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하군 살해범이 면죄부를 받는 운명의 그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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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죽었다가 살아 난 가짜 '진범' 탐방기 - 나는 꼭두각시 춤을 추었다
  
   드디어 찾은 정 대범 씨
  
  내가 정 대범 씨의 사는 곳을 알게 된 것은 지난 8월22일이었다. 서둘러 지급 전보를 쳤다. '전화 요망.'
  전보 배달원은 강서구 신정 2동 78의 2번지엔 수백 세대가 살고 있어 통 반을 모르면 찾기가 매우 어렵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최선을 다해 보겠다고 하더니 몇 시간 뒤 정 대범 씨 주소지의 관할 통장에게 전보를 전했다는 연락이 왔다. 한 시간쯤 뒤 전화가 왔다. 정 대범 씨의 어머니였다. '왜 대범이를 찾느냐!'고 따지는 것이었다. 나는 15년 전의 사진을 연상했다. 한복을 입고 아들이 선 법정에 나와 '이 사건은 조작이다'고 호통치는 장면을 찍은 사진, 젊고 후덕한 인상의 중년 부인이었는데 전화 목소리는 불안에 찬 할머니의 음성이었다. '대범씨를 그저 잘 아는 사람이다'는 나의 말에 대범씨 어머니는 '아들이 오면 전화를 걸도록 하겠다'고 하며 전화기를 놓았다.
  
  이틀을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 또 전보를 쳤다. 또 대범 씨 어머니의 전화가 왔다. '대범이는 오늘 막 강원도로 일하러 떠났는데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강원도에서 편지가 오면 주소를 알아 나에게 연락해 주겠다고 했다. 한 20분 뒤 이번엔 대범 씨의 아내가 전화를 걸었다. 시어머니로부터 얘기를 전해 들은 듯했다. '왜 그러느냐?'고 불안스레 다그쳐 물어도 속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하게 되자 당장 나를 찾아 오겠다고 했다.
  
  그날 저녁7시께 30대 아주머니가 조심스럽게 나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대범 씨의 아내였다. 전북 완주가 고향이라고 했다. 대범 씨가 군에서 제대한 직후인 지난 '71년 1월에 결혼, 지금은 1남2녀를 두고 있다고 했다. 대범 씨는 용접공으로 일하?있는데 고정된 직장이 없고 하청 업주를 따라 지방의 큰 공사장으로 자주 돌아 다닌다고 했다. 근하 사건 때문에 대범 씨를 한 번 만나 보고 싶었다고 했더니 대범씨의 아내 김 부순 씨(31)는 안도하는 낯빛을 보였다. 김씨는 내가 다른 골치 아픈 문제로 내가 전화질을 한 게 아닌가 하고 걱정을 태산같이 한 모양이었다.
  
  나는 '김 기철 씨는 왜 요절했나?'가 실린 '81년 10월호 '마당'한 권을 김씨에게 주었다. 다음날 하오 대범 씨의 어머니 김 성순씨(55)가 다시 전화를 걸어 왔다. '어제 며느리한테서 얘기를 들었고 지금 막 그 책의 기사를 다 읽었다'고 했다. 목소리에선 경계심이 사라져 있었고 '눈물이 나서 견딜 수 없었다'는 말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언제 한 번 놀러 오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두 번 죽었다가 살아 난 사나이의 집으로 초대장을 받은 것이었다.
  
   스물한 살의 살인마 배역
  
  정 대범 씨는 이 해괴한 근하 사건의 드라마에서도 특이한 배역을 맡았었다. 그는 군 복무중 체포돼 근하 군의 가슴에 칼을 꽂은 바로 그 살해 하수범으로 기소되었다. 그 때 나이 스물한 살. 정씨는 이 드라마의 우등생이었다. 현장 검증에선 수사관들이 이래라 저래라 시키기 전에 스스럼 없이 범행(?)을 재연했다. '저런 뻔뻔한 놈들은 코를 꿰어 끌고 다녀야 한다'는 구경꾼들의 욕설을 가장 많이 듣기도 했다. 범행 재연을 거부하는 김 기철 씨와 최 형욱 씨에겐 '비겁하게 지금 와서 발뺌을 해!'라고 추궁을 하기도 했다. 그는 황 덕수 씨의 수기에서처럼 기자들 앞에선 뉘우침 뒤의 정의감에 불타는 열변을 널어 놓았다.
  
  정씨는 재판이 시작되면서부터 범행을 전부 부인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1심의 사형선고를 면할 수는 없었다. 그는 군인이었으므로 군사 법정에서 분리 재판을 받았다. 2심 군재가 열리기 전 대구 고법이 김 기철 씨 등 민간인들에게 무죄를 선고, 정 대범 씨도 같은 선고를 받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고등군법회의는 또 다시 정씨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똑같은 사건에 대해 민간 재판은 무죄, 군사 재판은 사형을 선고한 사례는 한국 재판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대법원이 김 기철 씨등 민간인에게 무죄 확정 판결을 내린 뒤에야 정씨도 무죄 판결을 받을 수 있었다. 정씨는 근하 사건 피고인들 중 가장 긴 1년9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그리고 다시 군에 복귀, 지난 '71년1월에 만기 제대를 했다. 옥살이 기간엔 진급이 없었으므로 일병으로 제대했다.
  
   15년 만에 털어 놓은 사연들
  
  정씨의 셋방과 정씨의 어머니 집은 칼산이라고 불리는 신정2동의 야트막한 야산 비탈에 있었다. 이른바 불량 주택들이 다닥다닥 성냥곽처럼 붙어 있는 마을, 간선 도로에서 약 2킬로미터쯤 떨어진 이 후진 마을의 주변엔 채소, 과일밭이 있어 농촌 분위기까지 풍기고 있었다. 나는 정씨의 어머니를 찾아 갔다. 방 한 칸, 부엌 한 칸, 손바닥만한 마루가 붙은 열 평 남짓한 집이었다. 사진을 통해 낯이 익은 김 성순 할머니는 내가 마루에 엉덩이를 붙이자 마자 터진 봇물처럼 이야기를 쏟아 놓기 시작했다.
  
  그 동안 마땅한 말 상대가 없어 가슴에 쌓아 두기만 했던 사연들을 줄줄 외우듯 털어 놓았다. 젊었을 때는 상당한 미모였음을 암시해 주는 김씨는 연방 기침을 해 대었다. 천식이라고 했다. '그 사건 때문에 심장도 약해졌다. 자그만 일에도 가슴이 울렁울렁하며 자주 놀란다'고 했다. 비탈을 오르내리면 숨이 차다는 김씨는 허리가 벌써 굽고 있었다. 약 두 시간쯤 지나서 정 대범 씨가 나타났다. '강원도로 갔다'는 건 사실과 달랐다. 그의 얼굴도 나는 단박에 알아 볼 수 있었다. 나는 근하 사건을 직접 취재한 적은 없다. 사진이나 기사를 통해 상상해본 정씨의 인상은 유도와 합기도 유단자이며 '깡다구'가 있고 날렵한 청년이었다. 이날 내 앞에 등장한 서른여섯 살의 정씨는 짓눌리고 찌든 인상을 주었다. 방금 일터에서 돌아 온 탓만은 아니었다. 말투는 느릿느릿했다.
  
  표현력이 약한 그는 꼬치꼬치 묻는 나의 질문 앞에서 자주 말머리를 잊었다. 키는 작지만 근육질의 대범 씨는 '비가 오는 걸 하루 전에 아는' 신경통 환자이기도 했다. 물론 그 책임은 수사와 옥살이에 있다고 했다. '이렇게 털어놓고 이야기를 하는 건 그 사건 뒤 처음이다'고 정씨는 말했다. 옆 자리에서 정씨의 어머니와 아내도 정씨가 그처럼 속을 풀어 놓은 게 신기한 듯 우리의 이야기에 숨을 죽이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정씨는 가끔 '그 놈의 새끼들'이니 'xx!'하고 욕을 하곤 했지만 대체로 담담하게 15년 전을 회상했다.
  
  정씨의 세 아들 딸과 이웃에 사는 정씨의 동생까지 방에 둘러 앉아 평소엔 말이 없는 그의 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밤11시까지 듣고 싶은 얘기를 거의 끌어 낸 나는 사진 촬영 약속을 하고 물러났다.
  
  사흘 뒤 사진 기자와 함께 정씨를 다시 찾아 갔다. 정씨의 표정은 다시 굳어 있었다. 김 성순 씨가 말했다. '선생님이 다녀 가신 날 밤에는 나도 꼬박 뜬눈으로 밤을 세웠답니다. 새삼 가슴속이 부글부글 끓어 오르고 분통이 터지는 거에요. 대범이도 속에 들었던 것을 다 뱉아 놓았으면 시원해야 할 텐데 되려 마음이 편하지 못한 것 같아요.' 그래도 정 대범 씨는 일터(철물 공장)와 집에서 사진 촬영에 협조를 해 주었다. 원래부터 남에게 싫은 소리를 못 하는 사람 같았다.
  
  요절한 김 기철 씨와 비슷한 그런 순덕이,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희생물이 되기에 딱 알맞은 그런 사람 같아 보였다. '제 일자리는 변변히 찾지 못하면서 남을 취직시키는 데는 선수'라고 아들을 평한 김 성순 씨는 그래서 따르는 동네 젊은이들이 많다고 했다. 대범 씨의 아내에 따르면 정씨는 최근 여덟 달쯤 창원의 한국 중공업(주)공장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무리한 지출을 하여 큰돈을 모아 오지 못하게 되자 가족들 볼 면목이 없다고 집으로 돌아 오지 않고 다른 지방의 일터로 떠나려고 해 남편을 어르고 달래어 귀가시키는 데 애를 먹었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가상 재판
  
  정씨 집에서 사진을 찍은 다음날 나는 인천의 황 덕수 씨를 서울로 올라오게 했다. 그날밤 10시쯤 나와 황씨는 정씨 어머니 집으로 쳐들어 갔다. 김 성순 씨는 손녀를 보내 아들을 데려 오게했다. 10분쯤 뒤 반바지 차림의 대범 씨가 눈을 비비며 슬리퍼를 끌면서 들어 섰다. 대범 씨는 자고 있다가 나온 것이었다.
  '야, 오랜만이다.'
  황씨는 단번에 말을 놓으며 손을 내밀었다. 대범 씨도 그 손을 받아 악수를 했지만 황씨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우리는 그 집을 나와 비탈길 옆 구멍 가게로 자리를 옮겼다.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재꼈다. 정씨의 어머니도 걱정이 되는지 따라 내려왔다.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되었다.
  
  황씨는 마치 피의자를 심문하는 검사처럼 정씨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정씨는 덤덤하게 설명을 해 나갔다. 나도 황씨의 질문 사이로 보충 질문을 했다. 정 대범 씨는 두 사람의 집요한 질문을 처리해야 할 입장이었다. 나는 문득 며칠 전에 보았던 연극 '신화 1900'생각을 했다.
  
  무죄 석방 뒤 정신병자가 된 김 기창을 치료하기 위해 의사와 작가가 정신병동에서 벌이는 가상 재판. 김 기창은 자신이 겪었던 억지 수사와 재판을 다시 경험하도록 강요받는다. 사이코 드라마식 치료란 이름 아래서.
  
  황씨와 나는 정 대범 씨에게 그 같은 '체험의 재생'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밤 12시가 되자 가게문을 닫아야 하게 되었다. 우리는 바깥으로 나와 가게 앞의 긴 나무 의자에 걸터 앉아 이야기를 계속했다. 대범 씨 어머니는 길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말 참견을 했다. 어둠 속에서 모기들이 달려 들었다. 드문드문 행인들이 지나치며 우리의 좌담 광경을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우리의 목소리가 높아지면 대범 씨 어머니는 '동네 사람들 잠 깨겠다'고 말렸지만 대화에 열중한 세 사람은 들은 척만 할 뿐이었다.
  
   때리고 어르고 달래고 술 먹이고 돈 주고
  
  황 덕수:너는 어째서 근하 사건에 말려 들었나?
  정 대범:모든 게 구 영근이한테서 비롯되었어. 난 고등학교 다닐 때 구 영근이가 사범으로 있던 유도 도장에서 유도를 배웠어. 기골이 장대한 구 사범은 그 때 6단이었지. 나는 그때 한창 실력이 오르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구 사범이 아니면 상대할 사람이 없었어. 그래서 저절로 친해졌는데, 그것이 그런 인연이 될 줄이야…. 고등학교를 졸업한 무렵 우리는 동대신동에서 밀양으로 이사를 갔어. 나는 가끔 부산으로 내려와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우리가 셋방살이 하던 집에서 며칠 묵고 가기도 했지.
  
  황 덕수:근하 사건으로 그 전에 조사받은 적이 있었나?
  
  정 대범:한 번 있었지. 그 때야 동대신동이나 영남 극장 근방에서 좀 논다는 아이들치고 경찰에 안 붙들려간 사람 있었나? 밀양 집에서 서부 경찰서에 연행돼 1주일쯤 뭇매만 맞고 나왔지. 형사들은 무조건 때리면서 '불어라'불어라'했지만 불 게 있어야 불지. 형사들은 나 혼자 여관방에 자게 하고 다음날 아침에 경찰서로 오도록 하곤 했는데 나는 바보처럼 달아나지도 않고 시키는 대로 했어. 아침마다 얻어 맞으려고 경찰서로 출근하는 거였지. 그런 바보스러운 정직 때문이지 무혐의로 풀려 났고 얼마 안 있다가, 그러니까 '68년 3월에 논산 훈련소에 입대했어.
  
  황 덕수:훈련소에서 붙들려 왔지?
  
  정 대범:훈련을 다 받고 부대 배속을 기다리고 있는데 헌병들이 오더니 나에게 수갑을 채우고 지프에 태우더군. 그 자리에서 구 사범을 보았어. 난 영문도 모르고 부산으로 끌려왔단 말이야.
  
  황 덕수:나는 그 때 널 만나러 논산으로 갈 뻔했어. 구 사범이 날 보고 이렇게 지시하는 거야. 논산 훈련소에 들어 가게 해 줄테니까, 거기서 대범이와 싸워 같이 영창에 들어 가라. 함께 감방에 있으면서 대범이와 친해져 근하 사건에 대해 물어 보라는 거였어. 그래서 입대 준비를 하고 있는데 너가 끌려왔더군.
  
  조 갑제:그런데 왜 자백을 하게 되었죠?
  
  정 대범:난, 말입니다. 모 수사기관에 먼저 끌려 가 뭇매를 맞기 시작했어요. 한두 사람도 아니고 십여 명이 빙 둘러 서서 날 주어 패는 거에요. 다른 사람이 고문 받는 현장도 보여 줍니다. '너 저렇게 병신되고 싶니?'하는 겁니다. 그래도 난 부인을 했지요. 그런데 왠 키 큰 사나이가 들어오더니 날 보고 '군대에서 욕 봤지'하면서 다정하게 대하지 않겠습니까? '당신 누구요?'하니까 '자네, 날 모르나?'고 능청을 떱디다. 그게 바로 김 금식이었답니다. 난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어요.
  
  제가 사회 경험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감방 경험이 있습니까. 철 없는 어린아이와 마찬가지였죠. 훈련소를 갓 졸업한 때라 배는 오죽 고플 땝니까? 얻어 맞고 배고프고 무섭고 이런 상황에서 구 사범이 어르고 달래는 거에요. 시키는 대로 하면 징역도 조금만 주겠다. 감방에서 군대 생활하는 셈 치면 될 것이다. 그런 뒤에는 평생 잘 먹고 살 수 있도록 보장하겠다. 이러는 거였습니다. 금식이도 옆에서 '내가 하는 대로,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고 한수 거들어 줍디다. 그리고는 맥주를 먹이는 거에요.
  
  그 때 맥주 마시기가 그렇게 쉬웠나요. 맥주에, 좋은 음식에, 그리고 김 태현 검사는 수시로 저에게 용돈을 주었지요. 헌병대 감방에 있으면서 내 호주머니에선 돈이 떨어진 적이 없었어요. 그렇게 날 위협하고, 삶아 놓고, 술 먹여 놓고, 그래서 나의 마음도 붕 떠 있을 때 그들은 부산 지검의 김 검사 사무실로 부러 내 신문 조서를 받았습니다.
  
  그것도 꼭 밤에, 잠이 퍼 부을 때 말입니다. 난 무조건 예, 예, 했지요. 이렇게, 저렇게 된 게 아니냐고 물으면 예, 예, 너가 이렇게 하고 금식이가 저렇게 했지, 하면 예, 예, 그런 식이었어요. 또 예, 예만 하면 되는 식으로 묻습디다. 그 때의 신문 조서를 보면 아시겠지만 저의 진술 내용은 앞뒤가 안 맞고 앞에 받은 것과 뒤에 받은 조서 내용이 틀려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제가 근하 사건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신문 기사 읽은 전도인데 자백을 잘하려 해도 뭐 아는 게 있어야죠.
  
  저는 꾸벅꾸벅 졸면서 신문에 응했어요. 나중엔 그것도 견딜 수 없어 수사관이나 검사에게 당신들이 적당히 써 놓으면 나중에 내가 도장 찍어 줄 터이니 잠이나 좀 자자고 하면서 코를 곤 적도 있습니다. 그 때는 모든 걸 포기한 상태였고 어서 빨리 그 자리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생각뿐이였죠. 수사는 처음부터 조작이었습니다.
  
  조 갑제:검찰이 최 형욱 씨와 김 기철 씨를 붙들어 와 대질시켰을 때도 당신은 저 놈들이 살해 교사범임에 틀림없다고 찍었죠?
  
  정 대범:기철 씨와 최씨를 제가 어떻게 압니까? 검찰측에서 미리 암시를 주면서 아는 척 하라고 해서 그런 거지요? 난 그때는 일류 꼭두각시였으니까요. 한 번은 범인을 검문했다가 놓친 적이 있는 백 순경이 검사실에 불려와 대면한 적이 있었어요. 김 검사가 나를 가리키며 저 사람을 알겠느냐고 하니까 백 순경은 고개를 갸우뚱거립디다. 그러니까. 김 검사가 고함을 빽 지르면서 '그래 가지고 어떻게 순경질 해 먹느냐?'고 호통을 치는 거에요. 그렇게 되면 무슨 답이 나올지는 뻔한 것 아닙니까?
  
  조 갑제:검은 야광 시계를 범행 때 찼다고 진술했는데….
  
  정 대범:난 검은 야광시계를 본 적도 없어요.
  
  조 갑제:범행 때 입었다는 옷은?
  
  정 대범:그 옷에서 피 흔적이 발견 안 된다고 신문하는 거에요. 그래서 모든 걸 쉽게 풀어 가는 게 좋겠다 싶어 범행을 저지른 뒤 피 묻은 옷을 버렸다고 자백했지요.
  
  김 성순:검찰에서 말한 그 옷은 대범이 옷이 아니라 대범이 동생 옷이었다구요. 밀양 집에 구 사범이 와서는 신분을 사칭하고 하는 말이 대범이가 군 수사 기관에 배속되었는데 사복 근무이기 때문에 사복을 한 벌 갖다 주어야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동생이 입고 있던 옷을 벗겨 건네 준 것인데 대범이가 범행 때 입은 걸로 둔갑을 했습니다.
  
  정 대범:그 때 검사실에 불려 가면 다른 피의자들과 함께 만날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면 최씨와 기철이 등 다른 피의자들은 '너가 날 어떻게 아느냐?'고 우리를 보고 삿대질을 하곤 했지요. 그러면 나는 금식이 보고 '넌 나를 어떻게 아느냐? 나이 차이가 열 살이 넘는데 우리가 언제 어떻게 알았느냐?'고 새삼 원망을 하기도 했지요. 그러면 금식이는 나에게 '이게 모두 쇼다. 감방에서 편하게 지내기나 하자'고 말합디다. 나중에는 얼굴을 맞보고 웃었어요.
  
   예행 연습 뒤에 한 현장검증
  
  황 덕수:그래도 난 이해할 수 없는 게 많아. 넌 그 때 이런 말을 했지. 금식이와 기철이 저놈들이 범행에 성공한 뒤에는 나까지 죽여 바다에 던져 넣고 완전범죄를 꾀하려 했다고. 그러면서 화를 냈지? 그리고 금식이와 너의 얘기를 따로따로 들어 보면 일치했어. 더구나 면회 온 애인에게는 '아이를 죽였지만 덕분에 간첩 큰 놈을 잡게 되었다'고 자랑도 하고.
  
  정 대범:난 지금 잘 기억은 안 나는데 그랬을지도 모르지. 김 금식이와 내가 한 말은 일치할 수밖에 없었어. 신문을 다로 받았지만 구 사범이 중간에서 연락병처럼 이쪽, 저쪽으로 귀띔을 해 주었거든. 금식이는 이래, 저래 했다고 말하는데 넌 그렇게 하지 않았니, 이렇게 묻는 거야. 그러면 나는 야, 각본이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는구나 하고 그랬었다고 시인했지. 모든게 그렇게 맞추어져 간 거야. 난 구 사범이 시키는 대로 수기도 썼어. 근하 사건의 경위와 참회하는 내용의 수기였어. 그것도 대부분 구씨가 코치해 주는 대로 따라썼지.
  
  김 성순:수기 쓸 때 내가 헌병대로 면회 간적이 있어요. 아무나 가면 면회를 안 시켜 준다고 해서 구 사범과 함께 갔지요. 구 사범이 대범이를 면회실로 불러냈어요. 난 그때 만해도 대범이가 살인을 정말 한 줄로 알았지요. 신문에 그렇게 크게 났는데 안 믿을 도리가 있나요? 면회실에서 구씨가 대범이 보고 '오늘 좀 썼나?'고 합디다. '오늘은 몸이 아파서 못 쓰겠다'고 저놈이 히죽히죽 웃으며 대답하니까 구씨는 '오늘 약 사 넣어 주고 갈께'라고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거에요. 나는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속이 뒤틀려서 고함을 꽥 질렀습니다.
  
  '야, 이 새끼야! 운전사가 개를 치어 죽여도 종일 기분이 나쁜데 넌 사람 죽여 놓고 뭐가 좋아 웃고 자빠졌나!' 그러니까 저 녀석이 퉁명스럽게 불쑥 '내가 왜 사람을 죽였어요!'라고 해요. 구 사범의 얼굴빛이 단박에 달라집디다. '너 이제 와서 그러면 되나'고 중얼거리면서 '대범이가 아직 의리를 못 버려, 참 어리석긴…'하고 말합디다. 그때서야 난 뭐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지요.
  
  정 대범:김 태현 검사실의 방 아무개 서기는 어느 날 나에게 충고도 합디다. '아무래도 너희들이 이상한데, 한 그대로 불어야 된다.'
  
  황 덕수:또 의문이 있어. 현장 검증 때 나는 너를 묶은 포승을 잡고 다녔는데 너가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그처럼 잘 할 수 있었어?
  
  정 대범:야, 우리는 하루 전에 예행연습을 하고 나갔단 말야. 현장 검증 자리의 약도까지 구경해 가며 한 동작, 한 동작까지 그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어. 넌 낮에 바깥에서 일어난 일만 보았지 밤에 검사실이나 감방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잖아?
  
  조 갑제:그러면 현장 검증에서 근하를 뒤에서 왼손 칼로 찌르라고 시킨 것도 그들입니까? 정 대범:그건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저는 무조건 시키는대로 했으니까요. 그리고 난 짝베이(왼손잡이)아닙니까? 나중에 보니 왼손으로 찌르면 부검에 나타난 그런 상처가 안 난다고 해서 무죄 판결의 자료가 되었습니다만 난 시키는대로 했고 그것이 틀렸다는 얘기도 못 들었으니까 저들도 워낙 조작에 신경을 쓰다보니 부검 결과를 잊어 먹고 있었겠죠.
  
  조 갑제:사전 연습을 했는데도 왜 대구의 현장 검증에서는 범행 모의했다는 부엉이집까지의 길을 몰라 엉뚱한 방향으로 갔지요?
  
  정 대범:아무리 사전 교육을 받아도 내가 한 일이 아니데 제대로 됩니까? 현장 검증에서 실수한 게 어디 그 하나뿐입니까? 박 영태 씨 집을 못찾아 머뭇거리면 옆에서 구 사범이 슬쩍슬쩍 코치를 해 주었고 모의했다는 방이나 그곳에서 내가 앉았다는 자리를 잘못 짚으면 구 영근이가 옆에서 친절하게 바로잡아 주었습니다. 전 현장 검증이 모두 우습기만 했습니다. 완전한 연극이었어요. 내가 서둘러 연기를 잘해 보인 것도 그런 고역을 빨리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에서였지요.
  
   어머니의 욕설 듣고 정신 차려
  
  조 갑제:모친은 어떻게 대처하셨습니까?
  
  김 성순:변호사(이 영호)를 선임했는데 변호사 말씀이 지금은 대범이가 푹 삶기어 있으니까 아무 소용이 없다. 공판이 시작되면 그 때부터 깨고 들어 가겠다고 합디다. 나는 구 사범의 약점을 잡으려고 일부러 그를 만나 음식 대접, 술 대접도 해 주며 친해지려고 했지요. 한 번은 나한테 서울 출장비 5만 원을 빌려 달라고까지 합디다. 또 한번은 해운대에서 돌부처를 하나 사 준 적이 있었지요. 그 사실은 법정에서 폭로했습니다만.
  
  첫 공판이 열리는 날 저는 미리 재판소 앞에 가서 기다렸습니다. 대범이가 출정하는 걸 보자마자 욕을 퍼부었지요.
  '다른 사람은 사람 죽이고도 안 죽였다고 하는데 저 새끼는 안 죽이고도 죽였다고 한다. 네가 죽으려고 환장했나! 야, 이 등신, 바보 새끼야!'
  
  조 갑제:그래서 그날부터 범행을 부인하기 시작한 겁니까?
  
  정 대범:그 전부터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합디다. 감방 동료들도 '너 죽을 짓을 왜 하느냐?'고 충고를 했고요. 나도 곰곰 생각해 보니 이래선 안 되겠다는 계산이 생기기 시작했지요. 재판 시작 전에는 변호사와는 만난 적도 없어요. 다만 구 사범은 변호사 말을 들으면 너는 죽게 된다고 겁을 주더군요. 그날 어머니로부터 욕을 먹자 정신이 더 들었지요.
  
  김 성순:대범이가 1967년10월17일 밤에 옆방에서 잤다고 알리바이를 증언해 준 사람도 있었어요. 우리가 밀양으로 이사가기 전에 살았던 집의 아주머니인데 이 아주머니는 그런 증언을 했다고 그날 검찰에 붙들려 가 얼마나 혼이 났는지 압니까? 그 다음에 증인으로 나와선 앞의 증언을 번복합니다만 이해가 가더군요.
  
   눈물로 지새다가 숨진 할머니
  
  조 갑제:사형 선고를 받으니까 기분이 어땠어요?
  
  정 대범:아랫도리에서 힘이 쫙 빠지는 것 같았어요. 악이 받쳐 고함을 질렀지요. 귀신이 되어서라도 너희들 뜯어 먹겠다고.
  
  김 성순:나도 '오냐, 3심까지 가자!'고 응원 고함을 질렀지요.
  
  조 갑제:군 형무소에 가셨겠군요.
  
  정 대범:사형수들과 같은 감방을 썼습니다. 그들은 내 이야기를 들어 보더니 '넌, 살아 나간다'면서 위로를 하더군요. 그 감방에는 안동의 극장 앞에 수류탄을 던져 많은 사람들을 죽게 한 신 모 하사와 두 동료를 죽이고 형무소에 들어 왔다가 형무소 안에서 또 다른 사람을 죽인 오 모씨도 있었는데 생을 포기해서 그런지 사람들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신 하사는 변심한 애인이 면회를 오자 죽인다면서 쇠붙이까지 품고 간 사람인데 사형을 당하기 며칠 전에는 무슨 예감을 느꼈는지 비누 등 사물들을 우리에게 나눠주고 오락회를 열고는 노래를 실컷 부르는 거였습니다. 저는2심에서도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기에 마음은 편했고 오판으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은 별로 없었습니다.
  
  김 성순:야, 너는 편했는지 모르지만 집안은 콩가루가 됐단 말이다. 대범이 외할머니와 저는 밀양에서 바로 이곳으로 이사를 해야 했습니다. 살인범의 가족이라는 눈총 때문에 도무지 바깥 출입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야간 도주하다시피 이곳으로 달려 왔지요. 그 때는 지금 시세로 2만 원짜리 집을 살 수 있는 돈은 갖고 있었지만 여기서 무허가 건물을 하나 짓고 남은 돈으로 대범이의 옥바라지를 하다가 다 날려 보냈습니다.
  
  저는 블록을 이고 나르는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 갔습니다. 블록 한 개를 평지에서 언덕 위에까지 날라다 주면 1원을 받았지요. 육체 노동의 경험이 없는 나는 두 개만 이고 걸어 가도 땀이 비오듯 했는데 다섯 개까지 나르는 아주머니들도 있었죠. 그 아주머니들은 지금 모두 골병이 들어 비만 오면 온몸이 쑤신다고 야단이죠. 대범이 외할머니는 저를 대신해서 어린 대범이를 키웠기 때문에 각별한 정이 들었어요. 대범이가 저렇게 되니 매일 울기만하는 거에요. 그러다가 시름시름 앓다가 대범이가 무죄 확정 판결을 받은 며칠 뒤, 회갑일을 몇 달 앞두고 돌아 가셨습니다. 대범이 동생도 형이 저렇게 됐는데 나 혼자 살아 뭘 하느냐고 술만 퍼 마시고… 온 집안이 제 정신이 아니었지요.
  
   아들을 변호사로 키우고 싶다
  
  이야기가 이쯤 나가고 있을 때 대범 씨의 아내 김 부순 씨가 아래쪽에서 올라왔다. 집에 돌아 오니 남편이 없어 찾아 나선 것이었다. 김 부순씨는 정 대범 씨가 제대한 직후 결혼을 했다. 정씨집에 셋방을 얻어 살고 있던 처녀가 친구인 부순 씨를 소개해 준 것이었다. 부순 씨는 대범씨의 그런 과거를 전혀 모르고 결혼을 했다고 한다. 어느날 방을 치우다가 남편이 보관하고 있던 근하 사건 관계 신문조각을 발견했다.
  
  '앞이 캄캄해집디다. 이런 사람하고 결혼했다니 하는 후회와 함께 앞으로 어떻게 하나 하는 절망감에 사로잡혔지요.'
  그날 며느리의 물음에 그제야 김 성순 씨는 자초 지종을 설명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김 부순 씨는 남편의 좌절이 오히려 이해가 되더라고 했다. 정 대범 씨는 결혼 뒤 일자리를 잡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상업 고교를 나온 그였지만 취직할 수 있는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지 못했다. 더구나 '일병 제대'라는 이력이 그를 따라 다녔다. '이력서를 여러 군데 내었지요. 그 때마다 '일병 제대'에 걸렸습니다. 군에서 사고를 쳤겠지 하는 선입감을 갖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 사건을 회상하기가 실어 일일이 변명할 마음도 내키지 않았습니다.' 결혼 뒤 4년 동안 그는 방황했다. 공사판에 나가 막노동을 하다가 일이 없으면 술로 세월을 보내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문득문득 자신을 요꼴로 만든 구 영근 씨와 김 태현 검사 생각이 나더라고 했다.
  '참말이지 그 때는 차비가 없어 부산에 내려가지 못했습니다. 어머니가 차비를 안 주었어요. 이제는 정말 살인을 한 번 하리라 이를 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대범 씨가 갑자기 흥분하여 말하니 김 성순 씨가 옆에서 말린다.
  
  '이제는 자식새끼 생각해서 살아야지. 복수는 하늘이 할 게다.' 정 대범 씨는 그 사건 뒤 스스로 생각해도 성격이 변했다고 한다. 낯선 사람들 만나기를 무섭게 생각한다. 친구들이 아니면 잘 어울리지도 않는다. 저 사람이 또 나에게 어떤 피해를 주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부터 든다고 한다. 근하 사건에 휘말린 것도 구 영근 씨와의 친면 때문이었고 누구를 안다는 것이 재난이 될 수 있음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바깥 출입도 거의 하지 않는다. 쉴 때는 집안이나 마을을 떠나지 않는다. 영화보러 시내로 나가는 일도 없다. 그런 '세상과의 뒤섞임'이 귀찮기만 하다는 것이다.
  
  정 대범 씨는 보증금 10만 원, 월세 3만 원짜리의 단간 셋방에서 살고 있다.
  '이 정도라면 마음 잡고 살게 된 것은 저 아이 덕택이지요.' 김 성순 씨는 입버릇처럼 며느리를 칭찬해마지 않았다. 정씨의 아내는 장난감 행상을 하는 듯했다. 손가방에 작은 장난감이나 인형들을 들고 나가 호텔 주위에서 외국 관광객들에게 파는 일이다. 김 부순 씨는 해맑은 인상의 얌전한 30대 초반 아주머니지만 구 영근 씨나 김 태현 씨 얘기가 나오면 거침없이 극한적인 낱말을 내뱉곤 했다.
  
  '저의 소원이 있다면 막내아들을 변호사로 키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하고 불쌍한 사람을 많이 구해 주는 거에요.'
  이렇게 말하는 김 부순 씨는 둘째딸이 왼손잡이라고 하며 웃었다. 정 대범 씨는 언론에 의해 '손이 고운, 왼손잡이의 냉혈 살인마'로 묘사되었고 그 '왼손잡이'로 해서 현장 검증의 모순점을 만들었고 무죄 판결을 받는 데 실마리를 제공했던 것이다. 정씨는 10여 년 전부터 용접 기술을 배워 생계 수단으로 삼고 있다. 큰 공장에 들어가야 고정 수입이 있을텐데 정씨 같은 고참은 봉급을 높게 책정해야 한다고 받아 주길 꺼린다고 한다.
  
  그래서 하청 업자를 따라 부정기적인 작업을 하고 있는데 공치는 날이 잦다. 지금은 자동차의 앞 범퍼를 제작하여 납품하는 일을 하고 있다. 월 수입은 30만 원쯤 되지만 곧 일감이 끊어질 형편이다.
  
  정씨는 황 덕수 씨가 꼬치꼬치 캐물으니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우리 이러지 말고 금식이, 구 영근이, 김 태현이까지 불러 텔레비전에 함께 나가자, 거기서 한판 벌이자'고 했다. 새벽 1시가 넘어서야 우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젠 집을 알았으니 자주 놀러 오라'는 정씨의 황 덕수씨에 대한 인사가 인사치레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인천행 택시 안에서 내가 물었다.
  
  '황 덕수 씨는 지금도 정 대범 씨를 의심합니까?' 황씨는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그러나 또 말꼬리를 달았다.
  '대범이에 대한 의심은 풀렸습니다. 그 친구도 결국 금식이에게 당한 거군요. 그렇지만 금식이는 정말 무죄일까요? 그 사람은 판, 검사보다도 더 머리 회전이 빠른, 무서운 사람입니다. '이 사건은 내멋대로 돌릴 수 있다'고 중얼거리던 그의 말이 아직 귀에 쟁쟁합니다.'
  
  '김 금식 씨가 이 재판극의 각본을 쓴 것은 맞아요. 그건 이미 다 알려져 있는 사실 아닙니까? 그렇지만 근하 군이 살해된 날 그는 대구 교도소 안에 있었다는 사실 또한 분명해요. 그렇다면 김 금식 씨는 범인일 순 없지요.'
  '범인이 아니라 해도 범인에 대해서 무언가 알고는 있을지 모르지요. 공소 시효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바로 금식이가 아닐까요?'
  
출처 : 마당
[ 2003-07-04, 16:3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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