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언론파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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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변의 시대에서 심각한 내부 진통을 겪고 있는 「제4府」의 진면목
  
  <1988년 11월 월간조선>
  
  편집국은 지금 몇 시인가
  
  질풍노도의 현대사를 헤쳐온 한국의 언론은 이제 자유 경쟁시대를 맞아 극심한 내부진통까지 겪고 있다. 올해 들어 신문지면이 하루 12면에서 16면까지, 올림픽 기간에는 32면까지 늘었다. 텔리비젼 방영시간도 크게 늘었다. 지난 4월말 현재 등록된 신문이 26개였던 데 대해서 지난 9월말까지 28개 새 신문이 등록을 마쳐 약 두 배로 늘었다. 주간·월간·계간 등 잡지도 지난해의 6·29선언 이후 약 9백개가 새로 등록했으나 반 이상이 등록 뒤 여섯 달 안에 창간호를 펴내지 못하고 있다. 급증한 언론사와 급증한 기자들과 함께 오랜만에 「사이비 기자 문제」가 다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올해 들어 부산일보, 문화방송, 서울신문, 경향신문, 제주신문, 경인일보의 사장들이 언론노조의 활동 때문에 물러났다. 부산일보, 경남신문, 문화방송에서는 파업이 일어났다. 기자들이 직선한 편집국장과 기자들의 추천에 의해서 임명된 편집국장이 나타났는가 하면 노조가 회사의 경영구조 개편에까지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곳도 있다. 우리 언론사 경영자들이 금기로 규정하고 있었던 노조는 지난 1년 사이 36개사에서 생겨나 전체 언론 종사자들의 절반인 약 1만1천명이 가입하였다. 이 노조는 「언론사내 민주화」운동의 주체세력이 되고 있다. 위계질서가 어떤 조직보다도 강했던 편집국 안에서 운동권 학생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와 격렬한 구호, 때로는 사물놀이패의 풍악이 터져 나오고 있다. 공개적으로 사장과 편집국 간부들을 비난·비판하는 일은 예사가 되었다.
  
  이제 한국언론은 정보기관의 간섭을 전혀 받지 않는 자유상태 하에 있다. 옛날 같으면 글쓴 기자를 불법 연행하여 닥달을 했을 군 관계 기사에 대해 군은 언론 중재신청을 통해 ㅑㅐ?요구하고 있다. 안기부·보안사·청와대 사람들은 『이 시대 최강의 파워 그룹은 언론이다』 『이제는 군사독재가 아니라 언론독재다』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언론에 아직도 공정하지 못한 보도가 나오고 있는 것은 권력의 압력 때문이 아니다. 언론사와 기자의 자질 및 양식 부족 때문이다. 한국의 언론은 지금 세 가지 전환을 동시에 겪고 있다. 권력으로부터 해방, 독과정 체제에서 자유경쟁체제로, 그리고 사내 민주화 운동. 이 세가지의 변화 속에서 한국의 언론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편집국의 시계는 지금 몇시인가.
  
  평화시의 군대가 언론?
  
  언론사 편집간부 출신의 한 정부요직 인사는 『정부에서 일하면서 두 번 놀랐다. 언론이 너무나 센 데 놀랐고, 보도가 너무나 정확하지 못한 데 놀랐다. 어느 때는 내가 기자였다는 것이 부끄러울 때가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한 중견 언론인 출신의 야당 정치인은 『야당은 언론에 보도되기 위해 정치활동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청와대의 한 간부는 『행정부는 의회와 언론이, 의회는 행정부와 언론이, 언론은 사법이 견제해야 균형이 잡히는데 사법이 언론 견제를 못하고 있어 언론은 지금 견제가 불가능한 괴물이 되고 있다』고 까지 말했다.
  朴鍾哲 고문치사사건 때 부검 의사였던 黃   박사는 『칼을 잘못 휘두르면 한 사람이 죽지만 펜을 잘못 휘두르면 여러 사람이 죽는다』고 했다.
  그리고 한 방송사 간부는 말했다. 『평화시의 군대는 언론이다』
  
  「권력의 시녀」라는 비난을 받을 때에도 한국의 언론은 비굴했을 망정 결코 약했던 적은 없었다. 독재시대라고 해서 언론이 무기체처럼 권력을 뒷받침하는 역할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급변하는 사회의 세력균형 속에서 언론은 그래도 생동하는 유기체로 존재했었다. 그 균형에 틈이 생길 때는 기민하게 치고 나왔다간 곧 숨을 죽이는 방책으로써 늘 막강한 힘을 유지하였다. 그러면서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기도 하였다. 언론은 진정한 「사회의 목탁」이었던 적도 없었고, 진정한 「권력의 주구」였던 적도 없었다. 언론이 「권력의 시녀」 역할을 맡도록 된 구도 속에서 독자적 파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경쟁과 영리」라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논리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좋은 예가 언론이 만든 역사의 전환점 朴鍾哲고문치사 사건이었다.
  
  『경찰에 큰 일이 났다지?』
  
  1987년 1월15일 오전, 중앙일보 사회부의 법조출입기자 申性浩씨(35)는 여느 때처럼 서울 서소문에 있는 검찰·법원청사를 돌아다니면서 일상적인 취재를 하고 있었다. 申기자는 평소에 「특종은 루틴 체크를 성실하게 하는 과정에서 걸린다」는 소신을 갖고 한 20군데의 부서를 매일 오전에 점검하는 일을 지난 6년간, 아파서 결근한 하루만 빼고 늘 되풀이 해 왔었다. 검찰청사 15층의 검찰수사관실에서 시작하여 그 건너편의 대검 중앙수사부 수사실, 12층의 중앙수사부 각 과장실, 10층의 대검공안부, 7층의 대검 형사 1, 2과, 5층의 서울지검 공안부·특수부를 점검한 뒤 서울형사지방법원 쪽으로 건너가 영장계에 들려 간밤에 떨어진 50_60건의 구속영장을 뒤지며 죄명이나 구속된 사람의 신분이 특수한 경우를 점검하고…
  
  이러한 과정에서 申기자는 이날 한 가지 희미한 꼬투리를 듣게 되었다. 한 검찰 관계자가 던진 한마디―『경찰에 큰일이 났다지』라는 말이 한국의 현대사를 크게 뒤흔들어 그 흐름을 바꿀 대특종으로 커지게 된다.
  
  지금도 7년째 법조출입을 계속하고 있는 申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은 제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죠. 저도 아는 척하면서 「경찰이 일을 저지를 것 같았어. 그동안 너무 경쟁적으로 수사를 하더군」이라고 맞장구를 쳤어요. 「대학생이라지?」하고 그 사람이 다시 물었습니다. 저는 경찰에서 대학생을 조사하다가 사고가 났다고 추리했습니다. 검찰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단편적인 정보들을 귀동냥하기 시작했지요. 오전 10시쯤 해서 대학생이 치안본부에서 조사를 받다가 죽었다는 것까지는 확인했으나 날짜, 장소, 이름 등 기사를 쓸만한 자료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정보를 일단 李斗石 사회부장에게 전화로 보고 했지요』
  
  李부장은 일선 사회부 기자들에게 비상을 걸었다. 申기자도 검찰부서를 왔다갔다 하면서 확인작업을 더해갔다. 한 사무실에선 죽은 학생이 서울대학생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다른 사무실에선 14일에 연행돼 조사를 받았다는 정보를 얻었다. 죽은 학생이 언어학과 3학년이라는 사실까지 밝혀냈다. 申기자가 허리에 차고 있던 비상 호출기는, 사회부장이 찾는 삐삐 소리로 부산했다. 부장에게 전화를 걸면 마감 시간이 지났는데도 일선에서 이 사고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며 빨리 죽은 학생의 신원을 확인하라고 독촉하는 것이었다. 1판 마감시간인 오전 10시 40분을 넘겨서 申기자는 드디어 죽은 이가 朴鍾○라는 것까지 알아내고 이를 부장에게 알렸다.
  
  경쟁 붙으면 통제 불가능
  
  서울대학교를 맡은 기자가 학적부를 뒤져 朴鍾哲이라는 이름을 찾아냈다. 학적부에 적힌 부산의 집 전화번호로 확인을 시도했다. 번호가 바뀌었는지 연결이 되지 않았다. 부산에 주재하고 있던 중앙일보 기자를 시켜 집주소로 뛰게 하였다. 申기자가 기사를 전화로 부른 것은 11시30분쯤이었다. 이 기사 끝에 申기자는 이런 대목을 덧붙였다. 「경찰은 쇼크사라고 검찰에 보고 했다. 그러나 검찰은 朴군이 수사기관의 가혹행위로 인해 숨졌을 가능성에 대해 수사중이다」 이 기사는 가두판매판인 1판의 인쇄 도중, 윤전기를 세우고 급히 집어넣어 만든 이른바 1·5판의 사회면에 2단 제목으로 실렸다.
  
  『저는 그때가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사회면의 준톱 정도로는 실릴 줄 알았어요. 그날 회사에 들어갔더니 부장이 회의실에 불러놓고, 「오늘 우리가 세계적인 특종을 했다」고 하더군요. 다른 선배들도 「두고 봐라. 이 사건은 한국판 워터게이트 사건이 될 것이다」고 했습니다. 저도 이 사건이 심상치 않게 진행되리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커질 줄은 몰랐어요』
  
  1월16일자 조간이 이 특종을 받고 다음날 동아일보가 사회면 준톱 기사로써 사인을 물고문 쪽으로 몰고 갔다. 이 사건은 신문지면을 뒤덮기 시작했고, 그것은 이 사건의 수사와 정치쟁점화를 선도하였다. 중앙 6개 신문은 사건발생 4일째인 17일엔 51건, 20일엔 1백69건, 21일엔 2백25건의 朴군 관련기사를 실었다. 21일의 중앙 6개지 지면 가운데 약 38%인 2만3천2백53행의 기사가 이 사건 관련 보도였다. 당시 문공부 홍보조정실의 주요 간부였던 한 공무원은 이렇게 말했다.
  
  『큰 사건이 한번 터지면 언론통제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은 1982년의 이철희·장영자 사건과 제3공화국 비화 경쟁 때도 입증되지 않았습니까. 기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경쟁체제로 돌입하고, 경영주들이 독자의 여론을 의식하게 되면 정부에서 아무리 압력을 넣어도 통하지 않습니다. 박종철군 사건때 우리 부탁을 들어준 것은 고문 경찰관들이 대공수사요원이니까 사진을 쓰지 말아달라는 이야기 정도였어요. 이럴 때 먹힐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언론보도를 일시에 중단시키는 것인데, 언론사 문을 전부 닫게 하지 않는 이상 무슨 수로 그러겠습니까』
  
  사회 통념의 先占이 중요
  
  아무리 용기 없는 언론 경영자라도 『이 사건 보도에서 지면 부수가 떨어진다』는 현실 앞에서는 용기를 내지 않을 수 없다. 때로는 돈이 매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 기자들의 경쟁의식과 경영자들의 영리의식, 그리고 국민들의 분노가 3위1체로 되었을 때는 잠시나마 권력이 무력화 되었던 것이다. 당시 안기부장이었던 張世東씨는 최근 기자에게 『정치에서는 사회적 통념을 누가 선점(先占)하느냐가 승패를 가르더라』고 했다. 朴鍾哲군 고문사건 보도는 朴군을 죽인 것은 몇 경찰관이 아니라 부도덕한 독재정권이라는 사회적 통념을 선점(先占)하였다. 즉, 단순한 인권적 사건이 아닌 정권적 차원의 대사건으로 커진 것이었다. 이런 의미확대를 이해하지 못한 당시의 관계기관 책임자들은 간부 언론인들에게 『이 사건을 수사체질 개선의 계기로 삼겠다』고 선처를 당부하곤 했었다. 그때는 이미 수사차원의 사건이 아니었는데도.
  
  제2차 朴鍾哲사건인 축소·조작사건이 지난해 5월에 터졌을 때도 동아일보 사회부의 특종은 이 사건을 1차 사건 못지 않게 확대시켜 6월 사태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5월21일 서울지검은 고문경찰관 3명을 추가 구속하면서 「더 이상의 범인은 없으며, 치안본부 대공 간부들이 범인 축소조작에 가담한 사실이 드러나지 않아 이 사건은 수사 종결한다」고 발표했었다. 다음날 동아일보는 1면 톱 기사로 「관련 상사 모임에서 축소 조작 모의」란 제목으로 「박처원 치안감, 유정방 경정, 박윤택 경정이 축소 조작에 개입했고, 유 경정은 심경 변화를 일으킨 조한경 경위의 입을 막으려고 애썼다」는 사실을 보도, 검찰의 축소수사 방향을 뒤엎었던 것이다.
  
  지난해 4월21일 경향신문 사회부 兪珍五기자의 특종(범양 朴健碩회장 자살은 외화도피와 관련돼 있다는 내용)은 범양사건을 정경유착의 한 표본적 사례로 키우는 데 기여했고, 지난 3월19일 한국일보의 김포공항 출입기자 李鐄씨가 쓴 「새마을 全敬煥 돌연 출국」 특종은 이 사건을 수사차원으로 끌어올리는 중요한 계기였다. 지난 8월15일의 남북학생회담 기도를 앞두고 조선일보는 13일자 조간 사설에서 「두 야당은 보수정당인가」란 제목으로 학생들의 분별없는 통일운동에 대해서 분명한 태도를 밝히지 않고 있는 평민, 민주당을 비판했다. 이 날자 동아, 중앙일보도 비슷한 취지의 사설을 실었다.
  
  다음날 야당은 학생회담 자제를 촉구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격동하는 현대사의 순간순간에서 한국의 언론이 이처럼 결정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은 언론 고유의 기능, 즉 사실보도를 통해서였다. 「공정보도를 다짐한다」는 기자들의 선언문은 여러번 나왔지만 공정보도의 실천은 치열한 경쟁의식 속에서 우러난 사실보도로 이루어졌다. 긴박한 현장에서 한 젊은 기자가 캐낸 한 줄밖에 안 되는 사실―「대학생이 조사 받다가 죽었다」―은 독재정권의 행로를 바꾸어 놓았다. 군인은 총을 가질 때 강하고, 기자는 현장에 있을 때, 또 사실을 가질 때 「평화시의 군대」처럼 강한 것이다.
  
  申性浩기자는 朴鍾哲군 사망 특종을 한 데 대해서 단 한번도 사명감이나 정의감 같은 것을 내세우지 않고 『루틴체크를 하다보니까…라면서 겸손해 하였다. 현장을 뛰는 기자로서 그 직업의식에 철저할 때 언론자유나 민주화에의 기여는 아주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것임을 申기자는 입증하고 있다. 구태여 특종이야기를 소개한 것은 언론자유는 결국 기자와 기사를 통해서 실천되는 것이며, 이 저널리즘의 원점을 중심으로 하며 모든 문제가 수렴되어야만 생산적인 진통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신뢰도 높아진 언론, 그러나…
  
  지난 4월 한국언론연구원이 전국의 유권자 1천2백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선거와 언론―민디어의 영향과 신뢰도」에서 우리 언론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도는 6·29선언 이후 눈에 뜨이게 높아졌음이 밝혀졌다. 매체별 신뢰빈도를 보면 신문은 6·29선언 이전에는 37.4%였는데 그 이후에는 45.4%로 텔리비전은 23.4%에서 25%로 높아졌다는 것이다. 「아무 매체도 안 믿는다」는 대답은 23.2%에서 13.8%로 거의 반감되었다.
  
  언론 독재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오늘의 한국 언론이 강해 보이는 것은 국민들의 신뢰도가 높아진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한국 언론의 신뢰도가 높아진 데는 「언론은 장악할 수도 없고, 장악하려 해서도 안 된다」는 6·29선언의 영향과 언론사의 자체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
  
  지난해 9월 「월간조선」과 「신동아」의 李厚洛 증언 기사에 대한 안기부의 불법적인 제작방해사건은 6·29선언 뒤의 첫 힘겨루기였다. 이 게임에서 언론은 「국익의 여부는 언론이 스스로 판단한다」는 원칙을 관철시켰다. 그 뒤로는 정보기관의 강제개입은 사라졌었다. 국민이 언론을 권력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믿을 때 언론 보도를 믿고 따른다는 것을, 그리하여 정부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盧泰愚정권은 최근의 학생운동과 노사분규에서 실감했다고 한다.
  
  그러나 높아진 신뢰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언론은 나쁜 관행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여러 군데서 남기고 있다. 중앙경제일보 吳弘根 사회부장이 지난 8월6일 오전에 테러를 당했다. 이 기사는 그날 석간신문과 다음날 조간지, 그리고 어떤 통신과 방송에도 나지 않았다. 중앙일보 측에서 각 사회부장들에게 전화를 걸어 기사게재의 보류를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중앙일보 측에선 테러가 개인적인 사연에서 일어난 것일 때의 망신을 걱정했던 것 같다.
  
  8월8일에 중앙일보는 서울시경 출입 기자를 통해서 각사 사회부장에게 기사를 실어도 좋다는 통보를 했다. 그 날자 석간에서 경향신문은 이 기사를 싣지 않았고 동아일보는 1단으로, 중앙일보는 사회면 준톱으로 다루었다. 한겨레 신문을 제외한 3개 조간지도 1단 취급을 하였다. 吳부장이 피습되기 하루 전에 있었던 MBC 텔리비전 뉴스방송 중 괴청년 난입사건의 경우, 다음날 각 신문은 1면기사, 사회면 준톱, 박스기사 등으로 크게 취급했었다. 吳부장 피습 뒤 범인들이 검거되기까지 16일 동안 중앙 7개 신문에 실린 관련기사 건수는 83건 이었는데 대해 범인이 검거된 뒤 7일간에는 무려 4백50건이 실렸다.
  
  발생초기의 이런 소극적 보도 태도에 대해서 동아일보의 국방부 출입 육정수(陸貞洙)기자는 동아일보 사보에서 이렇게 썼다. 「당시 경찰로서는 힘이 부친 나머지 더 이상 어쩌지도 못하는 입장인 듯 했다. 경찰은 그렇다 치고 언론이 너무 『강 건너 불』보듯 했다는 자성이 앞선다. 이 시기에 언론이 침묵을 깨고 집중포화를 퍼부었어야 옳았다. 아무리 민주화 되어 간다고 하나 역시 거대한 군대의 실세 앞에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의적 침묵이 정권연장 도와?
  
  그러나 이 사건보도의 가장 큰 문제점은 우리 언론사가 동업사의 부탁에 의해 이토록 엄청난 사건의 발생보도를 48시간이나 보류시켰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 이유가 수사협조나 공익차원이 아니라 개인적 이해관계의 보호에 있었다면 더욱 납득할 수 없는 것이다. 정부가 국익보호를 앞세워 특정 기사의 보류를 요청해 올 때 거절할 명분이 없어진다. 지난 84년 2월3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에서 발생한 KBS직원 아들 피살사건 때도 언론이 이를 보도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추적 60분 제작 담당 프로듀서의 아들이 폭로성 프로에 대한 보복으로 피살되었다는 소문으로 번져 한동안 강남 일대를 떠돌아다닌 적도 있었다.
  
  한 시민은 『우리나라 기자들은 스스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했다. 기자는 사실보도의 의무를 가진 사람이지 사실보도의 선택권을 쥔 사람은 아니다. 기자니까 기사를 자의로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권력자가 권력을, 경제인이 돈을 멋대로 쓸 수 있다고 믿는 생각과 통하는 것이라고 이 시민은 비판했다. 우리 언론이 권력의 압력을 받지 않았는데도 알고도 안 쓴 기사는 숱하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 언론은 여론조사를 독자적으로 실시했고, 다른 기관의 조사결과도 알았지만 이를 보도하지 않았다. 그것은 盧泰愚후보의 당선을 크게 도와주었다는 것이 한국 갤럽 朴武益소장의 얘기였다.
  
  『여론조사에서 노태우 후보의 우세가 확실한 데도 이를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양김씨는 서로 자신 있다면서 단일화를 이루지 못했고, 국민들도 유리한 후보를 찍어 표를 몰아주는 선택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론조사가 발표되면 1위, 2위 차는 좁혀진다는 것이 관례로 돼 있는데, 이런 점에서도 노후보는 언론의 침묵, 그 덕을 봤어요. 국민들은 여론조사를 통해서 선거과정을 투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선거가 밤중에 보물찾기 하듯, 누가 유리하고 불리한지 모르는 상황에서 깜짝 쇼처럼 진행되어서는 안됩니다』
  
  지난 4월 언론연구원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조사대상자의 약 80%는 사전 여론조사의 발표가 투표에 영향을 끼친다고 답하면서도 약 54%(반대 32%)는 그것이 공개돼야 한다고 답했었다. 지난해 한국의 언론들은 날마다 양金씨가 단일화하지 못한다고 비난을 퍼부었으나 당위론만 외칠 뿐 누구 쪽으로 단일화해야 한다는 소신을 밝힌 언론사는 단 한 곳도 없었다. 어느 신문의 한 논설위원은 『누구 쪽으로 단일화하는 것이 유리한지는 여론조사를 통해서뿐 아니라 상식선에서 이미 확실해져 있었지만 지역감정이 두려워 그 사실을 밝힐 수 없었다. 언론이 다같이 소신을 밝히고 자료를 공개했다면 단일화와 정권 교체는 이루어졌을 것이다』고 말했다.
  
  지역감정이 진실보도 저해
  
  대통령선거 뒤 야당과 재야에선 컴퓨터 조작에 의한 개표부정설을 들고 나왔다. 개표과정을 취재한 기자들은 컴퓨터 부정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훤히 알고 있으면서도 대부분의 신문은 딱 부러지게 「컴퓨터 부정 불가능론」을 펴지 못했다. 부정을 주장하는 쪽의 견해와 방송국 측의 반박을 소개만 해줄 뿐이었다. 어느 동물이 개임이 명백한 데도 「ㄱ씨는 늑대라고 주장하고 ㄴ씨는 개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공평하게 보도해 놓는 『우리는 판단을 독자에게 맡긴다는 언론 본연의 임무를 다했다』고 자위하는 꼴이었다.
  
  지난 총선 뒤로는 어느 야당도 더 이상 컴퓨터 부정설을 들고 나오지 않았다. 컴퓨터 부정설은 총선의 득표 전략으로써 소모되었기 때문이다. 20세기 후반에서 컴퓨터 부정설 같은 허위가 그토록 유통될 수 있는 나라라면 진정한 언론이 살아 있는 곳이라고는 볼 수 없을 것이라고 한 논설위원은 말했다.
  
  외국 언론에 全斗煥 당시 대통령이 보잉 737 전용기를 2대나 구입하여 성남비행장에 두고, 일해재단과 지하통로로 연결시켜 두었다는 보도가 나자 국방부는 전용기는 한 대뿐이며 지하통로는 없다는 발표를 했었다. 한국 언론에서는 「전용기는 한 대냐, 두 대냐」하는 기사를 많이 다루었다. 이 문제도 각 사의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전용기는 한 대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全씨를 변호하는 것으로 보일까 저어하여 침묵한 경우였다.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그 전용기에 자주 동승, 취재한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뉴욕 타임즈의 한 원로기자는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사람이 있으면 서쪽에서 뜬다는 사람도 찾아 보아야 하는 것이 신문기자의 의무다』고 말했었다. 언론을 여러 다른 의견들이 모이는 광장으로 보고, 소수의견이 없으면 찾아서라도 이견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는 미국 언론의 전통과, 세론을 의식하여 정당한 소수 의견까지 봉쇄하는 한국 언론의 관행 사이에는 지적 용기의 기준 차이가 크다는 것이 한 논설위원의 지적이었다. 이처럼 한국의 언론은 권력 이외에도 양 金씨, 지역감정, 세론이란 벽에 부딪쳐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을 국민들에게 알리지 못하는 취약점을 갖고 있다. 남북 분단이 진실의 분단을 결과하듯 지역감정도 때로는 진실의 은폐를 부르고 있다. 언론자유는 권력으로부터의 해방으로써만 보장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모든 성역으로부터 해방일 때 이루어지는 자유일 것이다.
출처 : 월조
[ 2003-07-04, 16:0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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