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뒤흔든 격동의 10일간 完 김재규 최후의 날(2)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셔터가 안 눌러집니다』
  
  1979년 10월17일 밤 거의 자정 무렵, 부산시 서구 부용동 로터리. 천명쯤 되는 데모대 속에서 『서부서로 가자!』는 소리가 나왔을 때 박문두(朴文斗)기자는 『됐다!』고 생각했다. 어느 중앙 일간지 사진기자인 그는 취재차를 몰아 데모대보다 먼저 서부 경찰서 앞에 도착했다.
  
  차를 달아나기 쉽게 돌려놓고 시동을 걸어놓은 채 그는 데모대가 몰려오기를 기다렸다. 이날밤 朴기자는 아직 사진 한 장도 못 찍고 있었다. 데모 현장에서 플래시를 터뜨렸다간 데모대와 진압경찰, 양쪽으로부터 뭇매를 맞아야 할 험악한 분위기였다. 중구 대청동 미국 문화원 앞길에서 데모대 꽁무니를 따라다니다가 플래시를 터뜨린 순간 그는 젊은이 대여섯 명에게 붙들렸다. 그들은 朴기자를 군중 속으로 끌고 갔다.
  
  『뭐야?』
  『○○일보 기자다』
  『신문에도 못내는 사진 뭣하러 찍나?』
  『필름을 빼앗자』
  그들이 의논하는 사이 朴기자는 후다닥 달아났다. 그는 일단 회사로 돌아왔다.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서울 본사의 사진부장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부장님, 현장을 보고도 셔터가 안 눌러집니다』
  『역사적 현장이 될텐데 꼭 찍어야죠. 그러나 몸보다 귀중한 것을 없으니 요령껏 최선을 다 하세요』
  
  朴기자는 이를 악물고 다시 현장으로 뛰어나갔다. 그는 카메라를 웃옷 속에 숨기고 데모대와 뒤섞인 채 두시간 쯤 뛰어다녔다. 도저히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역사적 사건이 되겠다」는 인식은 분명했고 「맞아 죽어도 찍어야겠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셔터는 안 눌러지는 것이었다. 그는 다시 서울의 사진부장 댁으로 전화를 걸었다. 똑같은 하소연을 되풀이했다. 그런 朴기자가 드디어 기회를 포착한 것이다. 서부서 앞 도로는 비탈길이었다. 그 비탈의 아래쪽 모퉁이를 돌면서 데모대가 우루루 지쳐올라오는게 보였다. 朴기자는 취재차를 방패막이로 삼아 셔터 찬스를 기다렸다. 카메라 렌즈에 눈을 갖다댄 그는 데모군중이 서구청에 돌을 던지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朴기자는 데모대가 10m 쯤까지 다가올 때 셔터룰 누르기로 마음을 정하고 있었다. 길의 양쪽에 붙은 데모대는 중앙선 쪽을 따라오는 데모대보다 앞질러 뛰어올라왔다. 朴기자는 오목렌즈처럼 굽어진 선두 대열 속에 들게 됐다. 그는 사진이 나올 수 있는 최근접 거리까지 더 기다리기로 했다. 하나, 둘, 셋… 朴기자는 셔터를 누르려다가 말고 후다닥 달아나기 시작했다. 셔터를 누르려는 순간 렌즈를 꽉 메우며 확 들이닥친 군중, 朴기자의 행동은 의지력의 명령을 듣지 않고 반사신경의 지시를 받았다. 그는 시동 걸린 차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차가 비탈길을 느리게 기어오르자 겁이 덜컥 났다. 그는 차에서 뛰어내려 서부경찰서 안으로 피신했다. 경찰서 안에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사과탄이 동이 났다』면서 산하 파출소에다가 최루탄을 있는 대로 거두어 가져오라고 다급한 구조요청을 하고 있었다. 『지원병력이 5분 뒤에 도착할 것이다』고 부산시경의 통보가 왔지만 서부서를 1차 공격하고 지나간 데모군중이 다시 들이닥치면 경찰서는 함락될 위기에 있었다. 서부서 상황실에서 朴기자는 비로소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것을 알았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 사진 한 장 못 찍었다』는 좌절감이 더욱 그의 가슴을 죄어왔다.
  
  부산 KBS의 위기일발
  
  부마사태에서 언론과 기자의 설 땅은 없었다. 16일의 사태를 17일치의 신문·방송이 일제히 침묵했다는 것은 데모군중의 언론 불신감을 더욱 깊게 했다. 우리나라 데모사상 처음으로 언론기관이 습격을 받게 됐다. 부산문화방송(라디오), 부산일보, 부산KBS가 돌팔매질을 당했다. 부산KBS는 데모군중에게 접수되기 직전에 운 좋게도 난을 면할 수 있었다. 17일 밤 동구 수정동의 부산KBS 당직기자는 중부서 흑교파출소의 피습현장을 취재하고 있던 기자로부터 급한 전화를 받았다.
  
  『여기 데모대에서 우리 방송국을 습격하러 가자는 얘기를 하고 있읍니다』 이 전화기를 놓자마자 방송국 바깥에서 함성이 들리더니 유리병과 돌멩이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너무 빨리 닥친 사태에 놀란 당직자는 전등을 모두 끄도록 하고 경찰에 전화를 걸어 구원을 요청했다. 방송국 바로 옆에 있는 파출소의 경찰관들이 황급히 피신하는 것도 내려다 보였다.
  
  와장창, 와지끈 소리와 동시에 군중은 마당으로 뛰어들었다. 마당에 서있는 TV중계차를 각목으로 두들겨 박살을 냈다. 이윽고 건물 안으로 이들이 난입하려던 순간 『군인들이 온다』고 누군가가 소리쳤다. 완전무장한 군인들이 수십 대의 트럭에 타고 북쪽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수백 명의 데모군중은 혼비백산, 달아났다. 이 군인들은 계엄령 선포 직전에 시내로 배치되고 있었지, 이 데모대를 진압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니었지만 KBS를 함락직전에 구출했다.
  
  기자들은 부마사태의 취재에 열심을 내지 않았다. 이런 종류의 사건은 취재해도 보도할 수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그들이었다. 언론사의 부장, 국장 중에선 『쓸데없이 데모대에 휩쓸리지 말라』면서 취재를 말린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많은 기자들이 구경반 취재반의 현장점검을 했다. 몇몇 사진기자들은 지시에서가 아니라 직업적 사명감에서 개인적인 취재를 했다.
  
  꽃밭의 시대는 지나다
  
  국제신문 김탁돈 기자는 카메라를 가방속에 감추고 데모현장으로 나갔다. 17일 밤 10시쯤 그는 광복동 동양관광호텔 앞에서 데모대가 경찰과 충돌하는 것을 봤다. 경찰관 3명이 한 시민을 붙들어 몽둥이로 머리 허리 어깨를 사정없이 두들기고 있었다. 김 기자는 경찰버스 옆으로 바짝 다가갔다. 버스 뒤에 숨어 이 폭행장면에 렌즈를 조준하는 순간 그는 뒤로부터 습격을 당했다. 전투경찰관 3명이 건장한 김 기자의 허리를 끌고 가더니 발길질을 했다.
  
  『국제신문 사진부 기잡니다』
  『기자면 다냐』
  『죽여버려』
  몽둥이·주먹·발길질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그는 카메라 가방을 안은채 쪼그러 앉았다. 한 경찰관이 가방과 카메라를 빼았아갔다. 그는 재빨리 플래시를 웃옷 주머니에, 필름은 오른발 양말속에 감추었다. 그는 곧 「닭차」에 옮겨 태워졌다. 여기서도 한 차래 타작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차엔 28명의 시민들이 붙들려 와 있었다. 한 부산대학생의 가방에선 돌멩이가 수십 개 쏟아져 나왔다. 전경들은 이 학생이 뻗을 때까지 갈겼다. 한 동아대학생은 전경대원의 발길질을 입으로 받았다. 앞이빨 3개가 그 자리에서 부러졌다. 닭차는 서대신동 쪽으로 달렸다. 서대신 파출소에 차가 닿자 경찰은 모두를 내리도록 했다. 이 파출소 근처에선 지친 기동대 경찰관들이 퍼져 앉아 쉬고 있었다. 그들은 데모 피의자들이 내리는 것을 보자 파출소 앞에 양쪽으로 늘어섰다.
  
  이 인간터널 속으로 피의자들은 지나가야 했다. 주먹, 발길, 몽둥이 세례를 받으면서. 김 기자는 여기서 신문기자라고 해봤자 소용이 없겠다고 판단, 입을 꽉 다물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길이 30m 가량의 터널을 빠져나갔다. 가슴을 걷어채여 한번 넘어졌으나 벌떡 일어나 걸었다. 파출소에선 이들을 모두 서부서로 보내도록 지시했다. 김 기자 일행은 서부서 즉결심판자 대기실에 수용됐다. 피의자들이 빽빽이 들어차 경찰관들은 어깨를 밟고 다니며 숫자를 세고 있었다. 젊은 전경이 보호실까지 따라 들어와 몽둥이질을 하고 그것을 한 시민이 피하려다 유리창이 깨졌다.
  
  『대원들은 나가라』고 서부서 직원이 언짢은 듯 소리쳤다. 김 기자가 가만히 보니 그 직원은 잘 아는 사람이었다.
  『신 경사요, 접니다』
  『어, 어떻게 된 거요』
  『정말 이럴 수 있오』
  『어서 나오시오』
  이렇게 해서 김 기자는 두 시간만에 풀려났다. 그는 얻어맞은 것보다도 사진을 놓친 것이 안타까와 미칠 지경이었다. 부산시위의 현장 사진은 5월호의 이 기사에 실린 게 지금까지는 거의 유일한 자료인 것 같다. 그 사진도 기자가 찍은 게 아니라 부산대학생이 찍은 것이다. 사진기자들이 현장 사진을 못찍은 가장 큰 심리적 요인은 『찍어도 지면에 실릴 보장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단순한 기록을 위해서 승부를 걸기엔 주변정황이 너무 살벌했던 것이다. 부마사태는 우리 언론사상(史上) 수치의 장으로 기억될 것이다. 기자가 데모군중으로부터 환영받던 4·19나 6·3사태와 같은 「꽃밭의 시대」는 지났음을 그들은 깨달아야 했다.
  
  발포는 사령관의 육성명령으로
  
  = 18일 오전 부산계엄사령부

  
  부산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면서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된 군수사령관 박찬긍(朴贊兢)중장(전 총무처 장관)은 「발포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간밤에 들이닥친 金載圭는 『사태를 빨리 수습하고, 연행자들을 서둘러 선별하라』는 朴正熙대통령의 지침만 전달했을 뿐 발포문제에 대해선 일언반구 언급이 없었다. 계엄사령관이 알아서 하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경찰이 시위군중에 밀려서 군이 나서게 된 것이니까 군까지 밀려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朴장군은 그러나 발포를 최악의 순간까지 억제하는 지침을 휘하부대에 내렸다.
  
  첫째, 사령관의 직접 명령에 의해서만 발포를 할 수 있다.
  둘째, 이 직접명령은 문서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면담을 통해서 받아야 한다. 급박한 상황에서 전화로 발포지시를 받아야 할 땐 먼저 사령관의 육성을 확인해야 한다.
  
  이날 오전중 계엄군의 시내배치가 끝났다. 현지병력 외에 포항의 해병여단과 서울근교의 공수여단이 지원병력으로 투입됐다. 朴장군은 이들에게 실탄을 지급하지 않도록 했다. 최루탄도 소·중대장에게만 주었다. 데모대는 개머리판으로 진압토록 했다. 1개소대에 경찰관 1∼2명을 배치시켰다. 현지 사정에 밝은 경찰관이 데모군중 속에서 불량배를 지적해주면 그들을 붙들기 위해서였다. 朴장군은 또 이번 데모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하여 여론조사를 실시하도록 명령했다. 지게꾼에서 대학교수까지 각계각층의 여론을 정확히 수집하도록 지시했다. 며칠 뒤 집계, 분석된 여론 조사의 결과에 따르면 부산시위의 가장 큰 원인은 경제침체에 의한 서민·상인층의 불만으로 나타났다. 다음이 야당의원들의 사퇴서에 대한 여당측의 선별수리론이었다. 金泳三총재 제명은 결정적인 데모 촉발요인은 아닌 것으로 분석됐다.
  
  집단살상으로 윤색된 교통사고
  
  = 18일 오전 부산 양정동

  
  계엄군 소속의 탱크 한 대가 양정동 큰길에서 교통사고를 만났다. 택시 한 대가 탱크를 앞질러 가려다가 옆구리를 부딪쳤다. 운전사를 포함, 택시 승차자 3명이 다쳤다. 택시 운전기사의 과실이었다. 이 사고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계엄군이 탱크로 데모군중을 깔아 죽였다』는 루머로 발전하게 된다. 본 기자는 이 희안한 교통사고의 현장을 취재했었다. 얼마 뒤 서울에 올라왔더니 이 사고가 루머로 윤색된 걸 발견, 쓴웃음을 지은 적이 있었다. 부산사태에서 시위군중이 죽었다는 잘못된 기사가 실제로 전파를 타기도 했다.
  
  이날 오후 서울에 있는 일본공동통신의 曺모 기자는 부산사태에 대한 총재단 대책회의가 열린다는 신민당사에 들렀다. 회의는 이미 끝났고 비서들만 있었다. 어느 비서가 『부산에서 여자 1명, 남자2명이 죽었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曺기자는 사망자의 성별까지 구별하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는 사실이라 믿고 신민당 소식통에 의한 것이라 밝히고 3명 사망설을 기사로 타전했다. 일본 방송에 이 내용이 보도되자 문공부에서 즉각 강력한 항의를 해왔다. 공동통신에선 신민당에 재확인했다. 신민당측에선 그렇게 말한 사실이 없다고 잡아뗐다. 할 수없이 공동통신은 기사취소 통보를 해야 했다. 취소가 빨라 신문에는 이 기사가 실리지 않았다.
  
  = 18일 오전 10시 부산대학교
  
  간밤에 부산에 온 金載圭는 부산대학교에 나타났다. 본관 현관에서 朴기채 총장이 그를 맞았다. 金載圭는 의례적인 말투로
  『학생들은 어떻습니끼?』로 물었다. 朴총장이 총장실로 안내하려니까 金부장은
  『사실은 우리 부대가 여기 주둔하게 돼서 한번 찾아보고싶어 왔다』면서
  『수고하십시오』라고 말하고 군 부대의 지휘부가 들어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金부장은 침착했고 잔말이 통 없었다.
  
  휴강령이 마산사태 불러
  
  = 18일 오후 마산

  
  점심 때 경남대 도서관 앞에선 이야기꽃이 피고 있었다. 경제과3학년엔 부산에서 통학하는 학생이 둘 있었다. 이 두 학생이 부산데모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다를 대학생들이 귀를 쫑긋하여 듣고 있었다. 이날 아침 학생들은 부산에 비상계엄령이 내려졌다는 사실을 알고 등교했다. 학교 계시판에는 「박정희 파쇼 정권 타도」라고 쓰인 격문이 붙어 있었다. 술렁대는 분위기 속에서 점심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는데, 이때 느닷없이 교내 스피커에서 『오늘은 휴강을 실시하는 학생들은 빨리 집으로 돌아가 주기 바랍니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학생들은 웅성웅성했다. 『우리는 데모도 안했는데…』 학생들은 납득할 수 없는 휴강령에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부산데모가 경찰의 개입으로 확대된 것과 꼭 같이 마산데모에 기름을 부은 것은 이 휴강조처였다. 귀가하는 학생들은 저절로 길목인 도서관 앞으로 모여들었다. 군중이 되면 용기도 전염된다. 누가 나서주기를 바라는 분위기가 됐다. 말하자면 인화물질에 기름은 끼얹어졌는데 성냥을 그어댈 사람이 아직 안 나타난 상황이었다.
  
  부산이나 마산사태의 발단은 모두 우발적인 것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과관계가 분명한 사건이었다. 부산에서 鄭광민이 한 역할을 마산에서 한 것이 국제개발학과 2학년 鄭인권(당시22세)이었다. 두 鄭군은 울컥하는 충동적 심정으로 성냥을 그어댄 것이 아니라 오랜 고민과 결심의 결과에 따라 행동한 것이었다. 정인권은 며칠 전부터 일곱 명의 학생들과 데모계획을 짜 놓고 있었다. 중간 시험이 시작되는 10월21일을 D데이로 잡고 있었다. 휴업이 길어지면 D데이를 지킬 수 없게 된다. 당황한 정인권은 대책을 의논하려고 동료들을 찾아 우왕좌왕하다가 스스로 결단을 내렸다. 그는 학생들 앞으로 나섰다.
  
  『부산 학생들과 같이 싸우자』
  『3·15정신을 되살리자』
  『부모들이 피땀 흘려 공부를 시킨 것은 이럴 때 바보처럼 가만히 있으라고 한 줄 아느냐』
  鄭군의 일장연설은 그 자리의 학생들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그는 뇌관을 터뜨렸고, 그 다음부터는 학생과 시민의 자체 추진력에 의해 무서운 파괴력을 발휘하면서 저절로 굴러갈 것이었다. 그 뒤로는 鄭군이 다시 지도자로 나설 필요조차 없었다. 그 뒤의 경과는 부산과 거의 같이 진행됐다. 학생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구호를 외치며 바깥으로 나가려 했다. 정문앞을 경찰이 막자
  『3·15의거탑에서 만나자』
  『불종거리(의거탑에서 가까움)에서 만나자』고 속삭였다. 일부는 담을 뛰어넘어, 일부는 얼마 뒤에 집으로 가는 체 정문을 통해 노동자와 시민들이 기다리는 시내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4·19는 시작됐읍니다』
  
  = 18일 저녁 청와대

  
  金載圭는 18일 오후 항공편으로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갔다. 그는 막바로 청와대로 갔다. 金은 10·26사건의 재판과정에서 이날의 일을 이렇게 진술했다. 『부마사태는 그 진상이 일반국민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굉장한 것이었읍니다. 본인이 확인한 바로는 불순세력이나 정치세력의 배후조종이나 사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일반시민에 의한 민중봉기로서 시민이 데모대원에게 음료수와 맥주를 날라다 주고 피신처를 제고하는 등 데모하는 사람과 시민이 완전히 의기투합하여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고, 수 십대의 경찰차와 수 십개소의 파출소을 파괴하였을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읍니다.
  
  본인이 부산을 다녀오면서 바로 朴대통령에게 보고를 드린 일이 있읍니다. 金桂元, 車智澈실장이 동석하여 저녁식사를 막 끝낸 식당에서 였읍니다. 부산사태는 체제저항과 정책불신 및 물가고에 대한 반발에 조세저항까지 겹친 민란이라는 것과 전국5대도시로 확산될 것이라는 것 및 따라서 정부로서는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겠더라는 것등 본인이 직접 시찰하고 판단한 대로 솔직하게 보고를 드렸음은 물론입니다.
  
  그랬더니 朴대통령은 버럭 화를 내더니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는 최인규(崔仁圭)나 곽영주(郭永周)가 발포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하겠느냐」고 역정을 내셨고, 같은 자리에 있던 車실장은 이 말끝에 「캄보디아에서는 3백만 명을 죽이고도 까딱 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 2백만 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읍니까」하는 무시무시한 말들을 함부로 하는 것이었읍니다. 그런데 朴대통령의 이와 같은 반응은 절대로 말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본인의 판단이었읍니다.
  
  朴대통령은 누구보다도 본인이 잘 압니다. 그는 군인 출신이고 절대로 물러설 줄을 모르는 분입니다. 더구나 10월유신 이후 집권욕이 애국심보다 훨씬 강해져서, 심지어 국가의 안보조차도 집권욕의 아래에 두고 있던 분입니다. 李承晩대통령과 여려 모로 비교도하여 보았지만 朴대통령은 李박사와는 달라서 물러설 줄을 모르고 어떠한 저항이 있더라도 기필코 방어해내고 말 분입니다.
  
  4·19와 같은 사태가 오면 국민과 정부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질 것은 분명하고 그렇게 되면 얼마나 많은 국민이 희생될 것인지 상상하기에 어렵지 아니한 일이었읍니다. 그런데 4·19와 같은 사태는 눈앞에 다가왔고 아니 부산에서 이미 4·19와 같은 사태는 벌어지고 있었읍니다(후략)』(항소이유 보충서의 일부 발췌).
  
  이 대목은 金載圭가 자신의 범행을 합리화하기 위해 두고두고 써먹은 논리의 핵이다. 金載圭의 논리에는 많은 의문이 제기된다. 朴대통령과 車智澈이 과연 그런 말을 했는가, 했다 하더라도 진실된 의도에서 한 말인가, 아니면 사석에서의 단순한 과격발언인가. 부산과 같은 사태가 전국으로 확산될 것이라는 그의 판단은 과연 옳았는가. 朴대통령의 인격이 권력유지를 위해 발포를 사양하지 않을 그런 수준인가.
  
  이런 의문들은 이 글을 통해 앞으로 검증될 것이다. 金載圭는 79년 초에 일어난 이란혁명에 대해 연구를 시킨 적이 있었다. 일반시민의 봉기를 제압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얘기를 평소에 자주 했다. 그는 서울에 올라와서 부산에 연고가 있는 간부들을 현지로 내려보내 사태의 원인분석을 하도록 지시했다.
  
  계엄령 하에서 또 데모
  
  = 18일 저녁 8시 부산시청앞

  
  계엄 첫날, 부산엔 비가 왔다. 통금시간이 2시간이나 앞당겨져 퇴근시간에 시 중심부는 무척 붐볐다. 버스·택시 정류장이 집중된 시청앞의 동명극장 부근엔 수천 명이 몰려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누군가가 「야!」하는 소리를 지르며 찻길로 나섰다. 삽시간에 수백 명이 우루루 그를 따랐다. 어깨동무를 한 군중은 「왓샤!」「왓샤!」시청 쪽으로 향했다. 도중에 남포 파출소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박살냈다. 시청 주변엔 2백명쯤의 계엄군 병력이 배치돼 있었다. 그들은 습격 당하는 파출소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오다가 데모대와 맞부딪쳤다. 군인들은 차렷 총 자세로 군중을 향해 정면으로 돌격했다. 군중은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합동통신 부산지사 양원 기자는 밤 8시쯤 시청앞에서 데모가 또 터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계엄령이 내렸는데 데모를 해?』그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선배인 노외찬 기자와 함께 취재차를 타고 동명극장쪽으로 달렸다. 극장 앞 지하도 입구에서 앞서 가던 택시가 손님을 태우려고 멈췄다. 취재차도 멈췄다. 이때 길 건너편 남포동입구 골목에서 「와!」하는 함성과 함께 데모대 3백 명쯤이 우루루 몰려나왔다.
  
  시청앞에서 군인들의 정면공격을 받고 쫓기는 데모대였다. 이들은 찻길을 가로질러 취재차까지 다가왔다. 지휘자인 듯한 한 청년이 맨 앞에서 『어, 합동통신차다. 조져!』라고 소리쳤다. 「우당탕탕!」돌맹이와 유리병이 소나기처럼 날아왔다. 가로수 버팀목을 뽑아든 군중은 이 차에 몽둥이질을 했다. 책가방을 낀 한 고등학생이 창쪽으로 다가오더니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쳤다.
  『야! 이 새끼들아! 보도 똑똑히 해!』
  『알았다』 노 기자가 말했다.
  『똑똑히 하란 말이다. 새끼들아』
  『알았읍니다』
  
  한 청년이 운전석 창문으로 몽둥이를 쑤셔 박으며 운전사를 찔러댔다. 운전사는 문을 열고 혼자 달아났다. 다른 청년이 창문을 통해 운전석 뒷 자리에 앉은 양원을 겨냥하며 우산대로 찔렀다. 배에 박히는 순간 「억!」하면서 몸무게 80kg의 그는 우산대 끝을 잡아당겼다. 다른 청년이 창문을 열려고 했다. 노 기자는 급히 자물대를 눌렀다. 그 청년은 이번엔 앞 창문으로 손을 내밀어 자물대를 뽑아 올렸다.
  
  노 기자는 옆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네 후다닥 군중속으로 뛰어들었다. 차안에 홀로 남은 양원은 노 기자가 데모대 속에서 맞아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확 옆창문이 열리더니 수많은 손들이 양원을 붙잡아 끌어내렸다. 퍽 발길질이 그의 입에 와 닿았다. 땅바닥에 쓰러진 그는 「꽝! 꽝!」사과탄이 바로 옆에서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 군중이 우루루 흩어져 달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양 기자는 그대로 남포 파출소를 향해 뛰었다.
  
  양 기자는 뛰면서 뒤돌아보았다. 데모대는 차를 모로 세우고 있었다. 기름이 흐를 것이다. 누가 또 불을 지를게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시청 쪽에서 계엄군이 행진해 들어오고 있었다. 데모대는 흩어졌다. 먼저 달아났던 노 기자는 부산상대학생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 학생은 노 기자에게 뭇매를 때리려는 군중을 막고 그를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나왔던 것이다. 그 학생은 『우리가 노린 것은 이런 폭력이 아닌데…』하고 사과하듯 말했다.
  
  양원 기자를 두들겨 팬 데모대는 8시 40분까지 두 차례 더 시청접근을 시도했다. 그때마다 기동대의 공격을 받고 실패했다. 흩어진 데모대는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시민대열 속으로 들어가 인파 속에서 소멸돼 버렸다. 비상계엄령이 내려지고 장갑차와 착검한 계엄군이 시내에 쫙 깔렸는데도 데모가 또 터진 것은 학생·시민들의 끈질긴 투지를 보여주었지만, 또한 계엄군의 강경한 대응을 불렀다.
  
  초강경 진정책으로 부상자 속출
  
  동래구 동상동 신희철(회사원·37)은 18일밤 8시 50분께 서구충무동 상륙다방 앞에서 개머리판에 얻어맞아 머리를 크게 다쳤다. 뇌좌상과 뇌경막손상을 당한 그는 봉생신경외과에서 뇌수술을 받았다. 금은방 종업원인 부산진구 당감동 전병진(당시32세)은 계엄령 첫날인 10월 18일밤 9시 30분께 서면 태화극장 앞 택시 타는 곳에서 앞이빨 다섯 개가 부러졌다. 오른쪽 귀 위의 머리뼈엔 분쇄골절이 생겼음이 드러났다. 그는 분쇄골절된 부분을 말끔히 잘라내는 수술과 그 자리에 플라스틱을 대신 끼우는 수술을 두 차례 받았다.
  
  언론기관과 시청 및 계엄사령부 민원실엔 시민들로부터 강경 대응에 항의하는 전화가 빗발치듯 걸려왔다. 朴贊兢계엄사령관은 며칠 뒤부터는 계엄군을 트럭에 태워 교차로 요지에 배치, 땅에 내리지 말도록 명령, 민간인들과의 충돌이 없도록 했다. 그 뒤로는 별 사고가 없었다.
  
  부산시는 또 억울하게 다친 시민들을 무료 치료해주기로 결정했다. 이런 결정사실을 매스컴을 통해 알릴 수도 없었다. 반상회나 통반조직을 통해 부상자를 조사하는 수밖에 없었다. 시에선 데모 때 다친 사람들도 신고를 해주면 아무런 처벌을 않고 무료로 치료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거의 모든 시민들은 이것이 데모가담자를 찾아 내려는 수법이라고 오해, 신고를 꺼렸다.
  
  부산시가 발표한 데모관계 부상자통계에 따르면 16∼19일 사이 1백 97명이 다쳤다. 그중 1백 32명(67%)이 경찰관, 일반시민은 28·4%인 56명, 학생은 9명뿐. 부상자 통계만 봐도 학생보다 시민들이 더 많이 가담했음이 드러나고 있다. 경찰관보다 민간인이 적은 것은 신고기피 때문이다. 경찰 부상자의 88%인 1백 17명은 16일과 17일의 데모진압에서 다쳤다. 이에 반해 시민과 학생 부상자의 66%인 42명이 계엄군이 주둔한 18일 이후에 다쳤다. 계엄선포 이후 군에 도전한 데모대가 그들을 격앙시켜 강경진압책이 쓰인 결과였다. 부상민간인들의 약 80%는 20∼30대였다.
  
  가장 크게 다친 경찰관은 제1기동대의 문정규 순경(25). 16일 상오 11시께 부산대학교 앞에서 돌에 맞아 안면찰과상을 입었고,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파편이 왼쪽 발꿈치 위 종아리에 박혀 전치 5주의 중상을 당한 것이다. 경찰은 문 순경의 종아리에서 뽑은 파편을 감정했다. 감정 결과 이 파편은 길이 1cm가량, 구리로 만든 것으로 밝혀졌다. 한때 사제총에서 발사된 총알이 아닌가 하여 경찰을 긴장시켰다.
  
  사냥용 산탄총알은 물체에 부딪치면 모양이 바뀌어지는데 문제의 파편은 그런 자취가 없었다. 만약 이게 사제총이라면 단발식으로 3m쯤 앞에서 쏜 것이라고 경찰은 분석, 사제총에 대한 수사를 일선 경찰서에 지시하기도 했다. 朴 대통렬 시해사건 뒤엔 군과 시당국의 간부들이 시민과 학생들을 위문하고 10만∼20만 원의 위로금도 주어 마음을 달래려고 애썼다.
출처 : 월조
[ 2003-07-14, 17:5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리버티헤럴드  |  뉴스파인더  |  이승만TV  |  장군의 소리  |  천영우TV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