 있었지만 제대로 해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5·16후 朴대통령이 이케다(池田) 수상과 만나 「이제 정식으로 하자. 회담을 위한 회담이 아니라 해결을 위한 회담을 하자」고 제의했습니다. 對日청구권 문제가 걸려 있어 회담진행이 지지부진했습니다. 결국 누군가 짐을 져야 하는데 그 짐을 제가 졌습니다.
  
  미국서 돌아오는 길에 일본에 들러 오히라(大平) 외상과 만나는 자리에서 담판을 벌였습니다. 오히라 외상은 당초 8천만 달러를 제의했고 나는 5억 달러를 제의해서 결국은 나의 제의를 관철시켰습니다. 당시 일본의 외환보유고가 14억달러 였으니 결코 적은 돈은 아니었습니다. 이때 양국 수뇌에 보고하기 위해 장관 책상 위 메모지에 금액만 적었는데 이게 소위 「金-오히라」메모가 된 것입니다. 자필로 쓴 메모쪽지에 불과했지 서로의 서명이 있지도 않았습니다』
  
  ―미국정부도 성사되도록 한일양국에 압력을 많이 넣었습니까.
  
  『압력보다는 설득을 많이 했지요. 미국이 우리를 도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 주재 대사관을 통해 측면 지원을 했지요』
  
  ―미국이 한일국교정상화를 지원한 것은 소련과 중국을 의? 안보적인 차원에서 韓-日간의 유대를 필요로 한 때문이 아닙니까.
  
  『미국은 국교정상화가 성사되자 「한국의 승리」라고 했습니다. 일본은 당시 북한을 지지하는 사회당의 세력이 강했습니다. 일본으로서는 남한과 회담해서 성사시키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었지요. 미국으로서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한국이 빨리 경제적으로 성장해주기를 바라는 입장이었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85년부터 2년간 국내에서는 커다란 민주화 흐름이 있었습니다. 이 기간동안 金대표는 국내를 떠나 있어 민주화 흐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87년 6·29이후 대통령후보로 나섰을 때 아무 노력 없이 밥상 위에 숟가락만 올려놓는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87년 귀국해서 내 갈 길 간다고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신민주공화당 결성하고 대통령에 출마한 것은 당선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는 내 논리에 다라 살았습니다. 나는 오늘은 오늘의 논리 내일은 내일의 논리에 따라 최선을 다해 행동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80년대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습니까.
  
  『그 기회에 미국전역을 속속들이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돌아본 미국은 어떤 나라입니까.
  
  『알 수 없는 나라입니다. 보면 볼수록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시민정신이랄까, 제 할 일을 알아서 하는 시민의식에서 질서가 유지되는 것 같기도 하고…』
  
  오전 10시부터 시작한 인터뷰가 오후 4시를 넘어서도 계속되고 있었다. 金대표는 조금 지친 듯했다. 집요한 질문에 꼬박꼬박 대답을 빠뜨리지 않았지만 말수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목소리의 톤도 조금 떨어졌다. 그러나 칠순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세를 전혀 흩트리지 않았다.
  
  지식인의 阿世 문제
  
  ―새 당을 만들면 국가 목표를 설정해야 하는 데 무엇입니까. 역시 세계화입니까.
  
  『세계화는 아닙니다. 세계화는 시대의 흐름일 뿐입니다. 세계화는 바로 공산주의의 몰락에 따라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新黨의 목표는 시대흐름에 뒤지지 않고 잘사는 나라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선진화된 나라에 뒤지지 않게 윤택하고, 평화롭고, 자유롭고 그리고 인권이 존중되는 사회를 지향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선진화된 사회라고 할 수 있겠지요』
  
  ―80년 초에도 우리사회가 지향해야 할 바를 「민주화·개방화·국제화」라고 말씀하실 걸로 기억합니다. 당시 「국제화」는 다소 생소한 개념으로 들렸는데요.
  
  『그랬지요. 나는 그때 공산주의가 멸망하리라 예상했습니다. 공산주의라는게 고루고루 富를 나눠준 게 아니고 빈곤을 주었기 때문에 실패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80년 이후는 국제무대에서 뛰어야 한다는 인식에서 국제화를 주창했습니다』
  
  ―金대표는 34년 동안 정치권의 핵심에서 한 시대를 대표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국의 근대화라는 목표 아래 권력을 바탕으로 경제발전의 흐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합니다. 신당이 조국근대화를 바탕으로 조국선진화로 이끄는 데 존재 이유를 둔다고 할 때 과거의 성공비결이 오히려 미래의 실패요인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경귀(警句)가 생각나는데요.
  
  『어제는 어제의 논리로 최선을 다 했습니다. 이제 대결의 상대가 몰락한 상태에서 오늘은 더불어 살자는 논리가 중요합니다. 이런 취지에 맞게 신당을 창당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방법을 그대로 적용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을 겁니다』
  
  ―新黨의 역사관, 정책은 민자당과 어떤 차별을 두실 생각입니까.
  
  『정치면에서는 참된 민주주의를 위해 의원 내각제를 추진하고, 경제면에서는 중산층을 타깃으로 자유시장경제를 지향하는 것이 커다란 정책목표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과 내일의 논리에 맞게 교육·사회 제도를 정돈할 필요도 있을 것이고, 선진화에 걸맞는 과학기술 개발에도 최우선 목표를 둘 것입니다. 과학기술의 경우 소수의 대학, 연구기관에 중점 지원하는 방안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출처 : 월조
[ 2003-07-12, 23:3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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