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의 육성증언 下(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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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金泳三)의 육성 증언(證言) 하편
  
  저들은 우리에게 한치의 땅도 내주지 않으려고 하지만 머지 않아 대한민국 전체가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증오와 고문 이야기로 시종한 마지막 테이프. 그 뒤 8년 金泳三 대통령은 지금 그때 그토록 미워했던 全斗煥 당시 대통령을 5,18 관련 처벌 요구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온갖 비난을 다 받으면서, 때로는 시위 학생들을 향하여 최루탄을 쏘도록 하고 있다. 불과 8년 사이의 이 엄청난 변환! 이것이야말로 한국 현대사의 위대한 드라마가 아닌가.
  
  <1995년 11월 월간조선>
  
  =어머니의 죽음
  
  김영삼 대통령은 부잣집에서 태어나 아주 고민 없이 자라 원하는 것은 모두 차지한 행운아로 알려져 있지만 어머니가 강도에게 피살되는 비극을 당한 적이 있다. 1987년 4월 하순 金총재가 무교동 ソ퓻?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는 바깥 세상이 급박하게 돌고 있었지만 잠시 그의 생각은 고향과 옛날로 돌아가 아련한 추억을 되살리고 있었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더욱 진하게 맛보기 위해서인지 그는 아주 열심히 이야기했다.
  
   손 큰 어머니
  
  『대학 때나 언제나 친구들이 많이 오는데, 일본 사람들은 친구가 오고 하면 좀 귀찮게 생각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우리 어머님은 그런 게 전혀 없어요. 그런 게 전혀 없고, 아주 고마워하고, 고마워 한다는 게, 반가워하고, 꼭 나한테 하듯이 사랑하고 말이야』
  
  - 친구하고 아들하고 차별하지 않았던 모양이지요.
  
  『그렇지요. 그래서 우리 집에 오면 우리 친구들도 마음이 든든하고 말이지. 조금도 남의 집에 왔다는 그런 인상이 아니고 』
  
  - 마음이 편한 거지요.
  
  『마음이 편한거지요.... 그래서 아주 좋아하고 또, 우리 어머니가 어떤 의미에서는 손이 컸어요. 요새는 손 크다면 나쁜 의미에서 쓰는데요. 이 양반이 예를 들어서 아침마다 생선을 잡아오면 얼마를 내리라 그래요. 그래 가지고 동네사람들 전체에 나눠줍니다. 아침에 집집마다. 한 마디로 굉장히 후덕한 분이에요. 야간열차를 부산서 타고 서울에 오시면 하숙집에 오시기도 하고 말이지. 그날로 또 저녁차 타고 가신다고요. 그리고 우리가 결혼한 뒤에도 상당히 물건도 많이 가지고 오시잖아요.
  
  짐작하잖아요? 뭐, 김치를 비롯해서, 우리는 주로 생성이니까, 말린 생선 해서 이렇게 오신다고요. 또 오시면 하룻밤도 우리집에서 안 주무세요. 어떤 이유에서 그런고 하니 자기가 바쁘다는 이유로 말이에요. 내가 붙들 수가 없어요. 그 양반이 나하고 우리 집사람하고 둘이 편안히 살아라 하는 이유도 있단 말이에요. 그 또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대해서 옛날만 해도 부담이 있는 게 아닙니까? 그런 것이 그 양반한테 머리에 배 있어요』
  
   어머니의 피살
  
  - 어머니께서 간첩에게 당하셨다는데...
  
  『그 이야기를 오늘 하지요. 27년 전이歐? 仄?내 기억이 정확하지 않지만 내 나이가 서른 둘인가 그래요. 어머니가 쉰 둘이었으니까요. 저녁 늦게 열한시나 이렇게 되어서, 그 당시 내무차관이 이성주씨라고 죽었어요. 그 사람이 변호사인데 내하고 굉장히 친했어요.
  
  그전에 형사소송할 때 내 대리인도 해주고, 나하고 참, 아주 각별하게 친하던 그런 사이인데, 전화가 왔어요. 어머니가 돌아갔다고 안하고 「강도가 들어와서 어머니가 좀 다친 것 같습니다」라고요. 그때만 하더라도 교통상황이 영 나쁠 땝니다. 그 이튿날 아침에 비행기를 탔어요. 부산 비행장으로 해서 그때 거제도로 갔는데』
  
  - 부산서 거제도까지는 무슨 편으로 가셨습니까?
  
  『그때 내가 국방위원입니다. 파도가 쳐가지고 일반 배가 갈 수 없게 되었어요. 결국 내가 서울에서 국방장관한테 부탁을 해 진해에서 조그마한 속력이 빠른 해군 배로 갔었어요. 일반 객선이 못갈 때입니다. 가니까 벌써 돌아가셔서 시체가 우리집에 와 계시더만. 그때 장승포에서 수술해가지고 수술 도중에 돌아간 거지요.
  
  어머니가 거제도 우리집에서 주무시고 계시는데, 이 복면을 한 장총을 든 사람들이 왔더라는 겁니다. 둘이 와서 발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이래 깨우더랍니다. 이놈들이 서가지고 총을 들이대고 말이지요. 아버지 보고 돈 내놓으라 그래요. 두 분이 일어나 앉기는 앉았는데 그래 얼마나 겁나겠어요. 그 달빛 속에서 저녁에 아홉신가 열신가. 하얀 그물로 이래 썼더래요. 변장을 했더래요』
  
  - 말이 안나왔지요.
  
  『말이 안나왔는데 말을 못하니까 이놈들이 총을 쏘더라는 거요. 그 가까운 방안에서 말이지 탕하고 한 방을 쏘는데, 아버지하고 어머니하고 이래 나란히 앉아있을 거 아니요? 아버지가 싹 쓰러진 거요. 그런데 그 순간에 어머니가 탁 일어서더니 「야, 이놈들아, 돈 주면 됐지」말이야 했대요.
  
  우리 집에 금고가 있었는데 금고 열쇠를 이래 던지면서, 「다 가져가라. 돈 가져가면 됐지 말이야, 왜 사람을 죽이느냐」하면서 한 놈을 어머니가 붙들었어요. 참 순간적이지만 자기 사랑하는 남편이 죽었다고 생각하니까 「이놈아, 이럴 수가 있느냐」한 겁니다. 한 놈이 바로 대고 총을 두 방을 쏜 거요. 복부에다가』
  
  -앞에 쏜 거는요?
  
  『근께, 아버지는 사실 맞아 돌아간 게 아니고 놀래 기절해버린 건데. 어머니는 돌아간 줄 아신 거예요. 닥 엎드려 버리니까. 총소리가 야밤에 나니까 동네 사람들이 모이고, 이렇게 되어버렸단 말이지. 어머니는 「나는 괜찮다」하며 내 이름을 대면서, 「누구 아버지가 죽었다」이러더랍니다. 아버지가 기절했다가 깨어나신 거야. 아버지가 「나는 괜찮다」그러더라는 거야. 우리 배로 태워 모시고, 부산이나 진해나 마산으로 갈라 그라는데 파도 때문에 못가게 됐어요. 그래 가까운 장승포로 간 거예요. 그래 장승포에서 수술 중에 돌아가신 거에요』
  
   간첩의 소행
  
  『어머니가 돌아간 다음에 열녀비를 세웠습니다. 그때까지도 이게 누구 소행인지 몰랐어요. 그런데 5.16 나고 나서 거제경찰서에 정보가 들어왔단 말입니다. 어떤 정보가 들어왔는가 하니, 죽었다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는 집이 있는데, 그 자가 누님집 다락방에서 8년간이나 산 고정 간첩이란 말이지요. 그게 이북도 갔다오고 그랬던 모양이에요.
  
  무기까지 가진 줄 모르고 경찰이 잡을라고 잠복을 한 거라. 다 자기가 무슨 큰 공을 세울라고, 그래 가지고 결국 그 경찰이 총에 맞아 죽었어요. 진 모라는 경찰이오. 그 참 큰 사건이 돼버려 가지고 결국 이 집을 포위했어요. 나중에 결국, 잡았습니다. 그래 나중에 확인을 해 보니까, 고정 간첩이다 말해요.
  
  고정 간첩인데, 도저히 거기서 오래 살 수가 없어 이북으로 갈라고 하는데, 일본까지 가는데 배를 하나 사 가지고, 그래 가지고 가는 돈을 구하기 위해 그걸 했다는 거에요. 했는데, 나도 그래 이놈들이 정 그러면 우리 배를 하나 뺏아가든지 말이지. 어머니는 안 돌아갈 것 아니냐. 내 원망을 했는데, 원망을 해봐야 소용도 없는 일이지만, 그래서 그 당시에 이게 엄청난 사건입니다』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심을 극복하기가 힘들었다』
  
  -재판할 때도 기사가 크게 나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때도 톱이고요. 우리가 이북하고 「대화」이러지만, 참 그때 마음이 괴로웠어요.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심이 어떻게 극복하기가 어렵더라고요. 한참 동안이요』
  
  -혹시 기도를 하신 적인 있습니까? 살인을 한 사람을 위한 기도 이런 거는….
  
  『지금 현재 그 기억이 없어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혹시 정치적으로 곤경에 처했을 때는… 어머니 생각이….
  
  『납니다. 참 생각이 나요. 그래서 우리 안방에 어머니 사진을 따로 특별히 걸어놓고 있지요. 그 주변에 딴 사진은 하나도 안 걸어요』
  
  -무덤은 어디에 있습니까?
  
  『거제도에 있어요. 우리 집에서 뵈이는 덴데요』
  
  -산 언덕입니까?
  
  『예, 우리 산인데, 그것?묘한 일이에요. 할아버지가 그 자리에 가기를 원했던 곳입니다. 그때까지는 그 근처가 우리 산이었는데, 그곳만 우리 산이 아니었어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우리 큰 산을 주고 바꿨어요. 그런께, 그 후에 어머니가 돌아갔으니까 그 자리로 간 거지요. 그때 말하면, 할아버지가 명당 자리를 원해서 구해 놓은 자리지요』
  
   =청소년기 - 6.25사변
  
  내친 김에 기자는 金총재의 청소년 시절로 파고 들어갔다. 역사관. 인간관. 국가관 같은 것의 뼈대가 형성되는 주요한 시기에 미래의 대통령은 어떻게 살면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8.15 때는 어디 계셨습니까?
  
  『8.15 때는 그 통영중학교 3학년 때입니다. 방학 때인데, 우리는 강제로 사천 비행장 닦는 데 동원이 됐는데, 일본학생이 40명이었고, 한국 학생이 20명인데 밤낮 싸웁니다. 내 그때 무슨, 애국심이 생겨서 그랬다기보다 그저 일본 사람 하는 일이 아니꼬와요. 우리를 무시하고 말이지. 일본 선생이 밤낮 벤또에 김치 냄새가 난다고 하는 등 우리 무시하는 소리나 하고 말이지.
  
  이러니까, 그 反日 감정이 생겨요. 그래서 자연히 내가 그 일본 아이들하고 충돌을 하게 됐어요. 이리 되어가지고, 정확 비슷하게 되어버렸어요. 그런데 그때 나보고 이제 가라 그래 가지고, 내가 집에 왔어요. 거제도에. 거제도에 와 있는 동안에 라디오 방송이 나왔어요. 8.15라고』
  
  -그때 일본사람들이 습격을 당하고 그런 것은 없었습니까?
  
  『거제도에서는 별로 그런 일이 없었어요』
  
  -그러면 일본 사람, 동급생들은 해방 후에는 못 만났었겠네요?
  
  『못 만났지요. 그런데, 내가 해방되고 이틀 후 엔가 학교에 나왔거든요. 오니까. 일본사람들이 벌써 도망치고 하나도 없어요. 학생도 못 봤고, 선생도 못 봤어요』
  
  -그때는 해방의 의미라든가 이런 것을 어떻게 느끼셨습니까?
  
  『그때는 그래도 마 흥분되어 가지고, 뭐 우쨌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아버지는 이승만(李承晩)의 국민회의에 가담한 간부
  
  -그러다가 사상 투쟁, 좌우익의 대결을 느끼신 건 언젭니까?
  
  『그때, 부산으로 전학을 왔어요. 그때 무대가 조금 넓은 데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는지도 몰라요. 지금은 경남고등학교라 그러지만, 처음에 전학할 때는 부산 제2中입니다. 그래서 거기 왔는데, 그때 우리 아버지가 국민회의 무슨 간부입니다. 해방 직후 대체로 조금 여유있는 사람들이 거기에 관계했습니다. 이승만 박사가 거기 국민회의에 거 뭐 아닙니까』
  
  -서울대학교 들어가시고 났을 때는 좌우익 투쟁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지요.
  
  『48년이니까 국대안(國大案) 문제가 가라앉을 때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교수들이 정치적 욕심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이선근 박사라고 있었어요. 이 양반이 역사학 교수였는데, 그때 역사가 우리 필수과목입니다. 모든 학생이 무슨 과에 있던 이건 안들으면 안된다 말이야. 그런데 이선근이란 사람은 기회가 있으면 나를 부르고 그래요. 과와는 관계없이 말이오. 내는 철학과였으니까요』
  
   우익 학생운동 조직
  
  -그때도 그 학생조직은 있었지요.
  
  『그래 여럿이 모여서 「순학회」를 조직했어요. 그래 인제 학회라고 만들어졌으니 자연히 서클이 되어 만나게 되지 않습니까. 늘 만나는데 솔직한 얘기로, 이것이 하나의 우익단체들 사람 아니오. 웅변대회에 나가서 2등인가 한 일이 있어요. 학교에서 점심 이후에 강의 들어갈 시간이 되어서 잔디밭에 앉아 친구들하고 놀고 있는데 학생과에서 직원이 나와서 내 찾는다고 누가 그래요.
  
  그때 학교 안에 지프차가 들어온다는 건 좀처럼 없는 일인데, 지프차가 한 대 들어왔어요. 날 찾는다고 그래요. 그래 만나니까 그 사람이 「장택상씨가 날 좀 만나자」고 그런다 그래요. 그래서 인제 강의를 치아뿌리고 갔지요. 집에 갔더니 창랑이 나보고 뭐라 그런고 하니』
  
   창랑 장택상(張澤相)과의 인연
  
  -그때 일대 일로 처음 만난 겁니까?
  
  『그렇지요. 처음 만난 건데, 무슨 얘길 하는가 하니, 「아, 거, 자네가 문리대서 웅변도 잘하고 그런다는데, 내가 이번에 한 번 결정을 해야 되겠다」고. 그때 외무장관하다 그만두고, 보궐선거에 나가 두 번인가 떨어졌어요.
  
  그때 2대 국회 선거에 자기 고향인 경북 칠곡서 나가려고 준비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날보고, 「자네가 몇 사람 데리고 말이지 날 좀 도와줄 수 없겠느냐」이래요. 그때는 정치인들하고 사귀어 본 일이 없거든요. 그래서 상당히 그 마음에 닿는 게 많더라고요』
  
  -인품이요.
  
  『예, 인품이라든가, 여러 가지 느낌이라든가』
  
  -어떠했습니까?
  
  『그때 첫 인상이 한 마디로 「애국자」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거에요. 「내가 이 양반을 도울 수 있으면 돕자」라는 생각이 딱 들더라고요』
  
  -선거 때 뭘 하셨습니까.
  
  『그때는 개인 연설회가 있었어요. 창랑이 연설하기 전에 하는 찬조 연설을 하는 겁니다. 창랑이 올 때까지 내가 하고, 창랑이 오면 내가 자리를 비켜주고 말이지요』
  
  -당선됐죠.
  
  『당선이 되어 가지고 국회부의장이 되었지요. 그때 국회부의장은 대단합니다. 지금 부의장하고는 전혀 다릅니다. 진짜 힘이 있었습니다』
  
  -선거 끝나고 나서는 학교로 복교했습니까.
  
  『그래요. 학교로 도로 왔지요. 왔는데, 바로 6.25가 나버린 겁니다』
  
  -그때 이미 선거라는 게 뭐다 하는 걸 느끼셨겠네요.
  『민주주의라는 게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거구나」하는 생각을 가졌지요』
  
   YS의 6.25
  
  -6.25사변 났다는 것은 방송을 통해서 알았습니까?
  
  『내가 신설동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6.25가 난 것을 바로 알았어요. 일요일이었는데, 방송에 이승만이가 안심하고 있으라고 그래요. 그래서 그걸 믿었는데, 그 다음날인가? 27일 아침인가? 27일 아침인 것 같아요. 탱크가 돈암동까지 들어왔다는 거에요. 그래서 아이구 큰일났다 싶대. 우리 학교에서는 내가 장택상씨, 찬조 연설 갔다온 줄을 조금 관심이 있는 학생들은 다 안다고요.
  
  진짜 인민공화국판에 말이오, 창랑이 우익괴수로 되어 있는데 내가 찬조 연설을 하러갔다 왔다면, 그냥 죽는단 말이오. 그래서 당장 우리집에 쳐들어올 것 같아요. 내가 그 당시에도 귀중품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지요. 학생이 뭐 있어요. 그래서 가치있다고 생각되는 책 몇 권, 탁상시계, 그런 것 좀 싸가지고 그냥 나온 겁니다. 내가 어디 갈데가 있어야지요.
  
  어디로 가도 안전한 데가 없어요. 그냥 걷는 겁니다. 그냥 헤메다가 어디로 갔는가 하면 제일 처음에 서울에 와서 하숙했던 집으로 갔어요. 그게 삼각동입니다. 그래 삼각동에 가니까, 아, 내가 전에 하숙하고 있을 때 내 옆방에 있던 사람이 그대로 있어요. 아까도 이야기가 좀 나왔지마는 우리 어머니가 오시고,
  
  유달리 그 집에 내가 좀 잘했거든요. 한번 갔다오면, 뭐 갔다 주는 것도 있고 말이지. 돈을 더 주거나 이러지는 않았지만 고구마라든지 예를 들어서 생선 말린 거라도 갖다주든지 이런단 말이오. 자기네들이 나를 그렇게 나쁘게 생각 안하는 거지요. 그래, 반가워하기는 하는데 사실, 그 판에 내가 나타났으니 큰짐 아니오.
  
  그래 하숙하고 같이 있던 친구가 임필수라는 회사원인데, 그래 내가 그 애를 보고 그날 저녁에 불안해서 서울에 못있겠다. 이 집에서도 내 오래 있을 수 없지 않느냐. 그러니 날 좀 구해주면 좋겠다 했어요. 그러믄 자기하고 같이 자기 집으로 가자 그래요. 이천으로 말이지. 그런데 걔는 얻었는데 나는 통행증이 없었어요. 그래, 걸어서 둘이 갔어요. 나는 밀짚모자 하나 쓰고 가는데 검문소가 많은 겁니다. 나는 학생증밖에 없는 거요. 그래 나한테 대해서 꼬다리를 묻고 그라는데 지금 뭐라고 이야기했는지 나도 그것도 모르겠어요. 이천까지 가는데 어렵게 어렵게 이틀밤을 간 깁니다』
  
  金泳三대통령은 전형적인 부르조아 계급출신이고 그 또한 보수우익의 길을 걸어 왔다. 아버지는 李承晩을, 아들은 우익전선의 야전사령관이었던 장택상(張澤相)을 추종했다. 그런 경력 때문에 6.25때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경기도 이천으로 피난 갔다가 서울로 돌아올 때는 퇴각하는 인민군에게 붙들려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그 뒤 어머니까지 북한 간첩에게 피살돼 공산당에 대한 증오심을 한동안 제어하기가 힘들었다는 金泳三 대통령은 출신과 경력상 반공적(反共的)일 수밖에 없는 「역사」를 갖고 있다. 金泳三 총재는 이천에서 서울로 돌아올 때 아슬아슬한 순간들을 여러 번 통과했다면서 이렇게 기억했다.
  
   인민군에게 붙들려 거짓말하고
  
  『그때는 쌀이 귀할 땝니다. 귀한 쌀을 한 말 주데요. 그 한 말을 짊어지고 그 길로 인제 올라온 깁니다. 그런데 내가 어디로 갈 수가 있어요? 갈 데가 없는데. 도루 서울로 온 깁니다. 이제 갈 때보다 더 어려운 거에요. 곳곳에 인민군이 지키는 거에요. 그런데 붙들리모, 니는 왜 서울로 가느냐 말이지, 증명도 아무 것도 없는데 이승만의 공작원이다,
  
  즈그 표현대로 하면, 너 공작원 아니냐고 해. 그때 나는 「어머니가 서울에 계십니다. 어머니가 서울에 계신데, 참 위독하다. 그래 식량이 없어서 식량 구하러 갔다가 오는 길이다」그래 통행증 어디 있냐. 통행증 잃어버렸다. 분실했다. 거 이래 가지고 거짓말을 하는데 자기네들이 한없이 세워놓는 겁니다.
  
  세워 놓고 그래 가지고 얼마를 걸렸는지 모르겠어요. 계속 올라오고, 걸리고 말이지. 인민군이 그때 후퇴를 하니 별로 신경을 못쓰는 거에요. 아무렇게나 하는 거요. 그라니까 그 즈그 쉬는 동안에는 같이 거 앉혀 놓는 거요. 한 시간도 좋고 두 시간도 좋고, 거 동무 정말이야? 드러누워 가지고 인자 말이지 나한테 말이지. 나는 어머니가 지금 돌아가시려 합니다. 죽더라도 어머니한테 돌아가 죽어야지요. 이 식량으로 밥을 한 끼락 해드리고 죽어야 된다고… 이래 가지고 결국 빠져가지고』
  
  -시체 많이 보셨습니까?
  
  『아, 많이 봤지요. 인민군들, 그 시체가 이래 창자가 나와가, 나보고 동무, 살려달라고 이라는 것도 보고요. 수없이 봤지요. 그러고 나도 죽을 뻔하고요. 사선을 몇번 넘었어요』
출처 : 월조
[ 2003-07-04, 13:3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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