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族部落 - 釜山市 同族部落의 變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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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깊은 門中行事
  
  동족부락의 행사-시사(時祀), 동제(洞祭), 족보편찬 등은 문중공유재산에서 그 경비를 충당하는게 보통이다. 따라서 동족부락의 존속과 건전한 기능을 위해선 공유재산의 알뜰한 관리가 반드시 필요하다.
  
  용호동(龍湖洞) 파평윤(坡平尹)씨 부락은 이 공유토지를 둘러싼 말썽이 동족부락의 기능을 약화시키고 있는 본보기가 된다. 尹씨 마을에선 임야 3만5천평 위토답(位土畓) 2천평 등 모두 3만7천평의 문중토지를 갖고 있었다. 이 토지는 종손인 윤영봉(尹永鳳)씨(57)의 3명의 이름으로 등기돼 있었다. 지난 70년 尹永鳳시를 제외한 3명의 후손들이 공유토지중 1만평을 팔아버렸다. 세 사람은 『이 토지는 우리 선조들이 문중에 희사한 것이다』라고 주장, 그들의 행동을 변명했다. 종손 측에선 『등기할 때 편의상 이름만 빌렸다』고 맞서 소송까지 제기했으나 매각은 기정사실화되고 양쪽은 화해하고 말았다.
  
  71~75년 사이 尹씨 부락이 토지구획정리사업지역에 들어가자 논값이 평당 1천원에서 약 40배로 껑충 뛰었다. 종손 尹씨는 『이제 문중토지는 다 팔려버리고 位土畓 몇 마지기만 남았다』고 말했다 그 많던 공유토지를 누가 팔아 누가 덕을 보았는지에 대해선 끝내 입을 다무는 종손이다. 그러나 문중토지가 문중의 공동행사와는 관련 없는 일로 처분된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유사(有司)인 尹재석씨(53)는 돈이 없어 문중 일을 못보겠다고 한탄이다. 시사(時祀) 때의 제물도 경비 대문에 크게 간소화됐다. 이 마을에서도 구획정리사업은 동족부락의 농업종사자들을 대량 실업시켰다. 50代 이상은 자녀들이 공장노동, 날품팔이, 채소행상 등으로 벌어오는 수입에 얹혀 지내고 있다.
  
  이들이 양정(楊亭)동에 金씨처럼 순조롭게 전직할 수 없었던 것은 원래가 영세농민들이었기 때문. 구획정리사업이전 1가구당 평균 5마지기의 논을 가지고 있었던 이들은 땅값이 평당 4천~5천원 할 때 거의 다 팔아버렸다. 종손 尹씨도 평당 4천원에 6백평을 팔았다. 그 돈은 몇 년 사이 자녀학자금, 장사밑천, 높아진 생활비 충당으로 다 쓰여지고 尹씨는 이제 땅만 잃어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땅값은 그 뒤 평당 4만원까지 오르고 땅을 매점매석했던 토지「브로커」들에게만 좋은 일을 시킨 결과가 됐다.
  
  이 마을의 입향조(入鄕祖)는 尹영봉씨의 11대조인 윤성용(尹成龍). 경기(京畿)도 파주(坡州)에서 용호(龍湖)동에 가까운 용당갯가로 옮겨왔다. 尹成龍은 용당에서 생선중개업을 하다가 용호동으로 다시 옮겨 정착했다. 현재의 60호는 15촌 안쪽의 혈연.
  
  동족부락이 존속하려면 동족의식의 전승계층이 있어야 한다. 4-~50代의 장년층이 상당한 교육수준과 경제능력을 배경으로 동족부락을 이끌며 現金化해가는 예를 초읍손씨(草邑孫氏)부락과 양정김(楊亭金)씨 부락에서 보았다. 이들 마을에선 동족의식의 단절이 심하지 않고 노년층은 청장년층의 자유분방한 사조에 대해서도 관용적이다. 말하자면 가치관의 평준화(平準化)가 동족내에선 어느 정도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반면 가장 보수적인 지도층을 가진 동족부락이 전승계층의 不在로 몰락해가는 예가 흔하다. 부산시 동래(東萊)구 금사(錦絲)동 南平文氏부락이 그 보기가 된다. 이 마을은 文村이라 불리면서 지체높은 문중으로 이름을 떨쳤다. 南平文시들의 조상중엔 高麗文宗시대의 문익(文翼)을 필두로 文익점, 문萊 등 유명한 유학자들이 많다. 금사(錦絲)동의 文씨들도 그런 가풍을 이어받아 유학에 열심이었다. 이 마을엔 동래안락서원(東萊安樂書院)의 원장을 지낸 사람이 둘 생존해 있고 15명이 동래향교(東萊鄕校)의 회원으로 돼 있다.
  
  文씨들은 자연히 기독교에 배타적이었다. 이 마을엔 1910년 5월에 세워진 대한예수교장로회 登谷교회가 있다. 66년의 역사를 가진 교회지만 교인들은 꼬마들까지 합쳐 40~50명에 불과하다. 이 교회에서 근 30년 전도사로 일하다가 최근 사망한 문장만(文章萬)씨가 文씨 집안에선 유일한 교인이었다. 그는 『文씨들의 반대가 너무 지나치다 세례까지 받았던 文모씨(34)가 문중의 결사적인 만류로 이 교회를 그만두고 딴 데로 이사갔다』고 71년 1차조사때 말했었다. 文씨들은 또 독실한 불교신자들이다. 교회가 이 마을에 들어선 뒤인 1930년 뒷산에 배운사(寶雲寺)가 세워졌다. 文씨들은 기독교에의 대항의식도 있어 금장 이 암자의 「스폰서」가 됐다. 지금도 文씨들의 시주로 운영되고 있다.
  
   傳承階層 不在로 해체(解體)도
  
  文씨마을은 동족부락으로서는 해체과정에 있다. 종손(宗孫)이 딴곳으로 가버린지가 오래다. 젊은이들도 결혼하여 직장을 따라 시중심지로 잇달아 나가고 있다. 이곳은 부산시의 북쪽변두리, 교통이 불편하다. 日帝시대까지 下人을 부렸다는 文씨들은 신문명을 받아들이는데는 늑장이었다. 대학졸업자는 1명도 없다. 세대주는 80% 이상이 50대 이상의 노년층이다. 한 노인은 『찌꺼기만 남았다』고 푸념한다.
  
  1960년에 文씨들은 40가호였는데 71년엔 30호로 줄었고 76년 7월 현재 25호로 다시 감소. 71~75년의 구획정리로 이 일대는 공장지대로 변모했다. 이곳에서 농사를 못짓게 된 文씨들중 10가구는 「그린벨트」에 묶여있어 농지가 보전되고 있는 반여(盤如), 석대(石坮)동에서 다시 논을 구입, 농사를 짓고 있다.
  
  구획정리사업이 文시들의 전통적인 의식구조에 미친 영향을 상징하는 듯한 「에피소드」가 있다. 부산에선 가장 원초적인 형태의 동제(洞祭)가 매년 정월보름 전날밤 이 마을에서 올려져왔다. 제당(祭堂)은 네군데였는데 뒷산에 上堂, 마을 앞 개천가의 下堂, 논바닥에 칠성바위, 동네입구의 거릿대. 제관을 뽑는 철자와 조건도 까다로웠다. 결혼했으나 아이를 갖지 않은 남자, 상충에 있지 않고 평소 부정한 일을 저지르지 않은 남자라야 제관이 될 수 있었다.
  
  이번 조사에서 구획정리사업으로 거릿대는 파괴되고 동제는 2년째 중단돼 있음이 밝혀졌다. 거릿대가 있는 토지 주인이 거릿대를 다른 곳에 옮겨달라는 주민들의 요구를 무시, 부숴버렸다는 것이다. 동제들 못 올리게 된 것은 祭主를 서로 맡지 않으려 해서라고 한다. 조건에 맞으려면 젊은 신혼부부 가정에서 제주가 나와야 하는데 모두가 귀찮아 하여 중단돼 버렸다는 얘기다.
  
  文씨들은 조상제사에는 아직도 열심이다. 공유재산을 처분, 7백만원을 들여 선조들의 제실을 짓고 있다. 그러나 洞祭의 중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들의 관심은 지역사회에서 떠나 문중이란 좁은 테두리에 국한되고 있다. 건실한 동족부락의 사회적인 기여인 지역사회에 대한 애착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동제(洞祭)와 시사(時祀)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동제는 지역적인 단위로서의 부락이 제사의 목이며 時祀는 혈연집단인 문중행사라는데 있다. 이 洞祭의 중단은 동족부락의 정신적인 해체, 즉 지연(地緣)공동의식의 상실을 시사하는 것이다. 5년전만 해도 文씨마을엔 양자제도가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었다. 종손이나 차종손(次宗孫)이 대가 끊어지게 되면 문종회의를 열어 堂內한 집을 지명, 양자를 넣도록 결정하면 지명된 집은 반드시 장남을 양자로 보내야 했다는 것이다. 이 제도도 지금은 양자를 달라는 사람이 없고 선뜻 양자를 내놓을 사람도 없어 퇴색해버렸다.
  
  구획정리사업은 땅에 집착해온 동족부락의 家長들로부터 농토를 빼앗아버려 그들을 대거 실업시키고 있음을 우리는 여러 마을에서 보아왔다.
  
  70~73년 구획정리사업 바람이 휩쓸고 간 동래(東萊)구 구서(久瑞)동 박정(朴鄭)부락에서도 같은 현상이 빚어졌다. 이 마을에선 또 외래 입주자들이 몰고 온 치안문제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다. 인접한 T산업에선 매월 5일 월급을 준다. 5천여명의 공원이 이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상당수의 공원들이 久瑞동에 살고 있다. 이들이 월급을 받는 5일 밤은 특히 소란스럽다. 술을 퍼마신 젊은이들이 거리를 휩쓸어 다니고, 폭행 노상강도, 시비 소란이 일어난다. 지난해 이동파출소가 마을에 들어섰지만 밤도둑은 그치지 않고 있다. 참다못한 朴, 鄭씨들은 요즘 자체야경단을 만들고 교대로 순찰을 돌고 있다.
  
  久瑞동의 옛이름은 九世였다고 노인들은 말한다. 당시 南平文씨들이 이 마을에 9代째 살고 있었는데 자기들을 표준하여 마을이름을 지은 것이다. 죽산박(竹山朴)씨들은 지금으로부터 10代祖되는 분이 이 마을에 첫 입향(入鄕), 뿌리를 내리게 됐다. 3대쯤 늦게 동래정(東萊鄭)씨들이 들어왔다.
  
  朴씨와 鄭들은 이 마을의 다수세력인 文씨들과 대향하기 위해 서로 손을 잡고 친밀하게 지냈다. 서로 혼인을 많이 했다. 한 마을에 사는 兩大동족끼리 혼인하는 것은 부산에선 여기 뿐이다. 더구나 이들의 혼인방식은 「연줄혼인」이다. 연줄혼인은 朴씨 집에 鄭씨 집의 미혼자를 중매시키는 식의 혼인이다. 두 집안의 혼인이 잦을 수 있었던 것은 두 문중의 선조대에서 혼인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선조대의 혼인이 있었더라면 「할아버지집안」, 「外孫집안」이니 하여 후손들이 서로 결혼을 할 수가 없다. 朴씨와 鄭씨들의 가호수가 상당히 붓고 나서부터 혼인이 시작된 모양이다.
  
   文氏세력 압도한 朴鄭마을
  
  약 1백50년전 朴씨와 鄭시들을 수적으로 압도, 이 말의 주도세력이 됐다. 마을 이름을 文씨 본위의 九世에서 구서(久瑞)로 바꾼 것도 이때였단다. 朴씨들은 처음부터 文씨들과 대립관계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때 서로 혼인을 자주 했는데 文씨들과 결혼한 집이 잘되는 예가 없어 鄭씨들과의 혼사길을 트게 됐다고 한다. 71년에 朴씨는 62세대, 鄭씨는 58세대였다. 당시엔 가호수가 늘고 있었다. 69~71년사이 鄭씨 집안에선 전출 6세대, 전입 9세대, 朴씨 쪽에선 전출 6세대, 전입 9세대였다. 이런 현상을 朴씨들은 『젊었을 때 나가 살던 사람들이 부모들이 늙었거나 사망하면 여기서 代를 잇기 위해 오고 있다』고 설명했었다.
  
  지금엔 전출이 많아졌다. 지난 5년간 증감이 없는 설정이다. 직업은 71년의 농업 60%가 농업 10%로 바뀌어졌다. 가계를 내거나 집을 지어 T산업 근로자들에게 전세방을 주어 생활하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농사를 짓던 50代 이상의 노인들은 실업상태에 빠지자 가장권(家長權)마저 약화되는 형편이다. 문중의 젊은이들은 부모들의 말을 잘듣지 않는다. 동제(洞祭)의 제관을 서로 마다해서 지난 정월 보름 전날 밤의 제사 때는 동네노인들 모두 몰려가서 제주없이 함께 제사를 지내야 했다.
  
  朴씨들과 鄭시들은 외래인들의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에 퍽 비판적이다. 朴振馥씨(59)는 『새마을사업 등 마을 공장 사업에서 앞장서는 것은 항상 토박이들이고 외래인들은 고맙다는 말 한마디 않는다』고 불만을 표시한다. 특히 시장을 낼 때 사장부지의 소유자인 외래인이 그곳에 있던 동제당(洞祭堂)(탑거리)을 옮겨주지 않고 없애버린데 대해 감정을 갖고 있는 주민들이 많다고 한다.
  
  朴씨와 鄭씨들은 71년까진 두 집안에서 교대로 동장을 내놓았다. 구획정리사업 이후 인구가 2배나 붓고 외래인들이 많이 들어온 이후 이런 영향력은 상실됐다. 朴씨들은 시사(時祀) 때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한 위토답(位土畓)이 구획정리사업으로 없어지자 그것을 팔아 건물을 짓고 이를 세주어 경비를 염출하고 있다.
  
  구획정리된 이후의 동족부락에서 가호수가 감소되는 가장 큰 이유는 새 직장을 얻어 교통이 편리한 시 중심부로 나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통이 좋은 시 중심부에 있는 동족부락은 구획정리사업 이후 격심한 직업전환의 변동을 겪어도 가호수가 줄지 않는다. 이왕이면 친척들과 함께 살겠다는 마음만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변치 않고 있는 것이다.
  
  부산진구 주례(周禮)동 3통의 여산송씨(礪山宋氏) 부락은 이런 지리(地理)의 利 때문이 가호수가 늘고 있다. 71년에 21호, 76년엔 31호. 이 마을에 가해진 구획정리 68~74년의 「쇼크」도 다른 동족부락에서와 꼭 같은 변화를 몰고 왔다. 인구는 71~76년사이 2.3배로 불었고 땅값은 30배로 뛰었다. 1가구당 2천평 정도의 농지를 갖고 있었던 宋씨들은 2가호만 남기고 상공업으로 전환했다. 10여가구는 건물대여로 생활하고 있으며 기타 사상(沙上)공단의 고용인, 봉급생활자 등으로 전직했다.
  
  송씨들의 동족의식은 아직 강렬하며 지역사회에 대한 영향력 또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다. 周禮동 동장 송성실(宋成實)씨(52)는 7년째 일을 보고 있다. 宋씨들이 중심이 된 토박이들은 1년에 3차례나 동제(洞祭)를 올리고 있다. 동징, 정월대보름, 음력 5월 그믐. 宋씨마을의 堂山은 워낙 끈질긴 생명력을 갖고 있다. 경부선(京釜線)을 깔 때 日本人 「고노에」가 堂山나무를 자르려고 톱질을 하다가 급사했다는 얘기를 자랑스럽게 하고 있는 노인들이다.
  
  구획정리사업으로 두 당산중 下堂이 없어질 운명이 되자 宋씨들을 비롯한 동네 사람들이 일어나 上堂곁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이 마을엔 상민(常民)출신의 安모, 金모씨 등이 살아있다. 日帝 때까지 常民들은 소사(小使)로서 마을의 심부름꾼 일을 하며 살았다고 하니 이들에 대한 차별의식은 이젠 있을 수도 없다고 宋씨들은 말하고 있다. 종손 송주성(宋柱成)씨의 14대선조 송계방(宋啓邦)이 입향조(入鄕祖)이니만큼 宋씨들은 4백여년 이곳에서 살아온 셈이다. 동족부락으로부터 젊은이들이 대량 전출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이 마을의 내부적인 동족의식의 계승은 비교적 순조로운 편이다. 문종유사는 43세의 송상봉(宋相奉)씨인데 그는 30代에서부터 이 일을 보고 있으며 40代가 문중의 주축이 되고 있다.
  
  宋씨들의 공유재산은 토지 1천2백50평과 30평짜리 건물. 이 마을이 비교적 구획정리사업을 잘 견디어낸 것은 거주지 이동이 거의 없었고 장년층이 동족의식의 계승세력으로 확고한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민중(民衆)의 자위수단(自衛手段)이었던 계(契)
  
  日帝의 韓國연구학자들은 朝鮮의 정치행정제도에 대해서 극히 경멸적이었으나 부락의 지방자치제도 특히 契조직에 대해서만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宮의 수탈 속에서 한국의 사회제도가 그래도 붕괴되지 않고 유치돼 온데는 契에 의한 부락 내부의 상부상조 덕택이었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경제적인 상부상조뿐 아니라 혼인, 교육 종교 등 다양한 범위에 걸쳐 기능해온 契야말로 민중의 자위수단이었던 것이다.
  
  契엔 여러 종류가 있다. 契재산의 운용에 의한 수입금으로 계원들의 납세에 충당하는 호포계(戶布契), 山林의 이용을 목적으로 한 송계(松契), 교육기관의 운영자금을 대는데 소용되는 학계(學契), 관혼상제의 경비를 부담하는 혼상계(婚喪契), 동족의 제사비용을 염출하는 종계(宗契) 등 10여 가지에 이른다.
  
  부산의 동족부락중 부산진구 괘법(掛法)동 황씨(黃氏)부락은 4백여년의 역사를 가진 동계(洞契)를 운영하고 있는 유일한 마을이다. 창원황씨(昌原黃氏) 48세대는 종손 황규택(黃圭澤)씨(49)의 14대조가 昌原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이후 4백여년간 살아오고 있다. 이곳의 예시 지명 昌法을 따서 昌法契로 불리는 洞契엔 黃씨들을 비롯 토박이 80가구가 가입, 기금 2백만원을 마련해 놓고 있다. 이 계는 洞祭, 길흉사 부조에 주로 쓰인다. 契의 총무는 黃씨 집안의 종손인 黃圭澤씨. 그는 『외지에서 온 사람들의 가입도 환영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 契가 한 洞 안에서 분열의식을 심어 놓을까 근심스럽다고 말했다.
  
  黃씨 부락은 사상(沙上)지역 베1의 부촌으로 알려져 왔다.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괘법동내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나 동장직은 10여년 黃씨문중에서 맡아 장기집권(?)하고 있다. 지역사회에 밝고 관심이 높으며 유지들의 협조를 구하는데 황씨동장이 유리하기 때문인 듯.
  71~75년 사이의 구획정리사업은 여기에선 다른 동족부락에서와 같은 격변을 일으키지 않았다. 구포(龜浦)에서 부산시내로 들어가는 도로와 경부선(京釜線)사이에 끼여있는 이 마을은 日帝시대부터 외부에 개방돼 문화의 충격을 서서히 받아왔기 때문에 구획정리의 충격은 그 진폭이 다소 줄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땅값도 71년의 평균 3만원에서 4만~5만원으로 작게 올랐다. 71년에 벌써 黃씨부락에서 농가비율은 30%로 줄어 있었기에 지난 5년간 큰 직업전환도 일어나지 않았다. 가구수도 지난 5년간 변화가 없다. 69~71년의 3년사이 16세대가 나간 것에 비교하면 이 부락은 격동 뒤의 안정기에 들어간 느낌이다. 구획정리가 몰고온 갈등은 광대한 문중토지를 둘러싼 문중내부의 분쟁, 외부인사와의 송사(訟事) 등으로 나타났다. 이 분쟁 대문에 黃씨들은 두 파로 갈려져 시사(時祀)를 따로 지내고 족보도 따로 펴내고 있다.
  
  20년 전가지 동네의 심부름꾼격인 소임(所任)을 부렸다는 黃씨들은 그들의 몰락을 조상의 무덤을 잘못 옮겼기 대문이라고 변명하고 있다.
  
  「그린벨트」의 혜택
  
  부산시 西구 충무(忠武)동 「로터리」에서 반송동 종점 「버스」를 타고 東萊구 東上동 철거이주지역을 지나 약 1.5㎞, 동천교(東川橋)를 지나면서 석대(石坮)동. 여기 임진왜란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中國에 살고 있을 돈양천씨(潁陽千氏) 54호가 몰려 살고 있다.
  
  영양千씨의 시조는 천만리(千萬里). 그는 明의 이여송(李如松)장군 밑에서 영양사(領糧使)겸 총독장(總督將)으로 봉직,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원병(援兵)을 이끌고 우리나라에 왔다. 평양, 울산(蔚山)에서 공을 세웠고 명군(明軍)이 물러난 뒤에도 그대로 남아 조선인(朝鮮人)으로 귀화했다. 우리나라에 올 때 데리고 온 상(祥)과 희(禧) 두 아들은 朝鮮여자와 결혼했다. 석대천씨(石坮川氏) 부락의 입향조는 祥의 손자인 천찬석(千贊 ). 이분은 광주부윤(廣州府尹), 안악군수(安岳郡守), 황주목사(黃州牧使) 등을 지냈다. 그가 왜 여기 오게 됐는지 기록돼 있지 않으나 『오랑캐에 쫓겨 왔다』는 구전(口傳)을 믿는다면 병자호란을 피해 왔다고 봄직하다.
  
  그는 석대(石坮)에서 손수 기와를 구워 집을 지었다. 그 집에 그의 10대종손 천학수(天鶴壽)씨(51)가 3백여년째 아직도 살고 있다. 입향조(入鄕祖)가 지은 집은 그 뒤 몇번 중수(重修)되었으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대지 1천4백44평의 대저택이다. 건물배치는 ㅁ자로 돼 있다 본채 및 ㄱ자 모형의 사랑채, 방앗간과 마굿간 대문을 헐어버리고는 사랑채와 마굿간 대문을 헐어버리고 새 집을 지었다. 이 집은 민가(民家)로선 부산근교에선 가장 오래됐을 것이다. 사랑채를 헐 때 창건연대와 중수(重修)연대를 밝혀주는 상량문(上樑文)이 나왔다고 하는데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중수연대의 연호가 광서(光緖)(1875~1909)였다는 것만 千씨는 기억하고 있다.
  
  千씨 부락은 71년과 76년 사이 거의 변하지 않았다. 가호수는 그동안 분가한 1집이 늘어 54호. 20여가호는 아직 농사를 짓고 있는 것도5년 전과 같으며 千씨 洞長, 여전한 동제(洞祭)와 시사(時祀), 뚜렷한 행렬(行列)의식 등 5년간 시간이 저지됐던 것이 아니가 하는 착각을 느끼게 할 정도다. 이런 정체의 원인은 「그린벨트」때문. 千씨 부락과 그들의 농토는 모두 「그린벨트」안에 들어가 개발제한이 되고 있다. 따라서 농업의 비중이 아직 높고 직업의 변화에 전출이 거의 없다. 이 동족부락의 비도시성은 가족구조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시중심부의 동족부락에선 핵가족비율이 80% 아상인데 千씨부락의 핵가족비율은 43%에 불과하다.
  
  千씨부락엔 2파(派)가 있다. 입향조인 찬석(贊 )의 손자는 둘이었다. 장남은 자필(自弼) 차남이 두필(斗弼). 自弼의 후손은 윗마을 斗弼의 후손은 아랫마을로 갈라져 살고 있다. 위 아랫마을의 거리가 1백m에 불과한데도 당산을 따로 갖고 있다. 시사(時祀)를 제외한 제사도 따로 지낸다. 문중(門中)총회도 두 파가 함께 모이는 도문회(都門會), 각파끼리만 모이는 파문회(派門會)로 나눠 1년에 모두 4회 열고 있다.
  
  석대(石坮)에서 동북쪽 4㎞ 지점에 있는 동래(東萊)구 반송(盤松) 운봉(雲峰)부락도 「그린벨트」 때문에 지난 5년 사이 큰 변혁을 겪지 않았다.
  
  마을은 반송동 철거이주민 부락에서 雲峰産쪽으로 약 1㎞ 들어간 자리에 있다. 산으로 담처럼 둘러싸였다고 하여 「담안골」이라고도 불린다. 이 마을엔 1715년 입향(入鄕)한 경주김씨(慶州金氏) 22호가 살고 있다. 雲峰부락의 취락형성은 신라(新羅)말기의 사지(寺址)가 있다. 높이 3m, 길이 70~80m의 축대와 석탑자리가 남아 있는데 金씨들은 운봉사(雲峰寺)의 폐허라고 말한다.
  
   땅에의 무서운 집념
  
  金씨 앞엔 여산송씨(礪山宋氏)가 들어와 살았다 그들의 무덤은 뒷동산에 있는데 고려자기 파편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고 가끔 도굴꾼들이 다녀가기로 한다.
  
  金씨들은 지난 69년 농민으로서 큰 타격을 받았다. 그들의 논이 모여 있던 반송동 정책이주지역으로 지정돼 3만5천평의 농토를 잃은 것이다. 평당 9백만원의 보상금을 받아 장사를 해보려고 이 마을에서 9가구가 반송동으로 나갔다. 71년 이후엔 金씨 마을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타인에 의한 안정이 이뤄진 것이다. 金씨들은 아직 품앗이를 하고 있다. 직업분포는 40대 이상이 농업, 20~30代는 공장근로자 및 봉급생활자로 확연하게 구별된다. 이 마을에서도 동제(洞祭)의 제주(祭主) 뽑기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올해 정월 보름날엔 1가구당 1명씩 대표로 나가 제주 없이 제사를 올렸다.
  
  동래(東萊)구 좌동(佐洞) 김해김씨(金海金氏)부락, 해운대(海雲臺)에서 3㎞ 북쪽에 있지만 정경(情景)은 너무나 딴판이다. 이 마을에 가려면 해운대파출소에서 통행증을 끊어 철조망을 통과해야만 한다. 이런 인위적인 단절이 이 마을의 갑작스런 변혁을 막아주고 있다. 몇 년전엔 시사(時祀)를 올리기 위해 시내에서 몰려온 수십명의 金씨들이 철조망 앞에서 돌아서야 했던 일도 있었다. 金씨집 29호는 모두 1가구당 평균 10마지기의 농토를 갖고 있다. 개인별 직업은 『50代 이상은 파고(농사), 40대는 팔고(상업), 30대는 다닌다(회사원)』는 말처럼 제2, 3차산업으로 분화해 가는 중이다.
  
  金씨들의 땅에 대한 집념은 무서운 정도다. 6·25사변때 좌동(佐洞)에서 군용지로 징발된 농토는 40여만평에 달했다. 金씨들은 한푼의 보상금도 받지 못했다. 53년까지 3년간 金씨들은 농사를 일체 지을 수가 없었다. 54년부터 징발지역이 단계적으로 해제돼 갔다. 60년부터 거의 원상복귀. 근 10년 버려졌던 농토는 황무지가 돼 있었다. 땅을 다시 일궈 정상적인 경작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66년께부터였다.
  
  10여년간 땅을 잃은 金씨들은 귀속과 날품팔이로 생활했다. 그러나 농토를 돌려받으면서 그들은 모두 돌아왔다. 그들 말대로 『배운 기술을 땅파는 것 뿐이었다』이 마을 출신의 유일한 3급공무원인 김종휘(金鍾輝)(52)씨는 토지가 징발됐다고 해서 이 마을을 떠난 金씨는 한 사람도 없었다고 말했다.
  
  金씨들의 조상봉사(奉祀)는 지극하다. 1년에 6일을 문중전체가 참여하는 제사에 소비한다. 문중공유재산도 깡그리 제사를 위해 존재한다. 위토답(位土畓) 3천평, 조상의 무덤들이 있는 산 6천평이 공유재산의 전부다. 이 마을을 떠나려해도 조상의 무덤옆을 떨어질 수 없다고 말하는 노인네들이 많다. 金씨마을의 입향조(入鄕祖)는 종손 김지해(金智海)씨(62)의 14대조인 김학봉(金鶴鳳). 사상(沙上)에서 살다가 임진왜란 직후 여기로 왔다. 그의 무덤은 아직 沙上에 있다. 金智海씨와 조부는 좌동(佐洞)에 살다가 조상무덤을 더 지극히 모시기 위해 沙上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병영(兵營)처럼 외부와 단절된 이 마을엔 품앗이와 契(노인들의 단체여행목적), 동제(洞祭)(1년에 2회) 등 동족부락의 상징이 모두 남아 있다. 金씨들은 지성(地姓)들과는 길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끼리끼리 살고 있다. 이 경계를 넘어 地姓거주지역에 옮겨간 적은 한번도 없다는 金씨들이다. 金씨들은 물론 동내혼(洞內婚)을 금기로 하고 있으며 사방 30리 안쪽의 통혼권(通婚圈)을 갖고 있어 북쪽으로 양산군(梁山郡) 기장면, 남쪽으로 南구 대연동(大淵洞)에 이르는 지역의 토박이들과 혼인을 많이 해왔다. 그들은 가까운 어촌주민들과는 혼인을 한번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行列 하나가 열 살을 접는다』는 말대로 서열의식은 철저하다. 지난 5년간 가장 크게 변한 것은 TV 보급률. 71년엔 한집도 TV를 갖고 있지 않았으나 지금은 태반이 TV를 사들였다. 66년엔 족보를 펴낼 때 돈을 내지 못한 사람들의 이름이 빠졌다고 소동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이런 가난은 이젠 없어지고 金氏들은 조용한 도시 속의 농촌생활을 자족하고 있는 것 같다.
  
출처 : 월간중앙
[ 2003-07-04, 15:5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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