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오보는 은폐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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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계 내부의 언론 자유는 오보를 줄인다
  사례34
  
  '80년 봄에 한일 공동 광구5소구역 석유 시추를 할 때 나는 '천연가스가 나오기 시작했다'는 짤막한 기사를 '국제신문' 사회면에 썼다. 이 기사가 과장될까 보아 '천연가스는 시추작업에선 으례히 나오게 마련이다'고 토를 달았다. 다음날 신문을 보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우리 신문의 경제면에 '천연가스 검출' 기사가 서울 발 통신기사로 또 실려 있는 게 아닌가. 내가 쓴 기사를 부산의 통신 기자가 베껴 올린 것이 되돌아와 실린 것이었다.
  
  통신기사를 각 부서로 갈라 주는 사람은 이 기사가 경제부 소관이라고 생각, 경제 부장에게 건네주었다. 경제부장은 전날에 그 기사가 사회면에 실린 것을 못 보았던지 자기 면에 또 실은 것이었다. 이것은 신문 기자들이 다른 부서나 다른 면의 기사에 놀라울 정도로 무관심하고 부서끼리의 대화가 활발하지 못함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신문을 가장 안 읽은 사람이 신문기자다'느니 '자기가 쓴 기사도 안 읽는다'는 말이 떠도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사례35
  
  '얼마 전 H식초사건이 터졌을 때의 일이다. 과학적인 해석이 필요할 때는 과학부에 유권적 해석을 구해 오는 사례처럼 기사의 전말이 과학부로 옮겨졌다. 식초에서 포르말린이 검출되었다는 기사였다. 그 기사에는 포르말린의 검출량은 나와 있지 않았다. 포르말린이 검출되었다는 사실로만은 유해여부를 가릴 수 없다. 포르마린은 소주 막걸리 등 발효식품에는 모두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의 식초의 산도로 보아 방부제로 사용했다는 것은 믿기 어려웠다. 그것을 검출했다는 연구기관에 알아본 결과 '정성분석'만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과학부의 주장과는 아랑곳없이 그 기사는 충격적으로 씌어졌다. 신문이 나온 뒤 담당부서의 기자가 와서 'H식초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한다. H식초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나는 쓴웃음으로 대답할 길밖에 없었다. 항상 이면을 쫓는 기자의 촉각이 작용했는지 몰라도 그것은 너무 심한 비약이었다. 그 사건 보도는 우리나라 언론계의 오보였다.…동료조차 믿지 못하는 불신풍조는 이제 만성화된 언론계의 풍토병이라고 진단 내리고 싶다'('기자협회보' '72년7월21일 강신구 기자 기고문에서)
  
  사례36
  
  지난해 '워싱턴 포스트' 신문의 자네트 쿠크라는 여기자가 가공의 마약중독 소년 '지미의 세계'를 취재 보도한 공로(?)로 퓨리처 상을 받았다가 들통이 난 사건은 유명하다. 이 날조 사건의 전말을 조사한 워싱턴 포스트의 옴부즈맨(Ombudsman:신문사 외부 출신으로 독자를 대표하여 신문을 감시하는 기능을 맡고 신문사에서 일하는 사람) 빌 그린의 보고서를 보면 쿠크 기자는 지미의 주소나 신원을 부장이나 국장에게 알리지도 않았다고 한다. '소년의 신원을 신문기사에서 못 밝히는 것은 물론이고 회사의 어느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다. 신원을 알리면 나의 신변이 위험해진다'면서 기사가 실린 뒤 편집국의 다른 부장들이 쿠크의 상관인 콜먼 수도권 부장에게 '아무래도 기사가 이상하다'고 의문을 제기해도 콜먼은 '쿠크에 대한 질투심에서 나오는 얘기다'면서 묵살해버렸다고 한다.
  
  포스트의 기자들은 '지미의 세계'가 퓨리처 상 후보 작품으로 추천되자 '잘못하면 우리 신문이 큰 코 다치게 생겼다'고 쑥덕대면서도 편집 간부들에겐 그런 간언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런 확증도 없이 기사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했다가는 '질투심 때문이다'는 비난을 사게 된다고 그들은 생각했던 것 같다. 경찰이 '지미의 세계' 기사를 읽고 지미 소년의 소재 확인에 실패했다고 발표했는데도 세계최고급의 신문인 '포스트'의 간부들은 쿠크 기자를 믿었다. 쿠크 기자가 퓨리처상만 안 받았다면 이 기사의 조작 사실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위의 사례들은 편집국 내부의 경직성과 폐쇄성이 오보를 부르고 있음을 보여 준 것이다. 바깥에서 본 편집국이나 보도국의 분위기는 자유분방, 그것이다. 책상 위에 정리 안된 채 널려있는 책과 문서들, 두 다리를 책상 위로 올려놓고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기자들, 확 트인 사무실의 북적대는 분위기, 상하가 없는 것 같은 화통한 몸가짐…
  
  이런 자유 분방의 꺼풀을 벗기면 전혀 딴판의 세계가 드러난다. 기자들만큼 비판을 많이 하면서도 비판받는 것을 싫어하는 직업인들은 달리 없을 것이다. 남의 기사를 두고 공공연히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거의 금지로 되어 있다. 기사 심의실이 있기는 하지만 기자들과 심의 위원의 관계가 너무 대립적이고 냉소적이라 효과를 못 보는 곳이 많다. 비판을 받기 싫어하므로 남의 기사를 비판하지 않는다. 따라서 침묵. 이런 배경에는 한국 기자들의 성격적 특성도 상당한 몫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일반 기업체처럼 업무를 두고 부서장끼리 치열한 토론을 벌이는 풍경을 언론계에선 좀처럼 발견할 수가 없다. 일단 신문사나 방송국 바깥으로 나오면 따지고 가리는데 신경을 곤두세우는 기자들이 그 안에 들어가면 '내 할 일만 한다'는 식이다. 물론 정보를 다루는 기관은 그 속성이 폐쇄적인 법이다. 중요한 정보일수록 독점의 욕망도 커지는 것이 정보를 만지는 사람들의 제2의 천성이다. 정보는 수직적으로만 유통되기 쉽고, 수평적으로는 잘 전파, 공유되지 않는다. 기자들은 특종의 욕심, 곧 명예욕을 동력으로 하여 뛰는 직업이다. 간부들도 이런 의욕을 살려 주려고 하는데 그것이 자칫하면 맹목적인 신뢰가 되기 쉽고 오보로 연결되는 것이다.
  
  신뢰와 검증. 이것은 데스크의 필수적인 균형 감각이다. 부장에게조차 지미 소년의 신원을 밝히길 거부한 부하를 신뢰한 포스트의 부장은 이 균형 감각을 잃어버린 좋은 예이다. 기자는 모든 사실에 의문을 가져야 하는 직업이다. 그의 논리는 의문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런 사고방식은 부하 기자에게도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기사원고가 활자가 되어 나올 때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쳐야 한다. 기자→데스크→편집기자→국장이 기본흐름이다. 이 수직적인 체크 과정이 서로 언로(言路)가 통하는 활성적인 관계일 때는 오보를 가려낼 가능성도 높아진다. 편집기자가 '이 기사는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하면 '당신 일은 제목이나 붙이고 레이아웃이나 하는 거야'라고 면박을 주는 데스크가 있다면 오보는 걸리지 않고 쏙쏙 지면에 나고 말 것이다.
  
  기자의 매력은 독자적인 판단이 신문지면에 거의 그대로 반영되는 데 있다. 어떤 기업이나 관료 조직도 소속직원의 의사를 언론 기관만큼 존중하는 데는 없을 것이다. 이런 독립권에는 그만한 책임도 따르는 법이다. 인간관계보다 공익관계를 앞세우고 기사를 허심탄회하게 상호 비판할 수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 아래서만 그런 책임을 기자들은 다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언론은 바깥을 향해서만 '언론자유'를 부르짖지 말고 그 내부를 먼저 자유롭게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정정당당하게 바로잡아야
  
  사례37
  
  '중앙일보'에서 내는 '주간중앙'의 지난 2월28일치 15면에는 '탤런트 엄유신양의 농도 짙은 데이트'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엄유신양은 이 기사가 완전히 허위라고 주장, 언론중재위원회에 보도신청을 했다.
  '①'30대 병원장과 농밀한 연애를 즐기고 있어 화제'라고 했는데 나는 병원장 부인과는 같은 불교도로 4년 반전부터 친숙한 사이며 서로 부담 없이 방문하는 사이일 뿐 애인관계는 생각해 본적도 없다.
  ②'W 살롱엔 주 평균 2∼3회 들른다는데 상대는 항시 똑같은 원장님과의 동행으로 나타나 눈길을 끌게 한다는 것…'이라고 했는데 지금껏 단 한 번도 병원장과 둘이서만 W살롱을 이용한 적이 없으며 병원장 및 그 부인과 서너 차례 간 사실이 있을 뿐이다.
  ③'원장님과 농담한 관계…둘이 밀착된 춤…내놓은 애인사이…두주불사 운운'은 병원장이 춤 출 줄도 모를 뿐 아니라 그와 함께 서 본 일도 없는 나로서는 악의에 찬 인권유린으로 밖에는 볼 수 없다
  ④여인열전(장희빈 편)에 등장하다가 도중 탈락되기도 했다'고 했는데 여인열전이 주1회 녹화인 데다가 출연부분이 한 장면 정도밖에 되지 않아 '호랑이선생님'에 겹치기 출연 중이어서 작가와 합의, 양해를 받고 스스로 그만둔 것이다…
  
  '엄양이 조목조목 반론을 제기하자 '주간중앙'에선 정정 보도문을 내주기로 합의했다. 그 정정 기사는 3월21일치에 실렸다.
  '…엄유신양은 여자탤런트로서는 드물게 5남매의 동생을 부양, 가장의 입장에서 자신을 가꾸고 있으며 최근의 구설수로 인해 심한 충격을 받았다고…그녀를 둘러싼 구설수는 '유부남 병원장과의 데이트'에 관한 내용. 친분 있는 병원장과의 사교적인 술자리가 제3자에겐 데이트 상대로 비추어졌음이 밝혀졌다.…문제의 W 살롱 주석만 해도 그의 동료나 그녀의 동료 등과 동행…' 이런 식으로 정정을 했다. 사정을 모르는 독자들은 앞뒤가 안 맞는 이런 기사가 잇달아 왜 나왔는지 종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터무니없는 오보를 한 '중앙'은 덕분에 두 가지 특종을 한 셈이다.
  
  오보와 특종, 그것의 정정 특종. 구설수를 만들어 쓰고 그 구설수를 부인하는 기사를 쓰고… '중앙'의 이 사례는 한국의 언론이 오보를 어떤 식으로 바로잡는지, 그 실태를 짐작케 하는 하나의 단서다. 한국이 언론은 오보로 인권이 유린되어도 좀처럼 사과를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오보했다는 사실조차도 밝히길 꺼린다. '중앙'의 정정 기사처럼 구렁이 담 넘어가듯, 남의 이야기하듯 두리뭉실 감고 넘어가 버리는 게 정석인양 되어 있다. 한국의 언론은 '오류를 범하지 않는' 신성불가침의 권위와 체면을 한사코 지키려 하고 있다.
  
  오보를 한 기자가 자신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건 차라리 '인간적'이다. 그래서 정정을 해 주지 않으려고 항의하는 쪽의 다른 비위 사실을 들추어내는 기자도 있다. '좋다, 오보는 바로잡아 주겠다. 그러나 당신 쪽엔 이런 부정도 있더군…' 이런 식으로 들이대면 '거, 뭐, 꼭 오보를 바로잡자는 게 아니고…이것도 인연인데 앞으로 잘 봐 주십시오' 식으로 나오기가 십상이다.
  
  지난해 전국의 언론 중재위원회에 정정 보도를 신청한 건수는 모두 44건이었다. 이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20건(45.5퍼센트)은 중재가 진행되는 가운데 신청인이 정정요구를 취하한 경우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고려대 교수이며 서울 제3중재부 위원회 임희섭씨는 '…도중에 취하된 것은 대부분이 피신청 언론사의 막후접촉에 의한 것으로서 이런 현상은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언론침해의 피해자인 중재신청자가 언론사에 의해 직접 접근되어 회유를 받음으로써 침해사실을 회복하지 못한 채 신청을 취하하는 일이 많은 것은 앞으로 보완해야 할 문제점이다'고 했다('언론중재' '82년 봄 호39쪽)
  
  과연 언론사가 회유만 했을까? 회유만으로 피해자가 정정요구를 포기하게 되었을까?
  
  일본의 정정사례를 보자.
  '매일신문'은 지난 '78년7월10일 석간에서 '주점마담 살해사건 수사 급진전. 양녀를 취조, 예금 인출 필적 닮아'란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이 신문은 '경찰이 이날 저녁때까지 그녀를 살인 혐의로 체포할 방침'이라고 썼다. 이 날 저녁 진짜 범인이 다른 곳에서 붙들려 동경으로 압송됨으로써 양녀에 대한 혐의는 벗겨졌다. 다음날 '매일신문'은 진범체포를 보도하면서 '양녀는 무관계'란 제목으로 사과문을 실었다. 양녀는 이에 만족치 않고 명예훼손 혐의로 '매일신문' 관계자들을 형사, 민사로 고소했다. '매일'은 두 번 더 사죄 광고를 실어 겨우 양녀와 합의할 수 있었다.
  
  한국에선 이보다 더한 인권 유린이 수십 번이나 일어났다.
  '마당' 6월호에 사례가 소개된 부산 동래토막 사건의 보일러공과 가족몰살 사건의 국씨가 모두 신문들로부터 '진범'이란 가시관을 얻어 쓴 무고한 사람들이었다. 어느 신문도 사죄를 하기는 커녕 국씨를 풀어 주는 마당에서도 '심증 가나 증거 미흡'이라면서 '혐의의 꼬리표'를 선사하기까지 했다. 이들 무고한 언론 피해자들이 민, 형사를 불문하고 언론사를 고소했다는 소식은 아직 없다. 언론사를 외경과 두려움의 심정으로 우러러보는, 당하는 데 익숙한 이런 순덕이 시민들의 위에서 한국의 언론이 그 권위를 지켜 가고 있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그렇다고 언론이 오보를 해 놓고 늘 무시했던 건 아니다.
  
  피해자가 강하게 나오면 언론은 고개를 숙인다
  
  사례38
  
  1955년3월15일 '동아일보' 1면에 난데없이 '괴뢰고위층 재가 대기중'이란 제목이 나타났다. 한미 석유협정에 관한 기사의 제목이 '고위층 재가 대기중'인데 그 옆에 '괴뢰' 두자가 잘못 붙여진 것이었다. '괴뢰'는 다른 기사제목으로 쓰기 위해 뽑아놓은 활자였다. '동아'는 이를 발견하자마자 연판을 고쳐 다시 인쇄를 돌렸으나 4백10부가 회사 바깥으로 나간 뒤였다. '동아'는 서둘러 1백20부를 회수하고 정부 기관엔 이 사실을 통보하는 한편 사과문까지 실었다. 그러나 '동아'의 보도자세에 앙심을 품고 있던 정부는 이것을 꼬투리로 잡아 3월17일 '동아'에 무기한 발행정지처분을 내렸다. '동아'는 한달 뒤인 4월 18일에 복간되었다.
  
  '62년11월 '한국일보'는 혁명주체 세력에서 사회 노동당 조직을 구상중이라고 1면 톱으로 오보를 했다가 사장 등이 구속되고 3일간 정간 처분을 받았다. '72년3월29일치 '동아일보' 7면에 '포 사격 연습 뒤 세워 둔 대형 전차 잘라 고철로 팔았다'는 기사가 났다. 이것은 '사격장에 목표물로 세워 둔 못 쓰는 페전차를 민간인들이 고철로 잘라 팔았다'는 것의 오보였다. 곧, 잘린 것은 쓰는 전차가 아니라 이미 죽은 전차였던 것이다. 이 기사를 쓴 '동아'기자는 반공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되었으나 이 부문에선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밖에도 '大統領'이 '太統領'이나 '統統領', '大領' '大大領', ' 統領' 따위로 잘못 인쇄되어 관계 기자들이 혼이 난 예는 많다. 그래서 많은 신문사 공무국에선 '大統領'이란 활자 석 자를 묶어 놓고 사용하여 이런 실수를 막고 있다. 위에 소개한 사례는 모두 언론이 군이나 정부 또는 대통령 등, 이 사회의 권위에 대해 오보를 했다가 행정 처분이나 법적 제재를 받은 경우다. 우리나라 언론사가 오보의 책임을 솔직하게 지는 것은 거의가 이 사회의 권위에 대한 오보를 했을 경우이다. 그래서 청와대, 군, 검찰 등 기관에 대해서 기사를 쓸 때는 각별히 신경을 쓰는 것이 한국 기자들의 버릇이다.
  
  그런 습관, 그 자체는 퍽 좋은 것이었다. 다만 그런 습관이 일반 독자들에게 똑같이 적용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다. 기자들이 몇몇 취재 대상에 대해서는 그렇게 길들여 있다는 것은 일반인들도 언론에 의한 권익 침해를 받았을 때 법대로 대처하기만 하면 그런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언론중재위원회가 주최한 언론의 인권 침해에 관한 좌담회에서 어느 신문사의 편집국장은 이렇게 말했다.
  
  '…언론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기가 뭐합니다만…한국 언론에 결정적인 충격을 주고 진실로 언론이 새로운 단계로 올라가려면 역설적으로 어느 신문사가 엄청난 액수의 손해배상을 한 번쯤 당하면 발전적 계기가 될 것입니다.' 이 말을 받아 다른 원로 언론인이 '과연 한국인 가운데 언론을 상대로 과감하게 소송을 할 사람이 있을까?'고 의문을 제기하자 ㅎ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변호사도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해도 신문사를 상대로 한 소송은 꺼리는 편이지요. 간혹 언론과 관련된 사항을 상담하러 와도 신문사의 편집국장을 찾아 가든가 중재위원회에 가서 해결하라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언론 기관을 상대로 명예를 회복해 주는 경우가 극히 적은 것 같아요.' 한국인의 법의식에 관한 어떤 설문 조사에 따르면 '밤중에 자고 있을 때 경찰관이 연행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물음에 '영장이 없으면 안 간다'고 답한 사람은 19.3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상대방이 법으로 하자'고 하면 '기분이 나쁘다'는 사람은 62.2퍼센트나 되었다. 이것은 한국인들이 아직도 권리·의무 의식에 약하고 법적 절차에 의한 분쟁해결 방식을 기피하는 성향에 젖어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한국의 언론은 이런 한국인,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을 존경하는 이런 사람들의 큰 덕을 보고 있는 셈이다. 그런 온실에서의 안주가 언론의 발전에는 도움이 되지 못함은 분명한 사실이다. 최근 미국 잡지 '펜트하우스'는 미스 와이오밍을 모델로 한 소설을 실었다가 본인으로부터 명예훼손으로 손해배상 청구를 당했다. 1심 재판부는 잡지사에 대해 1천2백50만 달러의 배상을 하라고 판결했다. 일리노이주의 '엘튼 텔리그라프' 신문사는 지면에 싣지도 않은 오보로 해서 파산지경에 몰렸다.
  
  이 신문의 두 기자는 지난 '69년 지방의 오직(汚職)사건을 취재하다가 그린이라는 건축업자가 폭력단과 관련되었다는 미확인 정보를 얻었다. 이 정보의 진위를 확인할 수 없어 두 기자는 기사로는 쓰지 않고 그 메모를 법무부의 담당관에게 보냈다. 이 담당관은 메모에 적힌 은행에서 건축업자에게 이상할 정도의 많은 융자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캐내 융자를 끊도록 했다. 건축업자는 도산하고 말았다. 6년 뒤 건축업자는 융자를 끊게 한 것이 문제의 메모였음을 알아내고 신문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 지난 '80년 승소했다. 평결된 배상금은 9백20만 달러. 이 신문사의 전 재산이 3백만 달러였으므로 할 수 없이 파산 신청을 법원에 내야 했다.
  
  한국의 기자들은 어떤 단체나 개인이 정부기관에 의해 법적인 제재를 받으면 마음놓고(정부의 권위가 뒤에 있으므로) 그들을 나무라기 시작한다. 따라서 주의태만 상태에 빠지기 쉽고 사실 무근의 혐의까지 캐내 진짜 혐의에 엎어버리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최근 범죄자와 회사들이 '신문에 난 이런 범죄는 내것이지만 이 부분은 엉터리다'고 하여 언론사를 고소하는 게 유행처럼 되어 있다.
  
  최근 일본 동경에서 무좀 예방 기능이 있다는 '나오루'라는 구두 속창 만드는 회사가 약사법 위반 혐의로 적발되었다. '독매신문'은 기사 속에서 문제의 속창에는 향료나 풀 등이 사용되었을 뿐이라고 보도했다. 이 회사에선 제품 허가도 받지 않고 선전한 혐의로 적발된 것은 사실이지만 속창에 사용한 약품에는 향료나 풀뿐이 아니라 여러 가지 특허제품이 많이 섞여 있다고 주장, 신문사를 상대로 5백만 원(圓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 1백50만 원의 배상판결을 받았다.
  
  만약 한국에도 이런 똑똑한 사람들이 있다면 한국의 언론기관은 거의 날마다 피소될 것이다. 도박범이나 소매치기범 검거 기사를 보면 '수억 원의 판돈' '1백여 회에 걸쳐 3억 원어치 금품 훔쳐'식의 대목이 더러 눈에 띄인다. 그러나 경찰이 이들을 검찰에 넘길 때의 기록을 보면 수억 원은 수백만 원으로, 수십 회는 수 회로 범행 규모가 몇 십 분의 1로 줄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것은 경찰이 기자들을 갖고 논 때문이다.
  
  형사들은 그들의 검거 사실을 언론에서 크게 취급해야 고과 점수 등 여러 면에서 득을 보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크게 취급되려면 범행의 규모가 커야 하고 사건에 좀 특이한 면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기자들과 부대끼면서 체득한 요령이다. 도박사건의 경우, 검거 당시 이미 지출된 판돈에다가 도박자들이 호주머니에 지니고 있던 현금이나 수표까지 합산하는 게 보통이다.
  
  소매치기 사건은 범행 당시의 것 이외에는 증거를 세우기가 매우 힘들다. 금반지 목걸이 등 훔친 장물의 처분 경로를 추적하면 그 동안의 범행 규모가 약간은 드러난다. 이런 수사도 하기 전에 형사들은 '이 놈들 일당이 1년 동안 하루 평균 두 탕을 했을 것이니…'식으로 추산을 하여 대강의 범행규모를 기자들에게 알려준다(검찰 송치 기록에는 입증이 가능한 몇 건만 적는다) 기자들도 이왕이면 자기의 기사가 크게 나오는 것을 좋아한다. 형사들의 계산이 무리라는 걸 알면서도 속아주기도 한다. 적어도 한국의 범죄자들은 '나는 10만원밖에 안 훔쳤는데 왜 천만 원 훔쳤다고 했느냐?'고 대들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안심하고 그러는 것이다.
  
  경찰은 가끔 흉기 소지자 불시단속을 벌인다. 경찰서에선 단속 실적을 높이기 위해 경찰관1인당 몇 명을 잡아오라고 할당을 하기도 한다. 하룻밤에 수천 명의 '흉기소지자'가 붙들렸다는 발표도 나온다. 도대체 어떤 흉기냐? 필자는 '80년 봄에 부산이 어느 경찰서 보호실에 붙들려 온 수십 명의 흉기 소지자들을 일일이 면접한 적이 있다. 전공이 드라이버를 갖고 가다가, 수험생이 연필깎기 칼을 호주머니에 넣고 있다가, 재단사가 가위를 갖고 가다가… 이렇게 붙들린 죄 없는 '죄인'이 거의 전부였다. 그래도 그 날 다른 신문에는 흉기 소지자 단속 실적이 거창하게 보도되었다.
  
  선의의 경쟁은 오보를 교정한다
  
  과열경쟁은 오보를 많이 만든다. 그러나 오보 없고, 경쟁 없는 언론풍토보다는 오보 있고 경쟁 있는 풍토가 훨씬 건강한 것이다. 경쟁이 없어진다고 해서 오보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출입 기자실에 따라 이른바 '단고'(談合)를 하는 데가 있다. 치고 박고 하면 피차가 손해이니 사이좋게 기사를 나눠 쓰고, 같이 쓰자는 약속이다. 이런 기자실의 아침풍경은 가관이다.
  
  어느 기자가 취재해 온 기사거리를 동료 기자들에게 불러준다. 메모만 불러 주는 경우도 있지만 아예 기사를 대표 집필하여 기사로 불러준다. 그 기사를 기자실의 심부름하는 여자아이가 받아 써 전화통 옆에 놓아두기도 한다. 늦게 출근하는 기자용이다. 회사에서 당직하는 기자가 '뭐 없느냐'고 기자실로 물어오면 여자아이가 전화통에다 대고 그 기사를 줄줄 부른다. 이럴 경우 대표 집필한 기자가 숫자에서 착오를 내면 틀린 그 숫자가 전국의 신문 방송에 그대로 쫙 깔린다. 거짓말의 대량 복사, 유통이다. '모두 같이 틀리는 건 안 틀리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을 만큼 그런 단결된 실수에는 대체로 안심이다.
  
  사소한 사건은 터져도 출입 기자실의 대표선수만이 현장에 나가 대표 취재를 하여 기자실에 보고한다. 물론 이렇게 단결을 하면 에너지 절약이 되고 여가가 많이 생긴다. 그 여가를 기자들이 어떻게 이용하는가가 문제다. 경쟁 감각이 거세된 이런 풍토에선 기자의 촉각도 거세된다. 싱싱한 기사가 나올 리가 없다. 좋은 기사를 캐내도 농땡이 기자와 공유하게 되어 있는데 남에게 좋은 일만 시키는 취재를 할 생각이 나겠는가? 의령의 순경 난동 사건 보도에서 피살자 숫자가 시간마다 달라지고 이것을 베낀 일본 신문들도 일제히 오보를 한 것은 판단을 한 사람(이 경우는 '연합통신')에게만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실례로써 보여준 셈이다. 언론정비 이전처럼 의령군에 많은 기자들이 있었다면 오보의 범위나 정도는 크게 줄어들었을 것이다.
  
  지방 기사를 다른 신문들은 거의 '연합통신'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이 통신 기자의 잘못은 견제나 교정을 받지 않고 전국을 휩쓸 가능성이 높다. '천년 묵은 백사' '산과 바다를 날아다니는 산 갈치' '발암물질이 섞인 형광증백제' 따위의 거짓말이 그렇게 유통되었다. 오보통신 기사를 실은 신문은 통신 기사임을 밝혔더라도 정정 보도의 책임까지 지도록 되어 잇다. 남의 십자가를 대신 지는 셈이다.
  
  부산이나 광주, 대구 등지에선 신문이 두 개 있다가 하나로 통합되었다. '신문사가 하나만 있으면 참 불편하군요. 잘못된 기사가 실렸을 때 이에 반론을 하려해도 받아 주는 데가 있어야죠? 전에도 ㄱ 신문의 잘못을 ㄴ 신문을 통해 바로잡을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독자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 같다. 시내버스를 어느 한 회사가 독점 운행한다면 그 회사에 아무리 불평을 해도 잘 먹혀들지 않을 것이다. 신문의 지역독점도 같은 폐단을 낳기 쉽다.
  
  '80년 봄의 부산 동래 일가족 몰살 사건 수사의 경우도 지금처럼 경쟁이 없었다면 집주인 국씨가 범인으로 몰려 경찰에 구속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경찰서장이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국씨를 범인이라고 발표했고 다른 언론사에서도 그래도 받아썼지만 '국제신문' 기자만이 수사의 맹점을 들고 나와 1주일에 걸쳐 시끄럽게 속보를 쓰는 바람에 국씨는 풀려나올 수 있었다. 이것은 경쟁이 오보를 교정, 무고한 인간을 살린 구체적인 사례이다. 오보를 낳는 것도 언론의 경쟁이지만 오보를 자정(自淨)하는 것도 경쟁이다. 경쟁 속에서 좋은 상품(기사)이 생산되는 건 자본주의 사회의 생리다.
  
  많은 오보사례를 들었지만 가장 악질적인 오보 사례는 들지 못했다. 들 수가 없기 때문이다. 최악의 오보는 기사의 묵살이다. 알려야 마땅한 사실을 지워 없애버리는 행위, 붓대를 들어야 할 기자가 지우개를 드는 꼴, 그것은 오보보다, 과장보다, 날조보다도 더 큰 나쁜 짓이다. 오보나 날조는 그래도 '사실의 존재'는 알려준다. '사실의 존재'만 알려지면 당장은 왜곡, 과장되더라도 시간이 흐른 뒤 누군가의 손에 의해 바로 잡혀질 가능성은 있다. '사실의 존재'까지 말살하는 것은 이 '교정의 가능성'도 없애버리는 것이다.
  
  언론이 사회의 공기라면, 그래서 기자도 공직자 취급을 한다면 이런 행동은 직무유기나 증거 인멸, 또는 공무집행 방해죄에 해당한다. 경찰관이나 공무원의 잣대로 기자를 징계한다면 과연 몇 사람이나 남아날까? '사실의 존재'를 송두리째 지워버리지는 않지만 사실을 군데군데 부분적으로 감추어 놓고 독자들의 퀴즈 풀이를 유도하는 기사는 너무나 흔해 일일이 예를 든다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보건 사회부는 신경 마비 등을 일으키는, 인체에 해로운 것으로 밝혀진 키노보름의 성분이 들어 있는 32개 제약회사 43개 약품에 대해 제조금지 조치를 취했다.' '서울시 보건 당국은 82개 제과업소의 1백18개 품목 과자류를 유해 식품으로 판정, 행정 처분까지 내리고는 명단을 발표하지 않다가 여론에 못 이겨 이를 발표했다.' 거창한 리드로 시작된 이런 기사를 읽어 내려간 독자들은 미끼만 떼 먹힌 낚싯군의 심정이 되었을 것이다. 제약회사나 약품이름, 제과업소나 과자이름은 실려 있지도 않았으니, 실려 있어도 L제과 D제과식이나 독자가 암호해독사가 아닌 다음에야… 이런 은폐는 특히 언론의 가장 큰 광고주인 제약회사나 화장품 회사가 관련된 기사에서 자주 빚어지고 있다. '강물에 독약이 풀려졌다'고 해 놓고는 독약이름이나 독약이 풀린 위치를 안 밝힌다면 이게 무슨 꼴인가?
  
  수십만, 수백만의 입을 가진 언론의 거짓말이 한 개의 입밖에 갖지 못한 개인의 거짓말과 같을 수는 없다. 한 기자의 거짓말은 수십만, 수백만 개의 거짓말을 낳고 그 거짓말들은 눈에서 눈으로, 입에서 입으로, 귀에서 귀로 옮겨 다니며 대대로 새끼를 친다. 기하급수적으로 증폭, 증식되는 그 거짓말을 지우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언론의 오보, 그것은 '거짓말의 대합창'을 전파시켜 온 국민의 백지화를 초래할 수 있는 힘까지 갖고 있다. 외국의 어떤 학자는 '평화시의 군대는 매스컴이다'고 했다. 전시에는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 군이지만 평화의 민주국가에서는 힘의 상징으로서 있을 뿐이다. 평화시에 사회를 잡고 흔들 수 있는 것은 매스컴이다.
  
  이 조직의 구성원인 기자는 인격을 죽이고 살릴 수 있는 붓대를 갖고 있다. 총검은 몇 사람밖에 요리할 수 없으나 기자의 붓대는 가위 원자 폭탄이다. 이 붓대는 흔히 '양날 칼'로 비유되고 있다. 잘못 휘둘면 무고한 사람들만 해치는 '폭력의 칼', 잘만 쓰면 '정의의 칼'이다. 악마도 될 수 있고 천사도 될 수 있는 것이 기자란 직업이다. 사기군도 될 수 있고 사회복지사업가도 될 수 있는 것이 기자다. 공갈배도 될 수 있고 콜롬보도 될 수 있는 게 기자다. 현대의 마술사, 죽을 사람도 살리고 살 사람도 죽일 수 있는 무소불능의 대중 매체 종사자들은 그들의 권력, 그에 따른 의무를 새삼 인식해야 할 것이다. 우리 언론은 스스로를 사회의 공기(公器)라 부르기를 즐긴다. 언론이 정말 '사회의 공기'라는 평가를 받으려면 기자는 공무를 집행한다는 엄정한 마음가짐으로 일해야 할 것이다.
  
  형사가 사건을 묵살하는 것보다 훨씬 쉽게 기자는 기사를 묵살하지는 않는가? 형사가 조서를 편파적으로 쓰는 것보다 훨씬 더 심하게 기사를 왜곡하지는 않는가? 공문서만큼 정확한 기사를 쓰고 있는가? 공무원만큼 엄격한 윤리 규정을 기자들은 갖고 있는가? 잘못에 대해 공직자만큼 기자도 냉철한 감독과 심판을 받고 있는가? 기자의 영향력과 권한은 엄청나게 크지만 그것의 남용을 규제하는 힘은 약하다. 이 불균형이 클수록 오보의 가능성은 높아진다. 기자의 권력 남용을 견제하는 것은 독자들의 권리의식, 언론내부의 자율규제,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자들 자신의 청교도적인 직업윤리의 연마일 것이다.
  
  기자의 크나큰 힘과 남용의 엄청난 폐단을 생각할 때 기자는 어떤 직업인보다도 원숙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야 한다는 두려움이 절실하다. 원숙한 인격은 훌륭한 소양에다가 갖가지의 경험이 덧붙여져야 빚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경력이 오랜 기자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대기자는 전문 지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훌륭한 게 아니라 기사의 작성이나 판단에 있어서 엄정성과 인간성을 조화시킬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하고 있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다.
  
  기사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이다. 특종, 기사의 단수, 상대지에 대한 우월, 명예욕, 속보, 충격, 자부심 따위에 너무 빠지면 '인간을 위한 기사'가 아니라 '기사를 위한 기사'가 나오기 쉽다. 이런 풍토에서 인간은 정보원으로서의 가치, 뉴스가치, 몇 단 크기의 인간인가라는 잣대로 평가되기 쉽게 된다. 기사만 남고 인간은 소외되는 것이다. 인간이 소외되고 기사가 우상숭배를 받는 현장에서 오보, 과장, 왜곡, 날조는 번창하는 법이다.
  
  '지리산이 높습니까, 한라산이 높습니까?' 오늘도 신문사에는 내기의 심판을 요청하는 전화가 걸려온다. 그들 서민은 기자를 진실의 대변인으로 믿고 있다. 이들의 목소리를 늘 가슴속에 새기고 붓대를 놀린다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출처 : 마당
[ 2003-07-04, 15:1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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