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전 총리의 세기말 좌담 - 강영훈,남덕우,노재봉(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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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전 총리의 세기말 좌담 ; 강영훈·남덕우·로재봉- 20세기 한국 총정리
  
  『20세기 최대 성취는 民族국가 건설 李承晩 朴正熙가 대표 人物 … 물질적 발전에 어울리는 정신적 自主性- 정치 리더십-시민윤리 확보가 21세기 과제』
  
  ● 姜英勳:國權상실에서 얻은 「민족은 힘이 있어야 한다」는 自覺이 발전의 원동력 돼
  ● 南悳祐:민주주의 발전에는 경험과 自覺밖에 없어… 길게 보고 인내심 가져야
  ● 盧在鳳:우리가 추구해야 할 국가像부터 확립하고 실현 방법을 찾아야
  
  <1999년 12월 월간조선>
  
  1백년 前 開化 진통, 지금은 개혁-개방으로 되풀이
  
  한국의 20세기를 정리하고 21세기를 전망하는, 前(전)총리 세 사람의 鼎談(정담)을 마련했다. 姜英勳(강영훈) 南悳祐(남덕우) 盧在鳳(노재봉) 전 총리는 다양한 사회 활동과 橘??지식, 그리고 國政(국정)을 총괄해 본 경험에서 나오는 깊은 經綸(경륜)으로 우리 민족의 1백년 발자취를 되짚어면서, 다음 세기를 맞는 데 얻어야 할 교훈들을 추출해 냈다. 11월 11일에 있은 좌담은 4시간 동안 쉼없이 이어졌다.
  
  사회 : 20세기는 한민족 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1백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국주의 침략과 國權(국권) 상실, 식민주의, 공산주의, 민족 분단, 전쟁, 군사쿠데타, 독재, 경제개발, 민주화, 정권교체…. 여기에다 북한에서는 최악의 飢餓(기아)와 통제 체제를 겪고 있습니다. 20세기 인류가 경험한 모든 思想(사상)과 체제, 도전과 응전이 한반도에 집약돼 나타난 양상입니다.
  
  20세기 한국 역사의 話頭(화두)로 事大(사대)냐 自主(자주)냐의 문제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우리 근-현대사는 외세로부터 강요된 開化(개화)에 어떻게 대응?왔느냐의 기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해방후의 근대화도 그렇습니다. 38선으로 남북이 끊어져 버리니까 남한은 섬 아닌 섬이 돼 버렸습니다. 그같은 강요된 地政學的(지정학적) 조건에서 우리는 해외로 진출해 활로를 찾는 海洋化(해양화) 전략이 불가피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경제적 군사적 수단을 어느 정도 확보하게 됐습니다만, 또다시 IMF 사태로 개방과 개혁을 강요당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南悳祐 : 약 1백년 전에 우리나라는 심한 開化의 진통을 겪었습니다. 19세기 4/4 분기부터 개화의 소용돌이를 겪었는데, 금세기에도 1980년대 중반 무렵부터 국제화다, 세계화다 해서 도전에 직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1백년전 開化의 진통 이후 우리 민족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간략히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9세기 말 우리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국제 정세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청국, 일본, 러시아 3국이 한반도를 장악하기 위해 서로 치열한 쟁탈전을 벌이는 판국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이 淸日전쟁(1894∼1895)과 露日전쟁(1904)에서 이겨 한반도를 약탈한 거죠.
  
  그러는 동안 국내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丙寅洋擾(병인양요·1866), 辛未洋擾(신미양요·1871), 壬午軍亂(임오군란·1881) 등으로 표출되는 쇄국주의에다, 甲申政變(갑신정변·1884) 乙未事變(을미사변·1895) 俄館播遷(아관파천·1896) 등 외세의 암약과 국내 政爭(정쟁)이 맞물리는 대혼란을 겪었고, 이는 결국 淸日, 露日 전쟁의 도화선이 되는 과정이었습니다.
  
  나라의 운세가 기울어 질 때 高宗(고종)은 영토적 야심이 없는 미국의 개입을 기대해 보기도 했으나, 미국은 일본과 이른바 태프트-가츠라 비밀 조약(1905)을 맺어, 일본이 필리핀을 침공하지 않는 대가로 일본의 한국 지배를 용인한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결국 우리는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국권을 잃고 말았습니다.
  
  왜 우리가 이런 비운을 겪게 되었습니까. 당시에 우리 朝廷(조정)이 너무나 바깥 세상, 국제 정세에 어둡고 무능하여 자주적으로 외국의 문물을 받아 들이고 근대화에 필요한 개혁을 스스로 하지 못한 탓입니다. 힘 없는 나라니까 그렇게 된 것이지요.
  
   지도자들의 無能-無識이 국가 불행 自招
  
  姜英勳 : 20세기가 우리 민족에게 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느냐를 총체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렇습니다. 1백년 전 西勢東漸(서세동점)의 물결속에 列强(열강)의 이해 관계가 한반도에 침범, 대립 교차하는 가운데 우리나라 지도자들이 무능하고 무식해서 여기에 잘 대처하지 못했지요. 그래서 말씀하신 대로 강요된 開國(개국)이지, 우리 스스로가 어떤 주체성을 가지고 개국을 한 게 아니었습니다. 甲午更張(갑오경장·1894)이라는 것이 있었지만 일본 사람들이 한 것이지 우리 주체성이 없었어요. 그러니 國政(국정)이 극히 문란했죠. 서로 싸움질만 하고…. 그래서 나라가 결국 망하지 않았습니까. 日帝(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었지만 이것도 강요된 국토 분단을 가져왔습니다. 모두가 우리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역시 민족이 힘이 있어야 된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끼게 된 것이지요. 이 자각이 우리 민족에게는 큰 힘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이 힘이 없게 된 원인은 어디서 찾아야 하느냐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지도자들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몰랐던 겁니다. 일부 지도층에서 개화 운동을 시작했지만, 이 역시 타락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우리 나라를 집어먹기 위해 大韓帝國(대한제국)이라는 國號(국호)도 갖게 하고, 皇帝(황제) 칭호도 만들고 했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남의 장단에 춤추고 있었던 거예요. 개화 세력은 타락 하고, 타락한 세력은 국력을 배양하지 못하고 서로 싸움질만 했습니다. 賣官賣職(매관매직)이 횡행했지요.
  
  그러니 民亂(민란), 軍亂(군란)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13개월씩이나 군인들 보수를 못 줬어요. 먹고 살게 해주지도 않으면서 군인 생활을 하라는데 亂이 안 일어 나겠어요? 나라를 잃고 독립 운동을 할 때도 左右(좌우)로 갈라졌습니다. 그게 해방후에는 결국 국제 패권의 물결속에 38선으로 갈라진 것이지요. 金九(김구)선생이 나라를 가르지 않고 통일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인 점은 애국심이라는 견지에서는 아주 높이 평가하여야 하지만, 당시 국제 정세를 그 분이 올바로 보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單政(단정)을 수립했다고 해서 李承晩 박사를 깎아 내리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盧在鳳 : 단순히 시간 개념으로 20세기를 논하는 것은 編年史(편년사)적인 것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봅니다. 역사는 시간 개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 원칙일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南 총리께서 말씀하신대로 1900년부터 한국의 20세기가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굳이 시간 개념으로 이야기를 한다면 19세기의 4/4분기부터 한민족의 20세기는 시작됐습니다. 또 현재 우리는 21세기를 앞두고 있다고 하는데, 이미 한국의 20세기는 끝났습니다. 시대적인 개념에서는 이미 21세기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개념에서 20세기를 본다면 유교적인 국가 질서가 서양의 국가 질서로부터 도전을 받고 무너지는 시기입니다. 한국은 유교적인 질서에서 떠나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떠난다고 하는 것이 서양에서 불어닥친 막강한 힘을 받아 새로운 政治體制(정치체제)를 만들어야한다는 것이었고, 그것은 곧 민족 국가 건설이었습니다. 민족 국가를 만드는 데는 여러가지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잘 안되면 쿠테타(甲申政變)까지 벌어지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지요. 그러나 그건 向日派(향일파)였지, 親日派(친일파)는 아니었습니다.
  
  개혁 이념의 連綿性
  
  南悳祐 : 1945년에 해방이 되었지만 이때에도 또 다시 外勢(외세), 이번에는 美蘇(미소) 양국에 의해서 남북이 분단됐습니다. 다행히 남북이 분단된 상태에서 李承晩 대통령은 남한을 자유민주체제로 이끌면서 미국과 더불어 공산주의 赤化(적화)통일 야욕을 물리치는 데 큰 지도력을 발휘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남한이 자유민주체제에 기초한 國權을 회복하자 그동안 억눌려 왔던 민족적 에너지가 일시에 분출하여 우리나라는 모든면에서 역동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정치적으로는 4·19와 5·16, 군사정권과 이에 반대하는 민주화 투쟁을 거쳐 지금의 민주체제로 발전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朴正熙(박정희)대통령이 국민적 에너지를 경제개발로 집결하여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20세기 후반부는 2차대전 후의 새로운 국제환경 속에서 우리가 역사상 처음으로 민족적 에너지와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한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20세기 전반기와 후반기의 차이지요.
  
  돌이켜 보면 우리는 20세기를 줄곧 외세에 시달리고 외세에 의존하면서 살아왔습니다. 19세기 말 자주 독립을 위한 개화 운동이 있었지만 우리의 힘으로 개혁을 이루기 보다는 甲午更張처럼 외국의 압력과 강요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1백년이 지난 오늘도 똑같은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주목할 만한 점은 1백년 전 조상들이 내세웠던 개혁의 이념과 지금의 개혁 이념 사이에는 連綿性(연면성)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兪吉濬(유길준), 金玉均(김옥균) 등의 開化주의자들은 法治주의, 민주주의, 자유민주적 경제체제를 개혁의 목표로 내세웠습니다. 1백년이 지난 오늘에 있어서도 이들 목표는 未完(미완)의 과제로 남아있지 않습니까.
  
  개혁의 방법에 관해서도 지금과 비슷한 문제 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예컨대 兪吉濬은 「虛名的(허명적) 開化」와 「實狀的(실상적) 開化」를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虛名的 개화는 남의 것을 보고 앞질러 헤아릴 능력도 없이 무조건 이에 따라서 재물을 소비하는 것이고, 實狀的 개화는 사물의 이치와 근본을 살펴서 자기 나라의 실정에 합당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의 문제 의식하고 똑같아요. 開化에 관한 이념은 1백년이 지나도록 아직까지 끝장을 못 본 것이지요.
  
   自强, 세력균형, 自主
  
  이렇게 돌이켜 볼 때 과거의 쓰라린 경험을 통하여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로, 自明(자명)한 것이지만 힘 없는 나라는 외세의 지배를 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힘이 있어야 합니다. 1백년 전의 선각자들은 自强(자강)을 굉장히 강조했습니다. 둘째로 강대국에 둘러싸인 우리나라는 항상 강대국간의 力學(역학) 관계에 민감해야 합니다. 그들의 세력 균형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 미국, 중국, 러시아의 세력 균형이 깨지면 한반도는 또 위험하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로서는 결국 집단 안전 보장 체제를 추구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하는 생각을 합니다. 셋째, 세계 정세와 역사적 변화 방향을 정확히 잃고 능동적인 적응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自主(자주)의 참뜻입니다. 옛날에는 세계정세를 너무 몰랐어요.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守舊(수구)는 自主가 아니라 예속으로 통하는 길입니다. 1백년 전 자주적 開化에 실패한 원인을 되새겨 지금의 세계화 개혁에 성공해야 합니다.
  
   지금 사회 風潮는 나라 기울 때와 비슷
  
  姜英勳 : 朴대통령의 軍政(군정)하에 산업화를 이루고 우리 사회가 달라졌습니다만, 나는 그것이 비정상적인 산업화의 과정이라고 봅니다. 政經(정경)유착이다, 官治(관치) 금융이다 해서 비리, 불법, 부패의 온상이 되었거든요. 페어뱅크라는 교수가 동양 사회의 부패는 윤활유 역할을 해 사회 발전에 기여한다는 말도 했지만, 어쨌든 우리가 부패한 사회라 해도 군사 혁명이 일어날 때 1인당 국민소득이 1백 달러 미만인데, 1995년에는 1만 달러 이상 돼 물질적 면에서는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지요. 그것이 朴대통령의 업적이라고 하는데, 그러나 도시화, 대가족 제도의 붕괴, 도덕 윤리의 황폐화, 물질 만능주의 풍조 등이 우리 사회의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나라를 지킨다는 생각이 얼마나 있습니까. 요즘 젊은 세대들은 전쟁나면 도망가겠다는 말까지 합니다. 학교는 교실 붕괴라는 말도 나오고 있습니다. 국회에서는 민주주의라는 간판을 내걸고 싸움질이나 하고 있고, 국회에서 법을 만들어도 누가 지켜야 말이지요. 사회는 부패하고, 법을 안 지키고, 사치 향락이 만연하고…. 이런 사회 풍조는 1백년 전 나라가 기울 때하고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 국민성이 어떻게 되었길래 이런 풍조가 반복되고 있습니까. 국제 정세도 반복되는 측면이 많습니다. 우리 스스로 주인정신을 가져야 하는데 지금 우리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도자가 나와서 목표를 갖고, 선두에 서서 비전을 제시하고, 모범이 되면 우리 국민은 마음을 합쳐서 國運(국운)을 이겨낼 수 있는 민족이라는 것을 3·1운동과 6·25 등에서 보여 주었습니다. 이것이 20세기가 우리 민족에게 주는 교훈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盧在鳳 : 우리의 민족국가 건설은 20세기 전반에 성공을 못하고 좌절에 빠집니다. 그러다가 李承晩 대통령에 의해 성립됩니다. 그래서 李承晩 대통령의 업적이 역사적으로 아주 큰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민족 이름으로 국가가 형성되는 것이 1948년이 처음입니다. 물론 분단된 상태에서 이루어졌지만, 北에서는 민족국가라고 스스로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국제 공산주의에 의해서 민족국가라는 것은 반동적인 존재로 정의됐기 때문입니다. 북한이 민족을 부르짖는 것은 1970년대에 들어 와서, 정치적인 의도에 의해서입니다. 그 이전에는 북한사전 등에도 민족국가를 부르조아 반동적인 역사체, 혹은 민족을 죽이는 반동 이데올로기라고 나옵니다.
  
  우리가 민족국가적인 체제를 갖춘 것이 李承晩 대통령 때입니다. 이 점에서 李대통령은 한국의 역사에서 큰 위치를 가집니다. 그러나 민족국가를 만든 것 자체만으로 문제가 다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 민족국가가 작동할 수 있는 기반을 다져야 했습니다. 민족국가를 세우고 난 뒤에는 그것이 작동을 하게 해야 하는 과제가 남은 것입니다. 이것의 기초가 만들어지는 것이 朴대통령 때입니다. 농경사회가 산업사회로 변화했다는 것입니다. 근대 산업화를 기초로 하는 민족국가가 다져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李承晩 대통령과, 朴正熙 대통령이 20세기에 갖는 역사적 의미는 대단한 것입니다. 두 사람이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각 시대에 필요한 것을 충족시킨 역사적 역할을 담당했다고 봅니다.
  
   李承晩 대통령은 처칠과 맞먹는 지도자
  
  사회 : 月刊朝鮮(월간조선)이 인터넷으로 20세기 20명의 대표적 한국인을 제시하고 여론 조사를 실시한 결과, 1등은 朴正熙 대통령으로 약 52%, 2위는 金九(김구) 선생 16.6%, 3위는 金大中(김대중) 대통령 10.7% 등입니다. 李承晩 대통령은 1%에도 미달합니다. 건국과 독립 운동의 상징인 이승만 대통령이 20세기 전반부의 대표적 인물이 되어야 할텐데도 일반의 평가는 전혀 다르게 나옵니다. 여기에는 교육의 영향이 크다고 봅니다만….
  
  南悳祐 : 李承晩 대통령에 대한 일반의 낮은 평가가 대단히 의외인데, 해방 이후 좌파적 이데올로기가 강한 시대를 지나면서 근 20년 동안 그를 독재자로 매도했기 때문에 국민들이 그런 의식을 가지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지만 李대통령이 아니었더라면 남한만이라도 자유 민주체제로 이끌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쓴 「국제화 시대와 한국경제」라는 책에 李박사에 관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역사를 공부한 사람도 아닌데, 내가 왜 그런 걸 썼냐 하면, 李대통령 고문을 지낸 올리버를 하와이에서 만나서 나도 몰랐던 것을 많이 배웠습니다. 李박사는 정말 자주적이었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러시아는 한국을 赤化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것을 막지 못하면 미국이 나중에 크게 후회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주 자주적이고 앞을 내다보고, 국제 정치를 올바르게 판단한 것이지요. 올리버는 李대통령이 처칠이나 루스벨트에 맞먹는 지도자라고 썼어요. 그런데 그런 전체적인 이야기를 우리 젊은이들이 잘 몰라요. 그래서 우리 젊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읽히기 위해서 내가 요약을 좀 했어요.
  
  姜英勳 : 李대통령이 민족국가 건설을 위해 反共(반공)주의자로 사니까 공산주의자들이 비판하고, 매도한 것입니다. 민족을 반역했다든가, 친일파라고 욕했습니다. 1956년인가, 내가 육군 본부에 근무할 때(관리부장 중장)인데 어느날 갑자기 李 대통령에게 불려갔어요. 중동과 남미 지역 특사로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미국으로 공부하러 가느라 특사로 가지는 못했지만 그때 그분이 하신 말씀은 이랬습니다.
  
  『우선 중동으로 가는 길에 오키나와에 들러 독립정신을 고취해 줘. 옛날에는 오키나와가 우리나라와 제일 가까운 나라인데, 다시 일본에 붙어서 살겠다고 하니 정신들이 어떻게 된 것인가. 중동에 가서는 공산주의가 어떤 것인지를 철저히 가르쳐 주어야 해. 우리 경험을 통해서 말이야. 내가 군인들을 특사를 보내는 것은 공산당하고 직접 싸워보았기 때문이야. 우리가 전쟁을 통해서 얻은 귀중한 경험을 세계 평화를 위해 써야 해. 공산주의자들의 음모가 어떤 것인가를 알려주라고…』
  
  李대통령은 한반도 안에 가두어두기 어려운 분이에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언제나 세계를 생각하고 바라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생각한 분입니다.
  
   朴대통령은 민족국가의 경제바탕 완성
  
  盧在鳳 : 李承晩 대통령에 대한 평가와 관련해 내가 직접 들은 두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내가 유학을 가 있을 때인데, 그 때는 李대통령이 정치에서 물러난 후입니다. 비교정치학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한 교수가 『李대통령은 20세기 최고의 지도자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때 상당히 놀랐어요.
  
  또 한번은 金九선생을 극진히 모시던 분인데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金九 진영은) 李박사에게 足脫不及(족탈불급)이었다. 그분은 群鷄一鶴(군계일학)이었다. 우리는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었다. 지금 李대통령을 低(저)평가하지만 다 쓸데없는 이야기다. 아무도 그 사람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
  
  李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들쭉날쭉인 것은 한국 현대사를 어떻게 보느냐라는 기본 시각의 문제입니다. 權力史(권력사)의 시각에서 보자면 李대통령의 평가가 낮을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福祉(복지)라는 시각에서 보자면 압도적으로 朴대통령이 높은 평가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민족국가적인, 민족사의 시각에서 보면 李대통령과 朴대통령 중 누가 더 중요한가 하는 차이를 가릴 수 없게 됩니다.
  
  왜 이런 시각이 중요하냐 하면, 1백년 동안 우리가 싸우고 고통받고 해 온 것이 결국 우리가 하나의 공동체로 살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이것은 곧 민족국가이고, 그것이 세계에서 제자리를 잡도록 하는 노력이었습니다. 李박사가 민족국가를 성립시키고, 朴대통령이 경제적인 바탕을 완성시켰는데, 1991년 국제 사회에서 우리가 정회원으로 인정이 됩니다. UN 가입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우리가 독립국가라 해서 나가도 인정이 안 돼요. 그러다 국제 사회에서 완전한 자격을 얻게 됩니다. 민족국가로서 하나의 큰 기초 여건과 역사적인 과제가 매듭이 지어지는 것입니다.
출처 : 월조
[ 2003-07-04, 14:5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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