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哲彦, 침묵 깨다 - 金泳三 권력은 피크 지났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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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집권과정에서 배신, 3당 합당의 이념기초 파괴
  
  『철창 우리에 갇혀 개구멍으로 넣어주는 음식으로 연명하면서 처음엔 통한과 분노가 솟구치더군요. 불면으로 뒤척이면서 숱한 밤과 새벽을 지샌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곧바로 마음정리를 했습니다. 이 땅에서 정치보복은 내가 마지막이 되어야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좀더 깊고 넓은 가슴,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겠다고 정리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울화병으로 쓰러지고, 병동으로 옮겼지만 저는 1년 4개월 감옥 생활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출소하는 날 그동안 가졌던 통한과 분노는 모두 감옥에 묻고 나왔습니다. 이제는 따뜻한 가슴으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봉사하는 생활로 나가겠다는 심정입니다. 그래서 YS나 민주계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국민들이 선택한 대통령의 임기가 3년이나 남았으니 좀더 겸허하고 신중하게 중지(衆智)를 모아서 비전 있는 정치를 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출소하고 난 후 어떤 자리에서 『언론에 공개된 내각제 합의각서 이의에 또 다른 각서가 있다』고 하셨는데, 그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때 모임(94년 11월8일 全言會:전주고 출신 언론인 모임)에서 어느 기자가 「5월 전당대회 전에 작성한 각서 말고 3당통합을 발표한 90년 1월22일 직전에 내각제에 합의한 각서가 있다는 데 사실이냐」라고 묻길래 다 알고 묻는 것 같아서 시인도 부인도 않고 넘어 갔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만, 3당 통합 발표 이전에 세 분 정치지도자가 굳은 약속이 있었던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그것도 14대 이전까지 내각제 개헌을 완료한다는 시한이 篇珉?다짐이었습니다. 언론에 공개된 각서는 전당대회 직전에 작성된 것입니다』
  
  金泳三대표와의 비밀회동 『내각제 포기하면 당신 키워주겠다』
  
  ―그렇다면 합당 발표 당시에 각서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전당대회 이전에 또 합의각서가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합당 이후 YS가 처음에는 「내각제 합의를 비밀로 하고 발포를 연기하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서둘러야 한다고 하니까 개인적으로 만나자는 전갈이 왔습니다. 그 때가 90년 2월 하순이었어요. 그날 내각제 문제가 심도 있게 거론되었습니다. YS는 「야당도 내각제를 반대하고 국민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인데 朴장관은 왜 자꾸 내각제를 고집하는가. 내각제는 집어치우고 이번에 화끈하게 나를 밀어다오. 대통령 5년 밖에 더 하는가. 그 후엔 민주계에 사람도 없고 盧대통령도 朴장관을 걱정하니까 서로 합심해서 키워줄 수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하길래 깜짝 놀랐습니다. 이러다가 큰일 나겠다 싶어서 「金총재님(당시엔 정식으로 민자당 총재가 되기 전인데도 총재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나라와 국민을 위해 내각제를 하기로 합의하고 3당통합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내각제를 안하겠다니 말이나 됩니까. 절대로 내각제를 해야 합니다. 내각제 약속만 지키시면 제가 왜 金총재를 보좌하지 않겠습니까. 제 문제는 나이도 젊고 하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렇게 말하자 YS는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하더군요. 그날부터 YS와의 사이엔 깊은 앙금이 생겼습니다. 그 전까지 저는 YS에게 아주 좋은 인상을 가졌었습니다. 그 분이 차도 손수 따라 주고, 겸손해서 사람을 기분 좋게 하지 않습니까. 3당 통합의 밀담이 오가는 1년 몇 개월간 의기투합해서 역사적인 통합선언까지 했는데 그만 내각제 때문에 사이가 벌어진 겁니다. 그후 3월에 소련에 갈 때에는 이미 상당한 앙금이 생긴 후입니다. 소련에서도 수교를 위한 비밀협상이 진행중이었는데 YS측에서 너무 인기에 영합하고, 진실되지 않은 무책임한 내용으로 홍보 플레見?전개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그렇게 하면 안되지 않느냐」고 말한 것이 언론에 확대되어 마치 그분과 큰 불화와 갈등이 있는 것처럼 비쳐지게 된 겁니다』
  
  YS의 약속 위반, 언론이 비판하지 않은 것은 과오
  
  ―그때 사정을 들어보니 이런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정치 지도자 몇 분이 내각제 각서를 썼다가 어느 한편이 일방적으로 파기한 사실을 법률가적 시각으로 보면 金泳三 대통령쪽에서 약속 위반을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당시 언론과 여론은 「민간정부를 탄생시쿄야 한다」는 역사적 염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金대통령의 약속 위반에 대한 비난을 만이 하진 않았습니다. 이 문제는 법률가적인 잣대로 판단하기보다는 역사의 큰 흐름이 더 중요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5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또다른 역사의 흐름이 내각제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90년에 죽었던 내각제의 이상이나 꿈을 다시 살리는 역할을 朴 前 읜원께서 맡고 계신 셈인데요. 문제는 내각제를 가지고 5년 전 「민간정부 출범」이라는 역사적 소망과 맞먹는 정도의 국민적 여론을 만들어내느냐에 좌우될 것으로 봅니다.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는 문제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찬성입니다. 그러나 당시 언론이 YS의 약속 위반을 문제삼지 않고 넘어간 점에 대해서는 대단히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내각제로 갔어도 민간정부나 金泳三 정권이 출범할 수 있었거든요. 저는 지금도 5년 전 YS가 내갹제를 파기한 것이 오늘날 이 나라를 갈등과 대결의 정치로 몰아넣고, 국민에게 정치불신을 야기하고, 권위주의적 통치행태가 지속되는 원인이라고 봅니다.
  
  당시 세 지도자가 굳게 약속한 믿음의 전제는 내각제였습니다. YS가 이 약속을 지킬 의도도 없이 그들 표현대로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 호랑이 굴에 들어간 것이지 호랑이를 잘 키우기 위해서 들어간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처음부터 사기가 아니었느냐 이겁니다. 이것은 일방이 타방을 기만한 결과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도덕적으로나 윤리성 측면에서 있을 수 없는 얘기라고 봅니다』
  
  朴 前 의원은 당시 내각제 개헌을 위해 DJ쪽과도 긴밀한 대화가 있었음을 시인했다. 평민당쪽에서 내각제에 결사반대하지 않도록 지방자치제를 대폭 수용함으로써 명분을 세워준다는 의견교환이 있었다는 것이다. 내각제는 대통령, 수상 두 자리가 있고 권력분점 시스팀이기 때문에 『YS, DJ, JP 모두에게 이 나라를 끌어가는 기회가 돌아가는 가운데 점진적인 세대교체도 가능했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민주계는 순수한 의도에서 나온 내각제 주장이 마치 「朴哲彦의 대권욕 때문에 YS를 고사시키려는 공작 정치」라고 대대적인 언론 플레이를 펼친 겁니다. 이런 내면적 배경을 언론이 자세히 몰랐지 않습니까. 언론에게 그릇된 정보를 주어 가지고 약용한 결과 오늘날과 같은 갈등과 대결의 심화를 가져온 겁니다』
  
  내각제 실패, 대통령 우유부단 때문
  
  ―당시 언론이 親YS 편에 서서 내각제를 바라보았다고 해도, 국면의 주도권을 쥔 분은 盧泰愚 대통령이었습니다. 결국 盧대통령의 우유부단 때문에 내각제에 실패했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인 진단 아닙니까.
  
  『저도 趙부장의 견해에 동의합니다. 당시 盧대통령께서 구구적 결단으로 내각제를 위해 3당통합을 했다면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해서 그것이 실천되도록 해야 할 역사적 책임이 있었습니다. 결국 YS와 민주계의 위약(違約), 거기에 편승해서 盧대통령 주변의 민정계에 대한 설득과 격파에 하 사람 하 사람씩 YS계로 떨어져 나갔습니다. 盧대통령도 90년 3∼4월경에 내각제 문제로 제가 YS와 갈등을 일으키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각제는 추진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YS쪽으로 경사되기 시작한 盧대통령 주변 인사들, 특히 K 모 의원은 「YS를 설득해 90년 연말까지는 내각제를 받도록 만들겠다」고 장담했습니다.
  
  그 대신 朴哲彦이가 내각제 문제로 조급하게 갈등을 일으키지 않도록 제지해야 한다고 설득해서 결국 대통령이 그 말을 믿고 늦춘 겁니다. 90년 말까지 성과가 없자 이번엔 「91년 말까지는 수단과 방법을 안가리고 성사시키겠다」고 대통령을 회유시켰습니다. 盧대통령 성격이 우유부단한 탓도 있지만 이런 사람들에게 기만당해서 내각제는 숨도 못쉬고 물 건너간 겁니다. 원초적인 違約의 뿌리는 서로간에 약속을 하고도 「약속 안했다, 못하겠다」고 우긴 측에 있지만 리더십의 관점에서 본다면 趙부장의 의견이 맞다고 봅니다』
  
  ―TK 출신의 K 모 의원이란 金潤煥의원을 자칭하시는 것 같은데 그분의 역할은 지금까지도 朴 前 의원과 대치되고 있습니다. 대구·경북지역에서 그를 보는 정서는 어떻다고 보십니까. 『개인을 거명하기는 곤란합니다만, 그분도 나름대로의 인생을 살아가는 철학이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 분이 어떤 소신이 있는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金의원의 소신은 당시 역사의 대세가 『다음엔 민간대통령이 나와야지 않겠느냐, 金大中씨에게 대통령을 맡길 수 업다면 YS밖에 더 있느냐』는 의견이었던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盧대통령에게 약속한 내용과 다릅니다. 당시 盧대통령에게는 「대통령이 내각제 한다는데 어떻게 YS가 안하겠느냐. 조급하게 서둘지 말자. 반드시 내각제를 받도록 만들겠다」고 수차례 했던 발언과 배치되는 내용입니다』
  
  말과 행동 일치하는 정치인 드물어
  
  ―朴 前 의원의 정치행로에서 가장 중요한 시점은 90년 4월 정무장관에서의 퇴임이라고 보는데요. 그때 金泳三 대표와의 갈등이 커지면서 金대표가 朴장관의 퇴임을 요구했습니다. 그때 盧대통령이 朴의원을 정무1장관에서 물러나게 한 것은 金鍾泌씨가 YS를 지지하고 나선 것도 하나의 해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90년 4월 정무1장관에서의 퇴임이 6共의 권력 핵심에서 소외되는 중대한 갈림길이었습니다. 그 원인중의 하나로 JP가 당시 YS쪽 입장에 섰기 때문이란 해석은 옳은 겁니다. JP는 앞장서서 내각제를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JP에게 인간적으로 서운한 감정을 가졌던 것도 사실입니다. 개인적으로 만나서 얘기할 때는 「내각제를 해야 하는데 YS가 반대하니 큰일이다」라며 분개하기도 했지만 대의적인 활동이나 당내에서 공론화할 때는 젠 입장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요즘 JP의 신당에 대해 명확한 입장표명을 않는 것도 이런 데 원인이 있습니다. 말이 중요한 게 아니라 실천이 중요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실천한다는 의지가 있어야죠』
  
  朴 前 의원은 JP가 YS정권의 실체를 인식하고 야당의 길을 걷는데 대해 성공을 기대하면서도 선뜻 동참을 못하는 이유에 대해 『한국적 풍토에서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정치가를 찾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병풍 역할을 하고 후생을 키우겠다, 내각제를 하겠다. 새로운 세력을 결집해서 범국민적 정당으로 출범하겠다는 말은 풍성하게 많지만 믿음이 갈만한 쪽으로 전개되지 않기 때문에 신당에 대해 판단을 유보하는 겁니다』
  
  盧대통령에 의해 토사구팽?
  
  ―정무1장관 퇴임은 권력핵심에서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고, 내각제 추진의 키 플레이어 역할의 상실이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또 金泳三씨의 대권가도 질주에 장애물이 없어진 상황이 되었는데 왜 盧대통령이 정무1장관에서 물러나게 했다고 보십니까.
  
  『솔직하게 말하면 토사구팽당한 셈이죠. 盧대통령은 5共시절 3許씨들이 득세하는 가운데 어렵고 힘들게 7년 반을 지내다 보니 참모다운 참모가 없었습니다. 모두가 全斗煥 대통령의 눈치를 봤기 때문이죠. 그 분이 너무 외롭고 힘들었기 때문에 제가 제한된 식견과 정보를 가지고 보좌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6·29 선언을 제가 보좌했고, 大選기간에는 사조직을 통해 선거운동을 돕게 된 겁니다.
  
  盧대통령은 大選기간 중 민정당이 인기가 없어서 대단히 불안해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직선제로 성공해서 盧대통령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집념이 있었기 때문에 大選기간 내내 분초를 다투며 전국을 누비며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에 당선되자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취임준비위원회의 몇 사람을 중심으로, 좋게 얘기하면 경쟁이고, 나쁘게 얘기하면 그 팀 멤버들이 권력을 독점하려는 자세로 나왔습니다. 盧대통령 입장에선 저를 믿는 상황이었죠.
  
  그때만 해도 저는 지하에 묻혀 있는 사람이었는데 대통령이 청와대 요직에 불러 쓰려고 하자 취임준비위 사람들이 집요하게 반대하면서 언론 플레이를 펼쳤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검사로서 청와대와 안기부 2특별보좌관으로 파견되어 근무하는 상황이었으니까 盧대통령 당선 후엔 검찰로 돌아가겠다고 했습니다. 盧대통령은 저를 제일 믿었고, 또 제가 남북 비밀접촉이나 북방정책 실무책임자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이 일을 맡길 수 없다는 입장이었어요. 6共 출범이 88년 2월25일이었고, 다른 청와대 수석들은 그날자로 발령을 받았는데 저는 검찰 사표를 내고 3월6일자로 청와대 정책보좌관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초기에 취임준비위원회에서는 나를 제거하기 위해 끈질기게 경계하고 견제해서 盧대통령이 상당히 고심했습니다. 그때 盧대통령이 타협을 한 것이 정책보좌관제를 만들어서 「남북비밀접촉과 북방외교 문제를 朴哲彦이에게 맡기자」는 것이었습니다. 아울러 전국구 국회의원도 겸하게 됐습니다. 그 이유는 공산체제에서는 행정직 사람들이 최고인민회의 직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비밀스런 접촉을 하는 과정에서 직위가 필요했기 때문에 겸직하게 된 겁니다.
  
  곧 이어 4·26 총선 분위기로 돌입했습니다. 총선을 위해서 대책위원회가 만들어져 일일회의를 했습니다. 고위 선거대책회의, 차관급 회의 등을 열어 선거전략을 숙의하고 선거자금을 배분하는데 사실 저는 선거대책위의 정식 멤버도 아니었고, 옵서버로라도 대책위에 참석한 일이 없습니다. 다만 의원 후보 공천과정에서 大選 때 고생한 사람을 전국구에 7∼8명, 지역구 후보로 7∼8명 추천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언론의 「내가 공천을 주물렀다, 권익현 권정달씨를 탈락시켰다」는 내용도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권익현 권정달씨와 저와는 이해관계가 상충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사입니다. 軍 출신은 盧대통령이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제가 언급할 입장도 못되었습니다.
  
  그런데 선거일 며칠전에 전국을 둘러보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어요. 그래서 투표일 2∼3일 전에 대통령을 찾아갔습니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찮습니다. 안기부나 경찰보고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낙관하지 마십시오. 만약에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와도 마음의 준비를 해둬야 합니다」 라고 盧泰愚대통령에게 이야기했더니 그때서야 盧대통령이 『막판이지만 월계수라도 뛰게 하라』고 했어요. 그전에는 월계수 멤버 등 私조직이 선거에 참여하면 해가 된다고 해서 우리는 전부 「열중 쉬엇」하고 있었습니다.
  
  불과 이틀을 앞두고 내가 전국을 돌면서 「막판인데 상황이 어려운 것 같다」며 바짝 뛰라고 했으나 대세는 이미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선거패배를 보고 盧대통령은 무척 당황해 했습니다. 그때부터 밤을 세워 머리를 짜내온건―중도세력을 결집하고 다른 쪽으로 급진―진보적인 그룹을 형성해 혁신정당을 만드는, 「보수」 對 「혁신」구도로의 정계개편을 건의했더니 盧대통령은 「되지도 않을 일 집어치우라」고 말했어요. 나는 「아닙니다. 위기는 기회가 아닙니까. 직선대통령답게 당당하게 보혁구도로의 재편을 해나가면 문제가 해결될 겁니다」라며 안심을 시켰어요.
  
  그후 3당통합까지 청문회니 데모니 해서 盧대통령이 대단히 피곤하고 불안정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나는 막후에서 특히 YS와 통합을 위한 노력을 계속 진행했습니다. 결국 盧대통령은 3당합당이 성사되고 북방정책도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게 되자 안정을 찾게 됐어요. 그런데 3당통합 직후 모든 중요한 일을 朴장관이 결정한다는 시각이 만자당 내에서도 생겨났습니다.
  
  盧대통령은 3분의 2 의석을 가지고 여유를 갖고 싶은데 내 입장에서는 내각제 구도의 실현을 위해 YS에게 내각제에 대한 실천의지를 확인받기 위해 다그쳤습니다. YS는 반발하면서 盧대통령 주변인사에 대한 개별적인 설득에 나섰어요. 대통령 주변 인사들도 대통령에게 「朴보좌관이 모든 일을 다 결정한다」고 이야기했어요. 盧대통령은 내가 반드시 옆에 있어야 하는 이유가 사라졌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 대목에서 朴 前의원은 자신이 盧대통령에게 「兎死拘烹」당했다며 쓴 웃음을 지었다. 중간평가나 5공청산도 해결되고 3당통합도 성취해 盧대통령이 자신을 부담스럽게 느껴 물러나게 했으리라는 설명이다.
  
  ―YS가 결국 「약속위반」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된 것은 강한 대중적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고 朴 前 의원은 盧대통령이라는 태양에서 나오는 힘밖에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요.
  
  『행정구역개편 논의 이미 늦었다』
  
  『결국 나는 패배자이자 피해자입니다. 대통령이 되도록 그 틀을 만들어주고 그 칼에 엄청남 핍박을 당하고 옥고까지 치러 우스꽝스런 입장에 처하게 됐어요. 나는 80년 이후 국가운영에 관여하면서부터 일에 파묻혀 혼자 뛰었습니다. 언론에 나를 알린다든지 사람들을 만나 설득하는 데 소홀했어요. 반면 YS는 당장 무슨 일을 해나가는 것보다 언론과 국민을 접하고 대화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결국 내가 언론이나 국민의 공감을 받는 데 YS보다 현격하게 미흡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인터뷰를 시작한 지 2시간20분이 넘어 근처식당에 주문한 순두부-오뎅백반으로 사무실에서 점심을 같이 했다. 식사 도중에도 인터뷰는 계속 진행됐다)
  
  ―정부에서 행정개편, 예컨대 道를 폐지하고 市-郡을 하나의 경제단위롤 묶는 대규모 개편을 명분으로 내걸어 선거를 연기하자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거론되는 것 같은데….
  
  『지자제 선거를 앞두고 복잡하고 이해가 상반되는 행정구역개편 문제를 거론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당혹스럽습니다. 지금은 때가 늦었어요. 이번 선거는 치르고 다음으로 넘길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거론하면 그 동기를 의심받게 될 것입니다』
  
  ―단체장 직선 후 행정개편을 거론하기는 더 어렵지 않습니까.
  
  『사실 그렇지요. 이 문제는 집권 초기에 본격적으로 다뤘어야 합니다. YS 정권의 가장 큰 문제는 깜짝쇼를 하듯이 갑자기 무엇을 꺼내 사람을 놀라게 하고, 충분히 다듬어지지 않는 정책집행을 한다는 겁니다. 원래 취지는 좋으나 많은 부작용을 초래하는 것인데 이 문제 역시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어요』
  
  ―道를 개편하는 행정개혁을 위해 선거를 연기하겠다며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습니까.
  
  『국민투표를 할 수 있는 사항이 한정돼 있는데 이 사안은 거기에 포함되는 것 같지 않습니다』
  
  ―6월27일 선거를 한다고 법률로 못박았기 때문에 법률을 개정하지 않고는 불가능하지 않은가요.
  
  『그렇습니다』
  
  ―지자제 선거 결과가 金泳三대통령의 권력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십니까.
  
  『지방자치가 실시되면 대통령의 권력이 약화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자치체의 재원이 취약해 중앙정부가 재정교부금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행정명령이나 감사를 통해 통제를 가할 수도 있습니다. 교육자치를 위한 재정도 독립되지 않아 명실상부한 지방자치체를 하기 위한 제도적인 틀은 미흡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일단 하기로 했으니 해야지요』
  
  ―서울시장 선거는 어느 쪽이 유리하다고 보십니까.
  
  『야당이 난립하면 여당후보가 어부지리를 얻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일단은 야당후보가 유리하다고 봅니다』
  
  ―金鍾泌씨의 신당이 충청도 민심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 같은데 서울시장 선거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하십니까.
  
  『JP에 대한 동정론은 YS쪽에서 5년간 써먹고 용도 폐기됐다고 버리는 비인간적인 방식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 것이 많았으나 이젠 조금씩 가라앉는 분위기입니다. 선거까지 4개월이 남았는데 그런 분위기는 식지 않을까요. JP 고정표는 反民自쪽에 가겠지만 여당이 그것 때문에 크게 불리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TK의 本流는 누구인가
  
  ―서울의 인구구조를 보면 충청도 사람이 꽤 많습니다. 서울시장 선거에 호남후보가 나왔을 때 호남 對 비호남 구도로 가면 여권에 승산이 있다고 보는데 충청쪽에서 조금만 움직이면 여권에 상당히 불리한 입장이 아닌가요.
  
  『민주당후보, 朴燦鍾씨, JP 신당후보가 각각 출마해 표가 나위면 여당이 유리할 것으로 봅니다. 野측이 전체는 연대가 안되더라도 어느 일부와 연대하면 野측이 유리할 거예요』
  
  ―서울도 그런 연대가 필요한 지역으로 보십니까.
  
  『연대는 필요하지만 어려울 것 같습니다』
  
  ―대구·경북 여론으로 미루어 대구시장이나 경북지사는 민자당에서 차지하기 어렵다고 보시나요.
  
  『여당후보에 대한 지지는 30%를 넘어서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非民自후보가 난립해 표가 나위면 여당후보에게 기회가 있을 것으로 봅니다』
  
  ―金潤煥 의원이 어떤 인터뷰에서 자신이 TK 지역의 本流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朴 前 의원도 그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앞으로 누가 TK의 정통인가 하는 쟁점이 생길 것 같은데요.
  
  『그것은 지역주민들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더구나 金潤煥 의원이 TK정서를 대변한다고 말하면 소도 웃을 겁니다. TK정서는 이 정권이 TK의 과거를 모욕한데 대한 분개에서 나왔습니다. YS 정권에 표를 몰아 줬으나 정권의 무능함에 대한 민심이 반을 지난 대구 보궐선거에서도 나타난 것이에요. 이것은 민자당 의원들도 걱정하고 있는 상황인데 현 정권에 대해 돌아서는 마음을 여당의원이 대변한다는 건 말이 안되지요. 지금은 TK세력이 어느쪽으로 돌아설 것인지 모색하고 있는 과정입니다. 다만 내가 90년 4월 정무장관 사퇴후 5년간 일관되게 입장을 지켜왔고 옥고까지 치러 지역에서 내 동향이나 언행을 주목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옥중경험이 장기적으로 정치경력에 도움이 된다고 보십니까.
  
  『잘 견디고 나왔지만 사람을 쥐틀 같은 곳에 넣어두고 짐승같은 처우를 하는 것을 보고 감옥은 여러 번 올 데는 못된다고 생각했어요. 도움이 될지 안될지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朴 前 의원의 재판건과 관련해서 질문하겠습니다. 검찰수사 과정에서는 청와대의 영향을 받았을지 모르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판결과정에서는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도 법조인이지만 재판부 배당이나 재판 진행 과정 등이 통상적인 과정과 너무 달랐습니다. 대법원 상고심에서 사건배당을 대법관 13명중 유일한 검사 출신 대법관이 맡았습니다. 그때 변호인들은 대법원에서 판결을 뒤집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했어요. 원래는 은행알을 굴려 결정하게돼 있지만 검찰과 가장 잘 통하는 검사 출신 대법관에게 배정돼 결국 판결도 「이유 없으므로 기각한다」며 단 10초만에 끝났어요. 1심 재판부도 원래 합의부였다가 단독으로 넘어갔습니다.
  
  당시 판사가 법정에서 유일한 목격자인 洪여인이 나오지 않으면 유죄를 내릴 수 없고 보석을 결정할 수밖에 없다고 방청객 몇백명 앞에서 이야기했어요. 그 얘기가 나가자 청와대에서 난리가 났다고 해요. 그러나 갑자기 판사가 태도를 바꿔 洪여인 없이 결심하겠다고 해 재판부 기피신청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변호인과 함께 퇴장해 버렸어요. 항소심에서도 원래 李모 부장판사가 맡아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갑자기 법원인사를 통해 재판부 세 명 전원을 교체해 버렸어요. 새 재판부는 오자마자 제대로 심리도 하지 않고 1주일 만에 결심을 해버렸지요』
출처 : 월간조선
[ 2003-07-12, 23:5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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