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눈으로, 아랍인의 목소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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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당'의 구호는 '사실과 진실의 차이를 아는 잡지'다. 독자 한 분이 편지를 보냈다. '사실과 진실의 차이를 알려 주는 잡지'가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닌가 하는 견해가 들어 있었다. '아는'보다 '알려 주는'이 훨씬 더 적극적이고 자신감에 찬 표현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마당'이 '사실과 진실의 차이를 알려 주고 있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 솔직한 우리의 심경이다. '아는'것은 인식의 문제이며 '알려 주는'것은 용기의 문제일 수가 있다. '마당'은 정확하게 표현하면 지금 '사실과 진실의 차이를 알려고 노력하는 잡지'다. '사실과 진실의 차이를 아는 잡지'는 '마당'의 당면 목표이며 그 바탕위에서 '알려 주는 잡지'가 되려고 애쓰고 있다.
  
  사실과 진실의 차이는 어떻게 다른가? 우리는 그런 질문들을 많이 받았다. 영어에서 사실은 팩트(Fact), 진실은 트루스(Truth)라고 한다. 영어의 의미 차이를 빌 것도 없이 진실은 글자 그대로 '참된 사실'이다. 사실에 참됨이 더해질 때 진실이 탄생한다. 이 참됨은 무엇인가. 그것은 올바른 눈, 곧 '참된 시각'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코끼리가 한 마리 있다. 한 장님은 배를 만지고 천장과 같다고 했다. 다리를 만진 장님은 기둥과 같다고 했다. 코를 만진 사람은 고무 호스와 같다고 했다. 모두가 사실이지만 진실은 아니다. 진실은 이들 여러 장님의 파편적인 사실들을 입체적으로 종합할 때, 곧 여러 방향의 시각을 아우를 때만 나타날 수 있다.
  
  은행장이 뇌물 1억5천만 원을 받았다. 그것을 검찰은 발표했고 언론은 보도했다. 사실 발표고 사실 보도였다. 그러나 진실의 전달이었나? 아니었다. 검찰은 은행장이 며칠 뒤 그 뇌물을 돌려주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으니까. 검찰은 돌려주어도 뇌물 주고받은 죄는 성립이 되기 때문에 그걸 꼭 알려야 하겠다고 생각지는 않았다?했다. 그런 생각은 범법 여부를 판단 기준으로 삼는 검찰적 진실일 뿐이다. 윤리를 판단 기준으로 삼는 일반 국민에겐 '받은 사실'과 '돌려 준 사실'이 합쳐질 때만 그 은행장을 '진실되게'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경찰이 권총 강도범을 잡았다고 발표했다 하자. 범인이 사용한 권총이 고장나 쏠 수 없는 것이었음을 발표에서 생략했다면, 그 권총에는 총알이 들어 있지 않았음을 생략했다면 우리는 그 범행의 참된 모습을 알 수 없게 된다. 젊은 여자가 있다. 뒤에서 보니 멋지다. 이건 사실이다. 앞에서 보니 엉망이다. 이것도 사실이다. 진실은 이런 두 상반된 시각의 합(合)에서 나올 수 있다. 곧, 진실은 여러 가지 시각과 사실의 조각들을 균형 있게, 종합적으로, 입체적으로, 넓은 관점에서 쌓아 올릴 때 드러나는 것이다.
  
  사실은 벽돌, 진실은 그 벽돌로 쌓여진 건물이다. 사실을 진실로 만드는 것은 시각이다. 어떤 곳에서 어느 방향으로 볼 것인가가 중요하다. 4월에서 6월 사이 한국의 언론은 포클랜드 전쟁을 연일 크게 보도했다. 장 여인 사건 다음으로 크게 보도된 기사였다. 포클랜드 사태는 급전(急轉)된 이란-이라크 전쟁보다도 더 크게 보도되었다. 포클랜드 전쟁이 그처럼 크게 실릴 필요나 가치가 있었던가? 이 전쟁이 어떻게 결판나든 한국은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는다. 한국과는 거의 아무런 관련성이 없는 전쟁이다.
  
  반면 이란-이라크 전쟁의 경과와 결과는 한국에 크나큰 영향을 주고 있으며 또 줄 것이다. 한국은 이라크에서 수십억 달러의 건설 공사 계약을 따 놓고 있다. 수만 명의 한국 노동자들이 그곳에서 일하고 있다. 외교상으로도 한국은 두 나라와 깊이 엮이어 있고 전쟁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 석유 수급 문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적어도 한국인에겐 이란-이라크 전쟁이 포클랜드보다도 훨씬 큰 전쟁이다.
  
  규모면에서도 이란-이라크 전쟁은 포클랜드에 비할 바가 아니다. 전비가 수십억 달러, 사상자가 수천 명으로 헤아려지는(6월15일 현재) 포클랜드 전쟁에 대해 이란-이라크 전쟁의 전비는 1천5백억 달러, 사상자가 수십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포클랜드 전쟁은 해전과 상륙전으로 약간 극적인 점이 있으며 최신 병기가 사용되고 있어 기자들의 뉴스 감각을 자극하는 바가 있고 이란-이라크 전쟁은 오래 끌었고 육상전이라는 평범성이 있긴 하다. 그래도 포클랜드 전쟁이 이처럼 압도적으로 크게 보도되어야 마땅했을까?
  
  이것은 한국인의 필요에 따라 뉴스가 공급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 주는 사례다. 포클랜드 뉴스의 대부분을 한국 언론은 AP, UPI, AFP, 로이터 등 미국.영국.프랑스계 통신사에 의존했다. 이것은 우리가 구미 기자들의 눈과 가치 기준을 통해 이 전쟁을 구경했다는 얘기가 된다. 구미 기자들은 포클랜드 전쟁에 미국과 영국, 그리고 남미가 엮이어 있으니 크게 취급할 수밖에 없다. 이들의 취향에 한국 언론도 따랐고 시청자와 독자들도 끌려 갔다.
  
  구미 기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란-이라크 전쟁에는 구미의 어느 국가도 직접 개입하지 않고 있는 순수한 중동 내부 전쟁이었다. 그러니 호람샤르가 이란에 의해 탈환되어도 보도에 크게 열을 올리지 않았음도 당연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레바논으로 쳐들어가자 구미 통신사는 흥분했고 연일 한국 언론에도 기사가 크게 났다. 이란-이라크 전쟁보다도 한국에 더 영향이 커서가 아니었다. 레바논 침공에는 미국과 영국이 깊은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었다. 미국이 주관한 중동의 평화 노력이 레바논 전쟁의 영향을 받게 되고 그 전투의 꼬투리가 된 이스라엘 대사 피격 사건이 영국에서 일어났으며 영국은 중동에 깊은 역사적 연고권을 갖고 있어 구미 통신사는 이 전쟁을 크게 다룬 것이다.
  
  한국 언론은 무슨 이유에서 크게 취급했나? 미국인의 관심에 무턱대고 따른 것인가? 국제뉴스를 거의 독점 공급하고 있는 구미계통의 통신사에 끌려만 간 것인가? 한국 언론은 '한국의 눈'을 갖고 있다. 세계 각국에 파견한 특파원들이 그들이다. 이들 특파원이 한국인의 시각에서, 한국인을 대표하여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하겠다.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을 보도하는 구미 통신사와는 별도로 한국 언론의 독자적인 판단은 냉철한 것이었다. 정부도 이스라엘의 침공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신문의 사설이나 기명 해설 기사는 한결같이 이스라엘의 침략성을 호되게 비판했다.
  
  이것은 '70년대부터 왕성해진, 제3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나 구미의 시각에서 벗어나 중동을 보는 우리의 독자적 안목을 키우려는 노력의 결과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아직 심정적으로는 이스라엘 편이란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왜 그런가? 한국인들 가운데 기독교 신자들이 많고 이스라엘의 뛰어난 전투 기능이 인간의 영웅 숭배적 심성을 자극하였다는 것이 이유가 될 수 있다.
  
  보다 근본적인 것은 한국인들이 구미의 기독교 문명의 세계관으로 아랍과 이슬람교의 팔레스타인 문제를 보도록 오랜 교육을 받아 왔기 때문일 것이다. 30대 이상의 한국인들은 중.고교 시절 이슬람 종교를 '한 손에 칼, 한 손에 코란을 들고 양자 택일을 강요하는' 무시무시한 무단적 종교라고 배웠다. 십자군을 추앙하고 아랍인들을 토인 취급한 많은 영화들이 이런 이해를 도왔다. '타임'과 '뉴스위크'가 또한 한국인의 눈을 길들였다. '레이더즈'와 같이 아랍인을 바보 멍청이로 그린 영화가 아직도 많은 관객을 동원하고 있다. 아랍에 관한 서적은 거의가 구미의 기독교도들이 쓴 것이었다.
  
  어느 새 한국인들은 김 구 선생에 비교하여야 합당할 아라파트를 폭력 집단의 두목 정도로 이해하게 되었고 뮌헨 올림픽에서의 아랍 게릴라 총격엔 치를 떨면서도 팔레스타인 난민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훨씬 더 지독한 폭격에는 둔감하도록 교육받았다. 최근까지 우리는 서양의 언론과 출판물이 씌어 준 안경을 통해 중동을 보았던 것이다. 그 안경이 기독교 사상으로 물든 색안경이었음을 일부의 국민들이 알게 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었다.
  
  중동과의 직접 접촉이 이루어지면서 한국인들은 달리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중동에 한 번이라도 가 본 사람이면 거의 모두가 충격을 받았고 새로운 각성을 하게 됐다. 이슬람교는 결코 칼과 코란의 택일을 강요하는 종교가 아님을 알게 되었고 역사적으로 볼 때 기독교의 종교탄압이 훨씬 더 심했으며 중동에선 타종교의 자유도 보장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서양인들이 경멸하는 일부다처제도 그 나름의 논리를 갖고 있으며 아랍 여자들이 노예가 아니라 남편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여자들임을 보게 되었다. 아랍의 공개 처형 방식 덕분에 아랍의 범죄 발생률은 세계 최저 수준이며 구미의 제국주의와 석유 자본이 아랍인들의 자부심을 어떻게 능멸했는가도 알았고 자부심의 복권을 꾀하는 현대 아랍인의 심리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타임'과 '뉴스 위크'만 읽은 죄'로 흐려져 있었던 한국인들의 눈이 이제 우리의 시각으로 재정립되려 하고 있다. 한국인은 세계에서도 아랍인과의 직접 접촉 경험을 가장 많이 가진 민족 중의 하나일 것이다. 연 수백만 명의 노동자가 중동을 경험했고 또 하고 있다. 이런 바탕에서 이제 우리는 한국인의 눈으로 아랍을 보고 한국인의 귀로 아랍인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독립이다. 서양인의 안경을 벗고 구미 언론의 시각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시각은 인식을 지배하고 인식은 행동을 결과한다. 시각의 독립은 곧 생각과 행동의 독자성을 결과할 것이다. 곧고 바른 시각은 진실을 낳는다. <1982년 7월 마당>
  우리의 눈으로, 아랍인의 목소리로
  
  우리 '마당'의 구호는 '사실과 진실의 차이를 아는 잡지'다. 독자 한 분이 편지를 보냈다. '사실과 진실의 차이를 알려 주는 잡지'가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닌가 하는 견해가 들어 있었다. '아는'보다 '알려 주는'이 훨씬 더 적극적이고 자신감에 찬 표현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마당'이 '사실과 진실의 차이를 알려 주고 있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 솔직한 우리의 심경이다. '아는'것은 인식의 문제이며 '알려 주는'것은 용기의 문제일 수가 있다. '마당'은 정확하게 표현하면 지금 '사실과 진실의 차이를 알려고 노력하는 잡지'다. '사실과 진실의 차이를 아는 잡지'는 '마당'의 당면 목표이며 그 바탕위에서 '알려 주는 잡지'가 되려고 애쓰고 있다.
  
  사실과 진실의 차이는 어떻게 다른가? 우리는 그런 질문들을 많이 받았다. 영어에서 사실은 팩트(Fact), 진실은 트루스(Truth)라고 한다. 영어의 의미 차이를 빌 것도 없이 진실은 글자 그대로 '참된 사실'이다. 사실에 참됨이 더해질 때 진실이 탄생한다. 이 참됨은 무엇인가. 그것은 올바른 눈, 곧 '참된 시각'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코끼리가 한 마리 있다. 한 장님은 배를 만지고 천장과 같다고 했다. 다리를 만진 장님은 기둥과 같다고 했다. 코를 만진 사람은 고무 호스와 같다고 했다. 모두가 사실이지만 진실은 아니다. 진실은 이들 여러 장님의 파편적인 사실들을 입체적으로 종합할 때, 곧 여러 방향의 시각을 아우를 때만 나타날 수 있다.
  
  은행장이 뇌물 1억5천만 원을 받았다. 그것을 검찰은 발표했고 언론은 보도했다. 사실 발표고 사실 보도였다. 그러나 진실의 전달이었나? 아니었다. 검찰은 은행장이 며칠 뒤 그 뇌물을 돌려주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으니까. 검찰은 돌려주어도 뇌물 주고받은 죄는 성립이 되기 때문에 그걸 꼭 알려야 하겠다고 생각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런 생각은 범법 여부를 판단 기준으로 삼는 검찰적 진실일 뿐이다. 윤리를 판단 기준으로 삼는 일반 국민에겐 '받은 사실'과 '돌려 준 사실'이 합쳐질 때만 그 은행장을 '진실되게'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경찰이 권총 강도범을 잡았다고 발표했다 하자. 범인이 사용한 권총이 고장나 쏠 수 없는 것이었음을 발표에서 생략했다면, 그 권총에는 총알이 들어 있지 않았음을 생략했다면 우리는 그 범행의 참된 모습을 알 수 없게 된다. 젊은 여자가 있다. 뒤에서 보니 멋지다. 이건 사실이다. 앞에서 보니 엉망이다. 이것도 사실이다. 진실은 이런 두 상반된 시각의 합(合)에서 나올 수 있다. 곧, 진실은 여러 가지 시각과 사실의 조각들을 균형 있게, 종합적으로, 입체적으로, 넓은 관점에서 쌓아 올릴 때 드러나는 것이다.
  
  사실은 벽돌, 진실은 그 벽돌로 쌓여진 건물이다. 사실을 진실로 만드는 것은 시각이다. 어떤 곳에서 어느 방향으로 볼 것인가가 중요하다. 4월에서 6월 사이 한국의 언론은 포클랜드 전쟁을 연일 크게 보도했다. 장 여인 사건 다음으로 크게 보도된 기사였다. 포클랜드 사태는 급전(急轉)된 이란-이라크 전쟁보다도 더 크게 보도되었다. 포클랜드 전쟁이 그처럼 크게 실릴 필요나 가치가 있었던가? 이 전쟁이 어떻게 결판나든 한국은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는다. 한국과는 거의 아무런 관련성이 없는 전쟁이다.
  
  반면 이란-이라크 전쟁의 경과와 결과는 한국에 크나큰 영향을 주고 있으며 또 줄 것이다. 한국은 이라크에서 수십억 달러의 건설 공사 계약을 따 놓고 있다. 수만 명의 한국 노동자들이 그곳에서 일하고 있다. 외교상으로도 한국은 두 나라와 깊이 엮이어 있고 전쟁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 석유 수급 문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적어도 한국인에겐 이란-이라크 전쟁이 포클랜드보다도 훨씬 큰 전쟁이다.
  
  규모면에서도 이란-이라크 전쟁은 포클랜드에 비할 바가 아니다. 전비가 수십억 달러, 사상자가 수천 명으로 헤아려지는(6월15일 현재) 포클랜드 전쟁에 대해 이란-이라크 전쟁의 전비는 1천5백억 달러, 사상자가 수십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포클랜드 전쟁은 해전과 상륙전으로 약간 극적인 점이 있으며 최신 병기가 사용되고 있어 기자들의 뉴스 감각을 자극하는 바가 있고 이란-이라크 전쟁은 오래 끌었고 육상전이라는 평범성이 있긴 하다. 그래도 포클랜드 전쟁이 이처럼 압도적으로 크게 보도되어야 마땅했을까?
  
  이것은 한국인의 필요에 따라 뉴스가 공급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 주는 사례다. 포클랜드 뉴스의 대부분을 한국 언론은 AP, UPI, AFP, 로이터 등 미국.영국.프랑스계 통신사에 의존했다. 이것은 우리가 구미 기자들의 눈과 가치 기준을 통해 이 전쟁을 구경했다는 얘기가 된다. 구미 기자들은 포클랜드 전쟁에 미국과 영국, 그리고 남미가 엮이어 있으니 크게 취급할 수밖에 없다. 이들의 취향에 한국 언론도 따랐고 시청자와 독자들도 끌려 갔다.
  
  구미 기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란-이라크 전쟁에는 구미의 어느 국가도 직접 개입하지 않고 있는 순수한 중동 내부 전쟁이었다. 그러니 호람샤르가 이란에 의해 탈환되어도 보도에 크게 열을 올리지 않았음도 당연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레바논으로 쳐들어가자 구미 통신사는 흥분했고 연일 한국 언론에도 기사가 크게 났다. 이란-이라크 전쟁보다도 한국에 더 영향이 커서가 아니었다. 레바논 침공에는 미국과 영국이 깊은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었다. 미국이 주관한 중동의 평화 노력이 레바논 전쟁의 영향을 받게 되고 그 전투의 꼬투리가 된 이스라엘 대사 피격 사건이 영국에서 일어났으며 영국은 중동에 깊은 역사적 연고권을 갖고 있어 구미 통신사는 이 전쟁을 크게 다룬 것이다.
  
  한국 언론은 무슨 이유에서 크게 취급했나? 미국인의 관심에 무턱대고 따른 것인가? 국제뉴스를 거의 독점 공급하고 있는 구미계통의 통신사에 끌려만 간 것인가? 한국 언론은 '한국의 눈'을 갖고 있다. 세계 각국에 파견한 특파원들이 그들이다. 이들 특파원이 한국인의 시각에서, 한국인을 대표하여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하겠다.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을 보도하는 구미 통신사와는 별도로 한국 언론의 독자적인 판단은 냉철한 것이었다. 정부도 이스라엘의 침공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신문의 사설이나 기명 해설 기사는 한결같이 이스라엘의 침략성을 호되게 비판했다.
  
  이것은 '70년대부터 왕성해진, 제3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나 구미의 시각에서 벗어나 중동을 보는 우리의 독자적 안목을 키우려는 노력의 결과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아직 심정적으로는 이스라엘 편이란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왜 그런가? 한국인들 가운데 기독교 신자들이 많고 이스라엘의 뛰어난 전투 기능이 인간의 영웅 숭배적 심성을 자극하였다는 것이 이유가 될 수 있다.
  
  보다 근본적인 것은 한국인들이 구미의 기독교 문명의 세계관으로 아랍과 이슬람교의 팔레스타인 문제를 보도록 오랜 교육을 받아 왔기 때문일 것이다. 30대 이상의 한국인들은 중.고교 시절 이슬람 종교를 '한 손에 칼, 한 손에 코란을 들고 양자 택일을 강요하는' 무시무시한 무단적 종교라고 배웠다. 십자군을 추앙하고 아랍인들을 토인 취급한 많은 영화들이 이런 이해를 도왔다. '타임'과 '뉴스위크'가 또한 한국인의 눈을 길들였다. '레이더즈'와 같이 아랍인을 바보 멍청이로 그린 영화가 아직도 많은 관객을 동원하고 있다. 아랍에 관한 서적은 거의가 구미의 기독교도들이 쓴 것이었다.
  
  어느 새 한국인들은 김 구 선생에 비교하여야 합당할 아라파트를 폭력 집단의 두목 정도로 이해하게 되었고 뮌헨 올림픽에서의 아랍 게릴라 총격엔 치를 떨면서도 팔레스타인 난민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훨씬 더 지독한 폭격에는 둔감하도록 교육받았다. 최근까지 우리는 서양의 언론과 출판물이 씌어 준 안경을 통해 중동을 보았던 것이다. 그 안경이 기독교 사상으로 물든 색안경이었음을 일부의 국민들이 알게 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었다.
  
  중동과의 직접 접촉이 이루어지면서 한국인들은 달리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중동에 한 번이라도 가 본 사람이면 거의 모두가 충격을 받았고 새로운 각성을 하게 됐다. 이슬람교는 결코 칼과 코란의 택일을 강요하는 종교가 아님을 알게 되었고 역사적으로 볼 때 기독교의 종교탄압이 훨씬 더 심했으며 중동에선 타종교의 자유도 보장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서양인들이 경멸하는 일부다처제도 그 나름의 논리를 갖고 있으며 아랍 여자들이 노예가 아니라 남편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여자들임을 보게 되었다. 아랍의 공개 처형 방식 덕분에 아랍의 범죄 발생률은 세계 최저 수준이며 구미의 제국주의와 석유 자본이 아랍인들의 자부심을 어떻게 능멸했는가도 알았고 자부심의 복권을 꾀하는 현대 아랍인의 심리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타임'과 '뉴스 위크'만 읽은 죄'로 흐려져 있었던 한국인들의 눈이 이제 우리의 시각으로 재정립되려 하고 있다. 한국인은 세계에서도 아랍인과의 직접 접촉 경험을 가장 많이 가진 민족 중의 하나일 것이다. 연 수백만 명의 노동자가 중동을 경험했고 또 하고 있다. 이런 바탕에서 이제 우리는 한국인의 눈으로 아랍을 보고 한국인의 귀로 아랍인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독립이다. 서양인의 안경을 벗고 구미 언론의 시각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시각은 인식을 지배하고 인식은 행동을 결과한다. 시각의 독립은 곧 생각과 행동의 독자성을 결과할 것이다. 곧고 바른 시각은 진실을 낳는다.
  
  <1982년 7월 마당>
출처 : 마당
[ 2003-07-04, 15:0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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