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族部落 - 釜山市 同族部落의 變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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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族部落 - 釜山市 同族部落의 變貌
  
  제2회 評論家賞 作品募集 佳作 수상작
  
  근대화가 반드시 同族部落의 解體를 수반하지 않으며, 동족부락의 相扶相助의 생활양식이 근대화 몰고 오는 非情的 측면을 中和하고 있다
  
  <1976년 10월 월간중앙>
  
   問題의 提起
  
  同性同本끼리 모여 사는 동족부락(同族部落). 20세기 후반, 인구 2백 50만의 격반하는 대도시 속에서 동족부락은 그들의 聖城을 지켜나갈 수 있을까
  
  공동조상에 바탕한 혈연의식이 땅에 대한 집착으로 응집돼 이룬 同族部落. 그 통토에 대한 집착이 구획정리사업으로 거부되고 혈연의식은 급변하는 가치관에 위협받아도 원시씨족사회(原始氏族社會)에 기원을 둔 핏줄의 조직은 존속할 것인가.
  
  필자는 釜山의 12개 동족부락에 대해 5년만의 2차 조사를 하기 전 조사보고서의 제목을 『同族部落의 해체(解體)』라고 예정해 놓았었다. 이 마을들이 「文化의 충격」을 받고 허물어졌거나 급속한 붕괴의 길에 접어들었을 것이라고 예측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사결과는 반대의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다.
  
  ◀일부 同族部落은 조직을 현대화, 동족의식을 오히려 강화하고 있다.
  ◀농토(농업)없이도 동족부락의 존속은 가능하다. 토지(농토)자본을 상업자본으로 전환시키는데 성공하면 동족부락은 굳어진다.
  ◀대부분의 同族部落에선 가호수가 늘고 있거나 증감이 없다. 都心에 가까운 부락일수록 안정돼 있다.
  ◀모든 同族部落이 部落祭(동제(洞祭), 당산제(堂山祭)도 같은 뜻)와 시사(時祀)를 지키며 공유재산을 갖고 있다.
  ◀同族部落주민들은 지역개발에서 다른 시민들보다 능동적이다. 깊은 향토애 때문인 것 같다.
  ◀同族部落의 범죄발생률은 다른 주거지역에 비해 훨씬 낮다.
  ◀同族部落의 땅값이 토지구회정리사업 등으로 급등할 때 농토를 빨리 판 주민들보다 끝까지 토지를 보전한 주민들이 직汰恍??성공한다. 농업종사자들의 대거 실업이 발생하고 있다.
  ◀다른 성씨에 대한 배타의식은 전무하다.
  
  결론적으로 사회의 근대화가 동족부락의 해체를 반드시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근대화의 도전에 슬기롭게 대응한 동족부락들은 물질적, 정신적인 면에서 발전, 성장할 수 있다는 증거가 여러 마을에서 발견됐다.
  
  조사대상 동족부락들은 추적조사기간인 지난 5년간 심각한 사회적 변혁을 경험했다. 도시계획, 구획정리사업으로 농토가 없어지자 직업의 전환을 강요당했다. 동족부락이 소속한 洞의 인구는 5년 사이 2~3배 땅값은 최고 1백배로 뛰었다. TV보급률은 최고 10배로 높아졌다. 몰려온 정책이주민들은 범죄, 性문제 등 사회적인 골치꺼리도 함께 몰고왔다. 고루하고 허약하게만 보이는 동족부락이 그들의 생활근거지와 의식구조를 뒤흔든 이런 변혁에 무사하리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도 무리가 아니다.
  
  많은 韓國지식인들이 『전통적인 것은 비합리적이고 무력하며, 변혁되고 개조돼야 한다』고 믿고 있다. 우리 固有의 것에 대한 이런 圖式的 사고방식에 사로잡혔던 조사자는 동족부락의 힘을 과소평가했던 것이다.
  
  이 조사에서 동족부락의 뚜렷한 사회적 逆機能을 찾아낼 수 없었음을 고백해야 하겠다. 농촌의 동족부락이 가졌다는 배타성, 분열성, 낭비성(가정의례에 있어서)은 도시화의 과정에서 사라진 것 같다. 반면 급속한 도시화의 병폐인 획일성, 무관심, 몰인간성, 범죄다발경향, 소외감을 중화 내지 정화할 수 있는 「전통의 지혜」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큰 기쁨이었다. 향토애, 범죄억제능력, 소속감고취, 협동정신-이런 미덕을 동족부락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도시화과정에서 동족부락의 사회적 기능이 재검토돼야 할 것이란 생각을 갖게 했다.
  
  동족부락은 化石化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의 근대화에 큰 영향을 미치고 또 영향받은 사회적 力動관계에서 살아 있는 문제다 우리나라의 수백만 인구가 동족부락에 살고 있다. 그들은 앞으로 근대화의 충격을 가장 예민하게 받게 될 운명이다.
  
   社會構造上의 비중
  
  1930년 조선총독(朝鮮總督) 國勢조사에 따르면 南北韓엔 1만4천6백72개소의 동족부락이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1개 동족부락의 평균호수를 50, 1가호의 가족수를 5명으로 잡으면 당시의 동족부락주민은 약 3백67명으로 계산된다. 당시 전국인구 2천만중 약 18.5%가 동족부락 주민이었다는 얘기다.
  
  그때로부터 46년이 지났지만 동족부락 주민의 절대수는 불어가고 있다. 1960년 慶南道의 조사에 다르면 도내(市는 제외)의 동족부락(20가호 이상) 수는 3천 6백개소. 1930년 조사 때의 동족부락 1천7백57개소와 비교하면 약 2배나 된다. 1960년의 慶南도민 4백10만명 중 동족부락의 구성원으로 생활하고 있다는 추산이 나오기도 한다.
  
  물론 1930년의 조사가 동족부락의 수를 실제보다 적게 잡은 경향은 있다. 어쨌든 동족부락이 농촌에선 아직도 지배적인 취락형태이며 앞으로도 장기간 사회변화에 영향을 주고받는 거대한 조직체로서 건재할 것임을 통계자료는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동족부락의 구성원은 사회격변에 대해 비구성원과는 다른 반응체계를 갖고 있다. 일반개인들은 「개인-가족-사회」의 3단계사회조직을 넘나들며 생활한다. 동족부락 주민들은 「개인-가족-門中(同族)-사회」의 4단계 「시스템」속에 있다. 즉 동족부락은 사회의 변화를 개인에게 전달해주는데 있어서 緩速劑 또는 加速劑의 역할을 맡게 됨을 뜻하는 것이다.
  
  개화문명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의 동족부락의 완속역할 즉 전해역할이 지나치게 강조된 경향이 있다. 뒤에 그 예를 들겠지만 동족부락의 선각자가 개화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마을에선 다른 부락보다도 신문화가 훨씬 바르게 파급·흡수됐다. 동족부락이 加速劑역할을 한 것이다. 도시의 동족부락이 도시화의 충격에 대한 완충역할을 하는 장점도 무시할 수 없다. 동족부락에서 범죄발생률이 낮고 전통의식의 단절이 비교적 심하지 않은 것이 완충역할 덕택인 것 같다.
  
  한국의 사회구조에서 막강한 비중을 차지하는 동족부락은 어떻게 변모해 갈 것인가. 발전적인 변모의 길은 무엇인가. 이 의문의 해답은 대도시 속의 동족부락이 현재 겪고 있는 변화의 과정을 관찰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동족부락의 기능에 대한 연구는 농촌을 대상으로 하여 이뤄진 것 뿐이다. 그것도 소수 동족부락 내부의 조직과 기능조사에 그쳤고 변화의 과정을 다룬 논문은 드물다.
  
  많은 사회학자들이 한국의 동족부락은 해체과정에 있다고 보고서에서 지적했다. 그러나 사회변화에 대한 동족부락의 대응을 무시해선 안된다. 해체와 변모는 구별해야 할 것이다. 대도시의 동족부락들은 가장 먼저, 가정 심하게 사회변혁을 경험했고 또 하고 있는 중이다. 농촌의 동족부락들이 미래에 겪게 될 변모를 짐작케 해 주는 先行型이 도시의 동족부락이며 그런 뜻에서 하だ?교훈인 것이다.
  
  필자는 변모의 과정을 입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1971년 9월과 1976년 7월 5년 간격으로 두 차례 釜山의 12개 동족부락을 추적조사했다. 이 부락들은 1930년 국세조사에서 밝혀진 부산시내 17개 동족부락중 가호수가 비교적 많고 하쇠적변화를 심하게 받았음직한 곳을 고른 것이다.
  
  조사의 방법은 주로 「인터뷰」·변모과정을 거시적으로 잡으려 했다. 그 파악방법은 역사적인 접근방식을 택했다. 조사대상지경이 많아 통계적이고 조직적인 심층조사는 되지 않았다.
  
   발전적인 現代化의 길
  
  사회변화에 슬기롭게 대응하기 위해선 그 변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지도계층이 있어야 한다. 그런 계층이 동족부락에 존재한다면 동족부락의 근대화는 일반인들보다도 훨씬 빨리 이뤄질 수 있다는 본보기가 釜山市 釜山鎭區 초읍(草邑)동 3통 밀양손씨(密陽孫氏) 38호다. 성지곡(聖知谷) 공원부근에 있는 이 동족부락은 도농골(道農谷), 건골(乾谷) 등 나지막한 언덕으로 둘러싸여 바깥과 격리된 오목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토담 속의 초가, 묵직한 기와집들이 짜임새 있게 엮어놓은 이 마을을 오랜 취락 특유의 안온함이 인간적인 따뜻함, 정제된 분위기를 자아낸다. 孫氏마을의 창시자 즉 입향조(入鄕祖)는 亞宗孫인 손찬중(孫璨鍾)씨(50)의 16代祖 손구(孫龜)다. 약 4백80년 전 그는 密陽에서 여기로 옮겨왔다. 孫씨들이 이 마을의 지배적인 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孫龜의 4대손인 명윤(明胤)이 동래향교(東萊鄕校)의 간부로 뽑혀 향교출입을 자주 하면서부터였다. 수적으로 열세인 南平文氏, 慶州李氏들과는 이 즈음부터 동족부락에선 드문 洞內婚을 금기시(禁忌視)하는 경향이다. 『常民의 인연(因綠)은 가까운데 있고 兩班의 인연은 먼곳에 있다』면서 洞外의 家格높은 집안과 혼인하는 게 보통이다.
  
  孫氏족보를 살펴보면 소실과 양자제도가 발견되지 않는다 심지어 宗孫이 아들을 낳지 못해도 소실을 두거나 同族에서 양자를 꾸어주지 않았다. 이 대문에 입향조의 직계종손과 次宗孫은 모두 代가 끊어졌고 亞宗孫만 남게 됐다. 代를 이음을 중요시하고 宗孫을 신성시해 오는 동족부락의 전통에 비춰 孫氏들의 이런 가풍은 파격적인 것이다. 洞內婚과 함께 이런 가풍은 孫氏들이 실질적인 인간관계들이었음을 증명해주는 듯하다.
  
  孫氏들은 『명사도 배출 안했지만 빌어먹은 사람도 없었다』고 선조들은 평하고 있다. 孫氏들은 대체로 中農계층이었다. 孫氏들은 개화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현재 門長인 孫정즐씨(79)가 서당공부를 집어치우고 10세때 明倫소학교에 나갔다. 孫九鉉씨(73)를 비롯한 문종의 같은 나이또래들이 정줄씨를 따랐다. 정줄씨는 소학교~사립東萊고등보통학교를 거쳐 면서기가 되고 32세에 西面면장으로 출세했다. 이에 자극받아 문중에선 자녀들을 앞다투어 학교에 보내기 시작했다. 九鉉씨는 교편을 잡았다가 몇 년 전 국민교 교장으로 정년퇴직했고 다른 사람들은 의사, 건축업으로 진출했다.
  
  특히 의사가 7명이나 孫씨부락에서 나왔다. 孫九鉉씨는, 日帝시대 떳떳하게 살 수 있는 직업은 의사뿐이라고 생각한 문중의 젊은이들이 이 방면으로 집단진출했다고 말했다.
  
  27세에 九州帝國大學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았다는 孫정줄씨의 장남 奭鉉씨(拉北)와 太平洋戰爭 때 선반공으로 징용돼 강제노동하다가 폐병으로 죽은 九鉉씨의 장남 太晙씨(당시 京城대학 의학부 재학)는 西面三才에 들어간다는 평판이 날 정도였다. 孫氏들은 신문화를 배워 이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는데도 힘썼다고 한다. 정줄씨의 사촌형인 正烈씨는 12세에 慶南道 백일장에서 장원을 한 재사(才士)였다. 그는 백정의 아들에게도 신학문을 가르쳤다. 어느날 이 백정이 고맙다고 정렬씨를 범어사(梵魚寺)로 초대, 여자를 대접했다. 정렬씨는 여기서 성병을 얻어 25세에 요절했다.
  
  신문명의 적극적인 수용으로 孫씨부락은 해방 전에 이미 건실한 내부적 변모를 끝낸 상태였다. 이들은 해방 뒤의 농지개혁도 잘 견디었다. 많은 농토를 잃은 孫씨들은 정줄씨를 따라 9세대가 이 마을을 떠났다. 정줄씨는 가까운 釜田동에 삼성병원을 지어 의사인 아들을 데리고 와서 병원을 운영했다. 다른 사람들은 토건업, 설계사 등의 기술직종으로 나갔다.
  
  고등교육을 생활의 무기로 삼아 孫氏들은 더욱 안정된 기반을 갖게 된 것이다. 71년 1차조사 때 이들의 직업분포는 33호중 한 집만이 농사(位土畓)를 짓고 있었다. 나머지는 의사·교사 등 모두 안정되고 수입 많은 직업이었다.
  
  76년 7월의 2차 조사 결과 孫氏부락의 가호수는 5호나 불어 38호. 불어난 5호는 농지개혁 때 이 마을을 떠났던 사람들이 노년이 되자 돌아왔기 때문. 孫정줄씨도 돌아왔다. 언덕바지에 望子臺라는 별장을 지어놓고 북쪽을 바라보며 6·25대 군의관으로 입대, 납북된 장남을 그리고 있다. 釜田동에서 이 마을로 돌아온 孫덕기씨(70)는 『아무래도 같은 핏줄이 좋다. 여기 있으면 마음이 놓인다』고 말했다.
  
   理事會制度의 門中 서열
  
  수적으로 5년 전보다 강화된 이 동족마을은 내부구조에 있어서도 건실한 현대화를 끝냈다. 孫氏들은 門中有司제도 대신 8명의 이사로 구성된 이사회제도를 채택 宗中일을 보도록 하고 있다. 문중의 최연장자(또는 行列이 제일 빠르고 나이가 많은 최상서열자)인 門長과 그 밑에서 실무를 맡은 有司가 동족부락의 일을 보는 게 常例인데 孫氏들은 집단지도체제를 채택한 것이다. 孫氏들이 이사를 8명이나 둔 것은 문중 일에의 참여의식을 높이기 위한 것. 이사들은 40~50代의 이 마을의 실력자「그룹」이다. 이사회는 10월 첫 일요일에 있는 時祀를 준비하고 문중공유재산을 관리하며 3년마다 한번씩 베풀어지는 洞祭에 대한 협조 등의 업무를 토의 결정한다.
  
  이 동족부락의 공유재산은 위토답(位土畓) 10마지기, 임야 3천평, 기금 기백만원. 토지를 처분, 장학기금으로 만들려는 계획이 추진되어 있다. 이사회는 또 특정인물 이름으로 등기된 동족의 공유재산을 공동등기하여 재산분쟁의 소지를 없애버리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孫氏문중에 시집온 여자가 가문의 공유재산인줄 모르고 상속을 주장하여 말썽이 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동족부락의 현대화된 일면은 核家族化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38호가 핵가족이고 겨우 3호가 부모를 모시고 있는 직계가족(直系家族)이다. 노년층이 대부분 경제능력이 좋아 퇴직 후에도 스스로 장남과 함께 지내려 하지 않는 경향. 또 아들이 한 동네 있는 경우가 많아 떨어져 살아도 왕래가 잦아 소외감을 덜 느끼고 있다는 것.
  
  孫氏들은 동족부락의 연례적인 의식인 시사(時祀)도 하나의 문중 잔치날로 현대화시켰다. 많은 사람들을 참석시키기 위해 時祀시일을 음10월의 初丁日에서 음력 10월의 첫 일요일로 바꿨다. 이날에 제사 뒤엔 이 부락의 자녀들 중 모범생들을 뽑아 표창을 하며 총회를 열러 임원을 개선하기로 한다. 요즘엔 孫씨부락의 일부 젊은이들이 기독교를 믿게 돼 時祀에 나오지 않는 일이 있다. 이에 대해 노년층에서 퍽 관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洞祭는 원래 草邑동 전체의 의식이었으나 이 洞의 토박이인 孫氏들이 주동하여 제사 경비를 갹출, 정월 보름에 올리고 있다. 결국 이 孫氏부락의 근대화는 동족의 침체나 해체를 막고 되려 이 조직을 보존강화하는 역할을 한 것 같다. 근대화가 반드시 전통조직의 붕괴를 뜻하는 것이 아님을 孫氏부락이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도시화가 동족부락의 해체를 촉진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믿어지고 있다. 그러나 도시계획이 오히려 동족부락 주민들을 벼락부자로 만들어 동족조직을 발전적으로 현대화시킨 곳이 있다. 부산의 한복판에 위치한 부산진구 楊亭2동 淸道金氏부락 57호.
  
  18촌 안쪽의 金씨들은 양정(楊亭)「로터리」주변에서 3백84년째 살고 있다. 이곳은 부산의 「다운타운」에 속하는 都心으로 西南「로터리」에서 북쪽으로 약 1㎞ 떨어진 간선도로변이다. 이곳의 땅값은 평당 최고 50~60만원. 15~16년 전엔 평당 5백~1천원 나가는 논이었다. 약 1천배나 뛰어 오른 이 地代야말로 金씨들의 행복한 직업 전환을 가져온 부의 원천이었다. 楊亭사람들은 金씨들이 앉아서 부자됐다고 말한다.
  
  金씨들은 그러나 이런 변모를 일으킬 수 있는 자질이 옛날부터 가지고 있었다고 반론한다. 「一楊亭 二草邑」이란 말대로 淸道金씨부락은 草邑의 孫씨문중과 함께 옛 부산에선 부촌으로 통했다. 金씨들은 대부분 1백石 이상을 추수한 中, 大農이었다고 한다. 1910년대 楊亭을 가로지르는 국도가 뚫렸다. 길을 따라 가로지르는 국도가 뚫렸다. 길을 따라 온 개화문명을 金씨들은 주체적으로 흡수했다.
  
  1920년 김재호(金在昊)씨는 자기 논을 팔아 현재의 성지국민학교를 지었다. 金씨 자녀들은 이 소학교와 부산상업학교(현재의 부산상고)에 많이 나갔다. 金씨들중 일부는 日帝시대에, 그리고 농지개혁 이후 농사를 버리고 상공업으로 진출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지난 60년대까지는 농사를 지었다. 이들은 60년대에 들어서면서 놀라운「붐」을 타게 된다. 도시계획으로 교통중심지인 이 일대가 상가지역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땅값은 하루 아침에 수백배로 뛰었다.
  
   都市化로 강화된 金氏부락
  
  땅값이 급등할 때 농토를 가진 동족부락 주민들은 대체로 두갈래 길이 걷는다. 살림이 쪼들리는 집안에선 땅값이 올라가는 초기에 통토를 팔아 자녀들의 학자금이나 상업자본으로 쓴다. 상공업에 경험이 없는 이들은 참담한 실패를 맛보고 사회저소득층으로 전락해버리기가 일수다. 돈의 압박을 덜 받는 中上層에선 끝가지 농토를 보전한다.
  
  농토에 대한 집착, 농토를 버리면 선조의 땅을 떠나야 한다는 두려움이 오히려 이들에게 행복한 결말을 가져다준다. 땅값은 중단 없이 치솟는다. 농민들은 『어느날 갑자기 부자가 된』자신들을 발견한다. 평당 5백원 하던 논이 평당 4천~5천원으로 올랐을 때 통토를 팔아버린 사람들은 그 땅이 몇 년 뒤엔 평당 40만~60만원을 홋가하리라곤 상상치 못했을 것이다.
  
  金씨들은 대부분 부의 축적이 상당했던 부농들이라 농토를 마지막까지 보전할 수 있었다. 金씨들은 지난 66년을 전후해서 농업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그때엔 이미 땅을 팔아 「빌딩」을 짓고 상점과 점포를 내기에 충분하리만큼 땅값은 오를대로 올라 있었다. 이들은 현지에서 바로 상공업으로 전환했기 때문에 동족부락의 가호수는 줄지 않았다. 억대 이상의 재산가가 수두룩한 淸道金氏부락은 전국에서 가장 부유한 동족부락에 들어갈 것이다.
  
  71년에서 76년 사이 金씨들의 동족조직은 더욱 정비됐고 楊亭2동 일대의 지역행정과 개발엔 주축이 되고 있다. 楊亭2동 동장은 金씨문중의 유력인사인 金東烈씨(52)인데 7년째 이 일을 보고 있다. 이곳 출신 대의원엔 문중이사 金日守씨(47)가 포함돼 있고. 지난해엔 金씨들이 주동하여 洞舍을 신축했다. 공사비 1천7백만원중 7백만원은 부산시청의 보조, 나머지 1천만원중 반 이상을 金씨 문중에서 부담했다.
  
  金씨들은 올해엔 淸道金氏회관 기공식을 가졌다. 연건평 70평의 3층건물을 金씨들은 문중의 공동취사장, 예식장, 노인회관으로 이용할 예정. 金씨들은 또 淸道金氏의 시조인 영헌공(英憲公)의 문집을 한글로 번영, 종친회의 사업에 적극 협력했으며 역시 淸道金씨인 『大東輿地圖』의 제작자 金正浩의 행적조사도 벌였다.
  
  金씨들의 가구수는 5년간 증감이 없다. 자녀들이 시내에 직장을 얻고 분가를 해도 楊亭동이 부산의 교통중심가이기 때문에 거의 이사를 가지 않고 있다. 金씨 문중의 현대식 동족조직은 주식회사를 닮고 있다. 윤번제의 회장 밑에 총무와 8명의 이사가 있다. 이들 이사들은 각 지파(支派)의 堂內(8촌이내)를 대표한다. 감사도 있다. 간부들은 모두 40代. 권위보다 기능을 중시하는 변모된 동족부락의 특징이다.
  
  아무리 생활양식과 동족조직이 현대화됐다해도 가장 原初的인 토속신앙인 洞祭는 매년 정월 보름날에 엄격하게 치러지고 있다. 祭主는 8일 전에 매우 까다로운 조건을 붙여 金씨 문중에서 뽑는다. 제주는 목욕재계, 금욕하며 정성을 드리고 황영산(荒嶺山)에 있는 당산(堂山)을 청소하여 그날을 맞는 것이다. 이 부락제도 요즘엔 金氏문중의 전유물처럼 됐다. 마을의 평안, 주민들의 多産多福을 비는 부락제는 향토애와 단결심을 응결시키는 상징일 뿐 아니라 民俗의 보고이다. 부락제를 통해 주민들은 마음의 안정을 얻고 소속감을 되살린다. 그것은 사회병리학적인 측면에선 집단정신치료법인 것이다.
  
  이런 부락제가 72년 봄 새마을사업추진과정에서 미신으로 몰려 당산이 파괴되는 소동이 전국에서 일어난 적이 있었다. 日帝도 민족정기의 구심점을 파괴하기 위해 洞祭를 탄압한 적이 있다. 『전통적인 것은 비합리, 비능률적이다』는 획일적 사고방식은 지도층에서부터 제거돼야 할 것이다 대도시의 제일 번화가에서 우리의 토속신앙의식이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끈질기게 이어져 오는 현상에서 전통의 意義는 재평가돼야 마땅하다.
  
  淸道金씨부락의 入鄕祖는 종손인 金봉안씨(65)의 13대조인 金得仁. 그는 임진왜란이 터진 1592년 淸道에서 이곳으로 피난왔다. 그의 무덤은 이 마을에서 가까운 東萊鄭氏 문중 산인 草池산에 있다. 이것은 인연이 됐는지 金씨들은 鄭씨 문중과 자주 혼인했다. 金씨들은 『우리 집단에서 형무소에 다녀온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자랑한다. 조상과 체면 때문에 못된 짓을 하려고 해도 차마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동족부락의 공통특징이다. 同族에 대한 체면의식이 갖는 비행억제 효과의 결과인 것이다.
  
   門中土地의 現金化
  
  동족부락의 근대화는 문중 공유재산을 둘러싼 분쟁을 자주 촉발시킨다. 문중재산은 주로 통토와 임야인데, 이것들은 문중의 특정인물 앞으로 등기돼 있거나 등기인이 사망한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특정인물의 후손이 소유권을 주장하거나 소유권상속 또는 분할을 요구할 수 있는 소지가 크다. 도시의 동족부락들은 이런 분쟁을 막기 위해 땅을 처분, 기금으로 전환하려는 경향이다. 특히 구획정리사업 등으로 땅값이 갑자기 뛴 곳에선 문중토지를 팔면 巨金을 만들 수 있어 이런 現金化경향이 촉진되고 있다.
  
  부산시 南구 용호(龍湖)1동 開城王氏마을이 문중 토지 現金化의 「모델·케이스」다. 모두가 12촌 안쪽인 25호의 王씨들은 71년 1차 조사땐 문중토지 25호의 2만평을 갖고 있었다. 71~74년에 걸쳐 이루어진 이곳의 구획정리사업은 평당 1천원짜리 농토를 평당 최고 4만~5만원의 택지로 바꿔놓았다. 王씨들은 73년 문중토지 4천평을 팔아 장학기금 2천만원을 마련, 開城王氏 釜山派 이름으로 신탁등기했다. 王씨들은 그 이자로 매년 자녀들의 중·고·대학 입학금 전액을 매년 지급하고 있다. 문중의 길흉사 부조 時祀경비로 기금에서 염출하여 사실상 계(契)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길사(吉事)엔 쌀 1가마, 흉사(凶事)엔 쌀 2가마.
  
  開城王氏들은 지난 5년간 무서운 변혁을 겪었다. 구획정리사업으로 농지가 주거지역을 바뀐데 이어 불량주택 개량사업의 철거민들이 이주, 정책이주 지역을 형성했다. 龍湖동의 인구는 5년 사이 약 4배로 불어 3만1천여명. 한적한 갯가는 살벌한 신흥개발지로 변해 좀도둑, 살인, 폭행 등이 난무하는 치안 취약지대로 둔갑했다.
  
  王씨들은 5년전엔 80%가 농업으로 생계를 이어왔는데 지금은 농토를 팔아 구멍가게를 내고 집을 지어 전세방을 내줘 생활하는 사람들이 됐다. 영세농가에선 땅값이 오르기 시작한 초기에 논밭을 팔아 장사를 시작했다가 실패, 공장근로자나 날품팔이로 떨어진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71년 이전엔 龍湖洞長은 王씨문중과 또다른 동족부락인 尹씨문중에서 교대로 나왔다. 요즘엔 이런 영향력이 없어졌다.
  
  王씨들은 이 변화에 어떻게 대응했는가 그들은 먼저 문중조직을 이사회로 바꿨다. 19명의 이사들로 조직된 이사회는 기금관리를 비롯한 문중일을 토의 , 결정, 실지하고 1년에 한번 열리는 문중 총회에 보고한다. 71년엔 일반 동족부락처럼 長老밑에 별임(別任)을 두어 문중일을 맡기고 있었다. 이사회로 바뀐 것을 물론 기금관리를 철저히 하려는 의도이다. 과거엔 문중재산을 관리하던 사람이 이를 유용한 뒤 갚지 못하게 되자 이 부락을 떠난 일이 있었다고 한다. 문중의 분열을 막기 위해선 공유재산의 철저한 관리가 필수조건임을 많은 동족부락이 깨닫고 있는 듯하다.
  
  王씨들은 時祀를 종전엔 10月初丁日에 지냈다. 이번 2차 조사 결과 이것도 양력기준으로 변해 11월의 첫 일요일에 지내고 있다. 농사짓는 사람들이 대다수였을 땐 時祀는 아무날이라도 괜찮았지만 직장 가진 사람이 많아져 일요일이라야 많이 모인다는 배려에서다.
  
  王氏부락에서 5년동안 가장 변하지 않은 것은 洞祭. 9월 9일에 올리는 이 동제는 王씨나 尹씨들의 행사가 아니라 龍湖동 전체의 部落祭란 인식이 뚜렷하다. 경비를 추렴할 때도 龍湖동 본동네의 전가구를 대상으로 한다. 주로 나이 많은 사람들이 1가구당 30~1백원씩 성금을 낸다. 祭主도 동장이 되는데 동장이 비록 다른 10일 전부터 몸을 정하게 해야 한다.
  
  高麗창건자인 왕건(王建)의 후손인 王씨들은 입향조(入鄕祖)가 李朝의 역성혁명(易姓革命) 이후 全州李氏 들의 핍박을 피해 부산에 왔다고 말한다. 종손 왕채권(王采權)씨(69)의 10대조인 왕대봉(王大封)의 4대손인 태룡(泰龍)이 龍湖동으로 옮겼다. 王泰龍은 龍湖동에 처음 와서 先生하고 있던 파평윤(坡平尹)씨 문중의 처녀를 아내로 맞았다. 이 때문에 지금도 王씨들과 혼인을 않고 있으며 매우 사이가 좋아 한 집안처럼 왕래하고 있다.
  
  王씨는 尹씨들은 갯가에 살면서도 어업엔 전연 신경을 쓰지 않았다. 龍湖동의 대안(對岸)에 있는 南川동 사람들이 龍湖갯가까지 와서 해초듣는 것도 묵인했고 그들을 『생고기 배따먹는 사람들』이라고 멸시, 서로 혼인도 하지 않았다. 日帝시대 龍湖洞해안 어업권이 南川동 주민들에게 넘어가자 그제서야 王씨들은 윤씨들과 힘을 합쳐 일어난 어업권을 되찾았다.
  
  5년 전까지만 해도 王씨들은 全州李氏들과는 결혼않는다고 공언하고 다녔는데 요즘엔 그런 문제는 웃음으로 넘기고 있다. 문중理事 王윤호(51)씨는 동족의식을 깨우치기 위해 지난해엔 1백50만원을 들여 족보를 펴냈고 가문의 계통도를 인쇄하여 집안에 돌렸다고 말하면서 바깥사람들이 많이 몰려온 뒤엔 집안끼리 더 친밀하게 지낸다고 했다. 철거민 이주지역에선 범죄발생이 거의 없어 치안유지가 잘 되고 있다고 파출소에선 말하고 있다.
  
   땅의 침식과 갈등의 심화
  
  朴氏와 辛씨들이 박신박신 사이좋게 모여 산다고 해서 「박신(朴辛)마을」이라고 불리는 부산진구 학장(鶴章)동 1통. 5년 전엔 낙동강(洛東江)을 내려다보는 한가한 농촌이었던 이 마을이 이젠 확장된 사상(沙上)공단의 한복판에 갇혀버렸다. 하천을 사이에 두고 이 마을은 구획정리사업에 의해 공업지역과 주거지역으로 분할됐다.
  
  2백여년 동안 친하게 살아온 두 姓氏사이에 요즘 불화의 기운이 나타나고 있다. 밀양박(密陽朴)씨와 20여세대. 영산김씨(靈山金氏)20여세대는 매년 섣달에 뒷산에 있는 堂山과 마을 입구에 있는 골매기당(원뿔모양의 돌무지)에서 洞祭를 지내왔다.
  
  堂山 있는 임야는 朴씨문중의 장노 朴모씨(76) 소유였다. 그는 땅값이 올라가자 이 임야를 팔려고 내놓았으나 堂山이 있어 아무도 사려고 하지 않았다. 곤경에 처한 朴씨는 지난해 몰래 사람을 시켜 당산의 제각(祭閣)을 부숴버렸다.
  
  辛씨들이 이 사실을 알자 들고 일어났다.
  『옮기라고 했으면 옮겼을텐데 부수기는 왜 부숴?』-辛씨 문중을 비롯한 마을토박이들은 신성한 당산을 파괴한 朴씨를 처벌해 달라고 호소문을 관계기관에 돌리는 등 온 마을이 발칵 뒤집혔다. 朴씨와 함께 契(여행목적)에 들어있었던 동네노인들은 朴씨에게 그 동안의 불입금을 돌려주고 의절(義絶)한 뒤 자기네들끼리 놀러 가버리는 일도 벌어졌다고 한다.
  
  朴씨 문중에서도 朴씨의 행동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辛씨들이 거세게 공격해 오자 동족의식이 발동, 두 문중 사이가 벌어져 길에서 자나쳐도 외면해버리는 형편이 됐다. 젊은 사람도 아닌 한 동족부락의 지도층에 속하는 사람이 경제상의 이해득실 때문에 당산을 뜯어버린 이 상징적인 사건은 도시화의 물결에 휩쓸린 동족부락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朴辛마을에서 70~74년 사이 실시된 구획정리 사업은 동족부락의 존립바탕을 뒤흔들어 놓았다. 71년 1차조사 때 朴辛마을 주민들은 1백%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농토가 공단지역에 들어가 이제 농사로 생계를 잇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辛씨문중의 위토답(位土畓)도 없어졌다. 할 수 없이 金海에 位土畓만을 몇 마지기 다시 구입, 제사비용을 대고 있다. 구획정리사업은 朴辛마을의 50대 이상 노년층을 집단실직상태로 몰았다. 농사밖에 모르는 이들은 새 직장을 얻지 못해 요즘 경로당(敬老堂)을 중심으로 할 일없이 나날을 보내는 실정.
  
  평당 1천원에서 3만원으로 뛴 땅값도 동족부락에겐 큰 덕이 되지 못했다. 논 몇백평을 팔아야 10여평 남짓한 상점 하나라도 낼 수 있게 됐고 바뀐 환경 때문에 생활비가 엄청나게 든다. 사 썼던 분뇨를 이젠 돈을 주어야 버릴 수 있게 됐는가 하면 콩나물 채소까지 돈이 있어야 먹을 수 있다고 신두수(辛斗守)씨(73)는 한탄조다. 朴씨와 辛씨들 중엔 논밭을 처분, 집을 지어 사상(沙上)공단 근로자들에게 셋방을 내주고 사용료를 받아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다. 지난 5년사이 朴辛부락에선 10여호가 새 직장을 구해 시내로 나갔다.
  
  71년 1차 조사 때 辛씨 문중엔 「맏며느리契」가 있었다. 맏며느리들이 계를 조직, 어느 집안에 길흉사가 있으면 한꺼번에 몰려가 도와주곤 했다. 이 契도 74년에 없어졌다. 잘 모여지지 않더라는 것이다. 품앗이와 契 등 상부상조의 조직은 농경사회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농사가 없어지고 또 직업전환이 잘 되지 않는 어수선한 사회에서 계의 존속이 불가능해진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朴辛마을에서 동족의식이 해이되고 있는 까닭은 구심점이 돼야할 계층이 일찍 마을을 떠났기 때문인 것 같다. 71년 조사 때 벌써 朴씨와 辛씨 문중의 두 종손이 시내로 나가버렸음이 밝혀졌었고 노인들은 『좀 깬 사람은 모조리 나간다』고 푸념하고 있었다.
  
  이 부락의 선주자(先住者)는 朴씨들. 2백40여년전 입향조(入鄕祖) 박한방(朴漢芳)이 세웠다. 1백여년 뒤 辛씨들의 입향조 신치종(辛致宗)은 朴씨 가문에 장가들어 두 문중은 친해졌다. 지금도 서로 혼인을 하지 않는 것은 친척끼리란 생각 때문이다. 흐려지는 동족의식 속에서도 부락제(部落祭)만은 끈질기게 연명하고 있다. 지난해의 불상사로 당산제각은 없어졌지만 부락제는 당산나무 앞에서 올려졌었다. 동족부락들의 모든 조직과 의식중에서 가장 변하지 않고 쇠퇴하지 않는 것이 동제(洞祭)인 것이다.
  
출처 : 월간중앙
[ 2003-07-04, 15:5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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