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뒤흔든 격동의 10일간 完 김재규 최후의 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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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載圭 최후의 날
  
  한국을 뒤흔든 격동의 10일간 완결편 - <야수의 마음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는 김재규의 시해(弑害)심리
  
  청와대 현관에 나서니 박대통령의 두 딸이 보따리 같은 것을 안고 말없이 서 있었다. 밤공기는 싸늘했다. 누군가가 들것을 들고 들어 왔다. 하얀 시트로 덮여 있었다. 키가 작은 것을 보고 그는 『각하다』고 생각했다.
  
  <1985년 6월 월간조선>
  
  집례 거부하고 죽은 金載圭
  
  『金載圭가 어딘가에서 살고 있다』는 헛소리를 하는 이들도 아직 있기에 글의 선후관계를 일단 무시하고, 그의 죽음부터 먼저 확인해 둘 필요가 있겠다. 그래야 다음 글이 이어지겠다.
  
  = 80년5월24일 서울 구치소 사형장
  
  1980년 5월 23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서울구치소장에게 모처로부터 어떤 전갈이 왔다. 그 내용은 구치소장을 비롯한 일곱 명의 실무간부들에게만 통보됐다. 사형수 담당 김준영 목사에겐 『내일 아침에 대기를 해달라』는 연락이 갔다. 다음날 새벽 4시께 군 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金載圭는 서울구치소 보안청사의 지하실 독방으로 이감, 수용됐다. 수갑이 채이고 두 손은 포승으로 묶인 채였다.
  
  봄날의 아침이 밝아올 무렵인 정각 아침 7시, 구치소 직원 3명이 金載圭를 데리러 왔다. 두 직원은 金의 양쪽 팔뚝을 붙들고, 한 직원은 金의 뒤에서, 그를 데리고 나갔다. 金은 얼굴울 치켜든 채 말없이 걸어갔다. 위에는 흰 한복, 아래는 재색바지에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운동장과 9사(舍) 사이의 골목 같은 길을 지나 1분쯤만에 당도한 곳. 흰 담으로 둘러싸인 작은 기와 목조 건물이었다. 사형집행장이다.
  
  집행장의 옆문을 통해 金載圭는 계호를 받으며 들어왔다. 그는 정면 단하(壇下)의 돗자리 위에 앉혀졌다. 단상 정면엔 집행관인 교도소장, 그 오른쪽엔 스님과 목사, 그리고 검찰관계자, 뒷벽을 따라선 관계공무원들이 앉아 있었다. 金의 뒤에는 교도소 계호 담당직원3명이 섰고, 양쪽 측문 쪽엔 6명의 계호직원이 서 있었다. 집행장의 바닥은 퇴색한 마루. 1년에 한번 정도 처형이 있을 때만 문이 열리고 청소되는 것이 이 건물이다.
  
  집행기구가 낡아도 수리를 하려 하지 않는다. 집행장에 손대는 걸 모두 꺼리기 때문이다. 목에 거는 밧줄이 새까맣게 때가 묻어 반들반들하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도 그런 데 있다. 金載圭에 대한 인정신문이 시작됐다. 집행관(교도소장)은 죄수번호, 성명, 생년월일, 본적, 주소를 1문1답 식으로 물었고 金은 대답했다. 이어서 집행관은 金載圭의 범죄사항과 재판경과를 날짜에 따라 읽고 나서는 『오늘 법무부장관의 사형집행 명령에 의해 그 형을 집행합니다』고 선언했다.
  
  집행관은 『유언이 있으면 하십시오』라고 했다. 金載圭는 대강 이런 취지의 유언을 했다. 『민심이 유신정권을 떠났다. 국민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선 朴正熙를 죽이는 길밖에 없었다. 그런 나를 왜 죽이려 하는가』 朴대통령 가족에 대한 사과 같은 내용은 없었다. 유언을 하는 말투나 자세는 형장의 분위기에 짓눌려서인지 「들뜨고 흔들리는」것 같았다. 군 법정에서의 최후진술처럼 소신에 찬 인상도 주지 못했다. 내용도 「정리가 안된」것이었다. 유언은 기록관에 의해 기록됐다.
  
  유언이 끝나자 집행관은『스님을 모셨읍니다. 집례를 받으시겠읍니까?』하고 물었다. 金載圭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로 흔들어 버렸다. 보는 이에 따라선 『모든게 귀찮다』든지 『나 혼자 힘으로 최후를 맞겠다』는 것으로 해석됐다. 뒤의 경우로 해석하기엔 석연하지 않은 점이 있었다. 그는 계속 염주를 헤고 있었던 것이다. 교도소에 의해 초빙된 고광덕(高光德)스님은 단상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집행관이 사인을 주자 金의 뒷편에 섰던 세 계호직원이 재빨리 움직였다. 한 직원이 가슴까지 내려오는 하얀 천의 용수를 金의 머리에 덮어씌우는 것과 동시에, 두 직원은 金의 상체와 두 다리를 포승으로 감아 묶었다.
  
  뒤에서 겨드랑이로 손을 넣어 그를 비스듬히 뒤로 끌고 갔다. 직원들은 내려뜨려진 흰 커튼을 젖히고 별실같은 집행장으로 약3m쯤 끌고 갔다. 도르레에 달린 밧줄이 내려 와 있었다. 앉혀진 金의 목에 올가미가 걸렸다. 직원들은 비켜서면서 『준비완료, 포인트 제껴!』라고 고함을 쳤다. 건물 바깥에 나가 있던 직원이 벽에 붙은, 포인트로 불리는 손잡이를 젖혔다. 金이 앉은 네모 마루판자는 그 받침대가 빠지면서 ㄱ자로 꺾였다.「쾅!」마루판자가 지하 광의 벽을 때리는 소리는, 찬물 끼얹은 것 같은 집행장을 쩡 울렸다. 金載圭의 몸은 지하로 떨어져 허공에 매달렸다.
  
  비명은 없었다. 이럴 때 사람에 따라선 숨이 콱 막히는 「컥!」소리를 듣는다고도 하지만 판자가 지하벽을 치는 소리에 묻히고 만다. 25분쯤 흐른 뒤, 의무관이 지하광으로 내려가 가슴에 청진기를 대고 사망을 확인했다. 다시 5분을 기다렸다가, 생명이 달아난 金載圭의 몸을 풀어 내려놓았다. 집행의 모든 과정, 인정신문에서 사망확인까지는 컬러사진으로 기록됐다. 54년간 이어져 온 남자의 삶을 정지시키는 데 든 시간은 약 30분이었다.
  
  『밧줄이 꺼끄럽습니까』
  
  = 오전10시 서울구치소

  
  통상적으로 사형은 오전 10시부터 시작된다. 金載圭의 네 부하들은 이 관례에 따라 10시부터 차례로 최후를 맞았다. 10시에 집행장으로 끌려온 전 의전과장 박선호(朴善浩)는 김준영 목사의 집례 하에 마지막 예배를 올렸다. 김 목사는 디모데 후서를 읽고 간단한 설교를 한 다음 朴의 손을 맞잡고 찬송가를 함께 불렀다.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
  편안히 쉴 곳 아주 없네
  걱정과 고생이 어디는 없으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 나라
  
  김 목사는 이어서 『인생 상호간의 살생하는 참극을 끊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최후의 기도를 올렸다. 朴善浩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가족에게 교회 열심히 나가도록 전해달라』는 유언을 김 목사에게 했다. 그도 金載圭처럼 분위기에 눌린 듯, 스스로를 줏대 있게 가누지 못하고 교수형을 맞았다.
  
  형장에선 대부분의 사형수들이 도통한 자세를 보인다. 삶을 포기하고 종교에 귀의한 그들은 모두에게 감사하며 천당 가는 기쁜 마음으로 죽음을 맞는다. 소수의 사형수는 『돈이 없어 죽는다』느니 『억울하다』면서 통곡을 하기도 한다. 극소수의 사형수는 자기를 교수대로 보낸 사람을 저주하고 죽는다. 사형집행을 많이 목격한 목사나 직원들은 어느 쪽이든 「인간다운」죽음이기엔 꼭 같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고 한다.
  
  남을 저주하고 죽는 이가 남에게 감사하고 죽는 이보다 못하게 느껴지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인간은 그렇게 죽어야 하는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어느 관계자는 말했다. 어느 쪽이든 분명한 태도로 인생을 끝막음해야 깊은 인상을 남기는 법이다. 죽음이란 것이 삶의 총체적 결산이기 때문이다. 金載圭와 朴善浩는 그런 점에서 「어중간했다」는 평이었다.
  
  朴에 이어 교수대에 선 이기주(李基柱.전 중정 경비원) 유성옥(柳成玉.전 중정 운전사) 김태원(金泰元.전 중정 경비원)은 격렬한 저주를 남기고 사라졌다. 柳成玉은 바로 전날 무슨 예감이 있었던지 교화 담당자와 이런 대화를 나눴었다.
  『목에 밧줄이 걸리면 꺼끄럽습니까?』
  『그런 생각 마세요』
  『꿈에서 자꾸 그런 생각이 듭니다』
  『마닐라 삼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꺼끄럽지 않을 겁니다. 편안히 가십시오』
  무엇이 金載圭와 그의 부하 다섯 명을 이 형장으로 보냈던가. 살의(殺意)의 탄생에서 10·26 밤의 총성까지, 金載圭의 행적을 더듬어야 할 차례다.
  
  「18번」까지 같았던 두 사람
  
  「金載圭 + 부마사태 = 10·26」이란 역사적 등식이 있다. 부마사태는 金載圭란 인물을 폭파시킨 명분 또는 계기였다. 10·26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선 부마사태와 함께 金載圭란 인간에 대한 연구가 긴요하다. 하늘은 朴正熙와 함께 金載圭를 내셨다. 두 사람의 관계는 「운명적」이란 말로서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둘은 같은 고향 (경북 선산군)에서 태어났다. 똑같이 일군(日軍)과 교사 경력이 있다. 똑같이 초창기에 군에서 추방됐다가 복직한 경험이 있다.
  
  더구나 육사 동기였다. 묘하게도 술자리에서 부르는 「18번」을 양보하곤 했다고 한다. 다른 점은 나이 선배인 朴대통령이 시종일관 金載圭를 끔찍히도 아끼는 「시혜자」의 입장에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朴대통령은 5·16주체도 아닌 金을 5·16직후에 국영기업체사장으로 중용했고, 6·3사태 때는 서울지구 계엄부대장, 3선개헌과 71년 대통령 선거 때는 보안사령관, 예편 뒤엔 유정회 국회의원·정보부 차장·건설부장관·정보부부장으로 요직만을 맡겼다.
  
  金載圭가 10·26때까지 한번도 중단 없는 공직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朴대통령의 배려 덕분이었다. 朴대통령은 육사동기생들의 노후 생활을 보살피는 데 金을 심부름꾼으로 부렸고, 몰래 찾아가 단둘이서 통음하기도 했다. 74년 陸英修여사의 죽음 이후, 朴대통령의 인사(人事)엔 능력보다는 충직, 합리보다는 의리, 비정보다는 인정에 더 매이는 경향을 보인다. 그 대표적인 예가 金載圭의 정보부장 임명이었다.
  
  朴대통령은 金載圭를 「믿을 수 있는 인물」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가까이 두면 마음이 편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런 金載圭는 왜 총부리를 朴대통령에게 돌렸던가. 金載圭는 2심 최후진술에서 『朴대통령은 사적으로는 친형제와 다름이 없었다. 나는 개인적 정분을 야수와 같은 마음으로 끊었다』고 말했다. 우직한 金載圭를 야수로 만들어 간, 그의 심리적 변화과정이야말로 10·26사건을 이해하는 핵심인 것이다.
  
  「노기대장」이 별명
  
  = 1944년 4월 안동

  
  1926년에 선산군 선산읍에서 난 金載圭는 안동농림학교 4학년에 재학중이던 때 일본 요까이찌(四日市) 항공병학교의 특별간부후보생으로 들어갔다. 4학년생 전원(1백명)이 지원을 강제당했으나 시험과 면접에서 金載圭등 3명만 합격했다. 4월18일 비오는 날 金은 기차편으로 부산을 향해 떠났다. 입대일은 4월22일이었다. 이때 金과 동행한 사람이 담임선생인 히구찌 미노루 교사였다. 축산과목선생인 그는 기병대위 출신.
  
  히구찌는 金載圭를 떠나 보내면서 『얼마 안 있어 일본은 망할 것이다. 그때까지 꼭 살아 있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요까이찌 항공학교는 가미가제 특공대 요원도 배출하고 있었다. 金載圭는 히구찌 교사의 이 충고를 평생토록 감사하게 생각했다. 79년 9월, 정국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중에도 70노인이 된 히구찌를 초청, 비원에서 안동농림 동급생들과 한나절을 보냈다. 金은 히구찌에게 칙사대접을 해 보냈다.
  
  안동농림 시절, 金載圭는 두 개의 별명을 갖고 있었다. 노기 대장, 그리고 에노껜. 노기 대장은 러일 전쟁 때 여순을 함락시킨 명장으로 메이지 천황이 죽자 부인과 함께 따라서 자결한 일본 무사정신의 화신이다. 에노껜은 당시 유명한 만담가였다. 학생 金載圭는 그만큼 우스개를 잘했고, 노기 대장을 존경하며 닮으려고 노력하는 일면도 있었다. 오기와 고집이 센 그는 친구들 사이에선 늘 리더였고, 불칼 같은 성질도 갖고 있었다. 하숙방에서 공부하는 그를 놀래주려고 뒤에서 고함을 지른 친구의 얼굴에 잉크병을 집어던질 정도였다.
  
  그의 동급생 金모씨는 『載圭의 부모는 남에게 해를 끼칠 줄 모르는 인격자였다. 친척간 우애도 깊어 부러움을 샀다』고 회고했다. 10·26사건 재판을 통해 교도소의 金載圭를 가장 많이 만난 姜信玉변호사는 『그는 사생관이나 행동거지에서 일본 무사의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6·3사태 때 계엄 지휘관
  
  = 1949년 안동

  
  임관 여섯 달을 앞두고 해방을 맞은 金載圭는귀국, 1년간 선산국민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육사 2기에 지원 46년 12월에 졸업했다. 대전 제2연대에서 근무하던 중 사병들의 패싸움에 대해 당직장교로서의 책임을 추궁 당해 면직됐다. 그 뒤 김천중학, 대구 대륜중학교의 체육교사로 일했다. 金은 3단넓이뛰기, 장대높이뛰기에 능했다. 대륜중학교 시절의 제자 중엔 이만섭(李萬燮국)민당 총재가 있다. 48년 안동지구전투사령부에 정보참모로 배속됐다.
  
  이 시절 안동 금남여관에서 金과 같이 투숙했던 崔모 예비역 장군은 『그는 겁이 없고 의리가 있어 부하로 데리고 있고 싶은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金은 이때 혼자였는데 중매결혼한 첫 부인과는 첫날밤 직후에 헤어졌다고 한다. 안동에선 술집작부와 가까이 지냈는데, 어느날 崔장군(당시엔 중위)에게 『형님, 저 여자하고 같이 살렵니다』고 말하더란 것이다.
  
  金載圭는 6·25동란중 여수에서 연대장으로 근무할 때 네 살 아래인 순천사람 金英姬와 연애결혼했다. 미모인 김영희(金英姬)는 그때 광주에서 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엔 외딸이 있는데 지금은 미국에서 결혼하여 살고 있다. 金載圭의 장인은 순천 유지로서 군인을 대단히 싫어했다고 한다. 심지어 처가에서 첫날밤을 지내고 인사를 올리는 金載圭에게 난『난 그래도 군인이 싫어!』하면서 인사도 안 받더란 것이다.
  
  = 6·3사태 서울
  
  金載圭가 존경하며 따른 사람은 朴대통령을 비롯, 이종찬(李鍾贊.전 육군참모총장) 鄭구영(공화당 총재역임) 金桂元등이었다. 金은 존경할 만한 사람에겐 극진한 예우로 대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런 사람을 찾아가 만나는 데도 힘을 썼다. 白斗鎭 전 국회의장은 부산 임시수도 시절 재무장관으로 있던 자기를 찾아와 나라를 걱정하던 金載圭중령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64년 6월 3일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대학생 데모대가 서울시내를 휩쓸자 정부는 서울시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金載圭는 사단장으로서 휘하부대를 이끌고 서울에 진주했다.
  
  金載圭는 姜信玉변호사에게 이렇게 술회했다. 『그때 이화여대생들이 데모를 했는데 진압부대가 하이 힐을 일곱 가마니 분이나 거두어 왔다. 덕수궁에 앉아서 가만히 생각하니 나라가 큰일이라는 판단이 서더라』 당시 공화당 부총무 李萬燮은 옛 스승인 金載圭의 부름을 받고 계엄지휘부가 있는 덕수궁으로 갔다고 한다. 『앰뷸런스 안에서 金장군은 군의 심상치 않은 공기를 이야기해주면서 그 내용을 朴대통령에게 전해달라고 나에게 부탁을 합디다』 그 부탁 내용에 대해서 李총재는 지금도 함구하고 있다. 金載圭는 가끔 『6·3사태 때 金鍾泌의 외유를 건의한 것은 나다』고 자랑하기도 했었다.
  
  군단장 때 대통령 감금 계획?
  
  = 69년 3선개헌 무렵

  
  이 무렵 金載圭는 보안사령관이었다. 朴대통령은 車智澈의원을 정구영(鄭求瑛)에게 보내 『3선 개헌에 찬성해주시든지 탈당을 해달라』는 친서를 전달했다. 鄭求瑛이 고집을 꺾지 않자 金載圭를 보냈다. 鄭求瑛이 계속 『찬성 못하겠다』고 하자 金은 『옳으신 말씀인데, 그러시면 더 큰 사태가 옵니다』고 말하곤 물러났다고 한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鄭求瑛은 李鍾贊과 함께 金載圭가 가장 존경하는 두 사람이 됐다. 한 사람은 군의 정치도구화에 반대했고, 다른 이는 장기잡권에 반대한 사람이었다.
  
  72년 6월 鄭求瑛은 ○○산에 놀러갔다. 金載圭는 당시 3군단장이었다. 鄭求瑛일행이 차편으로 군단 사령부 앞을 지나는데 金載圭가 미리 알고 아내와 함께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점심준비를 해 놓았으니 드시고 가시라』는 것이었다. 鄭求瑛은 『고맙지만 나와 만난 사실이 대통령 귀에 들어가면 자네가 곤란해진다』고 사양했다. 金은 『그러면 차 한 잔이라도…』라고 졸라 鄭求瑛은 金載圭의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鄭求瑛과 동행했던 반정부 인사는 처음엔 金載圭와 동석하기를 꺼렸으나 헤어지고나선 『괜찮은 군인이다』고 평했다 한다. 군단장 시절 그를 만나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는, 鄭求瑛의 어느 측근은 『그때도 공화당 정권에 대한 불만을 읽을 수 있었다』면서 『金載圭를 멍청하다고 보는 이들이 있는데 바로 그들이 멍청한 사람이 아니겠는가』고 말했다.
  
  67년에 金載圭는 유명한 관광요정 선운각 주인 장정이(張貞伊)와 깊은 관계를 갖게 된다. 2년 뒤엔 남자 아이까지 태어났다. 張마담은 술꾼들 사이에선 「몸뻬」란 별명으로 알려진 여자. 미모는 아니고, 아주 활동적인 성격의 여자였다. 金載圭는 10·26뒤 재판과정에서 3군단장 시절부터 朴대통령에 대한 거역을 모의했었다고 진술했다. 3선개헌에 이어 10월유신으로 朴대통령이 장기집권을 시도하는 데 분개,
  
  朴대통령이 72년말에 3군단을 방문하면 그를 감금, 하야성명을 발표케 할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사령부 울타리를 바깥에서 안으로 침입하는 것을 막는 식으로 설계하지 않고 안에서 바깥으로 달아나지 못하도록 변칙설계를 해놓았다는 것이다. 朴대통령은 예정대로 사령부를 방문했는데 막상 면대해보니 생각이 달라져 포기했다는 것이다. 이 진술은 아무런 물증이 없어, 생각하기에 따라선 단순한 공상으로 치부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무럽 임방현(林芳鉉) 청와대 특별보좌관은 金載圭 의 부대에서 유신관계의 강연을 한 뒤 청와대로 돌아가려고 했다. 헬기에 林특보가 오르자 金載圭는 경례를 하면서 『각하께 가시거든, 이 金載圭 잘 있다고 말씀드려주십시오』라고 소리쳤다. 林특보는 金의 그 모습이 변경에서 임금을 그리는 신하처럼 비쳤다고 한다. 이즈음 金載圭가 군복무중인 친척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지도자는 먼저 수양으로 인격을 완성해야 한다. 대인관계는 기교로는 될 수 없다. 지성(至誠)만이 요결(要訣). 하급자(사병)을 볼 때 이것이 우매하게 보이면 자기의 눈이 우매한 줄 알아야 한다. 민심 즉 천심, 사병심 즉 민심(民心 卽 天心, 士兵心 卽 民心). (후략)」
  
  권총 숨겨 차고 사령관 받아?
  
  = 유정회 국회의원 시절

  
  육군중장으로 예편한 金載圭를 유정회 1기 의원으로 지명한 것은 물론 朴대통령이었다. 국회의원 시절 그의 활동을 전무상태.
  
  = 정보부 차장 시절
  
  유정회의원 재직 중 정보부로 옮긴 金載圭는 申직수부장 밑에서 실권 없는 차장 노릇을 했다. 申부장은 국내담당 조일제(趙一濟)차장보, 해외담당 이철희(李哲熙)차장보 중심으로 조직을 운영했다. 金載圭는 소외시켰다. 지학순(池學淳)주교가 구속됐을 때 趙차장보가 김수환(金壽煥)추기경을 설득, 추기경을 朴대통령과 면담시켜 池주교를 석방케 한 적이 있었다. 추기경 설득때 차장보와 동행한 金載圭는 『추기경님, 십자가를 메어 주시지요』라고 연방 간청했었다. 池주교 석방 직후 申부장은 마음을 바꿔 그를 재구금해버려 金載圭는 중간에서 곤란한 처지가 되기도 했다.
  
  74년 8월 신민당 전당대회 직전 申부장은 부하들에게 야당공작에 개입하지 말도록 지시했다. 그 대신 당시 국회의원이던 車智澈이 야당공작에 깊이 개입했다. 車의 야당공작 습성은 여기서 길들여졌고, 金은 이때부터 車를 좋게 보지 않았다. 金載圭는 이즈음 미국에 갔을 때 경금속제로 된 조그마한 45구경 권총을 하나 사와 申부장의 허가 아래 휴대하고 다녔다. 바지 오른쪽의 작은 주머니를 크게 개조하여 라이터처럼(金은 담배 안 피움)넣고 다녔다.
  
  = 건설부장관 시절
  
  74년 9월 건설부장관으로 임명받고 청와대에서 사령장을 받는 날 金載圭는 이런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재판과정에서 진술했다.
  『국민과 어머니, 집사람, 딸 및 남동생들에게 전할 유서 다섯 통을 준비, 나의 책상 서럽 속에 넣어두고 작은 태극기의 내면에 민주·민권·자유·평등이라 쓰고 나의 호주머니에, 45구경 작은 권총은 바지 주머니에 넣고 사령장을 받으러 갔다. 그러나 대통령의 얼굴을 대하니 마음이 달라져 결행하지 못했다. 75년도 대통령 초도순시 때에 똑같은 생각으로 장관실에 있는 태극기의 축 늘어진 귀퉁이를 면도칼로 잘라 그 속에 권총을 넣어두었다가 순시하는 대통령의 목숨을 끊겠다고 결의했으나 막상 만난 뒤 대화해보면 모진 마음이 약해져서 그 생각을 버리고 유서와 태극기는 태워버렸다』
  
  이 말 또한 金의 마음 속에서 있었던 증거가 없는 이야기라 객관적 신빙성은 약하다. 10.26 이후에 털어놓은 이야기인 만큼 더욱 그렇다. 金載圭는 가까운 사람들에겐 가끔 『나는 안방에 누워서 죽기 싫다』는 말을 하곤 했다. 불교신도인 그는 「無」자를 붓글씨로 자주 쓰기도 했다. 「어떻게 명예롭게 죽을 것인가」를 金이 많이 생각해온 것은 사실인 듯하다. 안동농림 시절부터 엿보이기 시작한 무사적 사생관과 연결시켜 볼 때 그의 마음속에 살의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던 것도 사실인 듯 하다. 그러나 이 살의는 이념이나 논리로 뒷받침되는 지속적 의지가 아니었음도 사실이다. 세번이나, 『대통령의 얼굴을 대하니 마음이 달라져서 결행을 포기했다』고 할 정도면 살의 자체가 충동적이고 엉뚱한 것이라고 봐야겠다.
  
  金載圭와 가까이 지낸 사람들이 한결같이 평하는 그의 낮은 지적 수준, 과대망상, 충동성, 우쭐해 하기 좋아하는 태도, 기본적인 성향인 우직성 등이 그 살의의 성격에도 잘 나타나고 있었던 것 같다. 「어떻게 살까」보다 「어떻게 죽을까」를 더 깊게 생각하는 사람은 영웅심리의 소유자이기 마련이다. 그런 金을 정보부장으로 임명한 朴대통령의 눈에는, 金이 충직하게 비할 데 없는 사람으로만 보였을 뿐, 그가 명예롭게 죽을 명분을 찾고 있는 사람이란 것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건설부장관으로서 金의 큰 공적은 중동건설 붐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정무장관이던 申형식은 『金載圭가 경제장관회의에서 다른 장관들의 반대론을 몇 시간이나 맞받으면서 해외건설업체에 대한 국내은행의 지불보증제도를 결연하게 밀고 나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결국 대통령이 金載圭의 안을 지지했고, 이것이 중동건설 붐의 촉진제가 됐다』고 말했다. 장관재임 중 아버지가 죽자 金載圭는 지관(地官)을 데리고 다니며 명당을 구했다. 이 명당은 대통령이 나올 자리라는 평까지 받았다. 그러나 풍수지리에 밝은 어느 국장이 보니 대역적이 나올 지세였다. 그는 간접적으로 그 얘기를 장관에게 전했으나 묘소를 바꾸게 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역사를 의식하기 시작한 金載圭
  
  76년 12월 朴東宣사건의 소용돌이속에서 정보부장이 된 이후 金載圭의 행동에는 세 가지 특징이 발견된다. 업무처리에 있어서의 무능, 정책건의에 있어서의 온건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를 의식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金載圭는 『정보부장에 임명되었으므로 물리적 방법이 아니라 평화적 방법으로 朴대통령을 설득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재판과정에서 진술한 바에 따르면 金載圭는 朴東宣사건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이 사건은 미국이 한국의 독재를 견제하기 위해 만든 일이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77년 2월 대통령에게 『체제를 바꾸는 게 좋겠습니다』고 건의를 했다고 한다. 그해 6월엔 『직선제로 출마해도 당선됩니다』면서 유신체제의 완화를 건의했고, 78년엔 긴급조치의 해제, 79년 7·8월 에도 『긴급조치9호는 칼이 너무 녹슬고 무디어졌읍니다』면서 긴급조치10호로 대체할 것을 건의했다는 것이다.
  
  10호는 『9호의 규제범위를 훨씬 줄인 것이었다』는 게 金의 설명이었다. 박찬현 문교부장관에겐 또 제적학생들의 복교를 세 차례 요청했다고 한다. 『훗날 우리가 무슨 소리를 듣겠는가. 학생들은 백 번 잘못해도 백 한번은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朴장관은 『복교생들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없다』고 거절하더라고 金은 진술했다. 기자는 이 부분에 대해 지금은 외국어대에서 일하는 박찬현 교수에게 확인을 해 보았다. 朴교수는 『그런 말을 듣긴 했으나 정보책임자로서 나의 마음을 떠 보는 것으로 생각했다. 꼭 복교시키려면 그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았겠느냐』고 반문했다.
  
  金載圭는 10·26이후 이「온건한 건의」를 되풀이 강조, 자신의 행동을 「민주혁명」으로 미화시키려고 애썼다. 나라의 주요정책에 큰 영향을 끼치는 정보부장이란 직위에 있는 인물은 얼마나 합리적인 건의를 했느냐는 사실보다는 건의를 얼마나 받아들이도록 했느냐는 점에서 평가를 받아야 한다. 「받아들이도록 하는」능력 면에서 金載圭는 여러 번 무능을 드러냈다. 이것은 그의 논리적 설득력의 부족뿐만 아니라 朴대통령의 고집에도 기인된 결과일 터이다.
  
  金의 법정진술에서는 무능함을 호도하기 위해 「선의의 건의」를 강조하는 듯한 냄새가 더러 풍긴다. 金載圭는 수양대군의 쿠데타에 거역, 친왕정 쿠데타를 모의하다가 사형당한 김녕金씨 김문기(金文起)의 18대손이다. 그는 이 金文起를 사육신으로 공인받게 하려고 직권을 이용했다. 협조를 거부한 부하는 좌천시켰다. 金文起의 사육신 여부는 젖혀 두고라도 공인이 이런 역사의 해석 문제에 개입한 것은 옳지 못한 일이었다. 金載圭의 金文起 숭배열은 평소에도 대단했고, 김녕金씨 문중에선 金文起가 진짜 사육신이라는 사실을 집안 사람들에게 가르쳐왔다. 이것은 金載圭의 사생관 형성과정을 엿보게 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金은 또 스스로를 『지위욕은 없지만 명예욕은 있는 사람이다』고 평했고 『역사에 깨끗한 이름을 남겨야 한다』는 말을 자주했다. 그와 오랜 친교를 가졌던 金桂元은 『金載圭의 성격은 자존심과 의협심이 강하고 저돌적이며 추진력도 있지만 뒷마무리를 못하는 사람이다』고 말했다. 천황을 따라 자결한 조기 대장의 흠모자, 쿠데타모의를 하다가 사형당한 조상의 숭배자, 역사를 줄곧 의식하는 사람… 이런 인물은 명분만 그럴 듯하면 목숨도 내던질 수 있다.
  
  79년에 잇달이 일어난 사건들은 朴대통령의 金에 대한 신임을 약화시킨만큼 金의 대통령에 대한 불만도 축적시켰다. 더구나 車智澈은 가끔 대통령의 대행자 행세를 하면서 오만불손한 태도로 金을 대했다. 金의 기질은 車와 같은 방약무인의 인간형을 도저히 못 참는 유형이었다. 좌절감, 열등감, 정의감, 명예욕 등이 뒤범벅된 金은 자신을 꼭 누르고 있었다.
  
  79년 여름 무렵 공화당 사무총장 신형식은 金載圭가 무심코 보인 태도에서 대통령에 대한 불칙, 불손의 기미를 두번 느낀 적이 있었다고 한다. 섬뜩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는 朴대통령 시해 사건에 접했을 때 『당했다』는 생각과 함께, 金의 불손을 퍼뜩 떠올렸다고 한다. 권력의 핵심에 잠복한 시한폭탄, 그것이 金載圭였다. 그 시한폭탄이 부마사태의 도가니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출처 : 월조
[ 2003-07-14, 17:5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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