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증 없는 사형집행(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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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증(物證) 없는 사형(死刑) 집행
  
  교수대에서 결백을 유언하고 죽은 '일가족 살인범' 오휘웅은 사법살인(司法殺人)의 희생양인가? 물증없는 사형선고, 재판장의 고민, 가혹수사. 10년만의 추적취재로 드러나는 충격의 사실들. 왜 그는 생의 끝장에서까지 항변을 멈추지 않았던가?
  
  <1984년 9월 월간조선>
  
   교수대에서의 마지막 항변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사형은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엄숙한 의식(儀式) 이기도 하다. 『연필이 떨어지는 소리에도 소스라쳐 놀라는』 숙연하고 팽팽한 공기가 늘 형장을 감싸고 있다.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 서울 구치소 내 사형장은 흰 담으로 둘러싸인 작은 기와 목조 건물이다. 사형수들은 보통, 연출조(連出組)에 이끌려 이 건물의 모퉁이를 왼쪽으로 돌아 측면에 난 문을 통해 건물 안, 곧 형장으로 들어간다. 오래 되어 꺼멓게 변색된 마루바닥. 그 앞에는 약간 높은 강단이 있다. 강단 위에 이 의식의 집행관인 구치소장이 의자에 앉고 그 옆에 서울지검의 입회 검사, 다시 그 옆에 목사가 자리잡는다.
  
  이날 오휘웅(34세·이하 경칭 생략)은 연출조 3명에게 인도되어 강단 바로 밑의 네모난 돗자리 위에 앉혀졌다. 연출조(구치소 직원) 3명은 오휘웅의 등뒤에 가로로 섰다. 양쪽 벽에는 계호(戒護) 임무를 띤 직원들 10여명이 늘어서 있었다. 의식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공판과 비슷하게 진행되었다. 집행관은 오휘웅의 신분장(帳)에 따라 번호, 이름, 죄명, 본적, 현주소, 입소 날짜를 묻고 다부지게 생긴 오휘웅은 또박또박 대답했다. 인정 신문 뒤엔 사실 심리. 기소 내용 1심 판결, 항소 제기 날짜, 항소 기각 날짜, 상고 제기, 기각 날짜를 집행관은 확인한 뒤 선언하듯 말했다.
  
  『법무부 장관의 명령에 의하여 1997년 9월 13일 오휘웅에 대한 사형을 집행한다』 이어서 집행관은
  『유언이 있으면 말하시오』라고 했다. 오휘웅은 말했다. 그 태도는 겸허하면서도 당당했었다고, 이 의식의 목격자들은 한결같이 증언하고 있다.
  『나는 죽이지 않았습니다. 사형은 억울합니다. 도덕적으로 제가 잘못한건 있을지 모르지만 법률상으로 저는 무죄입니다. 내가 무고하다는 것은 하나님도 알고 계십니다. 이 자리에는 검사님도 나와 계시지만 나와 같이 억울하게 죽는 사람이 다시는 안 생기도록, 옥석을 분명히 가려 재판을 해주십시오. 나의 이 유언을 가족에게 전해 주십시오. 내가 사형된 뒤에도 재심을 신청하여 나의 억울함을 밝혀달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 주십시오』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사형장에 울려 퍼진 오휘웅의 마지막 항변은 의식의 참석자들을 일순간 아연케 했다. 유언의 내용이 목숨을 구걸하는 게 아니라, 명분 있는 충고였기 때문에 그 중단될 만큼 우리의 사법 절차가 인간적이지는 않다. 의식은 계속됐다. 한때 독실한 일련정종교도였던 오휘웅은 이날 기독교인으로서 그 짧은 생의 마지막 순간들을 거쳐갔다. 김준영 목사의 기도, 이어서 찬송가를 교도관들과 함께 불렀다. 찬송이 끝나자 집행관의 눈짓에 따라 연출조 직원들은 오휘웅을 일으켜 세웠다. 뒤에서 한 사람이 그의 상체를 싸잡아 안는 사이 다른 사람은 흰 광목으로 된 용수를 머리 위에서 덮어 씌웠다. 무릎 밑, 그리고 두 팔과 상체를 밧줄로 동였다.
  
  천장에서 흰 커튼이 떨어졌다. 강단 쪽과 집행장 쪽은 이 커튼으로 차단되었다. 연출조 직원들은 뒤에서 오씨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상체를 껴안고 비스듬히 뒤로 눕혀 끌고 갔다. 교수대의 밧줄은 천장에 매달려 늘어뜨려져 있는데 끝은 바닥에서 약 70㎝ 되는 허공에 떠 있다. 의자는 없다. 오휘웅은 바닥에 앉혀지고 그 자세에서 목에 밧줄의 고리가 걸렸다.
  
  직원들은 몇 걸음 물러났다. 사형장 건물 뒷벽 바깥에서 한 직원이 포인트라고 불리는 핸들을 돌렸다. 오휘웅이 앉아 있던 나무바닥은 쇠로 만든 지지대로 받쳐지고 있었다. 이 지지대가 옆으로 벗겨 빠져 나가자 나무바닥은 [자로 꺽이면서 내려앉고 오휘웅의 몸은 지하실의 허공에 매달려다. [쾅]―교수대 바닥이 지하실 벽을 치는 소리는 한 생명의 종결을 알려 주었다.
  
   과연 억울하게 죽었나?
  
  오휘웅의 유언은 실천되지 않았다. 아무도 가족에게 유언을 전달하지 않았다. 그의 가족들은 사후(死後) 재심 신청을 하지 않고 있다. 오휘웅의 유언은 그 형장에 참석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평생 잊지 못할 충격을 주었다. 집행을 받아들이는 사형수들은 대체로 담담한 태도를 보인다. 사형 확정뒤의 체념, 참회, 명상, 그리고 종교에의 귀의……. 많은 사형수들은 속죄하고 천당에 간다는 기대감으로 사형을 [즐겁게] 맞기도 한다. 형장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형수들이 없는 건 아니다. 아내를 죽이고 시체를 토막냈다고 하여 사형된 이팔국은 집행 전에 『아내를 죽이려고 때린 건 아니었다. 살의는 없었다』고 말하고 『경찰에 자수까지 했는데 폭행치사 가지고 사형은 너무하다』고 원망했다.
  
  어느 사형수는 『나의 죄목 세 가지 가운데 하나는 내가 했지만 나머지는 뒤집어 쓴 것이다. 내가 저지른 한 가지 범죄로는 사형이 성립되지 않으므로 억울하다』고 변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휘웅처럼 단호하게 자신의 죄목을 전면 부정한 사형수는 처음이었다고 10여년간 내리 집행에 참여했었던 서울 구치소의 어느 직원은 말했다. 이날 오휘웅의 유언을 들은 목사, 교도관 등 많은 사람들은 오휘웅이 억울하게 사형된 듯하다는 느낌을 여태까지도 강하게 갖고 있다. 그의 무고함을[확신]하는 사람도 많았다.
  
  『인간이 죽음을 앞두고, 그 짧은 생의 마지막 시간에 뭐 할 일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겠느냐?』『과연 억울하게 사형됐을까?』라고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한 목격자는 이렇게 내뱉았다. 이 말에 자극되어 나는 오휘웅의 사형, 그 정당성 여부를 알아보기로 한 것이다.
  
   아빠·아들·딸이 피살체로
  
  세모의 들뜬 분위기가 감도는 1974년 12월30일밤 10시40분쯤이었다. 수인역 근방인 인천시 신흥동 삼성라사(양복점)에 이웃에 사는 두이분(28·중구 선화동 30번지)이라는 여자가 들어왔다. 양복점 여주인 이옥녀에게 두이분은 겁먹은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집 문고리를 채우고 외출했었는데 벗겨져 있으니 같이 들어가 봅시다』이옥녀는 두이분을 따라 두이분 부부가 꾸려가고 있는 쌀가게로 갔다. 이옥녀는 도둑이 든 것으로 짐작했다. 먼저 두이분이 방안으로 들어가 전등을 켰다. 두이분은 그 순간 비명을 지르며 쓰려졌다. 그 소리에 이옥녀도 방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방바닥에는 옷가지들이 흩어져 있었다. 두 평 남짓한 방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장롱 문은 열려 있었다. 두이분의 남편 정시화(38)는 방문가에 엎어져 있었다. 아들 정연홍(8)과 딸 정연경(6)은 아버지와 반대 방향으로 누워 있었다. 세 사람은 축 늘어져 있었다. 이럴 때는 역시 남자가 있어야 한다. 두이분이 『아이, 어떻게』라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사이 이옥녀는 바깥으로 뛰어나가 고무신 가게주인 엄인환을 데리고 왔다.
  
  엄씨의 증언을 듣는다.
  『……방문턱에서 두이분은 남편의 상체 위에 엎드려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연탄가스 중독이라고 생각했다. 급히 방안으로 들어 갔다.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 차례로 들어내 길에다 눕혀 놓았다. 두이분을 남편(정시화) 몸에서 떼어 정씨를 끌어내려고 하는데 불빛에 보니 그의 목에 넥타이 끈이 한바퀴 돌려져 비비 꼬여 있었다. 그는 이미 시체였다. 그 옆에 식칼이 있었다. 이 때 신흥파출소 경찰관들이 달려왔다』(경찰 참고인 조서).
  
  경찰관과 이웃 사람들에 의해 정시화의 그의 아들, 딸 등 세 명은 실신 상태의 두이분과 함께 그날 밤 11께 도립 인천병원(중구 신흥동) 응급실로 옮겨졌다. 세 사람은 벌써 죽어 있었다. 여기서 정시화의 목에서는 칼로 그은 상처가 확인됐다. 두 아이의 목도 끈으로 졸려저 있었다. 남자아이의 목을 조른 끈을 신흥 파출소의 김우식 경장이, 여자아이의 끈은 간호원이 풀었다. 다음날 인천 경찰서가 인천지방검찰청에 올린 변사 보고서는 세 사람의 사망을 [가정 불화에 의한 동반 자살]로 추정했다. 다음날 신문들도 도난된 금품이 없는 점으로 보아 집단 자살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흐트러져버린 현장
  
  연말·연시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자살로 간단하게 처리될 것 같았던 이 사건이 되살아 난 것은 한 검사사의 [느낌]에 의해서였다. 인천 경찰서에서 올라온 변사 보고서를 본 인천지청의 당직검사 안길수는 자살로 보기에는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천 경찰서 정기섭 수사과장(현재 서울 노량진 경찰서장)과 함께 3명이 사체가 보존되어 있는 도립병원으로 갔다. 지금은 수원에서 개업하고 있는 안길수 변호사는 이렇게 당시를 회상했다.
  
  『병원에 가 보니 영안실에서 두이분은 흐느끼고 있었다. 살결은 희고 몸집이 작은 여자였는데 잘 생긴 얼굴이었다. 우는 모습이 뭔가 좀 어색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수사과장에게 사체는 부검하고 저 여자 뒤를 캐보라고 수사를 지시했다. 만약 그때 병원에 가지 않고 경찰 보고서만 믿고 사체를 유족에게 인계하라고 지휘했다면 이 사건은 자살로 종결됐을 것이다』 인천 경찰서가 [자살 추정]으로 보고한 것을 골치를 아프게 하는 타살 사건을 자살 사건으로 위장해버리려 했다는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이었다.
  
  현장에서 발견된 칼, 변사자의 목에 난 자상, 목을 조른 끈 등등 타살로 보아야 할 증거는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경찰의 은폐 기도와 엉망진창이 된 현장 보존은 이 사건의 수사와 재판과정에 치명적인 결함으로 남아 나쁜 영향을 계속 끼치게 된다. 현장은 흔히 수사의 원점이며, 보고라고 한다. 현장에서 수사의 단서, 범행을 뒷받침할 물증이 발견되고 수사의 방향도 그곳에서 설정된다. 범행 현장을 엄격하게 원형대로 보존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 사건의 현장은 형편없이 흐트러져버렸다. 원칙대로 한다면 변사 신고를 받은 경찰관은 의사를 데리고 현장에 출동, 사체를 검안하고 현장을 보존한 뒤 검사에게 변사 보고서를 제출, 그의 지휘를 구해야 한다. 이 사건에서 사체를 맨 먼저 발견한 사람들은 당황한 나머지 시체를 바깥으로 들어냈다. 뒤에 출동한 경찰관들도 현장 보존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을 뿐 아니라 피살자들의 목에 매인 끈을 풀어버리는 해괴한 행동을 했다.
  
  이 끈은 그 맨 상태에 따라 사인이나 범행 방범, 범인의 성별, 윈손잡이 여부 등을 알아내는 데 결정적 실마리가 되는 데도 경찰관의 무지한 행동으로 그 중요한 자료가 없어지게 된 것이다. 사체 검안도 허술했다. 도립 병원의사 김갑환은 검안서에서 세 사람의 사인을 경부 압박(목누름), 사망 추정 시간은 10시 50분이라고 썼다. 수사·재판 과정에서 이 사건이 엉터리로 밝혀지자 그는 『경찰관의 말만 듣고 그렇게 썼다』고 변명했다. 범행 시간과 용의자의 알리바이 문제가 유·무죄를 좌우하는 핵심이 된 이 사건에서 사망 추정 시간이 이 모양이었던 것이다.
  
   오휘웅, 자백하다
  
  세 사람의 사체가 발견된 그 다음날(74년 12월31일) 새벽2시에 오휘웅(당시 29세)은 인천시 중국 신흥동3가 26번지 자기 집에서 경찰에 연행됐다. 그는 신흥 파출소에서 조사를 받고 그날 밤9시에 집으로 돌아왔다. 파출소에서 오휘웅은 정시화, 두이분 부부와의 관계에 대해 진술했었다. 오휘웅은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잔 뒤 다음날인 78년 1월1일 이발소에 갔다. 이발중에 그는 다시 경찰에 연행되었다. 오후2시 무렵이었다. 이때 인천 경찰서는 이 사건의 수사를 신흥동 지역반 형사들이 아닌, 정용달 경장등 강력반 형사 5명에게 맡겨 놓고 있었다. 타살이 분명한 사건을 자살로 몰고 가려고 했던 지역반 형사들에 대한 불신의 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오휘웅은 파출소에서 강력반 형사들에 의해 몸 수색을 당했다. 명함이 한 장 나왔다. 명함 뒷편에 무엇이 쓰여져 있었다. 그 내용은 오씨와 같은 신도인 장보금, 부평 근영(부평에 사는 근영이란 의미)에게, 『30일 오후7시, 20분경에 회관에서 나를 만났다고 경찰에 말해달라는』는 요지였다. 당시 오휘웅의 신문을 맡았던 정용달(현재 인천에서 공장 경영) 박인용(현재 상업)은 오휘웅한테서 별다른 혐의점이 드러나지 않아 손을 떼려다가 이 명함을 발견, 의심을 굳히고 본격적인 신문으로 전환했다고 한다. 이 명함쪽지는 두이분과 오휘웅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바꿔놓은 셈이다(명함에 기재된 시간에 오휘웅은 회관에 실제로 있었으므로 내용 자체는 조작이 아니었다).
  
  형사들은 오후5시께 오휘웅을 인천경찰서 형사계로 데리고 가 문초하기 시작했다. 밤8시께 형사들은 범행 자백을 받아내다. 정, 박 두 형사가 기록한 1차 피의자 신문 조서에는 자백 내용이 이렇게 씌여져 있다.
  
  [나는 인천 황해중학교 2학년을 중퇴했고 군복무를 마친 뒤 삼신화학(주)울산현대조선(주)등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현직인 인천 남구 수도사업소 검침원으로 취직한 것은 6일 전이었다. 6남내의 장남인 나는 10년전부터 남무묘법연화경(일련정종)을 믿기 시작했고 지금은 신흥동 지역의 책임자이다. 지난해 4월 나는 입신(入神)한 두이분을 알게 되었다. 지난해 9월에는 송도 인명사로 산길을 같이 가다가 입맞춤과 애무를 했다. 지난달 15일 저녁에는 여관에서 두이분과 처음으로 동침했다.
  
  5일 뒤 두이분은 나의 아기를 가진 것 같다면서, 남편에 대한 불평을 털어놓은 뒤 이제부터는 나를 『여보』라고 부르겠다고 했다. 두이분이 같이 살자고 하기에 나는 당신에게 딸린 식구가 있으니 이혼하면 같이 살아 주겠다고 답했다. 지난 12월30일 오후 7시20분께 나는 숭의동에 있는 교회회관으로 갔다가 밤8시5분께엔 수인역에 있는 칠공주 사진관으로 갔다. 오후 8시17분께 신흥동 서회상회에서 두이분을 만나 군고구마 산 것을 주고 가려고 하니 두이분은 『조금 있다가 한 번 더 만났으면……』이라고 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8시30분경 두이분의 집으로 갔다. 두이분은 『오늘은 모든게 끝나는 날이다』고 했다. 나는 이 여자가 도망가려는가 생각했는데 두이분은 식구들을 처치했으면 하는 뜻으로 눈짓을 하며 노끈을 집어서 나에게 주었다. 나는 노끈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세 사람은 모두 자고 있었다. 여자 아이 정연경의 목을 먼저 노끈으로 한바퀴 감아서 약 2분쯤 졸랐다. 아무반항도 없이 숨을 멈추기에 금고통 위에 놓인 부엌칼로 끈을 잘랐다. 같은 방법으로 남자아이 연홍을 죽였다.
  
  두이분의 남편 정시화를 부엌칼로 찔러 죽이려고 생각했다가 소리칠까 봐 다른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평소 이집에 놀러 왔을 때 장롱에 마후라가 있던 것을 보아 두었었다. 그 마후라는 미끄러질 것 같아서 장롱속에서 넥타이를 꺼내 마후라는 목에 걸치고 넥타이로 끈매듯이 한번 감아서 양쪽으로 당기니까 반항을 하며 옆으로 움직였다. 이때 정씨의 목을 타고 오른손으로 목을 누르면서 3∼4분 있으니 혼수상태에 빠졌다. 나는 부엌칼로 그의 목 오른쪽을 한번 내려그었다. 움직이고 반항하기에 계속 목을 눌러 죽이고 바깥으로 나왔다. 피묻은 마후라는 풀어 쌀창고 뒤로 던졌다. 내가 범행할 동안 두이분은 쌀가게(방과 붙어 있음)에서 망을 보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도중 밤9시쯤 신흥동 시장 입구 신흥지물 앞길에서 두이분을 만났다. 나는 파출소에 가서 강도사건이 났다고 신고하라고 말한 뒤 집으로 돌아갔다]
  
   오휘웅 검찰에선 범행 부인
  
  오휘웅은 전과가 없는 총각이었다. 그를 문초했던 당시의 형사 정용달, 박인용은 『키가 작고 통통한 몸집을 가진 오휘웅은 덤덤한 성격의 소유자 같았다. 체력은 좋고 저력이 강함 직한 인상이었으며 고집이 센 것 같았다』고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독한 여자의 인상을 하고 있었다는 두이분은 호위웅의 자백한 다음날 범행을 자백했었다. 두이분은 계속 범행을 부인했었다. 형사들은 두 사람을 대면 시켰다. 박인용에 따르면 두이분은 오휘웅이 그녀의 면접에서 자백하자 그 자리에서 실신하더란 것이다.
  
  경찰은 두 용의자를 떼어 놓고 신문하면서 한쪽이 먼저 자백했다고 부추켜 상호간이 증오심을 유발시킴으로써 진짜 자백을 받아내는 수법을 썼다고 한다. 두 사람의 자백에 따라 인천 경찰서는 오휘웅을 살인, 두이분은 살인교사혐의로 구속했다. 2, 3차 피의자 신문에서도 두 사람은 범행을 자백했다. 1월9일에 있었던 대질 신문에서 두이분은 새로운 사실을 털어놓았다.
  
  『오휘웅이 남편을 죽이기 전에는 나는 미리 신경안정제 아티반 10알을 사이다 한 병에 다 풀어 남편과 아이들에게 먹여 잠들게 해 놓았었다(필자주 : 그 직전에 그녀의 남편은 이미 진로 소주 한 병을 마셨음). 이 아티반은 12월20일(범행 10일 전)에 사둔 것이었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먹이게 된 것은 범행 전날 오휘웅이 말하기를 남편과 아이들에게 먹여 놓으면 자신이 처치하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대질 직전에 오휘웅은 아티반 먹인 사실을 몰랐다고 진술했다가 두이분이 끌려 와 오씨를 가리키며『실은 저 분이 시켜서…』라면서 상세한 설명을 하자 『(두이분이 말한 내용이)전부 사실이올시다』고 순순히 시인한 것으로 조서에는 기록되어 있다. 1월10일 두조서에는 기록되어 있다. 1월10일 두 사람은 검찰로 넘어갔다.
  
  여기서 오휘웅의 태도가 돌변했다. 인천지청 안길수 검사는 1월10일 오씨을 1차 신문했다. 오씨는 안 검사가 잃어준 경찰의 피의자 신문 조서 내용을 몽땅 부정했다. 『경찰에서는 엄문에 못이겨서 허위로 자백한 것입니다』고 그는 말했다. 1월24일의 검찰 2차 신문에서도 오휘웅은 범행 자백 내용 일체를 부인했다. 오씨는 두이분과의 불륜의 관계와 사건 당일 두차례 두이분을 집으로 찾아간 사실은 인정했다.
  
  사건 전날 두이분에게 『남편한테 아티반을 먹여 두라』고 한 사실도 인정했으나 이렇게 해명했다. 『두이분은 요즈음 집에 늦게 들어온다고 남편이 화를 낸다고 하기에 [남편에게 아티반을 먹여서 일찍 잠들게 해두면 모를 것 아니냐]고 했을 뿐이다』오휘웅은 사건 당일 자신의 행적을 자술서 형식으로 써냈는데, 이 행적은 이사건의 판단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자료이므로 여기에 일단 소개한다. (시간은 전부 오후).
  
  6시 20분 가량 : 수도사업소 망년 파티에 참석.
  7시20분 : 숭의동 회관에 예배 참석차 도착.
  8시 5분 : 회관에서 나옴.
  8시10분경 : 두이분 집에 도착. 두이분은 부엌일을 하고 있다가 커피잔으로 인삼주를 따라 주어 받아 마시고 떠남.
  8시20분경 : 칠공주 사진관에 도착. 사진을 찾고 나와 군고구마 세 개(50원어치)를 사서 다시 두이분 집으로 감. 반쪽을 오휘웅에게 권했으나 거절. 짧은 잡담하다가 나옴.
  8시30분경 : 집에 도착. 교인들끼리의 좌담회가 열리고 있었음. 방안으로 들어가면서 괘종시계를 보았으므로 시간은 정확히 기억. 좌담회에 지각은 했으나 간부로서 교리문답을 주재했음.
  9시15분경 : 좌담회 끝남. 저녁 먹고 일찍 잠듬.
  
  두이분의 진술에서도 8시20분경까지의 오휘웅 행적에 대해서는 별 다툼이 없다. 문제는 8시20분 뒤다. 오휘웅은 두 번째로 두이분을 만나고는 헤어져 바로 집으로 왔다고 주장했는데 반해 두이분은 오휘웅이 세 사람을 죽이고 집으로 갔다고 진술했다. 오휘웅의 이날 저녁 시간표에 10분 남짓한 살인의 시간대가 들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 이 시간대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그의 유죄 여부를 가리는 중요한 쟁점으로 등장한 것이었다.
  
   낮엔 부인, 저녁엔 시인
  
  75년 1월24일 두 번째로 범행을 부인했던 오휘웅은 이날 늦게 갑자기 태도를 바꾼다. 이날자로 쓰여진 자술서에서 오휘웅은 『양심의 가책을 받아』다시 범행을 시인하기로 했다고 말하고 있다. 다음날 안길수 검사는 3회피의자 신문을 했다. 여기서 오휘웅은 『이제 와서 범행을 자백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요?』라고 검사가 묻자 이렇게 답했다. 『처벌에 대한 공포감과, 부모나 동료 신자들에게 죽는 날까지 본인이 그런 끔찍한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숨기고 싶었기 때문에 부인을 했는데 양심의 괴로움과 죄책감을 더 참을 수 없어 자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왜 갑자기 양심의 가책이 발동했는가, 왜 같은 날의 낮에는 부인을 하고 밤에는 자백을 했는가, 정말 오휘웅은 자발적으로 자백을 다시 하게 된 것인가? 검사 앞에서의 자백은 경찰에서의 자백보다 증거력이 휠씬 강해 오휘웅을 더 확실하게 교수대로 밀어붙일 터인데 그는 정말로 [양심의 가책]으로 그 죽음의 길을 선택했을까? 뒤에 가서 검토하겠지만, 이 의문에의 해답은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 과연 무엇이었던가를 판단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
  
  어쨋든 오휘웅은 1월27일의 제 4회 검사 신문에서도 3회 신문때의 범행자백 내용을 되풀이하여 진술했다. 이로써 수사는 사실상 끝난 셈이었다. 남은 것은 재판뿐이었다. 재판정에 제출할 검사측 증거 자료는 충분한 것 같았다. 경찰과 검찰에서의 오휘웅의 자백, 이를 뒷받치는 공범 두이분의 자백, 범행에 쓰였다는 식칼·노끈·넥타이 등등……. 그러나 검찰측 자료를 자세히 살펴보면 확고한 것 같은 논리 구조 안에는 의외로 중요한 헛점들이 숱하게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결정적인 물증이 없었다.
  
  오휘웅이 범행 당일 만졌다는 물건은 유리잔, 장롱, 식칼 등등 많았지만 그의 지문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장갑을 끼고 저질렀기 때문에 지문이 안 나왔다면 장갑이라도 나와야 할텐데 그것도 확보되지 않았다. 사건 직후 두이분의 손에는 피가 묻어 있었음이 여러 증인에 의해 확인되었지만, 오휘웅의 옷이나 몸에서는 핏자국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범행을 입증하는 가장 유력한 증거는 오휘웅의 자백인데, 그 내용을 분석하면 핵심 부문이 너무나 자주 번복, 수정되고 있음이 드러난다.
  
   살해 용구에 대한 오휘웅의 진술
  
  녹음(경찰 수사과장과 오휘웅의 대담·1회피의자 신문 조서 직전에 녹음됨)에선 노끈은 방에, 마후라는 방안 재봉틀 위에 있었다고 했다가 경찰 1회피의자 진술 때는 『두이분이 노끈을 집어 주었다』『마후라는 장롱에서 꺼냈다』고 했다. 검찰 3회 신문 때에는 『노끈이 방안의 점포쪽 선반 위에 있었다』로 바뀐다. 녹음에서는 오휘웅이 정시화의 목을 톱날(줄칼)로 그었다고 했다가 경찰1회 신문에서는 부엌칼로 했다고 하곤, 검찰 3회 신문에서는 『남자아이인지 여자아이인지는 몰라도 아이의 목을 노끈으로 힘껏 졸랐는데 그 뒤는 당황하여 모르겠다고』고 진술했다.
  
   살해 순서의 변동
  
  오휘웅은 경찰1회 신문에서 여자아이를 먼저 죽였다고 했다가 자술서에선 남자아이를 먼저 졸랐다고 했으며 검찰 3회 신문에선 모르겠다고 하다가 검찰 4회 신문에선 남자아이를 먼저 죽였다고 진술했다.
  
   살해 동기의 혼란
  
  오휘웅은 녹음에선『밤9시40분에 술을 마시고 두이분의 집으로 갔더니, 오늘은 최선의 날이요, 처리는 다 할테니 들어가시오, 라고 권유해서 망설이다가 범행했다』고 말했다. 경찰 1회 신문에선『8시30분경 두이분이 식구들을 처치했으면 하는 눈짓을 하여 범행을 했다』고 진술하다가 자술서에선 두이분에게 두 번 『남편과 자식을 처치하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경찰 2회 신문 조서에선 범행 직전에 집에 갔다가 왔다는 전회의 진술은 거짓말이었다고 하고 두이분이 오늘이 마지막 기회라고 독촉해서 즉시 이에 응했다고 밝혔다가 3회 신문에선 두이분이 자신(오휘웅)의 팔을 잡고 끌어들여서 『술김에 다 해치워버리고 그녀와 같이 살겠다』는 마음이 들어 범행했다고 또 수정했다.
  
  살인이란 대전제를 자백한 사람은 범행 동기 수범 등 부차적인 사항들을 숨김없이 털어놓는 게 원칙인데 이 사건 자백의 경우엔 가장 핵심적인 사항들이 자백 때마다 오락가락하고 있다. 이런 자백을 과연 임의성과 신빙성이 있다고 볼 것인지? 유명한 부산 근하군 살해 사건 항소심 공판에서 대구고법은 『살인이란 큰 죄를 자백한 사람이 범행 수법 등 지엽적인 사항을 계속해서 엉터리로 진술하는 것을 피고인이 구체적 범행 사항을 모르는 것으로 봐야 하며 진술이 조작되어가는 과정으로 판단된다』는 요지로 피고인들에게 무죄선고를 내렸었다.
  
출처 : 월조
[ 2003-07-04, 16:5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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