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신드롬>독재부활인가 영웅탄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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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혹한 통제와 폭압 일삼는 독재자, 민족 중흥의 위대한 영도자' 평가 엇갈려
  
  박정희(朴正熙)전 대통령이 역사 속으로 들어간지 20년.
  그러나 그의 '유령'이 아직도 한국 사회를 떠돌고 있다.
  '민족중흥의 위대한 영도자'와 '가혹한 통제와 폭발을 일삼는 독재자'라는 엇갈린 평가 속에서 박 전대통령에 대한 관심은 '박정희 신드롬'이란 타이틀로 대중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 와중에 대한민국 건국 50년을 맞아 한층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박전대통령.
  '정당한 역사적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김근태(金槿泰) 국민회의 부총재와
  조갑제(趙甲濟) 월간조선 편집장이 지상논쟁을 벌인다.
  
  <1998년 8월 6일 뉴스피플>
  
  * 정부수립 50년을 맞아 조선일보·갤럽이 여론조사한 결과, 대한민국 건국 50년 큰 업적을 남긴 인물 박정희 전 대통령이 1위로 뽑혔습니다. 이를 錚뺐?생각하십니까.
  
  김근태의원 : 60~70년대에 걸친 한국의 압축적인 고도 경제성장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 점에서 박정희전대통령의 리더십이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할 측면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면 된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갖게 된 것은 근대화 과정에 있어서 강력한 동력이 될 수 있죠.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미래에 중요한 자산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김구 선생도 박정희 못지 않은 높은 평가를 바도 있는 점이 기억될 때, 보다 균형 잡힌 미래에 대한 전망과 계획을 수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갑제편집장 : 정부 수립 50년 박대통령이 18년간 장기집권을 했고, 국가 근대화를 통해 '근대국민 국가'를 형성한 공로를 생각할 때 첫 번째 손꼽히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건국의 아버지'인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공동 1위가 되지 못했다는 아쉬움으로 남지요.'
  
  * 작년부터 세차게 불어 닥친 '박정희 신드롬'의 원인을 무엇으로 봅니까.
  
  김의원 : '박정희 신드롬'은 우리 국민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절박함과 쓰라린 배반감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잘 보이지 않는 불확정성 대문에 더욱 가속화 되고 있죠. 한순간에 우리 국민은 IMF관리체제라는 고되고 아픈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OECD가입하다' '1만달러 시대다'하는 선진국 진입의 기대가 막 실현되는 것처럼 느껴질 때 일거에 반전이 일어난 것이죠. 더구나 이러한 상황을 초래한 것이 박전대통령의 영원한 대립항 중 하나이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과 문민정부였습니다. '민주화'가 그 원인중의 하나라는 은밀한 속삭임이 이제 공공연한 주장으로 드러나기 시작했고, 그로 말미암아 신드롬은 더욱 강화되고 있습니다.
  
  조편집장 : 근간에 형성되고 있는 '박정희 신드롬'은 교수 언론인 등 지식인들의 박정희 재평가입니다. '박통'은 죽기 전에도 죽은 후에도 국민들로부터 늘 일정하게 70~80%의 지지를 받아왔습니다. 이런 지지의 배경에는 박통이 그 시대 국가와 국민들 대다수가 요구하는 바를 10%% 이상 실되薩?때문입니다. 1961년 국민들을 국가안보와, 시위와 범죄로 들끊는 사회의 질서 회복, 배고픔으로 해결하는 경제적 요구를 했습니다. '자유'는 이중 우선순위가 아주 낮았어요.
  
  4·19혁명을 통해 장면 정부에서 자유를 맛본 국민들은 자유가 편안하지도 배고 품을 해결하지도 않는다는 경험을 하게 된 겁니다. 그 분위기를 감지한 박통은 그 요구를 실천하는 방법으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자조정신'과, 외국의 원조를 받지 않는 '자립경제', 진실로 독립국가는 '자주국방'을 하는 나라라는 '3자전략'을 내세웠고, 실천했습니다.
  
  * 일각에서는 '박통의 20년 독재가 불가피했다'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김의원 : 상처받은 대중들은 고도경제상장시대에 대한 그리움이 강력할 수 있죠. 그러나 그 그리움이 개발독재시대의 성과를 뛰어넘어 군사독재의 불가피성을 옹호하려는 주장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우려가 있습니다. 역사와 인간에 대한 미숙한 이해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독재 아래에서 신음했던 국민의 방황과 고뇌, 억압되었던 자유와 국민의 창의성을 망각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그렇게 해서는 역사로부터 올바른 교훈을 얻는 민족이 될 수 없으며, 21세기 미래를 열 수 없습니다. 그런 주장 속에 혹시 히틀러나 무솔리니 혹은 마오쩌둥같은 독재적 유형의 리더십에 대한 향수와 선동이 함축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조편집장 : 우선 '독재'라는 말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객관적인 용어가 아닙니다. 약간의 하자가 있었다고 하더라고 국민투표로 당선되었다면 민주적 정권이었다고 봅니다. 3선개헌 전까지 말입니다. 72년 유신 이후에도 권위주의적 정권이었을 망정 독재는 아니었습니다. 이승만·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언론의 자유와 야당의 견제와 비판 기능은 상당히 살아있었습니다. 반면 YS, DJ정권 하에서도 법치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고, 정보기관에 악용된 사례가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역사적으로 완벽한 의미의 독재나 민주가 이루어진 적이 없어요.
  
  * 일부 소장파 학자들은 박전대통령이 '일본만주군 출신이다, 공산주의자였다, 군사쿠데타 정권을 잡았다'라는 태생적 한계가 개발독재를 불러왔다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김의원 : 박정권으로부터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고, 정통성의 흔적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오직 '힘'에 대한 숭배와, 강력하게 유행하는 풍조에 투항하지 않았나 하는 혐의를 지울 수가 없어요. 세 차례의 변신에서 어떤 고뇌의 흔적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어차피 박전대통령은 처음부터 '무인(武人)'이고, 현실주의자였기 때문에 그냥 비판하지 않고 넘어갈 수도 있는 게 아니냐는 주장에는 타당성이 없습니다.
  
  조편집장 : 박전대통령은 일본인 군복을 입고 독립투사를 잡아놓지는 않았습니다. 마오쩌둥의 팔로군과 싸우는 전선에 투입되어 있었고, 일본인에게 적극적으로 동조하지 않았어요. 이 시절에 박통은 어떤 민족이든 자주성과 독립성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는 철학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한 상식적으로도 만군내 철학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한 사상적으로도 만군내 여운영 계열의 독립비밀조직에 동조를 했지만, 주도하지는 않았어요. 서북청년단과 미군에 대한 반감 때문에 사회주의자인 형 친구들과 어울리기는 했어도, 공산주의에 심취한 적이 없습니다.
  
  근대화의 촉발점인 5·16군사혁명은 청년장교 시절부터 목표였습니다. 이미 자신의 군사정변을 '혁명'이라고 생각했고, 이에 대한 열등감이나 죄의식을 한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정통성이 없는 정권을 창출해서 이를 경제정책을 통해 만회하려고 했다는 주장은 잘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좁게 보면 헌법을 유린했지만, 넓게는 국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어요.
  
  * 박정희 전 대통령의 근대?정책의 공(功)과 과(過)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김의원 : 외세의 강요된 분단체제 아래에서 상당한 정도로 근대화에 성공하였고, 그 과정에서 박전대통령의 리더십은 강력한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추진 과정은 국민의 자발적 참여가 아니라 국민 동원체제로 진행됨으로써 민주주의 실현이나 발전과는 관련이 없었죠. 게다가 그것은 심각한 도전과 갈등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한 권위주의적, 경쟁제한적인 시장경제가 우리의 경제체질을 취약하게 만들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경제위기의 직접적 원인으로 민주화의 진전에 따른 공정한 시장의 룰 수립, 시장주의의 세계화에 대응하는 유연한 제도 정비와 자세확립의 실패를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박정희식 모델'인 개인독재 즉 정부, 은행, 재벌간의 근친결혼식 경제구조 때문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죠. 물론 박전대통령 사후 그것을 수정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고, 그 책임은 그 이후 정부에 물어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조편집장 : 공(功)은 경제발전과 자주국방, 근대국가로서의 제도정비, 민주화를 위한 물적 토대건설로 봅니다. 특히 민주화의 물적 토대는 80%를 마련, 민주화의 주체세력인 중산층이 형성되었지요. 이 중산층은 결국 박통의 장기집권에 반발하게 되고 '부마사태'는 그런 민심의 이반을 보여준 것이죠. 박통은 자기 성공의 희생물이 된 겁니다.
  
  과(過)는 거대한 국가를 20년 안팎에 급격한 변화를 이끄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한 부작용으로 빈부의 격차, 노동자 인권제약, 언론자유의 제약 등입니다. 외국의 사례를 볼 때 최소한의 부작용이었어요. 처음부터 무혈 혁명이었고 집권사절에도 정적을 암살이나 집단학살한 예가 없었습니다. 불가피한 부작용마저 싫다면 근대화를 안하면 되는 것입니다.
  
  * 60~70년대의 개발드라이브 정책에서 현재적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까
  
  김의원 : '우리는 다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한 것이 중요합니다. 성서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을 수 있은 '믿음'이 귀중한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의 정부가 국민 속에서 그런 동의를 얻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국민의 요구이기도 하죠. 다만 민주적 리더십에는 시간과 비용과, 고통분담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민주적 절차를 통해 정권교체를 이루어 낸 뒤 경제회복과 민주주의의 균형적 발전을 추진하고 있는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적 리더십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박정희식의 개발 드라이브와 다른 점입니다.
  
  조편집장 : 시대적 효용성을 뛰어넘는 정책은 없습니다. 박정희식 개발정책은 그 시대에나 맞았던 것입니다. 그걸 그대로 현지에 대입하면 안됩니다. 벌써 20년이 지났는데도 YS정부가 그 방법을 그대로 답습하다가 IMF를 초래했습니다. 한마디로 관주도의 경제는 민간주도로 수정되어야 했습니다. 한마디로 '역사바로세우기'가 잘못된 것입니다.
  
  * 일각에서 '제2의 박정희'가 필요하다는 사회적 분위기도 있습니다
  
  김의원 : 지난 시기 개발독재를 추진했던 박정희처럼 그런'제2의 박정희가 필요하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과연 존재하는지 의심스럽습니다. 박전대통령이 여론조사에서 1위를 하는 것은 오늘의 경제위기를 효과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리더십에 대한 간절한 기대 때문입니다. 민주화되고 국제화되고 있는 이 시대에, 비판적 지식인들을 탄압해야만 유지될 수 있었던 박정희식의 개발독재형 리더십은 불가능합니다. 그러한 과장된 주장은 우리 사회에 돌이킬 수 없는 파괴적 갈등을 유발할 뿐입니다.
  
  조편집장 : 아마, 자주 정신과 추진력을 가진 지도자이자 동시에 대중적 정치력을 가진 사람이 나타났으면 좋겠다는 표현일 것입니다. 박전대통령을 그대로 카피하면 곤란하지요. 그러나 박정희는 위대한 인간입니다. 처음엔 비판적 입장에서 취재를 했는데 깍아내리려 해도 작아지지가 않아요. '박통'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겪으면서 동시대인들과 똑같은 절망과 환희를 맛본 토종 한국인입니다. 인간적 약점과 장점을 가지고 있는 친근한. 또 서민들이 뭘 원하는지 알았던 사람입니다. YS는 동시대인이면서 서민의 정서를 잘 알지 못한 사람입니다.
  
  * 박정희 신드롬?
  
  '박정희 신드롬'이 대한민국 건국 50년을 맞아 거세게 불어닥치고 있다. '독재자였다'는 거두절미식 평가는 사후 20년만에 '좋은 일을 많이 하기 위해 독재자가 되었다'로 탈바꿈하였다. 이는 작년 한해에 일어난 일의 추이를 살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97년 2월 인터넷에 박정희 전대통령전용사이트가 마련되었고, 3월에는 격렬한 논란을 동반한 채 소설가 이인화씨가 박대통령의 일대기를 그린 '인간의 길'을 출간하였다.
  
  또는 저항의 산실이던 한 대학교의 신문은 여론조사에서 복제하고 싶은 인물 1위 김구에 이어 3위에 박정희가 뽑혀 격세지감을 느끼게 했다. 4월에는 각계인사들이 '박정희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발족했고, 7월과 10월에 두 일간지에서 연재를 시작했다. 또한 12월 대선을 앞두고는 대구 박전대통령의 생가는 후보들의 발걸음으로 어지러웠다.
  
  이런 아버지의 후광을 입은 박근혜씨가 올 4월 대구 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이 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도도한 흐름을 막기에는 신문의 칼럼이나. 올해 3월 펴낸 소장파 역사학자들의 '박정희를 넘어서(푸른숲)'라는 책으로는 역부족이다. 이 와중에 대한민국 건국 50주년을 맞아 모 일간지에서는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위에 박전대통령을 뽑았다.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
  
  작년 97년 4월 24일 발족한 '모임(회장 노철용 전 경향신문사 사장)'은 박정희전대통령의 기념관 건립이 궁극적인 목표이다. 이를 위해 자료수집 및 박전대통령의 투철한 애국심이 헌신, 탁월한 지도력을 평가하고 업적을 기리는 사회적 분위기 조성을 꾀하고 있다. 박지만씨가 참여한 가운데 작년 10월 '국가와 혁명과 나'재출간, 출판기념회를 가진 것도 그런 의미. 발기 당시 권투선수 홍수환, 탁구선수 이에리사, 탤런트 이진수 씨등 각계 인사 30여명이 회원이던 '모임'은 1년이 지난 지금 전국 규모의 2천여명 회원을 자랑하고 있다.
  
  평범한 회원들 사이에서 홍사덕 의원, 이해봉 한나라당 의원은 눈에 띈다. 김종필 총리서리, 박태준 자민련 총재는 회원은 아니지만 물심양면으로 도와준다. 주 연령층은 40~60대의 중·노년층이지만 30대 회원도 100명이 넘는다. 현재 '모임'의 회원인 정용희씨가 작년 2월 인터넷에 박정희 전용 사이트(www.516.co.kr)를 운용, 젊은 회원을 모집하고 있다.
출처 : 뉴스피플
[ 2003-07-14, 14:2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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