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의 육성증언 上(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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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泳三의 육성 證言 (上) - 趙甲濟기자의 30시간 인터뷰 녹음테이프 공개
  
  {인간이란 한번만 만나도 情이 드는데… 朴正熙는 나를 배신했다}
  {직선 대통령이라야 군부를 통제할 수 있다. 내각제로 민주화되어도 쿠데타 부를 수 있다} {나는 누르면 더 튀는 사람}
  {정치인은 대담하고 대범해야}
  
  1987년 4, 5월 金泳三민주통일당 총재가 솔직하게 털어놓은 정치와 人生, 여러 상황이 6월사태라는 결전장으로 달려가던 격동의 시절, 그 한복판에서 민주화 세력의 지휘관 역할을 하고 있었던 金泳三은 비교적 순수한 마음상태에서 자신을 드러냈다. 8년 前에 냉동된 金泳三의 말과 그 뒤 8년간의 변화를 비교해보면 만감이 교차할 것이다. 이제 권력의 下山길에 접어든 金泳三 대통령과 등산길에 있었던 1987년의 金泳三, 두 점을 잇는 궤적은 자신의 운명에 엄청난 확신을 가진 우리 시대의 한 특이한 인간상을 그려준다.
  
  <1995년 10월 월간조선>
  
  자신의 운명에 엄청난 확신을 가진 한 인간의 자화상
  
   下山길의 고독을 맛볼 때?
  
  金泳三 대통령은 지난 8월25일에 집권 5년의 반환점을 돌았다. 약 50년에 걸친 집권 대장정의 궤적에서 그는 처음으로 하강곡선을 타고 있는 것이다. 등산에 비유한다면 그는 下山길에 접어들었다. 비행기 사고의 60% 이상의 착륙과정에서 발생하고 등반사고의 대부분도 下山 때 일어난다. 내려올 때는 체력이나 권력이나 엔진의 추진력이 약해진다. 등산, 이륙, 도전기의 긴장과 집중력은 이완된다. 권력자에게 무엇보다도 섭섭한 것은 주변 사람들이 이제부터는 제 살 길을 궁리하고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이런 下山길에서는 권력과 권위의 안개가 걷히면서 인간이 드러난다. 권력이나 선전·인기 같은 것으로 포장되었던 정치인의 인간적 본질, 또는 본전이 노출된다. 그때 국민들은 비로소 金泳三은 이런 인간이었구나 하는 발견을 하게 될 것이다.
  
  국민들은 지금까지 金泳三의 두 가지 얼굴을 보았다. 정권도전기의 金泳三과 대통령이 된 뒤의 金泳三. 많은 국민들은 정권을 잡은 金泳三에게서 그 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점들을 발견하고 때로는 감탄, 때로는 당혹, 때로는 절망하였다. 이제부터, 즉 집권후반기와 퇴임 후 국민들은 또 다른 모습, 즉 제3의 金泳三을 보게 될 것이다. 그 모습은 한 인간으로서의 金泳三, 한 정치가로서의 金泳三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인상을 새기게 될 것이다.
  
  인생의 下山길이기도 한 金泳三의 장래는 한 개인의 행, 불행뿐 아니라 국민의 행, 불행과도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李承晩의 下山길엔 4·19라는 수렁이 있었고 朴正熙에겐 10·26이란 낭떠러지가 있었다. 全斗煥은 6월사태란 장애물을 6·29선언으로 넘었으나 5共청문회란 제2의 장애물에 걸려 백담사로 가야 했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잔인한 장군] 全斗煥은 보다 친근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盧泰愚는 보수대연합의 3당합당으로써 下山길의 권력 실속(失速)을 막으면서 비교적 무리없이 金泳三정권의 탄생을 지원하였다.
  
   한국정치의 主語는 YS가 아니라 중산층
  
  金泳三대통령은 장애물과 함정이 많은 下山길에서 자신의 퇴임 후 설계와 정권재창출을 골똘히 생각하고 실천해야 한다. 권력의 반환점에서 만난 6·27선거란 큰 함정은 金泳三대통령을 거의 失足케 한 대사건이었다. 金泳三정권의 지지기반이었던 보수·중산층이 金泳三대통령의 부정적인 역사관과 독선적인 개혁행태, 그리고 굴욕적 對北정책에 대하여 화를 벌컥 내고 채찍을 한 번 크게 휘두른 것이 6·27 선거의 의미였다. 보수·중산층의 그런 분노는 국민여론에 민감한 金대통령의 정치행태를 다소 순화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의 왼쪽에 기울어 있었던 金大中총재까지도 오른쪽으로 끌어당겨 한국사회를 보수화시키고 있다.
  
  6·27선거는 한국정치의 主語는 3金씨가 아니고 중산층임을 더욱 확실히 보여주었다. 한국언론은 아직도 3金을 主語로, 국민을 목적語로 놓는 문법의 기사를 쓰고 있으나 실제 위대한 산물인 한국의 중산층은 釜馬사태 때 대학생들과 합세하여 朴正熙 장기집권에 치명타를 가하면서 한국 정치무대에 결정적 인자로 등장한다. 1980년 봄에는 3金의 분열과 사회혼란을 우려하여 학생들과 헤어짐으로써 신군부의 집권을 허용했던 중산층은 5년 뒤 2·12총선에서 관제야당을 선명야당으로 바꿔치움으로써 3金씨를 정치무대로 다시 불러내고 민주화를 한국사회의 제1主題로 만들었다. 중산층은 全斗煥 연출·盧泰愚 주연의 6·29선언을 수용한 바탕에서 또 다른 장군, 그러나 반성한 장군 盧泰愚를 대통령으로 선택함으로써 [점진적 민주화]를 한국사회의 발전모델로 확정지었다.
  
  1988년의 4·26총선에 의한 與小野大는 87년 大選의 승리로 오만해진 盧泰愚진영에게 중산층이 다시 한 번 [민주화의 실천]을 명령한 결과였다. 민주화의 소용돌이가 너무 거세어지자 중산층은 鄭元植총리에 대한 학생들의 테러가 있은 직후 1991년 6월의 광역지방자치선거에서 민자당을 압도적으로 밀어주었다. 이는 3당합당의 사후 추진이었을 뿐만 아니라 金泳三 당시 민자당 대표에 대한 중산층의 응원이기도 했다.
  
  1992년 12월18일 金泳三후보를 대통령으로 선택하도록 한 것은, 金泳三씨가 가끔 착각하듯이 그 자신의 개인적 인기 때문이 아니라 성숙하고 사려깊은 한국 중산층의 결단 덕분이었다. 金泳三대통령은 취임 후 언론의 전폭적 지원사격 하에서 司正 위주의 개혁을 진행하면서 중산층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중대실수를 저질렀다. 그는 한국의 중산층이 오래 전에 合意한, 한국의 現代史의 위대한 성취와 그것을 가능케 했던 前정권에 대한 객관적 인정과 평가를 완전히 뒤엎어버리고 좌파적 역사관에 서서 現代史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면서 자신의 도덕성을 독선적으로, 때로는 위선적 논리로 부각시켜 정치무기화라는 야당식 선동정치를 GNP 세계 12위의 한국사회에서 재현시켰다. 중산층의 심기를 결정적으로 건드린 것은 한국 현대사에 대한 오만한 부정과는 너무나 판이한 굴욕적 對北자세였다.
  
  {외국에서 쌀을 사 와서라도 인도적 견지에서 북한을 지원하겠다}던 金泳三대통령에게 돌아온 것은 쌀 북송선 억류사건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서 항의는 커녕 [귀측의 법을 어긴 점에 대해 사과한다]는 사과문을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보냄으로써 우리 헌법이 규정한 반국가단체 북한의 법까지도 남한국민들이 준수해야 한다는 논리를 만들어준 것이다. 국가보안법상의 이적행위에 다름 아니다. 이런 金정권에 대한 중산층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한 것은 권력기생체질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한국의 언론 및 지식인이었다. 법을 무시하고 진행되는 개혁에 대한 마녀사냥식의 응원 보도, 金泳三지지율 90%란 신화의 제조에 언론은 [사실추구]라는 원칙마저 버렸던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한국의 많은 언론은 중산층과 유리되었다. 한국 언론은 과격세력, 좌익세력, 위선적 지식인, 선동적 정치인의 견해를, 불만속에서 침묵한 중산층의 성숙한 생각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반영해주었다. 이런 보도태도는 결과적으로 金泳三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려 그를 착각과 환상에 빠뜨렸다. 선거의 위대한 점은 국민들의 의사표시가 언론의 왜곡된 중계 없이 직접적으로 이뤄진다는 점에 있다. 6·27선거에서 나타난 民意는 그동안 언론이 소개했던 여론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金泳三대통령이 6·27선거에서 가장 큰 교훈으로 받아들여야 할 점이 바로 그것이다. 한국의 언론은 국민의 여론보다는 집권자와 위선적 지식인들의 여론에 편향돼 있으므로 그런 언론보도를 나침반으로 믿고 정책을 펴다가는 벼랑 끝으로 인도될 가능성이 있다.
  
  金泳三식 정치의 전형―옛 중앙청 철거
  
  金泳三의 下山길이 명예로울 것인지, 아니면 치욕적일지는 6·27선거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느냐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6·27선거 뒤에도 중산층의 반대를 무릅쓰고 金대통령은 국립중앙박물관의 철거를 감행하고 있다. [철거] 그 자체보다도 철거에 이른 과정과 방법에서 우리는 金泳三식 國政운영의 문제들을 발견한다. 金泳三정부는 [現 국립중앙박물관 철거]를 [舊 조선총독부 철거]라고 강변하고 있다. 철거되고 있는 이 건물은 현재는 박물관으로, 그 전엔 중앙청으로, 그리고 50년 전에 조선총독부로 쓰여졌다. 해방된 그날 이 건물을 철거했다면 [舊 조선총독부 철거]란 표현이 맞다.
  
  이 건물엔 19년간의 日帝역사와 그 위에 덧칠해진 50년의 한국 현대사가 함께 쌓여 있다. 金泳三정부는 日帝의 악몽보다 더 귀중한 한국 現代史 부분의 파괴를 감추기 위해서 시계바늘을 50년 뒤로 돌려놓은 文法으로 [舊 조선총독부 철거]라고 말한다. 이것은 언어의 속임수이다. 속임수的 발상으로 民族正氣를 도모할 수 있을까. 문체부장관은 이 건물철거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친일파]라고 공언했다. 국가가 아닌 정권에 반대할 뿐인데도 [빨갱이]로 몰고, 개혁 그 자체가 아닌 金泳三식 개혁을 반대하는 데도 수구세력이라고 지목, 약점을 잡으려드는 기관원식의 용어가 소위 문민정부의 文化담당 책임자 입에서 나왔다는 것은 [문민]의 제1조건인 교양의 부족을 자백한 것이다. 이런 행태는 이 건물의 철거에, 전임 대통령의 집무실이었던 옛 청와대 본관의 철거와 함께 다른 진짜 의도가 숨어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민족정기 회복으로 위장하여 한국 現代史의 영욕을 상징하는 2大 건물을 없애버림으로써 대한민국과의 과거 정통성을 파괴하는 대신에 金泳三 정권을 역사 속에서 돋보이게 하려는 상징조작!
  
  무엇보다도 국립중앙박물관의 상투를 잘라내는 행사가 광복50주년 행사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전란과 독재를 극복하고 한국인이 이룩한 지난 50년의 엄청난 성취를 딛고서 세계를 바라보며 미래를 생각하는 장쾌하고도 비장한 기회로 삼았어야 할 그 자리에, 50년에 한 번 있는 그 타이밍에 조선총독부의 유령을 불러내어 과거지향적인 증오심의 상기를 연출한 金泳三정부의 문화적 수준은 두고두고 화제가 될 것이다. 건설과 비전이 아닌 [과거]와 [파괴]를 광복 50주년의 주제로 삼은 金대통령을 우리 세대는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더구나 광화문 일대 8·15기념 행사장의 운영은 행사 전문가들 사이에선 학예회 수준으로 평가되었다. 초라하고 앞 뒤 안맞는 8·15기념식과 군사정권의 작품인 서울올림픽 개회식의 일사불란과 예술적 완벽성을 비교해보라. 金泳三정권은 과연 군사 文化를 비판할 자격이 있는가. 서울올림픽이나 서울 定都 6백주년, 광복 50주년 같은 기념 행사의 의미는 [국민적 추억 만들기]이다. 서울 올림픽의 감동을 기억할 때마다 우리는 한민족의 저력을 확인한다. 광복 50주년 행사에서 우리는 10년 뒤에 무엇을 추억할 것인가.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주도록 역사가 마련해 준 그 무대에서 형편없는 연기로 관객을 실망시킨 연출가와 배우는 쉽게 용서되지 않을 것이다.
  
  조직경영과 국정운영의 미수함과 무능을 위선적 개혁과 선동적 정치로 호도하려 한다는 오해를 받지 않으려면, 金泳三대통령은 집권 후반기에 자신이 깨끗하면서도 유능한 인물임을 증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깨끗하지만 무능한] 지도자는 [부패하지만 유능한 지도자]보다도 더 큰 해악을 국가에 끼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사갈 집도 결정하지 않고 잘 살던 집을, 그것도 민족의 정신을 모신 국립중앙박물관을 먼저 헐어 버리고 임시 건물로 나앉는 이런 反文明的 정책을 만약 프랑스 같은 선진국에서 추진했다면 그 정권은 붕괴되었을 것이다. 미테랑 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을 루브르 박물관의 증축으로 꼽고 있는 나라, 대통령이 결정한 약탈문서의 반환을 말단공무원이 거부하고 있는 나라에서는 金泳三식 先철거 後건설은 아예 입안 단계에서 여론의 뭇매를 맞고 말 것이다.
  
   金泳三을 무덤까지 따라갈 유령
  
  그런데 대한민국에선 [대통령의 결단]이란 말 한 마디로 이런 무리가 성공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불만 많은 지식인도, 정치인도 숨을 죽이고 있다. 이런 무리를 저지할 행동력이 없는 한국의 지식인과 지도층이 과연 이 나라를 지킬 수 있을까. 오로지 권력과 권위 그 자체에 경의를 표하고 위선적 명분에 가위눌린 한국 지도층의 기회주의적 태도는 金泳三정권에 대해서도, 그 전 독재정권에 대해서도 되풀이하였다. 지식인·지도층의 수준이 이렇다면 金正日이 서울을 점령하여 권력을 잡아도 그 권력에 대해서도 똑같은 경의를 표하지 않을까. [민족정기 회복]이란 명분과 [친일파]란 언어폭력에 주눅든 대다수 지식인들의 침묵과 일부 인사의 지지를 金泳三대통령은 국민적인 찬동으로 오판하고 있는 것 같다. 金대통령은 이 문제에 대한 진정한 국민여론을 권력의 下山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정책의 실수는 쉽게 잊혀지고 양해될 수 있다. 그러나 국립중앙박물관 철거같은 유형적인 실수는 끊임없이 기억된다. 더구나 그릇된 역사관과 문화에 대한 무지를 증거하는 건물파괴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그 책임자의 인간됨을 설명하는 자료로는 활용된다. 퇴임 후의 金泳三씨를 무덤까지 따라다닐 것은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령일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돔이 철거되던 날 金대통령은 모처럼 기분이 좋았다고 한다. 그날 그가 받았던 그 환호는 미래의 어느 날엔 경멸의 웃음소리로 바뀔 수가 있다. 그런 배신을 예방하는 방법이 있긴 하다. 金大中총재의 충고대로 돔을 잘라내는 상징적 행사는 끝났으니 건물철거를 새 박물관 완공시까지 중단하고 그 동안 이 건물이 운명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을 버는 것. 상투 잘린 건물을 그 상태로 남겨두고 고민을 거듭하는 가운데 민족의 과거와 미래 진로에 대한 성찰이 생긴다면 이 또한 부수입이 아니겠는가.
  
   보수·중산층을 향한 대변신
  
  下山길의 인간 金泳三이 어떤 모습을 보일 것인가 하는 데 대해서 기자는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다. 기자로서 지난 10여년간 金泳三대통령의 언동을 비교적 가깝게 관찰하면서 재미있게 느꼈던 것은 金泳三의 변신이었다. 3당합당 같은 파천황적인 변신을 통해서 정권을 잡은 金泳三을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지조의 정치가]로 기억하고 있다. 파격적인 변신과 그 변신의 불가피성을 국민들에게 설득하는 데 있어서 그는 명수이다.
  집권 하반기에 가장 눈여겨볼 대목이 그 특유의 변신술이다. 그의 변신이 [사쿠라]로 몰리지 않았던 것은 변신 폭이 20∼30도 정도가 아니라 1백80도로 엄청나기 때문이다. 어중간한 궤도수정이 아니라 궤도 이탈에 가까운 큰 변신을 해버리면 구경꾼들은 정신을 못차린다. 그러는 사이 金泳三은 자신의 진로를 재빨리 정립한 뒤 {나를 따르라!}로 외친다. 그가 가리키는 곳에는 정권高地가 있으니 곧 동조세력이 몰려든다. 이런 성공적 변신이 下山길에도 가능할까. 정권고지는 안 보이고 돌아갈 상도동집이 보이는데, 그의 지지세력인 민주계는 많은 중산층 사이에서 조소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어디서 변신에 필요한 힘을 끌어낼 것인가.
  
  보수 중산층은 金泳三대통령에 대하여 애증(愛憎)의 감정을 갖고 있다. 그 미움의 뒤에는 애정이 붙어 있다. 金대통령이 언론과 민주계란 2大지원세력을 걷어치우고 중산층과 마주하여, 정권을 향한 변신이 아니라 중산층의 여론에 순응하는 대변신을 할 수 있다면 金대통령은 무사착륙에 필요한 힘을 국민 속에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대통령이 되기 전에 가졌던 최대의 정치적 자산은 보수 중산층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능력이었다. 도전자 金泳三의 이미지는 겸손하면서도 당당하였다. 집권자 金泳三대통령의 이미지는 어느새 빳빳하고 어색한 게 돼버렸다.
  
  그가 한국 현대사와 국민 앞에서 겸손하고 북한 노동당과 불법 앞에서 당당한 자세로 변신한다면 下山길이 외롭고 위태롭지만은 않을 것이다. 金泳三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행동기준은 과거나 지금이나 인기와 언론보도이다. 인기나 기사를 따라가는 정치행태는 단기적으로 갤럽의 지지율을 높일 수는 있지만, 중산층의 분별력이 한국처럼 높은 나라에서는 선거시의 표로도, 역사적 평가로도 연결되지 않는다. 단임제 대통령의 장점은 재선에 대한 미련없이 담담하게 역사·민족·국가·문화·경제 같은 큰 주제에 성실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닌가. 인기에 민감한 사람은 그 인기가 사라졌을 때 견딜 수 없는 배신감과 고독을 느끼게 된다. 金대통령은 이제 그런 시기에 대비해야 할 때를 맞고 있다. 많은 구경꾼들은 [인기 떨어진 金泳三]의 인간적 모습에 대하여 지금부터 흥미진진한 기대를 하고 있다.
  
   등산길의 YS―30시간분의 녹음 테이프
  
  기자는 겸손하고 당당하던 시절의 金泳三씨와 장시간 인터뷰를 가진 적이 있다. 1987년 봄 金泳三, 金大中 두 사람이 이민우(李敏雨) 총재의 신민당을 깨버리고 통일민주당을 창당하던 무렵이었다. 그때 金泳三씨는 국회의원이 아니기 때문에 서울시청 뒤 편 무교동에 있는 피닉스빌딩 3층 민족문제연구소에 나오고 있었다. 기자는 10여일간에 걸쳐 연 30시간 정도의 인터뷰를 가졌다. 月刊朝鮮 1987년 6월호에 실린 金泳三 人物論을 취재하기 위해서 시작된 인터뷰가 책을 한 권 남길 만한 분량으로 길어졌던 것이다.
  최근에 기자는 다시 그 녹음테이프를 들어보았다. 타임머신을 타고 8년 전으로 돌아가 金泳三총재와 친근한 분위기에서 아주 솔직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느낌에 젖었다. 리시버를 통해 들려오는 金泳三총재의 목소리와 그 목소리에 담긴 분위기는 요사이 텔레비전 화면에 비치는 대통령과는 사뭇 달랐다.
  
  인터뷰가 녹음된 때는 1987년 4월 초∼5월 말로서 6월사태 직전에 해당된다. 金총재로서는 全斗煥정권의 깡패를 동원한 방해공작을 돌파하면서 통일민주당을 창당(5월1일 창당)해가던 무렵이었다. 6월사태의 도화선이 된 [朴鍾哲군 고문치사사건의 축소 은폐]가 폭로되고 4·13호헌조치에 맞서 곳곳에서 단식과 서명이 이뤄지던 시기와도 겹친다. 6월사태라는, 군부정권과 민주세력의 결전을 향해서 여러 상황이 달려가던 시기, 그 한복판에 있었던 主役 金泳三총재(당시 金大中씨는 연금돼 있었다)와 거의 매일 만나서 인터뷰를 할 수 있었으므로 녹음 테이프는 격동하는 상황과 결연한 金총재의 의지가 그대로 담겨져 있다. 이 녹음테이프를 들으면서 기자는 이때가 金泳三씨로서는 한 인간으로서 가장 순수한 순간순간이 아니었을까 하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마음을 비웠다}는 성인 같은 술회가 자주 나와도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金泳三총재는 온 국민과 함께 오직 대통령직선제 쟁취에 전념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때는 또 金大中씨와의 협력도 잘 돼 지역감정이 표면화되기 이전이었다.
  
   자기 운명에 대한 엄청난 확신
  
  당시의 상황은 民主 對 독재로 단순했고 국민들의 열망도 군정종식으로 집약돼 있었다. 金泳三 총재의 장기는 단순한 상황에서 무서운 돌파력을 보인다는 점이다. 당시의 무대 자체가 승부사 金泳三에게 가장 적합한 장치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金泳三 총재도 순수한 마음에서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녹음테이프는 말하자면 정권을 향한 등산길의 인간 金泳三을 보여준다. 그 녹음테이프를 下山길에 접어든 金泳三대통령을 바라보면서 들으니 묘한 느낌이 들었다. 지난 8년간의 세월이 불러온 변화와 8년 전 시점에서 냉동돼 있는 金泳三의 말을 서로 비교하면서 분석해 볼 수 있었다. 그러니 金泳三의 모습이 좀 더 입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었다.
  
  이 녹음테이프를 다시 들으면서 기자는 金泳三이란 人物은 상식이란 잣대로써는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라는 생각을 했다. 상식이란 기준으로 金大中총재나 朴正熙를 분석하고 평가할 수는 있지만 金泳三을 재려고 하면 눈금이 흐려져버리는 것이다. 金泳三이란 人物을 이해하는 데는 다른 잣대가 필요한데 그것은 아마도 [운명] 또는 [大運]이란 단어가 아닐까 싶다.
  
  1992년 大選은 책을 적게 읽는 정치인이 아마도 가장 책을 많이 읽는 정치인에게 이긴 경우였다. 군복무를 안한 金泳三씨가 분단국가의 군통수권자가 된 것도 非상식적이다. 어머니를 고정간첩의 총격에 잃었다는 그가 북한의 金日成·金正日에 대해서, 그들의 만행에 대해서 그토록 분노를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로부터 그런 굴욕을 당하면서도 침묵하는 것도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안되는 대목이다. 말이 가장 중요한 무기인 정치판에서 어휘력이란 탄약在庫가 그렇게 적은데도 연전연승할 수 있었다는 것 또한 상식의 범위를 벗어난다. 요컨데 金泳三 정도의 독서력과 어휘력과 휴머니즘과 對北觀을 가진 인물이 4천5백만 국민의 꼭대기에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어려운 일이라면 우리는 다른 잣대를 찾을 수밖에 없다.
  
  자신의 운명에 대한 엄청난 확신! 이것이 金泳三 인격의 중심부에 있음을 8년 전의 30시간짜리 녹음테이프는 말해주고 있었다. 선천적으로 갖고 나온 그의 자신감은 성격형성기에 더욱 강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8년 전 金泳三총재의 술회에 의하면 그가 태어난 마을은 약 40가호인데 주민들 거의 전부가 아버지가 갖고 있던 어장의 피고용인들이었다고 한다. 남자 동생 셋이 일찍 죽어 독자로 자란 金泳三 소년이 그 마을에서, 그 가정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40가호 가운데 35가호가 金泳三 소년의 할아버지를 따라 기독교로 개종한 마을이었다.
  
  그 뒤의 사회생활·정치생활에서 金泳三은 나이에 비해서 항상 선두에 있었고 누구의 부림을 받은 적도 거의 없다. 정치적 패배는 있었지만 기가 꺾인 적은 한 번도 없다. 최연소 국회의원, 최장기 원내총무, 최연소 야당 총재 등의 화려한 경력은 어떤 독립운동단체에 가든지 항상 우두머리가 되었던 李承晩과 비교될 수 있다. 李承晩 또한 엄청난 자기 확신을 가졌던 人物이지만 그 확신은 그의 출중한 견식과 파란만장한 경력의 자연스러운 産物로서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金泳三의 가장 큰 정치적 자질이란 용기도, 도덕적 결단에서 나왔다기보다는 그의 자기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란 느낌이 더 강하다.
  
  金泳三 총재는 {내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 바로 민주화}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말에 웃는 것은 자유이지만 그가 소신을 정직하게 이야기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자기확신→용기→민주화 투쟁]으로 이어진 그의 행동체계는 시대를 잘 만났다. 정치인에게서 지식이나 교양보다는 용기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요구하던 시대를 金泳三은 살았던 것이다. 金泳三이 가진 자기확신은 민주화시대에는 용기로 비쳐졌고 이 시대와 국민과 金泳三 개인이 모두 그 득을 보았다. 金泳三의 권력욕이 민주화란 시대정신에 편승함으로써 약점은 덮이고 밀월은 계속되었다. 역설적으로 얘기한다면 용기 있는 지도층 人士가 적었기 때문에 金泳三의 용기는 더욱 큰 힘을 발휘했다.
  
   제왕적(帝王的) 사고방식?
  
  그러나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 자기중심적 사고방식과 이 시대의 요구는 비로소 어긋나기 시작했다. 그의 자신감은 용기가 아니라 오만, 독선,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비치기 시작했다. 金泳三이란 개인과 시대는 더 이상 동반자가 아니게 된 것이다. 金泳三의 자기 확신은 대통령 당선에 의해 환상도 망상도 아닌 하나의 운명이었음이 확인된 셈이다. 운명적으로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믿었고, 그 믿음대로 되었으니 그의 사고방식은 상식인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오히려 帝王의 思考체계를 닮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녹음테이프는 인간 金泳三에 대한 탐험으로 독자들을 안내해줄 것이다. 대통령 중심제하에서 국가의 운명은 대통령의 인간됨에 의해 영향을 크게 받는다. 金泳三이란 인간에의 탐험은 그의 國政과 그의 미래에 대한 이해와 예측을 도와줄 것으로 기대해 본다. 녹취록은 인터뷰 시간 순서가 아니라 주제 중심으로 재구성했다. 金泳三총재의 말은 원어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출처 : 월조
[ 2003-07-04, 13:5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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