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哲彦, 침묵 깨다 - 金泳三 권력은 피크 지났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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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정권 5년은 순간에 불과
  
   ―재심신청을 위해서는 洪여인이 나와 검찰에서의 증언을 번복하든지 鄭德日씨가 진술을 번복하든지 해야 합니까.
  
  
  『鄭德日 - 德珍 형제가 법정에서 위증한 부분이 많습니다. 위증죄로 고발해 유죄판결이 나거나 洪여인이 다른 이야기를 하면 재심사유가 되지요. 지금 鄭씨 형제를 고발하지 않는 이유는 검찰이 불기소처분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鄭씨 형제나 洪여인도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을 겁니다. 자기도 사업도 하고 살아야 하니까 유도질문에 시인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정권이 바뀌면 이 사람들이 양심선언을 해서 이 사건의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옛 중앙청 철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잘못된 처사라고 봅니다. 그 건물이 수치스런 상징물이지만 민족의 과거를 반성하면서 재발을 막는 ♧으?다지는 데 활용할 수 있지요. 국민여론상 꼭 철거해야 한다면 박물관 옮길 자리를 마련한 뒤 철거해도 늦지 않습니다. 유물을 7년간이나 가건물에 보관해야 한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아요. YS 정권 5년만이 이 나라가 존재하는 기간이 아니지 않아요. 5천년의 긴 역사, 앞으로 전개돼야 할 민족사에 비하면 5년은 순간인데 왜 그렇게 조급한지 모르겠어요』
  
  ―몇년 후 鄭씨 형제가 갖다준 6억원이 뇌물이 아니라 정치자금이었다고 하면 재심사유가 됩니까.
  
  『재심사유는 됩니다』
  
  ―朴 전의원께서는 6억을 받았는지 여부는 하느님만이 아는 상태인데….
  
  『하느님이 아니라 鄭씨 형제와 나 세 사람은 알고 있지요』
  
  ―혹시 정치자금으로 받은 것 아닌가요.
  
  『처음 만난 사람에게 정치자금을 어떻게 받습니까. 검찰의 스토리에 따르면 10만원권 헌 수표뭉치가 든 007가방을 열어보여주자 내가 「동지합시다」라며 받았다는데 이게 말이 됩니까. 나는 섬세한 泳汰都求? 정치를 하게 되면서 자금이 필요해 재력있는 일가친척이나 친지들에게 신세를 진 적은 있지만 처음 만난 사람에게 돈을 어떻게 받습니까. 공직생활 25년간 이권과 관련해 금품을 받은 적은 한번도 없었어요.
  
  그 뒤 鄭씨 형제가 국세청에서 1백28억원의 세금을 추징당하지 않았나요. 나에게 부탁했다는 세무조사가 시작돼 세 번이나 연장되면서 91년 6월 말에 1백28억원이 추징됐다고 하던데요. 90년 10월 5억원이 든 돈 가방을 주고 그 뒤 5천만원씩 두 번을 하이야트호텔 사우나에서 저에게 줬다는 말인데요. 그랬다면 제가 잘 아는 당시 서영택(徐榮澤) 국세청장에게 전화라도 해줬을 거 아닙니까. 그러나 당시 徐 국세청장은 수사과정에서 참고인 조사도 받지 않았고 우리가 법정에서 증인신청을 했지만 기각당했습니다.
  
  鄭德日씨 집은 양재동 우리집과 1백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데 집으로 조용히 오지 왜 약속도 없이 하이야트호텔 사우나까지 와서 돈을 전해줄 필요가 있을까요』
  
  정권 바뀌면 鄭씨 가명구좌 2백 개는 언젠가 지뢰밭 될 것
  
  ―鄭德日씨와 몇번 만났습니까.
  
  『洪여인과 오랜만에 통화가 돼 「잠깐 차나 한잔 하러 오라」고 해서 갔더니 인사를 하고 싶다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생각지도 않게 만났어요. 월남해 어렵게 성장해 호텔을 여러 개 가지고 있다는 등 군부대 위문 등 자선사업을 많이 한다는 등 자기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더군요. 그래서 「다음 약속이 있어 먼저 가겠다」고 말하고 나온 것이 전부입니다. 언젠가 이 사건이 다시 파헤쳐지면 엄청남 파문이 올 겁니다.
  
  처음엔 담당검사가 이 사건을 제대로 수사하기 위해 鄭德珍 3형제의 가명구좌 2백여 개를 추적해서 찾아냈답니다. 그 후 고위층에 돈이 들어갔다는 소문이 일자 가명계좌 수사를 중단했어요. 鄭德珍에 대해 기소한 부분은 90년 이후 것은 덮어두고 과거 90년에 세금낼 때 탈루한 것 18억원에 대해서 만이에요. 정권이 바뀐 뒤 가명구좌를 찾아내 수표의 행방을 추적하면 엄청난 지뢰밭이 될 겁니다』
  
  ―사건과 관련해 사생활이 드러나 법정에서 공방전이 벌어졌습니다. 연예인, 재벌회장 등과 술좌석에서 자주 어울린 사실이 드러난 것과 保安에도 실패한 것은 공인으로서의 처신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나는 신부나 스님처럼 완벽한 인생은 살지 못했지만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일을 하며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공직생활을 하며 각계각층 사람들과 어울려 대화하며 술도 마시고 노래도 하고 춤도 춘 건 사실입니다. 그것을 마치 부도덕한 일을 한 것처럼 검찰에서 몰고 간 것은 잘못입니다. 그것은 권력에 대한 과잉충성이고 아부에요. 검찰수사에서는 아무 것도 입증한 것이 없습니다. 여자 문제에 대해 내가 결백하다는 것을 증명해준 셈이죠.
  
  나는 17년째 하이야트호텔 헬스클럽 회원입니다. 공식일정 사이에 잠깐 운동하러 들르면 아는 회원들이 식사나 하자고 초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공식 일정이 끝난 후 마지막에 회원들과 가볍게 어울리기도 했어요. 사전에 누가 와 있는지 정확히 모르는 가운데 참석한 겁니다. 그 중에는 시인도 있고 이름은 모르지만 연예인도 더러 있었던 모양입니다. 사람들과 술마시고 노래하고 기분 좋으면 춤도 추고 한 적은 있습니다』
  
  ―출소 후 하이야트호텔 前사장 이희춘씨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요즘도 그 호텔 헬스클럽에 1주일에 한 두번 가서 조깅이나 헬스기구 등을 이용하고 사우나를 합니다. 그런데 못 만났어요』
  
  7·7선언은 내 작품
  
  ―이 사건을 담당한 검찰의 수사배경이나 의도는 무엇으로 보십니까.
  
  『처음엔 鄭씨 형제가 폭력계의 대부이고 탈세도 한 한국형 마피아라고 언론플레이를 해서 대대적으로 보도했어요. 그런데 가명구좌를 찾아 수사해보니 엄청남 게 나왔겠죠. 그리고 鄭德珍을 잡아보니 「우리가 사정이 이러저러한데 당신 그럴 수 있느냐」며 무슨 이야기를 하지 않았겠어요. 검사도 당혹스러웠을 거에요. 사건 마무리를 멋있게 해야하는데 고심중에 생각해낸 것이 鄭德日이 저를 한번 만난 일이 있다고 한 것을 이용한 겁니다(朴 前 의원은 이 부분은 자신의 추측이라고 덧붙였다). 집중적으로 朴哲彦에게 돈 준 적이 있냐고 몰고 가지 않았을까요. 洪여인은 하룻밤 사이에 여덟 번이나 조사를 받았답니다. 처음에는 부인하다 나중에는 다 「그렇습니다」는 식으로 진술을 받아냈어요』
  
  ―성격이 섬세하다고 표현했는데 정치자금은 어떤 식으로 받습니까.
  
  『추석이나 연말 때 주위의 친지들에게 한국적 관례상 이권과 관계 없이 조금씩 받는 정도입니다』
  
  ―對北문제에 대해서 물러보겠습니다. 7·7선언은 李洪九 당시 통일원장관이 주도적으로 만든 것인가요.
  
  『당시 청와대에 나를 팀장으로 통일원, 외무부, 안기부, 국방부 등에서 파견된 팀이 결성돼 각 부처 의견을 듣고 대통령에 건의해 마련했습니다. 사전에 대통령에 보고했으나 외양상 통일원에서 하는 게 졀渼鳴?해서 통일원장관이 보고하는 형식을 취했지요』
  
  공산권 수교 위해 7·7선언
  
  ―7·7선언은 북한을 동반자로 간주하고 우방국이 북한과 접촉하는 것을 지원하겠다고 규정하는 등 남북대화에 있어 과거의 「냉전적 사고」를 획기적으로 바꾸는 원칙을 다뤘습니다. 7·7선언은 지금까지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민족화해와 평화적 통일을 이뤄 세계 속의 중심국가로 성장하기 위해선 對北정책의 기조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盧정권 말기나 YS 정권에 들어서서는 통일정책이 좌충우돌하면서 너무 앞서가거나 혹은 강경노선으로 후퇴해 현재 7·7선언의 기조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7·7선언은 변하지 않는 북한에 대해 일방적으로 유화책을 제시했다는 측면이 있습니다. 남한에서 對北 경계심의 약화나 반국가 전복세력이 활개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했지요.
  
  『모든 정책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나라를 운영하는 데는 득실을 따져 방향을 선택할 수밖에 없어요. 7·7선언을 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까지만 해도 1백여개 나라와 수교했으나 자본주의권만 상대로 한 것이었고 그것도 美·日 강대국 치마폭 아래서의 반쪽외교였습니다. 전세계를 상대로 자주, 자본의 시대를 열기 위해서 공산권과도 수교를 해야 한고 남북문제에 있어서도 북한을 변화시켜 화해하고 공존하고 통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공산권과 수교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대외정책, 對北정책의 기조 변화를 국내외에 선언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었습니다.
  
  공산권은 우리가 대결주의나 반공 일변도의 정책을 취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북한의 맹방인 소련이나 중국이나 동구를 통해 북한에 간접적으로 노크하는 게 민족문제에 접근하는 현실적인 방식이 아닐까 해서 7·7 선언을 하게 된 것입니다. 또 실질적인 수확도 거뒀어요. 북방외교에도 이용했구요. 물론 7·7선언을 통해 對北 경계심이 이완되는 것 등은 감안했으나 우리의 자유민주체제에 대한 확신이 있었고 우리가 힘의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북한 핵문제가 심각하다는 이야기는 없었습니까.
  
  『우리가 가진 정보에는 북한이 핵에 접근했다는 내용은 없었습니다. 우리가 일방적으로 핵재처리 시설포기를 선언한 것은 잘못이에요. 너무 일찍 카드를 던져버린 것 아닌가요. 金泳三 정부는 이념보다 민족이 우월하다며 李仁模 노인을 석방했다가 국민 반발이 일어나니까 강경론으로 가는 등 우왕좌왕했어요. 결국 경수로 문제도 돈은 우리가 내고 생색은 미국이 내고 남북관계는 최악의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우리 정부가 남북관계에 어떻게 접근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화해와 민족의 통합을 위한 조용한 정책이 필요합니다. 정권홍보적인 깜짝쇼는 곤란하지요. 북핵문제와 관련해서 당시 우리는 북한이 NPT체제하에서 핵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원칙론만 고수했으면 됐을 것입니다. 결국 미국이나 일본이 더 조급하지 우리가 조급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어요. 그런데 우리가 나서 제재를 해야 한다고 나섰다가 美, 日은 빠져버리고 우리에게 부담만 남았습니다.
  
  남북문제와 관련해서 통치자는 예단을 해야하는데 YS정권은 통찰력이나 예단력이 전혀 없어요. 그때 국민인기에 영합하는 깜짝쇼를 하면서 허세를 부려 북한이나 미국을 불쾌하게 해 틀어진 상태입니다. 지금이라도 교류협력을 통해 서서히 통일로 나간다는 원칙을 정해야 합니다. 막후 고위급 비밀채널을 복원하는 게 중요한데 아마 어려울 거에요. 85년부터 6년간 있던 것을 하루아침에 중단했으니 말입니다』
  
  ―對北밀사 역할을 5∼6년간 하면서 또 한편으로 북한을 등 뒤에서 치는 북방외교도 담당했는데 그 역할의 양립이 가능했나요.
  
  고위급 비밀 막후창구가 필요
  
  『그래서 7·7선언이 필요했습니다. 북한이 우리의 우방인 美·日과 수교하는 것을 지원하겠다고 했으니 우리가 사회주의 국가와 수교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모순되지 않았지요』
  
  ―朴 前 의원은 89년 평양축전 개막식 때 북한을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月刊朝鮮에 기고한 적이 있는 이형래(李炯來)씨가 북한의 대남공작을 하는 사람과 만났더니 「朴哲彦씨는 판문점을 통해 들어갔기 때문에 미국 측에도 체크돼 밀사로 볼 수 없다」면서 金復東씨를 북경을 통해 모셔와 밀사로 활용하자는 이야기가 오고 갔답니다. 어떻게 생각하나요.
  
  『만화 같은 이야깁니다. 박경윤씨 측에서 金正日 측근 운운하며 접촉하자는 연락이 왔으나 공식적인 창구를 통해서 대화를 하자는 입장이라 거절했어요. 나중에 그쪽에서 상당히 화를 내더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웃고 말았습니다』
  
  ―북한은 우리 정부를 배제하고 기업만 상대하겠다며 나진-선봉에 우리 기업대표를 유치하고 있는데 정부 방침은 투자를 결정할 때는 정부허가를 받도록 해놓았습니다. 북한은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모양인데 정부관리하에 기업이 북한과 접촉해야 한다는 기본 입장에는 동의합니까.
  
  『가장 큰 문제는 남북한 수뇌부가 서로 불신하는 데 있습니다. 특히 북한의 수뇌부가 YS 정권을 불신하고 있어요. 공존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흡수통일이라든지 북한의 인권문제를 제기한다든지 金日成의 사망과 관련해 과거를 들추어내 공격한다든지 자극했어요. 북한 당국자는 YS정권이 북한을 붕괴시키려는 정권이 아닌가 하는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북한은 盧정권이 자기를 붕괴시키기 위해 교류하자는 것은 아니고 공존에 대한 어느 정도의 신뢰는 있었습니다.
  
  지금은 공존에 대한 신뢰가 없어요. 비밀 막후창구에서 일관성 있는 정책을 통해 충분한 신뢰를 쌓는 것이 시급합니다. 기업도 정부의 기본노선이나 방침을 잘 이해하고 자유민주주의 테두리를 잘 지켜가는 가운데 사업을 벌여야 합니다. 당국간에 깊은 신뢰만 있으면 민간단체, 언론인, 체육인 등의 교류는 가능합니다. 지금은 신뢰가 없는 데에 근본문제가 있습니다. 고위급 비밀채널을 마련해 자주 진실하게 대화를 나눠야 합니다. 평화공존 상태로 갔다가 평화통일로 연결시키는 단계를 밟아야 합니다』
  
  ―朴 前 의원 이후 90년 11월에 徐東權 당시 안기부장이 訪北해 金日成과 金正日을 만나고, 92년 4월에는 북에서 윤기복(尹基福)이 내려와 盧대통령을 만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도 남북 비밀채널에 해당됩니까.
  
  『그 사실을 지금 확인해 드릴 입장은 아닙니다. 85년부터 통치권자의 전권을 위임받은 대표간에 핫라인이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남북대표가 자주 며칠간씩 만나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신뢰가 형성됐어요. 하루아침에 사람이 바뀌면 핫라인은 있지만 일회성으로 그치고 진전이 없습니다』
  
  前職총리 등 민간인 북한에 보냈어야
  
  ―金日成 사후 정부의 대처에 대해 두 가지 측면에서의 비판이 있었습니다. 보수쪽에서는 金日成 사망의 의미에 대한 정부의 엄정한 해석이나 설명이 있어야 하는데 없다는 것이고 야당을 비롯한 일각에서는 조문을 해야 한다며 이념논쟁까지 벌어졌습니다. 金日成이 죽으면 북한이 혼란스러울 것으로 생각했는데 잠시 남한이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정부가 너무 서툴렀다고 생각합니다. 중대한 사건이 일어나면 國利民福에 이로운 방향을 빨리 판단해 구체적 방법을 마련했어야 하는데 YS정권은 여론의 눈치를 보느라 바빴어요. 정부대표가 조문할 입장은 아니지만 남북이 대결이 아니라 화해-통합으로 가야 하는 상황이라면 전직총리등 민간인 고위급 입사를 보내 정상회담을 당사자가 죽었으니 안됐다는 입장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고 봅니다. 내 생각이 보수측에서 보면 너무 유연한 입장이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당시 압도적인 국민 여론은 「잘 죽었다」는 반응이었기 때문에 정부측에서 양쪽을 다 어루만지는 조치를 취하기는 어렵지 않았나요.
  
  『어렵지만 했어야 합니다. 金日成에 대한 평가는 한국에서 이미 끝난 것이 아닌가요. 정부가 보다 신중한 접근을 했으면 낫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정부나 朴의원의 對北정책에는 가슴에서 우러나는 북한주민들에 대한 민족애, 동정심이 없는 게 아닌가요. 도덕성이 빠진 對北정책이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드는데요.
  
  『북한 인민을 하루 빨리 처참한 상황에서 해방시키려면 북한을 변화하도록 만드는 게 해결책입니다. 북한의 인권문제를 제기하고 金日成을 욕해 남북관계가 냉각되고 전쟁준비에 몰두하면 북한 인민들은 더 가혹하고 어려운 처지에 빠지게 됩니다. 하루라도 빨리 북한을 개방과 변화로 유도하면 북한 전체의 자유와 인권문제는 자연히 해결된다고 보기 때문에 7·7선언을 하고 북방정책을 하고 남북교류 정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인권문제 제기는 필요합니다. 하지만 정부 당국자가 그런 문제를 제기해 남북관계에 긴장이 고조되면 북한인민이 더 힘들어집니다. 안보는 튼튼히 완벽하게 해야 하지만 對北정책은 유연하게 접근해야 합니다』
  
  ―정치범 수용소 문제를 국제여론에 호소하는 것이 북한 인권을 향상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북한이 개방사회로 변화하면 인권문제가 개선될 겁니다. 북한에 관광객이 들어가고 외국투자를 받아들여 외부에 노출되면 문제해결의 실마리가 풀립니다. 북한도 자기체체에 어느정도 안심해 먹고 사는 것이 해결되면 주민들에 대해서도 부드럽고 관대해질 수 있을 겁니다』
  
  YS의 現代史 부정은 곤란
  
  ―강령론, 유화론이 두 수레바퀴처럼 돌아가면 오히려 對北정책을 펴나가는 데 유리한 점이 많은데 한국에서는 극우주의자-좌익이라고 서로 비난하며 불신이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정부는 유화정책을 취하고 언론이나 인권단체는 문제를 제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정부쪽에서는 청사진이나 중장기 비전도 없이 갈팡질팡하고 있어요. 정부쪽에서 소신이 없다 보니 언론이나 민간단체와 깊은 대화나 신뢰성이 있는 관계가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인모 노인 송환은 어떻게 보시나요.
  
  『인도적 입장에서는 이해하지만 우리도 돌려받을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비밀협상에서 이인모 노인을 돌려보낼테니 누구를 돌려달라고 요구했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金泳三정부가 추진하는 개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YS 정권이 들어선 후 개혁의 깃발을 들고 나와 지난 현대사를 부정하고 죄인시하고 어떤 때는 「과거 5천년이 모두 썩고 부패했다」는 발언을 보고 경악하고 한편으로 분노했습니다. 어떻게 짧은 순간을 맡은 대통령이 우리의 긴 역사를 한 마디로 매도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언제나 현상에 만족할 수 없고 개혁을 해나가야 한다는 측면에서 金泳三 정권이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개혁을 하려고 노력하는 기본방향은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구체적 내용이나 실천의 질은 수준 이하에요. 바람몰이식의 구호정치, 깜짝쇼정치는 문제입니다. 정파적 목적에 의한 개혁, 일시적 대중적 인기에 영합하는 개혁이 아닌가요. 문민정부라고 하지만 권위주의적인 통치행태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오히려 신권위주의적인 1인통치가 강화되고 있습니다. 여당은 최소한의 민주적 모습도 못갖추고 있어요. 특정개인의 사당, 붕당의 성격마저 띠고 있다는 덤이 걱정됩니다』
  
  世界化는 강대국의 패권논리
  
  朴 前 의원은 또 세계화에 대해 각계지도층이 문제제기를 안 하는 것이 불만이라고 말했다. 국제경쟁력을 提高해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점에서는 세계화를 해야 하지만 세계화는 「강대국의 패권주의 이념」이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로마제국이나 영국, 미국 등 세계를 지배하던 나라들이 자국의 질서를 강요하기 위해 주장하는 논리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지적이다.
  
  『우리가 지금 법과 제도, 교육을 세계수준으로 바꾼다고 금방 세계 1등국이 됩니까. 뱁세가 황새 흉내를 내다가 가랑이가 찢어지는 격이지요. 우리 현대사를 보년 건국, 근대화, 민주화, 복지통일화를 이룬 뒤에 세계화 이전에 복지통일을 해야지요. 그 다음에 세계 1등국 기준에 맞춰나가야 합니다. 세계화는 세계 시민이 같은 제도, 규범 아래 살아간다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모든 부문에 세계화할 형편이 되어 있습니까.
  
  지금 정부는 너무 거만해서 마치 자신들이 하늘에서 백마 타고 내려온 천사인 것처럼 다른 세력, 과거를 비판하고 쌍칼을 휘둘렀어요. 그러나 개혁이란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합니다. 국민의 의식을 전환하려면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해야죠. 金泳三 정부는 국민이 선택한 민선 정부이므로 역사와 국민을 두려워하며 겸허하게 국민이 대화합하는 가운데 복지통일의 시대에 접근해가는 내용있는 정치를 해주기를 바랍니다』
  
  ―「文民」이란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매우 생소하고 또 거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정권이 태생의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혁명한 것도 아니고 야당이 정권을 잡은 것도 아니지 않아요. 자신들이 군사정권이라고 부르는 당과 통합해 그 당원들의 힘을 빌려 대통령에 당선된 태생적인 한계가 있는데 왜 모든 과거와 단절하려는 위선적인 자세를 보입니까. 21세기를 향한 화합의 정치를 펴야지 왜 자기들만 천사인 양 하기 위해 「文民」을 강조합니까. 초기에 정권의 정통성을 고양시키기 위해 언론 플레이하는 건 이해하지만 이제 2년이 지났으니 차별화 정책 쓰지 말고 진실한 정책을 펴나가기를 바랍니다』
  
  ―金泳三 정부의 피크 타임은 지났다고 보십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金泳三 대통령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언제였습니까.
  
  『92년 9월 25일이었습니다. 그때 먼저 盧대통령이 민자당을 탈당해 정국이 시끄러운 상황이었습니다. 하이야트 호텔에선가 만남이 이루어졌는데 YS가 「당에 남아 나를 도와달라」고 말하더군요. 당시 저는 민자당 탈당을 결심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지막으로 YS에게 내각제 이야기를 꺼냈어요. 「나의 소신은 아직도 변함없다. 내각제를 위해 3당 합당을 했는데 그 기초가 무너져 버렸으니 내가 어떻게 민자당에 남아 있겠는가. 지금이라도 내각제를 받는다면 당에 남겠다」 그리고는 민자당을 탈당했습니다. 그때 심정은 삭풍이 휘몰아치는 겨울들판으로 외투도 없이 알몸으로 내던져지는 심정이었습니다』
  
  ―정치가로서 金대통령의 원동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언론과의 친화력, 현실주의적 입장, 오랜 정치생활을 통해 얻은 感, 돌파력이 무기라고 생각합니다. 盧대통령처럼 신중한 분과 주위 인사들을 개인별로 돌파해 설득한 것은 승리자로서의 자질이 있다고 봅니다. 나는 승리한 축제의 제물로 바쳐진 셈인데, 승리자의 집을 지은 주역이 제물로 바쳐진 악연을 가지게 됐습니다』
  
  ―장시간 재미있게 말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출소 후 처음하는 인터뷰인데 저에겐 매우 중요합니다. 잘 정리해주세요』
출처 : 월간조선
[ 2003-07-12, 23:5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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