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전 총리의 세기말 좌담 -강영훈,남덕우,노재봉(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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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개혁 못해 IMF 사태 불러
  
  사회 : 20세기 세계의 발전과 한국의 발전이 어떠한 과정을 걸어왔는지를 10년 단위로 끊어 보면 흥미로운 결과가 나옵니다. 1900년에서 1910년 사이 우리는 러일전쟁의 결과 식민화가 결정되었고, 세계는 미국의 시대가 열리고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만들면서 인간이 하늘을 날게 됩니다. 1910년대는 우리에게 국권상실과 3·1 운동이라는 저항의 시대이며, 세계적으로는 제국주의가 1차 대전으로 몰락하고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는 시기입니다. 1920년대에 국내는 민족 언론이 등장하면서 문화적 계몽이 이루어지는 시대이고, 세계는 대량생산 대량소비 시대가 시작됩니다. 1930년대는 일본이 조선을 兵站基地(병참기지)화하고, 세계적으로는 파시즘, 스탈린이즘, 나치즘, 군국주의가 등장합니다.
  
  1940년대에 우리는 우리 말과 글을 빼앗겼다가 해방과 분단을 겪고, 세계는 2차대전의 「불타는 세계」를 거쳐 전후 美蘇 양극 체제로 갑니다. 1950년대에 우리는 전쟁과 복구, 세계는 냉전이 심화되는 시기입니다. 1960년대는 우리의 근대화가 시작되고, 세계는 고속 성장 시대입니다. 1970년대에 우리는 해외로 나가 민족의 활동 공간이 넓어지고, 세계는 오일 쇼크를 겪고 환경운동이 시작됩니다.1980년대에 우리는 민주화 진통을 겪고, 세계는 공산주의가 붕괴됩니다. 1990년대에 와서 한국은 정보화 시대를 맞았고, 세계도 정보화 시대입니다. 우리가 세계의 흐름에 비로소 합류하게 된 것입니다.
  
  20세기가 시작될 때 세계가 하늘을 나는데 우리는 비로소 개혁을 시작하는, 엄청난 격차로 출발해 같은 세기에 따라잡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물질적·경제적 차원일 뿐입니다.
  
  그동안 말씀을 정리하면 20세기 우리에게 강요된 開化와 分斷(분단)의 와중에서도 우리가 이룩한 가장 큰 성과는 민족국가를 만들고 또 이 민족국가가 기능할 수 있도록 하는 물질적, 군사적 바탕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 IMF를 맞으면서 우리가 스스로 개혁해야 할 것을 못하고 강제적인 개혁을 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20세기를 열 때 가지고 있었던 문제, 즉 자주성과 주체성의 문제가 아직 풀리지 않고 있지 않은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해 봅니다.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IMF를 맞아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합니까.
  
  盧在鳳 : 우리 사회가 초고속으로 산업 사회로 바뀌면서 세계와의 연관이 밀접하게 되었습니다. 나도 정부에서 이를 추진하고 기초를 다졌습니다만,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 전환을 하게 되면, 기술 인력이 들어가야 하고, 두뇌 인력이 들어가야 하고, 이렇게 되면 지배 방식이 과거와 같아질 수가 없습니다. 어쨌든 그런 식으로 전환되어 나가야 하는데, 그 전환이 뿌리를 잘 내리지 못하고 그대로 나가면 나갈수록 低능률, 非효율적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정부에서 보니까 이미 이렇게는 한 발자국도 못나가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때문에 IMF사태가 온 것은 한국 경제가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데 사회적인 기초가 안된 데서 온 결과입니다. 자율과 타율의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굳이 시기적으로 보면 1987년부터 전반적으로 새로운 기초가 깔아져야 했고 깔려는 노력이 시작되어야 했는데, 이것이 계속 지연돼 오다가 결국 IMF사태라는 것이 터진 거지요. IMF사태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外貨(외화)의 유동성 문제로 터진 것이 아니고 펀더멘탈(경제 기반) 전체의 동맥 경화에서 온 결과라고 봐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IMF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경제의 투명성라든지, 합리성, 계산성, 그런 것들이 빨리 시정되지 않으면 그 당시부터 이미 희망이 없었던 것입니다.
  
  南悳祐 : 1980년대 중반부터 국제화 세계화 그리고 금융개방에 대비하여 경제 운영의 패러다임을 고쳐야 한다는 識者(식자)들의 소리가 높았습니다. 그러나 정치력, 행정력의 부족으로 개혁이 지연돼 오다가 1997년 태국, 인도네시아 등에서 외환위기가 발생하자 국제 금융계는 한국의 구조적 취약점으로 눈을 돌리게 됐습니다. 과연 한국이 외환위기의 예외가 될 수 있느냐 하는 의구심이 표면화하자 우리 금융, 기업, 정부에 대한 신뢰가 일시에 무너지면서 외환 파란을 겪게 된 것입니다.
  
  1990년 초에 미국 압력에 의해 자본 시장을 조금 개방 했습니다. 그때 한국의 금리가 국제 금리의 두 배나 됐습니다. 외국 은행의 지점에서 봤을 때 자국에서 금리 6~7%로 자금을 조달해서 한국에서 13~14%로 운영하면 곱배기 장사가 되는 겁니다. 물론 환율이 일정하다는 전제는 있어야 하지만…. 여하튼 이후 외국의 단기 자본이 대거 몰려 왔습니다. 추산을 해보니까 1996년까지 5백억 달러가 들어 왔습니다.
  
  이 돈을 한국에서는 어떻게 했느냐? 그것은 단기자본이었는데, 우리 금융기관과 기업들은 경험이 없으니까 장기투자를 했어요. 인도네시아, 러시아의 정크 펀드(부실채권)까지 샀어요. 단기자본을 가지고 장기투자를 한 거지요. 그러니 미국 사람들이 한국에 불안을 느끼고 자본을 회수해야겠다고 했을 때 내줄 돈이 없는 겁니다. 정부가 외환보유고를 충분히 가지고 있으면 모르겠는데 그것도 없으니까 파탄에 이른 것은 필연적인 것이지요.
  
   민주화-개방화-정보화의 「3化」에 제대로 적응 못해
  
  자본시장을 개방하기 전에 우리 금융 산업의 전체적인 취약점을 개선하고, 금리도 국제시장과 비슷하게 만들었어야 합니다. 금융이라는 것은 한 나라의 자본의 배분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금융기관은 대기업, 특히 재벌 중심으로 대형 투자가 있으면 경제적 타당성이나 리스크는 제대로 따져보지도 않고 치중했습니다. 책임경영 체제가 없었던 겁니다. 그리고 정부의 감독도 불충분했습니다. 단기투자를 종금사들이 굴렸는데, 당시 개혁이다 자유화다 해서 정부가 감시의 고삐를 놓아버렸습니다. 그래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당한 것입니다. 설사 IMF 위기가 없었다고 해도 우리는 커다란 전환기에 놓여 있었다는 게 사실입니다.
  
  姜英勳 : 일부에서 IMF가 와서 우리를 망치고 있다는 시각도 있는데, IMF에 도와달라고 한 것은 우리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美제국주의자들의 금융 지배」 같은 시각은 위험합니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우리가 너무 빨리 들어갔어요. 적어도 OECD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선진국들간에 적용되는 룰(규칙)을 우리가 만들었어야 했습니다. 일단 들어가고 나면 그 룰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겁니다. 들어가고 나니 정부의 규제도 자유화다 뭐다 해서 풀 수밖에 없게 된 거지요. 종금사가 난립하게 된 것 아닙니까.
  
  우리가 급하니까 IMF 보고 도와달라고 했는데 밑빠진 독에 물 붓기로 도와 줄 수는 없지 않아요? 그러니까 우선 투명성부터 확보하고, 재벌들의 정치자금도 없애라는 겁니다. 시장원리를 강조해서 정당하게 돈을 벌고, 기업은 망해도 기업인은 망하지 않는 그런 식의 기업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돈을 빌려주면서 병을 고칠 처방을 주는데, 그걸 우리를 망치게 하려는 것 아니냐고 보는 것은 문제입니다. 물론 해외자본이 국내에 들어와 주식투자에서 이익을 빼 가고 하는, 헤지펀드 등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요.
  
  사회 : 1980년대에 우리가 새로운 틀을 짜야 했고, 문제의식도 있었지만 실천이 되지 않아 IMF사태가 왔다고 지적들 하셨습니다. 이것을 해야 할 문제의식이 있었으면 그것을 실천, 또는 개혁해야 할 책임은 정치적 리더십의 몫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1980~90년대는 민주화의 시기입니다. 민주화된 리더십이 이를 못했다면 우리의 민주화에 문제는 없었는지 반성해 볼 필요도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이 시대는 3金이 권력을 놓고 다투면서 한편으로는 권력을 分占(분점)해서 우리나라를 이끄는 「3金 리딩 시대」였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南悳祐 : 우리가 「3化」 시대, 즉 민주화, 개방화, 정보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결국 이런 사태가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민주화라고 해서 그동안 여러 가지 일을 겪지 않았습니까? 전직 대통령들과 현직 대통령 아들이 형무소를 갔습니다. 임금이 오르고 노사분규는 늘었습니다. 외부에서는 한국에 대해 점점 불안을 느끼고, 국내적으로는 기업이 앞을 내다보고 사업을 꾸려 나갈 수 없게 됐습니다. 또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우리가 국내 체제를 개혁하지 않고 개방을 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정보화 시대에 세계 흐름에 맞게 빨리 산업구조를 바꿔 나가야 합니다. 그 적응이 여의치 않았고, 상당히 진통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국가가 당면한 문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가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루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代議(대의) 정치는 제 궤도에 오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언제 나아지겠느냐? 3金시대가 가고 새로운 지도자가 나와서 정말 능률적이고 생산적인 代議정치를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3金시대가 우리 정치의 발목을 잡아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文民정부」 「국민의 정부」는 修辭에 지나지 않아
  
  姜英勳 : 金泳三(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면서 민주화가 된 것처럼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민주화가 정식으로 시작된 것은 盧泰愚(노태우) 정권 때부터라고 해야 합니다. 그때의 헌법은 여야 의원들이 앉아서 담소하면서, 샴페인을 터뜨려 가면서 의논해서 만들었습니다. 대통령 선거법도 여야 의원들이 오순도순 만든 겁니다. 그래서 선거를 해서 盧泰愚 후보가 대통령이 된 것입니다. 그가 軍 대장 출신이라고 해서 군사정권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거예요. 내가 盧정권 때 행정부에 있었지만, 국회에 나가면 밤낮 盧정권은 민주정권이 아니라는 거예요. 야당들이…. 도대체 그런 인식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3化」 이야가 나왔는데 우리 나라가 개방된 것도 盧대통령 때입니다. 그때 소련, 중국하고 수교하고, UN에 들어갔어요. 盧정권 때 민주화, 개방화가 완성된 것은 아닐지라도 시작은 한 것입니다. 시작을 하면서 문제가 많았지요. 그때 정부에 들어가 보니 매일 데모가 일어나요. 노동 운동하는 사람들이 데모, 학생들이 데모…. 데모 좋습니다. 민주화하는 데에는 데모가 필요하지요. 국민 여론의 반영이니까. 그러나 데모는 법에 의해서 해야 합니다.
  
  그때는 주로 不法(불법) 데모였습니다. 민주주의라는 간판을 가지고 사회 질서를 문란하게 했습니다. 자기들이 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민주화 운동의 선봉에 서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잘못이라고 누구도 강하게 말도 못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노조 사람들이 생산시설에 들어가 다른 사람이 조작을 못하게 시설에 주저 앉고…. 선진 민주국가에서는 볼 수 없는 일들이었습니다.
  
  盧在鳳 : 민주화 문제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초기에 산업화를 한 방식을 여러 가지 개념으로 나타낼 수 있겠지만, 나는 이를 新重商主義(신중상주의)적인 체제와 신중상주의적인 정책방식으로 개발을 해 나갔다고 말합니다. 산업화를 시작할 당시 우리 나라 직업 종류가 몇 안 됐습니다. 농경사회였으니 많을 수가 없었지요. 그런데 내가 정부에 있을 때 보니까, 지금은 더욱 많아졌겠지만, 직업 종류가 2만4천 정도가 됩디다.
  
  무슨 말이냐 하면, 부지런만 하면 된다는 그런 시대가 지나간 거지요. 산업 연관이 복잡해지고, 두뇌와 고급 인력이 대폭 투입되면 더 이상 신중상주의적인 방식으로 국가와 경제를 운영해 나가는 것이 어렵게 됩니다. 각 섹터(분야)가 자율성을 갖고,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시스템으로 이루어 나갈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산업사회는 분화가 되는데, 이 분화되어 나가는 것을 인정해 주는 것이 자율성을 인정해 주는 것이고, 말을 바꾸면 민주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권력의 한계가 설정되고, 기업은 기업 나름대로 정부의 통제도 받고 협력도 하면서 또 비켜 나가기도 하고, 이런 것이 민주화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민주화가 시작되는 것이 6共(공) 1期(기)입니다. 지금은 헌법상으로 6共 3期입니다. 6共 2기, 3기를 문민 정부, 국민의 정부라고 규정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정책으로 규정하면 좋아요. 정책으로 이 정부는 무엇을 하기 위한 정부다 라고 하는 것은 좋지만 어떻게 문민 정부, 국민의 정부식으로 命名(명명)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레토릭(修辭·수사)에 불과한 것입니다.
  
  어쨌든 과거에 신중상주의적인 권위주의식으로 국민을 모빌라이즈(동원) 하고, 또 불균형 발전 정책을 강행했는데, 더이상 이것이 불가능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율성를 확보해주고 하는, 소위 민주화라는 것이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이것이 빨리 충족이 안되면 그 다음 발전이 안되는 거지요. 그래서 역사적인 과제는 권위주의와 발전의 컴비네이션(결합) 문제에서, 민주주의와 발전의 문제로 옮겨갔습니다. 민주주의적인 방식으로 어떻게 발전을 도모할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이 발전의 기초가 되는 여러가지 조건이 1980년대 중반에 한계에 들어왔다는 것은 南총리께서 지적하신 대로입니다.
  
  그런데 6공 2기, 3기 정부가 여기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YS 때는 순수한 권력투쟁적인 측면만 강화되었어요. 통치나 권력 행사라고 하는 것이 본질은 원래 寡頭的(과두적) 입니다. 그러나 과두성이 度(도)를 넘쳐버리면 안 됩니다. 무엇을 위한 과두성이냐는 인식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경제는 한계에 부닥쳐서 빨리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야 하는데, 金泳三 대통령은 외국만 나가면 『당신네들 민주화해라. 우리 돈 많으니까 도와주겠다』는 식으로 큰소리만 쳤습니다. 밖에서는 우리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다음 6공 3기가 지금 정부인데, IMF 극복이라는 「불행한」 과제가 없었으면 지금 이 정부도 어디로 튀었을까 싶어요. 지금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래요.
  
   민주화-산업화의 순서가 유럽과는 반대
  
  姜英勳 : 민주화는 영국이나 유럽의 예를 보면 重商主義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개인 단위로 돈을 벌려니까 합리주의 정신이 배양돼야 한다고 생각한 거지요. 그 위에 문예부흥이나 종교개혁 등의 과정을 통해 개인의 성숙기를 거치게 됩니다.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동시에 사회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절실히 알고 느끼고 실행하는 그런 개인입니다. 그런 시대를 거쳐 민주정치 문화가 먼저 정착이 되고, 산업화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개인의 성숙기, 즉 개인이 정직하고 성실하고 합리적이 된다는 단계를 거치지 못하고, 산업화를 먼저 했습니다. 산업화를 하면서 중산층이 생겨나고, 민주화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유럽의 역사 과정과 거꾸로 되었습니다.
  
  요즘, 말로는 민주화한다, 또 제도도 많이 민주주의적으로 되어가고 있지만, 의식은 과거 권위주의 그대로 입니다. 문제는 민주정치 문화, 민주시민 의식을 어떻게 함양해 나가는가 입니다. 그것 없이 아무리 구조개혁을 해도, 나무 위에 올라가 물고기 잡는 격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金대통령이 구조개혁에 애를 쓰고 있고, 또 제2의 건국을 위해 의식개혁을 이야기하지만, 의식개혁이 국민운동으로 전개되어 가면서 해야 하는데…. 잘 모르겠어요. 보조가 잘 맞아 들어가지 않는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사회 : 시민윤리가 정착된 바탕 위에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민주주의가 이루어져야 민주주의가 생활화되고, 그래야 法治로 구현된다는 말씀이시지요.
  
  姜英勳 : 우리는 그런 기본이 없이 산업화를 했어요. 영국의 명예혁명은 1688년입니다. 산업혁명은, 아담 스미스가 國富論(국부론)을 발표한 때를 기준으로 하면 1776년이에요. 1백년 후에 산업화가 된 거지요.
  
  盧在鳳 : 민족국가를 창건한 李대통령, 경제 발전의 산업화 기초를 놓은 朴대통령, 그후 과도기를 지나 6공 1기에서 민주화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한국의 큰 역사적 과제가 대충은 이루어졌는데, 남은 것이 있었어요. 통일 문제입니다.
  
  그러나 통일 문제를 가지고 민족적 업적을 남기겠다는 욕심이 문제였습니다. 나라가 통일에 접근할 수 있는 기초가 되어 있느냐 없느냐는 不問(불문)에 부치고 나간 것이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개혁을 하기 위해서는 6공 2기, YS정권에서 본격적으로 청사진이 제시되었어야 했고, 또 역대 대통령 중 YS처럼 좋은 조건으로 상속을 받은 사람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것을 전부 다 놓치고 말았어요. 그것이 결국 IMF사태로까지 연결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정부에서 일을 해 본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지금도 무엇을 하기 위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면 정보화 시대라고 하면 벤처기업을 양성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新지식인이 양성되어야 합니다. 新지식인이 무엇입니까. 얼마 전 청와대 장면이 텔레비전에 나왔는데, 신지식인이라고 식당 쉐프가 모자 쓰고 나오고 합디다. 이런 게 신지식인입니까. 정보화, 과학화 시대에 휴머니티(인간적 요소)는 빼고, (기술적으로) 직접 투입할 수 있는 그런 무엇, 그런 형태를 이야기하는 것인데 지금 나아가고 있는 것은 달라요. 정보화 시대에 따라갈 수 있는 기초는 돼 있습니까? 한 예로 지금 교육이 다 죽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벤처기업에 투입할 신지식인을 어디에서 구한다는 이야기입니까?
  
  여기 계신 분들이 모두 행정부에 있어 봤지만, 행정체제도 이래서는 안됩니다. 과거 생산을 독려하기 위해 만들어진 체제가 일정 시기에 방대한 효력을 발휘했죠. 그런데 민주화가 되고 자율성을 보장하자고 하는 지금에는 행정 자체가 서비스 체제가 돼야 해요. 아직 그것이 안되고 있어요. 6공 2기, 3기 정부 들어와 행정개혁을 한다고 했는데 무엇을 위한 개혁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민주화 플러스 발전」이라는 역사적인 과제가 상실돼버린 것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사회 流動性 높아 프로정신도 부족
  
  南悳祐 : 지금 정치 권력자들의 중요한 통치 수단이 세무조사와 검찰, 그리고 監査(감사)가 되고 있습니다. 사람들 말에 의하면 과거보다 더 하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 나라 민주주의의 척도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개선될 수 있겠느냐? 아무리 생각해봐도 경험과 自覺(자각)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별 도리가 없어요. 시간이 걸리는 겁니다. 사람들이 직접 겪어보고 지쳐서야 바꿔나가는, 그런 과정입니다. 길게 인내를 가지고 바라보아야 민주주의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盧在鳳 : 합리성의 결여도 지적돼야 합니다. 경제에서 말하는 합리성이란 계산성을 이야기하는데, 이 합리성의 결여로 망한 것이 공산주의입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 유교적인 전통 윤리를 가지고 있었고, 농경사회가 그렇게 계산성이 필요없었던 사회였어요. 그러다가 근대화가 이루어지면서 우리나라의 사회 유동성이 굉장히 높아졌습니다. 유동성이 높다보니 자기가 지금 하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생각은 다른 데에 가 있습니다. 프로정신이 없다는 것이지요. 제사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는 격입니다. 프로정신의 결여가 우리 사회 발전의 커다란 장애 요소가 될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정착시키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급속한 압축 성장을 해왔는데, 그때는 농경사회라는 단순사회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래서 행정이라는 것도 생산 독려 체제였습니다. 민주화 사회에서는 행정도 서비스 체제로 나가야 합니다.
  
  또 한가지 추가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우리 나라는 대통령제인데 대통령의 유형이 문제입니다. 李대통령부터 盧대통령까지는 非직업 정치인이 대통령을 했어요. 그뒤에 6공 2-3기에 직업 정치인이 대통령이 됐지요. 그런데 권력 행사의 특성을 본다면 대체로 非직업 정치인이 대통령이 됐을 때에는, 힘과 확신이 기초를 이루어요. 반면 직업 정치인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에는 詐術(사술)과 정보, 이 두 가지가 통치 수단의 기초가 돼요.
  
  문제는 여기에서 생겨납니다. 한국 경제나 사회 조직, 모든 면이 합리적으로 정착되고, 계산성으로 나아가야 하고, 프로정신이 있어야 하는데, 통치하는 방식은 다른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통치 권력층과, 한국이 안고 있는 과제가 충돌하고 있는 겁니다.
  
  사회 역사의 한 단계를 생략하고 뛰어 넘는 것이 어렵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최근 李光耀(이광요) 前 싱가포르 총리가 全經聯(전경련) 세미나에 와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문화를 바꾸기는 어려우나 시스템을 바꾸는 것은 쉽다고. 우리가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은 바꿨지만, 그에 따른 문화는 바꾸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르네상스的인 개인의 自覺(자각) 단계를 지금 민주화를 하면서 비로소 동시에 경험하고 있는 셈인데,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것을 먼저 하려고 민주화를 미룰 수도 없는 일이고…. 결국 동시에 갈 수밖에 없다는 데에 우리 고민이 있는 것 같습니다.
  
   軍事문화를 軍事독재와 같이 보는 것은 문제
  
  姜英勳 : 우리가 과도기에 있는 거예요. 전통적인 권위에서 이상적인 형태로 가는 도중에는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게 막스 웨버의 이야기입니다. 이상적 사회로 가는 데 필요한 경험과 自覺을 위해서는 지도자의 절대적인 先導(선도), 지도, 모범이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그것이 부족해요.
  
  여기서 군사문화라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좀 해야겠습니다. 우리 나라가 군대를 60만이나 가진 때가 역사상 없었어요. 그것도 국토의 절반인 대한민국에만 말입니다. 6·25때만 해도 군대가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기업이고, 가장 큰 조직체였지요. 전통사회에서 민주사회로 만드는데 미국 사람들은 憲法(헌법)만 만들어주면 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헌법 만들었는데 쿠데타 일어났어요. 터키 희랍에서도 그래…. 왜 이러느냐? 그래서 소위 정치발전 이론이라는 것이 미국의 정치학계에서 발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개발도상국가가 어떻게 민주화할 수 있느냐? 여기서 두 가지 전제 조건이 나왔습니다. 하나는 경제 발전 수준이 어느 정도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교육 수준입니다. 여기서 개발도상국의 과도적인 단계에서는 군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인식이 생겼습니다. 군대가 농경사회에서 조직사회로 넘어가는 발판을 제공한다는 거예요. 군사독재라고 하는데 몇 사람의 군인들이 정치에 간여한 것뿐이지, 군인 전체가 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군사문화란 무엇이냐? 우리 나라가 산업혁명을 할 때에 기초적인 기술을 제공한 것은 군대입니다. 내가 군대를 그만둘 때 軍 보유 차량이 2만 대였는데 당시 사회가 가지고 있는 차량이 모두 2만 대였어요. 군대에서 나오는 자동차 부속품을 사회가 썼어요. 운전 기술을 배워준 것도 군대였습니다. 통신, 공병, 포병 이런 게 모두 기술입니다. 소총도 半(반)자동이에요. 낫 놓고 기역字(자)도 모르는 청년들에게 이런 기술교육을 시킨 거예요. 군대가 국민 기술훈련 道場(도장) 역할을 한 것입니다. 전쟁 때 논산 훈련소에 매일 6백명씩이 들어오고 나갔어요. 그중 40%가 문맹자예요. 문맹자가 어떻게 자동화 기계를 다룹니까?
  
  그래서 각 사단에 학교를 만들어 가나다부터 가르쳤습니다. 최소한 6개월을 가르치면 편지를 집에 쓸 수 있고, 글을 읽을 수 있었어요. 이걸 군대가 한 겁니다. 그걸 군사문화라고 하면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러나 독재로 국민을 억압하고, 민주주의에 反動(반동)된 것을 군사문화라고 하면 이해할 수 없어요. 이런 잘못된 인식이 국민들의 머리 속에 들어가 있는데, 언론 기관도 책임이 있어요. 국민이 軍을 배척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출처 : 월조
[ 2003-07-14, 15:1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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