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국민이 안은 문제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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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위해 위장 취업하는 농부들
  
  베이비 붐 세대의 여성보다도 결혼이 몇 배나 더 어려운 동 세대의 남성들이 있다. 농촌 총각들이다. 경기도 화성군 마도면 김모씨(57년생)는 5만여 평의 고등소채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지난해 그는 서울의 어느 도금 공장에 말단 공원으로 취직해 올라왔다. 서울 생활을 하면서 결혼 상담소에 신청서를 냈다. 몇 달 뒤 상담소를 통해 한 살 많은 노처녀 조모양(56년생)과 선을 보고 곧 사귀게 됐다. 농촌에선 꿈꾸기 어려운 행운이었다.
  
  그가 서울행을 결심한 목적도 사실은 취직이 아니라 결혼이었다. 농부라고 하면 아예 선도 볼 수 없는지라 위장 취업을 한 것이었다. 김씨는 사귐이 깊어지자 농사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처지를 설명하고 조양을 데리고 고향에 갔다. 조양은 농촌에서 같이 살겠다고 했지만 부모가 완강히 반대했다. 김씨는 농장 경영을 임시로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서까지 계속 서울에 머물면서 조양 부모가 딸의 농촌행을 허용해 주기만 기다리고 있다. 김씨처럼 결혼을 위해 서울 등 대도시로 임시 위장 취업해 오는 농촌 젊은이들이 퍽 많다.
  
  서울 종로구의 어느 상담소에는 40여 명의 그런 농부들이 중매를 신청해 놓고 기쁜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상담소에선 이들이 반기지 않는다. 어느 상담원의 얘기-.
  『도와 주고는 싶지만 농부란 걸 알게 되면 판판이 깨져요. 신청비로는 전화비도 안빠져요』 농촌 총각들은
  『학력이나 용모는 무용, 오로지 몸 튼튼하고 농사를 같이 지을 생각만 있으면 된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도시나 농촌 처녀들은
  『차라리 엿장수하고 결혼하겠다』는 태도다.
  
  전남 함평군의 어느 마을에선 한 총각이 고물장수라고 거짓말했더니 선 보자는 농촌 처녀가 처음으로 나타나더란 농담 같은 진담도 있다. 서울 을지로 2가에서 결혼 상담소를 운영하는 신혜영 여사는 미혼 농부와 도시 처녀 사이의 집단 맞선을 열 한번이나 주최, 약 50쌍을 결합시킨 사람이다. 지난 4월 하순엔 경남 밀양 청년회의소에서 집단 맞선 모임을 가졌다. 서울 처녀 25명을 전세 버스에 태워 내려가 현지 농촌 총각들과 「미팅」을 시킨 것이다. 짝이 있는 미팅이 아니라 무작위 추출식의 자유 미팅이었다. 여덟 쌍이 즉석에서 교제를 일단 약속했다. 서울 처녀들이 떠날 때는 밀양 총각들이 과일 등 특산물을 버스에 잔뜩 실어 주는 흐뭇한 정경을 보였다고 하는데 총각들의 속은 애타고 있었을 것이다.
  
  경남도청은 행정력을 동원, 미혼 농어촌 후계자 7백70여 명에게 짝을 지어주는 운동을 펴고 있다. 총각들의 신상 카드를 이 고장 출신 기업인이 경영하는 도시 사업장으로 보내 처녀들을 모집하는 방식이다. 농협 중앙회도 청실홍실 상담실과 「월간 새농민」의 결혼 복덕방난을 통해 농촌 총각들을 돕고 있다. 당연한 현상이지만 베이비 붐 세대의 결혼 적령이 진입은 주택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고 있다.
  
  83년의 결혼건수(미신고 포함)는 약43만 건이었다. 약 43만의 새 가정이 탄생했다는 얘기다. 이 가운데 약80%는 새집을 필요로 한다. 건설부에 따르면 75∼80년 사이엔 주택 수요의 증가율을 연(年) 3.2%로 잡았는데 81년이후엔 3.5%로 잡고 있다고 한다. 주택 수요에 영향을 주는 것은 결혼건수와 핵가족화이다. 핵가족화가 강화될수록 주택 수요는 늘어난다. 베이비 붐 세대는 이 두가지, 즉 결혼 건수의 증가와 핵가족화의 강화를 동시에 초래, 주택 수요를 폭발시키고 있다. 81∼86년 사이의 가구(家口)증가수는 연(年)평균 약29만으로 76∼80년의 연평균 약 26만을 크게 웃돌고 있다.
  
  올해 한국에서는 27만호의 새 주택이 건설된다. 여기에 드는 자금이 약4조원. 그래도 주택 부족율은 줄지 않을 것이다. 10대와 20대 초반에서 교육수요를 급팽창시켰던 베이비 붐 세대는 20대 후반에서부터는 주택수요를 급증시키고 있는 것이다.
  
   맨 정신으로 춤출 수 있는 세대
  
  여자 이름에 「자」(子)가 거의 없는 세대, 라면 선호도가 가장 높은 세대, 음주율(약 86%)이 가장 높은 세대, 맛과 멋의 선택이 까다로운 세대, 여성의 55%가 살빼기에 신경쓴다는 세대, 스포츠 중계 시청률과 음악 프로 청취율이 가장 높은 세대, 송창식과 양희은의 세대별 인기도가 가장 높게 나타나는 연령층, 그러나 남녀 다같이 조용필을가장 좋아하고 「두만강 푸른 물에…」보다는 「옛 시인의 노래」를 더 즐겨 부르는 세대, 그러나 마이클 잭슨보다는 사이먼 앤드 가펑클에 더 마음이 놓이는 세대, 반 이상이 주일학교에 다닌 경험이 있고 지금도 기독교(개신교·천주교) 신봉률이 약 25%(불교의 약 3백)나 되는 세대….
  
  이런 것들은 갤럽, 리스피아르 등 여러 여론 조사 기관의 작업을 통해 통계학적으로 검증된 베이비 붐 세대가 주축인 20대의 단면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더 잘 안다. 골치아픈 숫자를 통해서 보다도. 무엇보다도 그들은 맨 정신으로 춤을 출 수 있는 세대다. 술 한 잔 걸쳐야, 누가 억지로 끌어내야 어둑한 무대에서 어색하게 몸을 흔드는 우리 세대(나는 45년생, 그러니 해방 세대다)와는 사뭇 다르다. 그들은 대낮의 태양 아래서도, 남이 보는 데서도, 술의 힘을 빌지 않고서도 그냥 즐기기 위해 춤을 출 수 있는 세대다.
  
  「춤」이란 「보디 랭귀지」를 마음대로 구사한다는 점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내용이 형식에 의해 빚어진다」는 일면을 받아들인다면 춤이란 「자유 행동」은 「자기 표현의 과감성」이상의 더 기본적인 사고(思考)체계를 보여 준다. 서구인과 동양인의 차이를 설명하는 한 가지 요소로 춤을 들 수 있다면 베이비 붐 세대는 서구 쪽으로 몇 걸음 가깝게 다가가 있는 셈이다.
  
  그들은 활자 매체에 못지 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TV 등 전자 매체의 영향을 받고 자랐다. 내가 만난 많은 「그들은」가장 잊지 못할 날로서 합격자 발표일과 함께 집안에 처음 TV가 들어온 날을 꼽았다. 사람을 논리적이기보다는 감각적이고, 옥외적이기 보다는 실내적이며, 적극적이기보다는 피동적으로 만든다는 TV의 영향권에서 자라온 그들이 「삼국지」를 되풀이 되풀이 읽으며 커 온 기성 세대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해방 세대는 대체로 동질성에 파묻혀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는 데 대해 그들은 남들과의 차별화로 자아를 확인하려 한다. 우리 세대는 새옷을 사 주면 놀림을 받을까 두려워 일부러 헌옷으로 닳게 한 뒤 입고 등교하곤 했던 소년시절을 보냈다. 베이비 붐 세대는 「남과 같지 않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철학을 일찍부터 생활화 하였다. 그런 생각이 옷에서부터 직장·생활방식·정치 성향 등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독자들은 곧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열병처럼 앓은 「자유」
  
  나는 이제부터 숫자나 개념이 아닌 실체로서의 베이비 붐 세대를 만나러 간다. 그들의 상황 조건-과밀과 경쟁이 개개인의 인간됨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다.
  
  -송지나. 여자, 59년생, KBS에서 스크립터로 일한다. 몸은 연약하지만 얼굴은 깔끔하고 야무지게 다가온다. 할아버지가 이탈리아 배우 지나 롤로 브리지다를 닮으라고 「지나」란 이름을 지어주었다니까. 여섯 딸 가운데 맏딸로 났다. 두 오빠가 있었는데 6·25 전쟁중, 그리고 직후에 파상풍 등에 걸려 잇따라 죽었다. 송양의 아버지는 육사 8기 포병 장교였다. 전쟁중 부상으로 세 번이나 수술을 받았다. 송양 가족은 아버지를 따라 군부대 주변을 수십 군데나 이사다녔다. 송양 어머니는 마흔여섯 번째 이사간 것까지만 세었다. 송양은 철모와 총기를 노리개처럼 만지작거리며 자랐다. 국민학생 무렵의 희망은 국회의원, 그것도 대통령보다도 더 힘센 국회의원이 되는 거였다. 정치 하면 선명하게 그림처럼 연상되는 장면이 있다.
  
  아버지는 교문 앞 공터 한가운데서 고독하게 서 있었다. 교문 너머에는 경찰 진압 병력이 포진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뒤에는 대학생 데모대가 버티고 있었다. 아버지는 『한 사람도 못 나가고 한 사람도 못 들어온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60년대 어느 날의 부산대학교 교정. 당시 송양 아버지는 학훈단장(대령)이었다. 아버지는 가난하고 강직한 군인이었다. 송양이 부하가 사온 빵을 먹으려 하면 빼앗아 돌려주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장성진급에서 탈락하자 자진해서 제대했다. 서울로 올라간 송양 집은 더 가난해졌다. 아버지는 정치에 손을 댔다가 된서리를 맞았다. 송양은 건방진 소녀로 자랐다. 중3년 때는 반장 선거에도 출마했다. 투표가 뭔지 알 것 같았다. 제주도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뒤 이화여대 신문방송과에 들어갔다. 공부도 열심히, 야학도 데모도 아르바이트도 열심히 했다. 사랑은 「무지무지」 해보았다.
  
  「…한동안 허덕이며 격정을 다한 뼈골 깊은」 사랑도 했다. 싸움도 열심히 했다. 남녀 평등 문제로 다투다가 남학생에게 막걸리를 끼얹기도 했다. 열병처럼 「자유」를 앓고 다녔다. 이런 일기도 썼다. 「수백 권의 책을 읽고 수십 권을 지어낸들 뭣하랴… 그토록 총명한 선배님들, 그들의 결과는 오늘인가? 이념은 있으되 신앙이 없고, 뜻은 있으되 사랑이 없다. 무엇을 위한 인내며 증오인가?」 자신이 「민주」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자유롭기 위해서, 그리고 사르트르의 말처럼 다른 사람이 자유롭게 되지 않으면 자신도 자유를 얻지 못한다』고 믿었기에. 아버지는 송양의 시국관을 못마땅해 했다. 정권의 부정 부패엔 통탄을 금치 못하는 아버지였지만. 『우리가 다 어떻게 지켜온 나라인데』라고 하며 데모란 항의방식을 나무랐다.
  
  졸업. 송양은 어느 방송국의 스크립터로 취직했다. 한 달에 60만∼70만 원을 거뜬히 벌었다. 속은 괴롭기 시작했다. 민주, 자유, 언론…… 생각할수록 골치가 아팠다. 모래알을 사이에 접착제가 되어 시멘트를 만들어 내려 했는데… 골치가 아팠다. 동생이 대학 입학 시험에서 떨어졌다. 동생 등록금으로 준비했던 백만 원을 들고 유럽으로 떠났다. 온 유럽을 싸 돌아다녔다. 히피, 거지 같은 젊은이, 그리고 진짜 거지들과 함께. 열차나 창고 안에서, 역전 광장에서 노숙을 하기도 했다. 서독에서 미국 신사를 만났다.
  
  『나는 독일과 독일인을 가장 좋아한다. 1년의 반을 여기서 보낸다. 사람이 한번 태어나서 저 살고 싶은 데 살아야지…』하면서 그는 송양더러 독일에 남기를 권했다.
  『대한민국은 날 필요로 해요』
  그렇게 말하고 나니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귀국했다. 82년 여름이었다. 송양은 KBS로 옮겼다. 필름을 편집하고 화면에 맞는 해설·대사를 정리하는 게 지금 그의 일이다.
  
  『왜 변화를 두려워하죠?』
  
  송양은 조직안에서 열심히 싸운다. 「여자이기에」, 싸워야 사람대우를 받는다는 걸 알았다. 싸우는 법도 익혔다. 처음엔 격한 감정으로 몸이 덜덜 떨렸다. 지금은 자료와 논리를 정리한 뒤 차분히 싸운다. 제 힘으로 남성 사회에서 서기 위해선 실력부터 쌓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밤샘을 밥먹듯 하며 악착같이 배우고 있다.
  
  - 송양의 눈에 비친 조직 속의 남자들은?
  
  『내시 같아요. 자신이 비굴하다는 데 대해 부끄럼조차 없어요. 명예심이 없어요. 독재가 나쁜 건 인간을 비굴하게 만들기 때문이죠』
  
  -어른들의 젊은이를 보는 눈은?
  
  『왜 변화를 두려워하죠? 효도심이 약해진다고 개탄만 하지 말고 노인들이 편하게 지낼 좋은 양로원을 만드는 게 빠르쟎아요? 요새 젊은이들 건강하고 너무 너무 똑똑하다고 생각해요. 가만히 버려두면 잘 될 거예요. 걔들이 아무리 문란하다 해도 어른들이 음지에서 하던 일을 젊은 층이 양지에서 하는 차이밖에 더 있어요? 강남의 어느 여관 주인을 인터뷰했는데요. 그 사람이 그래요. 40대 남녀손님은 죄짓듯 하는 표전인데 20대 남녀는 태연하게 출입한대요. 왜 그런지 아세요? 후자는 서로 사랑하니까요. 디스코가 뭐 나쁘다고 그래요. 어른들은 자신들이 어둑한 카바레에서 하던 일을 연상해서 디스코도 그렇게 보는 모양이지만…』
  
  -아직도 「민중」좋아해요?
  
  『요즈음은 시민이란 말이 좋아요. 피 냄새가 안 나거든요. 우리 세대는 세 가지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아요. 하나는 철저한 현실 적응형, 다른 유형은 이데올로기를 우상 숭배하는 쪽, 세 번째는 적극적인 현실 참여에 의한 개량주의. 사회 생활을 하면서 보니까 대학에서 데모한 사람과 안 한 사람이 크게 달라요. 같이 날씨 스케치를 해도 안 한 사람은 벚꽃 지는 걸 찍는데 한 사람은 공해에 시달리는 가로수를 찍어 와 무엇인가 말하려고 하죠. 데모 정신은 뚜렷한 세기관과 문제 의식을 심어준다는 점에서 값지다고 생각해요』
  
  -송양이 사는 지역구 국회의원의 이름, 기억해요?
  
  『몰라요』
  
  -전번 선거 때는 누굴 찍었는데?
  
  『그것도 모르겠는데… 모르는 게 뭐 창피한 일이에요?』
  
   태반이 지역구 국회의원 몰라
  
  대통령보다도 센 국회의원을 꿈꾸었고 민주·자유를 위해 데모도 감행했고 현실에 대해 날카로운 문제 의식을 지닌 송지나 양은 그를 대표하여 국정에 참여하고 있는 국회의원이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부끄럼없이 말하였다. 나는 이번 취재를 위해 열다섯 명의 베이비 붐 세대를 면담했다. 두 가지 질문을 늘 던졌다.
  『당신 지역구 국회의원을 아는가?』
  『국회의장, 국무총리, 민정당 대표위원 이름을 아는가?』
  
  첫 번째 문제를 맞힌 사람은 김선주양(60년생·이화여대 대학원 2학년 재학)뿐이었다. 서울 도봉구에 사는 그는 불과 며칠 전에 알았다고 했다. 「호OO 배 경로대회」 「김OO 배 축구대회」현수막이 한꺼번에 여기저기 걸려 있었기 때문에 절로 알게 됐다는 것이다. 김양도 두 번째 문제에선 걸렸다. 국무총리와 국회의장 이름은 맞히었지만 민정당 대표위원을 『거… 권 뭐라는 이가 아닌가요?』라고 했다. 따라서 두 문제를 다 맞힌 이는 한 사람도 없더란 얘기가 된다. 반 이상은 자신의 지역구 국회의원을 아무도 몰랐다. 둘 중 한 명을 알아도 소속 당을 혼동하는 이들이 많았다.
  
  총리 이름은 거의가 알지만 국회의장과 민정당 대표위원을 많이 혼동했고 특히 대표위원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이 거의 전부였다. 반 이상은 전번 국회의원 선거에서 기권, 나머지도 자신이 누굴 찍었는지 몰랐다. 임덕용 씨(56년생, 코오롱 근무)는 『찍긴 찍었는데… 아마도 멋지게 생긴 X한테 찍었겠죠』라고 했다.
  
  모두 대학을 나온 똑똑한 사람들, 더구나 사회 문제에 대해선 예민한 문제 의식을 가진 이들이 왜들 이러는가? 홍미숙씨(60년생·코리아 리크루트 기자)는 이렇게 풀이했다.
  
  『이름을 기억할 수 있게끔 하는 실마리나 이미지가 잡히지 않아요. 자신의 목소리나 자기류의 표현 같은 것, 그게 없거든요. 봉두완 하면 퍼뜩 외무위원장 하고 연상이 되는데…』 그래도 납득이 가질 않는다. 관심만 있다면 그런 실마리가 잡히지 않을 리가 없다. 열 자가 넘는 영어 단어도 외는데. 그러니 『왜 정치에 관심이 없는가?』를 물어야겠다. 홍 미숙양은 말했다.
  
  『학교 다닐 때는 대통령 하면 박정희밖에 연상되지 않았고 정권이 바뀌는 것도 못 보았고 그렇다고 호국단 설립 이후 학생 대표를 내 손으로 뽑은 기억도 없고… 대학에 들어가 비로소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게 허상이었던 것 같아요』
  
  김선주양은 『우리가 무관심한 것은 현실 정치에 대해서지 정치나 이념, 그 자체에 무관심한 건 아닐 것이다』고 반박했다. 15명의 베이비 붐 세대에게 『다음 선거에선 투표를 하겠느냐?』고 물었다. 태반은 『그날이 휴일로 되면 기권하고 놀러 가겠다』는 반응이었다. 정치에의 무관심은 무관심에서 끝나지 않고 「투표권의 포기」로 구체화되는 법이다. 민주 사회에서 투표권의 포기는 참정권의 포기를 뜻한다. 시민이 정치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투표다.
  
  베이비 붐 세대의 「정치 무관심」은 이 집단이 가장 많은 표를 가진 연령층이란 데서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한다. 지난 81년 국회의원 선거 당시의 유권자수는 20대가 전체의 33.8%, 30대가 23%, 40대가 18.9%, 50대가 12.9%, 60대 이상이 11.4%였다. 다음 선거에선 20대의 비중이 36%로 더 높아진다. 민주적 정치 권력을 표수로 치환할 수 있다면 20대(70%가 베이비 붐 세대)야말로 최강 정치 집단이다. 그들의 마음먹기에 따라선 정권을 바꾸는 데 결정적인 힘을 행사할 수도 있다(이론상). 표수를 놓고 본다면 그들은 기성 세대에게 요구, 항의, 또는 투석을 할 게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현실 정치를 바꾸면 된다(이론상).
  
   기권이나 부동표로 흐를 위험
  
  물론 20대의 정당한 투표권 행사를 방해하는 요인이 있어 왔다. 이런 자리에서 인용하기가 뭣하긴 하지만 유치송 민한당 총재의 말이 생각난다(월간 조선 84년 4월호 대담).
  『그러나 적어도 자유당과 박 정권이 자기들한테 표 안 찍었다고 보복한 건 없지 않은가? 기껏해야 나무 하는 것 단속하는 정도였어요. 그런데 창피하게 꾸부리고 앉아 막걸리다, 고무신이다, 요즈음은 단위가 높아져서 관광이다, 이렇게 하는 모양인데 속여먹는 놈도 문제지만 속는 사람도 문제에요. 백성이 튼튼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평화적 정권 교체니 뭐니 할 필요도 없어요. 벌써 그게 됐을 겁니다.… 국민들은 야당만 나무라고 텔리비전만 보고… 표 하나 제대로 찍지 못하면서 뭘 그러냐 말이야』
  
  큰 덩지 때문에 늘 손해를 보아온 베이비 붐 세대가 그 「규모의 정치성」을 제대로 살리려면 바닷가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어선 될 리가 없다. 이웃, 사회, 정치에의 관심과 사랑을 접착제로 하여 돌이 되어야만 파도도 막고 장벽도 부술 수 있다. 증오보다 더 나쁜 건 무관심이란 말은 그들에게 적용될지 모른다.
  
  중앙대 김영모 교수(사회학)는 말한다.
  
  『20대는 정치적 학습이나 훈련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교육은 기술주의로 흘렀고 입시·취직 경쟁과 핵가족화, 도시화는 인간을 이기적으로 만들었다. 이것들이 모두 정치적 무관심을 조장하기에 이르렀다. 70년대까지 우리 나라 선거에서 당락의 결정표 역할을 한 것은 지연·학연·혈연 등에 좌우된 부동표였다. 약 40%가 부동표였다는 분석도 있다. 20대의 무관심표가 부동표로 변할 가능성도 있다』
  
  『잘생긴 사람 찍었다』느니 『사람됨은 전혀 모르니까 무조건 경력 화려한 사람을 골랐다』느니 하는 베이비 붐 세대의 농담같은 진담은 기권율과 부동표의 증가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미국 같은 선진국일수록 기권율이 높고 국민은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위안은 한국의 베이비 붐 세대에겐 적용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선진국에선 국민 생활에 미치는 정치의 영향력이 매우 적어 누가 집권을 하든지 일상 생활은 큰 변화를 겪지 않는다. 한국처럼 정치가 생활과 문화 전반을 지배하는 나라에서의 정치 무관심을 「현대화」로 해석하는 건 착각일 것이다. 더구나 사회의 현실엔 관심이 많으면서도 현실 정치에 관심이 적다는 건 의도적 외면이나 도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베이비 붐 세대는 자가 당착에 빠지게 된다. 현실 정치를 통하지 않고 사회를 근본적으로 개량할 수 있나? 있다면 현실 정치 이외의 새로운 정치 세력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과연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그들의 행동은 그 믿음을 따르고 있는가?
  
  베이비 붐 세대가 가진 높은 정치 의식과 현실 정치에의 낮은 관심, 이 2중성의 한 이유는 현실 정치에 대한 거듭된 실망과 좌절일 것이다. 이런 2중성은 거꾸로 하나의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그들의 정치의식이나 라이프 스타일에 맞는 대중 정치가가 나타난다면 현실 정치에 폭발적 관심을 쏟을 것이란 가설이 그것이다.
  
  2차 대전 뒤 태어난 미국의 베이비 붐 세대가 하트 돌풍의지지 기반이 됐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문제는 베이비 붐 세대가 자신들의 엄청난 정치력(표수)을 확인, 그 잠재력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일 것이다. 임덕용씨는 『조용필처럼 정치를 하면 관심을 갖겠다』고 진지하게 말했다. 『목소리 하나로 수백만의 마음을 한 군데로 모으는 기술, 그런 공감대 형성이 바로 정치란 것 아닙니까?』
  
  대중 가수 같은 정치가. 텔리비젼 화면에 잘 맞고, 개성이 있고, 독특한 분위기를 몰고 다니는 정치가, 정견보다는 스타일이나 감각에 뛰어난 정치가가 이 세데에게는 잘 먹혀들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정치가는 대중매체의 조작(操作)에 의해서 탄생하는 법이다. 선거 운동에 광고기획 회사가 끼어들어 정당이나 후보의 이미지 부각에 노력하는 서구의 방식이 다가오는 총선거에서는 일반화될 듯하다.
  
  1960년의 미국 대통령 선거전에서 닉슨-케네디 후보의 토론이 있었을 때, 라디오로 중계를 들었던 사람들은 닉슨이 이겼다고 생각했고 텔리비전을 시청했던 사람들은 케네디가 이겼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텔리비전의 마사지를 많이 받아온 베이비 붐 세대에게는 닉슨과 같은 오디오적 정치가보다는 케네디와 같은 비디오적인 정치가가 더 환영을 받을지 모른다. 기존 선거 방식보다는 전파 미디오적인 광고기법의 선거 방식이 베이비 붐 세대의 감각에 잘 맞을 것이다.
  
  한국의 정치 발전사에서 1984∼88년의 의미는 엄청나다. 평화적 정권 교체, 민주화의 가능성이 시험받는 시기이며, 86, 88올림픽과 주변 정세는 우리 사회를 부산하게 만들 것이다. 정치적 도전이 잇따를 이 시기에 우리 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집단인 베이비 붐 세대가 정치를 망각할 때 극 결과는 역사에 대한 책임 문제로 비화될지 모른다.
  
출처 : 월조
[ 2003-07-04, 16:4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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