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이회창 총재와 내각제 개헌 주제로 비밀 회담(1)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김종필 총리의 공동정권 비화 토로 - 이회창 총재와 내각제 개헌 주제로 비밀회담했었다. 김대중 대통령에겐 국회 발의를 요청했었다
  
  ● 『내각제로 대통령과 맞서면 헤어져야 하고, 그러면 정권도 나라도 어려워지므로 내가 결심한 것이다』
  ● 『모 의원의 事前 발설로 金龍煥 부총재가 격분, 항의… 당초 계획이 헝클어지고 모양이 좋지 않게 되었다』
  ● 『2인자든 10인자든 상관없다…국가에 도움만 된다면』
  ● 金총리는 『이회창 총재가 한번 더 만나자고 연락을 해왔으나 오해를 살까 봐 만나지 않았다. 李총재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집념이 강한 분이었다』고 덧붙였다
  
  <1999년 9월 월간조선>
  
  李美子 이야기
  
  서울 종로구 삼청동 106번지 국무총리 公館(공관). 金鍾泌(김종필·74) 국무총리는 이곳에서 두 번째 살고 있다. 첫번째는 1971년 6월부터 1975년 12월까지 총리로 지낼 때였다. 그때의 공관은 지금과는 달랐다. 일제시대에 지어진 낡은 목조건물이었다. 작년 12월 초 그는 다시 이 공관에 들어왔다. 현재의 공관은 1984년에 다시 지어진 2층 기와지붕이다.
  
  지난 8월13일, 초가을 기운을 느끼게 하는 날이었다. 이날 국회는 한나라당이 제출한 金총리 해임건의안 표결문제로 들끓고 있었다. 「내각제 연내개헌 違約(위약)」을 이유로 제출된 해임건의안은 밤 늦게 두 여당의 퇴장전략에 따라 의결정족수 미달로 처리되었다.
  
  金총리와 우리 기자 일행은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웠다. 金총리에게서 초조해 하는 기색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그는 본래 내색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도시락 점심식사를 함께 하면서 「가요 50년 공연」을 앞둔 가수 李美子(이미자)씨 얘기가 나오자 金총리는 이런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李美子가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게 10代 초부터였어요. 5·16 직후에 우리가 演藝隊(연예대)라는 것을 조직했지요. 군사혁명이 나자 모두들 너무 긴장하는 것 같아, 「긴장만 하지 말고 일할 때는 일하고, 쉴 때는 적절히 쉬면서 근대화를 향해 총력을 경주하자」 그런 뜻에서 연예인들을 총동원해 4개 중대를 만든 겁니다. 결단식을 마치고 여흥을 하는데 조그마하고 얼굴이 까무잡잡한, 덧니가 난 아가씨가 나와 노래를 부르는데 웬 노래를 그리 잘 하는지, 기가 막히게 불러요. 그게 李美子예요. 그러고 나서 동백아가씨가 히트를 쳤지요. 한 번은 여의도 공군 비행장에 위문을 갔어요. 李美子가 노래를 하는데 나더러 아코디온 반주를 하라고 해요. 잘했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끝까지 했습니다』
  
  그는 『이난영, 이화자, 이미자, 주현미 이런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이어 내려오는 손꼽히는 가수들』이라고 칭했다. 그리고는 그 가수들 각각에 대해 評(평)을 했다. 대표적 노래는 무엇이었고, 그건 어떻다는 식이었다. 그는 패티김과 길옥윤이 결혼할 때 주례를 선 이야기와 헤어질 때의 뒷 이야기도 구수하게 들려주었다.
  
  月刊朝鮮(월간조선) 1999년 7월호에 金鍾泌 총리의 소년·청년 시절 이야기가 실렸다. 그의 일곱형제들과 金총리의 성장과정에 관한 글이었다. 소년시절의 金총리는 한마디로 천하의 개구쟁이였고, 학창시절의 그는 多才多能(다재다능)한 우등생이었다. 그 얘기를 꺼냈더니 金총리는 이런 에피소드들을 더 털어놓았다.
  
  『우리가 한참 개구쟁이 짓 할 때는 흥부놀부에 나오는 얘기 그대로였어요. 애들 보고 「똥 싸라」 하고는 미운놈은 밀어 주저앉혀 버리고…. 평상시에 우리가 노는 데 괜히 간섭하는 어른이 집을 새로 짓거나 개축하면 영락없이 똥을 잔뜩 발라놓곤 했지요.
  
  그땐 버스라는 것이 대단했는데, 태워달라고 해서 안 태워 주는 버스는 그날 저녁에 타이어가 다 바람이 빠졌지. 밤 잠 안자고 있다가 새벽에 돌아다니며 바람을 빼버렸어요. 찢는 것은 아니고 바람만 뺐어요. 그렇지 않으면 그 버스가 가는 길에다 바위를 굴려놓고 차를 못가게 하고서는 논두렁에 엎드려 보면서 재미있어 하곤 했어요.
  
  일본 애들 하고도 싸움을 많이 했지요. 걔들이 토란을 심어놔요. 그게 얼마만큼 자라면 낫을 갖고가 전부 잘라놓곤 했지. 그럼 우리가 했다는 걸 아니까 교장이 눈에 헤드라이트를 켜고 잡으러 돌아다니고, 우린 붙들리면 두들겨 맞고…. 정말 못말렸어…』
  
  점심식사가 끝나고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이미 준비를 해 왔을 것이니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하고 정색을 했다.
  
  당연히 첫 질문은 「내각제 연내개헌 연기가 그간 어떤 과정을 거쳐 이뤄져 왔는가」였다. 그 顚末(전말)에 대한 金총리 자신의 설명을 우리는 처음 듣는다.
  
  『고민스런 나날을 보냈지요』
  
  『원래 8월까지는 內閣制(내각제) 문제 논의를 삼가자고 합의를 했었지요. 모두들 간헐적으로 내각책임제에 대해 가타 부타 얘기를 하고, 내각제에 찬성하는 사람은 별로 얘기를 안했지만 그만 두었으면 좋겠다는 측에서는 말꼬리를 물어 문제삼고 하다보니 뭔가 왜곡되는 선전들을 하고 발표들을 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대통령과 나, 국민회의 대행(趙世衡 전 대행), 자민련 총재(朴泰俊 총재) 이렇게 넷이 앉았을 때(지난 4월9일 청와대 4자 회동을 말함-注) 8월까지는 논의를 삼가자고 합의를 보고, 그렇게 해 왔습니다.
  
  그래서 8월에는 어떻게든 내각책임제 年內改憲(연내개헌) 문제에 대한 可否(가부)가 결정되어야만 했죠. 그래서 시간이 가면서 나도 대통령과 얘기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事端(사단)이 일어났다. 7월12일 오전 광화문 정부제1종합청사 국무총리실로 자민련의 李모 의원이 찾아간 것이 발단이었다. 李모 의원은 이 자리에서 金총리로부터 「내각제 연내개헌 연기」를 시사하는 뉘앙스의 말을 들었으며, 자민련 당사로 돌아오자마자 이를 내각제의 戰士(전사)격인 金龍煥(김용환·당시 수석부총무) 의원에게 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소식에 놀란 金龍煥 의원은 바로 그날 저녁 姜昌熙(강창희·당시 원내총무) 의원과 함께 金총리의 공관으로 찾아가 그 경위를 따지게 되었다. 이 과정을 金총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이 문제를 대통령과 상의하기 前에 당의 한 두 사람에게 얘기를 했어요. 아무리 봐도 年內改憲을 이룩해 나가기는 어려운 상황하에 있다고 봐지는데, 최선은 연내에 개헌하는 것이지만 연내에 안되면 차선책도 있지 않겠느냐, 이런 점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 의원들도 덮어놓고 떠들 것이 아니라 이런 점도 한 번 좀 생각들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 이런 말을 했어요.
  
  그랬더니 이 친구가 우르르 가서는 金龍煥 의원에게 「포기한 것 같다」 이런 소리를 했어요. 그러자 金龍煥 의원이 바로 이 자리(총리공관의 응접실-注)에 왔길래 내가 자초지종을 다 얘기해주었어요. 그리고 며칠 뒤에는 누가 무슨 얘기를 어떻게 했는지 동아일보에 「연내 내각제 추진 포기」 이렇게 보도가 되었죠. 그래서 黨內(당내)가 들썩거리기 시작했던 겁니다.
  
  경위야 어떻든 그렇게 해서 내각제 연내 추진이 어렵다는 분위기가 확산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언론이 전부 「포기」로 몰고가요. 사실대로 묻고, 생각하는 것을 사실대로 전해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포기로 몰아가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들어주지 않고…. 고민스러운 나날들을 보냈지요』
  
  金龍煥 의원에게 한 말
  
  金龍煥, 姜昌熙 두 의원이 황급히 金총리의 공관을 찾아간 7월12일 저녁 세 사람 사이에는 심각한 얘기가 오고갔다. 金총리가 직접 전하는 그날의 상황을 들어보자.
  
  『金龍煥 의원이 바로 이 자리에 와서 묻길래 이렇게 얘기했죠.
  
  「8월에 들어 내가 본격적으로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얘기가 먼저 들어가서 속이 상하는 모양인데 얘기가 나왔으니 한번 얘기해 보자. 내각제 연내개헌은 아무래도 어렵다. 어려운데 이 문제를 고집스럽게 밀고 나간다면 결국엔 (국민회의와) 헤어지게 될 것이다. 나는 헤어지는 것만은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말이야 강조하느라 내각책임제가 자민련의 존재이유라고들 하지만, 그것이 금년에 성사가 어렵다고 해서 자민련이 부서지고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계속해서 우리는 내각제 구현을 위해 노력을 해 나가면 된다. 단 금년내는 어려우니까 유보하고 다음 기회를 노리자는 뜻인데 그걸 좀 이해해 줘야겠다」 이렇게 얘기했지요』
  
  金총리는 『그러자 金의원은 「그건 못하겠다. 이렇게 되어서야 자민련은 고사하고 우리도 용인할 수 없다」며 상당히 강하게 항의를 했다』고 말했다.
  
  『그 전부터 나는 이렇게 말해왔어요. 「금년 내에 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것은 우리들의 의지에다 한나라당이 얼마만큼 협조하느냐, 그런 생각이 한나라당 의원들에게 얼마만큼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니 한나라당과 모든 얘기를 은밀히 해주길 바란다. 그러면서 여건성숙을 기하면서 문제를 제기해야 되지 않겠느냐」
  
  그런 얘기를 그동안 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李會昌(이회창) 총재를 만나고 그곳 의원들을 개별적으로도 접촉하면서 얘기를 진행해 왔어요. 그러나 한나라당 측에서는 말만 그저 多數(다수) 있다고 그러지, 그걸 믿고 이 문제를 추진할 만한 세력규합은 하나도 되어 있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자꾸들 급하게 밀어 붙이자고만 하니 내가 그랬어요.
  
  「고르바초프가 세계사적 면으로 볼 때는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소련은 그걸로 망했고 고르바초프 자신도 침몰했다. 그 이유가 뭐냐. 페레스트로이카(改革-注)와 글라스노스트(開放-注)가 동행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글라스노스트는 한번 시작하면 브레이크가 안 걸린다. 自轉(자전)해서 앞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 페레스트로이카가 뒤따르지 못하니까 상호괴리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 거기에 두 다리를 걸쳐놓고 개혁을 하려 했던 고르바초프는 그 사이로 침몰하고 만 것이다.
  
  우리가 지금 추구하고 있는 年內 내각제 구현도 그런 식으로 되어선 안되지 않겠느냐. 페레스트로이카로 말하자면 한나라당을 설득하는 것인데, 한나라당에서 협력할 수 있는 많은 의원들을 다져야 하는데, 내가 보기엔 하나도 되어 있지 않다. 그럼 안되는 것 아니냐. 그래서 나는 차선의 책을 택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최선의 策(책)을 택한다고 마구 밀어붙이면 국민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게 된다. 대통령과 나 사이에도 이만저만한 논쟁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공동정권은 깨진다. 우리도 약속을 안 지킨다고 갈라서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안 지키는 것이 아니라 못 지키는 것 아니냐」』
  
  『공동정권을 절대 깰 수 없다』
  
  역시 계속되는 金龍煥 의원과의 대화내용이다. 『내가 金龍煥 의원에게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약속을 지킬 수 있는 것을 안 지켰다면 그것은 포기라거나 극단적인 탓도 할 수 있겠지만, 지금 여건이 지킬 수 없는 상황이니까 조금 기다려 다시 기회를 보자는 것인데 그것이 무슨 포기냐 말이다.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꾸만 포기라고 하는 모양이지만 거기 너무 신경쓰지 말았으면 좋겠다. 정치라는 것이 어디 一刀兩斷(일도양단) 식으로 깨끗하게 되느냐. 항상 이렇게 겹쳐나가면서, 여러 복합적인 요인을 안고 있는 것을 하나 둘씩, 그때 그때 최선을 다해서, 最善(최선)이 안되면 次善(차선)이라도 찾아 해결법을 찾아 나가는 것이 정치 아니냐.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이번에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이라도 택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물론 나도 알고 있다. 내가 (내각제 연내개헌을) 유보하는 것이 좋겠다고 대통령과 합의를 본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공격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공동정권을 깨서는 안된다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들은 내가 연내개헌을 고집해 공동정권을 깬다면 또 나를 공격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내각제를 빌미로 공동정권을 깼을 때는 全 언론이 나라를 결딴내 놓았다고 해서 우리를 두들겨 팰 것이다. 사실이 그렇다. 왜냐. 우리가 갈라서면 국민회의 혼자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나라를 생각하지 않고 그저 黨利黨略(당리당략)에 따라 나라의 정치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고, 무책임하다고 할 것이 아닌가. 나는 그런 비난을 받을 생각이 없다. 그래서 차선을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당신에게 먼저 얘기를 했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말이 전해져 버렸다.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똑똑히 얘기하지만 절대 (국민회의와) 갈라설 수는 없다. 공동으로 세운 이 정권을 우리가 어려운 지경에 빠뜨린다는 것을 나는 생각할 수가 없다. 우리도 공동정권의 한 축이라는 말이다. 이 정권을 黨利黨策(당리당책)에 의해 부수고 나라를 어지럽게 만들어 놓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모든 사람들이 뭐라고 하더라도 나는 이길을 택하는 수밖에 없다」 내가 그랬어요』
  
  대통령과 워커힐 회동 내막
  
  ―그런 소동이 있고 난 뒤 총리께서는 金大中(김대중) 대통령과도 서울 워커힐 호텔에서 만나셨죠. 무슨 얘기들이 오갔습니까.
  
  『그것이 7월18일 일요일인데, 대통령께서 거기서 만나 얘기좀 하자고 해서 갔어요. 내가 그랬어요. 年內개헌 노력도 안해보고 유보한다는 이도 있을 가능성이 크니까 대통령께서 약속한 대로 국회 發議(발의)를 좀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렇게 하면 내각제를 실천할 의사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우선 보여주게 되고, 그런데 여러 여건들이 미숙해서 이룰 수가 없었다고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또 자민련에서 이를 강조하는 사람들도 납득이 가지 않겠습니까 그랬죠.
  
  그랬더니 대통령은 「내가 그 생각을 안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뭘 좀 생각하는 사람 같으면 한나라당의 협력이 없기 때문에 안되는 것을 뻔히 아는데, 그런데도 그걸 낸다는 것은 뭔가 요식이나 차리려 한다는 비난이 있지 않겠느냐. 그것 때문에도 여러가지가 어려워진다. 또 그때 發議해서 안되면 다음에 또 發議하면 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렇게 한 번 해서 안된 문제를 또 꺼낸다는 것은 여러가지로 불합리한 점을 낳을 것이다. 그러니 일단 發議를 했을 때는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을 때가 옳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때 가서 의지를 펴나가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해요.
  
  그런 대통령의 말씀에 나도 동의를 했어요. 「그러면 금년은 보류합시다. 그리고 내년 총선거가 끝난 다음에 여건이 더 성숙하기를 바라면서 그때 다시 추진하기로 합시다. 양당 8인 위원회를 만들어 거기서 차후 共助(공조)해 나가는 기본자세를 굳히고 내각책임제를 추진해 나가는 앞으로의 여러 자세를 재확인하고 내일에 대비해 갑시다」 이렇게 얘기가 된 거예요. 그래서 兩黨(양당) 8인 위원회를 만들고, 年內개헌 유보에 대해 黨에서 추인들을 해주고 총선이 끝난 다음에 추진하기로 한 것입니다. 내각제를 연기하기로 한 이유가 그렇게 된 겁니다』
  
  李會昌 총재와 비밀회담 내용
  
  ―말씀 중에 李會昌 총재와 내각제 문제를 논의했다고 했는데, 金총리가 직접 만난 적도 있습니까.
  
  『있습니다. 지난 봄인가였어요』
  
  ―내각제 문제도 얘기했습니까.
  
  『했습니다. 「나는 내각제에 찬동하는 어떠한 사람과도 손잡고 하겠다고 이미 얘기를 했는데, 사실 내각제가 되고 안되고는 이 공동여당과 더불어 한나라당의 의지에 달려 있다, 어떻습니까, 한번 힘을 합쳐 할 생각이 없습니까」 그랬어요.
  그랬더니 명백한 대답은 않고, 「하여튼 진행되면서 여러 가지를 좀 더 봅시다」 그런 애매한 대답으로 끝났어요. 그런 다음 한번 더 만나자고 사람을 통해 연락이 왔는데 내가 안 만났습니다』
  
  ―총리께서 안 만났다는 말씀인가요.
  
  『사무총장(한나라당 辛卿植 전 사무총장-注)을 통해 만나고 싶어한다는 연락이 왔는데 안 만났어요. 본의와 다르게 여러 가지 다른 소리가 퍼질까 봐 조심스러워 안 만났습니다. 대신 金龍煥 수석부총재가 접촉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통해 얘기를 듣고 했지요. 그러나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金龍煥 부총재도 똑 부러지게 (내각제에 관한) 언질을 받거나 속얘기를 듣거나 한 적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점점 나는 「이건 안되는 거구나」 생각을 하게 되었죠』
  
  ―辛卿植(신경식) 사무총장이 지난 4월에 느닷없이 내각제 검토의사를 밝힌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그런 과정에서 나온 것입니까.
  
  『내가 李총재를 만난 다음에 그런 얘기가 사무총장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에 「속으로는 생각이 있나」하고 생각했을 정도지 크게 믿음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하여튼 그런 다음 한번 더 만났으면 한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내가 만나지 않았어요』
  
  ―그때 다시 한번 만났어야 하지 않았습니까.
  
  『아니에요. 내가 만나고 수석부총재가 두세 번 더 만났는데 별 반응이 없었습니다. 내가 다시 만나면 잘못하면 여러 가지 오해를 살 가능성이 있어 조심했지요』
  
  ―李총재와 만났을 때는 내각제 외에도 여러 가지 國政(국정)에 관한 얘기들도 했습니까.
  
  『내각제 외에 다른 얘기들은 안했습니다. 다만 우리나라의 어제 오늘 내일을 생각할 때, 이 나라가 21세기 의회민주주의를 제대로 하는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내각제가 가장 소망스러운 제도이기 때문에 이걸 실현시키는 데 한번 협력을 합시다, 그게 내 얘기의 골자였습니다』
  
  ―1997년 大選 前 가을에도 내각제 문제로 李會昌 총재와 대화가 있었죠?
  
  『李총재가 자민련 당사에 왔을 때 나와 집무실 뒷방에서 직접 얘기했습니다. 그때 자기는 내각책임제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했죠. 그렇지만 그걸 위해 협력하겠다는 적극적 언사도 없었어요. 반대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했죠』
  
  ―내각제를 실현시키려면 설득해야 하는 사람중 한 사람이 李會昌 총재인데, 李총재가 앞으로 내각제를 지지할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까.
  
  『그건 모르겠어요. 그러나 정치인이란 항상 어떤 가능성도 갖고 있으면서 그때 그때 택하는 것인데, 그 가능성 여부는 내년 총선 결과에 상당히 달려있다고 봅니다』
  
  6월쯤 이미 內閣制 연기 결심
  
  ―金大中 대통령과 내각제 문제를 갖고 진지하게 얘기한 것은 7월18일 워커힐 회동이 처음이었습니까.
  『아니죠. 그 전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金대통령이 내각책임제에 대해 기피한다든지, 고의로 안하려고 한다든지 혹은 어떻게든 꾀를 부려 「내가 대통령으로 5년을 채워야 되겠다」든지 하는, 그런 것을 感得(감득)할 수 있는 어떤 언행도 없었습니다.
  다만 우리는, 경제가 결딴났는데 이걸 다시 일으켜야 한다는 데 전력을 투구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내각제보다는 그런 경제문제에 중점을 두고 더 얘기를 했지요』
  
  ―그처럼 金대통령이 내각제에 대해 회피하지 않았다면 한나라당의 설득에 자민련보다는 국민회의가 더 적극적으로 나왔어야 했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지요. 그러나 그것은 제3자가 봐서 하는 얘기이고, 국민회의는 국민회의대로 지난 1년 동안 가졌던 입장이 있지요. 그게 이해못할 정도도 아닙니다. 그래서 「종합적으로 볼 때 몇 사람의 강경한 요구를 갖고 이것이 관철될 수가 없다. 관철할려고 하면 그건 결국 싸움이고, 싸움하면 결국 헤어지게 된다. 헤어지게 되면 나라는 결딴난다. 국민회의 혼자 할 수 없으니까. 야당하고는 극한 대립을 하고 있는 상황인데, 우리가 헤어져 나라가 어지럽게 되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느냐. 그것 하나 연기 못하고서 소위 몽니를 부리고 있는 측에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냐. 공조를 해서 공동정권을 세웠으면 정권의 한 축인데, 그 축을 부숴버리는 측에 책임이 있는 게 아니냐. 나는 그것은 할 수 없다. 이제 겨우 1년 반만에, 아직도 어려운 점은 많이 있지만 그래도 허리를 조금 펼 수 있게 되었는데, 그걸 다시 주저앉게 만드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당내 어느 누가 뭐라고 나를 욕하든 나는 부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연기밖에 없지 않느냐」 이렇게 결론을 내린 겁니다.
  
  하나를 얻지 못한다고 해서 전부를 결딴낼 수는 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대통령께서 「내일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도, 당내 사람들이 물을 때도, 「마지막에 가서는 국가차원에서 결심할 것이다」고 말해왔습니다. 그런 말을 기자들도 들었을 겁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內心(내심)으로는 그런 결론(내각제 개헌 연기-注)에 언제 도달했습니까.
  
  『지난 여름에 그런 정도까지 도달했습니다』
  
  ―여름이면 6월쯤을 말하는 겁니까.
  
  『그렇죠. 그 이전에도 여러가지 생각을 해 왔지만, 6월 지나면서 이젠 조만간에 결정해야겠구나 생각했지요. 8월까지라고는 했지만 그 前에 확실한 결심을 하고서 대통령과 얘기를 해야겠구나, 그렇게 생각을 해 왔죠』
출처 : 월조
[ 2003-07-14, 14:3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리버티헤럴드  |  뉴스파인더  |  이승만TV  |  장군의 소리  |  천영우TV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