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뒤흔든 격동의 10일간 完 김재규 최후의 날(3)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불꺼! 샤타 내려!』
  
  = 18일 밤 마산 불종로
  
  金載圭가 청와대에서 朴대통령에게 부산사태를 보고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 마산의 중심부 불종거리 주변은 구호, 투석, 비명, 화염의 도가니로 변해가고 있었다. 오후 5시를 지나 시내로 진출한 경남대학생 약 2백 명은 오후 7시쯤 마산수출 자유지역의 정문쪽으로 몰려갔다. 노동자들의 합세를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다시 불종 네거리로 돌아가기로 했다. 경남대학생 張군은 데모대에 앞장서 네거리를 향해 뛰어돌아오다가 깜짝 놀랐다.
  
  어둑한 네거리에 수천 군중들이 뒤엉켜 웅성웅성대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고 어둠 속에서 윤곽만 잡혀 사람들의 덩어리로만 느껴졌다. 군중을 향해 학생들이 달려오자 구호와 박수가 터졌다. 군중 속으로 돌입한 학생들은 이 사람 덩어리에 폭발력을 불어넣었다. 군중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달리기 시작했다.
  
  『불꺼!』
  『샤타 내려!』
  『공화당사를 작살내자!』는 고함소리와 함께 엄청난 인파는 오동동 유흥가를 거쳐 수출자유지역 정문앞을 지나 공화당사쪽으로 달렸다. 시내 상점들과 자동차들까지도 소동, 캄캄해졌다. 오동동 개울다리목에서 경찰부대를 만났다. 군중은 경찰트럭을 개울 밑으로 밀어넣어버렸다 . 상가건물의 2층에 있는 공화당지구당 사무실에 쳐들어간 군중은 집기와 유리창을 박살냈다. 이어서 이웃한 양덕파출소가 습격을 당해 경찰관들은 파출소를 비우고 달아났다. 군중은 대통령의 사진을 찢었으나 태극기는 떼어내 높이 치켜들고 기세를 돋구었다.
  
  몽둥이를 든 20대 청년들이 앞장을 서는 가운데 군중은 산호동 파출소에 불을 지르고 북마산·오동동 파출소엔 돌맹이 포격을 퍼부었다. 경남신문, 마산 문화방송에도 돌을 던졌다. 남성동 파출소를 2시간쯤 점령하기도 했다. 머리 수에서 워낙 열세인 경찰은 난폭해진 수천, 수만 군중을 도저히 다룰 수가 없었다. 마산사태는 처음부터 데모의 차원을 벗어나 폭동의 길로 치닫고 있었다. 암흑천지로 변한 불종로 일대는 다음날 새벽 3시까지 수라장이 됐다. 경찰병력이 증원되면서 반격이 시작된 건 밤 9시께 부터였다.
  
  마산 데모대에선 학생들의 비중이 부산처럼 크지 못했다. 대부분은 일반 시민, 특히 요식업소 종업원을 비롯한 군소업소들의 종업원들이 많았다. 그래서 마산의 데모대는 더 과격해졌고 경찰의 난폭한 대응이 상승작용을 일으켰다. 마산에서 경찰이 연행한 시위혐의자들은 5백5명이었다. 마산보다 인구가 여섯 곱이나 많은 부산에선 체포 시위혐의자가 1천58명이었던 것과 견주면 상대적으로 마산 데모가 격렬했음이 드러난다. 마산에 경찰서가 한곳 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들 피의자들은 밀집수용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콩나물 시루가 된 보호실
  
  = 18일밤 마산 경찰서
  
  김효영 소년(16)은 부산시 영도구 신선동에서 홀어머니 김명애(53)와 함께 어렵게 살았다. 막내인 그는 신선 중학교 졸업하고도 돈이 없어 고등학교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 소년이 취직한 곳은 마산시 중성동의 중국식 음식점 제훈반점. 10월18일 밤10시께. 마산시가를 쓸고 있는 데모에 겁이 와락 난 그는 어머니 품을 생각하며 귀가길을 서둘러 마산역으로 가고 있었다. 탱크가 역앞을 지나갔다. 그는 발검음을 재촉했다. 그때 뒤에서 『서라!』는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김군은 『설마 나보고 지르는 소리는 아니겠지』라고 생각하며 계속 걸어갔다.
  
  그때 전투복차림의 경찰관이 달려오더니 소년을 나꿔챘다. 팔을 뒤로 젖히고 꺾더니 빗물 괸 땅바닥에 패대기를 쳤다. 그는 기절해 버렸다. 그가 눈을 떴을 때는 수십명의 청소년들과 함께 「닭차」에 실려 경찰서로 붙들려 가고 있는 중이었다. 빗물에 섞인 피가 핏물로 변해 머리카락을 타고 얼굴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눈에 핏물이 들어갔다.
  
  한 40평밖에 되지 않은 경찰서 보호실에 수백명이 수용됐다. 앉을 면적이 생기지 않았다. 피의자들은 18일에서 21일까지 콩나물처럼 서서 지냈다. 벽 쪽에 붙어 선 사람들이 그래도 편했다. 잘 때 기댈 수가 있었으니까. 나머지는 서서 졸았다. 누울 수 있는 자리가 한 군데 있었다. 긴 나무의자 밑에 들어가면 누울 수 있었다. 긴 의자 위엔 얻어맞아 다리를 다친 처녀등 부상자 10여명이 다리를 뻗고 앉아 있었다. 남자 여자 구별도 없이 뒤섞여 있었다. 여자라고 잘 봐 줄 수도, 그럴 여유도 없었다. 가장 큰 고통은 변소에 갈 때였다. 뒷편에 변소가 있었는데 그곳으로 가려면 사람 속을 헤칠 수가 없어 철망 벽을 원숭이처럼 타고 가야 했다. 여자들은 선 채 오줌을 싸기도 했다.
  
  왜 하필 釜馬에서 터졌나?
  
  마산으로 불티가 튀었다는 소식이 서울의 권력핵심에 전해졌을 때, 그것은 단순한 충격이 아닌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 보좌관이었던 權숙정(지금 중앙국립도서관장)은 『마산이란 지명이 마음에 걸렸다』고 했다. 4·19란 대폭발의 기폭제 역할을 했던 것이 마산 3·15 의거였다. 실제로 마산사태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의 심리적 동기에는 3·15의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당시 경남대학생이었던 張정욱(지금 사업)은
  『마산학생들은 등하교길에 하루에 두번씩 의거탑 앞을 지나다닌다. 자연스럽게 3·15를 우리도시의 자랑으로 여기게끔 교욱을 받으며 자라왔다. 평소에는 의식하지 못했던 그 생각이 마산사태 같은 결단의 시기에 서니까 본능적으로 되살아 나 행동을 재촉하더라』고 했다. 이것은 부마사태가 왜 하필 두 도시에서 터졌느냐 하는 데 대한 설명은 되지 않는다.
  
  두 항구도시는 전통성이 약한 상공업 위주의 도시였다. 상인과 노동자가 주류인 시민계층은 특히 경기에 민감하고 소득격차에 불만이 많을 소지를 안고 있었다. 79년 제2차 석유파동에 기인한 경기침체와 부가가치세의 무리한 실시, 78년 현대아파트 특혜분양사건 등에서 드러난 부의 분배 문제들, YH사건과 도시산업선교회의 문제 등 주로 경제적 사건들이 시민계층의 반정부 불만도를 전반적으로 고조시켰다.
  
  부마사태의 바닥에 깔린 일반 원인은 이런 경제문제였음이 계엄사의 여론조사에서도 밝혀졌다. 뇌관 구실을 한 부산대학과 경남대학의 주모학생들도 거의가 경제과 학생들이었고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울분을 가장 큰 문제의식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마산의 경우, 수출자유단지의 저임금 현상은 학생들에게 피부로 와 닿는 교육을 시켰다.
  
  여기에 특수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 金泳三총재 제명 파동이었다. 더구나 부산에 기반을 가진 金泳三이었다. 그의 제명은 경제적 불만에다가 정치적 불만을 더해 불만의 공감대로 학생과 시민을 묶어놓는 역할을 했다. 이 공감대가 인(因)이었다면 도화선 역할을 한 鄭光敏, 鄭인권군은 연(緣)이었다. 아무리 인화물질이 깔려 있어도 어떤 의지력이 불을 당기지 않으면 인연, 즉 폭발은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다. 두 鄭군은 「욱!」하는 심정으로 불을 당겼고, 그 불은 공감대를 타고 시민쪽으로 확산됐다.
  
  그러나 분노의 단순표현인 그 「욱!」의 배경엔 오래 기간의 방황과 의식화 과정이 있었다. 두 鄭군의 의식화에 영향을 준 것은 70년대 후반부터 확산된 민중문화운동이었다. 부마사태는 겉으로는 우연의 연속처럼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필연의 기반 위에 선 우연, 즉 「필연적 우연」임이 확실해진다. 그런 뜻에서 부마사태는 근대화 과정에서 생긴 모순의 집약적 폭발이었던 것이다.
  
  「민중봉기」로 본 金載圭
  
  = 19∼20일 정보부장 공관
  
  부산에 다녀온 직후의 金載圭를 가장 가까이에서 관찰했던 사람은 김봉태다. 金載圭 아내의 여동생 남편으로서 의사인 김봉태는 퇴근뒤엔 거의 매일 남산기슭의 정보부장 공관으로 손위 동서를 찾아갔다. 金載圭부부와 저녁을 먹으면서 가끔 충고를 하기도 했다. 金載圭가 부임 뒤 지은 공관은 호화판이었다. 여기에 초대된 적이 있었던 朴찬현 당시 문교장관은 『청와대보다도 더 으리으리해 놀랐다』고 말했다. 金載圭는 퇴근이 빨랐다. 1주일에 다섯번쯤은 저녁 7∼8시에 귀가, 김봉태와 저녁을 함께 할 정도였다.
  
  『金부장의 부부간 금술은 참 좋았읍니다. 간이 나빠져 술을 마시지 않게 된 그분은 붓글씨, 바둑(10급), 골프(핸디 16), 테니스 등 취미를 즐기곤 했읍니다. 정보부장이 되고부터는 「전임 부장들이 어떻게 술마실 시간이 났는지 모르겠다」면서 보고서룰 한 아름씩 갖고 퇴근, 밤늦도록 읽더구먼요. 부산사태 시찰에서 돌아온 다음날인가, 저녁 식사 때 이런 대화를 나눈 기억이 납니다』 김봉태가 『부산데모가 어땠느냐?』고 물으니까 金載圭는
  『글쎄 그게 데모일까? 나쁘게 표현하면 민란이지』라고 했다.
  『민란이면 반란 아닙니까?』 金載圭는『자네가 그런 말을 하나』고 꾸짖더니
  『그렇지, 그건 민중봉기야, 민중봉기』라고 말하더란 것이다.
  
  이날부터 金載圭의 분위기는 싹 달라졌다고 한다. 식탁에서도 말이 없었고 굳은 표정으로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람도 피했다. 저녁식사 뒤에는 여늬 때처럼 잡담도 하지 않고 바로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金載圭는 군단장 시절부터 일기를 쓰고 있었다. 일기장이 수십 권이나 됐다. 이 일기장이 남아 있었다면 그의 이즈음 심경이 밝혀질 터인데, 10·26다음날 가족득이 그걸 태워버렸다고 한다. 金載圭는 이즈음 낮에 시간을 내어 내연의 관계인 장정이(張貞伊)여인 집을 찾아가곤 했다. 張여인도 부산에 갔다온 직후 金의 태도가 확 달라져 표정이 굳어 있더라고 했다. 서울 강동구 출신의 신민당 김동규(金東圭)의원(당시 상공부 차관보)은 이런 증언을 한다.
  
  『19일인가, 20일인가 날짜는 확실하지 않는데 궁정동 사건 1주일 전쯤 공관으로 金부장을 찾아갔읍니다. 같은 김녕金씨이기 때문에 알고 지내는 사이였고, 그분이 종친회 회장일 때, 내가 부회장을 지낸 인연도 있읍니다. 그 자리에서 金부장은 부산사태 이야기를 하면서 청와대에서 朴대통령에게 보고를 했더니 車智澈이가 옆에서 강경한 발언을 해 앞날이 걱정스럽다고 하더군요』
  
  金載圭는 10월24일 당시 공화당 의원 李厚洛을 만났을 때 지나치는 말처럼 『제가 싹 해치우겠읍니다』고 했다고 한다. 李厚洛은 그때 『신민당을 해치우겠다』는 뜻으로 들었는데 10·26뒤에 비로소 그 말이 다른 뜻이었음을 깨닫게 됐다. 金載圭가 가장 존경했던 李種贊장군(당시 유정회 의원)도 이 무렵 金을 찾아가 『유정회 의원을 더 이상 못해먹겠다』고 하소연을 했다. 金載圭는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여운 있는 이야기를 하더란 것이다. 金載圭가 부산에서 돌아와 청와대 보고를 한 뒤 심경변화를 일으켰음은 여러 측근의 증언으로 거의 확실한 것 같다.
  
  수습의 전면에 나선 대통령
  
  = 19∼20일 청와대
  
  朴대통령은 19일 오후 싱가포르 李광요 수상의 예방을 받았다. 李수상은 16일에 내한했었다. 朴대통령은 李수상에게 우리 농촌에 대한 인상을 물었다. 「농촌」이야말로 朴대통령의 보람이며 자랑거리였다. 李수상은 『농민의 생활수준이 대단히 높은 데 놀랐다』고 답했다. 대접견실에서 훈장수여와 기념촬영이 끝나자 두 사람은 서재로 옮겨 요담에 들어갔다. 창가에는 가을 양광이 따스하게 비추고 있었다. 이날 朴대통령은 대단히 만족해하였다. 李수상과 뜻이 통했던 것이다. 그해 6월에 한국에 온 카터 대통령과의 거북한 만남과는 대조적인 대면이었다. 두 사람 다 공산주의자와 싸워가면서 아시아의 후진국을 개발도상국으로 도약시키는데 성공한 국가지도자인 만큼 서로의 고뇌를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이해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날 밤에도 마산시내에선 격렬한 폭동이 이틀째 계속됐다. 朴대통령은 이 위기를 회피하지 않았다. 6·3사태, 1·21사태, 3선개헌, 71년 대통령선거, 유신선포,金大中납치사건, 1·2차 오일 쇼크, 文世光저격사건, 朴東宣사건 등 파란만장한 위기의 산맥들을 강철같은 의지력으로 넘어온 그였다. 朴대통령은 두번이나 직접 부산지구 계엄사령관 박찬긍(朴贊兢)중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산은 당신의 책임구역이 아니지만, 현지 부대장과 의논하여, 자네의 책임지역으로 생각하고 도와주라』고 말했다. 朴장군은 부산에 내려온 병력 2개여단 중 1개 여단을 마산으로 급파했다. 마산에 위수령이 발동된 것은 그 뒤인 20일 정오였다.
  
  마산지역작전사령관 조옥식(趙玉植)소장은 『경남지사의 요청에 의해 국방장관의 승인을 얻어 마산시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한다』고 했다. 위수령은 그 지역행정책임자의 요청에 의해서 내려가게돼 있지만, 모든 실제 행동은 먼저 청와대 주변의 권력 핵심에서 이뤄졌고, 발표는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朴대통령은 신속한 강경진압책과 함께 시국수습방안의 연구를 직접 지시했다. 20일께엔 공화당 申형식 사무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시국수습에 관한 당 의원들의 의견을 수집, 보고하라. 발언내용에 대한 일체의 책임은 내가 질테니 정확한 보고를 올려라』고 명령했다. 정보부 뿐만 아니라 경찰, 검찰, 행정조직, 그리고 車智澈의 사적인 정보기관 등 정권의 모든 촉각은 부마사태의 원인규명과 그 대응수립 쪽으로 풀 가동되기 시작했다.
  
  『나 단명할 것 같애』
  
  = 청와대 풍경1
  
  부마사태 전에 朴대통령은 가끔 회고 무드에 젖어 측근에게 『내가 참 오래 하긴 했지』라고 말하곤 했다.『 이제는 웬만한 위기는 두렵지 않아』라고 원숙한 위기 관리자의 모습을 보이다가도 『그때는 6·3사태 같은 걸 어떻게 넘겼는지 모르겠어』라는 심약한 말을 하기도 했다. 운명적인 이야기도 더러 했다. 대구 사범 시절의 담임선생이던 기시(岸木作)를 청와대로 초빙했을 땐 『이 집을 무력으로 점령한 내가 주인으로서 살고 있다는 데 대해서 운명의 불가사의를 느낍니다. 그런 저이기 때문에 언제 나 자신이 살해될지 모른다고 각오는 하고 있읍니다』고 털어놓았다.
  
  79년 여름 오랜만에 그를 찾은 5·16주체 李모 장군에겐 집안의 단명(短命)경향을 이야기하면서 『나도 단명할 것 같아』라고 했다. 李장군이 『각하는 인중이 좋으신데…』라고 해도 『아니야, 난 단명할 것 같애』라고 말하더란 것이다(朴대통령은 5·16전부터 흥국생명보험에 들어 있었다) 당시 주치의사에 따르면 朴대통령의 건강상태는 거의 완벽했다고 한다. 그의 피형은 B.
  
  말기의 朴대통령은 사생활 면에선 「쓸쓸한 독신자」였다. 육영수(陸英修)여사의 서거 이전부터도 그는 고독한, 애조어린 분위기를 지니고 다니던 사람이었다. 유신기념 만찬회에서정재호(鄭在虎)가 이야기한 대로 「눈 가장자리에는 늘 눈물의 그림자가 스며있는」는 사람이었다. 64∼65년 패기에 찬 젊은 대통령이던 시절 그의 대변인이었던 박상길(朴相吉)은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이 가끔 뇌까리신 말이 있다. 「이자들이 나만 이 깊은 감옥에 처넣고 저희들은 마음대로 뛰어다니며 사사건건 말썽만 부리니…」 나는 서너번 가량 모든 직원이 퇴근하고 갈 데 없는 대통령이 서재에 우두커니 홀로 서서 지는 노을을 창 밖으로 바라보며, 그 눈에 이슬이 맺힌 모습을 목격한 적이 있다. 컴컴해지는 실내에서 「황성옛터」를 피아노로 치시던 모습도 기억난다』
  
  65년에 모 레코드 회사에서 유행가 신판을 하나 냈는데 뒷면은 북한의 육상선수 신금단의 절규 「아버지!」를 소재로 한 노래였다. 그 앞면은 朴正熙 작사·작곡의 「금오산아 잘 있거라」였다. 朴모 가수가 부른 이 노래가 어떤 경위로 취입이 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노래의 기조는 애조 띈 가락이었다고 한다. 레코드판은 판매금지됐다.
  
  『절간에 사는 것 같습니다』
  
  = 청와대 풍경2
  
  경제가 활기차게 성장하던 그 60년대에도 청와대에는 흥이 없었다는 말을 하는 이들이 많다. 비수 어린 朴대통령의 개성이 청와대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풀이다.
  
  『그분의 혼자 모습에서 저는 영화에 나오는 비극의 주인공을 연상하곤 했읍니다. 늘 고뇌하고 쫓기는 모습이었읍니다. 그런 분을 모시려니까 심리적으로 고되더군요』
  
  『특별보좌관으로 오래 있어 보니까 결국 나라의 운명을 「나의 책임」으로 의식하고 고민하는 사람은 대통령뿐이란 생각을 하게 됩디다. 그 당시의 당직자나 총리나 장관이 그런 책임을 느끼거나 분담했겠읍니까. 대통령이 홀로 그 무게를 감당하려니 편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겠읍니까』
  
  朴대통령은 『한강물이 넘치는지 안 넘치는지 둑 위에 서 있는 사람이라야 안다』고 말하곤 했다. 「둑 위에 홀로 선」사람으로서의 부담감과 고독은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아집으로 발전했다. 朴대통령이 陸여사의 타계 이후 자신의 고독감을 더욱 심화시켰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우두커니 陸여사의 초상화를 쳐다 보곤 했고 金泳三총재와의 단독 회담에서는 金총재가 위로의 말을 하자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으면서 『제 처가 죽고 난 뒤부터는 꼭 절간에서 혼자 사는 것 같습니다』고 했다.
  
  朴대통령의 국장을 치르고 난 직후 崔광수 의전수석비서관은 처음으로 2층의 대통령 침실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이런 감상을 피력했다고 전한다. 『집기라고는 침대와 아령, 그리고 검도용 대칼. 분위기가 그렇게 쓸쓸할 수가 없읍디다』 이런 분위기 속에 파묻힌 朴대통령을 심기일전시키려고 애쓴 사람들도 많았다. 朴대통령은 주위에서 재혼을 권하면 쑥스러운 듯 씩 웃기만 했다고 한다. 『지만이가 장가 든 다음에나…』하면서 말을 피하기도 했다. 『각하께선 수줍음을 잘 타시는 분이기도 했읍니다. 재혼 이야기만 나오면 그런 표정입니다』(모 비서관의 얘기).
  
  대통령 측근일수록 陸여사의 죽음이 朴대통령의 말기 통치에 결정타를 가했다고 해석하는 이들이 많다. 아내라는 기둥이 뽑혀나간 집안에서 의지력과 판단력은 서서히 약화되고 있었다. 대통령의 쓸쓸함을 달래려고 주위에서 고안한 「궁정동」은 그런 약화현상을 부채질 했을 뿐이었다. 朴대통령은 다른 사람의 여자 문제에도 퍽 관대했다. 74년에 야당의 다수 후보가 유부녀와 통정, 그 여자가 이혼을 당한 적이 있었다. 이 여자는 당수후보를 찾아가 『같이 살자』고 매달렸다. 당수후보는 급한 김에 벽에 걸어둔 달력을 찢어 뒤에다가 서약서를 써 주었다. 모 기관에서 이 서약서를 입수, 朴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대통령은 『당장 태워버려라』고 지시했다.
  
  10여년간 그의 측근에서 근무했던 어느 보좌관은 『말기에 가선 대통령의 생각이나 행동이 퍽 헤퍼지더라』고 했다. 결재를 할 때도 옛날처럼 꼬치꼬치 따지지 않았고, 옛날과 같은 결연성이나 비정함은 사라지고 인정주의로 흐르는 듯했다는 것이다. 뭔가 나사가 좀 풀린 것 같은 朴대통령이 부마사태를 계기로 옛날의 그런 박력있는 지도자상을 되찾아 주길 바라는 이들이 많았다.
  
  『각하께선 한번 쉬셔야』
  
  = 21일 오후 金桂元실장 집
  
  일요일인 이날 유정회 조일제(趙一濟)의원은 金桂元비서실장으로부터 『만나자』는 전갈을 받았다. 정보부에서 국내 정치담당과장, 국장, 차장보를 오래 지낸 趙의원은 과거의 상관인 金실장집으로 찾아갔다. 金실장은 시국수습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유신선포 무렵의 정치공작을 맡았던 趙의원은 이틀 전 부산·마산을 다녀와 그 전날 태완선(太完善)유정회의장에게 현지 실정을 보고한 적이 있었다. 趙의원은 이날 솔직하게 말했다. 『유신헌법의 정신이 지금 왜곡되고 있읍니다. 당초의 헌법정신은 대통령이 당적을 갖지 않고 초당적 차원에서 국정을 통괄하고, 국무총리는 야당도 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2원집정제적인 요소가 있는 헌법입니다. 그래야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지명할 수 있는 정당성을 갖게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朴대통령께서 공화당 총재직을 맡아 여당의 당수가 되셨읍니다. 야당 입장에서 보면 정권장악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극한투쟁이 안될 수가 있겠읍니까. 이제는 우리나라의 체구도 커졌으니 옷을 갈아입어야 합니다. 대통령이 공화당 총재직을 내어 놓고 국방, 통일 문제 등 큰 줄기만 붙들고 자질구레한 건 민주화시켜야 합니다』
  
  金실장은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얼마 전 대통령이 『金실장,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공화당 총재를 맡은 건 잘못된 것 같아』라고 말하더란 것이다. 10년간 대만에서 대사생활을 하는 바람에 국내정치정세에 어두워진 金실장은 무슨 뜻인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는 것이다.
  
  金실장은 『그런 질문을 다시 할지 모르니 건의서를 하나 써 달라』고 부탁했다. 趙의원은 며칠간 국회도서관에 틀어박혔다. 유신 선포의 막후 연출가인 李厚洛의원을 찾아가 당초의 구상을 확인하기도 했다. 유신선포 당시 정치담당 국장이던 趙의원은 2원집정제의 논리로 야당인사들을 설득, 유신찬성 서명을 받았었다. 그러나 朴대통령이 공화당 총재직을 수락하자 화가 나서 공화당 고위당직자에게 『이건 사기 아니냐』고 대든 적도 있었다고 한다.
  
  = 22∼23일 공화당 의원회의
  
  朴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공화당은 이틀간 무역회관 식당에서 상임위원회별로 의원들의 시국수습책을 들었다. 식당 문을 닫아걸고 기자들의 출입도 막았다. 申형식 총장은 『발언내용은 내가 책임진다』는 대통령의 말을 전하고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했다. 오랜만에 언론자유를 얻은 여당의원들은 솔직한 아야기들을 쏟아 놓았다.
  
  『정보부장을 바꾸라』
  『청와대 비서실을 개편해야 한다』
  『후계자를 빨리 부상시켜야 한다』는 이야기에 이어
  『각하께서 한번 쉬시는 게 좋겠다』까지 나왔다.
  申총장은 이 발언들은 첨삭하지 않고 충실히 기록, 두툼한 보고서를 만들었다. 청와대에 보고서를 가져가기 직전인 24일 대통령비서실에서 전화가 왔다. 『각하께서 그 보고를 안 듣겠다고 하십니다』 申형식은 맥이 탁 풀렸다. 그는 지금도 『그때 안 듣겠다는 것이 대통령의 뜻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의 귀를 가리는 자들의 소행이었을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당시 朴대통령의 눈과 귀는 車智澈에 의해 많이 가려지고 있었다. 朴대통령은 어느 날 존경해온 최경록 장군(지금 주일대사)을 불러 화를 냈다. 『아무리 선배님이시지만 제가 몇 번이나 찾았는데 어찌 한번도 회신이 없었읍니까』 崔장군은 청와대로부터 그런 연락을 받은 적이 없어 얼떨떨했다 車智澈은 崔장군처럼 대통령에게 재혼을 권하는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다고 한다. 車실장은 대통령의 위광을 백% 활용했다. 「각하의 지시」라면서 장관들을 함부로 불렀다. 어느 날 朴찬현 문교부장관은 車실장의 급한 호출을 받고 청와대로 갔다.
  
  『각하께서 오늘 대전을 다녀오시는 길에 옛날부터 보아온 ○○학교의 나무가 잘려진 것을 아시고 대 노하셨으니 진상을 조사하라』는 것이었다. 전화로 말해도 좋을 사소한 일도 이런 식으로 처리해온 車는 「각하의 지시」라면서 관계장관 회의도 주재하는 「망칙한」행동도 서슴치 않았다. 그는 또 수시로 경제인, 교수, 야당인사, 언론인들을 청와대로 불러 식사를 대접하며 교분을 넓혀갔다.
  
  연행자 1천5백63명의 처리
  
  데모는 본질상 불만이나 스트레스의 발산이다. 그래서 심각하기보다는 유쾌한 분위기를 띤다. 그러나 데모의 열정이 식거나 억눌려진 뒤에는 지긋지긋하고 처참한 반작용의 날들이 이어진다. 데모의 배후를 캐는 수사와 고문과 재판의 날들이다. 여기엔 축제도, 낭만도 없다. 더구나 부마사태와 같은 정치사건에서는 수사의 방법이 거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지나친 신문이라 하여 추궁을 받을 위험이 적다. 정작 붙들리는 데모 피의자들은 또 억울한 경우가 많다. 경찰쪽에선 시위현장에서 물증을 확보하기 어렵다. 증거를 만들려다 보면 지나친 신문방법이 동원되기도 한다.
  
  부마사태는 바야흐로 그런 단계로 진입하고 있었다. 부산과 마산경찰이 붙들어간 데모관련피의자들은 모두 1천5백63명(마산 5백5, 부산 1천58명)이었다. 경찰은 이들을 죄질에 따라 A B C급으로 갈랐다. 데모에 앞장 서거나 주동한 사람과 공공건물을 파괴한 사람은 A급. 이들에겐 구속수사를 원칙으로 정했다. B급은 데모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사람. 즉심에 돌리도록 했다.
  
  C급은 소극적으로 데모에 가담했거나 무턱대고 따라 다닌 사람. 이들은 훈계 방면키로 했다. 부산 및 마산경찰은 계엄사합동수사단의 지침에 따라 연행자의 51%쯤인 7백92명을 훈계 방면했다. 즉심에 돌려진 사람들은 42%인 6백1명. 나머지 1백20명은 구속됐다. 부산 연행자들 가운데 학생은 38%인 3백97명. 나머지 62%가 일반시민들이었다.
출처 : 월조
[ 2003-07-14, 15:5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리버티헤럴드  |  뉴스파인더  |  이승만TV  |  장군의 소리  |  천영우TV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