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을 늦춘 舊공산당 계열이 오늘의 위기 자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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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을 늦춘 舊공산당 계열이 오늘의 위기 자초 - 불가리아 前 총리 필립 디미트로프 의원
  
  <1996년 8월 월간조선>
  
  파산 직전
  
  지난 6월20일 번영을 구가하는 독일의 프랑크푸르트공항을 출발한 루프트한자機가 시골역 같은 불가리아 소피아 공항에 내렸을 때 기자를 맞이한 뉴스는 외환위기였다. 불가리아의 외환보유고가 6억5천8백만 달러인데 1996년중 상환 기일이 도래하는 외채상환액수가 8억 달러, 이 가운데 6억 달러는 7월말까지 도래하게 돼 있었다. 상환자금 부족에 따라 정부가 지불기한 연기를 선언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자 경화 사모으기가 시작돼 對美환율이 4월초의 1달러 對 76레바에서 5월 중순엔 1달러 對 2백 레바까지 하락했다.
  
  일본산업은행이 主간사가 되어 지난 89년에 발행했던 불가리아 미네랄 은행의 사무라이 본드(약1억5천만 달러) ?6월14일에 도래한 5천만 달러에 대해선 불가리아 정부가 『정부와는 관계없는 일이다』고 상환 불가를 선언, 사실상 부도를 내버린 상태였다. IMF와 세계은행은 긴급차관을 대주는 전제조건으로서 문제의 미네랄은행, 제1민간은행 등 2∼5개의 은행과 65개∼1백개의 부실회사를 파산시킬 것을 권고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이 된 불가리아 정부는 부실회사의 정리에 착수하는 한편 수입관세, 부가가치세, 특별소비세 등을 인상하거나 신설하여 수입을 억제하고 재정적자를 보전할 계획을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 舊공산당 세력이 집권하고 있어 과감한 사유화가 되지 않았던 것이 이번 위기의 이유라는 분석이 오가는 속에서 연말에는 대통령 선거가 예정돼 있다. 정치적 불안정이 경제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라는 비관론도 제기되고 있었다.
  
  1인 장기집권의 후유증
  
  불가리아 문자인 키릴 문자에서 러시아語가 만들어졌다는 역사적 배경 때문인지 불가리아는 전통적으로 親러시아정책을 써왔다. 1954년에 당서기장이 된 지프코프는 1989년까지 45년을 장기집권하는 기록을 남겼다. 1인 독재下에서 개혁세력의 대두도 없었고, 공산주의 붕괴 이후에는 잦은 정권교체로 인해 루마니아처럼 정치적 안정도 기할 수 없었다. 이런 정치적 요인은 그대로 더딘 체제 전환으로 나타났다. 사유화비율이 동구에서 가장 낮아 95년 말 현재 44%에 머물고 있다. GNP 성장률은 1991년의 마이너스 27.5%에서 마이너스 13.9%(92년), 마이너스 6.2%(93년), 실업률은 91년의 10.5%에서 93년엔 17.1%까지 올라갔다.
  
  인내심이 강하고 관대하기로 유명한 불가리아인들 중에서도 요사이는 범죄가 늘고 있다고 한다. 불가리아 前총리 필립 디미트로프 의원은 反共민주화운동세력에 기반을 둔 UDF(United Democratie Force=민주세력연합) 소속이다. UDF는 1991년 11월에 군소정당과 손잡고 정권을 잡았는데 이때 디미트로프 의원이 총리가 돼 급진적 경제체제 개편 작업을 주도했다. 그러나 그 후유증으로 물가폭등·실업률 증가ㆉ♀현?등 혼란이 생기자 1992년 10월에 聯政의 파트너인 MRF(Movement for Right and Freedoms=터키 민족당)가 연정중단을 선언, 내각은 국회에서 불신임을 당하고 MRF가 주도하는 새 내각이 성립되었다.
  
  1994년 12월 선거에서는 불가리아 사회당으로 이름을 바꾼 前 공산당세력이 과반수를 차지하여 1989년 이후 처음으로 재집권하는 데 성공,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제체제 전환을 추진하다가 1년만에 물러난 디미트로프 의원을 소피아 시내의 국회의사당에서 만났다. 수염을 기른 디미트로프 前 총리는 잘 웃지 않는 얼굴로 시종 담담하게 답변했다.
  
  과감한 개혁으로 과도기를 짧게 넘겨야
  
  -귀하께서는 오랫동안 1인 독재下에 있었던 불가리아의 계획경제체제를 시장경제로 전환시키는 과정에서 수상으로 재직하시다가 舊공산세력에게 정권을 넘겨주고 말았는데 체제 전환기의 어려움을 들려 주십시오.
  
  『정부·국가의 기능을 감소시키고 민간부문을 증대시키는 것이 사유화이며 시장기능의 활성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1991∼92년 사이에 이런 시장경제로의 개혁에 착수하여 그 기반을 놓았다고 자부합니다. 비록 前 공산주의자들에게 정권을 내주었지만. 우리는 체제전환의 핵심은 국가소유인 토지, 농장, 공장의 민영화(또는 사유화)라고 생각했습니다. 토지의 개인소유를 허용했으며 거래도 자유화 하였고 비록 제한적이지만 공공토지의 개인적 이용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헌법을 개정하여 외국기업이 땅을 소유할 수 있도록 했고 그래서 한국의 기업도 활동을 강화할 수 있었지요.
  
  1992년 말부터는 국가소유의 중공업을 민간에게 불하하는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하려고 했는데 그때 정권교체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개혁은 주춤거리고 있으며, 前공산당 세력인 집권당은 사실상 재벌 기업을 만들어 특혜와 폭리로써 막대한 치부를 하고 이것이 여당에 흘러 들어가고 있습니다. 국유재산·시설·공장의 사유화와 해외자본 유치-이것이 불가리아의 살 길입니다』
  
  -문제는 국영농장을 사유화하면 잉여노동력을 해고하게 되며 실업률이 늘고 이렇게 되면 정부·여당에 대한 지지율이 떨어져 정권교체가 일어나게 되는데 이런 악순환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한 가지 방안은 사유화된 민간기업에서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것이지요. 우리가 집권하고 있던 91∼92년에 1백50만명의 실업자가 생겼지만 민간 부문에서 80만의 일자리를 새로 만들어 충격을 완화할 수 있었습니다. 해외자본의 유치가 활발해지면 일자리가 더 생기죠. 실제 받는 월급과 실업수당이 큰 차이가 없으니 과감한 사유화를 단기간에 해내면 과도기를 짧게 넘길 수가 있습니다』
  
  -은행제도나 법률정비가 제대로 안 돼 있는데 외국자본이 들어오겠습니까.
  
  『현재 불가리아의 가장 큰 문제는 은행입니다. 집권세력이 선물을 주듯 이 은행을 설립하고 친구들에게 융자를 마구 하게 하여 은행이 총체적 부실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집권할 때 은행을 파산시킬 수 있는 법률을 제안했는데 헌법재판소에서 위헌이라고 각하해 버렸어요. 불가리아의 경제문제는 정치에 기인하고 있어 더 큰 문제가 되고 있지요』
  
  디미트로프 의원은 『2元집정제적인 요소가 강한 불가리아 헌법이 정치를 불안정하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고도 지적했다. 『대통령과 내각 사이에 정확한 권한의 분리가 이뤄져 있지 않아』 권력게임을 유발할 소지가 있다는 것이었다.
  
  -反共민주화를 요구했던 국민들이 94년 선거에선 공산당 출신 인사들에게 다수의석을 주어 재집권케 했는데 이런 대중의 변심을 어떻게 해석하십니까.
  
  『저희 정부가 국회에서 불신임 투표로 해야했을 때에도 국민지지도는 40%를 유지했습니다. 실업률이 높았던 대도시에서도 인기가 높았습니다. 우리 정부의 실권(失權)은 연정(聯政)세력의 배신 때문이었습니다. 94년 총선거에서 민주화세력이 대패하고 舊공산당세력인 사회당이 과반수를 점한 것은 그들이 언론을 이용하여 자신들도 민주·개혁 세력인 것처럼 위장했기 때문입니다. 헝가리에서 舊공산세력이 승리한 데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시장경제로의 전환이 열매를 맺기까지에는 시간이 걸리는데 국민들은 그때까지 참지를 못하죠』
  
  -이런 전환기에는 국민에게 인내와 희생을 요구하는 지도자가 나와야 하는데 선거 때는 국민에게 영합하기가 쉽습니다. 민주주의 체제로서 단시일 內에 체제 개편을 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나도 강력한 지도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강력한 것이 꼭 좋은 결과를 빚는 것은 아니지요. 옐친 대통령은 강력하지만 마피아가 등장하여 개혁에 걸림돌이 되고 있어 러시아의 개혁은 지지부진합니다. 반면에 태평양의 호랑이들(한국·대만·홍콩·싱가포르)이나 칠레는 강력한 지도력에 의해 개혁과 성장이 이루어졌습니다. 朴正熙의 경우엔 강력한 리더십과 국민들의 잘 살아 보려는 의욕이 합치하여 별幣臼눼쨉?舊공산권에선 오랜 독재에 대한 국민들의 거부감이 강해 그런 협조가 어려울 겁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유럽 공산주의의 붕괴에 영향을 끼쳤다고 보십니까.
  
  『여기서는 서울올림픽 중계에서 한국의 발전상을 아주 제한적으로 보여 주었기 때문에 공개적인 영향이라기 보다는 소문 등 非공개적인 루트에 의해 공산주의의 붕괴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출처 : 월조
[ 2003-07-14, 13:3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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