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뒤흔든 격동의 10일간 完 김재규 최후의 날(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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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장 속의 정신병자
  
  = 부산중부서 유치장
  
  고려신학대학생 宋길원은 17일 밤 중부서보호실에 갇혔다. 그가 보호실에 들어가자 먼저 잡혀와 있던 시민들이 박수로 이들을 맞아주었다. 헛소리를 하는 정신병자도 잡혀와 있었다. 이날 밤은 부산했다. 연거푸 비상벨이 울리고 경찰관들이 급히 뛰어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데모대가 갇힌 사람들을 구출하러 온다는 소문이 보호실에까지 전파돼 왔다. 계엄선포 이후 분위기가 싹 달라졌다. 지독한 신문 선풍이 불었다. 경찰은 宋군에게 불지른 사실을 자백하라고 강요했다.
  
  고통을 견디다 못한 그는 집에서 휘발유를 가져와 뿌렸다고 거짓 자백을 했다. 화끈해진 형사는 이 사실을 수사과장과 서장에게 보고했던 모양이었다. 간부가 직접 면담하겠다고 宋군을 불렀다. 이 자리에서 그는 허위 자백했다고 말했다. 화가 치민 간부는 형사를 불러 심하게 나무랐다. 이 형사는 분풀이를 宋군에게 했다. 宋군은 구류 10일 처분을 받았다. 그가 들어간 유치장엔 정신병자가 들어 있었다.
  
  『호는 설여, 이름은 정해영』이렇게 자기소개를 한 26세의 이 청년은 유치장의 노리개가 됐다. 짧은 영어회화도 그는 곧잘 했다. 노래를 특히 잘 불렀다. 그의 18번은 「맹진사댁 세째 딸」이었다. 그는 밤중에 가끔 간수를 깨웠다. 눈을 부비며 짜증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간수에게 그는 『노래 신청받습니다』고 애교를 떨었다. 그는 자신이 어째서 데모피의자로 잡혀와 있는지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다른 피의자들은 친척이 넣어준 사식을 맛있게 먹고 있는데 그 혼자만 배를 주리고 있는 모습은 처량하기만 했다.
  
  『아저씨 배가 고픕니다. 김밥 하나 주이소』 출감 전날밤 宋군이 들어 있던 유치장 9호실에선 이별을 아쉬워하는 파티가 열렸다. 초대가수는 정해영이었다. 파티가 끝난 뒤 그는 말했다. 『나는 어디로 가지?』 광복동의 어느 안경점 종업원이 『나하고 같이 일하자. 주인에게 소개시켜주겠다』 그러나 정해영은 자존심이 강한 정신병자였다. 宋군이 유치장을 나오던 날 아침에도 정해영은 자기의 런닝셔츠를 벗어 물걸레로 만들어 변소청소를 하고 있었다. 『설여? 잘 있게』라고 작별인사를 했다. 돌아서 나오는 宋군의 눈엔 이슬이 맺혔다.
  
  한 소년의 체험기
  
  18일 밤 마산경찰서에 붙들려간 金호영 소년은 19일부터 조사를 받았다. 형사는 다짜고짜 돌을 몇 개 던졌느냐고 물었다.
  『안 던졌읍니다』
  『이 xx가 거짓말을 해?』 형사는 수갑 채인 소년의 팔을 위로 치켜 올렸다. 소년은
  『바른대로 말하겠다』고 했다. 『
  돌맹이 몇 개 던졌어?』 소년은 그러나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안 던졌읍니다』
  『불은 어디에 질렀어』
  『안 질렀읍니다』 형사는 池경복이란 17세 소년을 데리고 왔다. 池군은 혼이 빠진 것 같았다. 그는 金효영과 함께 파출소에 불을 질렀다고 말했다. 金효영은 池경복이 심한 조사의 충격으로 머리가 돈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래도 金군이 자백을 않자 형사는 지하실로 두 소년을 데리고 갔다. 이미 혼이 빠진 池경복은 『나는 기름을 뿌리고 효영이가 성냥을 그었읍니다』고 말하고 있었다. 다음날엔 형사가 드라이버를 가져 와 책상 위에 내놓았다.
  
  『이것으로 누구를 찔렀지?』
  『이것이 뭡니까?』
  『이 xx야! 너가 이것으로 우리 경찰관 찔렀잖아!』 형사는 김효영군에게 찔렸다는 뚱뚱한 경찰관을 데리고 왔다. 끝까지 소년이 찌르지 않았다고 하자 형사는 소년을 또 지하실로 데려갔다. 세째날엔 형사 의 책상 앞에 광택이 나는 차돌맹이 하나가 놓였다. 이돌은 마산 경찰서에 붙들려온 사람들에겐 눈에 익어 유명해진 것이었다. 여자 대학생의 핸드백에서 나왔다고 해서 투석의 증거물이 된 그 돌이 이번엔 소년이 파출소에 던진 돌로 변했다. 김효영 소년은 돌을 던지고 불을 지르고 경찰관을 드라이버로 찌른 혐의를 덮어쓰고 21일 구속됐다. 유치장에서 金효영 소년은 새벽 2시쯤만 되면 조사를 받고 울면서 돌아오는 여자 5명을 눈여겨 봤다. 그들은 유치장에 들어와선 울음을 그치고 찬송가를 목놓아 불렀다.
  『내주는 강한 성이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崔모양은 연방 『우리가 이겼다』고 외쳐댔다. 아가씨들이 「고향의 봄」을 부를 때 소년은 엄마생각이 나서 따라 울었다.
  
  공무원이 감정한 「반시(反詩)」의 불온성
  
  다방 주방장인 金석만(18) 소년은 10월20일밤 8시50분께 서면 부산진 세무서 앞길에서 계엄군 옆으로 지나가다가 붙들려 혼이 났다. 金군은 화가 치솟았다. 동국빌딩 계단을 뛰어올라가 5층 옥상에 있던 음료수 공병 3개를 집어 던졌다. 그는 계엄군에게 붙들려 경찰에 넘겨졌다. 경찰은 金석만을 야간 주거침입 및 상해미수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형사들도 소년에게 동정을 했지만 잘 봐준다는 오해를 사지 않으려고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기각될 것을 기대하면서. 판사는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김광호란 대학생은 동인시집「반시」를 갖고 있다가 붙들려 왔다. 경찰은 시집의 이름이 도발적이라고 생각했다. 경찰은 「불온성여부의 감정」을 부산 동부교육구청 文창도 관리과장에게 맡겼다. 文과장은 시인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는 근사한 「시 감정서」를 써주었다. 「…어떻게 이런 내용의 책이 시판되고 있는지 모르겠읍니다. 다 불온한 것은 아니지만 부분적으로 한국의 현실에선 자극적인 데가 있읍니다. 여가가 있다면 좀 더 건전한 책을 읽었으면 합니다」 이 어처구니 없는 감정서를 받고 형사들도 어떻게 이 사건을 처리해야 할 지 망설였다. 徐동백 수사과장이 결단을 내려 김군을 내보내 버렸다.
  
  부산사태에 대한 수사의 결론은 수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내려졌다. 朴대통령은 「지각없는 일부 학생들과 이에 합세한 불순분자들」이 난폭한 행동으로 사회를 혼란시켰다고 계엄령선포에 즈음한 특별담화문에서 밝혔다. 치안본부는 「우발적인 군중의 시위행동이 아닌 조직적인 폭거」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수사의 목표는 민중의 시위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고 학생과 민중을 뒤에서 조종한 배후조직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쪽으로 설정이 됐다. 부마사태의 발화점이 됐던 鄭光敏(부산대 경제과 2학년)은 데모 당일 달아나 3일간 떠돌다가 19일밤 8시께 서구 서대신동 신태곤 상대 학장집의 문을 두드렸다. 신교수는 鄭군을 불러들이더니 커피를 마시게 하고는 한참 침묵을 지켰다.
  
  『기분 같아선 뺨이라도 때려주고 싶다만……너를 아주 멋있는 놈으로 키워보고 싶었다. 이렇게 나를 배신하다니……』
  신 교수는 鄭군에게 그동안 겪었던 급우들과 교수들의 수모를 얘기해주고 자수를 하라고 말했다. 鄭군은 교수집을 찾아 올 때는 자수하고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자기 때문에 급우들이 고역을 치르고 있다는 얘기를 듣곤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제가 십자가를 지겠읍니다』
  
  그는 울먹이면서 말했다. 교수도 눈물을 글썽거렸다. 신 교수는 부산대학 담당인 장전파출소장 金모 경위에게 전화를 걸었다. 金경위는 그때 부산대학교 데모를 미리 알아내지 못한 책임추궁에 몰려 괴로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일부 형사들이 이럴 때 하는 식으로 교수 집으로 뛰어가 鄭군을 달랑 붙들어 경찰서에 데리고 와선 자수라는 말을 빼버리고 특수정보로 검거했다고 보고하면 워낙 큰 사건의 주범이기 때문에 잘하면 특진도 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金경위는 신 교수에게 『당신이 경찰서에 데리고 가서 자수시켜라. 나는 모른 척 하고 있겠다』고 말했다.
  
  남민전 소동
  
  16일 오후 광복동에서 붙들린 외국어 대학생 황성권은 경찰이 불순분자로 몰기에 가장 알맞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부산학생이 아니라 서울에서 내려온 대학생이었다. 서울의 불순조직이 파견했다고 볼 수도 있다는 얘기다. 더구나 서울에서 여러 차례 시위를 주동한 활동가임이 밝혀졌다. 마산이 고향이라 마산데모와도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수사관들은 생각했다. 황성권을 맡은 중부서 형사 5병은 호텔 수사를 시작했다. 신문의 고통을 참다 못해 黃군은 『朴아무개를 잘안다』고 말했다. 朴모양은 그 며칠 전 남민전 요원으로 발표됐었다.
  
  黃성권은 이 여자와 몇 번 만난 적은 있으나 남민전이란 조직이 있는 줄도 朴양이 그렇게 된 줄도 몰랐다. 형사들은 흥분했다. 데모진압의 실패로 풀이 죽어 있던 부산경찰은 치안본부로 남민전 용의자 체포 사실을 즉시 보고했다. 며칠 뒤, 서울에서 남민전 전문가들이 내려왔다. 남민전사건을 취급했던 치안본부 요원들이었다. 그들은 번갈아가며 黃성권을 신문했다. 그는 닷새동안 잠을 못 잤다. 더 버틸 기력도 사라지고 있었다. 그의 오직 하나 희망은 몸을 누이는 것이 됐다. 黃성권은 친구들의 이름을 대기 시작했다. 50명 쯤은 댔을 것이다. 그 가운데는 정애란의 이름도 끼여 있었다. 정애란은 황성권의 친구인 徐아무개의 여자친구였다.
  
  황성권은 자기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정애란이 불려 오면 자신이 남민전과는 관계가 없음을 자연스럽게 증언 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황성권은 그러나 정양이 바로 옆방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소리를 듣고 미안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 황성권은 어느 날 자기를 맡은 다섯 수사관에게 다짜고짜로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릴 것이 있으니 한 분만 남고 나가주십시오』라고 했다. 수사관들은 『이 놈이 이제사 털어놓는구나』고 생각하는 듯했다.
  
  黃성권은 홀로 남은 책임자에게 시치미를 딱 떼고 『나는 남민전과는 아무 관계가 없음을 솔직히 말씀 드립니다』고 선언하듯 엄숙히 얘기했다. 수사관은 그때서야 놀림을 받은 것을 알고 흥분, 분풀이를 했다. 부산경찰에서 파견된 孫창원 경감은 이 사건을 맨 먼저 제기했던 중부서의 편을 들어주고 싶었으나 너무나 무리로 생각되어 남민전과는 관계가 없는 것 같다는 견해를 발표했다. 이 회의에선 黃성권에 대한 수사를 원점으로 되돌려 다시 시작하기로 방침이 정해졌다.
  
  = 자살미수
  
  부산사태의 시발점이 된 10월15일의 부산대학 유인물 사건에 관계된 서점원 黃선용은 계엄선포 직후부터 교도소에 갈 준비를 했다. 집에 있던 지하유인물을 모두 불태웠다. 용공서적은 절대로 아니지만 그것으로 오해될 수 있는 책도 불태워버렸다. 친구들의 이름을 쓴 수첩도 없애버렸다. 교도소에 들어갈 것에 대비, 교도소에 넣을 책들의 목록을 만들어 사촌동생에게 맡겨두었다. 그리곤 병원을 찾아갔다. 골수염환자인 黃군은 의사에게 당장 수술을 받게 해달라고 졸랐다. 의사는 지금 상태에선 수술을 할 수 없다고 잘라 거절했다. 黃군은 10월22일밤 서면서점에서 붙들려 동래경찰서로 끌려갔다. 심한 문초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24일 하오 그는 3층 정보과에서 조사를 받고 1층 보호실로 옮겨지고 있었다. 2층 계단을 내려 2층 복도에 이르렀을 때 복도 끝이 바깥의 가을과 환하게 통하고 있는 것을 봤다. 자기도 모르게 그는 그 터널의 끝을 향해 뛰고 있었다. 감시책임을 맡았던 형사는 벙벙한 상태에서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그는 아래로 몸을 날렸다. 머리를 밑으로 하고서. 그래야만 쉽게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황선용의 몸은 높이 3미터에 걸쳐져 있던 전기줄에 걸렸다. 몸이 덜컹 한 바퀴 돌면서 그는 땅에 떨어졌다. 오른쪽 어깨가 먼저 닿았다. 그는 자신이 살아 있음을 알았다. 그는 외쳤다. 『역사는 끝났읍니다』 새 역사가 시작되려 하고 있음을 그는 알 길이 없었던 것이다.
  
  金炯旭 실종에 신경 써
  
  白斗鎭 당시 국회의장은 이 무렵 金載圭의 직접 전화를 받았다. 『부마사태를 조종한 것은 남민전 조직이라는 증거가 나오기 시작했다』는 내용이었다. 金의 이 통보는 黃성권을 남민전 관련자로 착각한 부산 수사진의 보고를 그대로 전한 것으로 보인다. 20∼25일 사이 김재규는 부마사태에 대해 매우 엇갈리는 보고를 올렸다. 개인적으로는 측근들에게 부마사태가 장기집권에 대한 염증에서 비롯됐고 배후는 없다고 말하곤 했지만 공식 회의에선 상투적인 원인분석을 보고하곤 했다.
  
  임방현(林芳鉉) 당시 청와대 대변인(지금 민정당 의원)의 증언 :『관계회의에서 김재규는 부마사태의 주모자를 첫째 신민당, 둘째 학생, 세째 제 5열의 개입등 세 갈래로 추정, 조사를 하고 있다고 보고하는 것을 들었다. 朴대통령을 마주 보지도 못하고 아래로 시선을 비켜 던진 채 풀죽은 표정으로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정보부장이 저런 애매한 보고를 해선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치열법무장관의 증언 : 『안보회의에서 김재규의 보고사항 중에 신민당이 조종했다는 내용이 분명히 들어 있었다. 나는 다른 계통으로 부산사태에 대한 정보를 받고 있었으므로 「저게 아닌데」하는 생각을 했다』 재판과정에서의 진술대로 김재규가 혼자서는 부마사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공식적인 자리에선 신민당이나 불순세력의 조종을 보고하고 있었다. 이것이 자신의 역심(逆心)을 위장하려는 행동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10월22일 현홍주(玄鴻柱)국장이 작성, 대통령께 보고한 부마사태에 대한 전반적인 판단서는 정확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 1차 보고서는 부마사태의 원인을 여러 갈래로 분석한 것이었다. 그 뒤의 김재규보고는 주로 배후세력 수사에 관련된 부분이었다. 수사가 오락가락했으므로 김재규의 보고도 일관성이 없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국가위기에 있어서의 정보책임자로서는 신뢰감을 주지 못했던 것 같다.
  
  김재규는 대체로 부마사태를 과대평가하는 쪽으로 보고를 한 흔적이 있다. 5대도시로 확산된다든지 하는 것이 그런 예이다. 반면 차지철은 확산의 염려가 없다는 식으로 보고했다. 朴대통령은 이 경우에도 차의 보고를 선호했던 것 같다. 김재규는 이때 파리에서 일어난 김형욱실종사건에도 신경을 쓰고 있었다. 부하간부가 해외출장 목적지에 파리를 집어넣어 결재를 돌리자 『이럴 때 왜 하필 그곳에 가느냐』면서 신경질을 내곤 목적지 변경을 지시했다. 김재규는 정보부장 부임 직후 김형욱을 귀국시키려고 두 차례 편지를 쓴 적이 있었다. 77년 1월17일에 쓴 편지에는 이런 귀절이 있다.
  
  『…각하께서는, 그 친구가 돌아온다면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자유롭게 왕복한다면 남이 보아도 좋고 본인도 얼마나 떳떳하겠는가? 또 돌아와 일하겠다고 하면 원하는 직책도 맡기지, 하시더군요. 모든 걸 훨훨 뿌리치시고 고국에 돌아오셔서 다시 옛과 같이 손과 손을 맞잡고 나라와 겨레를 위한 더욱 보람되고 값진 일을 해보지 않겠읍니까?(후략)』
  
  朴대통령은 가끔 『개도 주인을 알아보고 꼬리를 흔든다는데 그놈은 개만도 못한 놈이다』고 김형욱에 대해 심한 욕을 하곤 했다. 한때 세간에선 김재규의 결행동기가 김형욱의 실종과 관련이 있다는 풍문이 돌았었다. 강신옥변호사도 거기에 호기심을 갖고 옥중의 김재규를 면회할 때 캐물어 보았으나 모른다는 대답만 들었다. 다만, 79년에 김재규는 김형욱이 미국에서 자서전을 출판하지 않도록 회유하는 데 신경을 썼음은 확실하다.
  
  김형욱이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여 교섭은 성사되지 못했고, 김형욱은 원고의 원본대신 복사원고만 한 묶음 김재규에게 보냈다고 한다. 김형욱의 가족들은 그의 실종이 자서전과 관계가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게 만약 사실이라면 김재규도 관련돼 있다는 얘기다. 이후락이 金大中을 납치한 것과 꼭 같은 강박심리에서 김재규가 단독으로 어떤 행동을 했다는 추리도 나돈 적이 있으니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이다.
  
  정국 전환의 구상에 몰두
  
  = 23∼24일 청와대
  
  朴대통령은 이틀간 두 차례 김치열 법무장관을 불러 장시간 시국의 수습방안을 의논했다. 대통령 직선제도로의 환원, 유정회 폐지문제까지 거론된 심도 깊은 단독 면담이었다. 부산과 마산도 평온을 되찾아 통행금지시간이 환원된 직후라 이번 위기도 한 고비를 넘겼다는 안도감이 깔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한달쯤 전에도 金법무는 대통령과 단독 면담을 했다. 이 자리에서 朴대통령은 『이번 임기(78∼84년)가 끝나기 전에 그만두고 싶다』고 분명히 이야기했다고 한다. 朴대통령은 유신을 시한성이 있는 비상조치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朴대통령은 늘 장기집권의 심리적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한달전 쯤 새마을 운동담당의 박진환(朴振煥)특별보좌관에게 朴대통령은 불쑥 『金泳三이 대통령이 되면 정치적으로 새마을 운동을 없애버리겠지』라고 말했다. 朴대통령은 정권에 관계없이 새마을 운동이 계속되려면 농협이 앞으로 이 운동을 주관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더란 것이다. 朴대통령은 부마사태를 계기로 두달 밖에 안 남은 80년대에 대한 큰 구상을 하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78년 유신헌법 하의 두번째 임기에 취임한 직후 朴대통령은 통대 제도를 「당적을 가진 선거인단 제도」로 바꾸고, 대통령 후보도 정당추천이 가능하며, 찬반연설도 할 수 있도록 개선해야겠다는 소신을 피력한 적도 있었다. 부마사태 이전부터 임방현대변인은 80년도 기자회견 내용의 준비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 줄거리는 80년대에 우리사회를 「자율과 개방」으로 성숙시켜나가겠다는 것이었다. 朴대통려의 이런 80년대 구상의 상당부분이 제5공화국에 와서 실현된 점은 주목거리다.
  
  金泳三총재가 제명되던 날 차지철은 대통령을 수행, 지방시찰을 갔다가 서울로 돌아오는 차중에서 카폰으로 공화당 간부와 전화연락을 하여 제명을 확인한 다음, 도중의 어느 호텔에서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대통령에게 『각하, 이제부터야말로 진짜 정치를 할 때입니다』고 힘주어 말했는데 대통령은 묵묵부답이었다. 朴대통령이 구사하던 80년대의 새 정치가 차지철이 생각한 새 정치와 같을 리야 없겠지만,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었음도 명백한 것 같다. 朴대통령은 5·16때부터 그가 혐오해온 「구정치인」 집단을 청소한 뒤 깨끗한 정치판을 합리적인 정치인들에게 물려주고 은퇴한 생각이었던 것 같다.
  
  金泳三제명은 그런 청소작업의 시작이었다. 朴대통령의 구상을 실천하기 위해선 정운갑(鄭雲甲)대행체제로 상징되는 야당의 어용화가 그 수단으로 이용되어야 했고, 여당권의 도구화도 불가피한 것이었다. 정치의 결벽성을 무리하게 추구하면 정치를 위해 정치를 말살시키는 결과를 빚게 된다는 걸 몰랐다는 점에서 『朴대통령은 본질적으로 정치인이 아니라 개혁가(Reformer)요 교사(Teacher)였다』는 해석도 있다. 안보담당 특별보좌관이었던 金경원 박사는 朴대통령 생존시에도 『이분은 유교적이고 일본적인 철학을 가진 우리나라의 마지막 통치가가 될 것이다』는 평가를 하곤 했다.
  
  金載圭·황락주의 담판
  
  = 24일 오전 궁정동
  
  신민당 황락주 총무는 23일 정보부 김정섭(金正燮)차장보로부터 만나자는 전화를 받았다. 이튿날 오전 약속된 장소인 백남빌딩의 한 사무실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모르는 사나이가 불쑥 전화기를 내밀었다. 엉겁결에 받았다. 김재규였다. 『아이구, 황 총무님 오랜만입니다. 중대한 문제가 있으니 지금 이리로 와주십시오. 안내는 金차장보가 할 겁니다』 이렇게 해서 황락주는 생각도 못했던 장소로 가게 됐다. 그는 백남빌딩 사무실에서 집으로 전화를 걸어 『지금 정보부로 가는 데 저녁까지 안 돌아오면 金泳三총재에게 연락하라』고 당부를 해 놓았다. 황 총무를 태운 뉴 코로나는 낡아서 페인트가 벗겨지고 안에는 흙탕물이 괴어 있어 발을 놓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불안 속에서 차가 당도한 곳은 궁정동의 정보부장 공관이었다.
  
  문앞에서 낯익은 金부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응접실로 황락주를 안내한 김재규는 30분동안 딴 소리만 했다. 도꾸가와 이에야스 이야기를 하더니 『지도자는 후퇴를 잘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朴대통령의 위대성에 대해서도 열을 내 말했다. 이윽고 부마사태 이야기가 나왔다. 『신문에선 양아치와 불량배가 데모했다고 하지만 실은 선량한 시민들과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읍니다. 우리가 이 국난을 수습 못하면 광화문 네거리가 피바다가 됩니다. 이걸 수습할 분은 나와 황 총무뿐입니다』
  
  이렇게 해서 본론이 시작됐다. 김재규는 『난국수습을 위해선 金泳三총재가 당의 일선에서도 물러나야 하며, 黃총무도 원내총무직을 사퇴해주야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金泳三총재는 나와는 같은 피가 섞인 일가가 아닌가. 내가 그분이 망할 일을 하겠는가. 당신도 사퇴하면 진해여상의 확장을 도와주겠고 2∼3년 뒤에는 롤백할 수 있도록 밀어주겠다』고 미끼를 던졌다. 黃총무는 김재규가 말을 조리있게 잘 하는 데 놀랐다.
  
  김재규는 계속해서 『만약 黃총무가 불응하면, 아무리 내가 당신과 친하지만 웃분의 지시가 있을 경우, 감옥에 안 보낼 수가 없다. 모든 조사는 다 돼 있다』고 위협했다. 黃총무는 『당신과 나의 의견은 하늘과 지하실 만큼의 차이다. 차라리 서대문 형무소로 가겠다』고 했다. 평행선만 긋는 이야기는 무려 네 시간이나 계속됐다. 김재규는 애원, 설득, 협박을 번갈아 하면서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黃락주에게 그것은 고문이었다. 부마사태가 진정되자 김재규는 중단된 신민당 당직자 사퇴공작을 재개했었다.
  
  24일엔 이후락에게 부탁, 자신이 실패했던 최형우의원의 당기위원장 사퇴 설득을 다시 시도하도록 했다. 이후락은 같은 선거구 출신인 崔의원에게 사퇴를 종용했으나 실패했다. 김재규의 의도는 黃총무 등 당직자들을 사퇴시키고 정운갑 대행체제를 출범시키겠다는 것이었다. 黃의원은 오후 4시쯤 『선약이 있다』고 거짓말을 한 뒤 공관을 나왔다.
  
  김재규는 문밖까지 따라 나오면서 『내일 기자회견을 통해 사퇴를 발표해달라. 일을 잘 처리하고 함께 진해의 맑은 공기나 마시러 가자』고 다짐을 놓았다. 黃의원은 그 길로 같은 선거구의 공화당의원 朴鐘圭를 찾아갔다. 朴의원은 黃의원의 이야기를 다 듣고나서 바로 청와대에 대통령 면담신청을 했다. 오후 5시30분께 의전수석비서관이 『지금 바로 들어오시랍니다』란 연락을 해 왔다.
  
  朴대통령, 朴鐘圭에게 교섭지시
  
  = 24일 저녁 청와대
  
  朴鐘圭가 청와대에 들어가니 대통령은 집무실 옆 식당에서 칵테일을 들고 있었다. 申직수, 김계원, 유혁인 등이 함께 있었다.
  『馬山은 어땠어? 자네 집은 피해 없었나?』
  박종규는 자기가 보고 들은 부마사태의 심각성을 이야기하고, 온건한 대책을 건의했다. 7시반쯤 저녁 식사가 끝나고 다른 사람들이 일어서는데 朴대통령은 『자네는 남게』라고 했다. 두 사람만 남자 박종규는
  『각하, 오늘 낮에 黃락주 총무가 찾아왔읍니다』고 말문을 열었다.
  『김재규를 만났대?』
  『그런 말은 없었읍니다. 만났더라도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주의를 받았겠죠』
  『알아. 아까 다 보고받았어』 박종규는 金泳三제명과 선별수리론의 부당성을 험구까지 섞어가면서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는 공화당의 경직성도 비판했다. 朴대통령은
  『당에서 金泳三이를 제명해야 한다길래 나도 처음엔 반대했는데 계속 제명을 주장하더니 이렇게까지 몰고 갔어』라고 했다. 두 시간쯤 이야기를 했는데 대통령은
  『그렇다면 자네가 나서서 일단 金泳三과 의견을 나누어 보게』라고 했다.
  
  = 25일 오전 청와대
  
  박종규는 25일 아침 黃총무를 초대, 아침을 먹으면서 朴대통령과의 대화내용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나서 金총재의 태도를 빨리 알려달라고 했다. 金총재를 만나고 나서 黃의원은 다시 朴의원에게 『金총재도 난국수습엔 동감이다. 긴급조치 9호의 철폐와 민주화 추진은 선행돼야 한다. 야당분열공작도 중단돼야 한다』는 뜻을 전했다. 박종규는 25일 오전10시께 그 내용을 가지고 朴대통령을 만나 1시간 가량 이야기했다. 박종규는 이 자리에서 『朴대통령께선 金총재의 조건을 거의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단, 앞으로도 질서파괴와 폭력을 수반하는 불법행위는 없어야 한다」고 친필로 메모까지 해주었다는 것이다. 朴대통령을 하직하고 나오는데 입구에 차지철경호실장의 보좌관이 기다리고 있다가 『실장님이 점심을 대접하고 싶다고 하십니다』는 전갈을 했다. 『시간이 없으니 차나 한 잔 들고가자』면서 경호실장실로 들어갔다. 車실장은 朴의원을 「실장님」이라고 부르면서 깍듯이 대했다.
  『이틀 동안 각하와 무슨 말씀을 나누셨읍니까』
  『중요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어』 朴의원은 퉁명스럽게 하대하는 말을 했다.
  『혹시 김재규정보부장을 바꾸겠다는 말씀은 안하셨읍니까』
  
  박종규는 金과 車의 불화가 이 정도로 깊은가 하고 속으로 탄식했다. 박종규는 車를 높게 평가하지 않고 있었다. 밑에 데리고 있을 때 그의 성품을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겉으로는 우쭐해 하지만 소심하고 겁이 많은 것이 차지철이었다. 그래서 74년에 후임을 천거할 때도 박종규는 오정근(吳定根)을 밀어 대통령의 내락까지 받았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인척이 다녀간 뒤 朴대통령은 갑자기 태도를 바꿔 車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정보부 무능 준렬히 꾸짖어
  
  = 25일 정오 청와대
  
  박진환(朴振煥) 농촌 담당특보는 여늬 때처럼 점심을 먹고 있었다. 그때 본관에서 그를 찾는 전화가 왔다. 朴대통령이 부른다는 것이었다. 『좀처럼 낮에 부르는 일이 없는 분인데…』하면서 朴특보는 혹시 개각을 하는데 자기보고 뭘 맡으라고 하는 게 아닌가 상상했다. 朴대통령은 식당에서 金桂元실장, 김용식(金溶植)주미대사, 崔광수 의전수석비서관과 함께 스테이크를 들고 있었다. 朴대통령은 朴특보에게 스테이크 한 덩어리를 더 먹으라고 권하곤 다른 동석자들과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朴박사 고향이 마산인데, 이번 사태를 어떻게 생각해?』라고 물었다. 朴특보는 며칠 전 마산에 사는 친척들을 만나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민심이 떠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국민들이 새마을운동에도 옛날처럼 열을 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지방관리들이 올리는 새마을 관계 보고나 통계도 과장된 것이 많습니다. 정부와 국민이 뭔가 헛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건 고약한 일인데』
  『12월초에 장충체육관에서 열 새마을지도자대회도 박수만 요란하지 김이 빠질 것 같습니다』 朴특보의 말을 한참 듣고 있던 朴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그래, 그것 참. 부산 광복동에서 파출소에 불을 질렀는데, 옆에 있던 방티장수들이 손뼉을 쳤다는 거야. 그렇다고 그 아줌마들을 좌익이라고 할 수 있어? 평소에 그 파출소에서 노점 아주머니들을 얼마나 괴롭혔으면 그랬겠어. 역시 이것은 정당이나 정치에 맡겨야 할 문제가 아니라 정부가 나서서 책임지고 해결해야 할 문제야』
  
  말을 끝맺자 朴대통령은 벌떡 일어섰는데, 朴특보의 눈에는 「결연한 의지」의 표시같았다. 비서관이 『회의 시간이 다 됐다』고 대통령에게 알렸다. 朴대통령은 근본적으로 정치에 기인한 부마사태를 정치로서가 아니라 행정으로 해결하겠다고 하고 있다. 정치가로서 그의 한계였다.
  
  = 25일 오후 청와대
  
  청와대 소접견실에서 우후 2∼4시 사이 안보회의가 열렸다. 대통령, 총리, 부총리, 외무, 법무, 내무, 국방, 보사, 문공장관과 청와대에서 김계원 서종철 신직수 유혁인 고건 임방현, 정보부에서 김재규 현홍주가 참석했다. 玄국장이 부마사태에 대한 총괄적인 보고를 했다. 원인분석 중에 「장기집권 운운」하는 이야기가 나오니까 朴대통령은『정부의 실정보다는 金泳三이의 영향이 더 크다』고 코멘트를 했다. 보고가 끝나자 朴대통령은 준렬하게 꾸짖었다.
  
  『이번 부마사태에 대해 정보부와 내무부 등 정보기관은 크게 반성해야 한다. 사전에 정보활동을 충분히 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큰 소요로 확대된 것이다. 이번 사태는 (1)사전 정보활동의 부족 (2)초동단계 진압의 실패 (3)일선 공무원들의 안일한 대(對)국민자세에서 기인한 만큼 각 기관은 이의 시정을 위해 최대한 노력하도록 하라』
출처 : 월조
[ 2003-07-14, 15:2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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