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범이란 낱말의 도태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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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범'이란 낱말의 도태를 위하여
  
  <1982년 10월 마당>
  
  지난 9월10일치 '동아일보' 1면 머리에는 경쟁지 기자들이 보면 '눈알이 튀어 나올' 특종 기사가 실렸다.
  '1심 무죄, 2심 15년형 살인 혐의, 범인은 따로 있었다.'
  '택시 강도 용의자가 범행 자백.'
  '억울한 옥살이 14개월, 마구잡이 수사 드러내.'
  이런 제목들이 시커멓게 찍혀 있었다. '살인 사건의 피의자로 구속 기소되어…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대법원의 최종 판결을 기다리던 중 진범이 붙잡혔다'는 대목만 보아도 이 기사가 1면 머리감임을 알기에 충분했다.
  
  다음날 조간지들도 이 기사를 베꼈다. '동아일보'는 특종 뒷날엔 사설('억울한 범인과 진범')과 고정난('그게 이렇지요'―김 중배)에서도 이 문제를 다루었다. 우리는 '동아일보'의 이 독점 기사에 찬사를 보내면서도 한편으론 석연치 않은 기분을 털어버릴 수가 없다. '동아일보'가 강조한 '진범'이란 말 때문이다.
  
  '진범'으로 지칭된 권 모 군(18) 등 세 명은 아직 1심 재판도 받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아무리 권 군 등이 범인으로 확실하게 보였다고 해도 법원이 확정 판결을 내리기 전에 언론이 먼저 '진범'이라고 지상 판결을 할 권리를 갖고 있는가? 유죄 확정 이전의 피의자는 무죄인으로 추정, 대우해야 한다는 우리 헌법의 정신은 보도의 원칙으로도 받아 들여져야 할 것이다. 물론 '동아일보'의 단정대로 첫 번째 피의자가 무죄, 뒤늦게 잡힌 피의자가 '범인'으로 확정될 가능성은 매우 높다. 대법원은 9월 14일 첫 번째의 피의자 김 시훈 씨(30)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한 고등 법원의 판결을 깨고 고법으로 돌려 보내면서 김씨에겐 구속 집행 정지 결정을 내려 석방했다.
  
  우리가 따지고 싶은 것은 이 재판의 결과에 대한 예측의 정확성 여부가 아니라 보도의 절차이며 원칙이다. 우리 언론도 이제는 좀 느긋한 마음가짐으로 형 확정 판결까지 기다렸다가 '범인'으로 부르는 대범하고 성숙된 자세를 가져야 할 시대를 맞은 게 아닌가 한다. 누가 보아도 범인임에 틀림이 없는 피의자에게까지 그런 무죄 추정의 원칙을 적용하는 건 무리인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고 숙종 씨나 정 재파 군 등 수사 기관과 언론에 의해 '진범'으로 단죄되었던 피의자들이 잇따라 법정에선 무죄인으로 바뀌는 사태가 빚어지고 있는 최근의 사례를 보더라도 인간의 존엄에 관한 원칙은 가장 엄격하고 안전하게 적용되어야 하겠다는 게 우리의 믿음이다.
  
  피의자들이 잡히면 신문들은 왜 그토록 서둘러 '진범'이라고 못박기를 즐겨했을까? 독자들에게 빨리 확실한 결론을 전해 주려는 조급한 마음 탓이었던가? 그래서 무리를 해서도 '불확정 상황'을 '확정 상황'으로 변형시켜 알려 주어야 했던가? '진범'이란 말은 아껴 두었다가 형이 확정되었을 때 써야 '말의 제값'이 보증되는 법이다. 진범이란 말을 제대로, 정직하게 쓸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릴 수 없을 만큼 우리는 조급한가. 아무리 복잡하고 애매한 일이라도 박력 있게 단정을 하고 즉석에서 판단을 내리고 요절을 내야 속이 풀릴 만큼 우리는 시간에 쫓기고 있는가.
  
  '진범'이란 낱말을 생각해 본다. 진짜 범인. 그러면 가짜 범인도 있다는 얘기다. 아니 너무나 많은 가짜 범인이 있었기에 '진범'이란 강조법이 생겨났고 이제 우리는 '범인'이라면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진범'이라 해야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었다. 한국에만 있는 이 '진범'이란 낱말은 우리의 불행했던 법 집행과 언론 보도의 역사를 상징하고 있다.
  
  형 확정 이전에 이미 범인으로 발표되어 활자와 사진과 화면을 통해서 무수한 증오와 욕설과 모독의 융단 폭격을 당했던 그 범인들이 법정에서 무죄로 풀려 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법정의 무죄 판결이 법과 언론에 의한 폭행을 얼마나 보상했던가?
  '그래도 범인이 아닐까'
  하는 의혹의 꼬리표, 고문으로 망가진 몸과 정신, 박살나버린 가정, 이런 폐허를 만든 장본인들―형사, 검사, 기자들이 그 때문에 처벌을 받았다는 기억을 우리는 아직 갖지 못하고 있다.
  
  '진범'이란 낱말을 우리 사회에서 퇴치할 길은 있는가? 있다. 그것은 교과서적인 원칙을 지키는 일이다. 검사와 형사는 가혹 행위를 금지한 법을 지키고 법관은 '열 사람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 사람의 무고한 사람을 살리는' 정신에 충실하고 기자는 헌법의 '무죄 추정' 조항을 따르면 될 것이다. '그렇게 원칙대로 하다간 범죄자들은 법망을 피해 활개를 칠 것이다'고 반론할지도 모른다. '과잉 인권은 인권 부재 못지 않게 위험하다'고 대들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로 한국의 수사 실력이 발전하려면 가혹 행위, 투망(投網)식의 요행 및 육감에 의지하는 전근대적 수사에서 먼저 벗어나야 할 것이다. 결론부터 먼저 내리고 방증을 주워 모으는 악습이 깨뜨려 질 때만 과학 수사는 가능할 터이다. 세계 최고라는 일본과 영국의 경찰이 마구잡이 수사 덕분에 그 높은 검거율을 기록하고 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이제 '진범'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우린 나라의 사람과 사회가 가진 중요한 약점으로 연결된다. '사실의 인식'보다도 '가치 판단'을 서두르는 태도를 우리는 이 나라의 구석구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을 오래 겪어 보지도 않고, 아니 대면도 하지 않고 '재주만 부리는 사람' '아첨하는 사람' '모략 잘하는 사람' '솔직한 사람' '화통한 사람' 식으로 한 마디로 한 쪽만을 단정해 버리는 경우를 숱하게 본다. 이런 판단 우선의 사고 방식은 인간뿐 아니라 사건이나 사상을 대상으로 할 때도 마찬가지다.
  
  엄격하고 면밀한 사실 확인의 작업 뒤에 이런 판단이 오는 게 순서인 데도 판단이 앞서고 사실 인식은 미리 내려버린 그 판단을 뒷받침하는 방향으로만 진행된다. 결론을 서두르는 이런 조급한, 또 안이한 생각에서는 선입감과 편견된 고정 관념만 생겨날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지역 감정이나 흑백 논리나 '진범'의 문제가 파생되고 있는 것이다.
  
  어떤 강력 사건의 수사가 1주일쯤 진척이 없으면 '오리 무중'이니 '경찰은 기고 범인은 뛰고' '헛도는 수사'식으로 언론이 수사 당국을 치고 나오는 수가 왕왕 있다. 범인 잡는 게 모래 속에서 조개 캐는 일이 아닌 바에야, 형사들이 부부 탐정이나 샬록 홈즈나 콜롬보가 아닌 바에야, 꽁꽁 숨는 범인을 1주일이나 한 달 안에 무슨 재주로 잡아 낼 건가? 언론의 성화에 못 이긴 경찰이 범인 잡는 기간을 단축시키려 할 때 취하는 행동이 이른바 마구잡이 수사이다.
  
  언론의 조급함이 경찰의 조급함을 선동하고 그 피해는 선량한 시민들에게 쏟아진다. 이런 언론에 길들여진 경찰은 언론이 사건 보도에 시들해지면 수사도 시들하게 하기 시작한다. 어떤 범인을 1년이고 2년이고 추적하여 잡아 내고야 마는 집념의 수사가 한국에선 찾아 보기 힘든 것도 이런 풍토에 그 책임의 일단이 있을 것이다.
  
  형 확정 판결을 기다리지 못해 진범이라 부르고, 몇 주일도 못 기다려 '경찰의 무능'을 들볶고, 그 사람 얼굴도 모르면서 먼저 악평이나 하는 이런 분위기, '우선 해 놓고 보자'는 이런 성급함에서 우리는 벗어나야겠다. 그것은 감성으로부터 해방되어 이성을 찾는 길이며 민주화의 길과도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한국인을 더욱 조급하게 만들었던 것은 지난 20년 동안의 고속 성장이었다. 서구의 지난 2천 년간 평균 경제 성장 속도보다도 40배나 빨리 달렸다는 한국 사회. 뛰면서 생각하는 '임기 응변'과 해 내고야 마는 '과묵한 실천력'이 이 시대의 장점으로 존경받았던 사회. 무섭게 달리고, 무섭게 바뀌던 이 사회에서 어느 누가 조급해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 앞다투어 승진하기 위해 벌인 전시 행정은 사람과 국토를 황폐시켰고 '키워 놓고 보자'는 기업가의 성급함은 과잉 투자와 경제 규모의 비능률을 몰고 왔으며 문교 행정에서 보듯 '내 재임 기간에 무언가 보여주련다'는 관료의 과욕은 국민과 국토를 실험장으로 삼는 현상을 빚고 말았다.
  
  '80년대에 들어 확실해진 것은 앞으로 상당 기간 '저성장의 시대'가 계속되리란 전망이다. 경제가 천천히 돌면 생활이나 사고 방식의 템포도 느슨해질 것이고 이런 시대에선 과묵한 실천력이나 조급함은 전 시대의 유물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사회의 하부 구조가 우리의 사고방식을 바꾸어 주기까지 기다릴 수는 없다. 우리가 먼저 간단하게 상징적인 작업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 사회에서 '진범'이란 낱말을 도태시키는 일일 것이다. '진범'이 없는 사회가 보다 인간다운 사회일 것이니까.
  
출처 : 마당
[ 2003-07-04, 16:3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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