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증 없는 사형집행(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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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심 법정에선 다시 범행 부인
  
  재판은 1975년3월12일 인천지원101호 법정에서 개막됐다. 재판장은 김진우, 배석 판사는 박영무·한광세였다. 오휘웅의 가족은 사준을 변호사로 선임했다. 두이분은 사선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아 사준·최락구 두변호사가 국선으로 나섰다. 1차 공판에서 두이분은 살인교사의 동기를 『(다리를 저는)불구의 남편이 주벽이 심하고 성관계마저 좋지 않아 욕구불만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오휘웅은 범행 일체를 부인하기 시작했다. 검찰에서의 부인과 시인에 이는 세 번째의 태도 변경이었다. 오휘웅은 2차 공판에서 『경찰에서 자백한 것은 고문에 의한 허위이며 자술서는 고문도구를 보여주어 형사계장이 불러준 대로 쓴 것입니다』고 했다.
  
  4월11일에 열린 3차 공판에서 사준 변호사는 송안섭, 여창근, 이석흥등 세명의 일련종종 신도(호휘웅과 같은 교회에 다님)와 사체를 검안한 의사 및 현장의 첫 목격자들을 증인으로 신청, 허가를 받았다. 변호사가 신도들을 증인으로 신청한 것은 물론 오휘웅의 알리바이를 입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건 당일 오휘웅이 언제 집에 돌아왔느냐 하는 것은 이 사건의 큰 쟁점이었다. 오휘웅의 주장대로 8시30분에 귀가했다면 앞 뒤 사정을 살펴 볼 때 범인으로 단정하기가 어렵다.
  
  오휘웅이 귀가했을 땐 30여 명의 신도들이 좌담회를 하고 있었으므로 증인들은 많았다. 그러나 이들 증인은 모두 오휘웅과 같은 일련정종 신도란 점에서 증언의 신빙도는 약해 지기 마련이다. 당시 수사에 참여했던 인천 경찰서 형사 박인용은 수사 단계에서 이들을 불러 오씨의 귀가 시간을 물었는데 한결같이 8시30분이라고 하여 오히려 『말을 맞추고 있다』는 의심을 굳혔다고 했다.
  
  신도 송안섭(여자·당시 38세)은 이 재판의 결과에 영향을 끼친 중요한 증인인데, 75년1월2일 경찰에서 『오휘웅은 좌담회가 끝날 무렵에 왔다』고 말한 것으로 조서에 기록되어 있다. 경찰관이 재차 묻자, 송씨는 『좌담회는 9시10분에 끝났는데 거의 끝날 무렵에 오휘웅이 집에 왔다』고 했다. 송씨는 그 뒤 검찰에선 『8시40분께 오휘웅이 집에 왔다』고 진술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내가 여기서 [기록되어 있다]는 표현을 하는 것은 송안섭이 그 뒤 법정에서 다른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즉, 경찰과 검찰에서 산 자신의 증언과 기록된 내용은 다르다는 얘기였다. 자신은 8시30분이라고 이야기했는데 조서에는 [좌담회가 끝날 무렵]이라고 쓰여졌고, 특히 검찰에서는 기록자가 8시30분이라고 타이프했는데 『모 인사가 이렇게 되면 알라바이가 성립되니 8시40분으로 고쳐라』고 해서 기록을 고치는 것을 보았다고 송씨는 말했었다.
  
  오휘웅측 증인들은 모두 그의 귀가 시간을 시계를 보고 알았다고 했다. 신도 이석홍(당시 공무원)은 그 좌담회에서 자신이 반장으로서 신도의 질문에 대답을 하고 있었는데 말이 막혀 곤혹스럽게 되어 있는데 마침 오휘웅이 들어와 대답을 대신해 주었으므로 그 귀가 시간을 정확히 기억한다고 증언했다. 이런 신도측 증언의 신빙성을 어떻게 평가하느냐 하는 것은 자유심증주의의 원칙에서 판사의 재량이다.
  
  재판부는 이 증언의 신빙성을 거의 무시했음이 뒤에 드러난다. 두이분은 그러나 이들 신도들이 4월28일로 예정된 제4차 공판에서의 증인으로 채택되자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제4차 공판은 무순 사정 때문인지 연기됐는데, 교도관이 당일 연기통보를 하자 두이분은『남자쪽은 변호사를 대고 증인이 두명이나 되니 나는 불리하다. 나를 위해 증언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크게 낙심하더라고 한다(같은 감방에 있었던 이주순의 증언).
  
   두이분, 옥중에서 목매 자살
  
  재판 연기 통보를 받은 그날 두이분은 자살했다. 같은 감방에 있었던 이주순(여 : 밀주 판매죄로 구속)은 이렇게 증언했다(4차 공판 기록에서 발췌). 『오후 7시50분경 미결수들끼리 옛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두이분이 슬그머니 없어졌으므로 변소에 간 줄 알았다. 8시에 폐방으로 취침하기 직전 용변을 보려고 화장실에 가서 16번 빨리 나오라고 소리쳤으나 아무 대답이 없었다. 변소 유리창을 통해 들여다 보아도 깜깜하기만 하여 화장실 문을 확 열고 들어갔다. 두이분은 창가에 목을 매달고 죽어 있었다』 이주순 증인은 두이분이 죽기 전이나 평소에 하던 말도 법정에서 진술했다. 이 증언은 오휘웅에게 유죄를 선고하도록 중요한 증거가 되었다.
  
  문(재판장) : 남자(오휘웅)가 왔을 때 (두이분이) 약을 먹였다고 하니까 남자가 뭐라고 했다고 하던가요?
  
  답(이주순) : 그 때 남자가 죽이자고 했으며 죽인 후 남자가 방을 나오면서 애들까지 죽였대서 왜 애들까지 죽였느냐고 (두이분이) 말하니 애기는 발에 밟혀서 죽였다고 남자가 이야기했다고 들었습니다.
  
  문 : 두이분이, 애들까지 죽였다고 슬퍼하던가요?
  
  답 : 어느날 울면서 『12월27일 애들과 소풍을 갔었는데』라고 혼자말을 합디다. 어느날엔 또 애들이 꿈에 보였다고 하면서 큰 아들이 큰 집을 샀다고 손을 잡고 끌었다느니, 애들에게 새옷을 입혀준 꿈을 꾸었다고 했으면 남편이 불쌍하다는 말도 했습니다.
  
  문(검사) : (두이분이) 죽기 직전에 들은 이야기는 없었는가요?
  
  답 : 죽기 30분전쯤에 『누명쓰게 됐다』고 연거푸 네 번씩이나 말을 한 후 결국은 죽었습니다.
  
   더욱 굳어진 [죽음의 깍지]
  
  두이분의 자살은 참으로 낭패였다. 이 사건의 기획자(변호인들은 실천자를 겸했다고 주장)인 그의 죽음은 진실 규명의 가정 중요한 정보원(源)이 상실된 것을 뜻했다. 오휘웅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무고함을 (언젠가는) 입중해줄 유일한 증인이 없어진 셈이었다. 공범 관계에 있어서는 『같이 했다』는 한쪽의 증언을 부정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같이 했다』는 동료의 증언을 반증할 방법은 범행의 유일한, 그래서 가장 권위있는 증언자인 동료의 양심 이외엔 없다. [나는 살고 싶다]란 영화로도 유명해진 원죄( 罪)사건의 여주인공도 끝까지 범행가담을 부인했지만 다른 범인들이 같이 했다고 우기는 바람에 사형장으로 보내졌던 곳이다. 서울 구치소에서 사형수 교화를 오래 담당했던 김준영 목사에 따르면 이런 사건도 있었다.
  
  『어느 호텔 경영주의 집에서 일하는 가정부가 여주인을 죽이고 보석을 훔쳐 달아나다가 경찰에 붙들렸다. 가정부는 그 호텔의 주방장인 애인과 함께 범행했다고 했다. 주방장은 부인했으나 1심에서 두 사람은 사형 선고를 받았다. 항소심이 진행중에 여자가 자살했다. 여자는 자살 직전에 자신이 저지른 살인은 실제론 단독범행이었고, 남자는 억울하다는 유서를 남겼다. 이유서가 유력한 증거가 되어 남자는 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다』
  
  이 사건에서는 남자와 [죽음의 깍지]를 꼈던 여자가 죽기 전에 그 깍지를 풀어줌으로써 남자의 누명을 벗겨준 경우다. 오휘웅 사건에선 두이분의 죽음이 그 깍지를 더욱 단단하게 고정 시키는 역할을 했다. 남편과 아들·딸·살해의 진범이 두이분이라면, 진범이 뒤늦게 잡혀 누명쓴 오휘웅이 풀려나는 행운도 더는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죽기 전에 두이분이 말했다는 내용은 오휘웅에의 혐의를 더욱 뒷받침하는 쪽으로 활용되었다.
  
  검찰은 두이분의 자살직전 하소연을 들었다는 이주순 여인을 증인으로 세워 두이분의 자살을 유리한 방향으로 극적으로 이용하는 데 성공했다. 『죽을 때 설마 거짓말을 하겠느냐?』는 인간 양심에 대한 믿음이 이 경우에는 오휘웅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검찰측에선 이주순에 이어 7차 공판에선 인천 소년교도서 지광남 교도관을 증인으로 세웠다. 오휘웅과 두이분은 미결수로서 소년교도소의 미결수 동(棟)에 수용되어 있었다. 지 교도관은 두 사람이 검찰이나 법정에 출정할 때 계호 임무를 맡았다. 두 사람이 검찰에 신문 받으러 가는 도중에 서로 하던 이야기를 엿들었다는지 교도관은 이렇게 진술했다.
  
  […그때 두이분이 오휘웅에게 말하기를, 『그동안 부인하는 것을 보니 남자로서 비겁하더라. 그런데 오늘 전부 자백하는 걸 보니 측은한 마음이 든다. 나는 일가족 전부가 죽어 살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당신은 총각이며 부모형제가 있으니 살아라. 나는 교도소 안에서 알게 되었는데 교사범이 직접 죽인 사람보다 죄가 더 무겁다고 하더라. 당장에라도 검사님에게 내가 혼자 전부 저질렀다고 말하마』이에 대해 오휘웅은 두이분에게, 『지금 검사 앞에서는 다 끝났다. 여기서는 필요 없고 법정에서 번복해주기 바란다』고 했다] 이 증언도 재판부에선 오휘웅에게 불리한 쪽으로 채택했다.
  
  두이분의 자살 심리
  
  오휘웅에 대한 두이분의 감정은 엎치락뒤치락했음이 조서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두이분은 당초 범행을 부인했었는데 오휘웅이 먼저 자백, 자신을 물고 들어갔다고 원망했던 것 같다. 그러나 경찰 2회 신문에서 두이분은 『죽은 사람이 불쌍하기도 하나 저 때문에 한 일이므로 형을 받고 나가면 그이와 같이 살겠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범행 책임을 오씨에게 돌리려는 회피 진술도 했다. 오씨가 수면제를 남편에게 먹이라 해 먹였다고 변명하고 아이들까지 죽인 데 대해 원망했다지만, 두이분은 아이들에게도 수면제를 먹였으므로 아이들에 대한 살의를 처음부터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검찰에 넘어가 오휘웅이 범행을 부인하자 두이분은 『자기만 살려고 나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습니다. 오휘웅을 사형에 처해 주시오』라고 진술했다.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 오휘웅이 부인하면 두이분은 대단히 흥분했었다고 한다.
  
  남편·아이를 희생시키면서까지 같이 살려고 했던 그 지독한 애정은 왜 증오심으로 변해 버렸을까? 같이 범행을 저질러 놓고 혼자만 살려고 하는 오휘웅에게 배신감을 느낀 때문인가? 아니면 처음부터 오씨가 무고한 줄 알면서도 물고 들어가 공동운명체로서의 상호위안, 또는 안도감을 구하려 했었는데 오씨가 증인을 세워 빠져 나가려하자 배신·소외·무력감을 느껴 증오하다가 자살한 것인가? 오휘웅이 비록 공범은 아니지만, 두이분은 자신이『그를 위해, 그 때문에 죄를 지었으므로』 오휘웅도 자기를 위해 고통을 나눠 가질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던가? 오휘웅이 두이분의 짐을 분담하길 거부하자 사랑은 미움으로 변했던가? 이상과 같은 여러 가설을 두고 두이분의 자살심리를 규명하는 것은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재판장, 고민 끝에 사형 선고
  
  재판부는 75년 6월30일 오휘웅에게 살인죄를 적용, 사형을 선고했다. 김진우 재판장 등 3명의 판사는 검사가 제출한 증거들―경찰과 검찰에서의 자백 조서, 수사과장과 오휘웅의 대화가 담긴 녹음 테이프, 이주순·지광남의 증언―의 신빙성을 전부 인정하여 이같이 판결했다. 검찰측 주장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인 선고였으므로 판결문도 타자지 5장 분량으로 간단했다. 그러나 재판장이 이 선고를 내리기까지의 고민은 간단하지가 않았다.
  
  지난 7월의 전화 인터뷰에서, 지금은 서울 서소문에서 변호사를 개업하고 있는 당시의 재판장 김진우는 놀랄 만큼 솔직하게 그때의 심정을 나에게 털어놓았다. 나는 그로부터 왜 사형 판결을 내렸는가에 대한, 일말의 의구심도 없는 확고한 설명을 들을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99%의 확신이 있어도 1%의 불확실성이 있으면 유죄 판결을 내리지 않는 것이 재판의 원칙이라고 알았고, 『의심 나면 무죄다』는 법언을 귀동냥으로라도 들은 탓이리라.
  
  김진우 변호사는 첫마디부터 나의 예상을 깨뜨렸다.
  
  『그 사건으로 참 고민 많이 했습니다. 지금도 그 판결이 마음에 걸립니다. 그 사건은 처음부터 자백 중심으로 돼 있었고 수사도 잘 돼 있지 않아 판결에 애를 먹었습니다. 오휘웅이 꼈다는 장갑의 행방도 수사가 안 돼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선고 단계에서 수사를 다시 하라고 할 수도 없고…선고를 내린 뒤 항소심 판사한테 제가 찾아갔습니다. 1심에서 합의를 하기는 했는데 미심쩍은 게 있으니 2심에선 잘 살펴 보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사형 선고를 내려놓고 고민하다가 더 정확히 재판해 달라고 고등법원 판사를 찾아갔다는 너무나 솔직한 실토에 나는 가슴이 찡해졌다. 아무리 판사직을 떠났다고 해도 생면부지의 기자에게 이렇게 털어놓기란 드문 일이다. 그만큼 김변호사의 가슴에 들어앉아 있는 그 사건의 무게가 큰 것이리라.
  
  『녹음 테이프(수사과장―오휘웅 대화)를 몇 번이나 들었습니다. 그 사건은 유죄, 무죄의 갈림길에 있었습니다. 두이분은 법정에서 오휘웅이 범행을 부인하니까 흥분하여 막 열변을 토하기도 했습니다. 여자가 자살하는 바람에 판결은 더 어려워졌지요. 오휘웅이 무죄라면 결국 두이분이 세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여자가 과연 혼자 힘으로 세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 남편은 죽일 수 있다 해도 아이들까지 죽일 수 있는가, 하고 깊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 노인들한테도 물어 보았는데, 여자가 그럴 수는 없다는 거에요.
  
  그 사건이 항상 마음에 걸려요. 혹시 잘못된 것이 아닌가……그러나 기록상으로도 유죄가 안 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배석 판사들과도 토의를 신중히 했는데 증거법 상으로는 유죄가 아니냐 하는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재판이란 건 사람이 하는 것 같지만 실은 제도가 하는 것 아닙니까? 그 제도의 규칙을 안 따를 수 없지요. 신(神)과 제도는 같을 수 없지요. 신은 완벽하지만 제도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법정에서 오휘웅의 태도가 별로 좋지 않았어요. 재판부에 신빙성을 줄 수 있는데 태도를 취하지 않았어요. 항소심에서도 그랬는가 봐요. 1심까지는 줄곧 두이분과의 간통 사실을 인정하다가 2심에 가서는 이것도 딱 잡아 뗐어요. 잘 되길 바랐는데…』
  
  신과 제도가 다르다는 그의 말은 재판이라는 제도나 형식에 너무 충실하다가 보면 억울한 판결도 나올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변호사의 활동, 너무 미약
  
  진실을 밝히는 데 있어서 항소심은 상고심보다 중요하고 1심은 항소심보다 더 중요하다. 수사는 1심보다도 더 중요하다. 검사는 경찰의 수사 자료에, 1심은 검사가 제출한 증거에, 항소심은 1심의 경과에 의해 판단상의 제약을 받기 때문이다. 최후심인 상고심에 가면 이미 사실 판단의 정확성 여부는 문제가 되지 않고 법리 적용의 정당성 여부가 쟁점이 된다.
  
  오휘웅 사건은 가장 기본이 되는 초동수사에서부터 엉망이 돼 있었으므로, 김진우 1심 재판장의 실토대도 선고에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최근 이 사건 관계자들을 만나보니, 인천 경찰서의 당시 강력반 형사들은 초동 수사를 했던 지역반 형사들 때문에 수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하고 검사는 같은 논리로 경찰을 비난했으며 1심 재판장은 겸찰·경찰의 엉성한 수사를 또 비판했다. 재판이 좋은 작품이 되려면 형사, 검사, 변호사, 판사가 다 같이 본분을 잘 지킬 때라야 가능한데 오휘웅 사건에선 경찰은 물론이고 변호사마저 활동이 미약했다.
  
  가장 중요한 1심 재판에서 있었던 변호사 반대신문 기록 등을 살펴보면 너무나 문제접근이 피상적인 데 놀랄 정도이다. 가장 중요한 증거가 된 오휘웅의 자백이 고문에 의한 것임을 변호사가 입증했다면 판결 결과는 달랐을 것이고, 그 입증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는데도 이 부문에 대한 변호사의 기여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알리바이 문제의 열쇠인 현장의 지리와 주요 지점간의 거리를 현장 답사로 확인했다는 흔적도 없다.
  
  알리바이 문제도 깊게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오휘웅의 아버지 오기남은 『1심, 2심에서 변호사를 잘못 선임하여 우리가 진 것이나 다름없다. 상고심에서 좋은 변호사를 만났지만 그때는 이미 너무 늦었었다』고 했다. 오휘웅은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뒤 항소, 75년9월12일 서울고법 117호 법정에서 항소심 1차 공판이 열렸다. 재판장은 홍순표, 배석 판사는 김광년·주환석, 담당 검사는 김태원, 변호사는 김구남이었다.
  
  항소심에서도 오휘웅은 1심에서와 꼭같이 범행을 부인했는데, 1심까지는 시인했던 [두이분과의 동침]까지도 부인했다. 왜 전에는 시인했었느냐는 판사의 물음에 대해서는 『이 살인 사건과는 직접 관계가 없는 것 같아서 그렇게 허위 진술했다』고 답했다. 검사 신문에서 두차례 부인하다가 다시 범행을 자백을 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답했다. 『지하실(검찰청)로 끌고 가사 고문을 하여 하는 수 없이 자백을 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대답에서 보듯 오휘웅은 수사, 재판 과정에서 요령부득의 대답을 많이 하고 있다.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는 기술도 아주 많이 부족했다. 고문을 받았으면 어떤 상황에서, 어떤 방법으로 받았는지 사실적으로 묘사해야 신빙성을 줄 터인데 덤덤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피고인의 표현력이 부족하면 변호사가 집요하게 질문을 던져 피고인이 자연스럽게 상황을 묘사하도록 유도해야 하는 데 그런 노력은 1,2심 어디에서나 보이지 않는다.
  
  친척들에 따르면 오휘웅은 고집과 오기가 대단하여 자기가 당한 고통과 수모를 가족한테도 이야기하기를 싫어 했다고 한다. 아버지 오기남에 따르면 면회 때 딱 한번 검찰청 지하실에서 고문당한 이야기를 하더란 것이다. 『너무나 혹독하게 당해 자살하려고 셔츠를 찢어 목을 맨 적이 있다』는 얘기였단다. 오휘웅은 검사 앞이나 법정에서 두이분이 『같이 했다』고 열을 올려도 별 대꾸없이 덤덤하게 앉아 있기만 했다는데, 그의 가족은 이런 소극적 태도가 판검사에게 나쁜 심증을 준 것 같다고 풀이하기도 했다.
  
  어쨋든 오휘웅은 성격상 좋은 변호사를 절실하게 필요로 사는 사람이었지만 변호사 운도 나빴던 것 같다. 2심 2차 공판에서 변호사는 사건 직전 오휘웅과 혼담이 오고가던 김모양의 남동생 김종철(당시 20세)을 증인으로 불렀다. 김씨는 두이분이 김양집에 찾아와 김양과 찾아와 김양과 오휘웅이 결혼하면 재미없을 것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변호사는 이 증언을 통해서 총각인 오휘웅은 두이분에게 빠져 있지 않았고 두이분만 오휘웅을 짝사랑하고 있었다는 것, 따라서 오휘웅이 두이분과 같이 살기 위해 세 사람을 죽일 이유가 없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했던 것이다.
  
  애매한 점과 쟁점이 너무나 많은 재판인데도 진행은 빨라 불과 세 번째 공판에서 선고가 나왔다. 10월17일 공판에서 재판부는 피고인의 항소를 기각, 원심의 사형 선고를 지지했다.
  
   상고 이유서―『하수인은 두이분』
  
  오휘웅은 상고했다. 이때쯤 되어서는 가난에 쪼들린 가족들도 기진맥진, 있는 돈을 다 까먹었다. 그래서 국선변호사가 붙게 되었다. 그 변호사가 이범렬이었다. 국선이었지만 이 변호사가 1,2심의 어느 사선 변호사보다도 성의껏 변론서를 작성했다고 오휘웅의 가족들은 지금도 고마워하고 있다. 이 변호사가 75년12월19일에 작성한 상고 이유서는 독특한 스타일의 명문이다. 우리가 으레 보아온 길고 무미건조한 법률적 문장이 아니다. 기사체를 연상시키는 짧고 명쾌한 문장에다가 개탄과 분노의 솔직한 표현까지 담아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변론서가 되었다. 이 변론서는 오휘웅의 범행가담설에 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비판을 하고 있으므로 그 요지를 소개한다.
  
   1. 유죄 증거의 검토
  
  ①이주순·지광남의 증언 : 두사람이 이 증언한 두이분의 자살 직전 이야기나 두―오의 대화는 두이분이 한 자백이상의 신빙성이 없으므로 별개의 증거로 삼을 가치가 없다.
  
  ②두이분의 진술 : 두이분은 두 가지 대죄를 저지른 용서받을 수 없는 여자다. 남편과 자식을 죽였고, 무고한 남자를 살인범으로 조작하려다가 끝내 자책으로 자살했다. 세 사람의 피살자는 두이분이 혼자서, 그 자신의 손으로 죽인 것이다. 변호인은 본 사건에 대한 진술처럼 전후가 모순되고 부조리에 충만된 지리멸렬한 진술을 본 적이 없다. 두이분의 진술은 절대적으로 신빙할 수가 없다. 먼저 범행공모의 시기를 진술로서는 알 수가 없다. 10년을 같이 살아온 남편과 자신의 혈육을 죽이는 일인데 번뇌와 주저와 결단과 또 이런 것의 반복이 무수히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끝내는 천인단애에서 뛰어내리는 결단과 방법·시기 등에 대한 결심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진술에선 두 사람이 구체적 의사 합치가 언제 있었는지 알수가 없다. 두이분은 왜 수면제(아티반)를 탄 사이다를 먹였는가? 남편이 자신의 늦은 귀가를 질책하지 못하도록 하려고, 즉 일찍 잠재우려고 먹였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두이분은 그날 외출도 하지 않았으므로 질책당할 이유가 없다. 그래도 남편과 아이들에게까지 먹인 이유는 간단하다. 연약한 여자의 손으로 건장한 남자를 살해하려니 피해자의 항거불능상태. 즉 숙면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피고인(오휘웅)의 살해 동기가 모호하다. 한 때 두이분과 가벼운 사연(필자주 : 두 사람은 한번밖에 동침하지 않았다고 진술)이 있었다고 해도 혼담중의 총각이 아이까지 딸린 가난한 유뷰녀와 살기 위해 살인을 할 수는 없다. 절박한 동기 없이 살인한다는 것은 경험 법칙상 있을 수 없다. 범행이 두사람의 공모 끝에 감행된 것이라는 두이분의 진술과 배치되는 사정이 너무나 많다. 어두운 상태에서 오휘웅은 어떻게 선반 위의 칼, 줄칼, 노끈, 그리고 옷장안의 넥타이·마후라 등을 찾아내 범행에 사용할 수 있었단 말인가?
  
  계획된 범행을 저지르기 위해 찾아온 오휘웅이 범행 직전에 사진관에서, 군고구마 장수에서 신분을 노출시킨 처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범행 직전에 군고구마를 나눠 먹으면서, 찾아온 사진을 나눠 보며 한 장 다오, 안된다 하는 식의 유장한 행동을 한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피고인(오휘웅)이 범인이라 전제한다면 이런 점은 경험칙상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다. 결국 두이분의 진술은 유죄―그것도 살인죄―의 증거로서는 결코 채용할 수 없는 것이다.
  
  ③ 피고인의 자백 살인 동기를 『……두이분이 팔을 끌어들여서 술김에 다 처치해버리고 같이 살겠다는 마음이 들어……』라고 검찰에서 진술하고 있는데 이것은 한 마디로 거짓이다. 피고인은 불교인이다. 개를 때려 잡아 달래도 주저했을 것이다. 어떤 자백을 진실한 것이라고 판단하는 기준의 하나로 [비밀의 폭로]라는 말이 있다. 진범만이 알 수 있는 내용이 있어야 믿을 수 있다는 뜻이다. 오휘웅의 진술을 답습한 것으로 새로운 바가 없다. 달리 객관적인 유죄의 증거가 없는 경우 이런 자백은 유죄의 자료로 쓰여서는 안되는 것이다. 결국 피고인이 진범이란 증거는 기록상 존재하지 않는다.
  
   2 반증(反證)
  
  ①부재증명 : 그날 저녁 피고인에겐 범행시간이 절대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세 사람이 살해된 시간은 그날 저녁 6∼8시55분 사이라는 점만이 분명할 뿐 정확한 살해 시간은 알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살해 시간에 피고인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추궁하지말고 피고인의 행적을 추궁, 피고인이 범행할 시간적 여유를 갖고 있었는지를 조사해야 한다. 저녁6시 이후 피고인이 망년회, 교회 집회에 참석한 다음 8∼8시10분 사이에 두이분의 집을 향해 불교회관을 떠났음은 확정적인 사실이다.
  
  회관∼두이분 집의 거리는 도보로 빨라야 약13분(보통 15분)이 소요되는 정도다. 두이분집에서 두이분을 만나 인삼주 한잔 얻어 마시고 몇 마디 하고 사진관으로 떠날 때까지의 시간은 적어도 2분을 잡아야 한다. 두이분집∼사진관 사이 거리는 걸어서 약 2분이다. 사진 찾고 나와 군고구마를 사서 두이분 집에 오려면 적어도 왕복 6분은 걸림으로 피고인이 두 번째로 두이분 집을 찾은 것은 밤8시21분∼8시31분경이 된다.
  
  피고인 오휘웅이 범인이라고 가정한다면 가장 빠른 범행 착수 시간은 (8시21분)+(찾아온 사진을 두이분이 군고구마를 먹으면서 본 시간), 즉 8시21분에서 최소한 1∼21분이 경과한 시간이 된다. 범행 시간을 산출해 보면 의사 김갑환의 진술대로 한 사람을 목졸라 죽이는 데는 3―5분이 걸린다고 할 때 세 사람을 죽이는 데는 적어도 10∼15분이 걸린다(범행 도구 찾는 시간까지 참작). 따라서 피고인이 범인이라면 범행을 완결하고 두이분의 집을 나온 시간은 밤8시32∼8시42분 사이이며 절대적으로 이보다 빠를 수는 없다. 두이분 집에서 피고인 집까지 걸어서 7분 거리이므로 피고인의 귀가 시간은 밤8시39∼8시49분이었어야 한다.
  
  그런데 당시 피고인 집에 모였던 신도증인들은 여러 번의 추궁을 받고도 오휘웅의 귀가 시간을 8시30분으로 고집하고 있다. 이들의 나이·직업 등으로 보아 위증했다고 보여지지 않는다. 모두가 시계에 근거하고 시간에 민감할 수가 있는 사람들이다. 피고인이 범인이라면 밤8시40분 이전에는 절대로 귀가했으므로 피고인에게는 그날 범행 시간이 존재할 수가 없었다. 이상은 회관 출발시간, 도보시간, 체류시간 등에서 피고인에게 가장 불리한 시간을 근거로 계산한 것이다. 그것은 양보를 거부하기 위해서다. 피고인은 그가 원하더라도 이 사건의 범인이 될 수는 없다. 실체적 진실을 캐내는 법원은 모험을 피해야 할 것이다.
  
  ② 지문의 없음 : 피고인이 범인이라면 장롱 속에서 지문이 발견되어야(두이분의 지문은 발견됨)하는데 없었다는 것은 뚜렷한 물적 반증이다.
  
   대법원, 사형 확정 판결
  
  대법원의 판결은 1976년2월24일에 있었다. 재판장은 홍순엽 대법원 판사, 간여 판사는 양병호·이일규·강안희. 판결문은 이범렬 변호사의 상고 이유서를 조목조목 반박하는 형태로 씌여졌다. 판결문은 먼저 이주순·지광남 등 주요 증인들의 증언을 믿을 만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두이분이 자살하기 직전에 억울하다고 했다는 이주순의 증언에 대해 『모든 것을 체념한 상태에 이뤄진 이야기임을 참작할 때 믿을 수 있다』고 했다.
  
  두이분의 진술이 오락가락한다는 상고이유에서의 주장에 대해선 『범행의 주요 부분에 관해서는 그 진술이 전체적으로 일관되어 있으며 미세한 국부적인 점에 있어서 엇갈린 진술이 있다고 하여 믿을 수 없다고 단정할 순 없다』고 했다. 범행 공모 시기가 애매하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살해하기 직전에 이뤄졌다고 봐야 한다』고 했다. 판결문은 또 『여자가 남자를 목졸라 죽인 예를 알지 못한다』는 의사의 이야기를 이유있다고 했다. 두이분의 심리 상태에 대해서 판결문은 『피고인(오휘웅)을 두이분은 이성을 잃을 정도로 사랑하고 있었는데 피고인이 모든 책임을 두이분에게 뒤집어 씌워버리고 혼자만 빠져 나가려 하자 억울함과 원망, 후회, 환멸 등의 마음이 뒤범벅되었으며……두이분이 피고인을 기어이 공범으로 끌어들이지 않으면 안될 사유를 발견할 수 없다』고 했다.
  
  판결문은 이 밖에도 경찰, 검찰에서 범행을 시인한 오휘웅의 자백이 믿을수 있고, 오휘웅이 1심 법정에서 『검사로부터 고문을 받은 바 없다』고 진술했음을 상기시킨 뒤 검찰에서 당초엔 부인하다가 『양심의 가책으로 다시 자백한다』는 오휘웅의 심경변화도 허위로 볼 수 없다고 했다. 오휘웅이 경찰에서 송도 솔밭에서 두이번과 애무한 사실을 맨먼저 진술했고, 살해방법에 대해서는 오로지 피고인만이 진술하고 있는 점을 들어, 변호인이 상고이유서에서 주장한『오휘웅의 자백은 선행한 두이분의 진술을 답습하고 있다』는 요지를 반박했다.
  
  부재증명에 대해서도 오휘웅의 귀가시간에 대한 신도들의 증언은 믿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장롱 속에서 오휘웅의 지문이 나오지 않은 점에 대해서는『지문이 없다고 해서 원판결이 각 증거에 의해 유죄 판결한 것이 잘못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고 하고 『피고인은 면장갑을 끼고 피해자 집에 갔었다는 사정을 참작하면 더욱 그러하다』고 했다.
  
출처 : 월조
[ 2003-07-04, 16:4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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