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국민이 안은 문제점(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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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없는 세대」의 프론티어는?
  
  60년 전에 죽었던 사람이 부활하여 오늘의 베이비 붐 세대를 본다면 모두가 「수퍼맨」이나 「원더 우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14세 한국 남자의 평균 키를 비교하면 1919년엔 1백40cm였는데 80년엔 1백60cm였다. 25세의 여자 평균 키는 1910년의 1백47.5cm에서 80년의 1백57cm로 커졌다. 국민 1인당 평균 섭취 열량은 62년의 1천9백43칼로리에서 80년엔 약 2천6백 칼로리로 늘었다. 시력만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질병률도 격감했다. 20대 여성의 반이 살빼기에 고민하고 있다는 통계는 베이비 붐 세대가 누리고 있는 물질적 풍요를 상징하고 있다.
  
  지난 4반세기의 고도 성장에서 한국인들이 도달한 가장 핵심적인 철학적 각성은 「물질적 풍요만으로는 인간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고도 성장과 함께 인간 욕망의 크기도 성장했고 욕망과 현실 사이의 상대적 격차(불만도)는 별로 좁혀지지 못했다.
  
  고도 성장의 가장 큰 수혜 집단인 베이비 붐 세대의 불만은 그러한 상대적 빈곤에서 오는 것이리라. 그들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과밀과 경쟁이란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개인의 욕구 충족도는 그가 속한 집단의 머리수와 대체로 반비례하는 법이다. 지금 직장에 들어간 베이비 붐 세대는 그 전처럼 급행 승진을 못할 것이다. 30대 이사는커녕 30대 고장도 어렵게 될 것이다. 신입 은행원은 지점장으로 퇴직할 수 있느냐, 없느냐로 가슴을 죌 것이다.
  
  지금 40대의 숫자는 20대의 반도 안 되니 승진에서 얼마나 유리한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70년대의 신화-율산, 제세, 원기업 같은 벼락 재벌도 이들 세대에선 옛이야기로 빛바랠 것이다. 세상이 합리화돼 가면서 한탕주의가 통용될 수 있는 여지는 좁아질 것이다. 합리가 지배하는 속에서 신화가 창조될 수는 없다. 그들은 벌써 스스로를 「신화가 없는 세대」라고 규정하고 있다.
  
  도전의 장도 좁아질 것이다. 60∼70년대의 종합상사, 해외 시장, 혹은 민주화나 고통받는 자들이 젊은이들에게 정열을 불태울 프론티어로 제공되었다면 80년대의 프론티어는 무엇인지 아직 뚜렷하지 않다. 이런 환경에서 그들의 욕망과 관심이 먼 데서 가까운 데로,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옮겨갈 것임은 명백하다. 출세나 승진으로 명예욕을 충족시킬 수 없다면 하루하루의 인생을 즐기는 것으로 보상받자는 심리 발동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다. 미국에서도 2차 대전 후 10여년간 베이비붐이 있었다. 이들을 보통 「나 혼자만의 세대」(Me Generation)라고 부른다. 모든 관심을 「나」에게만 쏟는 세대란 뜻이다.
  
  일본의 베이비 붐 세대도 탈정치, 다양성, 개인주의를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민족과 전통은 다르지만 베이비 붐 세대의 공통 필수 조건인 과밀과 경쟁은 거의 같은 현상을 결과하고 있는 것 같다.
  
   싹트는 다양한 가치관
  
  「나에 대한 관심의 증대」는 양날 칼이다. 좋은 방향으로 휘둘러질 때는 가치관의 다양성, 개성화, 인간화를 낳는다. 나쁜 방향으로 칼날이 돌아가면 타인에의 무관심, 이기주의, 향락주의로 흐르게 된다. 우리의 베이비 붐 세대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올봄 대학가의 데모 현장을 부지런히 쫓아다녔던 마이니찌 신문 서울 특파원 시게무라씨는 『학생들의 데모관이 크게 바뀌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학교 내의 데모가 자율화되어도 80년 봄의 거교적(擧校的)데모와는 달리 학생들의 행동이 통일되지 않고 그 불통일, 즉 행동의 다양성을 서로가 존중하는 것 같더라고 그는 말했다. 데모에 참여 않는 학생들이 참여파에 대해 느꼈던 죄책감이나 참여파가 비참여파에게 던졌던 경멸감 같은 게 거의 사라졌다는 데는 내가 만난 모든 베이비 붐 세대 젊은이들도 동의했다.
  
  『데모해도 잡아가지 않으니 데모하는 애들에게 미안할 필요가 없지요. 이제는 데모가 용기의 증명은 아니니까 그들도 순교자와 같은 도덕적 우월감을 가질 수 없게 되었죠. 또 솔직히 말해서 취직 생각하면 데모할 마음이 내키지 않아요』
  
  『전엔 데모하는 학생들의 유형이 고정돼 있었는데 요즈음은 그렇지 않아요. 놀때는 놀고 공부할 땐 하고 데모할땐 또 열심히 하고. 짙게 화장한 여학생도 데모를 하고. 도식적으로 참여, 비참여파를 가를 수 없게 됐어요』
  
  어느 교수는 『차라리 몽땅 데모에 가담하면 휴강이라도 하겠는데 데모하는 학생도 있고 공부하는 학생도 있으니 강의를 안할 수가 없다』고 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도 통용되던 도식으로 오늘날의 대학생들을 분류할 순 없게 되었다. 획일적 행동 양식이 그만큼 각양각색으로 분화된 때문이리라. 고려대 4년 김돈씨는
  『우리끼리의 대화에서는 요즈음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이 퍽 자주 쓰인다』고 했다. 『그래선 안된다』느니
  『그래야만 한다』는 여유 있는, 남의 입장을 인정하려는 말투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보기에 따라선 자기 주장을 회피하려는 자세로도 받아들여지겠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사고 방식은 생활양식에선 『저 잘난 맛에 산다』는 개성화, 차별화로 나타나고 있다. 컬러 텔리비전의 방영과 교복 자율화는 젊은이들의 패션을 다채·다양하게 변모시켰다. 한국인의 라이프 스타일을 해마다 추적 조사하고 있는 여론조사 회사 리스피아르의 분석 담당 박지선씨는 『세대차가 크게 나타나고 그 차이가 해마다 커지는 부문이 의복 선택시의 디자인·색감 선호도다』고 했다. 의복의 스타일이나 감각을 중요시하는 20대지만 질기고 값싼 실용성도 기성세대 못지 않게 중시하는 타산적 일면도 보이고 있다. 『멋을 좋아하니까 씀씀이는 헤플 것이다』는 도식도 베이비 붐 세대에겐 잘 들어맞지 않는 것 같다.
  
  『책임지라』는 말 없어져?
  
  서울 외국어대학의 40대 교수 ㅈ씨(46)는 이런 경험담을 털어놓는다. 『퇴근길인데 나의 과 남학생이 여자 친구와 허리를 껴 안고 앞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앞질러 가자니까 마주칠 것 같아 일부러 느릿느릿 걸었다. 가게 쇼윈도 앞에 오더니 두 남녀는 멈춰서서 안을 기웃거렸다. 이 때다 싶어 발걸음을 빨리하여 스쳐 지나가는데 그 놈이 「선생님!」하고 아는체하지 않는가? 「선생님, 왜 모른 척하고 지나가십니까?」 이런 농담을 던지는 제자의 얼굴 보기가 민망스러워진 것은 바로 나였다』 나는 앞에서 베이비 붐 세대가 「맨 정신으로도 춤을 즐길 수 있는 첫 세대」라고 규정했다. 과학적 데이터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나는 춤을 자유롭게 출 수 있다는 것과 성적(性的)행동 사이엔 상관 관계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몸놀림으로 의사를 표시하는 점에선 같으니까.
  
  그렇다고 이 시대의 성의식이 기성 세대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는 단정할 수 없다. 성의식이란 것은 아마도 가장 느리게 변하는 관습일 것이다. 다만 베이비 붐 세대에 와서 성의식의 변화가 두드러지는 건 인정할 수 있겠다. 그렇게 두드러져 보이는 것도 이들의 숫자가 워낙 많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 신혼 부부의 결혼 후 1년내 출산율이 20년 전의 약 3배나 된다는 것은 「약속한 사이의 혼전 관계」는 거의 보편화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듯하다. 약속에 관계없이 「초야의 순결」을 중요시했던 전통적 성의식과는 크게 달라진 현상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결혼을 전제로 하지 않는, 좋아하는 사이라면 그것도 무방하다는 생각이나 두 걸음쯤 더 나아가 성 자체를 일종의 레저로 여기는 태도도 일부 20대 사이에선 나타나고 있다.
  
  60년생의 어느 직장 여성의 얘기를 들어보자. 『옛날엔 그런 일이 있은 뒤 여자가 「이젠 책임을 져라」고 남자를 얽어매곤 했다는데 요사이는 거꾸로 「그랬다고 해서 날 자꾸 따라다니지 말라」고 면박을 주는 여자도 있다. 어느 남학생은 이런 말을 하더라. 「우리가 한 일을 생각 않고 첫날밤에 신부가 처녀이기만을 희망하는 건 비겁하다. 순 총각수와 순 처녀수는 비례하는 게 아닌가」』 『성의식에 있어선 10년, 20년 선배 세대보다도 3∼4년 뒤의 후배들과 더 큰 생각의 차이를 느낀다』
  
  어느 인구학자는 『자세히 밝히긴 곤란하지만 우리가 어느 공단의 미혼 여공들을 조사했더니 30%가 관계를 가진 경험이 있고 10%는 인공 유산경험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면서 『이들에 대한 성교육과 산아제한 홍보가 강화돼야겠다』고 했다.
  
   건강하고 보수적인 세대
  
  미국 유럽 등 외국 베이비 붐 세대의 공통된 특징은 「안티(反)의 입장」이었다. 반전·반체제·반문화 운동을 통해 그들은 현대 기계 문명의 어두운 면을 고발했고 새로운 생활 양식을 창조하려 했다. 기성 세대는 또 그들의 고발과 도전을 하나의 충고로 수용, 사회를 개선하는 데 노력했다. 미국에선 60년대의 히피 사조가 70년대엔 사라졌다. 『왜?』라는 질문에 미국인들은 『우리 모두가 히피가 되었기 때문이다』고 답한다.
  
  한국의 베이비 붐 세대에선 그런 안티(反)의 성향이 퍽 약한 것 같다. 종속 이론이나 해방 신학 등 비교적 선명한 주장을 제외하고는 그들의 사상은 파격성이 없는 너무나 합리적이고 보수적인 내용들이다. 문제는 이런 보수적 주장마저도 수용할 수 없는 우리의 상황 조건이다.
  
  외국 베이비 붐 세대는 마약·섹스·폭력이란 부정적인 풍조를 사회 속에 퍼뜨렸다. 데모가 안티의 적극적 표현이라면 마약은 퇴영적 표현이었다. 한국처럼 근대화된 나라에서, 6·25 베이비 붐 세대처럼 숫자가 많은 집단에서 마약 오염률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건 유례가 드문 일이다. 가까운 일본의 베이비 붐 세대가 본드와 히로뽕에 젖어든 것과도 큰 대조가 된다. 최근 서울대학에 유학온 재일동포 여자 소설가 이양지 씨(29)는 한국의 젊은 남자들에 대한 첫인상을 이렇게 표현했다.
  
  『덜 세련된 것 같지만 건강하고 활력과 박력이 넘친다. 특히 일본 남자와 비교하면』 많은 문제도 가진 우리의 베이비 붐 세대이지만 현재의 도덕 기준으로 재어볼 때 「보수·건강」이란 일반적 판정은 거뜬히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보수·건강이 과연 장점이냐 하는 데는 사람들마다 생각이 다를 것이다. 기성 세대의 입장에서 보면 『우선 안심이다』고 하겠지만 젊은이들의 생각이 「애늙은이」같아서야 장래에 희망이 있겠느냐고 개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청년들이란 기성 세대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새로운 생활방식이나 사고 방식의 가능성을 제기해야 하는 세대라고 믿는 이들이다. 문제는 베이비 붐 세대의 에네르기가 계속 발산되도록 배출구를 터 주는 일일 것이다. 경제 성장이 정체되면 이들의 에네르기는 안으로 잠복, 우리 사회를 화농시키기 쉽다. 이들 젊은 활력은 어느 쪽으로 쏠릴 수 있을 것인가? 한 사람의 특수한 모델을 놓고 사례 검토를 해보자.
  
   도전·죽음·또 도전
  
  임덕용. 56년생, 늘 신선한 분위기를 몰고 다닌다. 완강한 뼈대를 근육질로 얇게 포장하고 있는 몸집이지만 어린아이 같은 표정이다. 나라 안에서 손꼽히는 암벽 등반가다. 미혼. 체육 훈장을 두 개나 받았다. 지난 80년엔 알프스의 마터호른, 그랑드 조라스 암봉을 올랐다. 81년엔 히말라야의 미답봉 바인타 브락2봉에 도전했다가 정상 도달 직전에서 동료 이정대를 잃었다. 정상 공격조였던 이정대·유한규 두 사람은 자일로 몸을 묶고 철수도중 조난을 당했다. 이씨가 유씨률 살리기 위해 스스로 자일을 풀고 빙벽 아래로 떨어진 것으로 원정대에선 해석하고 있다.
  
  임씨가 속한 악우회는 지난해 여름 바인타 브락2봉에 재도전했다. 3캠프까지는 순조로왔다. 해발 6천5백m의 3캠프에서 눈과 바람을 만났다. 대원들은 텐트 속에 15일간 갇혔다. 그 부근의 다른 나라 원정대는 모두 하산했다. 그들만은 이정대씨를 생각하며 버티었다. 식량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루 두끼만 먹었다. 체력소모를 막기 위해 종일 식물 인간처럼 누워 지냈다.
  
  천막 안에서 먹고 자고 배설해야 했다. 임씨에게는 환청이 오기 시작했다. 민방위 훈련 사이렌 소리가 들리곤 했다. 환각도 나타났다. 텐트는 노란색이었다. 그 색깔이 자꾸만 정신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임덕용 씨는 여자 친구가 선물한 「아리」란 인형의 머리를 다듬어 주면서 15일을 기다렸다. 7월 14일 저녁에 대원들은 결정했다. 『내일엔 날씨에 관계없이 죽어도 「고우」다』 더 기다릴 수 없을 만큼 식량도 동이 났고 7월 15일은 이정대씨가 숨진 2주기이기도 했다.
  
  정상 공격조는 임덕용, 유한규 팀. 오전 9시에 악천후 속에서 출발, 6천8백m 지점에 이르러 빙벽에 얼음굴을 팠다. 두 사람은 굴속에 틀어박혀 밤을 새웠다. 침낭은 가져 오지 않았다. 입은 그대로 서로 껴안고 비비고 노래 부르며 죽음을 뜻하는 잠을 쫓았다. 너무 추워 카메라를 깔고 앉는 바람에 망가뜨려버렸다.
  
  캠프에서 후방 대원들은 워키토키로 노래를 불러주고 『목욕탕에 콜라 부어 놓고 마시자』고 소리를 질러 주면서 두 대원들을 격려했다. 달빛으로 빙벽과 암벽이 푸르스름한 기막힌 밤이었다. 임씨는 문득 『교향곡을 한곡 들었으면』하는 생각을 했다. 「여기가 가장 좋은 무덤」이란 생각이 들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거기에 없었다. 다음날 오후 1시 50분 둘은 정상에 섰다.
  
  세계최초의 등정. 식인봉이란 별명을 가진 해발 6천9백60m의 칼날 같은 봉우리에서 그들은 이정대씨의 사진을 눈속에 파묻었다. 『이정대 대원에 대한 의무감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일찌감치 포기했을 것이다』고 임씨는 말했다. 임씨는 이 정상 등반도중 발에 동상이 걸렸다. 지금도 치료중이다. 그 후유증은 죽을 때까지 따라다닐 것이라고 한다.
  
  『안 되면 될 때까지』
  
  나이로 보면 베이비 붐 세대의 제1파에 해당하는 임덕용 씨는 부모와 학교가 덮어씌우는 과외 공부에 반발, 그 도피처로 산을 선택했다. 일요일엔 부모의 눈을 속이기 위해 고무신을 신고 집을 빠져 나와 도망치듯 산을 올랐다. 미친 듯 산을, 계곡을, 바위벽을 올랐다. 밤에 인수봉에 올라 도회의 불빛을 내려다볼 때는 『너희들 두고 보자』고 악에 받친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77년에 서라벌 예대 서양미술과를 졸업, 육군에 입대했다. 특수부대에 뽑히기 위해 군용 백을 입에 물고 선착순 1위를 했다. 그는 입대 첫날부터 「고생을 사서 하기로」결심한다. 군복무 3년간은 등반 기술 연마를 위한 체력 단련 기간이라고 스스로 선언했다. 특수부대 지원, 사역 자원, 외출 포기 등 모든 육체적 고통을 「내가 좋아서 하는 운동」이라고 생각하니 즐겁기만 했다.
  
  제대 뒤 80년에 알프스 원정을 하고 돌아와 그는 그 체험기를 「알프스의 꿈」이란 단행본으로 펴냈다. 위계 질서가 굳은 산악계에선 그런 「자기 과시」가 금기처럼 돼 있었지만 아랑곳 하지 않았다. 알프스에서 그는 「전율할 만한 감동」을 가슴에 안고 돌아왔다. 거기서 그는 산을 오르는, 등산을 즐기는 서구인들의 진정한 자세를 보았다. 그는 이 감동을 인생의 추진력으로 삼기로 했다. 무턱대고 코오롱 상사의 스포츠 사업본부장을 찾아갔다.
  
  등산 현장에서 느꼈던 등산 장비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산도 모르는 사람들이 만들고 있으니 그 모양이다』고 욕했다. 이런 당돌한 면담이 계기가 되어 임씨는 즉석에서 코오롱의 스포츠 상품 디자이너로 특채됐다. 그는 자신이 등산장비 디자인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전문가가 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설계, 산행에 의한 시험이 가능할 뿐 아니라 성야화를 전공한 덕분으로 일러스트레이션도 잘 한다. 이런 점에선 독일의 철인(鐵人) 등반가 메스너보다도 자신이 유리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얼마 전 춘천 구곡 폭포에서 60분짜리 암벽 등반 비디오도 만들었다. 후배 등산인들을 위한 교육용이다. 알프스 등반 때는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도큐멘터리를 당시의 TBC에서 제작, 방영하기도 했다. 『그런 짓들이 치졸하게 보일지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나도!」하는 자극제가 될 수 있다면 기꺼이 한다. 어린이 잡지에서 원고 청탁이나 인터뷰 요청이 오면 거절 않는 이유도 그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싶어서다』 2년 전엔 동아 세계 마라톤 대회에도 참여했다. 비록 등수에는 못 들었지만 완주했다. 참가 이유는 자기가 디자인한 운동복을 입은 선수들이 어떻게 뛰는가를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임씨와 같은 사람은 사생활은 다소 무질서하다는 것이 기자가 가진 도식이다. 그런 도식은 여기서도 들어맞지 않았다. 그는 인생에 대해서나 일상생활에 있어서 컴퓨터처럼 계획적이고 타산적이다. 산에서 익힌 습관이란다. 『극지 등반을 할 땐 두 달 뒤 어느날 몇 시에 원정대가 고도 얼마에 있어야 하고 그날 점심은 어떤 것, 열량은 얼마짜리라는 거리 미리 계획해 놓아야 한다. 내 인생도 그렇게 설계하고 있다』
  
  『내가 왜 떨어요?
  
  요사이 그는 2년제 대학 졸업이란 학력 핸디캡을 보충하기 위해 퇴근 후엔 개방대학 산업미술과에 다닌다. 자가용도 샀다. 자가용 사는 게 경제성이 있다는 셈을 해 본 뒤 산 차다. 타산적인 사람은 이기적이란 도식도 있다. 지난해 4월3일 인수봉에서 큰 조난 사고가 났다는 걸 아침 밥상 앞에서 라디오를 통해 듣자 그는 회사엔 『오늘 출근 못한다』고 알리고 어머니에겐 『따끈한 꿀물을 보온병에 넣어달라』(꿀물은 탈진한 조난자에게 즉효가 있다)고 부탁한 뒤 등산 장비를 챙겨 조난 현장으로 달려가 구조작업을 도왔다. 『그런 건 등산인이면 당연하게 하는 거다』고 임씨는 가볍게 말한다. 시내 버스를 타면 소매치기를 유혹하기 위해 일부러 바지 뒷 호주머니에 돈지갑을 찔러 넣기도 한다. 물론 소매치기를 잡아 혼내주기 위해서다.
  
  지난해 8월초 일요일, 임씨는 여자 친구와 함께 용인 민속촌에 놀러갔다. 가지고 온 라디오를 통해 『경인 지역에 적기가 공습중이다』는 다급한 방송을 들었다. 이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옳지 잘됐다. 너희 새끼들 이제 맛좀 봐라』였단다. 『공산군을 쳐죽일 기회가 생겨 잘 됐다』는 생각이 조건반사적으로 날 수 있었다니 그는 『이산가족이 되면 어쩌나』부터 생각했던 나 같은 사람과는 다른 정신 체계를 갖고 있음이 분명하다. 어느 소설가가 『모험이란 건?』하고 그에게 물었다.
  
  『「신난다!」 「재미있다!」 그런 거예요』
  이런 그의 즉답처럼 그는 등산을 우선 즐기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 점 그는 선배 등산인들과는 크게 다르다. 산행에다가 실존, 자아 확인 등 철학적이기까지 한 무거운 의미를 부여하는 선배들과는 화사한 대조다. 그는 산행에서 체득한 노우하우를 사회 생활에서 절묘하게 활용하고 있다. 그는 사회와 조직과 인간 관계까지도 바인타브락 미답봉처럼 차례차례 정복해 가고 있는 느낌이다. 등산인들이 자주 인용하는 말이 생각난다.
  
  『여기 봉우리가 있다. 오르자. 여기 바다가 있다. 건너자. 여기 부정이 있다. 바로잡자. -이런 것들은 각기 다른 행동 같지만 같은 마음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임덕용씨는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두 번 훈장을 받았고 두 번 식사 대접을 받았다.
  『떨리지 않더냐?』고 했더니
  『내가 왜 떨어요? 』란 반문이 돌아왔다.
  『초대받아 간 손님인데 당연히 대접을 받아야죠. 떨긴 왜 떨어요?』 그를 이토록 당당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개인주의 정신에 입각한 직업의식일 것이다.
  
  『누가 뭐래도 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산을 잘 타는 사람, 그리고 스포츠 디자인 분야에선 세계 최고가 될 사람이다』는 자랑과 정열이 천진난만한 그의 표정 밑에 단단히 깔려 있다. 그런 프로페셔널리즘이 있기에 소시민이면서도 비굴하지 않고, 개인 중심이되 이기적이지 않고, 철학적이지 않고서도 아주 자연스럽게 선행을 하며, 화내야 할 때 화낼 수 있는 것이리라. 물론 임덕용 씨는 매우 특출한 예로서 베이비 붐 세대의 전형은 아니다. 그들이 모두 임씨를 닮는다면 그 집단은 「수퍼 제너레이션」이 돼버릴 것이다. 나는 임씨를 베이비 붐 세대가 창출할 수 있는 하나의 인간형, 하나의 가능성으로 설정했을 뿐이다.
  
   80년대의 의미체계는 「인간화」
  
  베이비 붐 세대의 우울-도전할 프론티어가 없다는 고민에 대해서도 임덕용씨는 하나의 가능성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좁은 분야를 깊게 파고드는 것, 즉 수직적 프론티어의 발굴, 그리하여 개인의 능력을 확장시키는 것이 새로운 「도전의 장」(場)이란 말이다. 지나친 전문화는 인간소외로 달리 위험을 안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전문화, 직업의식, 장인의식은 보편적 가치로 가는 길이 된다. 괴테가 말했듯이 참다운 특수성은 보편성으로 통한다. 쇼비니즘이 아닌 건강한 향토성과 민족적 특성은 국제성이나 보편성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인간존중이란 보편적 가치는 개인주의의 천착으로 획득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일제 시대의 우리 젊은이들이 지향했던 의미 체계가 「독립」, 6·25이후가 「반공」, 70년대가 「근대화」였다면 80년대는 「인간화」여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 사회학자도 있다.
  
  80년대의 주인공인 베이비 붐 세대는 「인간화」를, 살아가는 보람으로 삼기에 가장 적합한 경험을 해왔다. 비인간화의 풍토를 헤쳐온 자기성찰에서 비로소 「인간화」에의 열망이 우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를 읽을 때마다 받는 감동이 있다.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그릇은 너무나 크고 넓고 따뜻하다. 왜소해진 현대인의 눈에 비친 그 시대 인물들은 모두가 영웅 같다. 그러나 그런 위인들의 삶을 80년대를 사는 베이비붐 세대가 복사해 가져다 놓고 본받을 수는 없다. 우리는 시대를 거스르지 않고 새로운 인간형을 모색해야 한다. 베이비 붐 세대만큼 새로운 한국인상을 빚어내기에 적합한 집단도 없을 것이다.
  
  가장 많은 한국인을 대표하고, 가장 건강하고, 폭 넓은 동질성과 공동 체험을 갖고 있고, 대중 문화의 본격적 수용충이기도 한 그들이기 때문이다. 고도 성장의 혜택과 그 재앙을 아울러 경험하면서 우리 사회를 충격, 변화시켰고 스스로도 변화해 간 「근대화의 장남」이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가정과 나라의 희망이었던 세대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한국인상(像)의 창조는 베이비 붐 세대의 역사적 사명일 것이다. 한국 사회의 주류는 어차피 서구화로 향해 달리고 있다. 베이비 붐 세대가 보여 주기 시작한 개인주의, 다양성, 전문화, 정치적 무관심의 추세는 다른 인구 계층으로 확산될 것이다.
  
  베이비 붐 세대는 그 덩지로 해서 한국을 서구화로 몰고가는 가장 강력한 견인차가 될 것이다. 전통의 단절이 없었던 일본보다도 허물어진 전통을 뒤로 하고 새출발한 한국이 훨씬 더 빨리, 더 비슷하게 서구를 닮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는 학자들도 있다. 물론 서구화와 발전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서구화가 반드시 인간다운 삶의 진전을 약속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인구 구조면에서 한국은 수십년의 인구학적 후진성을 가졌다고 한다. 15세 이하의 연령층 인구가 전체의 약 32%나 돼 경제 활동 인구의 부양 부담이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 서기 2천년에 가면 15세이하 연령층의 비율이 26%로 떨어져 그 짐이 가볍게 될 것이다. 이런 인구 구조의 선진화도 사회 중견층을 보다 자유롭게 만들 것이다.
  
  나는 어릴 때 대통령 이름도 모르는 미국인이 많고, 일본 소년의 희망이 주로 야구 선수라는 기사를 읽고는 『무슨 이런 나라도 있나?』하고 의아해 했던 걸 아직 기억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20여년 뒤 나는 지금 그런 나라에 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다시 20년 뒤엔 지금의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한국에 내가 살고 있을까?
  
  남이 걸어간 길을 뒤쫓아 가는 건 안전한 일이지만 미리 다 알아버린 추리 소설처럼 재미나 보람은 덜할 것이다. 좀 고통스럽지만 새로운 길, 새로운 삶의 방식, 즉 새로운 문화, 가치관, 인간상을 창조할 순 없을까? 우리의 근대화는 인간 소외의 서구화가 아니라 인간 중심의 서구화일 수는 없을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베이비 붐 세대는 갖고 있을 것이다.
  
출처 : 월조
[ 2003-07-04, 16:4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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