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이회창 총재와 내각제 개헌 주제로 비밀 회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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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표지판, 이름, 고유명사는 漢字병기 해야
  
  ─漢字倂記(한자병기) 정책은 앞으로 확대 강화할 생각입니까.
  
  『지금 4백~5백만 명에 이르는 관광객 중 반 이상이 일본, 중국 등 漢字(한자)문화권 사람들입니다. 여기 와서 도로표지판으로는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영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도로표지판에 계속해서 英文(영문)만 써야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또 姓名(성명), 固有名詞(고유명사)만은 漢字로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글專用(전용)으로 가 우리 손자쯤 가면 자기가 무슨 이씨인지, 무슨 유씨인지도 모르게 해야 하느냐 하는 겁니다. 姓名은 조상과의 관계를 일관되게 유지해 가자는 하나의 證票(증표)입니다. 유씨만 해도 柳씨, 劉씨가 있고, 유라고 쓰는 사람도 있고 류라고 쓰는 사람도 있어요. 한글만 써서는 자기 姓도 몰라요. 조상들하고 단절시켜 놓고, 무슨 國粹主義者(국수주의자)도 아니고, 한글전용이 무슨 소리예요. 姓名, 固有名詞 이런 것은 반드시 漢字로 써야 합니다. 그리고 뜻이 애매한 말은 괄호속에 漢字를 倂記해서 뜻을 분명히 해주자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현재 언론의 한글전용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다고 보시겠습니다.
  
  『정말 너무들 쉽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이름, 고유명사, 애매한 말은 괄호 속에라도 漢字를 써서 뜻을 분명히 해 줄 여유조차 없다는 말입니까.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현명하느냐 하면, 청주비행장에 가 보세요. 우리 할아버지 때 그곳에 비행장이 생길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거긴 風向(풍향)이 늘 일정한 곳인데, 비행기가 이륙하는 곳은 飛上里(비상리)이고, 내리는 곳은 飛下里(비하리)예요. 조상들이 先見之明(선견지명)이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그걸 한글로 써놓아 보세요. 무슨 뜻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내가 漢學者(한학자)도 아니고 두드러지게 뭘 많이 배운 泳宕?아니지만, 뭔가 우리 조상들의 靈氣(영기)를 그런 데서 느낄 수 있습니다. 그걸 다 단절시켜 놓고서는 될 일이 아니에요』
  
  ─요즘 金九(김구) 선생 기념관을 만든다고 여러가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金九 선생 기념관만이 아니라 이제 朴正熙 대통령 기념관도 만들기로 했으니 建國(건국)대통령인 李承晩(이승만) 대통령 기념관부터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사실 그래요. 국회의사당 건물 한가운데 큰 홀(로턴다 홀-注)이 있어요. 丁一權(정일권) 국회의장 시절 국회의사당을 지으면서 그 큰 홀을 가운데 만들어 놓은 뜻은, 그곳에다 초대 국회의장에서부터 역대 의장들의 胸像(흉상)을 세워두려는 것이었어요. 초대 의장이 바로 李承晩 대통령입니다. 그런데 그걸 하려고 하기만 하면 젊은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반대하고, 만들기만 하면 때려부수겠다고 해서 아직도 못만들고 있어요. 오늘 아침에, 張勉(장면) 박사 기념행사를 하는 데 도와달라고 해서 예비비에서 2억원을 지출해 주었습니다.
  
  金九 선생 기념관도 정부에서 나름대로 지원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李承晩 대통령은 얘기만 나오기만 하면 난리예요. 그걸 만들었다가는 다 때려부술 형편입니다. 그래도 朴대통령 기념관은 이제 건립위원회도 발족하고 했으니 이걸 하면서 해 나가야지요.
  
  李承晩 대통령은 建國의 할아버집니다. 다른 얘기 할 것도 없어요. 요새야 별별 얘기 다 하지만, 그래도 李承晩 대통령이 대통령을 하셨기에 이 나라가 이렇게 올 수 있었던 겁니다. 그걸 우리는 겪어온 사람 아닙니까. 사실 모모 한다는 사람들 중에 李承晩 대통령 묘소에 가는 사람은 나밖에 없더군요. 나는 뭣하면 그곳에 가 참배하곤 합니다』
  
  ─청년 장교시절에도 李承晩 대통령에 대해 그런 존경심을 갖고 있었습니까.
  
  『그럼요. 위대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요. 建國의 할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땐 金九씨는 우리가 좀 의심을 한 게 사실이에요. 물론 지금 생각하면, 순수하게, 왜 갈라져야 하느냐, 그 애를 써 光復(광복)이 되었는데 왜 남북이 갈라져야 하느냐, 그런 순수한 생각으로 평양까지 갔지만 가셔서 실망했어요. 하지만 그땐 이미 늦었죠. 그런 피로 얼룩진 建國史(건국사)를 요새 젊은 이들이 뭘 어떻게 보고, 어떻게 알아 마음대로 떠드는지…, 도대체 내가 알 수가 없어요』
  
  東江댐 백지화 결정된 바 없다
  
  ─이번에 홍수가 났을 때 서울이 잠기지 않은 것은 소양강댐과 충주댐이 홍수조절기능을 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앞으로 더 안심하려면 東江(동강)에 댐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金大中 대통령은 기존 태도를 바꾸어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밝혔는데, 그것이 정부의 확정된 방침입니까.
  
  『나는 아직도 대통령께 그것을 들은 바가 없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제적으로 권위있는 조사단으로 하여금 더 철저한 조사를 시켰고, 환경단체들이 주장하는 것 만큼 그렇게 자연경관과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고 이젠 그곳밖에 댐을 만들 곳이 더 없다는 것을 대통령께서 충분히 인식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반대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인지, 제가 직접 들어본 일은 없어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총리께서 가장 정력적으로 추진한 것 중 하나가 국민연금 확대실시인데, 일부 변호사 단체에서는 그것이 憲法정신에 위배된다고 異議(이의)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즉 낸 사람이 낸 만큼 받아야 하는데, 많이 낸 사람이 덜 받고, 적게 낸 사람이 많이 받는 것은 자본주의 정신에 위배되고, 그것은 연금이 아니라 세금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의 의견은 그런지 몰라도, 연금제도는 꼭 필요합니다. 일본처럼 실시한 지가 오래된 곳도 연금이 매년 문제가 돼요. 정부가 매년 상당한 보조를 해 주고 있어요. 연금은 정부재정에서 지원하지 않으면 안될 겁니다.
  
  그리고 지금은 확대 연금제도를 겨우 발족시킨 단계예요. 그런데 조금만 어려우면 이 소리 저 소리가 나오고, 집어치우라고 하고, 그러면서도 老後保障(노후보장)하라고 하면 어떡하란 말입니까. 이건 좋은 일이니까 가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 사회보장 측면에서 조금 나은 사람들이 어려운 사람 도와주는 뜻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걸 갖고 시비하는 모양인데, 앞으로 가면서 다듬어 합리적으로 만들어야지요. 지금 이걸 중단한다든지 변질시키면 앞으로 못해요. 일단 하면서 모자란 것은 고쳐가야지요』
  
  ─마지막으로 우리 月刊朝鮮 독자들에게 한마디 해 주시지요. 그동안 내각제 문제를 두고 서로 오해가 된 부분이 많았던 데 대해서 말이죠.
  
  『세상이라는 게 사실 모두들 같은 농도로 알고 인식할 수는 없는 문제지요. 같이 정치를 하면서도 공유할 수 있는 정보가 있고 그렇지 못할 것이 있는 법인데, 하물며 일반 국민 여러분들이 아시고 싶은 것이 많겠지만 모든 것을 다 알게 해드리지 못하는 것을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지난 40년 가까이 정말 나름대로는 요만큼이라도 이 나라에 기여될 수 있는 일이라면 하는 심정으로 노력을 해 왔습니다. 나는 내 개인적 욕심을 얻어내려고 터무니 없는 일은 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요만큼이라도 우리나라에 도움이 되겠다 하면 나는 어느 위치에서도 했습니다. 두 번씩이나 해외에 쫓겨나가서도 그냥 지내지 않았습니다. 하다 못해 돈 벌 수 있는 일이 있으면 하고 찾아다니며 대통령께 건의드렸고, 그런 일을 여러가지 했어요.
  
  그렇게 나는 늘 국가차원에서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면서도 내 생각을 내 생각만큼 국민 여러분에게 알려드리지 못하고 해서 우리들이 하려고 하는 일이 정당하게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하나둘이 아니었는데, 그저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믿어주십시오.
  
  정치라는 게, 국민이 안심하고 내일에 대한 자기의 꿈을 실현시키려 계획을 세워 별 지장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꿈을 이룩하는 노력을 할 수 있는 보장, 편안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뒷받침을 해 드리려고 있는 것인데, 그런 철학 밑에서 국민이 허용해 주는 한에서 봉사를 할 것입니다. 늘 짜증스러운 일도 많겠지만 좀 달래주시면서 내일을 기약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연설같은 마지막 말이 끝나자 비서가 『다음 일정이 있어 일어서야 할 시간』이라고 보고했다. 金총리는 『괜찮다』면서 냉커피를 달라고 했다. 그에게 『李會昌 총재와 만나보니 앞으로 대화할 상대라고 느꼈느냐』는 질문을 했다. 그가 흥미로운 얘기를 꺼냈다.
  
  『대화야 되지요. 李총재도 나름대로 입장은 다르지만 나라걱정을 하는 것이고…. 다만 李會昌씨가 근원적으로 나와 다른 것은 대통령 되고 싶은 집념이 강해요. 나는 그런 거 떠난 사람이고…. 나는 그러니까 국민의 뜻에 의해 다수의 지지를 받는 정당이 정치하는 것, 바로 내각책임제를 만들어보자는 것이지요. 그런데 李총재는 내가 대통령이 되어야겠다는 것인데 그런 현격한 차이가 좁혀질 것 같지가 않아요』
  
  『나하고 팔씨름 한번 해볼까요?』
  
  ─내각제 개헌을 끝낸 뒤에 정계에서 은퇴하실 생각이었다고 하셨지요?
  
  『난 그럴려고 그랬어요. 부여지구당도 후배에게 다 넘겨주었잖습니까』
  
  ─그럼 내각제 개헌이 안되면 언제까지나 政界(정계)에 남아 계신다는 말씀입니까.
  
  『그런 逆說(역설)은 성립하지 않지요. 내가 나이가 얼마인데 언제까지 할 수 있겠습니까. 허용되는 기간 내에 이룩하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다는 것이죠』
  
  ─건강이 정상적인 집무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닙니까.
  
  『건강은 좋아요. 웬만한 젊은 사람에게도 진다고 생각지 않아요. 나하고 팔씨름 한번 해 볼까요?』
  
  ─金大中 대통령은 건강이 어떻습니까.
  
  『괜찮아요. 그런데 너무 스케줄이 무거워서 좀 덜하시라고 내가 권하고 있지요』
  
  ─총리께서는 朴正熙 대통령과 金大中 대통령 두 분을 국무총리로서 모셨는데, 朴대통령과 金대통령의 관계와 관련해 많은 생각이 있으시겠습니다.
  
  『글쎄요. 두 분은 라이벌이었잖습니까. 그리고 朴대통령 계실 때 金대통령이 괴로움을 받았지요. 그러나 그것이 朴대통령의 本意(본의)는 아니었어요. 가령 일본서 일종의 납치사건이 났을 때도 朴대통령은 모르는 일이고 그건 HR(李厚洛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말함-注)이 했어요. 밖에선 마치 朴대통령의 승인 하에서 한 일처럼 말하지만 천만에요. 그건 내가 아는 일입니다』
  
  그는 『朴대통령은 냉정한 분 같지만 아주 인정이 많은 분』이라고 말했다.
  
  『朴대통령이 계획적으로나 고의로, 혹은 라이벌에 대한 증오의식으로 金대통령을 괴롭히려는 심사는 없었다고 봐요. 그건 분명합니다. 金대통령이 그걸 아시는지 어쩐지는 잘 몰라요. 그러나 내가 알아요. 하나의 정치적인 배려라고 하더라도 朴대통령 기념관도 지난 大選 前에 내가 이건 해 주셔야겠다고 얘기해서 이제 발족이 된 겁니다.
  
  이런 것을 보면 金대통령은 어느 정도 朴대통령에 대한 속마음의 일부라도 이해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한테는 「다 지내고 보면 그저 그런 기복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다 용서해야 한다」 이런 말을 했어요. 金賢哲씨 赦免 문제도 그런 점에서 「지내다 보면 용서할 점이 있는 것이다」 그런 심정이었을 겁니다』
  
  金총리는 朴正熙와 金大中 두 대통령을 똑같이 국무총리로 모시면서 느낀 소감을 이렇게 부연했다.
  
  『朴대통령은 제 처삼촌이지만 사실은 혁명의 지도자로 모셨습니다. 朴대통령은 나를 어떤 점에서는 경계도 했어요. 그러나 난 경계할 인물이 아니었죠. 그 주변에서…, 나를 예컨대 나세르라고 했어요. 朴대통령을 나기브로 하고 (나기브를 거세한) 나세르 짓을 하려 한다는 거에요. 그런 쓸데 없는 모략을 주변에서 했어요. 朴대통령 시절 내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 보면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잖습니까. 늘 성의껏 모시려 했고 어떤 어려움은 내가 대신 안고 넘어가기도 했습니다. 朴대통령은 그런 나를 믿고 일을 맡겨주었습니다.
  
  金대통령은 일종의, 혁명은 아니지만, 공동정권의 파트너로 지금까지 아무런 트러블이 없었습니다. 같이 앉아 얘기를 해도 서로 의견이 상충해 입장이 거북해지거나 한 예는 없었습니다. 또 하나 내가 느끼는 것은 金대통령은 합리적인 얘기에 대해서는 아주 이해가 빠르다는 겁니다. 그런 성격을 갖고 계세요』
  
  『기분이 나쁜 거야 뻔하지 않습니까』
  
  ─그런 면에서는 金泳三(김영삼) 대통령과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르지요. 金泳三씨는 고집을 부리면 이유에 상관이 없어요』
  
  ─옛 중앙청 철거문제가 그런 예였죠.
  
  『글쎄 말이죠. 중앙청 철거는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었는데, 다만 병행했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현관만이라도 독립기념관으로 옮겨서 이것이 36년간 우리를 점령했던 사령부였다고 그 實物(실물)을 후손들에게 보여줬으면 했습니다. 그 현관 바로 뒤에 홀이 있었는데, 나는 그것도 옮겨두었으면 했어요. 그곳이 바로 우리나라 制憲國會(제헌국회)가 시작된 곳입니다. 그런 뜻을 李御寧(이어령)씨를 통해 金泳三 대통령에게 거듭 부탁했는데도 막무가내라고 하더군요』
  
  ─金大中 대통령과 두 분이 얘기하실 때는 서로 호칭을 어떻게 부르십니까.
  
  『대통령께서는, 총리께서는… 이렇게 부르지요』
  
  ─총리께는 각하라는 호칭이 더 익숙할텐데요.
  
  『옛날에야 각하라는 말이 입에 달려 있었지만 이제는 대통령이라 부르죠』
  
  ─두 분이 얘기를 하시면 편하십니까.
  
  『아주 편해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저 농담도 하고 그럽니다. 그리고 처음엔 우리가 만날 때 비서실장이 배석하곤 했지만, 도중에 비서실장은 오지 말라고 하고 둘이서만 만나요』
  
  ─그렇게 단 두 분이서만 만난 것이 오래 되셨습니까.
  
  『금년 봄부터 그랬지요』
  
  ─이번주에도 두 분이 만났지요?
  
  『화요일날(8월10일) 만났지요』
  
  ─내각제 연기 발표를 하고 나서는 처음 만나신 거죠?
  
  『처음은 아니고 늘 만나지요. 둘이서 단독으로만 만난 것이 처음이죠. 내가 왜 그랬느냐 하면, 둘이서만 만나면 자꾸 없는 얘기가 돌아다녀요. 그래서 「이제 거기엔 안 들어가겠다」 그랬더니 (金대통령이) 웃으면서 그러자고 그래요. 하두 쓸데 없는 소리가 돌아다녀 그런 모양이다고. 그랬는데 일요일날(8월8일) 대통령께서 전화를 해 오셨어요. 「아이구, 이번 週부터는 좀 만납시다」 그래요. 그래 「그럽시다」했지요』
  
  ─두 분이 만나시면 私的(사적)인 얘기나 세상 돌아가는 얘기들도 합니까.
  
  『많이 하지요』
  
  ─이번 週에는 무슨 얘기를 하셨습니까.
  
  『金賢哲씨 문제하고, 국회문제를 주로 얘기했습니다. 金賢哲씨 문제 때문에 대통령이 퍽 고민을 합디다. 내가 그것을 알죠. (지난 大選에서) 당선 되고서 (金大中 당선자가 金泳三 대통령을) 만났을 때 金泳三씨가 아들 문제를 아주 간곡히 부탁했어요』
  
  ─金大中 대통령께 말이죠?
  
  『그렇죠. 그래서 金대통령께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을 했었습니다. 그게 짐이 된 겁니다. 사방에서 반대를 하는데도 「내가 그렇게 약속을 했는데…」 하고 (우리 둘이 만났던) 그날도 고민을 해요. 그래서 지금의 赦免案(잔여형 집행 면제)이 나온 겁니다』
  
  ─그것이 그 자리에서 합의된 겁니까.
  
  『대략 그 범위에서 얘기했지요』
  
  ─그런 金大中 대통령으로서는, 金泳三 전 대통령이 저렇게 독재자라고 나오니 섭섭한 면이 있겠습니다.
  
  『그래도 金泳三씨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을 안하려고 그래요. 나도 그러려고 하고. 왜냐하면 기분이 나쁜 것이야 뻔하지 않습니까. 前任(전임) 대통령이 바로 後任(후임) 대통령보고 독재자라고 하는데 기분 좋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서로 그런 것은 터치를 안했죠. 다만 이렇게는 말했습니다.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이 逝去(서거)했을 때 내가 弔問(조문)사절로 갔는데,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이 현직 대통령과 함께 다 왔습디다. 그리고 같이 다닙디다. 그러면서 같이들 인사하고 그러는 것이 보기도 좋던데…, 우리나라는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그런 얘기를, 金泳三씨가 욕을 하고 할 때 했어요』
  
  ─그랬더니 金대통령은 金泳三 전 대통령에 대해 뭐라고 했습니까.
  
  『「글쎄, 날 그렇게 미워하나?」 그 말씀 한 마디밖에 안하더군요』
  
  動中靜의 인물
  
  이렇게 해서 세 시간 이어진 인터뷰가 끝났다. 바깥에서는 그의 진퇴문제로 시끄러운데 그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1961년 5월16일 새벽 한강을 건넌 뒤 그는 대략 다섯 번의 큰 위기를 넘겼다. 1963년 초 民政(민정)이양을 앞둔 최고회의의 내분으로 「自意半 他意半(자의반 타의반)」의 외유, 1964년 6·3 학생시위와 계엄령선포 직후 군부의 압력에 의한 2차 외유, 공화당 의장시절이던 1968년 朴대통령 친위세력의 압력에 저항하여 던진 공직 사퇴 카드, 그리고 1980년 5월17일 밤 新軍部(신군부)에 의한 연행·조사.
  
  이런 위기를 넘기고 大政客(대정객)으로 살아남은 金총리는 공화당, 신민주공화당, 自民聯 등 세 번의 창당(그는 청년장교 시절에는 酒黨도 만들었다고 자랑한다)을 지휘한 기록도 갖고 있다. 그를 만나면 늘 역사와 마주한 느낌을 갖게 된다.
  
  내각제 연기 파동은 그에게는 여섯 번째의 위기인 셈인데, 金총리 특유의 자신만만함과 익살로 해서 기자는 이날 그런 위기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亂世를 살면서도 人間性을 잃지 않은 사람」이란 평을 듣는 金鍾泌 총리는 이날도 소용돌이 속에서 평상심을 유지하는 장기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動中靜(동중정)의 인물 金鍾泌 총리와 부인 朴榮玉(박영옥) 여사 두 사람만 산다는 총리 공관의 정원 잔디밭에는 殺氣(살기)가 빠진 햇볕이 비스듬히 내리고 있었다.
  
  <정리·許容範 月刊朝鮮 기자 >
출처 : 월조
[ 2003-07-14, 14:2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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