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김대통령과의 인연은 소중히 간직하고싶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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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鍾泌, 드디어 털어놓다 - 창당방해 극심… 그러나 金대통령과의 인연은 소중히 간직하고 싶다
  
  30年 政友 金泳三대통령과의 愛憎·정권 심장부에서 있었던 깊은 이야기·마지막 결별의 만남 內幕
  
  ● 『옛 중앙청 철거할 돈으로 용담 댐 짓는 게 낫다』
  ● 『중산층 대변 정당을 만든다』
  ● 『한자 혼용 정책에 찬성』
  ● 『金대통령과의 마지막 자리엔 이미 결심하고 갔다』
  ● 『작년 12월에 그쪽의 의도를 읽고 준비했다』
  ● 『金대통령은 역사왜곡…미워도 역사는 역사』
  ● 『동해선거 후보 매수사건이 조작이라니… 매수자금은 金泳三씨 쪽에서 나왔다』
  ● 『정치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위기 관리 능력』
  ● 『내가 무엇이 되는가 보다는 무엇을 만들어서 넘겨주는가가 더 중요하다』
  
  1992년 4월8일 金泳三-金鍾泌 밀약4개항 최초 확인
  ● 내각제 개헌 포기
  ● 정부운영에 내각제 요소 활용
  ● 정당 중심의 국회운영
  ● 민자당운영?JP가 주도
  
  역사와 마주 한 느낌
  
  金鍾泌씨를 대면하면 늘 역사와 마주한 느낌을 받는다. 1961년 5·16쿠데타로 시작된 그의 정치궤적은 한국 현대사의 나이테를 그리면서 한국인들의 삶에 크나큰 자취를 남겼다. 5·16의 발상·기획자, 중앙정보부 창설에 의한 정권의 보위, 한일 국교정鑽?과정의 결정적 역할, 개발 年代의 정치담당세력인 공화당 창당의 주역, 유신시대의 총리, 3당 합당, 金泳三 대통령 만들기, 그리고 민자당 탈당 후 신당 창당 착수. 이런 파란만장의 정치 풍상(風霜)은 30代의 날렵한 美靑年을 이제 70 고희(古稀)를 눈앞에 둔 고목 같은 둔중한 大정객으로 그를 변모시켰다. 나이로 치면 老정객인데 老자를 붙일 수 없는 것은 이번 인터뷰에서도 재확인된 그의 절륜(絶倫)한 체력과 정신력 때문이다.
  
  1995년 2월12일 오전 10시 서울 신당동 자택 응접실에서 기자 일행을 맞은 金씨는 점퍼차림으로 떡 버티고 앉아 있었다. 그 뒤 10시간, 점심·저녁식사를 함께 해 가면서 내리 쏟아 낸 그의 말들은 목에서가 아니라 뱃속 깊은 데서 울려나오는 열변이었다. 말하기를 즐기는 그는 3당 합당 이후 5년간 그 말을 조심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다. 金泳三 대통령과의 결별 이후 그는 언론자유를 되찾자 직격탄을 거침없이 쏘아댈 수 있게 된 것이 무엇보다도 신나는 일인 듯 보였다. 金鍾泌씨의 말투는 현학적이지 않고 재미있으며, 논리적이지 않으면서도 설득력이 있고, 심각하지 않되 해학과 가시가 있어 질문자로서는 아주 편한 상대이다. 더구나 비화(秘話)를 쫓는 잡지 기자 입장에서 볼 때 그만한 양과 깊이의 정보를 가진 한국인은 달리 없다 이날 인터뷰는 漢字혼용과 관련된 가벼운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호칭은 편의상 「대표」로 했다.
  
  30년전의 내셔널리스트
  
  우리 당의 문자정책은 한문혼용
  
  ―새 당을 만드시면 문자정책에 관한 어떤 대안을 내십니까.
  
  『나는 한글·한자를 혼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우리 한글 낱말의 어원이 대부분 한자에서 나온 게 아닙니까. 국제화, 세계화한다면서 통상 사용할 수 있는 한자도 안 쓰니까 동남아나 중국,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뭐 하나 읽을 수가 있어야지요. 앞으로는 자기 차를 가지고 와서 장사를 할 건데 어디 하나 찾아갈 수 있게 만들어 놨어요? 표의문자를 넣어서 깊이 이해하고 생각하는 좋은 점도 되찾아야지요』
  
  ―간판을 우선 한자로 하는 것이 시급한 것 같습니다만.
  
  『간판도 도로표지도 그렇지요. 우리 어렸을 때는 한자 옆에 토를 달아주니까 자꾸 읽으면서 저절로 익혔어요. 우리 출판물들도 토를 달아 주면 금방 익힐 수 있을 텐데』
  
  ―간판을 한자로 쓰면 자연스레 교과서가 되는 거죠.
  
  『텔레비전에서도 한자를 쓰지 않는데, 개인성명이나 지명 이런 고유명사만이라도 자막에 쓰면 좋을 텐데, 방송국 사장들에게 얘기했더니 그것도 할 수가 없다고 합디다. 어째 이렇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어요』
  
  ―문화부 건물에 이 달의 인물이 남명 조식 선생으로 한글로만 적혀 있던데….
  
  『이런 식으로 가면 얼마 안 가서 제본관조차도 모르게 돼요. 그런 식으로 이제는 제 조상도 몰라보게 된 거에요. 그런 고루한 생각을 버리지 못하면서 입으로만 국제화니 세계화니 하는데 그래서는 안돼요. 어문학을 버렸어요』
  
  ―한글전용정책은 朴대통령 시절에 결정된 것입니다.
  
  『그때 공판타자하는데 시간이 너무 걸리니까 행정효율을 위해서 그랬던 거지요. 그것도 전용이 아니라 혼용이었어요. 그런데 어느새 전용화되어 버리고…. 내가 총리가 되고 나서, 다시 한자를 가르치라고 해서 가르치고 있는데 너무 형식적으로 되어버렸어요』
  
  30여년 전의 내셔널리스트
  
  ―지난 1월14일 억지 인터뷰를 끝낼 무력 金대표께서 다음에 본격적으로 하자고 말씀하셨는데, 약속을 지켜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신당창당과 金대표님 개인에 대해서, 또 과거사 중에서 궁금한 것과 좀 정리가 필요한 부분들을 들려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그리고 이 시간이 가능하다면 정치인으로의 생애를 정리하는 역사적인 인터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젯밤 우연히, 도날드 스톤 맥도날드라는 美국무성 관리가 쓴 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미국 입장에서 한미 관계를 어떻게 보았느냐 하는 그런 내용인데, 5·16직후에 관련된 기사를 읽어보니까 미국이 당시 金鍾泌 정보부장을 어떻게 정치에서 손을 떼게 하느냐 하는 문제로 고심하고 압력을 넣은 과정이 아주 잘 나와있습니다. 특히 사무엘 버거 미국대사가 朴대통령을 찾아가서 「중앙정부부장을 정치에서 손떼게 하라」로 했다고 쓰고 있어요.
  
  『버거하고 많이 싸웠지요』
  
  ―특히 63년 공화당 창당을 앞둔 시점에서 외유를 하도록 어떻게 압력을 넣었는지, 또 64년 6·3사태 직후에 2차 외유를 하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과정이 나와 있는데, 이걸 읽어보면 미국 쪽의 시각은 金대표를 내셔널리스트라고 분류를 했습니다. 그런데 3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젊은 세대로부터는 수구세력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세대의 흐름이 묘한 반전을 가져왔다는 걸 느꼈습니다.
  
  『미국은, 나를 제대로 몰랐다』
  
  『당시에 미국 사람들이 날 민족주의자라고 해석한 것은 잘못되었어요. 그건 미국식으로 해석한 것은 잘못되었어요. 그건 미국식으로 해석해서 그래요. 그 사람들이 후진국의 애국자들을-애국자라는 데 나를 포함시키는 것은 아니고-민족주의자니 뭐니 해서 사상적으로 판단하는 데에 완전히 실패했어요. 또 하나는 그 사람들 하자는데 내가 고분고분하지 않았어요. 서로 덮어두기로 했기 때문에 조금만 얘기하지만 당시에 장면(張勉)민주당 정권을 엎으려는 작용들이 있었어요. 미국 쪽으로부터였지요. 나는 미국과 손잡은 그 세력들을 모아서 김포공항으로 데려가 국외로 추방시켜버렸습니다.
  
  사무엘 버거가 그 후에 월남 대사로 가 있었어요. 내가 월남서 그를 만났을 때 비로소 자기가 잘못했다고 했어요. 61년과 62년 그 당시에 나를 제대로 몰랐다고 말입니다. 그래, 「이제는 내가 어떠냐고」하니까 「이젠 잘못 보지 않겠다」고…. 그렇지만 美대사관에서 본국에 보고한 것은 과장이나 거짓말을 한 것이 있을 것으로 보는데…예를 들어서 朴대통령에 압력을 가해서 내가 정치에서 손을 떼게 하려 했다든지 하는 부분들이 그래요. 朴대통령이 그런 것을 받으면 전부 나한테 얘기를 했지요. 내가 외유할 무렵에 미국으로부터의 압력이 들어왔다는 따위의 말들은 朴대통령으로부터 들은 적이 없어요. 자기들 상전에게 과장하거나 조작해서 보고한 가능성도 부인할 수는 없어요』
  
  ―그러면 미국쪽에서는 朴대통령에게 그런 압력을 행사했다고 믿었지만 실제로 朴대통령이 金대표를 외유 보내는 데 있어서 미국쪽의 압력은 별 무 효과였다는 말씀이시군요.
  
  反美는 아니었다
  
  『아무튼 자기들끼리 나에게 압력을 가하려 했다는 것은 나를 미워했다는 것이지만, 64년에 하버드에 갔는데 자기들이 별별 편의 제공을 다 해줘서 미국 국내를 전부 돌아다니면서 산업시찰을 했어요. 아마도 나를 反美주의자라고 봐서 순회하려고 했는지는 모르나 난 反美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미국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물론 국토가 양단되는 원인은 미국사람들이 만들었지요. 소련이 어떤 나라인지 잘 몰라서 작전상 편의로 한 것이지만 이제 한 국가의 민족을 분해하게 만든 건 사실 아닙니까. 그걸 지적했어요. 그러나 공산군이 쳐들어 왔을 때 우릴 도와주었어요. 그후에도 미국의 지원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난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 당시 혁명을 했으니 나를 보고는 「참 곤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법해요』
  
  ―지난 9월에 갤럽에서 차기 대통령후보에 대한 여론조사를 해보니까 아주 재미있는 현상이 발견되었습니다. 金대표에 대한 지지율이 50대 후반에서는 24.5%가 나왔고 30대에서는 5%가 나왔습니다. 50대 후반과 그 밑으로는 단층이 생길 정도로 극단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만 50세인데 김대표를 좋은 인상으로 기억하게 된 계기는 대표께서 5·16직후에 중앙정보부장으로 처음 기자회견을 하실 때였습니다. 그때 미국의 對韓 정책 중 소비재 물자만 지원한다는 것을 비판적으로 말씀하셨는데 이런 발언 때문에 미국사람들이 내셔널리스트로 보게 되었고 그 후 정치활동에 여러모로 방해가 되지는 않았습니까.
  
  『방해물이 되지는 않았는데… 미국원조기관으로 「유솜(USOM)」이라고 있었는데 거기에 무려 천 수백 명이 근무하고 있었어요. 결국 우리나라에 원조해준다면서 이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한 것 아니냐고 지적했지요. 그러면서 반으로 줄이라고 요구했더니 반으로 줄였어요. 그 사람들 가져가는 걸 우리한테 써달라 했으니 날 고얀 사람으로 봤을 거에요. 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였어요. 숫자만 엄청났지만 실제 우리 군에 들어오는 건 보잘 것이 없었어요. 그래서 이왕 지원할 바에야 고맙게 생각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어요』
  
  황태성 사건
  
  ―5·16직후에 미국은 朴장군이 과거에 공산주의자적 경력을 가지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런 때 정보부가 지시를 해서 HID가 북한과 서해상의 비밀접촉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HID는 그 전부터 자주 북쪽과 접촉하고 그랬어요…』
  
  ―접촉한 것은 사실인데 그 접촉이 정치적인 목적은 아니라는 말씀이신지….
  
  『어떻게 알게 되어서 만났는지는 몰라도 남북접촉을 위한 어떠한 혁명정부의 의사도 결부되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그건 북한에서 오해한 것입니까. 최근에 舊 소련의 북한 전문가가 쓴 것을 보면 북한은 그것을 정치적인 접촉으로 해석하고 거기에 대한 화답으로 황태성을 내려보냈다는데요.
  
  『그건 저들이 만들어 낸 것이고, 황태성(朴正熙의 형 相熙씨의 친구로 월북자―편집자注)이가 내려온 데 대해서 아마도 내가 제일 놀란 사람들 중에 하나일 거요. 뭘 근거로 해서 이런 사람을 내려보냈느냐, 다만 朴대통령도 황을 아니까 뭐가 되지 않겠느냐 해서 내려 보냈을 거다. 그러나 이건 혁명수행에 잘못하면 결정적인 장애요인이 될 거다 하고 판단했지요. 그냥 잡아오라고 해서 집어넣었어요. 그 이후에 미국은 여러 이유를 붙여서 자꾸 처형을 지연시키려고 했어요.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간첩으로 해서 처리하려고 했고 그러다 결국 朴장군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미국측의 요구가 쑥 들어가 버렸어요. 기자들 입회하에 교수형으로 끝냈지요』
  
  ―사형집행 당시에는 정보부장을 그만두신 후입니까.
  
  『황태성을 처형시키던 당시의 부장은 김형욱이었을 겁니다. 63년 11월인가 12월인가 그랬어요』
  
  ―황태성을 밀사로 봐야 되느냐 간첩으로 봐야 되느냐의 문제인데 對南밀사로 봐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처형은 무리였지 않았습니까.
  
  『간첩으로 봤지요. 왜냐하면 朴대통령을 만나서 공작하려고 밀사로 파견되었다면 그 전에 우리 쪽에서 어느 정도의 호응이 있어야 하는 거지요. 그는 어떻게 하든지 朴대통령을 만나야 하겠다고 떠들어대면서 우리 장모를 찾아 왔어요. 그래서 잡아들였는데 밀사라는 것은 전혀 말이 안되죠』
  
  ―당시에 미국이 후진국의 국가 지도자가 상당히 민족적으로 나갈 때 어떤 태도를 취했느냐를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가 월남 지도자 「고딘 디 엠」에 대한 쿠데타 사주인데요.
  
  『그것도 미국이 잘못했어요』
  
  ―거기에 대해서 최근에 맥나마라가 회고록을 냈습니다만 거기서 보면, 당시 미국에서 고딘 디 엠을 뒤엎느냐 아니면 고딘 디 엠 체제하에서 베트콩과 계속 싸우느냐에 대해서 토론이 붙었다고 합니다. 맥나마라 자신은 쿠데타를 반대했다고 하는데….
  
  『고딘 디 엠으로 하여금 끝까지 싸우게 했어야 했어요. 그런데 그것을 엎어 버리니까 그냥… 수렁에 빠진거지』
  
  美國의 고딘 디 엠 축출은 월남패망의 원인
  
  ―1962년 초에 정보부장으로서 월남에 가셔서 현지 조사를 하셨지요. 그때 고딘 디 엠을 만나셨습니까.
  
  『만났지요. 만나서 싸우라고 했지요. 나중에 대통령이 된 티우는 내가 갔을 때 월남군 1사단장으로 17도선에 배치되고 있었습니다. 그가 나중에 국방부장관이 되고 대통령이 되고 했지요. 고딘 디 엠에게는 동생 고딘 누와 동생부인이 측근으로 있었지만 미국이 이들을 자극해 전의를 다 상실하게 하고, 지휘력도 약하게 만들고, 거기다가 쿠데타를 일으키게 해가지고… 그때 월남은 끝난 거지요. 그러던 시기의 미국의 대외정책 같은 것은 더 정확하게 반성을 해야 합니다』
  
  ―맥나마라도 같은 얘기를 했습니다. 월남전에서 지게 된 첫 번째 이유가 고딘 디 엠 피살 뒤에 나타난 정치세력이 불안정해서 자기들끼리 싸우는 바람에 베트콩 소탕도 못하게 됐다는 겁니다.
  
  『그저 도토리 키 재기지. 「키우」라든지 「민」이라는 작자에게 미국이 계속 작용을 해서 민에서 티우로 바뀌었지만 그때는 지휘력이라든지 대통령의 권위라든지… 자신들의 일을 자신들이 책임지고 하지 않고 미국을 시켜 대리전쟁 하듯이 하게 되니 그게 제대로 되겠어요』
  
  ―1962년 초에 월남에 가신 동기가 61년 11월에 朴대통령이 최고회의 의장자격으로 케네디와 정상회담을 했을 때였지요. 그때 「필요하다면 우리가 월남에 군대를 보내서 도와주겠다」라는 제의를 먼저 했거든요. 그 뒤에 상황을 알기 위한 현장조사로 대표께서 가신 것 같은데 고딘 디 엠을 만나셨을 때 국가 지도자로서 국민의 지지를 얻고 있었습니까.
  
  『그땐 지지를 얻고 있었어요. 그땐 그 사람 이외엔 없었어요』
  
  ―개인적으로 그에게서 어떤 인상을 받으셨습니까.
  
  『개인적으로 이 사람이야말로 애국자구나 하는 퍽 부드러운 인상이었습니다. 그런 부드러운 사람들이 위기에는 강력한 의지의 소유자가 되지요』
  
  金泳三 의원 제명 때 유일한 반대표 던졌다
  
  ―고딘 디 엠이 쿠데타로 넘어가고 동생하고 같이 암살되었는데 그 직전에 그가 프랑스를 통해서 호미명과 직접 나라 문제를 담판하려 했고 그걸 미국 정보기관에서 알아내었습니다. 그것이 고딘 디 엠을 쫓아내느냐 아니냐를 논의할 때도 하나의 화제로 등장했거든요. 미국은 분단국가가 자체문제를 직통채널을 통해서 스스로 해결하려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신경을 쓰는 것 같은데요.
  
  『난 미국에서 무슨 논의를 했는지 그건 모릅니다. 우리도 북쪽하고 얘기하려고 하는데 월남도 해서 안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 걸 그 당시의 미국 사람들 사고방식으로서는 의심스럽다는 해석을 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미국 학자들의 바뀐 해석들 중의 하나가 과거 60년대에 가난하건 고프건 말건 덮어놓고 민주주의 하라고 압력을 가하곤 했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느냐 하면 역시 민주주의 하려면 최소한의 경제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약 30년 전의 미국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여러 가지 그런 어려움들을 자초했던 면이 없지 않아 있었어요』
  
  ―朴正熙 장군이 5·16쿠데타를 하게 된 것도 매그루더 미8군사령관이 사상적인 것을 문제삼아 朴장군 자신을 예편시키려고 한다는 강박관념이 작용해서 어떻게든지 군에 있을 때 혁명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거사를 앞당긴 하나의 요소가 됐다고 봅니다. 10·26사건을 당하게 된 것도 물론 미국의 CIA가 조종했다고는 보지 않습니다만, 10·26사건의 한 환경적 요인이 된 金泳三 당시 신민당 총재를 제명하게 된 동기가, 金총재가 뉴욕타임스지와 기자회견을 했던 내용이었어요. 朴대통령이 국내의 인권문제나 민주화를 탄압하는 데 대해서 미국정부가 좀더 적극적으로 개입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주문사항이 있었고 그것이 문제가 된 거죠. 그러니까 朴대통령의 집권과 그 분의 죽음 이 두 가지 순간에 있어서 모두 다 미국의 존재와 연관이 된다고 봅니다. 더구나 金大中씨나 金泳三씨나 국내 정치문제에 대해서 미국의 개입, 미국의 영향력 행사를 요구했습니다. 朴대통령은 진심으로 화가 났습니까?
  
  『미워했지. 뭐냐하면, 「왜 국내문제에 외세를 끌어들여야 하나」 이런데 대해서 朴대통령의 정신기조에 기초해서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런 데서 권력의 속성과 더불어 작용한 것이라고 봐요. 그때 난 고향에 가 있었는데 박준규씨가 당의장 서리로 있었어요. 날 좀 올라오라고 해서 올라갔지. 프라자호텔 중국관에 고문들이 다 모였습디다. 이효상씨, 백남억씨, 백두진씨, 정일권씨, 박준규 그리고 나. 거기서 당의장이 「金泳三 야당총재 옷을 벗기겠다」고 그런다는 겁니다. 대통령의 큰 의지라는 거죠. 제가 화를 냈습니다. 「대통령에게도 안 되는 세상일이 있었습니다. 야당 당수를 내쫓는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얘기입니까」그러나 내 말에 즉석에서 동의하는 사람이 정일권, 이효상씨 두 사람뿐이었어요. 백두진씨와 백남억씨는 침통한 표정만 하고 답을 안 합디다. 일방적으로 朴의장이 「당의 원로여러분께서 협력해 달라」고 하고 헤어졌어요. 그 다음에 국회에서 그때 난 반대표를 던졌어요』
  
  ―그런데 그 당시에 발표되기는 만장일치로 제명이 결의된 걸로 돼 있습니다.
  
  『발표는 그렇게 했는데 표를 계산하지 않았겠지요. 그러한 사정들이 있었는데 그건 한 정권의 말로적 현상이었어요』
  
  『산이 퍼래지는 데 사람이 많이 죽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사람을 진보냐 보수냐로 가르는 여러 가지 잣대 중 하나가 미국을 어떻게 보느냐 입니다. 그 점에서 보면 朴대통령이나 金대표께서는 진보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요즘은 수구세력이라는 비판을 받고 계십니다.
  
  『글쎄 요즘 사람들이 뭐를 수구라고 그러는지 난 잘 모르겠어요. 가령 사, 오십대 이상은 이해를 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들은 지난 개발시대를 같이 겪어 온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이해가 가요. 그러나 지금 이삼십대는 개발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알 턱이 없지요. 게다가 그때 개발 때문에 빚어졌던 부작용들이 주위 사람들의 정신구조, 의식구조에 작용했을 겁니다. 그걸로 머리 속이 가득한 사람들에게는 고얀 사람으로 비칠 겁니다. 이삼년 전에 젊은 사람들하고 50∼60년대에 우리가 얼마나 가난했는지 얘기를 했는데 도중에 한 젊은 친구가 「그때는 그 흔해 빠진 라면도 없었느냐」고 그래요. 이런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예를 들어서 그런 얘기도 했어요. 산에 자꾸 나무가 죽어가지만 산길이 보이지 않도록 많이 퍼래졌다. 이게 어떻게 퍼래졌는지 아느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그거야 놔둬 보니까 퍼래졌지, 그걸 누가 했냐는 겁니다. 그 답답한 친구들에게 이렇게 얘기해 주었지요. 「6·25사변 때 격전장에는 산이 황폐했었다. 그리고 고향 삶들이 베다 팔고 했다. 어쨌든 완전히 황폐한 산이었다. 그것을 저렇게 만들어 가는 데는 희생이 있었다. 61년에 혁명할 당시, 석탄을 7백만t 캤는데 그걸 1천만, 1천5백만, 2천만t씩 마구 캐서 연탄을 공급해 주면서 산에 못 들어가게 했다. 그 전에는 땔 것이 없으니까 산에 들어가 나무하는 걸 말리지도 못했어요. 석탄을 캐서 19공탄을 만들어 주는데 막장에서 수 천명이 죽었다. 그들이 석탄을 공급해 주었기 때문에 산에 안 들어가서 산이 퍼래진 거다.
  
  그뿐인 줄 아느냐. 연탄가스가 스며들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이런 희생이 뒷받침이 되어서 산이 퍼렇게 된 것이다. 너희들 지금 밥 굶지 않지. 그게 너희들로부터 공격받는 그 사람들이 밥 먹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려고 애쓴 보람이다. 이것을 이해하느냐」, 그 사람들이 보기에는 누가 무엇을 했는지 고마움이 하나도 없어요. 하지만 그거 뭐 다 개의치 않습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너희들이 꿈을 펼칠 수 있도록 그 광장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겠다. 너희 세상 너희가 잘 살 수 있으면 되지 않느냐」그런 생각이니까요』
  
  『마누라가 무서울 나이가 되면…』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서 「조국 근대화라는 게 국가규모의 개혁인데 우린 그런 개혁을 했기 때문에 수구세력이 아니다」라든지, 「경제발전으로 민주화의 토대를 이룩했기 때문에 절대 우리는 반민주 세력이 아니다」든지 하는 식으로….
  
  『마찬가지지요. 그 사람들한테는 그렇게 해도 납득하지 않을 겁니다. 세대차라는 생각의 괴리는 도리 없는 것이라고 봐요. 그래서 그 사람들한테 그렇게 얘기했어요. 「세상물정 알고 자녀들이 고등학교 대학교에 가고 40대가 되고 마누라가 무서운 것을 깨닫게 되면 생각도 바뀌게 될 것이다. 고마운 것이 보이게 된다」고. 2천5백년 전에 소크라테스가 젊은 사람들이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술이나 마시고 여자들 궁둥이나 따라 다니고, 부모가 뭔지 생각도 하지 않고, 이래서는 죽어서 어떻게 눈을 감겠느냐 한탄했어요. 그러나 어느 시기에 가면 그 사람들도 세상이 험한 걸 알게 되지요』
  
  ―문제는 신당이 성공하려면 지금 당장 30대와의 전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金대표를 커버하고 있는 기자들도 거의 30대고 또 우리나라의 유권자들 중에서 27%가 30대입니다. 30대가 8백30만명인데 30대는 80년대에는 20대였고 그 10년 동안을 민주화의 역리 속에서 지냈기 때문에 여론조사를 해보면 20대보다도 더 반체제적이고 야당성향이 강합니다. 이 막강한 세력을 어떤 식으로 설득하느냐가 우선 당면한 지자제 선거에서 크게 영향을 끼치리라고 보는데, 그냥 나이를 먹으면 알게 된다고 해서는 곤란하지요.
  
  『그건 인생행로를 얘기한 것이지요. 앞으로 나는 당을 만드는 데 청장년이 주축이 되고 기성층의 경륜과 의지가 잘 조화되어서 내일을 향해서 잘 엮어나가는 당을 만들어 제공하려고 합니다. 젊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계속 설득하고 납득시키는 끈질긴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번에 당을 만드는 데도 이름깨나 있는 사람들을 자꾸 접촉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21세기를 자신이 정력을 불태워서 주축이 되어 참여해서 이끌어 가려고 하는 뜻이 있는 젊은이들이 참여해 주기를 바란다」는 광고를 내려고 합니다. 그래서 청장년들의 의지를 규합해서 당조직을 만들어 나가려고 합니다. 기왕의 당들은 그것이 안되겠지만 새로 만드는 당은 가능하리라고 봐요. 「내가 무엇이 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만들어 놔야 내 조국에 도움이 될 수 있느냐」하는 데서 출발해야지요』
출처 : 월조
[ 2003-07-12, 23:4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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